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 김광섭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 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뎄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봐
지구처럼 부동(不動)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데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神)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과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高山)도 되고 명산(名山)도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시감상
개인적으로 '산' 시를 좋아해서 작고한 시인 김광섭 시인의 '산'과 '성북동 비둘기' 두편을 싣게 되었다. 아는 분 말씀에 명산 일수록 사람이 많이 죽는다고 했는데, 산이 가끔 신경질을 부려야 명산도 되고 고산도 되나 보다.
진초록으로 덮힌 산이나 눈으로 뒤덮힌 산도 밤에 보면 시커멓게 보인다.
산은 먹지도 않고 말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늘 그자리에서 사람들을 기다린다.
산도 외로울 땐 절대자와 가까이 하고 싶어 가장 뾰족한 봉우리로 하늘과 잇대어 있고, 슬플때면 밤새 운 눈물이 골짜기 마다 부딪쳐서 흘러간다.
어디 그뿐이랴!
산은 너그러워 산속에 두 계절과 함께 살며, 사람들이 생을 마감했을 때 산 자신이 산을 키우며 살고 싶은 양지바른 곳을 기꺼이 내주는 산을 김광섭 시인은 산을 마치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
이렇게 너그럽고 헌신적인 산도 몸살을 앓고 있다.
무분별한 개발과 무지한 산행 인구가 늘면서 산이 병들고 있다.
산이 큰 기침을 해도, 산이 열이나 숲이 시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머잖아 불행하게 되는 건 산이 아니라 인간일 것이다. - 이담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