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하에서 자원을 캐내는 광산 갱도의 막다른 곳, 채굴의 실제 현장인 막장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나는 지상에서 살아간다. 초원과 어깨 맞댄 도시, 돌가루에 철이 버무려진 빌딩 속에서 생활하며, 햇빛 물든 바람을 쐬며 산책하고, 쇳덩이로 된 차를 타고 다니며 철기시대의 끝자락에 매달린 역사시대를 살아간다. 내가 편의를 누리며 살아가는 이 물질문명의 근본 물질은 땅속에서 캐내진 것들이고, 그걸 캐내는 사람들이 광부들이다. 그들은 먹고 살려고, 돈 벌려고, 가족 부양하려고 자꾸만 땅속 더 깊은 곳으로 더 아래로 굴을 파고 들어가는 남자들이다. 그들 중 일부는 서독으로 건너가 구라파의 땅속을 파기도 했다. 그들이 그렇게 파낸 물질들 중 하나가 석탄이고 석탄이 산업혁명의 시발점이었으며 원동력이었다. 그 혁명의 결과가 현대 문명이다. 탄광의 광부들이 햇빛과 바람, 초원과 도시로부터 수백 미터 땅 밑에서 곡괭이와 삽으로 파낸 검은 흙덩이들이 흰쌀밥이 되고 자식들 등록금이 되고 따뜻한 아랫목이 되고 전깃불이 되고 산업이 되었다. 그 검은 흙 중 일부가 구멍 열아홉 개가 고르게 뚫린 검은 원통형 연탄이 되었다. 대략 1980년대 말까지 우리의 각 가정은 그 십구공탄으로 살림을 살았다. 특히 겨울에는 그게 생필품이었다.
연중 기온이 내려가 아궁이에 불을 넣어야 하는 시기가 오면 집집마다 연탄을 떼었다(‘탄을 띠었다’). 동네마다 있었던 연탄가게의 주인이 리어카 가득 연탄을 싣고 와서 부엌 한쪽을 천장까지 닿도록 차곡차곡 쌓아 주었다. 학교에 갔다 와서 부엌 한구석에 그렇게 연탄이 가득한 걸 보면 부자가 된 것처럼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도시 사람들은 모두 오로지 그 열기에 의존해서 겨울에 실내 생활을 했고, 밥을 짓고 국이나 찌개를 끓여 먹고 살았다. 한 번에 탄을 몇 장 뗄 수 있는가가 각 가정의 살림살이의 수준이었다. 겨울이 아직 다 지나가지 않았는데 연탄이 점점 줄어들면 불안해졌다. 여러 줄이던 연탄이 점점 줄어 달랑 한 줄 남게 되면 마음속에 걱정이 그만큼 커졌었다. 연탄 뗄 돈이 없으면 낱장으로 사다가 불을 때기도 했다. 연탄아궁이의 공기구멍 조절은 가정경제의 노하우였다. 구멍을 넉넉히 열어 놓으면 방은 따뜻했지만 하루에 연탄을 두세 장씩 때야 하니 아궁이가 돈 먹는 하마였다. 불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작은 구멍을 터놓아 하루에 한 장으로 버티는 것이 살림살이 비법이었다. 그 구멍의 크기를 어떻게 조절하는가가 주부가 실행하는 미시경제의 예술이었다.
그래서 연탄에는 사연이 많다. 아마 그래서 안도현 시인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물었나 보다. 사실 연탄이 타고 나면 옅은 황톳빛이 감도는 허연 재가 남는다. 연탄재는 연탄에 비해 크기는 그대로인데 훨씬 가볍고 조직이 허술하다. 불과 열이 다 소진되고 남은 재는 그렇게 골다공증 걸린 뼈처럼 부실해진다. 어디 연탄만 그렇겠는가? 열역학 제2법칙이 적용되는 건 다 그렇다. 태양도 별도 사람도 사랑도. 아침에 연탄재 실어가는 리어카나 트럭이 오는 날—요일이 정해져 있었음—은 골목에 단거리 경주가 벌어졌었다. 지금은 환경미화원이라는 아름다운 명칭을 가진 분들—그때는 청소부 아저씨들—이 조그만 종을 손에 쥐고 세차게 흔들어 치면서 골목을 지나가면 각 집안에 비상이 걸리고 집안의 대표주자들이 출동한다. 연탄재 담긴 양철통이나 비료부대를 들고서 한 발짝이라도 먼저 달려가서 리어카나 트럭에 탄재를 던져 넣어야 한다. 늦으면 이미 가득 찬 리어카나 트럭이 떠나가 버린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한편 그 검은 흙덩어리에는 늘 무시무시한 죽음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무색무취의 연탄가스가 방바닥 틈새나 문틈으로 스며들어오는 밤이면 죽거나 까무러친다. 운 좋게 살아나면 얼른 동치미 국물을 한 사발 들이켜야 한다. 그게 정말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연탄가스를 마신 날은 하루 종일 머리가 무겁고 아프고 정신이 흐렸다. 해마다 겨울이면 상당수의 무고한 목숨들이 그렇게 잃어졌다.
1980년대 후반부터 주거 환경이 급속히 아파트로 바뀌고 그 아파트들이 다투어 고급화되면서 연탄 사용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도시가스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연탄 시대가 급속하게 쇠락하게 되어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오늘날은 일부 달동네나 비닐하우스 또는 식객들을 위한 연탄 구이 식당에서 사용된다. 더불어서 연탄 공장들도 거의 다 사라졌다. 광주에는 남선연탄 공장과 대성연탄 공장이 양대 산맥이었다.
석탄은 비운의 물질이다.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몰린 것이다. 사실 진짜 주범은 석탄도 광부도 아닌 우리의 탐욕이었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2024년 9월 6일 태백 장성광업소가 88년 만에 문을 닫으면서 석탄을 캐던 막장은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종무식에 모인 마지막 광부들은 “광부의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훔쳤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광부가 되어/탄 캐고 동발지기 어언 수십 년/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나 죽어 이 광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탄광의 막장은 그렇게 폐업했지만, 신기하게도,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막장은 크게 번성하고 있다. 위키 백과를 찾아보니, ‘막장 드라마’는 복잡하게 꼬여있는 인물관계, 현실상으로는 말이 될 수 없는 상황 설정, 출생의 비밀, 고부관계, 불륜, 패륜 등 매우 자극적인 장면을 이용해서 줄거리를 전개해가는 드라마를 의미한단다. 줄여서 ‘막드’라고도 한단다. 흥미로운 건, 그런 막드들이 대부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여, 흔히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로 불린단다. 우수한 막드 몇 개만 예로 들면 『조강지처 클럽』, 『청담동 스캔들』, 『뻐꾸기 둥지』, 『모두다 김치』(여기서 그 유명한 김치 싸대기가 나옴), 『아내의 유혹』, 『왔다 장보리』 등이 떠오른다. 사실 요즘 텔레비전 주말드라마는 대부분, 심지어 일일드라마도, 막장의 핵심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우리 시청자를 볼 맛 나게 하고 살 맛 나게 한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삶의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땡큐, 막드.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팩트가 하나 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소설이나 드라마의 다수가 그 줄거리에 있어서 막장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줄거리나 소재로 치면 막장의 대표적인 소설가가 헨리 제임스이다. 지난번에 “아프니까 사람이다”라는 글에서 언급했던 『메이지가 알았던 것』이 막장 드라마의 전형이다. 주인공인 메이지는 10살 전후의 여자아이이고, 그 애의 엄마 아이다와 아빠 비일은 막 이혼했다. 그리고 서로를 벌레 대하듯 증오한다. 이혼 법정은 메이지의 양육권, 아니 양육 의무를 부부에게 각각 6개월씩 나누어지라고 판결한다. 메이지는 6개월마다 양쪽 부모 사이를 왔다갔다 해야 한다, 배드민턴의 셔틀콕처럼. 메이지의 엄마인 아이다는 프로 당구 선수인데 자기 딸을 마치 쓰리쿠션으로 쳐 내듯 이리저리 쳐낸다. 아빠인 비일은 멋진 수염을 가진 건달이다. 그리고 아이다나 비일이나 누가 더 유능한 ‘선수’인지 가릴 수 없을 만큼 바람둥이들이다. 이혼하자마자 비일은 메이지의 여가정교사였던 젊은 아가씨 오버모어와 재혼하고, 아이다는 이태리 여행 중에 만난 매력적인 연하남 클로드와 재혼한다. 그리고 메이지가 6개월마다 양쪽 집을 왔다갔다 해야 하는 게 연결고리가 되어 메이지의 새아빠인 클로드와 새엄마인 오버모어가 눈이 맞아, 그 두 사람 사이가 불륜관계가 된다. 그리고 더 심한 것은 새 아빠인 클로드가 이제 열 서너 살쯤 된 메이지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 둘이 파리로 도망치려는 아슬아슬한 상황에 이르지만 다행히 그건 실행되지 않는다. 이보다 막장일 순 없다. 그러나 그 소설은 매우 훌륭한 문학 작품이다. 소설에서는 줄거리나 소재, 심지어 주제도 그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그 가치는 주로 무얼 말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블라드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도 역시 극심한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최고 수준의 소설로 꼽히는 데는 거의 이견이 없다. 20세기에 생산된 모든 소설 중 단연 최고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도 그 내용뿐만 아니라 묘사도 선정적이다 못해 매우 ‘막장적’이다.
사실 우리의 마음속과 현실 생활, 그리고 드라마나 뉴스를 도덕적 저울로 재 본다면 그 세 가지 중 제일 부도덕한 게 마음속이고 그 다음이 현실 생활이고 그 다음이 드라마나 뉴스이다. 우리의 마음속 생각이 현실 세계로 나올 때 양심이나 윤리의식에 의해 한번 걸러지고, 다시 그것이 뉴스거리나 드라마가 되어 방영될 때 방송심의위원회에 의해서 다시 한번 걸러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마음속을 악의 근원으로만 여길 일은 아니다. 우리가 최고 미덕으로 치는 선도 역시 거기에서 나오니까. 석탄이든 드라마든 검다고 더러운 건 아니다. 광부든 미화원이든 막다른 곳에서 일한다고 천한 건 아니다. 막장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다.
첫댓글 ㅎ 와~~막장 얘기를 참 재미나게 푸셨네요.^^ 호미님 글 덕분에 조금 터 놓은 작은 구멍으로 연탄불을 조절했던 시절을 40년만에 떠올려 보게 됐어요.
ㅎㅎ막장과 검은 연탄의 접목글 넘나 재미있게 술술 읽었어요! 남선연탄 진짜 유명했죠! 날씨가 스산해지니 어렸을때 연탄불 추억이 새록새록 돋습니다.^^
호미님 글을 읽다가
겉이 검다고 속조차 검을소냐 하얀 백로야 검은 까마귀 비웃지 마라는 시조가 급 떠오르면서 겉희고 속검은 백로처럼 마음 속이 가장 어둡다를 인정하면서도 저의 마음은 하얀 도화지처럼 희다고 우겨보고 갑니다.^^*
메이지에 관련된 영화와 소설의 전개나 결말이 조금 달랐던 것 같은데,
영화는 조금 더 따뜻하고 소설은 조금 더 철학적이었던 것 같아요. 엉터리 분석가로부터.. .^^
영화는 원작 소설과 많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대중성, 상업성에 맞게 바꿨겠죠.
저는 지금도 간간이 추운 날, 연탄을 갈았는지 걱정하는 꿈을 꾼답니다. 엄마가 집을 비울 때, 큰딸로서 연탄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책임을 맡았거든요. ^^
저도 어릴 때 몇 번 연탄 가스에 기절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