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 이한(李翰) 시조 이한(李翰)은 덕망이 높고 문장이 탁월하여 신라 문성왕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그후 대대로 신라시대에 벼슬을 해왔다. 18세손되는 이안사(李安社)는 대대로 전주에 살아온 호족이었는데 새로 부임한 지주의 탐학을 규탄하자 지주가 군사를 휘둘러 보복하려하여 그를 피해 강원도 삼척으로 피했다가 다시 함경도를 거처 원나라 간동으로가 그곳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지냈고 증손자 되는 이자춘(李子春)이 고려시대에 공을 세워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다. 이자춘의 아들, 즉 시조의 22세손 이성계(李成桂)에 이르러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 배극렴(裵克廉)등 52명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 조선왕조를 창건, 전주이씨의 종시조가 되었다.
인물
전주이씨는 조선 500년을 이끌어온 왕가이므로 가문의 번성기를 따로 기술할 필요가 없다. 전주이씨의 1백여 파중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密城君. 침=세종의 아들)파로써 6명의 정승과 3대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했으며,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정종의 아들)파가 부자 대제학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領議政)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덕천군파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 정승 1명과 숱한 문신과 무신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등이 빼어나다.
전주이씨는 오리정승(梧里政丞)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인조때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흥선대원군(興宣大元君) 이하응,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장군등 역사의 한획을 그었던 거목들을 배출하였다. 1585년(선조 18년) 이수광은 별시문과(別詩文科)에 급제, 1627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여러차례 사신으로 명나라에 왕래, 당시 명나라에 와있던 이탈리아 신부에게서 "천주실의(天主實義)" "중우론(重友論)"을 얻어와 1614년(광해군 6년) "지봉유설(芝峰類說)"을 간행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소개함으로써 실학발전의 선구자가 되었고 시문에도 능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본관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 전주(全州)는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成)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렸다가, 555년(위덕왕 2)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900년(효공왕 4)에 견훤(甄萱)이 무주(武州: 光州)로부터 이곳으로 후백제의 도읍을 옮겨 백제 부흥의 노력을 하였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후백제가 망하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었다가 940년에 다시 전주로 회복되었다. 983년(성종 2)에 12목 가운데의 하나인 전주목이 설치되었으며, 993년에 승화(承化)로 개칭하고 절도안무사(節度安撫使)를 두었다. 995년에는 강남도(江南道) 관하의 전주순의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안남대도호부로 승격되고, 1022년에 전주목으로 개칭되어 1곳의 속군과 11곳의 속현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전주로 강등되고, 1355년(공민왕 4)에는 부곡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에 완산부(完山府)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전주이씨의 본향지라 하여 완산부유수(完山府留守)로 승격되었으며, 1403년(태종 3)에 전주부(全州府)로 개칭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주부 전주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북도 전주군으로 개편된 이래 1935년 전주면이 부로 승격하여 독립하고 1949년 전주시로 개칭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주이씨는 1985년에는 총 558,019가구 2,379,537명, 2000년에는 총 808,511가구 2,609,890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첫댓글 고향길 가고오는 길이 많이 정체가 된다 합니다.
안전운행 하시고 차분한 마음으로 무사무탈히 잘 다녀 오시길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