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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걸음 / 사 52:7-12, 고전 6:1-8
어제가 설이다. 새해 복많이 받기를 바란다. 옆에 계신 성도들과 함께 이렇게 말하라. 손을 꼭 잡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웃으면서 다시 한번 해 보자. 설날이 무슨 뜻인가? 새해 첫날을 설날이라고 한다. 설은 근신한다는 의미도 있는데, 해가 시작되는 첫날은 모든 말과 행동을 삼가고, 지나간 해를 되돌아보며 새해를 맞는 마음의 자세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설날은 낯설다는 뜻에서 설날이라고 했다 한다. 어릴 때 설은 세뱃돈 받는 재미로 지냈다. 평소에는 찾지도 않던 먼 일가친척의 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아롬이와 효리도 세뱃돈 받는 재미로 설날을 기다려 왔고, 또 그런 재미로 이번 설도 지냈다. 제가 어릴 때는 세뱃돈으로 제기도 사고, 딱지도 사고, 구슬도 사고, 폭음탄 등 화약류를 사서 놀기도 했다. 지금은 어린이들의 노는 모습이 많이 달라져가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 뜻을 바르게 알려면, 그 구절을 읽어본 후 앞뒤 구절도 읽어보아야 한다. 오늘 본문 말씀도 11-12절만 볼 것이 아니라, 앞뒤의 내용을 읽어보아야 의미가 통한다. 북이스라엘, 남유다가 멸망한 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왔다. 애굽에서나 바벨론에서나 노예로 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조국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돌아갈 꿈도 없이 살았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파된다. 그들을 이끌어 줄 구세주가 오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 다음 구절들이 말해 준다. 그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놀란다. 그는 십자가의 고통 속에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부활하여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그래서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억압된 사람들에게 자유가 선포된다. 그것도 전에 애굽에서 나올 때처럼 도망하고 오래 고생하면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는 모세가 이끌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구세주가 이끈다. 그와 함께 동행하는 이는 누구나 구원을 얻고, 누구나 아름다운 삶을 살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구세주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도 변할 것이라고 말한다. 노예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활한 영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과하기 위해 이 세상을 사는 것이다. 이 소식이 전파되면서 이스라엘의 할 일이 선포된다.
1.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은 노예상태로 있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제대로 가질 수가 없었다. 바벨론의 신은 이스라엘의 신을 이긴 것 같이 보였다. 이스라엘은 아무런 힘을 발할 수 없었다. 그들이 행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것처럼 바벨론은 우상을 섬겼다. 큰 신상을 만들어 거기에 절하라는 법도 만들어 지키게 했다. 다른 종교들처럼 부적을 가지고 다녔고 주문을 외웠다. 하나님은 명령하신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곳을 떠나라. 새로운 삶을 살도록 자유를 선포한다. 이제 여기 바벨론의 우상에 매이지 말고 깨끗하게 믿음으로 일어나라.
이 내용은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된다. 신앙을 미신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종교들처럼 나이나 선행과 공로가 복을 주리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래 기도한 것, 많은 봉사와 노력을 바친 것, 이것들을 내세우면 안된다. 하나님은 이런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 구원하지 않으신다. 또한 그렇게 고생한 대가로 복을 주시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선행과 공로로 하나님의 것을 사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냥 자신의 모든 축복을 선물로 주기 원하신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했으니 ‘하나님 나에게 이렇게 해주십시오’ 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것은 부정한 마음이다. 부적을 품고 열심히 기도하고 우상에게 절하므로 무엇을 얻으려는 것과 같다. 이런 부정한 것을 버려라. 우리 앞에는 전혀 새로운 길이 열렸다.
어제가 설인데 정초가 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해 신수를 본다고 토종비결 같은 것을 본다. 꼭 철학관이나 점쟁이를 찾지 않더라도, 잡지나 신문, 그리고 책을 보면서 ‘야, 올해 내 신수가 잘 나왔다’ 하면서 좋아하기도 하고, 잘못 나왔다면서 울상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렇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한다. 총회에서 나온 2000년도 ‘말씀과 명상’ 어제 것을 읽어보면 이런 글이 기록되었다. ‘명절에 어른들이 모여 화투 치는 것을 보고 자란 아니는 어른이 되어서도 명절을 그렇게 보내기 쉽다. 술과 화투, 갈등으로 얼룩진 낭비적이고 비교육적인 명절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노인이 고스톱을 치면서 놀면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무리 건강에 좋다 해도,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하면 안된다. 재미로 해도 자녀들에게 교육적이어야 한다. 뭔가 보여줄 것이 있어야 한다.
2. 옛 삶으로부터 나오라.
옛 삶으로부터 나오라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명령하신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어떻게 나오며 어떻게 정결하게 할 것인가? 그들은 바벨론에서 오래 머물렀다. 70년은 긴 세월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끌려온 자들은 아주 늙어 힘을 쓰지 못하거나 땅에 묻힌지 오래다. 바벨론에서 사는 이스라엘 백성 중 대부분은 거기서 태어났다. 바벨론의 풍습 가운데서 자라나서 그것이 몸에 배인 상태다. 바벨론의 풍습이 좋은 것으로 알고 살았다. 그러나 바벨론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구세주의 가르침으로 돌아와야 한다.
오늘의 우리도 그렇다. 세상의 사고로 마음이 채워졌다. 그것 밖에는 아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멀어보이고 경험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롬 12: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어떻게 마음을 새롭게 할 것인가? 이미 가득 채워진 육신의 사고를 무엇으로 몰아낼 것인가? 어둠을 몰아내는 빛은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그의 전체를 믿으라. 그를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라. 그리고는 그가 나를 위해서 하신 일들을 명상하라. 그래서 그것을 나의 의식구조로 삼으라. 그러면 나의 마음이 새롭게 된다. 변화를 받는다. 그리고 옛 삶으로부터 벗어난다.
누가복음의 탕자 이야기이다. 돼지를 치다가 집으로 돌아온 탕자, 목욕을 시키고 깨끗한 옷을 아버지가 입혀주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돼지 치면서 입던 옷이 고생할 때 입었던 옷이라고, 고생한 것을 기념한다고, 버리기가 아깝다고, 이 옷을 입고 있어야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새옷에 껴입는다면 어떻게 될까? 새 옷만 버린다. 아까워도 버릴 것은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새 삶을 살기로 했으면 옛 삶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엡 4:22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말씀한다. 바울이 말한 옛 사람을 벗어버린다는 것은 나의 나쁜 습관, 악한 행실, 계속 지니고 있어선 안 될 지난 날의 버릇을 완전히 옷을 벗는 것처럼 벗어버리라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입던 옷가지 등을 불에 태우는데, 우리도 이렇게 태울 것은 태워버려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그것을 찾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방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벗어버리지 않고 보관해 두는 것들이 많다. 보물단지처럼 소중하게 보관했다가 기회만 되면 다시 꺼내 쓰는 경우가 많다. 여러분들이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월 마지막 주 구역예배 교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오랫동안 술집을 운영하던 건물에 교회가 싼값에 수리를 끝내고 교회로 개조했다. 첫 예배를 드리게 된 날, 술집 주인이 선물로 주고 간 앵무새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장로교 예에배 전통에 따라서) 입장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앵무새가 목사님이 입장하자 ‘새 주인, 새 주인’이라고 말하더랍니다. 이어서 성가대가 입장하자 ‘새로운 팀, 새로운 팀’이라고 말했다. 회중석에 앉아있는 교인들을 바라보던 앵무새가 ‘그 손님, 그 손님, 똑같은 손님 똑같은 손님’이라도 말하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옛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 삶을 살아야겠다.
3. 여호와께서 함께 행하신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개인적으로 느끼지 못했다. 개개인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으셨다. 특별히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에게나 가능했다. 개개인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에게 임해도 은사적으로 부분적으로나 임했다. 그러다가 그 일이 끝나면 떠나셨다. 인격적으로 전체가 임해서 영원히 머물지 않았다.
이제 하나님의 영이 개개인에게 임하신다. 그래서 개개인의 하나님으로 그 특정한 개인만을 책임지고 돌보신다. 마 28: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것이 성령강림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 그리고 성령으로 우리 속에서 일하신다. 우리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긴다면 주님은 우리를 이용해서 의의 도구가 되게 하신다. 기록된 말씀을 늘 상고하라. 그러면 성령은 그 말씀에 대해서 책임을 지신다. 그 말씀을 살아있게 해서 우리 속에서 싹터 나오게 한다. 특별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신다. 또한 예수처럼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있게도 하신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어떤 존재로 변했는지 성령이 나를 어떻게 돕는지 늘 연구해야 한다. 요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보면,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4. 애굽에서처럼 도망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신다면, 우리는 세상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다시 세상과 내 운명의 지배자로, 왕으로, 제사장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삶은 전과 같지 않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두려움 속에 탈출했다.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함께하심을 경험하게 했다. 그래도 애굽의 바로와 그의 군대가 두려워 급히 떠났다. 그들은 인도자 모세가 늘 필요했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면 도망을 갔고, 물이 없어서 목이 마르면 모게에게 원망을 했다. 무엇 하나 자기 힘으로 해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구세주를 믿는 사람들은 달라진다. 자기 속에 인도자가 늘 계시기 때문이다. 찬 391장 후렴을 같이 불러봅시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 하나님이 능력의 팔로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피곤하지 않게, 위험하지 않게 숨겨주시고 보호해 주신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도움을 늘 바라라. 늘 주님을 인식하고 주님의 인도하는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럼 머리로만 받아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그러면 내 영혼이 성령의 도움으로 그 의미를 깨닫고 마음으로부터 뜨겁게 받는다. 그러면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임하게 된다. 때로는 마음으로부터 성령의 음성이 들리기도 한다. 물론 하나니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 음성을 받아야 한다. 어쨌든 성령의 인도를 늘 느끼고 받는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특별한 것이 된다. 애굽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처럼 두려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얼마나 든든한 말씀인가? 어린이들을 보세요. 친구와 놀 때 부모가 옆에 계시면, 힘이 센 친구가 때리면 맞고 울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고 겁없이 달라든다. 왜 그런가? 부모님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신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신다. 이제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는 두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용담댐으로 인해 고향 땅에 살 날도 몇 달 남지 않았다. 여러분들이 주평으로 가든, 진안으로 가든, 전주로 가든, 봉동으로 가든, 서울로 가든, 다 대한민국 땅이다. 어느 곳으로 이주하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다 같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따라해 보기 바란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아멘. 이 말씀을 확실히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우리의 걸음을 주께서 안전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믿고 나가기 바랍니다.
< 축 도 >
지금은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을 완성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기의 백성을 사랑하시되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교통하심이, 은혜받고 믿음으로 살기를 다짐하며 세상을 향해 나가는 사랑하는 성도들과 가정과 일터와 우리가 섬기는 교회와 이 민족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실지어다. 아멘. (20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