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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 (단편소설)
맑은하늘 / 이영자
(프롤로그)
민희는 두 아들을 둔 싱글맘이다.
결혼 3년 만에 두 아들이 태어났고
남편 사랑에 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지만
큰아들이 세 살 되던 해 불행이 닥쳐왔다.
남편이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다 앞지르던
차와 충돌해 그 자리에서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민희는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며 두 아들과
남편 없이도 열심히 잘 살아내는 슈퍼우먼이었다.
결혼 생활은 얼마 안 되지만 동아리에서
만난 남편은 민희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었다.
1) 민희의 학창 시절
국민학교 4학년 때 만난 박정란 선생은 아주 특별한
은사님이었다.
그 사랑을 잊지 못해 선생님을 닮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
민희는 어린 마음에 박정란 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될 거라고 다짐하였다.
민희는 어릴 적부터 교대 교육학과를 꿈꾸었다.
그렇게 다짐한 이유가 있었다.
박정란 선생님은 무척 다정하고 사랑이 많은
분이셨다.
선생님 집이 민희집 옆에 있어서 매일 민희와 함께
등교하면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끼고 예뻐해 주셨다.
그 단임 선생님은 평생 잊지 못할 은사님으로
민희 마음에 남았다.
교사가 꿈이었던 민희에게 변화가 생긴 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절친인 원숙이가 이대 피아노학과에 갈 일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해서 이화대학교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원숙이를 따라갔다.
훗날 민희의 운명이 바뀌는 날이 되었지만 철없는 민희는
캠퍼스에 들어서면서부터 신세계에 온 듯
커다란 눈을 반짝였다.
이대생들 모습이 하나같이 예쁜 옷을 입은 인형 같았다.
이대생들은 이쁜 사람만 다니나 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민희는 설레는 마음으로 피아노학과 학장실을 원숙이를
따라서 들어갔다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유명한 김자경 선생님을
만났다.
그분은 꽃향기가 풍기는 인자한 인품에
즐거운 음악 같은 음성을 소유하신 분이었다.
민희가 그때 본 그 환경은 세상 속 별세계였다.
"민희야~, 학장님이 뭐라고 하셨는데?"
신비로운 피아노 연주 음악 속에 빠진 민희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대 캠퍼스에 울려 퍼지는 생전 처음 듣는 신비한 소리들이
민희의 영혼을 송두리째 지배하고 있었다.
성악과에서 들려오는 소프라노는 환상의 세계에서
천사가 노래하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민희는 피아노학과에서 들려오는 피아노소리에 이끌려
가보니 연습실에서 누군가 열심히 연주하고 있었다.
희고 가느다란 열개의 손가락이 하얀 발레복을 입고
건반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검은건반 흰건반에서 음표들이 튀어나와 반짝이는 별이 되어
민희가슴에 악보를 그리며 왈츠를 추었다.
민희는 천상에 온 거 아닌가 생각하며 넋이 나갔다.
그날 이후 민희는 열손가락을 피아노건반 위에 올려놓고
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민희는 그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피아노 치는 게 너무 좋아서 밤낮으로 연습을 했다
불과 1년도 안 돼서 체르니 40번을 마스터하고
피아노 명곡집을 끝냈다.
모짜르트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하기까지는 2년도 채 안 걸렸다.
민희는 피아니스트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2) 결혼 그리고 이별
민희는 교사보다 피아노를 선택을 했고
결국 피아노학원을 차려 좋아하는 피아노를
두드리며 행복하게 살았다.
좋은 사람을 만나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여
영화 같은 사랑을 했다.
민희는 그렇게 두 아이 낳고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았다.
불행이라면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출장에서
돌아오다 저 세상으로 가기까지
민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 생각하며 살았다.
사랑하는 남편을 보내고 아이 둘을 키우며
남자는 그 남편 하나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민희는 남편의 끔찍한 사랑을 추억하며 남편곁으로
가는 날까지 행복하게 살겠노라 다짐을 했다.
민희는 싱글맘으로 사는 날들이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그런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낄 것 같다 싶으면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바쁜 일상을 만들며 살았다.
그렇게 십 년의 세월이 바람처럼 흘러갔다.
싱글맘 민희의 나이 서른다섯 가을이 오는 길목에
그녀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민희의 뒤통수가 뜨끔거렸다.
누군가의 눈이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민희가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데 길 가다가도
왠지 돌아보게 되고는 했다.
민희는 미행을 당하는 느낌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가고 남자는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민희가 학원문을 닫고 나올 때면 건너편 전봇대 옆에 서서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빙긋 웃었다.
민희는 이상한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고 지나쳤다.
하지만 뒤에서 뚜벅뚜벅 따라오는 소리가 들려
잰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고 잠갔다.
민희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이층 침실방에 올라가
몰래 창을 열고 내다보았다.
한참을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달빛이 구름에 가릴 때쯤
어슬렁거리던 남자는 가버렸다.
민희가 시장을 보려고 나갈 때면 그 남자는
어느새 시장 골목에 서 있었다.
그 남자는 열 발자국쯤 사이를 두고 어딜 가나 민희의
앞이나 뒤쪽에 서있었다.
남자는 민희의 분신 같은 그림자가 되어 한동안 따라다녔다
서른다섯 살 민희는 동안의 얼굴이라서 십 년은 더 어려 보였다.
민희는 처녀 적 몸매를 그대로 간직했고
영화배우 최은희를 많이 닮아서 최은희 딸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런 민희는 여전히 날씬하고 예뻤다.
민희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남자를 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아가씨인 줄 알고 관심 갖나 보네
싱글맘인줄 알면 어느 날 먼지처럼 사라지겠지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자 마음먹고
민희는
변함없이 예전과 같이 행복해하며 일상을 보냈다
한 달 두 달 지나고
학원 앞 플라타너스 낙엽이 길가에 융단처럼 깔릴 즈음
가을이 가고 초겨울이 오는 데도
남자는 여전히 학원 문 닫을 때부터 집에 갈 때까지
한결같이 파수꾼이 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집 앞에서 서성이다 불을 끄면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낙엽을 밟으며
어둠 속으로 쓸쓸히 사라진다
민희는 그런 청년에게 조금씩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민희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고 이층으로
올라가 몰래 그 남자를 훔쳐보는 일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남자의 인상착의는 키 180m 정도에
체격은 그런대로 건장해 보이나 뚱뚱하지 않았고
모델같이 쭉 뻗은 몸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누구나 호감 갈 것 같은 멋짐이 풍겨 나왔다.
바람이 머리를 헝클어 놓으면 오른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남자였다.
달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이 민희의 가슴을 쿵쿵 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달빛이 만든 남자의 긴 그림자를 보는 민희 눈동자는
호수에 돌을 던지면 물 위에 번져가는 물결처럼 일렁였다.
민희는 그 남자가 왠지 외로워 보였고 불쌍해
보이기까지 시작했다.
무슨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는 남자,
어제는 하얀색 목티에 검은색 카디건을 걸치고
까만 면바지를 입었었다.
오늘은 카라가 있는 청색 셔츠에 엉덩이를 감싸는
회색 슈트를 걸치고 회색 면바지를 입었다.
신발은 어두워서 무엇을 신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나이는 민희와 동갑쯤 된 것 같아보았는데
유부남은 아닌 것 같았다.
남자를 훔쳐보던 민희는 남편을 보내고 처음으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민희는 자신의 뺨을 만져보고 예전에 남편의 사랑을
받을 때처럼 화끈거렸다.
도대체 저 남자는 누구인데 서너 달이 넘도록
한결같이 나 자신을 지켜주려는 걸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 사랑은 죽었는데 무슨 사랑이 또 있겠어?"
민희는 기억 속에 남자를 지워버렸다.
"오늘 밤 꿈에서 남편을 만날 수 있을까?"
민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하나뿐인 베개를 머리밑으로 깊숙이 밀어 넣으며
남자의 얼굴이 있던 빈자리에 미안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부르다 잠이 들었다.
3) 그 남자를 다시 만났다.
원생이 다른 학원보다 많아서
민희의 귀가 시간은 항상 10시가 넘었다.
학부모님 소개로 수안보에서 혼자 사시다가
옆집으로 이사를 오신 명자 아주머니는 친엄마 같은
분이었다.
6학년 아들과 4학년 아들을 어찌나 잘 돌봐주시는지
민희는 아이들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민희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수업 끝나면 학원으로 와
원장실에서 숙제를 했다.
복습 자습을 하며 과외 한번 안 받고도 늘 성적은
상위권인 이었다.
말썽 한번 안 피우고 잘 자라는 기특한 아이들이었다.
민희가 아이들을 과외에 보내지 않는 건
교과서만 잘 이해해도 된다는 생각이기도 했고
아이들을 자유롭게 자라게 하고 싶어 아예 학교수업 외에
별도 과외를 배제했다.
민희는 전국 피아노 콩쿠르를 앞두고 참가 원생들
지도하느라 여느 때 보다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전국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한 원생 전원이 상을 받고
민희도 최우수 지도자 교육상을 받았다.
학부모들이 준 꽃을 두 팔에 안고 있을 때 그 남자가
불쑥 꽃을 들고 나타나 쑥스러운 듯 건넸다.
집으로 돌아온 민희는 그 남자가 준 꽃다발 안에
또박또박 곱게 쓴 엽서를 펴보았다.
엽서에 쓴 글은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콩쿠르가 끝난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내일 10시부터 반포본동에 있는 티파니찻집에서
기다린다는 내용이었다.
시간이 되는대로 와주면 고맙겠다는 엽서를 읽으며
민희는 훈남인 남자를 떠올렸다.
아침 10시부터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남자의 마음을
분석해 보았다.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지만 한 번은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희는 아이 둘 딸린 싱글맘이라고 꼭 말해줘야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이 좋아하는 콘샐러드와
쇠고기수프 계란프라이를 넣은 토스트를 차려
아이들과 먹으며 내내 그 남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민희는 티파니로 향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보았다.
"이런 속물 같으니라고!"
영희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10시부터 계속 기다린다고 했으니까
오후 3시쯤 가서 없으면 말고 그 남자에게 신경 쓰는
마음이 싫어 민희는 머리를 흔들었다.
민희는 그 남자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아이들에게
말했다.
도시락 싸서 한강에 가서 놀다 오자고 너스레를 떨며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그 남자를 생각하는 자신이 싫어서 한 행동이었다.
민희는 도리질을 하며 그 남자를 뇌리에서 밀어냈다.
김밥을 싸서 과일과 함께 피크닉 가방에 넣고 좋아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한강에 도착해 적당한 곳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싸 온
점심을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아이들은 축구공 놀이를 하느라 소리 지르며 즐겁게 놀았다.
형제우애가 남다른 아이들이었다.
민희는 재미있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돗자리 위에 누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았고
남편 얼굴을 떠올렸다.
자상한 남편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환하게 웃다가 사라지고
그 남자의 빙긋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 티파니에 가야 해 ,
민희의 몸이 반응하며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였다.
민희는 한참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렀다.
약속이 있어서 가야 한다며 돗자리를 걷고 짐을 챙겼다
민희 행동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들은 뭔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바쁜 거라 생각했는지 서둘러 도와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민희는 아이들을 집으로 들여보내고 급
하게 티파니찻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핑크빛 꽃무늬가 있는 감색 원피스는 잘록한 민희 허리를
돋보이게 했고 바비인형 같이 창랑대는 긴 머리는 보는
사람마음을 설레게 했다.
민희는 티파니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쪽 구석진 자리지만 찻집에 들어오는 사람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는 그 남자의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찻집 분위기는 공들여 배치한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편안함을 느끼게 했고
그곳에 앉아 있는 그 남자로 인해 묘한 향기마저
품어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민희를 보자 오른손을 번쩍 들며
반가워하는 남자 얼굴이 왠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 듯
익숙하고 낯설지 않았다.
민희는 가벼운 목례를 하고 남자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문반대쪽 커다란 몬스테리아 놓여있는 옆 자리였다.
의자는 푹신한 안락소파였다
그 남자의 눈이 민희를 직시하며 바라보았다
남자는 차를 주문하려고 여종업원을 불렀다.
민희는 자식 둘 딸린 싱글맘이니 관심 갖지 말라며 말하고
나가려고 남자를 쳐다보며 차는 생각이 없다고 했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민희 씨, 저는 민희 씨에 대해 모두 알고 있습니다.
민희 씨를 처음 본 순간 저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저는 민희 씨보다 9살 연하인 것도 압니다.
하지만 두 아이의 아빠가 될 자신이 있습니다.
제 가족들에게 허락받기 위해 두 달이란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 저의진심을 아시고 제가족 모두 민희 씨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자고 합의 보았습니다.
형제는 형 둘에 누나 하나 양평에 사는 부모님
큰형은 검사고, 둘째 형은 민희씨 학원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얼마 전 당구장 개업을 했습니다.
둘째 형 도와주느라 형네 집에 머물다가 우연히
민희 씨를 보고 이 자리에 오기까지 삼 개월이 걸렸습니다."
말없이 듣고 있던 민희는 결심한 듯 다부지고
냉정한 어투로 남자에게 말했다.
"난 두 아이를 사랑하기에 새아빠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이대로 사는 게 더 행복해요!
그러니 제 삶 속에 들어오는 걸 거절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행동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민희는 고개 숙이고 우는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찻집을 나섰다.
민희의 가슴은 허전하면서도 후련했다.
"잘했어, 그 남자도 시간이 지나면 좋은 짝 만나
결혼하고 행복하게 잘 살 거야!
그 남자를 위해서도 잘한 일이야!"
하늘을 보니 낮달이 푸른 하늘에 이쁘게 떠 있었다.
4) 다시 만난 그 남자
남자와 찻집에서 만난 이후 그 어디서에도 그를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포기를 했구나!
잘 생각한 거지 안 그래?
뭐가 부족해서 두 아이 딸린 과부를 좋아하겠어."
민희는 잘된 거라 생각하면서도 몇 개월간
남자의 기다림을 도둑이 훔쳐간 것 같은 허전함
이었다.
기름이 똑똑 떨어져 종지 안에 고이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민희는 세미클래식을 틀어놓고 피아노 선율 속으로 들어가
남편과 데이트하던 시간으로 돌아갔다.
남편을 추억하며 행복감을 느꼈다.
민희는 목이 따끔거려 따끈한 물에 생강차를 타 마시며
어둠이 드리워진 골목길을 내다보고 앉았다.
아이들은 제방으로 가서 잠들었는지 조용했다.
세상이 다 잠든 적막을 영역다툼을 하는
길고양이들이 깨웠다.
아기 우는 소리를 내며 앙칼지게 싸우던 냥이들도
조용해졌고
남자가 서 있던 가로등밑엔 뿔각 모양의 빛이
텅 빈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이제 그 남자는 오지 않았다.
남자와 찻집에서 헤어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날은 민희는 저녁에 재즈피아노를 배우러 오는
성인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개인 교실이 15개로 꽤 규모가 큰 음악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민희는 유치부, 초등부, 중고등부,
성인반까지 합치면 120명은 족히 넘었다.
8시쯤 안기부에 근무하는 여직원 몇몇이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있었다.
민희는 연습소리를 들으며 소파에 앉아 개인별
수강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
학원문이 열리고
검은색 정장차림의 중년 남자 한 명, 회색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 한 명, 그리고 짧은 파마머리에 깔끔한
투피스를 차려입은 중년여성 둘이 들어왔다.
한눈에 두 남자가 그 남자의 형들이라는 걸
알아본 민희는 그들이 들어와서 앞에 설 때까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중 사십이 채 안 돼 보이는 남자가 민희에게
인사를 하며 말을 건넸다.
"민희 씨, 이렇게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저는 재근이의 큰 형 되는 사람입니다.
재근이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민희 씨가 우리 재근이를 한번 만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작은 형과 두 여자가 간절한 눈으로 민희를 바라보며.
큰 형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무언중에 보내왔다.
민희는 그 남자의 가족들이 찾아온 이유가 뭘까
라고 생각했다.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지 모르겠지만,
가족들이 있는데 제가 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둘째 헝수 되는 여자가 나서서 말했다.
"도련님이 민희 씨 만나고 와서 이틀을
꼬박 방에만 틀어박혀 있더니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답니다. 흑흑흑"
"그럼, 죽었단 말인가요~?"
"꼬박 3일이 지나 오늘 아침 혼수상태에서
겨우 깨어났는데 계속 민희 씨만 찾아요!"
첫째 형수가 뒤이어 말을 했다.
"민희 씨, 민희 씨가 싱글맘인 거 우리는 다 괜찮아요!
도련님만 좋다면 저희는 다 찬성이거든요?
그러니 도련님과 한번 사귀어 보세요!
정말 도련님이 남편감이 아니다 싶으면
그땐 우리도 더 부탁하지 않을게요!"
잠시 생각에 잠긴 민희는 일행에게 말했다.
"30분이면, 오늘 수업이 끝나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민희는 그렇게 말하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민희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죽든 말든 상관할바 아닌데 괜히 간다고 했나?"
민희는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리고
남자 가족들과 함께 잠실병원에 누워 있는
남자를 만나러 갔다.
병실문을 여니까 남자는 민희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민희와 다시 못 만날 바엔 먼저 저 세상 가서 기다렸다가
다시 만나려고 했단다.
마음이 약해진 민희는 사람목숨이 얼마나 소중한데
그런 생각을 했냐며 그 남자 손을 잡았다.
5) 그 남지와 첫 데이트
아침부터 민희는 뭐가 즐거운지 모짜르트의
세레나데를 흥얼거리며 옷장 속을 들여다보았다.
예전에 입었던 청자켓과 청바지를 꺼냈다.
긴 머리는 예쁘게 그냥 늘어뜨렸다.
가슴에 수국 자수가 놓인 하얀 티에 청자켓을 걸치고
일자형 청바지를 차려입으니 거울 속에 민희는
아직도 대학생 같이 풋풋해 보였다.
화장기 없는 청순한 얼굴은 민희의 매력포인트였다.
그녀는 야해 보이는 게 싫어 화장을 거의 특별한 날
빼고는 안 하는 편이었다.
로션만 쓱쓱 발라도 하얀 얼굴이 예쁜 그녀였다.
집 앞에 그 남자가 승용차를 대기해 놓고 휘파람을
불며 그녀를 기다렸다.
소녀 같은 민희가 나오자 재빨리 조수석 문을 열었다.
민희가 올라타고 그 남자가 운전을 했다.
민희가 좋아하는 동해로 가서 바다도 보고
모래밭에서 파도 소리도 들으며 걷다가 오기로 하고
동해로 승용차는 달렸다.
운전하는 남자를 곁눈질로보니 턱수염이 거무스름한
그 남자의 얼굴에서 남성미가 넘쳤다.
키가 큰 남자가 민희 어깨에 손을 얹으니
아빠와 아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남자의 손은 따스했고 그의 숨결, 시선, 음성이
십 년을 독수공방한 민희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장난치며 놀았다.
땀이베인 남자의 커다란 손이 민희의 작은 손을 잡았다.
남자는 자살소동을 벌여 우여곡절 끝에 만난
민희가 꿈만 같기도 하고 너무 좋아 종일 히죽거렸다.
바닷가를 걷다가 파도소리가 들리는 게 요리
식당에 들어갔다.
민희가 좋아하는 음식을 미리 체크해 둔 남자가
대게를 주문을 했다.
대게가 나오자 남자의 손이 부지런히 게살을 발라내어
민희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남자는 맛있게 먹는 민희를 바라보며
아빠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커플이 사랑스러워 보였는지 산 낙지와
해삼 멍게 한 접시를 서비스로 내놓는 주인이었다.
"신랑 신부가 너무 사랑스럽게 보여서 서비스하는
거니까 한번 먹어봐요.
신랑이 색시를 엄청 챙기는구먼."
그 말에 남자가 주인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요.
제 아내 나이가 몇 살로 보이나요?"
"흠~, 어디 보자. 한 스믈넷은 먹었겠는데?"
"어이구, 사장님은 어떻게 딱 맞히신데요?
그럼 저는요?"
남자는 신이 났다.
민희를 보며 거 보라는 듯 의미 있는 웃음을 보인다.
"신랑은 서른 살쯤 들어 보이는걸.
내 말이 맞는가?"
"네, 네, 돗자리 깔으셔야겠습니다."
그 남자는 키가 크고 덩치가 있어서 어려 보이는
민희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술을 먹지 못하는 남자와 민희는 게요리를 먹고
바다풍경이 보이는 찻집에 갔다.
"민희 씨, 얼마 전 처음 반포 티파니찻집에서 만났던 날
제가 오렌지주스를 주문했는데
여종업원이 실수로 민희 씨 옷에 주스를
엎질렀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당황하지 않고 아무런 내색도 없이 차분하게 괜찮다며
툭툭 털어버리던 모습에 민희 씨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같이 보였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요.
그 종업원도 많이 놀랐을 텐데
화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옷이야 빨면 그만이지만 화를 내면 상처받는
여종업원은 평생 생각하며 속상해할꺼니까요."
"저도 실수하면 너그러이 용서해 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더, 민희 씨를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바다엔 고기잡이 배들이 항구로 들어오고,
멀리 오징어잡이 배들이 밤바다를 환히 밝혀 주었다.
별들이 바다로 퐁당퐁당 떨어져 내릴 것 같은
아름다운 밤이었다.
두 사람은 바닷가를 걷다가 벤치에 앉아 바다도 보고
별도 보면서 서로의 새근대는 숨결을 느끼고 있었다.
장미꽃 향기가 주위를 가득 채우고 황금빛나비 떼가
춤을 추었다.
인어가 노래하고 고래도 춤을 추었다.
환상 속 파티가 열렸다.
남자의 체온이 불덩이같이 뜨거웠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체온과 하나가 되었다.
남자는 키스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민희를 만나면서 비디오도 보고 영화도 보면서
간접 경험을 해두었다고 말했다.
6) 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
동해바다 모래 위 벤치에 앉아
파도가 춤추고 별들이 노래하는 아름다운 날
남자는 첫 키스를 경험했다.
뜨거운 불같은 남자 입술이
포개졌을 때 여자는 꿈속 요정이 되었다.
"희야~, 사랑해"
남자의 굵직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지나 심장 속으로
들어와 천여 개의 빨간 하트가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남자는 그래도 어른이고 싶어 했다.
연하가 아닌 민희의 오빠가 되고 싶어 했다.
"이제부터 희야라고 부를 거야.
나만의 희야."
민희는 그 남자와 있는 시간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다.
동해에서 집까지 10분도 안 걸린 듯 아쉬움이 남았다.
여자가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 남자는 시동을 걸고
떠난 듯싶었다.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렸다.
남자와 여자는 새벽까지 시시덕거리며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밤새워 통화를 했고 내일 저녁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렇게 남자와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남자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준비를 했다.
운동을 좋아하는 남자는 축구, 배구, 농구,
탁구등 공으로 하는 건 다 잘했다.
아이들과 자연스레 만나 친해지려고 노력도 했다.
레슨 하느라 바쁜 민희대신 아이들과 운동도 하고
공부도 가르쳐줬다.
남자는 반도체 산업의 주식이 많았다.
경제적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남자는 아이들과 놀고 민희와 데이트하는 걸 좋아했다.
남자는 이해와 배려심에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전 남편이 보내준 사람일까?
민희는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아이들도 남자를 잘 따랐다.
어찌 보면 형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행복하고 또 행복해했다.
민희와 아이들만 보면 저절로 도파민이 나와서
성가시다며 날마다 웃었다.
아이들은 그 사람을 만나고부터 웃음이 많아졌다.
민희는 남자가 하늘에서 보내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우뚝 선 커다란 산이 되어주었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준 남자를 보며
민희는 필시 남편이 보내준 선물이라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해야 남편에게 덜 미안할 것 같은
자기 합리화이기도 했다.
늦게 끝나는 민희를 위해 기다리며 최선을
다하는 남자가 말했다.
내년 봄 오월에 신부가 되어 달라는 거였다.
아이들을 책임지고 가르치고 좋은 아빠가 되겠다며
약속을 했다.
드디어 11월이 왔다.
시간 날 때마다 남자와 아이들과 함께 남산길을 걸었다.
리라국민학교를 지나 동국대 앞까지 걸으며
여자는 같이 걷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행복해했다.
"오늘 태진이와 태우가, 성적이 쑥쑥 올라가
전교 10등을 했어?
축하 선물을 해야 하는데 뭘 사줘야 할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 남자를 바라보는 민희얼굴이
행복하다'라고 말하진 않아도 보였다.
그 겨울은
남자가 있어서 참 따뜻했다.
어느새 그 남자는 민희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겨울여행도 떠나고 그 남자는
아이들에게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롯데월드 스케이트장에서 아이들에게 스케이트를
가르쳐주고 수영도 가르쳐 주었다.
민희의 눈에 그 남자는 만능 엔터테인먼트였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왔다.
계절이 바뀌어도 남자는 아이들과 민희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봄이 가고 오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와의 결혼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5월 5일 야외결혼식장에서 결혼하기 위한 준비를
남자가 혼자서 다 했다.
남자는 또 하나의 민희 도플갱어였다.
남자는 결혼식을 앞두고 들떠 있었다.
하지만, 민희는 그렇지 못했다.
언제든 남자를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식 딸린 과부와 결혼해야 하는 남자가 불쌍한 마음도 들고
9살 차이를 극복해 낼 자신도 없었다.
그런 민희 마음을 읽는 남자는 행복하면서도
한 켠으로 민희와 헤어지게 될까 불안해했다.
4월이 오고 새봄이 그려놓은 산과 들엔 화사한
신부가 되어 있었다.
오늘 민희는 아침부터 서울음대 같은 과 후배
진이를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예쁘장하고 지적인 진이가
과일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선배님, 저 왔어요~!
우리 선배님은 학교 다닐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시네요!"
너스레를 떠는 진이를 바라보며 픽 웃는 민희였다.
사실은 학원 운영을 진이에게 맡기려고 부른 거였다.
진이는 강남에서 음악학원을 운영하다 남편이
절친 친구와 바람을 피우다 들켜 헤어지는 아픔을 겪으며
학원을 정리하고 세계여행을 다니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할 일이 없는 상황이었다.
진이는 캐리어를 집으로 옮겼고
진이는 당분간 민희집에서 거주하며 학원운영을 할
의논을 했다.
민희는 남자와 함께 처음 만났던 티파니찻집에
진이를 데리고 나갔다.
여자가 남자에게 진이를 소개하며 말했다.
"앞으로 우리 학원을 대신 운영해 줄 후배 진이에요.
저는 일본 시모노세키에 살고 있는 시부모님이 위독해서
내일 출국해야 해요.
그래서 후배에게 학원을 맡기고 다녀오려고요."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민희는 다음날 일찍 옷가지 몇 개 챙겨서
공항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남자가 집으로 들어왔다.
"언제 돌아오나요?
결혼식 전에는 오는 거지요?
기다릴 테니 빨리 돌아와요."
그를 바라보는 민희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남자는 여자를 행여라도 놓칠세라 꼭 안았다.
"희야 , 사랑해"
며칠 전 남자의 누나가 찾아왔었다.
이대로 결혼까지 할 거냐고 다짜고짜 묻는 남자의 누나였다.
애 둘 딸린 과부와 결혼하는 동생이 말이 되냐는 투였다.
남자의 누나 말로는 부모님이 병이 났다고 했다.
남자는 축복된 결혼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날밤 민희는 남자와 첫 밤을 보냈다.
감히 민희를 먼저 안아보겠다고 나대다가 거절당할까 봐
남자는 결혼이란 미끼로 민희와 잠자리를 하려고
했지만 민희가 먼저 밤을 같이 보내자고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단단한 근육질을 갖고 있는 남자는
민희의 모든 것을 통째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듯 이마부터 발끝까지 쓸어내려가며
사랑의 화신이 되었다.
그것은 성욕이 아닌 예술의 극치였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며 보고 또 보고
껴안고 또 껴안고 민희는 남자의 품에서 마음껏
행복을 누렸다.
민희는 너무 행복해서 흐느끼기까지 했다.
사실은 행복해서가 아니라 이별 준비를 해야 하는
민희 마음은 울고 있었다.
7) 남자와 이별
공항에 나갈 준비를 하는 민희를 꼭 안고 남자가
빨리 돌아오라고 말했다.
시모노세키로 직접 가는 항공편이 없어서
후쿠오카 공항에서 내려 시모노세키로 가는
좌석버스를 타고 가야 해서 민희는 후쿠오카
항공권을 예약했다.
탑승시간은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민희는 많은 여행객들이 붐비는 공항풍경을
바라보며 며칠 전 걸려온 전화를 떠올려 보았다.
"민희 씨, 저는 재근이 큰형입니다.
시드니 벤처 기업에서 재근이가 지사장으로
스카우트되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절대로 안되는데
재근이는 민희 씨와 있는 게 행복하다며 한국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네~, 그런 일이 있는 줄 전혀 몰랐습니다.
제가 일본 시댁에 들어가 한 두 달 있겠습니다.
그 사이에 재근 씨를 시드니로 보내세요."
민희는 계획된 이별을 남자가 알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민희는 남자의 앞길을 막고 싶지 않기도 하고
나이 들어 함께 늙어 갈 자신도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남자에게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풀어내어도 또 가득 채워지는 사랑꾸러미를 받았다.
"이만하면 되었어! 그동안 너무 행복했으니까
더 욕심부리면 남편처럼 저 남자도 저 세상으로
떠나갈지도 몰라!"
민희는 하늘이 데려갈 것 같은 두려움이 남자와
이별하라 말한다고 느꼈다.
시모노세키 거리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시댁은 시모노세키 시내에서 오퍼상을 크게 하고 있었다.
보따리상들이 아침부터 몰려들었다.
부산을 오가며 인기 있는 일본제품 코끼리밥솥,
카메라, 전자졔품, 시계들을 한국에 내다 파는 무역상들이다.
하루 한번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부산
훼리는 늘 만석이었다.
저녁 부산에서 출발해서 시모노세키항에 정박해 있었다.
세관들이 9시에 출근하면 입국해서 볼일을 보고 저녁에 다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상인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민희는 시부모님을 도와 가게 물건 들을
진열하기도 하고 계산서 끊어 주는 일도 하며
바쁜 시부모님을 도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민희를 지켜보는 시부모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켜만 보았다.
왠지 말 한마디라도 하면 울 것 같은 며느리를 보고 있자니
측은한 마음에 시부모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시부모가 일본에 정착한 건 이곳에 사는 레슬링
선수 김일의 부모님 초대로 일본에 들어와 정착하고
이십 년을 보냈다.
그러니까 시부모는 일본이 제2의 고향인 셈이다.
시모노세키에서 보따리상 들 덕분에 갑부가 되었다.
큰 집이 두채 오퍼상도 세 개나 되었다.
시부모는 제일교포로 성공 한 셈이다.
어린 아들은 한국에서 키우고 싶어 친척집에 맡기고
아들이 장성해서 결혼하고 기자로 일하기까지
일본에 와서 살란 말은 안 하신 분들이었다.
한국에서 온 아이들이 조센징이라며 놀림 받는게 싫었고
기죽어 사는 게 무엇보다 싫어서 그랬다.
시부모는 민희를 바라보며 남편 없이 혼자 사는 게
안쓰러워 재혼얘기를 슬그머니 꺼내
넌지시 의사를 물어보기도 했다.
일본에 좋은 신랑 자리가 있다고도 했다.
딸 대하듯 대하는 자애로운 분들이었다.
민희는 일본에서 바쁜 한 달을 보냈다.
어느 날 남자에게서 편지가 왔다.
"사랑하는 희야!
나는 당신을 날마다 그리워하고 있소.
시드니 벤처회사에서 지사장으로 오라는 소식이 왔다오.
큰형이 애를 많이 써서 만든 자리여서 거절할 수가 없어요.
형님이 민희 씨와 시드니에서 살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소.
사랑하는 희야,
내가 먼저 들어가 자리 잡아 놓을 테니
준비하고 있다가 오라 하면 바로 오 길 바래요.
민희 씨 없으면 못 사는 나를 부디 생각해 주기 바라오.
세상에서 제일 민희를 사랑하는 재근이가."
며칠 후 시드니로 떠났다는 남자의 소식을 받고
민희는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민희의 눈에서 그냥 눈물이 흘렀다.
준비한 이별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가야 해!
시간이 가면 다 잊혀질꺼야!
아픔도 슬픔도 이별도 모두 세월 속에 묻힐 거야."
민희는 시모노세키 시내에서 가라토 이찌바
회 시장까지 바닷길을 걸었다.
민희는 하염없이 울면서 걷고 또 걸었다.
"안녕, 내 사랑 사요나라!"
따스한 남자의 품 안에 안긴 시간들이 되살아났다.
민희는 아스라한 추억을 검은 밤바다에 모두 다
던져버리고 싶어졌다.
한국에 돌아온 민희는 후배에게 학원을 넘겨주고
이사 갈 곳을 보러 다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지만
대한민국 어딘들 갈 곳이 없을까 싶어 아침에
일어나면 길을 나섰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학원 전문 컨설팅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수원 세류동에 괜찮은 음악학원이 나왔다며 추천했다.
학원 3층에 살림집이 있어서 민희는 보자마자
계약을 했다.
민희는 피아노 수업을 할 때도 바이엘 체르니 같은
어려운 교재로 레슨을 하지 않았다.
수강생이 좋아하는 곡을 물어보고 그 곡을 쉽게 편곡해서
코드주법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누구나 1년 정도면 웬만한 동요나 가요
재즈를 연주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바로 연주하도록 레슨 하는 원장님이라는 소문이
고등동까지 퍼져 몰려드는 수강생들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C코드, D코드, F코드 G코드만 알아도
다장조곡들은 쉽게 연주할 수 있도록 반주법을
활용해서 수강을 했다.
민희는 그 남자로부터 숨어 살았다.
남자를 잊기 위해 주말이면 사랑의 집 짓는 일을 하며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
잠시 짬이 날 때면 남자와의 행복했던 꿈같은
시간들을 떠올리며 수신인 없는 편지를 썼다.
민희는 영화 같은 끔찍한 사랑을 두 번이나 원 없이 했다.
민희는 그래서 찐한 사랑의 굴레에서 혼자여도
행복했다.
민희는 그 남자를 다시는 찾지 않았다.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어디서 우연히 만난다면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민희는 그 남자가 그리우면 썼던 편지들을
가끔 꺼내어 읽어보았다.
그러나 그 뒤로 편지를 쓰지는 않았다.
어떤 사랑이 주고 간 행복한 시간들이 언제나
늘 곁에 있는 것 같아 훙얼 흥얼 노래를 불렀다.
그 남자가 엉덩이를 흔들며 부르던 애창곡을 부르면
여유로운 미소가 생겼다.
아름다운 시절을 그리며 살아가는 그 여자는 오늘도 행복했다.
"그대 사랑하는 난 행복한 사람
잊혀질때 잊혀진대도
그대 사랑하는 난 행복한 사람
떠나갈 때 떠나간대도
어두운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다가
그대를 생각해 보면 나는 나는 행복한 사람 ~~
흐흠, 이 세상에 그 누가 행복할까요
나는 정말 행복하니까
나는 정말 행복하니까 🎶
희야, 사랑한다.
바람이 지나다가 속삭인다.
밤하늘에 별들이 속삭인다.
꽃들이 새들이
민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속삭였다.
"희야, 사랑해. 사랑해."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