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道冲而用之.
도道는 (태극太極으로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텅 빈 기氣인데,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을 텅 비우는 바로써) 그것을 일삼아야 한다.
冲, 冲和也. 言太極, 寄于陰陽, 之冲氣. 故人之, 用道, 亦當以冲和也.
“충冲”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을) 텅 비우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모양과 모습을 뜻하는 말이다. 이른바, (“도道”인) 태극太極은 (작용에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오행五行을 낳기 이전의) 음陰·양陽을 의지하는 바로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텅 빈 기氣이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도道”를 “일삼는 데” 있어서, 이른바 마땅히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을) 텅 비우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로써 해야 하는 것이다.
或不盈淵乎, 似萬物之宗.
(도道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으로) 넘치지 않는 바로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깊은 연못인 듯하다! 그런 것 같다! 태극太極으로서.
曰或, 曰似, 皆以氣象言之也. 淵, 深也. 萬物之宗, 太極, 是也. 凡此, 皆冲和, 之積于中, 見于外也.
(이 문장에서) 일컬어진 “혹(或; ~듯하다)”, 일컬어진 “사(似; ~ 같다)”는 모두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기氣의 모양과 모습, 그것을 (또렷하고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한 말들이다. “연淵”은 (연못처럼) 깊다는 뜻이다. “만물지종萬物之宗”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텅 빈 기氣인) 태극太極, 그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른바, (이 문장에서 일컬어진 “혹或”, 사似, 연淵, 만물지종萬物之宗”) 이것들은 모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텅 비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과 더불어) 어우러진 바로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가운데 쌓인 바(이자,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모양과 모습의 기氣인 태극太極) 그것을 (또렷하고 뚜렷하게) 밖으로 드러내는 (말들인) 것이다.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乎似或存.
(도道는) 그 (일부러 일삼아) 날카로운 바를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무디게 하고, 그 (일부러 일삼아) 얽힌 바를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풀어버리며,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빛나는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고,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티끌된 바와 (더불어) 같이 하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시끄러운 바가 없이,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조용하다! 연못 깊은 곳에 자리하는 물처럼, 물인 듯.
摧挫鋒銳, 則無激觸. 解釋紛結, 則無閼塞. 混和光芒, 則無猜忮. 合同塵垢, 則無孤高.
(“도道”는 “그” 일부러 일삼아) 뾰족한 바를 뭉그러지게 하고, (“그” 일부러 일삼아) “날카로운 바”를 “무뎌지게 하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찔리거나 베이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그” 일부러 일삼아) “얽힌 바”를 “풀고”, (“그” 일부러 일삼아) 설킨 바를 헤치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끊어지거나 잘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그” 저절로 그러하게) “빛나는 바”와 (더불어) 뒤섞이고, (“그” 저절로 그러하게 보잘것없는) 터럭과 (더불어) “어우러지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다가오거나 떠나가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그” 저절로 그러하게) “티끌된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고, (“그” 저절로 그러하게 더러운) 때와 (더불어) “같이 하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아래로 끌려 내려지거나 위로 추켜 세워지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如是. 而但斡轉運用之. 意, 行于其中. 則正如造化闔闢之. 機, 湛湛. 然存, 乎自然之中.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도道”의 모양과 모습) 그것과 (더불어) 같이 해야 한다. 따라서 이른바 (그 마음이) 그것을 돌리게 되고, 굴리게 되며, 움직이게 되고, 일삼게 된다. (따라서 이른바 그) 의지가 “그” (마음의) 한 가운데에서 일삼아지게 된다. 따라서 이른바 (그 의지가 “도道”의 모양과 모습) 그것을 만들게 되고, (그것과 더불어) 어우러지게 되며,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는 행위有爲로 나아가는 문을) 닫게 되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행위無爲로 나아가는 문을) 열게 된다. (따라서 이른바 그 행위의) 모양과 모습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조용하고”, “조용하게 된다.” 왜냐하면, (따라서 이른바 그 행위의 모양과 모습이)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 道·太極)의 한 가운데에서 자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凡此, 皆冲和, 之應于事, 施于世也. 朱子曰, 老子, 看得天下事變, 熟了. 又曰, 惟靜. 故能知變.
요컨대, (이 문장이 일컬은 “도道”의 모양과 모습) 그것들은 모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텅 빈 모양과 모습(冲; 道·無爲·性·心)”이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과 더불어) 어우러진 모양과 모습(和; 太極·自然·命·意)이며,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을 “텅 비운 채”, 천하의) 사안을 말미암는 모양과 모습이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과 더불어 어우러진 채) 천하(의 변화)를 펼치는 모양과 모습이다. (따라서) 주자朱子는 일컬었다. “노자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천하의 사안을 살피고, (천하의) 변화를 얻는 데 능했다.” 또한, 일컬었다. “노자는 오로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조용했는데, 따라서 (노자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천하의 사안을 일삼고, 천하의) 변화를 살피는 데 능할 수 있었다.”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나는 (도道가) 누구를 말미암아 생겨났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겠다. (도道가 말미암아 생겨난 바는) 상제上帝보다 앞서는 바인 듯하다.
誰之子, 謂此道, 何從出也. 帝, 天之主宰也. 盖道卽太極之, 具於吾心者, 而其所從出, 則無極, 是也. 太極, 沖虛, 淵深. 一, 似無極之. 若有, 若無. 故曰, 象帝之先也.
“누구의 아들인가?”라는 말은 이른바 “이 도道가 누구를 말미암아 생겨났는가?”라는 뜻이다. “상제上帝”는 (만물의 시작인 땅과) 하늘을 주재하는 바이다. 이른바, “도道” 곧 태극太極은 “내” 마음에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갖추어지는 바(具; 性·命·自然)이며, 그것이 말미암아 생겨나는 바는 이른바 무극(無極; 일부러 일삼는 바爲를 가지는 바가 없음無이 그 끝점에 다다른 바極·自然), 그것이다. (요컨대) 태극(太極; 性·命·無爲·自然·道)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을) 텅 비우고 텅 비우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연못”처럼 깊다. (이른바, 태극太極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한결같은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음이 (그) 끝점에 다다른 바(無極; 自然)인 “듯하다.” (따라서 그 또렷하고 뚜렷한 모양과 모습이 그 자리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듯하기도 하고, (그 자리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듯하기도 하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은 것이다. “(도道가 말미암아 생겨난 바는) 상제上帝보다 앞서는 바인 듯하다.”
今按象, 之爲言類也. 以道爲, 象帝之先者. 微有與道爲. 二之病. 此又, 老道與儒道, 不同處.
여기서, (노자가) 일컬은 “상象”, 이것은 (그 모양과 모습이 저절로 그러하게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바를) 일부러 일삼아 (또렷하고 뚜렷하게) 일컫는 류類(의 하나)이다. 따라서 “도道”가 (말미암아) 일삼아지는 바(爲; 誰)로서, (‘상자연象自然’이 아니라) “상제지선(象帝之先; 誰)”이 일삼아진 것이다. (이로써, 세상에서 그 모양과 모습이 저절로 그러하게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 象帝之先·誰)와 “도(道; 子)”가 (서로 따로) 일삼아지게 되었다. (이른바, 세상에서 그 말미암아 생겨나게 한 “누구誰”로서의 ‘자연自然’과 그 말미암아 생겨난 “아들子”로서의 “도道”) 두 가지가 (서로 따로) 자리하는 폐단이 일삼아지게 되었다. 이로써, (세상에서) 노자의 “도(道; 誰·自然·無爲)”와 유학儒學의 도(道; 子·無極·無爲)가 (그) 머무는 바를 (서로) 같이 하지 못하게 되었다.
儒道則曰, 先天地之無極, 卽後天地之太極, 後天地之太極, 卽先天地之無極. 始終一致, 微顯一貫. 夫何, 象類, 之可言者乎!
(그러나) 유학儒學의 “도道”는 이른바 일컬어진다. “하늘과 땅보다 앞서는 무극(無極; 無爲)이자, 하늘과 땅보다 뒤서는 태극(太極; 性·命·自然)이며, 하늘과 땅보다 뒤서는 태극太極이자, 하늘과 땅보다 앞서는 무극無極이다.” (따라서 노자의 “도道·自然”와 유학儒學의 “도道·無爲”는 그) 시작과 끝이 하나에 이르며, (그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바와 (그 또렷하고) 뚜렷한 바가 하나로 꿰인다. 따라서 이른바 (이 문장에서) “상象”이라는 (그 모양과 모습이 저절로 그러하게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바自然를 일부러 일삼아 또렷하고 뚜렷하게 일컫는) 류類(의 하나), 그것이 (“도道”가 말미암아 생겨나는 바自然를 드러내는 수단으로서) 일컬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右第四章.
여기까지가 제4장에 대한 풀이이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