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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인도철학
약어 : KJIP
1994, vol., no.4, pp. 251-288 (38 pages)
발행기관 : 인도철학회
정승석 교수 동국대학교
KCI에서 이 논문을 인용한 논문의 수는 4건
목차
1. 문제의 접근 방향
2. 아我의 진상
1) 윤회하는 ‘나’와 윤회하지 않는 ‘나’
2) 범부의 아我
3) 각자覺者의 아我
3.무기無記의 이면
4. 윤회의 주체
5. 맺음말
1. 문제의 접근 방향
불교를 철학적으로 그 사상의 깊이를 심화해 온 것이 무아설 이라고 한다면, 종교적으로 그 실천적 수용의 폭을 넓혀 온 것은 윤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전개 과정에 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무아설과 윤회설이 양립하면서 질 과 양의 양면에서 불교를 발전시켜 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윤회설이 불교의 본질적인 교의인 것은 아니라 고 인정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지적할 수 있겠다. 하나는 윤회설이 불교 이전의 정통 바라문교에서 발아하여, 1. 문제의 접근 방향 2. 我의 진상 1) 윤회하는 ‘나’와 윤회하지 않는 ‘나’ 2) 범부의 我 3) 覺者의 我 3. 無記의 이면 4. 윤회의 주체 5. 맺음말 특히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세련되었다는 역사적인 이유이다. 즉 “우파니샤드의 윤회 개념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단순히 유전 과 환경이라는 기계적인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생에서 행한 행동의 집약된 본질과 잠재력의 영향에 의해 개성과 인격이 결 정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우파니샤드 사상의 이 요소 역시 불교에 의해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불교의 자타카 문 헌은 그 수용의 實例로서 지적된다.1)
다른 하나는 윤회설에서 핵심이 되는 전제가 불교의 중심 교 리인 무아설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철학적인 이유이다. 보 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흔히 영혼이라고 표현되는 불멸의 본 체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에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개 인의 윤회를 가능케 한다고 전제하는 것이 인도 일반의 윤회 설인데, 불교의 무아설은 그와 같은 불멸의 본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윤회설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윤회설이 불교의 비본질적 교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 당하지는 않다.2)
그러나 본질과 비본질을 차별하는 것만으로는 불교를 지탱해 온 두 기둥일 수 있는 무아설과 윤회설의 의의를 바람직하게 인식할 수 없다. 석가모니는 엄연히 윤회를 전제로 하는 설법 을 했고, 윤회설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신자의 삶을 지탱 하는 힘으로 기능해 왔다. 솔직히 말해서 무신론자나 유물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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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Vishwanath Prasad Varma, Early Buddhism and its Origins(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Pvt. Ltd., 1973), p. 163. 2) 반면에 무아설이 불교의 본질임은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자존적 본체를 부정하는 무아설은 불교 철학의 가장 독특한 일면 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불교의 모든 교의는 다른 철학 체계와 종 교에서도 다소 발견할 수 있으나, 무아설만큼은 명백히 이의 없이 오 직 붓다 의해서 교시되었다.’(Nyanatiloka, Buddhist Dictionary)라고 주 장하는 것도 이 점에 기인할 것이다.” Bijayananda Kar, “Anatma and Karma in Buddhist Philosophy”, G. C. Nayak (ed.), Analytical Studies in Buddhist Philosophy(Bhubaneswar : Utkal University, 1984), p.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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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아닌 사람이라도 초원자적이고 정신적인 단일한 본체가 끝없 이 生死를 거치면서 실제로 영속한다는 점을 믿기 어려움을 발 견하지만, 세계가 기계적으로 운행되지 않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윤회의 교의는 현세의 시련을 헤쳐 나가는 데 힘을 북돋워 왔 다3)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사상의 합리성을 따지는 이론적인 시각은 기존의 교설들을 분 석하여 서로 차별하고, 다시 그 접합을 모색하게 된다. 무아설 관련의 불교 연구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 나 이렇게 모색된 결론 역시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미해결의 문제로 남게 된다. 무아설에 관한 이런 과정이 다음의 언급에 는 잘 압축되어 있다.
말 그대로 이해하는 한, 무아와 주체성은 서로 모순한다. 이 모순에 관한 의문 은 일찍이 원시불교에도 보이지만, 부파 시대에 이르러 특히 윤회의 문제와 결부 되어 요란하게 논의되었다. 즉 “만약 我가 없다면 6道를 윤회하는 자, 응보를 받 는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근본 상좌부의 有分 (bhavaṅga)識, 有部의 五蘊相續說 내지 中有說을 비롯하여 독자부의 補特伽羅(非卽 非離蘊), 경량부의 一味蘊(根本蘊), 化地部의 窮生死蘊, 대중부의 根本識 등이 설해져 서 혹은 무아론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뭔가의 주체적 지속이 가능함을 설명코자 하고, 혹은 일종의 정신적 주체를 인정하여 유아론으로 이끄는 등, 여러 가지로 해명에 고심한다. 무아의 사상은 般若空觀에서 다시 심화되고, 이로부터 대승적인 無我卽大我 또는 ‘蘊 속의 眞我’ 사상, 혹은 여래장이라든가 佛性을 설하며, 혹은 마나식과 아뢰야식을 세우는 입장, 더 나아가서는 無位의 眞人을 바로 증득하는 입장 등이 전개되어 간다.4)
불교 내부에서 그간 논의의 핵심은 윤회설이 무아설과 상충되 지 않도록 영혼을 대신할 수 있는 원리 개념을 발견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이 불교 밖의 현대 학자들 에게 오해의 가능성이 있는 견해를 유발하기도 했다. 예를 들 면 현대 학자들에 의해 불교적 접근과 베단타적 접근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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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f. Varma, Early Buddhism and its Origins, p. 160. 4) 增田英男, 「無我と主體性」, 印度學佛敎學硏究, 14-1(1965), p.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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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적절히 감소될 수 있는 방식으로 무아설을 해석하려는 시 도가 이루어져 왔는데,5) 인도의 샤르마는 “무아설의 불교는 순수 의식이자 유일한 실체인 순수 자아, 즉 순수한 아트만 (我)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6)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불교도는 아트만을 영혼(jīvātman)으로 취급하며,7) 궁극적 실체 인 진정한 자아는 결코 불교도의 비판의 손길이 닿지 않는다 는 것이다. 그는 아슈바고샤와 아상가와 샨타락쉬타가 각각 我(ātman), 最高我(parātman), 淸淨我(viśuddhātman)와 같은 용어 를 사용함을 인용하기도 한다.8)
인도의 바르마는 근대의 힌두 사상가들이 ‘초기 불교의 베단 타化’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불교의 무아설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여 경계한 바 있는데,9) 샤르마의 경우엔 아예 ‘불교 전체의 베단타化’로 나아갔다고 지적할 만하다. 불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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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Kar, “Anatma and Karma in Buddhist Philosophy”, p. 28. 6) Chandradhar Sharma, A Critical Survey of Indian Philosophy(Delhi : Motilal Banarsidass, 1960), p. 325. 7) 이 경우의 아트만은 ‘순수한 아트만’이 아닌 아트만이다. 이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언급은 다음의 註를 참조. 8) Kar, “Anatma and Karma in Buddhist Philosophy”, p. 28. Kar 는 이런 견해가 반드시 타당하지는 않음을 반증하고서, “[불교 내부에 서] 후대의 몇몇 저자들이 ‘我’ ‘最高我’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긴 하지만, 이를 통해 논리적으로 무아설과 有我說이 아무런 차이가 없 으며 동일한 기반에 있다는 결론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다. Ibid., p. 31. 그러나 샤르마의 오류는 불교가 베단타 철학의 경우와 같은 ‘순수한 아트만’을 인정한다고 주장하는 데 있으며, ‘순수한 아트만’과 대비되 는 아트만에 대한 그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타당하다고 보아도 좋다. “불교는 ‘아트만’이라는 말을 시초가 없는 무지(avidyā)요 환상(māyā)이 요 인상(vāsanā)인 ‘개인의 자기 고정 관념’(the individual ego-complex) 또는 영혼으로 취급하는데, 이는 통각(buddhi)이라는 내 적 기관과 결합된다. 붓다와 대승불교도는 이런 아트만을 쉽게 거부하 였으며, 동시에 그것이 경험적 실체임을 받아들였다.” Sharma, A Critical Survey of Indian Philosophy, p. 325. 9) Varma, Early Buddhism and its Origins, pp. 144 ff. 拙稿, 「원시 불교에서 非我의 의미」, 印度哲學, 제3집(인도철학회, 1993), p. 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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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포함하여 불교 외부의 위와 같은 견해들은 결국 무아설 과 윤회설이 양립할 수 없다는 기본 인식에서 기인하는 것이 다. 그래서 인도의 정통파의 입장을 견지하는 학자들은 윤회 설이라는 기반 위에서 무아설의 취의를 해석하려 한다.
이상과 같은 문제는, 반복되는 과정이긴 하지만, 항상 원점에 서 그 해결의 가능성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일반 윤회설의 전 제10)를 고려하면 윤회와 무아는 모순함을 부인할 수 없음에 도, 석가모니가 이 모순에 개의치 않고 윤회를 설법한 의도나 인식 내용을 재검토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흔히 통용되는 설명들이 있다. 즉 일부 학자들은 교의상 무아와 業(윤회) 사이의 불일치를 인정하는 반 면, 다른 학자들은 사람들의 의식 성향이나 정신적 염원이나 일 반적 행위·성격 때문에 당시 널리 퍼져 있던 業說(윤회설)을 채용 하여 붓다가 자신의 법을 설했다고 말한다.11) 좀 색다른 견해로 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있다.
불교가 윤회의 개념을 수용하지만, 우파니샤드와 불교의 이론 사이에는 중대 한 차이가 있다. 첫째의 이론적 차이는 불교가 인간의 영혼에 대한 일원론적이고 본체론적인 견해를 거부하는 점이다. 언뜻 보면 윤회하는 어떠한 정신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윤회의 관념을 내세우는 것이 터무니없는 듯하다. … 영혼에 대한 영적인 본체론적 견해를 거부한 후에도 불교가 윤회 개념을 수용한 것은 문화적 전통에서 수용되어 온 개념들이 거대한 힘으로 존속함을 입증한다. 윤회 개념의 영향력은 불교가 뭔가 변형된 형태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당시의 북인도 국 민을 압도했음이 틀림없다.12)
이러한 설명들은 납득할 만한 타당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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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 전제의 핵심은 윤회의 주체인 불멸하는 본체(영혼 또는 아트만)인 데, 관련된 부수 전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拙稿, 「業說의 양면성과 불 교 業說의 의의」, 伽山學報, 제3호(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pp. 180-212, 참조. 11) Genjun H. Sasaki, Linguistic Approach to Buddhist Thought(Delhi: Motilal Banarsidass, 1986), p. 24. 12) Varma, Early Buddhism and its Origins, pp.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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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특히 위의 견해는 석가모니 또는 이후의 불교가 마지못해 윤회설을 수용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불교의 윤 회설 수용은 본래적인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석가 모니의 가르침은 자신과 동등한 수준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범부(설혹 그의 제자일지라도)를 상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간과해 서는 안 된다. 이에 관한 좋은 예가 율장의 「大品」에서 발견 된다. 석가모니는 성도 후 최초의 설법에서 전에 함께 수행한 적이 있던 5비구에게 무아(非我)를 설한다. 그러나 이후 재가자 로서 불교에 입문하게 되는 야사, 야사의 부모, 야사의 친구들 에게는 베품(보시)과 도덕적 습관(持戒)과 천상에 태어남(生天)을 차례로 설함(소위 次第說法)으로써 그들을 교화한다.13) 석가모니 는 애초부터 윤회를 인정하고서 대중을 교화했던 것이다. 이 런 인정이 그럴 만한 의도에서였다면, 그 의도가 분명히 불교 의 궁극적 지향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 지가 없다.
바로 이 점에서 불교의 윤회설은 인도 일반의 윤회설과 그 성 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석가 모니의 의식 속에 윤회와 무아가 양립했다는 사실을 주목하 여, 그렇게 양립한 윤회설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무아설과 의 상충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구모이 쇼젠(雲井昭善)이 제시한 다음과 같은 고찰의 방향 을 주목하면서, 불교에서 양립하는 윤회설과 무아설의 성격을 검 토하고자 한다.
“무아를 표방하는 불교가 윤회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라는 設問은 그대 로 불교의 근본적 태도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해답에 앞 서 다음 두 가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①불교가 수용했다는 윤회설의 성격과 ②그 수용의 태도, 바꾸어 말하면 윤회설이 外敎說이라는 입장을 전제로 하여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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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Vinaya-piṭaka, Vol. Ⅳ, Mahāvagga, Ⅰ, 6-7. I. B. Horner(trans.), The Book of the Discipline(London : The Pali Text Society, 1951), pp.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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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결론에 이른 “外敎說이기 때문에 불교 독자의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사 고 방식을 먼저 음미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外敎說이기 때문에 불교적으로 의의 가 없다.”라고 보는 것이 허용되는가 안 되는가를 비판해야 한다.14)
위에서 제시한 두 문제 중에서 전자(①)를 이해하면 후자(②)는 어느 정도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후자에 대한 간명한 입장에서 전자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이미 언급했 듯이, 윤회설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에 유행했던 관념이라는 점에서 불교로 보면 비본질적인 사상(外敎說)이지만, 어쨌든 그 것이 석가모니의 설법에서 무아설과 공존하면서 대중을 교화 했다는 점에서 보면 그 가치가 당연히 불교적인 것으로 인정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한 입장에서 필자가 파악한 불교 윤회설의 특수한 성격은 영혼 개념으로서의 아트만(我)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윤회한다 는 사실을 설파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교설을 통 해 영혼과 같은 불멸의 본체가 없이도 윤회할 수 있음을 이해 한다면, 윤회와 무아의 양립상의 상충은 해소될 수 있다. 이 문제는 ‘윤회하는 나(我)’와 ‘윤회하지 않는 나’를 어떻게 이해 하느냐는 문제로 직결된다.
사실 이런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소위 ‘석가 모니의 無記’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지각 능력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석가모니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던 데에서 상반된 추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無記를 야기한 중요 관심사는 자아의 有無 문제를 둘러싼 내 용으로, 세계 속의 영혼 또는 해탈한 자의 존속 문제에 집중 되어 있다.15) 이 문제에 대한 석가모니의 침묵은 무아를 암묵 적으로 천명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그의 黙說的인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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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雲井昭善, 「輪廻と無我について」, 印度學佛敎學硏究, 2-2(1954), p. 280.
15) 徐盛源, 「雜阿含에 나타난 Vatsagotra의 질문」, 佛敎思想論叢(鏡 海法印 申正午博士 華甲記念會, 1991), p.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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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도 불구하고 근본 문제에서 ‘일체가 무아’임을 명백히 하 고 있으며, 부수적으로 실용적인 면에서 질문자의 의도와 심 리적인 상태가 참작되고 고려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16)는 것이다. 또는 이것은 자아의 부정으로 이끌며 불교의 가르침 을 ‘자아는 없다’는 점으로 이끈다고도 한다.17) 반면에 “그러 한 문제들에 대한 그의 침묵은 초월적 자아로서의 본체가 ‘있 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지만, 그것은 논리적 추리의 영 역 안에 이르지는 않는 것으로 해석되었다.”18)라고 지적하며, 또 “붓다의 침묵을 절대적 아트만을 승인하는 것으로 해석할 합리적인 근거는 없다.”19)라고 지적하는 점으로 보아, 無記를 무아의 반대인 有我로 해석한 예도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 다.
필자는 위와 같은 無記의 이면에는 무아와 윤회의 양립이 내재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한다. 無記의 태도는 中道와 緣起에 기인한 것임이 석가모니의 설법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아함경에서의 무아와 윤회의 문제는 어떠한 점에서 보더라도 중심적 과제라고 한다. 아울러 “이 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은 인도 사상사적 기반에 서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동시에 윤회설이 지닌 사상적 기반과 무아설이 지닌 사상적 근거를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한다.20) 그러나 필자는 지침이 될 만한 이 타당한 지적을 기본 시각으로 견지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미흡한 상태로 당장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이 미흡함은 본론과 관련된 지속적인 연구로써 보완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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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위의 책, p. 286. 17) H. Oldenberg, Buddha, translated by William Hony from the German(1882 ; New Delhi : Lancer International, 1992), p. 273. 18) David J. Kalupahana, Buddhist Philosophy : A Historical Analysis(Honolulu : The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76), p. 40. 19) Kar, “Anatma and Karma in Buddhist Philosophy”, p. 29. 20) 雲井昭善, 「輪廻と無我について」, p.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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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것으로 생각한다.
2. 我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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