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창세기 1장 6절부터 8절까지 있는 두 번째 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첫째 날에는 빛을 만드시고 그리고 그 빛을 통해서 빛과 어두움으로 나누셨습니다. 사실 빛과 어두움은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빛이 생기면 어두움은 자연스럽게 구분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을 날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 여기에서 낮과 밤은 아침과 저녁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까 통일이 되다. 하나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첫째 날 하나님이 하신 말씀 사역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날입니다.
창 1: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 가운데 궁창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창세기 1장1절과 2절 그리고 첫째 날까지 보면 하늘, 땅, 물 이렇게 등장합니다. 그런데 하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물과 땅밖에 없습니다. 이런 그림속에서 두 번째 날 말씀을 그려보면 물이 전체를 감싸고 있고, 땅은 물속 제일 밑부분에 위치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물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상태에서 물과 물로 나뉘고 아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라고 하니까 그때 땅이 드러나잖아요! 그러니까 아직까지 땅은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둘째 날 처음 상태는 물만 하나의 덩어리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그 위에 지금 하나님의 신이 있는 상태입니다. ( 그림을 그리고 )
이렇게 물만 있는 상태에서 물과 물로 나뉘기 위해 그 가운데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궁창으로 기준으로 해서 윗물이 있고 아랫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연창조론을 이야기하는 것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지금 우리 안에서 각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설명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물이 도대체 무엇이냐? 성경에서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자는 것입니다. 성경에 신약과 구약에 걸쳐서 이 물이라는 단어만 직접적으로 약 700번 나옵니다. 그러면 반대로 700번 사용되어있는 이 구절에서 물의 의미를 알아야 창세기 1장 6절에서 말하는 물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치 않으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윗물을 만들어 놓아서 비가 내린다. 노아의 홍수에서 내린 비가 바로 이 비다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자, 윗물과 아랫물로 나뉘고 있는 것이 궁창입니다. 그러면 궁창이라고 하는 것은 윗물과 아랫물의 경계입니다. 궁창 때문에 윗물은 아랫물로 아랫물은 윗물로 갈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궁창을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하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윗물과 아랫물이 섞이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궁창/하늘입니다. 히브리어로 궁창이라는 이 단어가 “라키아흐”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금속을 두들겨서 얇게 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인들에게 하늘은 하나님이 두들겨서 넖게 펼쳐놓고 양쪽에 높은 산을 세워두고 그 위에 올려놓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물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의미로 요약하자면 물은 생명의 근원으로 등장합니다. 만물이 이 물로부터 나오고, 물이 없으면 살수가 없는 어떤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어떤 세계가 돌아가는 원리도 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위의 세계와 아래세계, 위의 원리와 아래의 원리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말하쟎아요! 노는 물이 달라! 물이 좋아! 저 동네는 물이 안 좋아!! (서울 물이 좋아, 안산 물은 어때요? ) 그 돌아가는 원리에 따라서 그 세계가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깡패의 세계도 그들만의 원리가 있습니다. 의사들도, 그런데 이러한 윗물과 아랫물을 궁창이라는 것으로 나누어놓은 것입니다. 그 둘의 세계는 궁창 때문에 서로 건너 갈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하는 세계는 위의 세계인가? 아래세계인가? 위의 세계입니다. 위의 세계는 실상이고 아래의 세계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나요? 아래의 세계의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세계는 비유입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이해하기 쉽도록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아래의 있는 것으로 위의 것으로 말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목사가 비유를 잘 말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과 차이가 있습니다. 목사님들의 비유는 세상의 있는 것을 비유로 말한 것이고, 예수님은 위의 세계를 비유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왜요? 목사는 사람은 아래에서 땅에서 낳고, 예수는 위에서 낳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목사의 말이 대단하지 않아요. 심지어 저의 말도 대단하지 않아요. 그 말속에 담겨있는 그 의미가, 그 위의 세계의 실체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입을 열어 비유로 가르칠 때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래의 물을 가지고 위의 물의 실체를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열린 자, 깨닫는 자는 이 예수의 비유의 말씀을 들으면서 실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 예수의 말을 듣고 실체를 보지 못하면 소경입니다. 못 들으면 귀머거리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실체와 비유를 무엇으로 나뉘어놓았나요? 궁창/하늘이라는 것으로 나뉘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윗물의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나오더라도 이름으로만 등장하지 내용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노아의 홍수 때 한번 등장하고 요한계시록에서 한번 등장하고 그 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 때 하늘의 창이 열려 아래의 물과 썩이게 됩니다. 그러면 물이 혼합이 되죠? 그러면 심판입니다. 물이 혼합이 되면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혼합된 것을 무엇으로 설명하고 있나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하나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물이 혼합된 것입니다. 그러면 등장하는 것이 바로 네피림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떠나고 육체가 되어버린 네피림! 이 네피림이 아래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용사이고 땅에 있는 큰 자들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니네 말 안 들으면 물로 싹쓸이 해버린다는 말이 아니고!! 그러니까 성경에서 마지막 때 심판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것이 혼합입니다. 썩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서를 볼 때 이스라엘백성들이 멸망하는 주제가 무엇입니까? 이방신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혼합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 안 섬기고 바알만 섬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섬기고 우상은 우상대로 섬기고, 지금 교회에서 이렇게 하고 있죠?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고, 하나님 통해서 세상에서 성공해 볼려고 이 상태가 혼합입니다. 아랫물입니다. 흙탕물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막아놓은 것이 궁창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물 이야기입니다. 감춰놓은 물이 위의 세상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바로 여기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이 두 곳만 제외하고 모든 물 이야기는 아래 물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아랫물이라고 다 부정한 이야기냐? 그렇치 않습니다. 아랫물도 좋은 물과 나쁜 물로 나뉘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을 이야기할 때는 아랫물입니다.
사 31:1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31: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31: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애굽을 성경에서는 신이 아닌 것, 사람과 육체로 말합니다. 그래서 애굽과 광야의 경계가 어디입니까? 홍해입니다. 홍해를 건너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기까지는 애굽 왕 바로의 밑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는데 하나님이 이 홍해를 무엇으로 가르나요? 바람으로 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고 어디로 건너갑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전에 어디를 건너나요? 요단 강을 건넙니다. 그래서 광야와 가나안 땅의 경계는 요단 강입니다.
그 다음에 가나안 땅에서 살 때 그들이 북방에 있는 바벨론과의 경계가 되는 곳이 유브라테스 강입니다. ( 그래서 계시록에 유브라테스 강이 마르면 심판이 온다고 하죠? )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을 비유하고 있는 가나안 땅은 물하고 관련되어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나안 땅을 말할 때 단에서부터 브엘세바라고도 말하지만, 애굽 강부터 유브라데 강까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중심으로 오른쪽과 아래는 세상/율법을 의미하구요. 유브라데를 중심으로 위쪽은 종교적인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속해있나요? 세상과 종교적인 것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속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육체 안에. 육신 안에 있는것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의 땅, 가나안은 주변이 다 세상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그러니까 젖과 꿀이 흐르고 기름진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적으로 농사짓기 좋은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땅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요? 자꾸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암몬과 모압과, 때로는 북쪽에 바벨론과 동맹을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북쪽의 바알 종교가 가나안 땅에 뿌리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합니까? 너희들이 섬기는 그 신/바알이죠? 그 신이 있는 그 땅으로 보내버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포로로 끌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의 애굽을 좋아하니까 애굽으로 보내버린 것이고, 너희들이 바알 신을 섬기니까 그 바알이 있는 곳으로 보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가보니까 어때요? 애굽으로 가도 종살이, 바벨론으로 가도 종살이를 하게 되는 것이죠! 가나안 땅! 하나님을 떠나면 종살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자유는 어디에 있나요? 가나안 땅에만 있는 것입니다.
렘 2:17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2:18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시홀이라는 단어가 애굽의 개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내려가고, 앗수르는 북쪽에 바벨론이 점령하기 전에 있는 나라가 앗수르입니다. 앗수르의 물! 유브라테스의 물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두 강물로 갈팡질팡할 때 무엇을 버리냐면 하나님이라는 진리의 강물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그 웅덩이는 어떤 웅덩이입니까? 터진 웅덩이입니다. 그게 애굽과 유부라테스의 강물을 의미합니다. 먹을수 없는 물!! 그러니까 가나안 땅을 떠나면 생수를 떠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에도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먹게 해주었습니다. 그 물이 바로 생수입니다. 위의 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죠? 이 반석을 깨뜨려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깨뜨려야 거기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육체가 있는 한 생수는 절대로 나오지 못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육체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사람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 생수는 절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여인과 예수님의 물먹는 이야기입니다. 여자가 지금까지 먹는 물은 건수입니다. 먹으면 목이 말라서 다시 물을 필요로 하지만 예수님이 주는 물은 다시 목마르지 않는 생수라는 것입니다. 목마르다는 것은 만족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 107: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혼에게는 만족을 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데 우리가 좋은 것을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궁창이라고 하는 것이 위의 세계와 아래의 세계를 지금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궁창 “라키아흐”라는 이 단어가 사용된 곳을 보니까
출 39:1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성소에서 섬길 때 입을 정교한 옷을 만들고 또 아론을 위해 거룩한 옷을 만들었더라 39:2 그는 또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에봇을 만들었으되 39:3 금을 얇게 쳐서 오려서 실을 만들어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에 섞어 정교하게 짜고
이 부분은 대 제사장의 에봇을 만드는 법을 설명해 놓은 구절입니다. 금을 얇게 쳐서 무엇으로 만드나요? 실로 만듭니다. 그래서 그것을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을 함께 꼬아서 옷을 만드는 것이 제사장 에봇입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라고 다 입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만 입는 옷입니다. 이 옷을 언제 입냐? 일년에 한번 속제일 일때 이 옷을 입고 제사장이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을 정결케 하는 제사장중에 에봇을 입은 대 제사장은 세상과의 구별을 의미합니다. ( 대제사장은 일주일전부터 준비합니다 ) 이 에봇이 신약에서는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등장합니다. 거룩한 성도들이 입어야 할 전신갑주! 그래야만 악의 영들과 싸울 수 있고 어둠의 주관자들에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신갑주가 무엇이라고 설명하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악한 자들의 칼과 화살이 나오는데
시 64:1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64:2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 64:3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는 어둠의 주관자들하고 칼과 화살로 싸우나요? 아니죠? 말 싸움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독한 말과 칼과 같은 혀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무엇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율법의 말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 세상의 전통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썩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전신갑주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는 에봇이고, 신약에서는 전신갑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궁창입니다. 그쵸? 그러니까 이것 입지 않으면 궁창이 무엇인지 구별이 안되면 혼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입니다.
렘 23:15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선지자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로부터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
지금 하나님이 누구에게 먼저 독한 물을 먹이나요?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먼저 세상의 율법적이고, 전통적인 말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제사장, 왕이 심판을 받는 것이고 그리고 그 나라가 완전히 심판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독한 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독한 물의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렘 23: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23: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평안하다.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 이러한 말들이 지금 어디에서 선포되고 있나요? 그러니까 지금 이러한 시대를 가리켜서 혼합한 시대. 마지막 시대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복을 혼합하고, 말씀과 표적을 혼합하고, 영과 육을 혼합하고, 모든 것을 다 혼합해 버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선지자로 부터 문제가 생기니까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순식간에 이 독한 물을 먹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독한 물을 누구부터 먼저 먹습니까? 목사들부터 먹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자동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주일날 말씀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나가서 그들의 말을 들으면 어떤가요? 슬슬 끌려갑니다. 그러다가 혼합됩니다. 왜요? 전신갑주을 입지 못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궁창을 만드시고 윗물과 아랫물로 나누었습니다. 그러면 구별이 나쁜 것인가요? 그렇치 않습니다. 구별은 하나님의 온전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통일입니다. 그것을 연합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먼저 구별이 되고 연합이 되어야 합니다. 구별은 둘입니다. 남자와 여자, 선과 악, 하늘과 땅, 빛과 어둠, 거룩과 부정 이모든 것이 구별입니다. 흔히 상대적 이원론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상대적 이원론은 성경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구별이 안되면 하나, 연합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분은 과정이고, 완성은 하나, 연합입니다. 나누지 않으면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신 것입니다. 어떻게 만드셨나 볼까요?
창 1: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바요메르 엘로힘 =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뭐라고? 궁창이 있으라고!! 그럼 궁창을 무엇으로 만드셨나요? 말씀으로 만드셨죠? 첫째 날에도 말씀으로 빛을 만드셨죠? 자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있을 때 하나님이 하늘을 드리우시고 모세에게 말씀을 주셨죠? 그 주신 말씀이 뭔가요? 율법이죠? 그렇다고 하면 이 율법도 뭐에요?? 라키아흐, 궁창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죄와 의를 구분하시죠? 그래서 율법이 중요한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궁창, 라키아흐는 어디에서 나온 거에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거쟎아요? 그래서 율법이 어느 때까지 중요하냐면 죄와 의를 구별할 때까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구별이 끝난 사람은 죄와 의가 어떻게 되나요? 둘이 연합/하나가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좋은사람 나쁜사람 이렇게 구분지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꾸 죄를 따지는 사람입니다. 율법의 구분은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지를 하나님차원에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나눔으로 끝이 난다면 복음은 우리에게 올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으로 끝나면 됩니다. 그런데 율법 다음에 복음이 오니까 구분이 없어집니다.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구분이 없어집니다. 복음 안에서는 낮고 높음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으로는 제사장과 일반사람이 어떻게 똑같은 위치에 있을 수 있나요? 지금 교회성도들이 목사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목사들은 주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대접이나 받을려고 하쟎아요? 그런데 복음은 너희가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구약에서 사람은 죄인, 하나님은 거룩한 분, 신약에 오니까 우리를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야기합니다. 뭐가 없어졌나요? 구분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의 증표로 오신 예수님은 하늘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시키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이 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육체를 가진 몸으로 온 것이 중요한가요? 그 몸 안에 가지고 온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요? (요즘은 포장만 그럴싸하고 내용물은 주먹만하던데) 그분이 통일시키시기 위해 그 몸 안에 가지고 온 것이 뭡니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진리라고, 생명이라고, 말씀이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를 위의 것과 하나로 통일시키시러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뭐에요? 죄 용서입니다.
둘째 날의 역사는 나눔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죠? 그렇다고 하면 나누는 것은 저녁에 해당되고 그 나눈것을 다시 하나로 통일되는 상태를 아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제일 먼저 하시는 것은 나누시는 것입니다. 나눈다고 하는 것은 죄를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빛 가운에서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왜? 죄를 드러나게 하시나요? 용서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죄가 드러나지 않으면 용서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근데 우리는 지금 묻어놓고, 감춰놓고,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눈 한번 딱 감고 다 용서해달라는 식으로 회개하고 있쟎아요. 이런 마음으로 회개기도 하는거 아닌가요?
그래서 용서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의 죄를 갚아줄 수 있는 상태가 될 때 그때 용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번째 날을 산다고 하는 것은 구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위의 것과 아래의 것을 구별해서 하나로 말씀해 줄 수 있는 상태가 되어 그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둘째 날로 들어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첫댓글 노아 홍수 실제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