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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주 가르멜 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모세수사
20 세기의 교황과 리지외 성녀 데레사
1887년 11월, 레오 13 세의 금경축을 맞아 데레사 마르탱은 아버지와 함께 Coutances 교구가 조직 한 로마 순례에 참여했습니다. 데레사는 감탄을 하면서 긴 여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녀가 여행 중에 본 것에 대해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무엇보다도 그녀가 배울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아, 여행! 오랜 공부보다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순례를 하면서 그녀는 많은 이탈리아 도시를 방문 할 수 있었고, 자서전에서 길게 이야기했습니다. : “로마의 중요한 명소를 구경하면서 6일을 보내고, 7일째 되는 날에는 현재 이 땅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신 레오 13세 교황님을 뵈었습니다.” ( 원고 A 62r°) 그녀는 깊은 감탄과 헌신으로 그것에 대해 말합니다.
프랑스 순례자들에게 주어진 레오 13세 교황과의 알현에서 그녀는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즉, 15세에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요청 한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에 대한 그녀의 헌신은 이것으로 인해서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G. Papasogli는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의 생애에서 다음과 같이 씁니다. : “알현이 있던 날인 1887년 11월 20일, 그녀의 희망이 실패한 후 데레사는 아녜스 수녀 (그녀의 누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아! 폴리나 언니,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쳐서 완전히 스러져버릴 듯 했으며, 버림받은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난 너무 멀 리, 너무 멀리 있었어요… 이 편지를 쓰면서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가슴이 너무 북받쳐서… 그렇지만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내 힘에 벅찬 시련을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분은 시련을 이겨 낼 용기를 주셨어요. 아! 이렇게 큰 시련을… 하지만 폴리나 언니, 난 어린 예수님의 작은 공이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장난감을 부수고 싶으시다면 그건 그분 마음에 달렸어요. 그래요 난 그분의 뜻에 완전히 따르고 싶어요. (편지 36)
레오13세 교황은 데레사가 간절히 원했던 대로 15세에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갈 수있는 은총을 직접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낙담시키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성녀는 다음과 같이 씁니다. : 교황님께서는 저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시더니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좋아……. 하느님께서 원하신 다면 들어가게 될 테지……! (그분의 말씀이 어찌나 제 마음을 파고드는 듯하고 신념에 차 있던지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원고 A 63v°)
이 유감스러운 사실에도 불구하고 데레사는 평생 동안 레오 13 세 교황 알현한 것에 대해 매우 감사 한 기억을 간직했습니다. 기억은 아버지의 병기(病期)에 위안이 될 것입니다. “레베로니 신부님이 아버지에게는 친절하셔서 ‘가르멜 수녀 둘의 아버지’라고 소개했답니다. 교황께서도 특별한 친절을 보여주시고자, 사랑하는 저의 임금님의 존경하올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어, 당신이 성스러이 대행하고 계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비로운 표'를 박아 주시는 듯이 보였답니다. 아! 지금은 천국에 계신 아버지, 가르멜 수녀 넷을 딸로 가진 이 아버지의 이마에 놓여진것은, 이미 그의 고난을 예언하는 교황의 손이 아닙니다....” (같은 쪽)
리지외 가르멜 수녀의 신앙을 장려하고 제대의 영광에 대한 관심으로 다시 불을 붙인 금세기의 교황은 어떻게 행동했으며 교리를 전파하고 홍보했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녀의 교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독특함은? 특성은? 권위가 있는 가? 저명한가? 그것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과 교회 전체에 유효한가? 그것은 단지 윤리적이고 금욕적인 교리 일뿐인가 아니면 영원한 가치를 지닌 교리적인 몸을 포함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성녀의 탄생 150주년 (1873~2023) 즈음을 맞이하여 회상하려는 것입니다.
l. 성 비오 10세 (1903-1914)
비오 10세 교황은 하느님의 종(데레사)의 초상화를 선물로 준 선교사 주교에게 보낸 그의 입에서 나온 가장 특징적인 표현은 ‘여기에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이 있다’였습니다. 세기 초에 영혼을 정복한 새로운 인물, 리지외의 가르멜 수녀원에서 24 세에 사망한 맨발 가르멜 수도회 아기 예수의 테레사 수녀를 향해, 성 비오 10세 교황은 예언적 직관을 가졌습니다.
리지외 가르멜 수녀회의 겸손한 가르멜 수녀에게서 그는 무엇보다도 성덕의 스승으로 보았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고 지적한 사람들에게 비오 10 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 “극도의 단순함은 이 영혼에서 가장 특별하고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당신은 신학을 다시 공부하십시오.”
1907년 3월 15일 교황은 『한 영혼의 이야기』 프랑스 판을 선물로 받았다. 성스러운 얼굴의 아름다운 초상화와 함께 이 선물을 감사하게 받았다. 1910년에 이탈리아어로 번역 된 『한 영혼의 이야기』가 교황에게 전달되었고, 그 해에 다시 인쇄되었습니다. 비오 10세 교황은 피렌체 가르멜 수녀원 원장인 예수 성심의 루이지아 수녀에게 기쁨과 감사의 편지를 썼는데, 그 중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그녀 (테레사)는 백합처럼 꽃을 피웠고, 향기로운 향기를 흘렸고, 하느님 은총의 진정한 비를 내렸으며, 그녀는 자신의 사명에서 주님을 온전히 찬양하고 축복했습니다.”
비오10세는 또한 하느님의 종인 아기 예수의 데레사의 시복 조사를 도입하는 시간을 단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914년 6월 10일에 그는 시복 절차를 마치고, 시복 조사 위원회을 지명하여 '교황청 시성성'의 판결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보였습니다. : 따라서 그러한 원인으로 인해서 시복되었지만, 안타깝게도 8월 20일 비오 10세 교황은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제단의 새로운 후보자에 대한 일부 내적 태도에 대해 특별한 직감, 신뢰 및 동정심을 가졌습니다. : 예를 들어서 매일 빈번한 영성체와 어린이들에게 영성체를 촉진합니다.
데레사 시대의 교회의 이질적인 규율로 인해 성녀는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교황은 1889년 5월 30일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보낸 편지가 세심증의 이유로 영성체를 멀리한 그녀의 사촌 마리아 게랭에게 보낸 편지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래의 성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 데레사도 세심증으로 순교를 겪었지만 예수님은 내게 영성체를 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어요. 하물며 이 데레사가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말이예요… 그래요. 이 데레사는 언니에게 확신할 수 있어요. 영성체를 하는 것만이 사탄을 쫓아내는 유일한 길이란 것을. 사탄은 자기가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언니를 평화롭게 내버려 둘테니까요!… (...) 사랑하는 언니, 가능한한 자주 영성체를 하세요… 그게 유일한 치료제가 될 거예요. 언니가 낫고 싶다면 말이예요. 언니 마음을 끌어당기는 이런 힘을 예수님께서 괜히 언니 마음에 불어 넣어주신 게 아니예요. (편지 92)
신자들이 자주 성체를 영하는 것과 어린이가 성체를 영하는 것에 관한 두 가지 법령: 1905년 12월 20일의 교령 「거룩한 트리엔트 공의회」 (Sacra Tridentina Synodus) 와 1910 년 8 월 8 일의 교령 「Quam singulari」는 첫영성체의 연령을 7세로 앞당기며 첫영성체에 적합한 나이를 규정하는데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어린이들도 전례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아마도 데레사의 작품의 관점에서 볼 수 없을까요?
2. 베네딕트 15 세 (1914-1922)
베네딕트 15세의 리지외의 데레사에 대한 공경과 헌신은 전임자의 뒤를 이어 계속되었습니다. 1918년 12월 10일 베네딕트 15세는 시복 절차을 위한 섭리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CIC에 따르면, 그들은 아기 예수의 데레사 탄생 50주년에 하느님의 종의 죽음에서 덕에 대한 논의로 넘어 가야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종의 시복과 시성 과정에 대한 타당성을 인정했습니다.
1920 년 6 월 1 일에 사전 준비위원회 (Commitio Antepraeparatoria)를 종결했고, 1921 년 8 월 2 일 교황에 앞서서 예비 심의가 끝났습니다. 베네딕토 15 세는 1921년 8월 14일에 아기 예수의 데레사의 영웅적 덕행에 대한 법령을 공포하기 위한 긴 연설에서 미래의 복녀에 대한 덕의 칭송을 하면서, 영적 어린이의 길 의 "작은 길"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영적 어린이의 길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주님 손에 맹목적으로 완전 위탁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 어린이의 특징을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소극적인 특징은 자존심을 배제하고 인위적 방법으로 초성한 목적에 도달할 수 있디는 망신(妄信)과,위험한 때와 시련을 당할 때 자력으로 승리 할 수 있다는 망상증을 추방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특징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생생한 신덕을 요구하고,그 전능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한 복종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게 하는 성총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주의 섭리하심에 신뢰하여 위탁함을 요구한다. 이렇게 영적 어린이의 특징은 소극적이거나 적극적이거나 모두 기묘한 것이고,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필요한 조건으로 일러주신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
세기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이 교훈으로써 이 모든 덕을 실천하고 이 영웅적 완덕에 도달하는 영혼들의 수가 증가되어야만 했다. 성교회는 항상 스승의 계명을 더 잘 알리고 더 널리 보편적으로 실천되기 위하여 성인들의 표양을 환기시켜왔던 것이다. 오늘 아기 예수의 데레사 동정의 영웅적 덕행을 선포함도 이 목적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 복된 하느님의 종은 아주 오랜 세월을 하느님께 봉사한 것도 아니고, 어떠한 어려운 큰 일을 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5년 동안의 공적에서 그 충만함이 나타났다. 스승들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도회의 제자는 나약한 여성도 같은 몫이나,어려운 공부로써 특별히 양육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자신이 그 지식을 연구하였고 구령의 참된 길을 다른 이들에게 일러줄 줄도 알았다. 그녀는 그 충성한 공적의 추수를 어디에서 거두었으며, 그 무르익은 열매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것은 바로 영적 어린이의 정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 지식의 풍부한 보배는 어디서 솟아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하느님께서 아이들에게 그 은밀한 것을 열어 보여주시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이 연설로 베네딕토 15세는 20세기 동안 리지외 성녀의 모습과 교리를 설명하는 일련의 교황의 개입을 시작했습니다.
3) 비오 11 세 (1922-1939)
비오 11세 교황과 리지외의 데레사와의 관계는 매우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바르샤바의 교황 대사였을 때, Achille Ratti 추기경은 『한 영혼의 이야기』를 테이블에 항상 올려놓았고, 밀라노 대주교였을 때도 똑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 책을 읽었습니다.
비오 11세는 항상 크고 부드러운 헌신을 키웠으며 그녀의 예배를 홍보했으며 그녀를 모든 교황 활동에 참여자로 간주했습니다. 데레사의 도시 리지외에 대한 그의 큰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는 많은 상황이 있었습니다. 리지외 가르멜 수녀원에는 이 사랑을 표현하는 많은 작은 표시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전보와 글로 교황은 수녀원에서 올라온 기도와 사목 활동에 대해 수녀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비오 11 세는 생애 말년에 리지외에서 자신이 갈망한 순례를 했다. 1937년에 그는 바이외와 리지외 주교인 Mons. F. Picaud 에게 그가 받은 치유에 대해 성녀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리지외에 가고 싶었다고 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 저는 우리 자신이 이 목적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서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 엄청난 양의 문제가 매일 교황의 식탁에 도착합니다. 예전과는 다릅니다. 이제 처리 수단, 철도, 전신, 라디오, 그들을 빨리 서둘러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로마에 교황이 있어야합니다.”
교황의 생각은 교황의 노령과 위태로운 건강을 염두에 두고 놀란 그의 협력자들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교황의 의지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몇 주 동안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모든 제한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외부 환경과 너무 늦은 나이에 계획을 실행에 대해서 조언했습니다. 비오 11세는 리지외 성녀 대성당이 ‘매우 크고 아름답고 신속하게 지어지기를’ 바랐습니다.
리지외에 그는 성녀의 시성을 위해 신성한 장식 예복을 보냈습니다. 매년 그는 리지외에 주님 봉헌 축일을 기념하여 축복받은 초를 주었습니다. 비오 11세는 ‘그의 의사’ 라고 불렀던 데레사에게 돌린 수많은 은총이 있었습니다. 그를 무덤으로 이끄는 고통의 침대 근처에서 그는 데레사의 유물을 원했고 종종 손을 그 위에 올려놓고 말했습니다. :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작은 성녀가 나와 함께 있습니다.” 데레사는 비오 11세가 교황 재임기간의 별이었습니다. 그것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 자신입니다. 1923년 2월 11일 그는 시복을 위한 기적을 승인 했습니다. : “하느님 시인과 함께 반복되는 이 위대한 영혼의 덕의 기적 :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 천국에서 지상으로 온 것. 작은 데레사는 행했다. 그녀는 또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 아기 예수의 작은 데레사는 기도를 통해 사도적 열정으로 모든 위대하고 영웅적인 일에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데레사의 시복을 위해 로마에 온 프랑스 순례자들에게, 비오 11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여기 당신들은 교황 재위 기간이 시작될 때 하느님의 손길이 빛나기를 원하신다고 부르고 자하는 이 별의 빛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행복한 체험을 하고 있는 징조이자 보호의 약속입니다. [...] 자연과 은총의 걸작.
다음은 비오 11세가 교황 재위 기간에 리지외의 별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빛입니다. 1923년 3월 6일 시복 법령이 공포되었습니다. 3월 19일에 비오 11 세는 “데레사는 하늘과 땅을 놀라게 하기 위해 천국에서 지상으로 온 진정한 사랑의 꽃이다. 어린 아이의 마음과 영혼을 지니셨음에도, 동시에 영웅적인 행동까지 사도적이다.”
그는 1923년 4월 29일에 그녀를 시복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시복 법령에서 데레사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영예와 영광 (Carmelitarum ordinis decus et ornamentum) 이라고 읽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부르심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데레사는 그녀의 이름으로 특정 종류의 성덕을 나타내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녀는 거의 영적 어린이라고 불리는 그 완전함에 큰 헌신을 기울였습니다.
1923년 5월 28일부터 30 일까지 그는 새로운 복자품을 받은 자를 기리기 위해 축하 행사를 주재하기 위해 교황 특사 A.Vico 추기경을 리지외에 보냈습니다. 이듬해 7월 25일은 기적의 원인의 지속에 대해 동의했습니다. 1925년 3월 19일에 그는 시성에 대한 기적을 승인했으며 다음 3월 29일에 그는 시성에 대한 최종회의인 Tuto 회의의 동의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삶의 불결함과 관능함이 너무나도 무례한 시대에, 여기에 순결한 환경에서 너무나 높이 솟아오르는 매혹적인 어린 아이 같은 단순함과 순결함을 전망한 복녀 아기 예수의 데레사가 여기에 있습니다.
1925년 5월 17일에 그는 그녀를 시성했고, 강론에서 그는 아기예수의 데레사는 제단의 영예로 올린 첫 번째 복녀이고, 시성한 첫 번째 성인임을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교황은 그의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데레사는 교리 교육에서 신앙의 진정한 교리, 준주성범에서 수덕적인 교리, 그리고 십자가의 성 요한의 책에서 신비주의를 많이 이끌어 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경은 그녀의 정신과 마음의 양식이었습니다. 진리의 영은 그녀에게 전달되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혜롭다는 사람들에게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드러내는 것을 그녀는 이해하였다. 사실 그녀는 천국에 대한 많은 풍부한 지식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확실한 구원의 길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빛과 은총에 대한 이처럼 풍부한 참여로부터, 데레사에서 너무나 큰 애덕의 불이 타오르고 결국 그녀를 태워버렸다 [...].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꾸준히 그녀를 본받아 아이들처럼 보이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그들은 천국에서 제외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론이 끝날 때 그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 “오 예수님, 우리는 당신께 수많은 작은 영혼들에 대한 당신의 신성한 시선을 낮추고 이 사랑 안에서 자신을 선택하도록 기도합니다.”
다음날 프랑스 순례단에게 그는 “작은 데레사는 그녀의 중재 기도의 힘으로 위대한 데레사가 되었다. 회랑 깊은 곳에서 데레사는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거룩함의 본보기, 그녀의 매력적인 모범으로 오늘날 세상을 매료시킵니다. 누구나 이 ”작은 길“에 들어가야합니다. 단순한의 길, 영적 어린이의 길, 마음의 모든 순수함과 단순함, 선과 진리와 성실에 대한 저항 할 수없는 사랑.”
1925 년 9월 말 일에 새 성인을 위한 엄숙한 경축 행사가 리지외에서 열렸습니다.
비오 11세 교황은 황금 장미를 축성하고 교황 특사인 A. Vico 추기경이 데레사의 손에 드렸습니다. 1925년 성년이 끝날 무렵, 비오 11세는 귀중한 사인과 함께 양피지에 그려진 작은 사진을 리지외 가르멜 수녀원에 보냈습니다. : “우리의 특별한 보호자(PROTECTRICIS NOSTRAE SINGULARIS) 아기예수의 성녀 데레사 중재로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들께 축복합니다.” (Per intercessionem S. Theresiae ab Infante Iesu PROTECTRICIS NOSTRAE SINGULARIS benedicat vos omnipotens et misericors Deus)
1927년 5월 17일, 비오 11 세는 서거 2년 후인 바티칸 정원에 프랑스 교황청 대사, G. Doulcet 및 여러 추기경과 주교, 가르멜 총 본부 및 맨발 가르멜 수도회 콜레지오 형제들을 초대한 가운데,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상을 축복했습니다. 사랑스러운 성녀는 바티칸을 경계하는 수호자로 배치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녁 산책에서 교황은 천상의 수호자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마음의 근심과 걱정을 그녀에게 털어 놓았습니다.
같은 해 1927년에 비오 11세는 리지외의 성녀에 대한 신뢰를 다시 한 번 증명했습니다. 그녀의 시복 직후에 그는 그녀를 가르멜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했습니다. 이제 그의 시선은 전 세계와 가톨릭 교회의 모든 선교지로 확장됩니다. 1927년 12월 14일에 많은 선교사 주교의 요청에 따라 아기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성 프란시스 하비에르와 함께 전 세계 모든 선교사 및 모든 가톨릭 선교의 수호자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법안은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에서 예언적 가치를 가정 할 것입니다.
1930년대에는 멕시코와 러시아에서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박해가 있었습니다. 1927년, 멕시코 가톨릭교회에 대한 유혈 박해 동안 교황은 그 나라의 주교들에게 당신 나라의 종교적 평화의 중재자인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신뢰하라고 권고했습니다. “멕시코에서 종교적 실천이 재건 될 때, 나는 당신 나라의 종교적 평화의 중재자인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에서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1928 년 2 월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쪼레 성당의 Colle Esquilino에 러시아의 미래 선교사 양성을 위한 Russicum 또는 센터의 첫 번째 돌이 놓였습니다. 센터는 우리 성녀의 특별한 보호 아래 배치되었습니다. 발족식 후에도 Russicum은 항상 로마 교황청의 아버지와 같은 관대함의 대상이었습니다.
1931년에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교황은 즉시 수호자 리지외 데레사 성녀께 호소합니다. “ 이제 우리는 나의 작은 성녀에게 기도해야합니다.” 그 순간들이 한계에 다 달았고, 다음 문제들이 생존과 관련되었을 때에,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과, 비오 11 세는 다시 성녀에게로 향했습니다. “내 작은 성녀여, 성모 축일을 위해 모든 것이 정상화가 되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사실 8 월 15일에 논쟁이 해결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이외와 리지외 주교에게 그는 1932년에 반복했습니다. “그녀의 겸손함 속에서 데레사가 ‘작은 데레사’라고 불리고 자하는 소망을 표현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는 성덕의 길을 따라감으로써 그녀가 자신을 위대한 성녀 중에 한분으로 만들었던 그러한 영웅적 태도로 이 길을 걸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비오 11세에 따르면 선교의 수호성인인 아기예수의 데레사는 교회 계층의 지시에 따라 평신도 사도직에서 그녀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벨기에의 젊은 가톨릭 신자들을 맞이한 비오 11 세는 선교의 수호성인인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이미지가 새겨진 메달을 각자에게 수여했습니다.
“또 다른 추억은 그녀의 성덕에 의해 추가되었으며, 그것은 선교의 수호성인인 아기 예수의 작은 데레사의 메달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선교와 선교 성소에 대한 벨기에의 모든 위대한 관대함을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선교 사도직은 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필요합니다.
1937년 4월 4일 비오 11 세는 오랜 병을 앓은 후 첫 번째 알현 중 하나에서 데레사의 로마 성지 순례 50주년 (1887-1937) 행사에 프랑스 순례단을 받았습니다. 데레사의 로마 순례를 떠올리며 비오 11 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 “ 네, 저는 성녀가 당신들을 따라 왔고, 그녀가 당신들과 함께 들어왔고, 그녀가 이 순간 당신들과 함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37년 7월 11일에 교황 특사인 E. Pacelli 추기경에게 순례를 갈망하는 비오 11세는 리지외의 새로운 대성당을 축복하며 라디오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 “ 우리를 위해 계속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얻기 위해, 무엇보다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사랑스러운 의지에 대한 완전하고 완벽한 일치, 단순함과 영적 어린이의 정신, 자아 포기 정신으로 당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가 하느님 정배의 마음에 그렇게 받아들여질 자격이 있습니다.
1937년 12월 15일 새로운 추기경들에게 추기경 비레타를 부과하면서 베네치아 총 대주교인 가르멜 수도회 소속 A.G. Piazza 추기경을 새 추기경 중 첫 번째 추기경으로 언급하면서 진심 어린 감사의 말과 함께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에 생각으로 돌아왔습니다. : “베니스의 총 대주교인 A.G. Piazza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성소와 가르멜 수도복을 입은 가르멜 수도자의 기억을 가지고 전 세계에서 경배하는 성녀를 기억합니다. 그녀는 타당하고 분명하게 최고 교황에게 도움을 주실 것이며, 여전히 그를 도울 의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마침내 그가 사망 한 지 몇 달 후인 1938년 9 월에 유럽에 괴로움의 구름이 드리워졌습니다. 전쟁이 임박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고통 받고 지친 일꾼’(그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은 세상에 감동적인 메시지를 냈고, 참으로 그는 전쟁의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목숨을 바쳤다.
‘그의 별’이 지평선을 비추고 성녀의 사망 기념일인 9월 30일에 위험이 멈췄습니다. 비오 11세는 “세계 평화의 날짜와의 일치에 만족하며 효과적인 개입에 대해 데레사에게 감사를 표하며”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이 암시들은 비오 11세가 본인 교황 재위기간의 별인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얼마나 선호했는지, 그리고 그녀의 영향력이 보편 교회에 유익하도록 얼마나 많이 전해졌는지를 충분히 보여줍니다.
4. 비오 12 세 (1939-1958)
그 당시 교황청 국무 원장으로서 미래의 비오 12세 교황인 Eugenio Pacelli 추기경은 리지외와 성녀와 특별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베를린에서 교황 대사였을 때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1929년에 그는 리지외 가르멜 수녀원에서 “한 영혼의 이야기” 독일어 번역 초판을 받은 것에 대해 감사 편지를 보냈습니다.
비오 11세 교황의 국무 원장으로서 그는 리지외의 특정 기능을 관장하기 위해 교황 옆에서 여러 번 교황 사절이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1934년 10월 10일 ~14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세계 성체 대회에서 교황 사절로 파견하여 작은 성녀의 유해를 가져갔으며, 그로부터 은총을 기대했습니다. 1935년 4월에 그는 구원의 성년의 폐막 3일을 위해 루르드에 교황 사절로 파견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감사의 생각을 리지외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1938년 5월 25일 ~ 3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세계 성체 대회 때에도 교황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는 1937년 7월 11 일에 성녀 성당의 축복을 위해 공사 기간 동안 리지외 가르멜 수녀원 내부를 방문했습니다. 비오 11세는 그에게 리지외로부터 장미 3송이를 가져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붉은 장미; 그의 건강의 장미 차 ; 거룩한 삶과 사제에 대한 열심의 흰 장미.
로마 교황으로 선출 된 지 며칠 후 신임 교황 비오 12 세는 리지외 가르멜 수녀원에게 자신의 선출을 계기로 좋은 소망을 표한 것에 감사의 전보를 보냈습니다. 그는 아녜스 수녀와 셀리나 수녀와 많은 관계를 가졌고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파첼리 추기경은 데레사의 교리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반복해서 소개했습니다. 1937년 7월 11일, 비오 11세 교황 옆에서 교황 사절로 파첼리 추기경은 리지외 데레사 대성당을 축복했습니다. 긴 연설에서 교황 사절 추기경은 “작은 길”에 대한 심오한 묵상을 펼쳤다. : “데레사는 작은 길을 발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학문은 부분적으로 습득되고 부분적으로 주입되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자신을 위해 간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저의 임무는 선하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게하고 작은 길을 주는 것입니다. 수녀원 기초를 둔 작은 가르멜 수녀는 그 학문을 자랑스러워하는 우리 시대까지 강의를 합니다.
그녀에게는 사명과 교리가 있습니다. 그녀의 교리는 겸손과 단순함입니다. 그것은 영적 어린이 또는 작은 길의 두 단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복음은 20 세기가 지난 지금 “하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의 것이다”라고 가르치는 곳은 아직 없습니다. 이를 위해 데레사는 영혼들을 정복하고 계몽하게 합니다. 비오 11세 교황이 말하기를 “데레사는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성덕의 본보기, 그녀의 매력적인 모범으로 오늘날 세상을 매료시킵니다.”
사실 하느님 학문을 습득한 후, 그녀는 또한 보쉬에(Bossuet)가 “사랑에 전심하지 않는 모든 의식은 불행”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 그분의 사랑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메시지와 사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 “그녀가 죽기 직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 사명이 곧 시작될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 결과와 함께 이 사명은 모든 인간의 말로는 그 폭을 설명 할 수 없습니다 [...]. 성인이 된이 작은 가르멜 수녀는 반세기도 안 되는 시간에 수많은 제자들의 무리들을 얻었습니다. 율법의 가르침들은 그녀의 학교에서 아이들이었다. 우리의 사랑하는 성녀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제 사명은 곧 시작될 것 같습니다. 내 사명은 내 작은 길을 영혼들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1938년 3월 23일 로마에 있는 프랑스 신학교에서 Pacelli 추기경은 무릎에 복음서를 얹고 앉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상을 축복했습니다. 동상은 성녀의 언니인 예수의 아녜스 원장 수녀가 기증했습니다. 받침대에는 TERESIA DOCET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추기경은 가르멜 성녀가 사제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형제들이 내 자리에서 일하고 어린 아이인 나는 왕좌 옆에 서 있습니다. 나는 투쟁으로써 그들을 사랑한다. 데레사는 사제직을 투쟁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투쟁에서 그녀는 곧 전심으로 몸을 바칠 때에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한편, 당신은 영적 무기를 준비해야합니다. 이것은 연구와 개인 성화라는 두 단어로 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신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성 세실리아 같은 거룩한 복음을 그녀의 수도복과 마음 깊은 곳에 담았을 뿐만 아니라, 길고 깊은 정신 집중으로 이 책을 열어 본문들을 읽고 묵상합니다.
사제직의 위대하고 무거운 책임에 직면한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 “이 이상의 숭고함이 당신을 두렵게 하고 내일 당신의 어깨를 무겁게하고 인간의 힘보다 우월해 보일 책임의 무게를 다시 한번 이 신학교의 테라스로 오십시오. 공부하는 동안 오십시오. 나중에 돌아와서 그녀의 관상적인 태도로 리지외 동정녀를 조용히 묵상하십시오. 외모가 작고 약한 그녀도 수천 명의 영혼을 구한 장미 꽃다발로 가득 찬 손에 들고 다니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녀가 열정의 가장 큰 비결로 당신들을 가르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열정을 가지고 다른 모든 사람, 전 인류를 세상 끝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1938년 리지외 가르멜 창립 100 주년을 기념했습니다. 비오 11세의 이름으로 국무 원장 Pacelli 추기경은 F. Picaud 주교에게 은혜로운 행사에 대한 축복과 축하 편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하느님의 단순함과 순수함과 사랑에 사로잡힌 불같은 영혼이 이 성벽을 지나가면서 가르멜 전체를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이 순결한 육체의 귀중한 그릇이 부서지는 동안 온 집안을 그 향기로 가득 채웠습니다.”
비오 12 세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에 대한 애착을 증언하는 많은 사실과 말이있었습니다. 1939년 6월 19일, 비알라르의 성녀 에밀리아(Aemilia)의 시복 다음 날, 교황의 첫 달에 한 수도 단체에게 비오 12 세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 “ 전임자 비오 11세 교황은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리지외 가르멜 수녀를 선포했습니다. : 가장 거대한 별로서 그녀의 별을 천상에서 안내하는 데레사 마르탱 손가락이 가르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26일 교황 근위병을 알현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당신들에게 사랑스러운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를 모델로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가르멜의 작은 성찬에서, 예수님의 가장 거룩함 몸을 보관하고 있는 성합과 성작들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고 얼룩 없이 보존하기 위해 사랑 가득히 관리를 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도 몸을 보호하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명예를 지키는 여러분의 칭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의 순결과 영혼의 고양(高揚)을 항상 보존하고 증가시킬 것입니다....”
1940년 10 월 6 일, 성 다마소 안뜰에 이탈리아 여성 가톨릭 활동에서 많은 젊은이들을 받아들인 비오 12 세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 “당신들의 모습에서 사랑스러운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생각 나게합니다. 그녀는 어린 데레사 마르탱은 여전히 ”작은 박사“ 교리 교사로서 부름을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1944년 5월 3일 : 비오 12세는 프랑스의 두 번째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데레사의 사후 50 주년 (1897-1947)을 맞아 비오 12 세는 1946년 12월 30일 아녜스 수녀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 “공포되는 희년은 영적 쇄신의 원천으로 부족할 수 없습니다. 진리와 평화를 갈망하는 지친 세상에 영적 어린이의 정신과 단순함을 바탕으로 한 삶과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믿음과 사랑의 복음적 덕목 만이 이 황폐한 시대를 다시 꽃피우게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1947년 8월 7일 교황은 바이외와 리지외 주교인 F. Picaud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영적 어린이의 길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연구를 제안했습니다. 다음은 교구 문서의 일부 내용입니다. : “많은 성인들 이후 그녀가 우리에게 상기 시키러 온 영적 어린이의 길은 구원자와 그의 사도들의 말씀에서 권장하는 것입니다 (마 18 : 3) [...].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젊은 수련자의 순결한 영혼이 첫 단계에서만 그들을 인도 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분별함이 많이 필요하고 중대한 책임이 있는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 자신이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 심지어 그분이 선택한 사도들과 같이 가장 높은 책임, 영혼의 책임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이 방법을 추천했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
이 영적 어린이의 길은 매우 숭고하지만, 비록 그가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모든 자녀에게 적합한 길입니다 [...]. 우리가 그것을 잘 이해한다면 매우 순수한 지향으로 하느님께 곧바로 가는 영혼의 탁월한 단순함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은총를 구하게 하는 겸손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되풀이합니다. 영적 어린이의 길은 우리가 내적 성찰과 기도를 방해하고 성성과 초자연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는 완전히 자연스럽고 과도한 “활동주의”의 손상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1952년 4월 28일, 많은 선교 협력자들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비오 12 세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 “모든 선교의 수호자인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우리의 일상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을 매우 효과적인 공로로써 사도적 희생 제물을 봉헌하도록 가르칩니다.”
1954년 7월 11일 비오 12 세는 리지외 대성당 봉헌을 위한 라디오 메시지에서 영적 어린이의 교리에 대한 주제를 심화 시켰습니다. 1937년 7월 1일에 비오 11 세의 이름으로 자신이 성녀의 대성당을 축복했을 때 감정적으로 회상 한 후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하느님의 섭리가 그녀를 경배하는 비범한 확산을 허용했다면, 그것은 그녀가 놀라운 영적 통찰력의 메시지, 겸손, 신뢰 및 사랑에 대한 독특한 증언을 전 세계에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
복음이 재발견 된 것은 복음 그 자체이며 복음의 핵심이지만 참으로 매력적이고 신선합니다! [...]. 존경할만한 그리스도교의 딸인 그녀는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주님의 마음에 숨겨져있는 관용과 연민의 보물을 배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에게 팔을 계속 뻗는 아버지 이십니다. 이 제스처에 응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쉬지 않고 그분을 향해서 우리의 엄청난 고통을 울부짖지 않습니까? 데레사가 완전한 이들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이들을 초대 할 때 우리는 데레사의 말을 신뢰해야합니다. 죄 많은 피조물의 근본적인 약점과 영적 가난을 하느님 앞에서 주장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의 데레사가 위대한 교황 비오 12 세의 영혼과 교리에 남긴 흔적이 많이 있습니다.
5. 요한 23 세 (1958-1963)
안젤로 주세페 론 칼리 (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와 리지외와 관계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Roncalli 대주교는 진정한 리지외의 순례자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그는 1930 년 9 월에 처음으로 그곳에 갔는데, 불가리아 교황대사를 맡고 있었을 때 그는 방문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교황대사였을 때 파리에 세 번은 비밀리에, 두 번은 공식 초청을 받아서 갔는데, 항상 갈망했고, 부분적으로 자극을 받았다.
그는 데레사를 “작고 큰 성녀, 프랑스에서 나의 사명 화해의 별” 이라고 불렀다. 그는 아녜스 수녀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나는 종종 교황 대사 개인 성당에 있는 대리석 이미지를 봅니다. 나는 거룩한 성 교회와 프랑스의 봉사에서 나의 사명을 특징짓는 화해와 평화의 직무에 대한 나의 어려움과 노력을 그녀에게 맡깁니다.”
리지외 두 번째 순례는 1945년 9월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1946년 2 월 24 일 성녀의 언니인 성면의 즈느비에브 수녀의 금경축을 위한 것이었다. 네 번째 순례는 1948년 7월이었다. 그리고 1951년 8월 15일에 다섯 번째는 성모 승천 대축일
처녀의 승천 선포를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교황으로 선출된 A. G. Roncalli는 리지외에 그를 위해 작성된 기도들에 대해 기억과 감사의 메시지를 여러 번 보냈습니다. 그는 1959 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에 리지외에 축성된 봉헌초를 보냈다. 1960년 10월 16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에 대해 일반 알현에서 연설한 후 그는 구어체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 “스페인의 위대한 성녀와 함께 우리와 훨씬 더 가까운 시대에 살았던 가르멜 수도회에 소속된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교황 비오 11 세는 하느님의 교회에서 선택한 이 새로운 꽃을 먼저 시복하신 다음 성인들의 칭호를 받도록 시성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는 ‘작은 이’라고 불립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생애가 매우 짧았고 중요하고 뛰어난 외적 훌륭한 행위에 부르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리지외에 있는 그녀의 성지는 리지 외에 대한 계속적인 순례의 목적지이기도합니다. 전 세계, 특히 선교지에서 그녀는 항상 그녀의 기도와 매일 주님께 덕을 바칠 때 염두에 두었습니다. [...]. 아빌라의 데레사는 그리스도교에 성화(聖化)의 살아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빛나는 방식으로 증명 한 사람이었습니다. 리지외의 데레사는 겸손, 단순함, 끊임없는 극기, 하느님 사업에 협력하고 셀 수없이 많은 신자들의 선익을 위해 은혜를 베푼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황은 적절한 비유를 주기를 원하면서 몇 번이나 회상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 “콘스탄티노플 항구에서 여러 번 관찰할 기회가 있어서 그것을 회상하였다. 거대한 화물선이 도착했지만 해저의 특성상 부두에 접근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대형 선박과 나란히 선착장 근처에 보트 하나가 나아갔고, 그것은 처음에는 불필요해 보일 수 있었으며, 그 대신 큰 해안으로 물품을 운송하는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에 매우 귀중했습니다.”
1959년 4월 29일 맨발 가르멜 수도회 총회에서 언급한 다음 말을 기억합니다. :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건네 준 횃불을 들고, 그것을 먹이고 여러분의 성소에 대한 거룩한 열심으로 그것을 퍼뜨리십시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전임자 비오 11 세 가 1927년에 선교의 공동 수호자로 선언한 그녀의 본보기의 열렬한 열정으로 위에서 빛을 발합니다. 그것은 영혼 구원을 위해 침묵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거의 초인적인 힘을 가르멜 이상에서 끌어낼 수 있었던 열렬한 선교사적 열정으로 당신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길 바랍니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초상화를 그에게 봉헌한 맨발 가르멜 수도회 성모의 프란치스코 신부에게 요한 23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위대한 성녀 데레사, 나는 그녀를 많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작은 이 : 그녀는 우리를 해안으로 인도합니다[...]. 그녀에게 꼭 필요한 교리가 설교되어야한다.”
공의회가 시작되기 몇 달 전에 관상 수녀들에게 보낸 권고에서 그들의 기도 도움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썼습니다. : “회랑의 침묵 속에 사는 사람들, 특히 그곳에서 교회는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들은 모세처럼 팔을 들고 기도하며 이 간절한 태도에서 승리를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직에 대한 관상 생활을 하는 수녀들의 공헌은 매우 중요하여, 비오 11세는 선교의 공동 후원자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로 활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가 아니라 가르멜의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원했습니다.
요한 23세는 그의 짧은 교황 재위 기간에도 리지외 성녀를 잊지 않았습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