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고, 자신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마음과 몸이 무위를) 아끼는 일 만한 바가 없다.
治人事天, 莫若嗇.
(중국 송宋나라 때) 동사정董思靖은 (『도덕진경집해道德眞經集解』 제59장 주註에서) 일컬었다. “색嗇은 (마음과 몸이 무위無爲가) 면밀한 바(精; 性·太極·自然·道)를 아끼고,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운 바(神; 命·四端·無爲·德)를 살핀다(는 말)로서, (마음과 몸이 무위無爲가) 곧은 바(貞; 精)와 (무위無爲가) 굳은 바(固; 神)를 (본래 저절로 그러한 모습대로) 쌓기를 바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이른바)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도(道; 太極·性)에 대한 학문을 하는 바가 오래 가게 되면, 마음이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도道에 대해) 넓어지게 되고, 기(氣; 七情)가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도道에 대해) 넉넉해지게 되는데, 따라서 (마음과 몸이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하늘의 덕스러움(德; 無爲·命)에 이르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가 오롯해지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따라서) “사천事天”은 자신(의 마음과 몸)을 다스린다(自治; 修己)는 말이다. (따라서) 『맹자孟子』는 (「진심장구상盡心章句上」에서) 일컬었다. “그 마음(心; 四端)을 (본래 저절로 그러한 모습대로) 자리하게 하고, 그 성性을 (본래 저절로 그러한 모습대로) 기르는 일은 이른바 따라서 (그 마음과 몸이 오롯하게 이른 바를 가진 바가 있는) 하늘(의 덕스러움德)을 (본래 저절로 그러한 모습대로) 일삼는 일이다.”
董氏曰, 嗇, 乃嗇省精神, 而有歛藏貞固之意. 學者, 久於其道, 則心廣, 氣充, 而有以達乎天德之, 全矣. 愚按, 事天是, 自治也. 孟子曰,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이른바, 자신을 다스리고,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는 일은 모두 마땅히 (마음과 몸이 무위無爲를) 아끼는 일을 이치로 삼아야 한다. (이른바, 마음과 몸이 무위無爲를) 아끼는 일은 (마음과 몸이 무위無爲를 일삼는 것을) 친밀하게 여기고, (유위有爲를 일삼는 것을) 가엾게 여기며, (유위有爲를 일삼는 것을) 거두어들이고, (무위無爲를 일삼는 것을) 바란다는 뜻이다.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말하면, 이른바 (마음과 몸이 유위有爲를) 즐겁게 여기거나 일삼고자 하는 바를 막는 일, (무위無爲가) 면밀한 바와 신령스러운 바를 기르는 일, (일부러 일삼아) 말하거나 글 쓰는 바를 삼가는 일, (일부러 일삼아) 마시거나 먹는 바를 끊어내는 일, (무위無爲를) 받들어 놓이는 바에 머무는 일, (무위無爲가) 대쪽같이 곧은 바를 일삼는 일들, 이것이 (마음과 몸이 무위無爲를) 아끼는 (일을 이치로 삼는) 일(의 사례)이다. 세상 사람들을 다스림에 있어서 말하면, 이른바 법령을 집행하는 바를 신중하게 하는 일, 명령을 시행하는 바를 대쪽같이 하는 일, 복잡한 (법령이나 명령의) 조목을 살피는 일, (재화가) 낭비되는 바를 덜어내 없애는 일, 사안을 (본래 저절로 그러한 모습대로) 처리하는 바를 받들어 높이는 일, 사람을 (본래 저절로 그러한 모습대로) 아끼는 일들, 이것이 (마음과 몸이 무위無爲를) 아끼는 일(을 이치로 삼는 일의 사례)이다.
言自治治人, 皆當以嗇爲道. 嗇是, 愛惜收歛之意. 以自治言, 則防嗜慾, 養精神, 愼言語, 節飮食, 居敬, 行簡之類, 是, 嗇也. 以治人言, 則謹法度, 簡號令, 省繁科, 去浮費, 敬事, 愛人之類, 是, 嗇也.
따라서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고, 자신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오로지 (마음과 몸이 무위를) 아껴야 하는데, (몸이 무위를 아끼게 되는 바) 이것은 (마음이) 앞서 (무위를) 되돌이켜야 하는 일이다. (마음이) 앞서 (무위를) 되돌이키게 되면, “(몸이 뒤따라) 덕스러움(德; 無爲)을 쌓는 바를 거듭하게 되기 때문이다.
夫惟嗇. 是謂早復. 早復, 謂之重積德.
동사정董思靖은 (『도덕진경집해道德眞經集解』 제59장 주註에서) 일컬었다. “중重은 ‘(마음을 뒤따라 몸이) 거듭하게 된다’라는 말이다. 주자朱子는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25 「노자서老子書」에서 일컬었다. ‘조복早復은 (마음과 몸이 무위無爲를) 아끼기를 잘한다는 말로서, (마음과 몸이 무위無爲에서) 멀어지지 않은 채, (본래 저절로 그러한 모습을) 되돌이킨다는 뜻이다. 이른바, 앞서 자신(의 마음)이 (무위無爲를) 쌓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고, 뒤따라 (몸이 무위無爲를 쌓는 바를) 기른다는 말로서,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 앞서 무위無爲를 쌓게 되면, 뒤따라 몸이 무위無爲) 그것을 쌓는 바를 더하게 된다는 뜻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이 (무위無爲를 일삼기를) 잘하는 바로 나아간다는 뜻, 이것이 (주자朱子의) ‘자신(의 마음)이 (무위無爲를) 쌓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다’(는 말의 뜻)이다.
董氏曰, 重, 再也. 朱子曰, 早復者, 言能嗇, 則不遠而復. 言先己, 有所積, 後養以嗇, 是又加積之也. 愚按, 人性, 夲善, 是, 先己, 有所積也.
(마음이 앞서 무위를 되돌이킴으로써, 몸이 뒤따라) 덕스러움德·無爲을 쌓는 바를 거듭하게 되면, (마음과 몸이 자기 마음대로 일삼는 바가) 끝점을 다하지 않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고, (마음과 몸이 자기 마음대로 일삼는 바가) 끝점을 다하지 않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면, 그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고, 자신을 다스리는 공능의) 끝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고, 그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고, 자신을 다스리는 공능의) 끝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면, (그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고, 자신을 다스리는 공능이 끝점을 다하는 바를 가지지 않은 채) 오래 살게 되고, 오래 보여지게 된다.
重積德, 則無不極, 無不極, 則莫知其極, 莫知其極, 可以長久.
(무불극無不極은 자신의 마음과 몸이 무위無爲에서) 멀어지지 않은 채, (무위無爲를) 되돌이키게 되면, 자신(의 마음과 몸이) 자기 마음대로 일삼는 바가 (그) 끝점을 다하지 않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이른바, 자신을 다스림에 있어서) 자신(의 마음과 몸이 마음대로 일삼는 바를) 이긴 채,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마음과 몸의) 질서(禮; 自然·無爲·道·德)을 되돌이키게 되면, 천하가 (본래 저절로 그러한 자신의) 인(仁; 性·命·四端·太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그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고, 자신을 다스리는) 덕스러움(德; 功能)이 (그) 끝점을 다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되겠는가? (그) 덕스러움德이 (그) 끝점을 다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면, (그 덕스러움德이 천하에 두루) 넓어지고, 두터워지며, 높아지고, 밝아지게 되는 바에 이르게 되는데, 이른바 이것이 (비유컨대 그 덕스러움德이 살아가게 되는 바가) 멀어지게 되고, (보여지게 되는 바가) 오래 가게 되며, 끝점을 다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는 이치이다.
不遠而復, 則己私, 無不極矣. 克己復禮, 則天下, 歸仁. 其德, 豈有限量哉. 德, 限量, 至於博厚高明, 則是, 悠久無疆之道也.
여기까지가 제7장이다. (이 장은) 뜻한다.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고, 자신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도(道; 四端·太極·性·自然·道·命·無爲·德)에게 찾아듦으로써, 그 (다스림의) 공능(功能; 德)을 이루게 된다. (이른바, 무위無爲를) 아낌으로써, (그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고, 자신을 다스리는) 공능을 일삼게 된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고, 자신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유위有爲) 그것을 덜어내라는 뜻이다. 이 장 이후 다섯 개의 장은 모두 이 장의 뜻을 (자세하게) 펼쳐서 일컫는다.
右第七章. 言入道成德. 以嗇爲功. 是, 損之之謂也. 此下五章, 皆申言此章之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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