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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성 지 혜
가위 바위 보 놀이
유년의 놀이 중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가위 바위 보>였다.
무슨 놀이를 겨루거나 가름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우리들 중에 그 놀이를 가장 잘하는 게 성우였다. 성우는 우리반 반장이고 나는 부반장이었다. 성우는 그 놀이의 대장이었지만 나는 꼴찌라 울상을 지었다.
저 봐. 수정이 야코죽은 모습을.
조무래기들이 놀리면 성우는 나를 다독였다.
그까짓 게 뭐라고. 정신 차려.
나는 곧바로 화답했다.
OK, 그러고말고.
손만 잡지 않으면
고교 졸업 무렵이었다. 우리학교 교지 편집자들이 교지에 실을 앙케트 문항을 교사들에게 돌렸다.
남녀 연애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리학교는 남녀 공학이라 그 질문은 재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손만 잡지 않으면.
정호영 선생의 해답이 우리들에게 인기 짱으로 떠올랐다. 연애는 인정하되 육체의 접속은 삼가란 은유법이라며.
그분은 국어교사이며 수필가였다. 알폰스 도데의 <별>을 낭독하면 우리들은 그 입담에 취해 마치 주인공인 목동과 스테파네트가 된 양 황홀경에 젖었다. 우리들의 졸업식이 끝나자, 정 선생은 제자들을 밀림다방으로 초청했다. 그 당시 진주시의 가장 번화가인 중앙로터리 옆이었다. 그 다방 마담은 긴 파머머리를 풀풀 날리며 몬로 워커를 흉내 낸 팔등신 미인이었다.
와인을 가져 오시오.
정 선생의 주문대로 마담은 와인병을 가져왔다. 남녀 10명이 앉을 원탁 위엔 10개의 잔이 놓였다. 마담은 나비 흉내를 내며 튤립 모양의 와인글라스에 5분의 1 분량을 잔에 따랐다. 용량이 하나같이 비슷하며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재주가 기똥차군.
정 선생의 칭찬에 마담이 입술을 쫑긋거렸다.
기교 아닝교.
우리들은 단숨에 그 와인을 들이키곤 불평을 쏟았다.
더 따라 주세요.
이미 집에서 과일주나 모과주, 포도주도 야금야금 마신 경험자들이라 성에 차지 않아서였다. 이젠 사회인이니 더 마셔도 된다던 유혹이 꿈틀거렸다.
안 돼. 와인은 혀끝으로 음미하는 거란다. 정 더 마시고 싶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님을 만나면 한 잔을 반잔씩 나눠 마셔라.
살아가면서 나는 정 선생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제자들을 댁으로 초청해 와인을 대접할 만했다. 그런데도 밀림다방으로 가서 몬로를 닮은 마담에게 와인을 따르라고 한 건, 앞으로 세상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자신을 지키란 뜻임을. 그리고 진정한 님과 앞날을 약속할 때 그의 반쪽으로 거듭나야함을.
아주버니 + 아씨 = 홀레붙기
우리 동네 북쪽의 언덕이 바남투였다. 예전엔 밤나무 숲이며 활쏘기 대회가 열렸다고 그리 불리었다. 농번기 때는 동민들의 타작마당으로 이용되었다. 바남투 언덕 서쪽은 국민학교, 북쪽은 과수원이었다. 아이들은 국민학교의 넓은 운동장보다도 바남투 언덕의 좁은 공지에서 잘도 뛰놀았다. 널리 알려진 곳보다도 덜 알려진 곳을 더 선호한 조무래기들의 얄궂은 심보랄지. 과수원이 가까워 철따라 과일을 서리하던 재미도 솔솔한 탓이었다.
바남투 언덕엔 400여 년 나이 먹은 두 그루의 소나무가 우뚝 서서 아래를 내려다 봤다. 우람하고 잎이 풍성한 소나무는 아주버니, 늘씬하면서도 자태 고운 소나무는 아씨라 불리었다.
우리 고장을 대곡면이라 부른 건 골짜기가 넓고도 수려해서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보호수들이 짱짱해 대곡을 대곡답게 하던 원천이었다. 설매 느티나무와 굴참나무는 7백여 년의 나이테를 지닌 좋은 예였다. 그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푸르디푸르게 그늘을 드리워 그곳 동민들의 안식처였다. 상촌 느티나무는 5백여 년, 월암 느티나무도 4백여 년, 용암 느티나무도 3백여 년의 나이를 지녔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후에 조성된 가정의 참나무 숲은 야산을 메웠다.
우리 동네를 봉평이라 부름은 지세가 봉이 누운 형국이라 그리 불리었다. 위뜸은 구루골인데 거북이가 기어가는 모양새라며, 김해 허씨 집성촌이었다. 아래뜸은 닥밭골인데 닥나무가 많이 자란, 창녕성씨 집성촌이었다. 모시골은 예전에 누에를 치고 길쌈하던, 바남투 위의 산두봉 아래인데 타성들이 사는 곳이었다.
바남투는 닥밭골에 속했다. 나는 그것마저도 자랑스러웠다. 그 언덕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다만 타성이며 인근 동네 송곡에 살던 성우 외는. 나는 성우가 마냥 좋았다.이웃들이 성우를 귀골이라 공부도 잘한다며 칭송하면 나도 모르게 우쭐해졌다.
우리집은 닥밭골에서 중앙에 위치한 큰 기와집이었다. 기와집이 20 채나 되는 중에서도 단연 백미에 속했다. 안채, 사랑채, 고방, 나락실, 헛간, 우릿간 등 천석 살림의 본가라 윤기가 흘렀다. 따라서 아버지의 입김이 봉평을 좌우할 정도로 드높았다. 아버지는 성격이 온유하며 4살 많은 엄마와의 사이에 금슬도 좋았다. 엄마는 40세에 외아들을 낳아 금지옥엽 기르며 나는 그저 그런 딸로 키웠다. 그래도 아버지의 극진한 보살핌과 아울러 친척들도 나를 귀히 대접했다.
길손들도 곧잘 바남투의 소나무를 우러렀다.
창녕성씨 집성촌에 부부 소나무가 푸르고도 푸른 건 윗대 어른 근보 선생의 충절이 새파랗게 살았음을 증명한 거라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그 시조를 읊조렸다.
아이들도 바남투에서 그 연극 놀이하며 길손들의 흉내를 냈다.
봉평의 부부 소나무가 오래도록 푸르고도 청청한 건 흘레붙기 잘해서란 우스갯소리도 나돌았다. 추석이나 단오를 맞이하면 동민들은 아주버니 소나무 가지에 그네를 매달아 그네타기 대회를 열었다. 그런 날엔 남정네와 아녀자의 로맨스가 심심찮게 나돌았다. 아주버니와 아씨 부부의 합궁 영험이 무궁하다란 객담이었다. 덩달아 아주버니+아씨=흘레붙기가, 누구+누구=합궁으로 이어져 호사가들의 입담에도 올랐다.
소나무는 나이에 따라 200-300년 된 건 노송, 300년-500년은 고송古松, 500년 넘은 건 신송神松이라 불린다. 닥밭골 동민들은 그 사실을 일깨우며 가락을 뽑았다.
바남투 언덕의 소나무랑 더불어 우리도 일백 세를 누리며 신송이 되고저.
사모 리자
우리들이 바남투 언덕으로 자주 오른 건, 그곳 남쪽이 예배당이라 사모가 먹거리를 자주 아이들에게 나눠 줘서일 게다.
봉평예배당의 김청강 담임목사는 미군부대에 근무한 탓으로 외국선교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들은 밀크, 비스킷, 햄, 쏘시지, 바둑껌 등 먹거리와 동화책들을 가져와 교회학교를 드나든 우리들을 즐겁게 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딱 마주치며 오케이라고 흥겨워 하던 게 참으로 보기 좋았다. 조무래기들은 그들을 향해 코쟁이, 양코뱅이 라며 히죽거리다가도, 그들이 OK라며 오른손 엄지랑 검지를 부싯돌 켜는 양 딱 마주칠 때의 모습을 곧잘 흉내 냈다. 그러면 우리들이 야코죽은 기를 되살린 활력소였다.
성우와 나도 그런 흉내를 내다보면 용기가 샘솟고 가슴이 마냥 뛰놀았다. 무어든지 하고픈 용기가 샘솟았다.
헵시바 사모는 둥그스름한 얼굴에 눈썹은 가느다랗고 눈동자는 폭 기어들었다. 암갈색 머리를 어깨까지 드리워 소녀티를 풍겼다. 삼십 대 중반인데도 김 목사와의 사이에 아이가 없어 더욱 그런 인상을 풍겼다. 입술은 얇으면서도 언제나 거의 미소를 머금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리 보면 미소인 것 같고 저리 보면 냉소인 것 같아 속을 종잡을 수 없다고 성도들이 수군거렸다. 그래도 솜씨가 맵고도 바지런했다. 구제품 옷들을 교회학교 아이들 치수에 맞게 고쳐 입혔다.
양놈들의 노랑내가 얼마나 고약한지.
어른들이 절레절레 고개 흔든 걸 상쇄하기 위해서인지, 사모는 구제품 옷들을 냇가로 가져가 며칠을 우려내 말렸다. 추수기엔 벼이삭을 주워 윤에게 주었다. 모시골에 사는, 어릴 때 부모를 여윈 윤은 조모 슬하에서 자라 헵시바 사모를 친엄마처럼 따랐다.
성우와 나, 윤이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허순유 담임선생은 구루골 출신으로 국전에 입선해 화가라 불리었다. 더불어 우리학교 환경미화의 총책임자였다. 이름에 遺가 붙는 건, 유복자라 그 액을 면하기 위해서라고 이웃들이 숙덕였다. 허 선생은 다빈치 작 <모나리자> 그림을 우리학교 복도 가장자리에 붙였다.
세계 제일 미녀인기라.
그러고선 흥에 겨워 양손으로 가락 젓기 했다.
우리들은 모나리자를 미녀라고 여겨지진 않았다.
무서바라. 상희 엉가가 살아났나 봐.
누군가의 외침에 우리들은 가슴이 옥죄었다.
상희 엉가는 6.25 전쟁 때 그 그림 아래 지하에 피신한 지리산 빨치산의 연인이었다. 국군의 총에 맞아 숨진 월암 동네 처녀였다. 대낮에도 그곳을 지나치면 몸이 움츠러들었는데, 총살당한 빨치산의 연인을 닮았다는 덴 샛노래질 수밖에 없었다.
그 누나를 안 닮았다카이.
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누굴 닮았는데?
성우가 의문을 토했다.
헤헤헵시바 사모잖아.
그러고 보니 나도 과연 그렇다고 여겼다. 얼굴형과 머리형이 거의 비슷했다.
사모 이름이 왜 헤헤헵시바인 줄 모르지?
응, 그래.
성우도 나도 쉽게 수긍했다.
외국 이름이라도 마리아, 안나는 부르기 쉬운 이름인데.
윤은 목에 힘을 주며 사모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했다.
헵시바는 하나님의 짝꿍이라나.
하나님이 결혼 하셨다?
성우와 나의 의문은 며칠 지나서 풀렸다.
헵시바는 성경에 나온 이름인데, 하나님이 귀히 여긴 여인 이름이란다.
김 목사의 사역을 돕는 집사의 설명이었다.
허 선생은 미남인데다 총각이었다. 우리 동네와 이웃 동네 처녀들이 가슴을 설레도 허 선생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자주 담임선생의 심부름으로 사모댁을 방문했다. 예배당 옆이 사모댁이라 연극놀이 장소여서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사모는 내가 건넨 편지를 읽고는 얼굴이 파리해졌다. 나는 사랑 고백 편지임을 눈치 챘다.
그날의 심부름은 편지가 아니라 꽤나 무거운 스케치북이었다. 나는 그걸 들고 오르막길을 오르다 발이 미끄러져 짐을 떨어뜨려 속에 것이 드러났다. 사모가 선교사의 딸로 태어나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친 사역지인 홍콩에서 영어 통역으로 봉사하던 장면들이 그림으로 그려졌다. 수녀가 되려다 김 목사의 구혼으로 사모의 길을 걷게 되었다던 건 성도들도 알았다. 영어 회화를 잘해 외국선교사들이 봉평예배당에 오면 통역사가 되었다.
모나리자 그림 앞에서 성우와 나, 윤이 불안에 휩싸였다.
멀쩡한데 왜 수녀가 되려 했을까?
성우의 얼굴이 얼룩졌다.
행여 문둥이가 될까 봐 숨고 싶었을 테지.
윤의 근심어린 얼굴을 보고 내가 선수 쳤다.
과연 그래. 눈썹도 피부도 희멀건 하잖아.
우리 저 그림에 눈썹을 그리는 게 어때? 사모랑 많이도 닮았잖아. 그러면 그 기가 살아 사모의 눈썹도 까매지게.
성우의 부추김에 나도 윤도 덩달아 손뼉 쳤다.
주일 오후 해질녘이었다. 우리 셋 외엔 아무도 없었다. 우리들은 책상을 세우고 그 위에 올라 성우가 먼저, 윤, 내가 뒤이어 검정 매직으로 눈썹을 그렸다. 그 매직은 내가 선교사에게 선물 받은 거였다. 엄마가 교회의 중요한 날이면 사모를 돕기도 하고 먹거리를 가져가서, 나는 곧잘 선교사들에게 필통, 색연필, 크레용을 선물 받았다.
이튿날, 모나리자 그림으로 우리학교에선 소동이 일었다. 모나리자 그림 눈썹이 봉우리처럼 오른쪽 눈썹 셋, 왼쪽 눈썹 셋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의 심미안과 조막손이 실제 그림보다 적은 게 탈이라면 탈이었다. 범인이 누구인진 곧 밝혀졌다. 미제 검정 매직을 지닌 자는 나뿐이었다. 우리 셋은 교무실 복도에서 1시간 동안 꿇어앉아 양손 든 벌을 받았다.
허 선생의 연정도 오래 가지 못했다. 사모가 냉정스레 대하자, 술에 취한 허 선생이 사모댁을 찾아가, 네년이 뭔데, 악다구니를 쏟았다. 그 사건이 널리 알려져 다른 학교로 전근 가서였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주일 예배시간이었다. 김 목사는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의 제목으로 설교했다. 성경 이사야 49장 16절이었다.
엄마 손은 약손입니다. 아픈 자식에게 이마에 손을 얹으면 낫습니다. 피붙이가 아프면 엄마도 아프기 마련입니다. 자녀의 아픔을 당신이 거둬들이므로 그 간절한 기원이 의사의 손보다도 더한 값어치를 지닌 게지요.
엄마가 국과 찌개를 끓이면 새끼손가락으로 온도를 가늠하고, 간을 맞추면 눈물만큼 짠 음식이 가장 맛있답디다. 그러므로 맛을 내기 위해 눈물을 삼키며 눈물의 간을 한 엄마 애정이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사랑의 둥지를 트는데 기여하나 봅니다.
이웃을 만나면 우린 서로 악수를 나눕니다.
오늘도 참 좋은 날이군요.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서로 화답하며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따스함이 사랑의 공동체를 일군 활력소입니다.
우리들은 다섯 손가락을 지녔습니다.
엄지는 가장 굵어 형 노릇 하지요. 우리들이 제일임을 내세울 때도 그렇습니다. 제일은 최고를 뜻하고 최고를 최고답게 한 건 도장보다 더 확실한 지문을 지녀서일 겝니다. 개개인을 나타낼 때 그만한 보증수표는 없지요. 주민등록증과 여권에도 지문이 찍힙니다. 이 세상 하고많은 인구의 지문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건 창조주의 오묘한 섭리가 헤아릴 수 없음을 나타낸 거랍니다.
검지는 무얼 가리킬 때 사용되지요. 중지와 나란히 치켜세우면 V가 됩니다. 세계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 처칠 수상의 빅토리vicory는 황금보다 더 큰 효과을 지녀 영국 경제를 일으킨 원동력이었습니다. 세계인들이 즐겨 사용한 승리의 지침이 되었고요.
약지는 무얼 집을 때, 새끼손가락은 코딱지 떼 내는 구실도 합니다. 언약의 증표로 사용 되기도 하지요. 우리 내기 하자며 곧잘 새끼손가락으로 상대방의 것과 고리 걸기 합니다.
우리들은 오른손뿐만 아니라 왼손도 지녔습니다. 양손을 지녔다는 건 세상 모두를 지녔다는 뜻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우리의 인체 중에서 양손이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처럼,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게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서 우리들을 돌보십니다.
하나님이 저를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셨는데, 전들 가만히 손잴 순 없지요. 저도 하나님을 저의 손바닥에 새겼습니다.
김 목사는 양손을 펼쳐 보였다. 그 양손엔 예수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성우와 나는 틈만 나면 바남투의 소나무 아래서 지냈다. 그 아래 그늘진 곳엔 의자가 놓였다. 우리는 전날에 치른 시험지를 번갈아 훑어본다든지 집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화제에 올렸다. 우리는 시험을 치르면 전교에서 1,2등을 다툰 사이라 서로 상대방의 시험지에 관심이 많았다. 성우도 나도 서로 자신이 2등을 해도 좋다고 여겼다. 그런 양보의 미덕은 둘 사이의 유대감을 더욱 북돋웠다.
소나무 둘레를 돌며 성우가 내게 속삭였다.
우리도 담임목사님처럼 손바닥에 무얼 새기자.
응, 그러자구나.
이튿날 우리는 양손을 펼쳐보였다. 성우의 양손바닥엔 나의 자화상, 나의 양손바닥엔 성우의 자화상이 새겨졌다.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양손을 치켜들고 서로 손뼉을 쳤다.
성우의 출생지는 송곡이다. 바남투에서 닥밭골을 거쳐 남쪽들로 걸어 장고개를 넘으면 송곡인데, 반시간 남짓 걸렸다. 그 사이에 시냇물이 흘러 그 위에 다리가 놓였다. 아이들이 걸으면 20보 정도의 좁은 다리지만 장마가 지면 그 아래 내의 물살이 세어 어지러웠다. 그 다리 입구에서 우리는 잡은 손을 놓으며 빠이빠이 했다. 어느 날은 내가 장고개 까지 가서 헤어졌다.
정 선생은 손만 잡지 않으면 남녀 연애를 인정한다고 했지만, 우리는 이미 양손을 잡은 사이였다. 비록 성에 눈뜬 시기는 아니었지만.
송곡은 그 이름답게 동네 둘레에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앞엔 남강이 흘러 풍광이 좋았다. 소실이라고도 불린 건 여남은 집들로 이뤄진 작은 동네여서였다. 그래도 우리 동네나 가정과 설매, 5일 장이 서는 북창 동네 사람들도 진주로 걸어가려면 그곳을 지나쳐야 했다. 송곡 어귀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면 백사장이 드러나고 두루미들이 날아 운치를 더했다.
송곡은 동성이씨 집성촌인데 양반촌이다. 호사가들은 윗대 어른 퇴계 선생의 제자 구암 이정 선생의 학덕을 기렸다. 구암은 조선 중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유학 서적들을 발행한 대학자였다. 후학들이 구계서원을 설립해 그를 기렸다. 동성은 사천의 옛 이름이었다.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한 어느 봄날이었다. 대곡중학교 건물은 북창의 볕바른 곳에 세워졌다. 그 중학교 입학 성적도 성우가 1등, 내가 2등이었다. 우리가 등교 시엔 성우는 송곡에서, 나는 닥밭골에서 걸어 그 중간 지점인 봉평호수 둘레에서 자주 마주쳤다. 봉평호수는 농사를 지을 때 물을 대기 위한 인공호수였다. 그래도 호수 둘레엔 버드나무 가지들이 바람에 한들거리고 두루미들이 노닐던, 호수다운 정취를 풍겼다.
성우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부사 선생이 구암 선생의 제자였대.
성우가 양가 집안의 아는 바를 밝혔다.
성여신 선생은 조선 선조 때, 『진양지』를 기록하는데 앞장섰다. 임진왜란 이후, 진양의 고을들이 초토화 된 행정구역을 재정비한 역작이었다. 남명선생의 문하생으로 사서칠경에 능통했다. 시서화에도 능해 당대의 대학자로 대접받았다. 아버지는 부사 선생의 12대 손이었다.
나도 쉽게 수긍했다. 우리는 그 사실마저도 우리 둘 사이를 이은 징검다리인 양 즐거워했다.
성우 엄마는 표정이 없었다. 장남이 여친을 데려와도 무표정이었다. 마치 인형이 움직인 것처럼 보였다. 모친의 그런 모습에 질린 성우 동생 진우는 가출을 일삼았다. 그런 연유는 부친의 이중생활에 불만을 품은 탓이었다. 성우 부친의 이중생활은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고자한 몸부림이었다. 겨우 몇 평의 논밭으론 슬하의 형제를 기르지 못해 무어든지 해야 했다. 그리하여 북창에서 설탕가게를 운영한 과부와 눈 맞아 동거했다. 설탕은 농민들이 새참용으로 생수에 담아 휘저어 자주 마시므로 수입이 쏠쏠했다. 그 과부는 석녀라 전처 자식들에게 잔정을 베푸는 덴 인색했다. 진우는 형보다는 성적도 못 미치고 생김새도 빼어나지 못한 칼칼한 성격이었다. 구암 선생의 후손이라면 그 학자답게 살아야지, 아녀자 치마폭에 감춘 생활을 해야 하느냐며 부친에게 자주 푸념을 쏟으며 항의했다. 그래도 형제끼리는 사이가 좋았다.
그날은 내가 북창 장터로 가는 길이었다. 그들 형제가 멀리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논둑에서 나를 향해 활짝 웃는 그들 형제가 알알이 영근 보리처럼 토실토실해, 나는 뛰어가서 껴안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성우와 나는 고교도 대곡중학교 옆에 세워진 대곡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생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3년 우등생으로 그 고교를 졸업했다. 성적이 전교 1,2등에 못 미친 건 나는 아버지가 숨졌으며, 성우도 부모와 계모도 숨진 탓일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진우가 자살했다는 걸 나는 윤에게 들었다.
대곡교회로 변해 지평을 넓히다
그리도 청청하던 부부 소나무가 쓰러졌다.
성우와 내가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그가 월남전에 파병된 시기였다. 우리가 신학대학교를 선택한 건 김 목사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봉평예배당은 너무 작아. 호칭을 대곡으로 바꿔 큰 교회를 새로이 지어 목회사역에 이바지 하게나.
성우도 나도 김 목사를 사랑했기에,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목회자가 되려면 폭 넓은 경험도 쌓아야 해.
성우가 월남 파병을 자원한 것도 김 목사의 권유가 효과를 발휘해서였다. 나는 엄마가 중학생이 된 외아들을 보살피기 위해 진주시내에서 지내므로 진주 시민이 되었다. 그리하여 당숙부의 보호를 받으며 외톨이로 닥밭골 고가에서 지냈다. 성우도 혈혈단신이라 그 사실이 더욱 월남 파병을 자원한 연유였을 것이다.
성우와 나는 봉평교회에서 혼례를 올렸다. 그가 월남으로 파병되기 전이었다. 주례는 김 목사였다.
이성우 신랑과 성수정 신부끼리 서로를 배려하는 힘이야말로 결혼을 성공으로 이끌 초석입니다. 신랑이 신부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어주는 것도 앞으로 변치 않은 사랑을 나누며 잘 살아보자는 언약입니다.
김 목사는 포도주 한 잔을 반으로 나눠 신랑과 신부에게 권했다.
우리는 포도주 반잔을 마시고는 서로 이심 일체가 됨을 헤아렸다.
떠돌이 방랑자가 어느 날 느닷없이 모시골에 둥지를 쳤다. 억쇠는 처음엔 봉평 사람들에게 네, 네하며 허리를 굽히고 아부를 떨었다.
김 목사는 홍콩 선교사로 부름 받아 떠났다. 봉평교회를 책임진 건 여자전도사였다. 우리 문중 다른 어른들도 억쇠를 탐탁지 않게 여겨도, 모시골이 좋아 살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기에 도리 없이 응했다. 모시골은 타성들이 사는 곳인데 당신들이 방해 못한다고 으름장도 놓아서였다. 돼지를 기르는데 그 불순물이 흐르고 흘러내려 부부 소나무가 쓰러졌다. 봉평 어른들이 뒤늦게 위급함을 알고 진주 경찰서에 탄원서를 올렸다. 따라서억쇠가 돼지들을 몰고 봉평을 등졌다.
봉평교회를 책임진 이영순 전도사는 30여명의 성도들을 이끌고 그런대로 사역을 꾸려나갔다. 그것도 아이들의 수가 많고 어른들은 몇 안 되었다. 워낙에 봉평과 이웃 동네가 조상 제사를 지낸 유교 성향이 강해 복음을 전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아버지의 입김과 김 목사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그동안 70여 명에 이른 성도들이 합심해 교회다운 교회로 이끌어 왔다. 큰집 장조카가 앓아누운데 마침맞게 김 목사가 부임해 안수기도로 병에서 놓임 받자, 우리집안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되었다. 그래도 조상 제사를 지내며 교회 성도 노릇하느라 어른들도 믿음을 향한 확신이 부족했다.
그런 와중에 외팔이 전도사가 봉평교회로 발령받았다.
그는 허물어져 가는 교회를 신축할 단안을 내렸다. 낡고 헌 건물을 추스르고 500여 명을 수용할 대성전을 마련했다. 장소는 과수원이었다. 7천 평의 대지라 대성전 아니고도 앞으로 교회학교도 지을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5년 동안 성도들의 협조와 외국 선교사와 김청강 목사의 후원으로 봉평교회는 대곡교회로 거듭났다. 그 외에도 진짜백이 후원자가 있었음을 외팔이 목사의 간증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간증도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겠고>였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합니다. 마치 생의 수칙을 손아귀에 쥔 양. 가위는 자르고 바위는 깨뜨리고 보는 감싼 구실을 하지요.
그러므로 죄는 자르고, 교만은 깨뜨리고, 어려움을 겪는 이웃은 포근히 감싸 주어야만 밝은 세상이 옵니다.
한민족은 손의 민족이요, 한문화는 손의 문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손재주를 지녔답니다. 서양 사람은 사물을 봐서 좋고 나쁨을 알지만, 대한민국 사람은 사물을 손의 촉감과 영감으로 안다고 합니다. 그런 문화 특성은 손바닥을 치며 찬송가를 부르고 뜨거운 기독교 열풍이 일어난 바탕이랍니다. 풍부한 감성은 믿음으로 이어진 촉진제일 테니까요.
한민족은 아주 부지런한 손을 지녔답니다. 중동에서 일한 코리아 해외 근로자들의 부지런한 손놀림이 사막을 오아시스로 만든 원천이었습니다. 게으름은 윤택한 생활에 걸림돌이 되고 손이 부지런한 사람은 수고한 노력대로 기름진 삶을 살지요.
손을 떠올리면 안중근 의사의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 붓글씨 끝에 낙관 대신 찍은 장인掌印이 기억납니다. 뤼순 감옥에서 쓴, 죽음을 앞둔 애국지사의 충정어린 기개와 강한 의지가 배인 글과 함께. 그 손도장이야말로 안중근 의사의 얼굴입니다. 인고를 견딘 버팀의 미학이지요.
더불어 손은 또 하나의 얼굴입니다. 분노하면 부르르 떨고 즐거우면 명연주자처럼 가락 젖기 합니다. 악기 연주자들의 손엔 생의 리듬 감각이 꽃처럼 피어오릅니다. 화가의 손엔 사물을 향한 애정이 솟아오릅니다. 문필가 손엔 생의 철학이 담겼고요. 무용가 손엔 이 세상을 소유하고픈 열정이 깃발처럼 나부낍니다.
손바닥엔 손금이 그어졌습니다. 생명선, 두뇌선, 감정선, 운명선, 재물선, 바람둥이선도 있답디다. 손금쟁이들도 사람 운명이 손금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랍니다. 뜻을 굳게 하고 실천에 옮기면 그대로 실현 된다고 합니다.
그런 예는 제가 월남전에서 외팔이가 되어 귀향해 교회를 확장하고 이렇듯 여러분 앞에 목회자로 우뚝 선 연유입니다.
적군이 쏜 총알이 저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어 야전병원에서 수술하고 난 뒤였습니다. 내가 외팔이가 된 사실을 뒤늦게야 알고 얼마나 애통하며 부르짖었겠습니까. 그러기를 100일이 지난 뒤였습니다. 입술은 마르고 목은 쉬어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몸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입술을 앙다물며 살아야겠다던 의지를 다졌습니다. 나는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 동생처럼 허망하게 세상을 등질 순 없다. 창창한 앞날을 져버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동생처럼 될 순 없었습니다. 아버님의 격분한 꾸중을 듣고 저의 집 근처 느티나무 가지에 목매달은 동생처럼 죽음을 맞이할 순 없었지요.
내게 주어진 고난을 이겨야 한다. 바남투의 소나무처럼. 돼지들이 흘린 오염 찌꺼기가 얼마나 지독했겠습니까. 태풍까지 몰아쳤으니. 쓰러진 고목 사이에 두 그루의 아기 부부 소나무가 새 둥지를 튼 것처럼. 그 소나무가 자라는 걸 지켜봐야지요. 더욱이 나를 애타게 기다린 사모가 있기에, 그 손길보다 더한 주님의 손길이 저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적군의 총이 저의 왼팔을 관통하기 전이었습니다. 땅땅 쏘아대던 총알을 비껴가던 중에 저의 동료가 쓰러진 걸 목격하곤 그를 흔들어 깨우면서 그만 저도 쓰러졌지요. 그 위기의 순간이 동료가 살게 된 기적이었습니다.
그 동료 부친이 전자제품을 만든 회사의 사장이었습니다.
내 아들을 살려줘서 고마우이.
뭘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적군의 총알이 빗발처럼 쏟아진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런 용단을 내던 게 어디 쉬운 겐가.
그분이 제가 교회를 개척한다던 소식을 접하곤, 과수원도 구입하고 성전 신축금 얼마도 희사하셨던 겁니다.
그것도 주님이 미리 예비해 놓으신, 책임져 주시겠다던, 불변의 언약입니다.
근데 희한 한 것은 저의 슬픔과 기쁨이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간 부위에서 살아 움직인 겁니다. 기쁘면 가락 젓기처럼 흔들리고 슬프면 땀방울처럼 눈물이 송송 맺힙니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왼팔을 잃은 대신 또 하나의 얼굴을 주셨군요.
저는 외팔이 아닙니다. 오른손으로 그 부위를 만지니 희열이 샘솟았습니다. 그러고는 얼굴 근육이 움직이더니, 하하하 웃었지요. 그런 웃음 뒤엔 저의 아내 사모의 내조가 빛을 발한 까닭입니다.
나의 왼팔이 당신의 왼팔에 접목 되었으니, 만사 OK 아니겠어.
* 성지혜 약력
1997년, 장편소설 《환상의 나비》 출간. 월간문학 신인상.
진주여고,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작품집 《은가락지를 찾아서》 《옛뜰》 《까치호랑이》 《아버지》
《해를 품은 천리안》 《그리고 그리니 마냥 그리워》 《논개》 등 20권 출간.
한국소설문학상, 펜문학상, 한국문학백년상, 남촌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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