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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적 문명 전환의 학문학 이론을 설파한 학문방법론
1. 앎과 삶이 함께 가야 슬기롭다. 이 둘이 서로 겉돌지 않고 어김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지행합일’이다. 앎과 삶은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놓여 있어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룬다. 앎의 ‘체’가 없는 삶은 맹목적이고 삶의 ‘용’이 없는 앎은 공허하다. 확고한 앎을 갖추면 삶이 가치 있게 실현되고, 올바른 삶을 실천하면 앎이 질적으로 성장한다. 앎은 단순히 삶을 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삶의 경험을 통해 더 깊고 풍부해진다. 따라서 앎은 삶을 통해 끊임없이 성숙하고 삶은 앎을 통해서 더욱 성장한다. 그러므로 앎과 삶은 상호 순환적 관계에 놓여 있다.
누구에게든 삶의 지혜가 필요하듯이 앎의 지혜도 필요하다. 특히 앎을 추구하는 학자들에게 앎의 지혜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학자들은 기존 앎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앎을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앎의 지혜가 없으면 기존 앎을 동어반복하는 데 머물기 일쑤이다. 남의 지식을 배워서 아는 체하는 학자를 달빛학자라 하고, 스스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학자를 햇빛학자로 은유할 수 있다.
달빛학자와 햇빛학자라는 은유가 낭만적인 탓인지 달빛학자라고 비판해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시적 은유 대신에 거칠게 말하면 달빛학자는 남의 지식을 빌어서 먹고사는 ‘빌어먹는 학자’이다. 햇빛학자는 스스로 자기 지식을 창조해서 먹고사는 ‘벌어먹는 학자’이다. 지금 우리 학계는 ‘빌어먹는 학자’들의 ‘빌어먹는 학문’이 석권하고 있다. 이런 학계의 세태를 비판하고 ‘벌어먹는 학문’ 곧 ‘창조학’을 주창하며, 앎의 슬기를 일깨워주고 채근하는 책이 조동일의 <<앎의 지혜 학문의 위 아래 공사>>(지식산업사, 2025)이다. 이 책을 약칭 <<학문 공사>>라고 할 수 있다.
<<학문 공사>>는 독립적인 저술이면서 저자의 <<삶의 지혜 창조주권론>>과 짝을 이룬다. 두 책은 ‘앎과 삶’ 또는 ‘삶과 앎’의 문제를 일관되게 아우른다. 앎의 책 <<학문 공사>>는 학문하는 법을 설파하는 메타학문으로서 ‘학문학’이자 ‘학문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학계에서 논문작성법이나 연구방법론 관련 저서는 더러 있어도 학문방법론에 관한 저서로는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저자는 앎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 공부를 ‘배우기’와 구별하여 ‘알기’라고 한다. ‘배우기’는 학습으로서 남의 앎을 빌어와서 아는 체하는 달빛학문에 머물기 일쑤이다. 그러나 ‘알기’는 학문으로서 자기 앎을 벌어내서 이바지하는 햇빛학문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공부는 곧 배우는 일로 여기기 일쑤인데 이것은 타력적이자 수동적이다. 잘 배워라 열심히 배워라고 하면, 스스로 깨치라는 뜻보다 남의 앎을 잘 따라 익히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학생 노릇 잘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공부를 ‘알기’라고 하면 다르다. 알기는 스스로 하는 일이어서 자력적이자 능동적이다. 잘 알아라, 열심히 알아보아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앎을 깨치라는 뜻이다. 따라서 “알기는 각자 지닌 능력을 가지고 스스로 하는 일이며, ‘배워 알기’에서 ‘찾아 알기’로, 다시 ‘깨달아 알기’로 나아가”며 발전한다. 깨달아 알기가 벌어먹는 학문이자 창조학의 최종 목표인가 단정할 필요는 없다. 더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우리 학계는 ‘빌어먹는 학문’이 석권한다고 했다. 그 구체적인 근거는 학문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이 유학 출신 교수들로 채워져 있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교수들은 외국 유학 이력을 평생의 자랑거리로 삼으면서 자기 학문을 게을리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 유학생 수는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절대적인 유학생 수는 중국과 인도에 이어 한국이 3위이지만, 인구 비례로 따지면 한국이 사실상 1위이다. 일본은 세계 8위인데 인구 비례로 따지면 한국의 5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일본은 진작 탈아입구(脫亞入歐)를 표방했으되 유학이 드세지 않고 자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노벨상을 받곤 한다. 한국은 탈아입구를 표방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미국 유학에 더 열을 올리고 있는 당착에 빠져 있다.
최근에는 외국 학생들이 한국에 유학을 오는 시대가 되었다. 2019년 통계에 의하면 181개국 14만 명이 한국에 유학했는데, 2024년에는 26만 3천 명으로 급증하고 있다. 문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 학문을 하기 위해서 왔는데, 한국 교수들은 외국 유학에서 배운 것을 강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학생이 한국 외교사에 관한 학위논문을 쓰려고 하는데 교수는 서양 외교사만 알고 있고, 일본 학생은 한국 미학을 공부하려고 왔는데 교수가 서양 미학만 강의한다고 불만이다. 미국 학생은 한국문화를 공부하려고 유학 왔는데 교수는 미국 책만 교재로 강의하고 있어서 난감하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 대학을 찾아오는 유학생들로부터 학문적 망신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들이 자국으로 돌아가서 한국 대학과 교수, 학문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할지 불을 보듯 뻔하다. 외국인 유학생들을 위해서도 빌어먹을 수입학인 외국의 달빛학문이 아니라, 스스로 벌어먹을 창조학으로서 햇빛학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한국 대학이 서구 학문 중간 도매상이 아니라, 자국 학문 직거래 생산지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야 한다. 그러자면 외국 학자가 저술한 책을 교재로 삼아 그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를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저술한 원고와 책을 교재로 자기 이론과 학설을 설득하고 토론하는 강의를 해야 마땅하다.
앞의 강의를 빌어먹을 강의라면 뒤의 강의는 벌어먹을 강의이다. 그런데 빌어먹을 강의는 하기도 힘들다. 외국 학자가 쓴 논저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든데, 그것을 쉽게 설명하기는 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려운 학술용어 풀이나 내용 설명을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기 일쑤이다. 그러나 스스로 쓴 원고나 저서로 벌어먹을 강의를 하면 “문제를 제기하고, 자료를 들어 논증하고, 최상의 결론을 도출하는 강의를” 쉽게 할 수 있다. 자기 학설을 설득하므로 강의하는 일도 즐겁고 수강생들도 쉽게 이해하며 토론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벌어먹을 강의를 하려면 강의와 연구가 함께 가야 한다. “강의가 연구이고 연구가 강의”여야 가능하다. 기존 교재의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가 아니라 자기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강의를 해서, “강의가 바로 연구발표이고 새로운 학문의 개척”이 되도록 강의 체제를 혁신해야 한다. 자연히 새로운 연구가 없는 사람은 강의를 할 수 없다. 학자로서 교수는 강의실에 설 수 있어도 교사로서 교수는 강의실에 설 수가 없어야 강의와 학문이 함께 발전할 뿐 아니라, 저절로 벌어먹는 햇빛학문이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대학의 강의는 일제의 영향으로 불러주고 받아쓰는 데서 시작되었다. 원래 새 원고를 불러주고 받아쓰는 독일의 학풍이었는데, 일본에서는 기존 교재를 불러주고 받아쓰게 했다. 그 영향을 받은 교수들은 해마다 같은 강의노트나 외국어 교재를 번역해서 불러주었다. 그러나 복사기가 출현해서 노트를 복사하는 것은 물론 교재까지 복사하게 되자 불러주는 강의는 사라졌다. 영서가 교재로 채택되면서 번역 강의가 주류를 이루어서 스스로 벌어먹는 창조학은 요원하다. 왜냐하면 강의를 하는 교수 노릇에 만족한 채 연구를 하는 학자 노릇은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수이면서 학자이고 학자이면서 교수여야 하는데, 한국 대학에서는 학자보다 교수가 득세하는 구조이다. 저자는 교수와 학자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교수는 아는 것이 많아야 되고, 학자는 모르는 것이 많아야 된다. 아는 것이 많은 학생은 교수가 될 수 있고, 모르는 것이 많은 학생이라야 학자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 학계는 아는 것이 많은 교수가 대학을 차지하고 있어서 햇빛학문이 살아나지 않고 있다. 모르는 것이 많은 학자는 교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어 대학에서 벌어먹는 학문을 하는 진정한 학자는 아주 드문 상태이다. 교사 노릇을 하는 지식인 교수가 아니라 연구자 노릇을 하는 학자 교수가 대학 강단의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수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아서 새로운 앎을 추구하는 연구를 줄기차게 하는 학자교수라 할 수 있다.
3. 앎을 알아가는 기초가 배우기이다. 어디서 배워야 최선인가. 우리는 으레 사람에게 배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사람에게 배우는 것보다 책에서 배우는 것이 좋고 책에서 배우는 것보다 자연에서 배우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사람에게서 배우면 작은 것을 이루고, 책에서 배우면 중간 정도를 이루며, 자연에서 배우면 큰 것을 이룬다’고 했다. 세 가지 ‘알기’로 말하면, 사람에게서는 ‘배워서 알기’이고, 책에서는 ‘찾아서 알기’이며, 자연에서는 ‘깨달아서 알기’라 할 수 있다. 사람에게 들어서 알고 책을 찾아 읽어서 아는 것과 달리,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자연으로부터 큰 가르침을 얻기 어려운 까닭이다.
사람에게서 배우니 가르친 사람을 본받아 교수가 되기를 바란다. 교수가 되면 강의에만 치우쳐 연구는 게을리하기 예사다. 강의 부담이 없는 연구교수는 학문활동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연구교수도 아닌 백수 학자들은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아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학문활동에 전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모두 교수를 좇아간다. 연구교수 제도는 허약하여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무직의 학자들은 교수자리에서 밀려난 실직자로 자괴하며 신세 한탄에 빠져 있기 일쑤이다. 가난한 전업시인은 있어도 전업학자는 없어서 학문이 살아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교수도 전업학자의 기회가 반드시 온다. 누구든 정년퇴직에 이르면 전업학자가 되기 때문이다. 교수에서 은퇴한 뒤의 삶은 전업학자로서 학문활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강의 부담에서 자유롭고 제도적 구속에서도 해방된 것이 퇴직교수이자 전업학자이다. 전업학자는 논문 편수에 구애되지 않고 전작저서를 발간하는 학문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다. 저자는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유튜브 강의를 하면서 전작저서를 계속 출간하여 전업학자의 모범을 보일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예술활동도 적극 실천하므로 학자이면서 작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집으로 <<山山水水>>와 <<老巨樹展>>을 펴내고 유튜브에서 ‘문인화 산수화 자화자설’ 강의도 하고 있다. 작가이자 학자이므로 할 수 있는 강의이다. 학자와 작가로서 직접 경험한 학문과 예술을 견주어 말하는 것을 주목해 보자. “예술은 논리를 넘어서는 창조를 의미가 개방된 형상으로 구현한다.” “학문은 논리를 넘어서지 않고, 그 자체로 혁신하는 창조 활동을 한다.” “개방하고 혁신하는 것을 창조의 필수 요건으로 삼는다”는 사실은 예술과 학문이 서로 다르지 않다. 더 구체적으로 대비해 보면, “예술은 확산을 능사로 삼는 원심력을 보여준다”면, “학문은 집약을 소중하게 여기고 구심점을 분명하게 한다.”
그러나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를 가지면서 서로 겹치기도 하므로, 저자처럼 학문과 예술을 함께 하면 둘 다 잘할 수 있다. “예술에 힘쓰면 학문도 잘되고, 학문에서 이룬 발전이 예술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절실하게 체험”한다. “예술은 학문처럼 하고 학문은 예술처럼 해야, 예술 창작도 학문 창작도 뛰어나게 할 수 있다.” “연구를 하느라고 마음속에서나 그리는 그림이 아주 좋아지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연구가 부쩍 자라난 것을 알고 놀란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저자의 체험에서 우러난 고백이다.
학문을 예술처럼 창조적으로 하지 않으면 지식 자랑에 머문다. 지식은 이미 있는 앎을 터득한 것이다. 지식 자랑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퀴즈 챔피언이다. 그러나 퀴즈 전문가는 학자가 아니며, 퀴즈풀이가 학문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학문은 기존 지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식을 창조해야 한다. 모르는 지식을 새로 알아내고 그릇된 지식을 바로잡는 것이 학문이다. 따라서 기존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은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아는 것은 ‘힘’이 아니라 ‘짐’이라고 한다.
그런데 학문을 한다는 학자들이 새로운 앎을 스스로 알아내는 일보다 이미 있는 앎을 아는 일에만 힘쓴다. 기존 지식을 아는 일은 끝이 없다. 이를테면 철학자가 남의 ‘철학알기’를 하는데 일생을 바치느라 자기 ‘철학하기’를 스스로 하지 못한다. 자기 철학을 하지 못하는 것은 남의 철학을 너무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는 것은 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철학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의 옛날이야기를 들어보면, 거기에 놀라운 철학이 있다. 그들은 철학자가 아니라 한갓 이야기꾼이지만 철학을 깨우치고 있다. 그러므로 옛날이야기와 같은 문학작품에서 철학하기를 바로 할 수 있다.
4. ‘알기’의 짐을 벗어던지고 ‘하기’의 실천으로 나아간다고 학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학문은 용어를 가지고 하므로 “용어가 그릇되면 학문이 온통 빗나간다.” 따라서 용어를 바로잡는 일이 학문에서 필수 과제이다. “자연학문은 만국공통의 수리기호를 사용”하므로 용어의 논란이 없다. 사회학문은 서양화된 사회현상을 주로 다루는 까닭에 용어 차용이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문명의 전통을 다루는 인문학문은 나라마다 사정이 달라서 같은 용어로 나타낼 수 없다. 서양 용어는 서양문명에만 타당할 뿐 동양문명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를테면 음악(music)은 서양 음악만 나타낼 뿐 동양음악이나 제3세계음악은 민족음악(ethnomusic)이라고 다르게 호명한다. ‘novel’은 소설이 아니라 18세기 영국에서 나타난 ‘길고 심각한 이야기’에 한정된다. 뒤에 ‘근대장편소설’을 뜻하는 것으로, 또는 그 유사품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지만, 국가와 시대에 따라 다른 서사문학 일반을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저자는 ‘소설’을 보편적 용어로 제기하면서, “소설은 ‘자아와 세계가 상호우위에 입각해 대결하는 서사문학이다’라”고 규정하고 소설 이론을 수립했다. 그러므로 용어를 바로잡으려면 이론적인 연구로 나아가야 한다.
이론적인 연구는 철학과 만난다. 철학하는 용어는 주로 서양언어 특히 고대그리스어나 현대독일어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은 어느 언어든 원어민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의 언어로 철학을 하기는커녕 그들의 철학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도 쉽지 않다. 이러한 언어 장벽을 극복하려면 자국어 철학을 해야 한다. 언어는 모두 대등하며 우열이 없기 때문에 철학하기에 적합한 언어는 따로 없다. 그러므로 한국철학은 한국어로, 곧 ‘우리말로 철학하기’를 실천해야 한다.
독일철학이나 중국철학은 모두 독일어와 한문의 ‘체언’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현상이 당연하다고 여기면, 철학은 체언으로 해야 한다는 틀에 갇혀 있기 일쑤이다. 우리말로 철학을 하려면 철학은 ‘용언’으로도 할 수 있으며, 용언 철학이 체언 철학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있고 없음’의 문제를 용언으로 나타내면, “있으니까 없고, 없으니까 있다”, “있어서 없고, 없어서 있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다”, “있음이 없음이고, 없음이 있음이다.”와 같이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어, 체언으로는 할 수 없는 유무의 철학을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말로 철학하기는 “체언의 철학에서 용언의 철학으로 나아가는 것이 대전환이다.”
체언이 정적이라면 용언은 동적이다. 학문도 정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동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알기’는 기존 지식을 습득하는 정적 학문이라면, ‘하기’는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동적 학문이다. 유명 철학자들도 남의 ‘철학알기’를 하다가 일생을 마치고 자기 ‘철학하기’로 나아가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철학알기’는 철학 학습을 하는 학생 노릇에 해당된다. 학자 노릇을 하려면 자기 철학을 주창하는 ‘철학하기’를 해야 한다.
유학 경력을 뽐내고 외국인 지도교수 자랑으로 자기 권위를 내세우려는 것은 학생이나 하는 행색이다. 그런데 교수들이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학자라면 학생 수준의 학벌 자랑과 단호하게 결별하고, 스스로 개척한 자기 학설과 자기 이론을 제기한 학술논저를 자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유학 이력의 학벌이 아니라 자기 학설과 이론 수립의 연구업적을 학계에 발표하여 두루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진정한 학자라 할 수 있다.
경전을 배워서 아는 승려가 학승이라면, 스스로 깨달아서 아는 승려가 선승이다. 학생 노릇을 하는 학승과 학자의 경지에 이른 선승의 관계는 어떤가? “선승은 학승을 겸할 수 있지만, 학승은 선승을 겸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학자는 학생을 겸할 수 있지만, 학생은 학자를 겸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진정한 학자의 길에 들어서려면 기존 지식을 배우는 학생의 수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습을 학문으로 착각해서는 교수라 하더라도 사실은 학생이나 다르지 않다. “학문은 거듭 깨닫는 과정이다. 완성이란 있을 수 없고 계속 나아간다.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유한한 노력이 학문이다.” 그러므로 학문의 세계는 끝이 없다.
학문적 통찰력을 발휘하려면, 실학의 실용이나 실증을 넘어서 기학(氣學)의 물질과 정신을 아우르는 총체적 철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실학을 근대화라고 여기는데, “근대화는 산업화이고 민주화이다. 산업화는 정부나 기업이 선도하고, 민주화는 민중이 일으켜”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다. “기학은 근대를 극복하고 다음 시대를 바람직하게 이룩하는 지침을 제공한다.” “기가 여럿으로 나누어져 상생과 상극하는 이치를 제시”하여, “상생이 상극이고 상극이 상생”이라는 생극론을 펼치고, 이러한 생극 관계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대등론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기학은 저자에 의해 마침내 ‘대등생극론’에 이르렀다.
5. 학문적 통찰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제의식과 집중력을 갖추고 끈덕진 노력을 해야 가능하다. ‘문제의식’은 개인적인 고민이나 번뇌가 아니라 “공동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맡아서 해결하려고 애쓰는 의식”이다. 저자는 가사(歌辭)의 갈래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문학의 갈래를 연구하여 일반론에 이르렀다. 기존의 문학갈래인 서정, 서사, 희곡을 넘어서 ‘교술’이라는 새로운 갈래를 제기하고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통해 이 4 갈래를 명쾌하게 설정했다. 이러한 갈래이론을 근거로 세계 소설사를 전개하면서 후진이 선진이 되고 다시 선후진의 역전이 일어나는 과정을 생극론 철학으로 논증하면서 소설이론을 개척하는 혁명을 이룩했다.
이러한 혁명적 이론은 오랜 과정과 단계를 거쳐서 마침내 성취된다. 학자의 생애에 따라 학문의 진전과정을 정리하면 1) 학위논문, 2) 주문생산, 3) 계획생산의 3단계가 있다. 학위논문을 쓰고 나면 학계에서 연구를 주문하게 되는데, 여기에만 매달리면 학문의 진전이 없다. 학계의 주문과 상관없이 스스로 계획하여 연구하는 3) 계획생산을 해야 커다란 업적을 쌓을 수 있다.
계획생산을 한다고 학문의 단계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이 단계에서 4) 이론 창조, 5) 학문 창조, 6) 문명 전환의 단계로 더 나아가야 한다. 돈오(頓悟) 단계의 이론적인 논문을 여러 편 쓰면서 점수(漸修)를 해나가야 더 큰 돈오를 이룩한다. 저자는 문학 갈래 논문을 진전시켜 문학사의 체계를 생극론에 입각해서 수립했다. 민족모순과 문명모순을 대등론으로 해결해야 하며, “생극론과 대등론을 실현하려면 사람은 누구나 지닌 창조주권을 발현해야 한다”는 지론을 펼쳤다. 그 연구성과가 <<삶의 지혜 창조주권론>>으로 저술되었다.
저자는 학문창조의 보기로 ‘구비문학’과 ‘학문론’을 든다. 구비문학은 국문학과의 전공으로 자리잡았을 뿐 아니라 학계에서 학회 활동이 활발하여 일정한 성과를 이루었다. 학문론은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서 학문에 대한 총체적 연구를 하는 메타학문으로서 우리학문을 바로잡고 세계 학문의 역사를 바꾸어놓아야 하는데, 아직은 미흡하다. 4) 5) 단계의 학문은 6) 문명 전환의 학문으로 이어진다.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고 근대를 넘어서는 다음 시대를 전망하는 것이 문명전환의 학문이다. 저자는 대등생극론과 창조주권론을 펼치면서 대등문명의 시대가 세계사를 바꾸어놓는 대전환의 혁명이 되길 기대한다.
문명의 전환은 학문의 세계화가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山과 水의 생극론을 기호화하면 세계화가 가능하다. “山은 水를 막고, 水는 山을 무너뜨리는 것은 생극이다. 山에서 水를 머금었다가 내보내고, 水는 山의 수목을 키우는 것이 상생이다.” 이러한 생극론을 인류 보편의 학문으로 일반화하려면 수학이나 과학의 기호로 나타내는 것이 대안이다. 산의 mountain과 수의 water에서 첫 글자를 따와서 M과 W로 기호화하면 MW수학으로 생극론을 펼칠 수 있다. “M-W는 상극이고, M+W는 상생이고, M∓W는 생극이다.” 생극도 기호에 따라 둘로 나타낼 수 있다. ∓는 상극에서 상생으로 가는 생극이고, ±는 상생에서 상극으로 가는 생극을 뜻한다. 그러므로 산수의 생극론을 ‘MW수학’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
학문의 전환보다 문명의 전환은 더 어렵다. 그러나 학문 이론으로 주목하면 문명의 세계적 전환이 보인다. 저자는 영국과 인도를 실증으로 들었다. 영국이 선진이고 인도가 후진이라 하는데, 사실은 “영국보다 부유하고 영국에 면직물을 많이 수출하던 인도가 식민지 통치를 받는 동안에 수탈을 너무 심하게 당해” 가난하게 되었다. 물질뿐만 아니라 문학도 인도가 앞섰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의 키플링(Kipling)과 인도의 타고르(Tagore)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노벨상으로 후진국의 타고르 문학이 선진국 키플링 문학과 같은 수준으로 평가된 것은, 단선발전론으로 보면 모순이다. 그러나 역사의 실상은 단선발전론을 배격하고 선후진의 역전이 일어난다.
키플링은 시 <백인의 책무>에서 식민지 통치를 찬양하고, 소설 <정글북>에서 늑대에게 양육된 아이가 동물 사냥꾼이 되어 동물을 지배했다. 그러나 타고르는 시 <바치는 노래>에서 누구나 절대자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고, 소설 <고라(Gora)>에서는 피부색과 처지는 달라도 인도인과 백인은 다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키플링이 차등론 문학에 머물렀다면 타고르는 대등론 문학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키플링은 잊혀졌지만 타고르는 아직 높이 평가되고 있다. “차등론이 부당하고, 대등론이 정당하다”고 널리 인정되는 까닭이다.” 영국의 차등론은 청산되고 인도의 대등론은 다음 시대로 나아가는 지표 구실을 한다. 대영제국은 진작 사라졌으나 인도는 끊임없이 성장하여 영국을 제치고 세계 5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이처럼 “선진이 후진이 되고 후진이 선진이 되는 역전이 인류역사에서 계속 일어났으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영국과 인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 역사에서도 선후 역전 현상이 분명하다.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고 청제국을 세웠다. 나라는 막강했으나 대국을 다스리려고 만주를 떠나야 했으며 한족과 소통하려다가 만주어도 잃어버렸다. 따라서 만주족은 강토와 언어, 역사를 다 잃어버리고 소멸되고 말았다. 만주족과 한족은 선후 역전을 이루어서 한족이 청을 물려받아 중국을 통치하고 있는데, 중국은 청과 마찬가지로 대국주의를 추구하고 있어 미래가 어둡다. 청의 반면교사를 알지 못하는 탓이다.
반면교사로서 대소 강약을 이해하지 않고 대국의 영광과 강국의 지배력을 추종하는 까닭에 강자 자멸의 길을 자초한다. 역사적으로도 제국은 다 자멸했으며, 자연 생태계에서도 거대한 몸집의 동물들은 멸종되었다. 강자 자멸의 원리는 “역사적 사실이고, 천지만물의 이치이다.” 미국도 강국을 추구하는 한 머지않아 자멸한다. 지금 미국의 트럼프는 힘의 우세를 내세워 자유무역을 거부하고 고율 관세로 보호무역을 하며 다른 나라들을 굴복시키고 있다. 그러나 미국 부채는 엄청나고 제조업은 거의 퇴조 상태에 이르러, 일방적 관세로 극복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트럼피즘은 강국으로서 마지막 몸부림이다.
6. 저자는 인류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가 아니라 차등과 대등이 투쟁해온 역사라고 한다. 계급투쟁이 어느 단계에서는 종식되고 계급 없는 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을 무너뜨리고 승리하게 되면,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어 횡포를 자행하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의 명분으로 삼은 평등을 강제로 실현하려고 새로운 권력을 휘둘러, 차등을 더 키워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러나 “대등을 위한 투쟁은 평화적인 투쟁이다.” “투쟁이 아닌 투쟁을 하는 것이 대등의 본질이다.” 대등론이 이론을 제기하여 차등론이나 평등론과 경쟁하면 타락하고 변질된다. “대등론은 이론이 아닌 이론이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대등이므로, 대등론은 따로 있지 않아도 된다.” “대등론은 살아가면서 창조주권을 대등하게 발현하여 모습을 드러내고, 의의를 입증한다.” 공연예술 창작에서는 차등을 부정하고 대등을 실현하려는 도전이 계속된다. 대등예술이 인류를 위해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대등을 이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깨우쳐주어 인류가 희망을 가지게 한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가 아니라, 차등과 대등이 투쟁해온 역사가 진실이다.
그러나 국사 교육은 정치사에 매몰되어 차등을 가르친다. “정치는 권력의 차등을 기본원리로 하고, 국내외의 다른 권력과 상극하는 관계를 가진다.” 통치자가 무력으로 적군을 물리치고 국토를 확장한 치적을 자랑하기 일쑤이다. 무력 침공을 한 통치자를 존경하고 패권주의를 칭송하는 것이 국사 교육이다. 남의 나라 전쟁에 관해서는 초연하지만, 자국이 전쟁을 겪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도록 부추긴다. 이처럼 국사는 정치사에 치우쳐 차등을 가르치고 상극을 조장한다.
정치사를 버리고 문화사를 가르쳐야 인류 역사는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정치사가 절대적이라고 하는 국사를 문화사는 상대적으로 인식하면서 경계를 허문다.” ‘정치사는 자국중심의 배타적 사고방식을 조장하지만, 문화사는 자타의 경계를 넘어서는 비교를 통해 제각기 소중하다는 대등한 평가에 이를 수 있다.’ 불탑을 두고 비교해 보면, “중국은 전탑, 한국은 석탑, 일본은 목탑”이어서 우열을 다툴 필요가 없다. 불교에 불탑이 있다면, 이슬람에는 첨탑이 있고, 기독교에는 종탑이 있다. 서로 다른 탑을 두고 문화사 공부를 하면 적대적으로 다투지 않고 비교문명사에서 세계문명사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사 중심의 국사로 국가주의를 주입할 것이 아니라, 문화사 중심의 역사로 인류의 문화와 문명을 포괄적으로 공부하여 제각기 창조주권을 발현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화사는 정치사의 경계를 넘어선다. 정치사의 경계를 넘어서면 ‘유럽연합’과 대등한 ‘동아시아연합’을 이룰 수 있다. 종교적으로 동아시아는 불교가 공통이고 유교도 공유하여 연합의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 한꺼번에 합치는 것은 어렵고 서로 도움이 되는 두 나라가 먼저 합쳐야 하는데, 한국과 몽골이 앞설 필요가 있다. “몽골은 국토가 넓고 인구는 적으며 한국은 인구는 많고 국토가 좁은 것이 상반되면서 대등한 조건이다. 한국의 기술과 몽골의 자원이 결합되면 서로 큰 도움이 된다.”
이어서 월남 또는 대만과 연합을 하고, 몽골과 한국, 대만, 월남이 연합을 이루어 판도를 바꾸어놓으면 일본도 우월 의식을 버리고 대등한 화합의 길을 택하여 연대할 수 있다. 이러한 동아시아 5국 연합은 대국을 자처하던 중국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시기가 다소 늦어져도 중국이 포함되는 동아시아연합을 이루면, 유럽연합과 미주연합, 이슬람연합과 대등한 관계를 이룰 뿐 아니라 기독교연합과 이슬람연합의 다툼도 중재할 수 있다. 문명권 연합은 영역 확장이 아니라 국경을 없애는 데 목적을 둔다.
이런 거대한 역할을 하는데 정치적 발상 못지않게 예술의 사명이 크다. 전통적인 민중예술은 노동과 사랑, 예술이 하나인 대등예술을 구현했다. 모내기 소리가 구체적인 보기이다. 그러나 상층은 신분 차별을 하면서 노동을 하지 않고 사랑과 예술도 제각각이었다. 현재 상황은 노동과 사랑, 예술이 더 멀어졌다. 노동은 임금으로, 사랑은 조건으로 결정되며, 예술은 작가나 하는 전문활동이 되고 말아서 분열이 더 커졌다. 그러므로 대등예술은 분열된 현대예술을 바로잡고, 철학에서 하지 못하는 대등론을 설득해 나가는 임무 자각이 긴요하다.
7. 학문은 이론을 만드는 작업이다. 이론은 “특수성을 넘어서서 보편성을 갖추어야‘ 성립된다. 자연현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자연학문 이론이 특히 명쾌하다. 자연학문과 달리 국문학 이론은 많은 연구비를 들이지 않고도 가능하며, 전문적 식견이 없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연구비가 모자라는 후진국에서도 자국문화 연구로 보편적 의의를 지닌 인문학문 이론을 정립할 수 있어서 선후진이 역전을 일으킬 수 있다.
이론은 3단계로 나아간다. 사실판단의 단계에서 인과판단의 단계로 나아가, 가치판단의 단계에 이른다. 인문학문은 사실판단과 인과판단, 가치판단을 연관성 속에 포착하는데, 자연학문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별개로 취급한다. “학문의 이론은 이론으로 그치지 않고, 실천을 위한 지침이고 설계이어야 한다.” 그러자면 “사실판단이나 인과판단에 그치지 않고 가치판단을 갖추는 이론”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이론을 수립하자면 용어가 제대로 정립되어야 한다. 사실 설명의 일상용어가 아니라 이론 정립의 개념용어가 필요하다. 용어에 이어 ‘분류’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논리’가 새롭게 개척되어야 한다. 이론 문장은 수학처럼 “짧고 쉽고 정확”해야 바람직하다. 중세에 이룩한 동아시아 공동문어문명을 계승하려면 한문 유산을 끌어안고 한글 문장을 써야 마땅하다.
문학의 율격론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작품 분석을 예증으로 들어 실감나게 이론 수립을 설득했다. 저자는 시의 ‘토막’과 ‘줄’, ‘음절’의 수에 따라 민요와 시조, 사뇌가, 가사, 경기체가, 서사무가, 용비어천가 등의 율격을 기본형과 일반형, 특수형으로 설정하고 반복과 변화 양상에 따라 서로 영향관계를 포착하면서 문학사적 전개과정을 펼쳐 놓았다. 신라의 향가와 일본의 와카[和歌]를 비교하고 같고 다른 이유를 같은 논리로 설득했다. 불국의 상징주의 시가 중국, 월남, 일본, 한국, 아랍의 각국 시에 미친 영향과 변화를 살펴 율격론으로 인류문명사를 포착하는 거대이론의 초석을 놓았다.
문학의 미의식 논의는 작품도 흥미롭고 이론도 명쾌하다. 저자는 묘미 있는 작품 둘을 들고 다른 점을 대립적으로 찾아서 ‘차등’과 ‘대등’을 포착한다. 차등은 차등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등을 흡수하고, 대등은 대등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차등을 흡수한다고 더 구체화한다. 작품에서 차등과 대등은 서로 흡수하는 관계뿐만 아니라 격파하는 관계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그러한 관계는 가) 대등을 흡수하는 차등, 나) 차등을 흡수하는 대등, 다) 대등을 격파하는 차등 라) 차등을 격파하는 대등의 4가지 양상으로 존재한다. 이 양상은 각각 숭고, 우아, 비장, 골계라고 하는 미적 범주 또는 미의식에 해당된다. 저자는 오래 전에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을 준거로 미적 범주론을 처음 개척했는데, 이 책에서 더 쉽고 간명한 준거로 ‘미의식’ 이론을 더욱 진전시켰다. 미의식은 다양한 변이가 열려 있다. 그러므로 변이에 관한 이론은 미완성이 완성이다.
미의식 이론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이론에 이끌려서 남의 미의식을 표준처럼 떠받들게 된다. 고대 그리스 연극의 생명을 카타라시스라고 하자, 연극은 모두 카타라시스여야 하는 줄 착각했다. 그러나 인도에는 ‘라사’ 연극이 있고, 한국에는 ‘신명풀이’ 연극이 있으며, ‘라사’와 ‘신명풀이’ 연극은 ‘카타리시스’ 연극과 미의식이 다르다. 카타르시스 연극이 신과 인간의 차등에 입각해 영웅적 인간이 좌절하는 비장이라면, ‘라사’ 연극은 신과 인간이 평등에 입각해 신인합일의 화해를 이루는 우아이고, ‘신명풀이’ 연극은 사람 스스로 신명을 적극적으로 풀어내 역동적인 삶을 대등하게 누리는 골계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대중가요의 판도를 바꾸어놓은 케이팝의 신명풀이처럼 영화계도 ‘신명풀이’ 영화로 세계 영화의 판도를 바꾸어놓기를 기대한다.
8. 문학사 연구에서 이론을 표방해도 이론이 미흡해 차질을 빚게 된 사례를 비판적으로 거론했다. 문학사 이론의 보편적 원리를 사계절의 변화나 유물사관, 사회경제사로 해결하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문학 자체를 대상으로 독자적인 이론을 수립해야 타당하다고 주장하며, ‘기일분수(氣一分殊)’에 입각한 생극론의 문학사를 서술했다.
문학사의 뿌리로 구비문학을 주목했다. 구비문학은 기록문학 이전의 원시문학이라는 차등론을 버리고 대등론에 입각해서 “문학사는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의 관계사이며, 기록문학과 구비문학은 하나가 우세하면 다른 것은 열세인 관계를 서로 가지고 맞물려 있다.”고 규정했다. 세계문학사에서 기록문학의 발전 양상과 거꾸로 구비문학이 성행한 관계를 밝히고, 구비문학이 기록문학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 갈래를 들어 해명했다.
구비문학과 기록문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문문학과 한글문학도 있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문명권마다 문명권 공유의 문자문학과 자국의 문자문학이 있어서 그 관계 양상이 복잡하다. 그러나 “한문은 동아시아의 공유재산인 공동문어였다.”고 포착하는 순간 이론적인 길이 열린다. 문명권의 공동문자로 창작된 ‘공동문어문학’과 자국어로 창작된 ‘민족어문학’으로 세계 모든 문명권의 문학을 일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권 내부의 문학도 문명권의 핵심과 맺는 관계의 위상에 따라 중심부와 중간부, 주변부로 나누고, 공동문어문학과 민족어문학의 발전 수준을 다루었다. 중심부는 공동문어문학이 앞서고 민족어문학이 뒤떨어진 반면, 주변부는 반대로 공동문어문학이 뒤떨어지고 민족어문학이 앞섰으며, 중간부는 그 둘이 서로 대등하다. 중심부인 중국, 중간부인 한국, 주변부인 일본의 한문학과 자국문학 관계를 제각기 들어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한문문명권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문명권, 라틴어문명권의 사례도 다루어 일반화를 이루었다.
문학사의 시대구분도 중세와 근대로 단순화하지 않고 중세전기와 중세후기,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로 세분했다. 단순한 연대기적 시대구분이 아니라, 실제 문학사의 변모 양상과 철학의 전환 및 사회사의 진전을 총체적으로 수렴한 시대구분이다. 시대구분론은 미래를 전망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지금은 근대에서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이행기이다. 근대에는 ‘국가’만 중요시하다가, 다음 시대로 나아가는 이행기에는 ‘국가’와 ‘문명권’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며, 다음 시대로 넘어가면 ‘문명권’이 서로 협동해서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시대에 이른다.
‘세계’가 하나가 되면 ‘문명권’과 ‘국가’, ‘지방’이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존중하며 상극이 상생이도록 하고, 차등이 대등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이상이 아니라 실질적 의미를 지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지구에 머무르지 않고 외계를 왕래하면서 인류는 세계라는 공간에서 함께 사는 형제임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우주여행을 하며 외계와 교섭할수록 ‘세계’가 인류공동체로서 연대를 이루기 마련이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하나이고 세계도 하나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지구의 삼라만상과 함께 지구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대등하다는 만물대등론에 이르는 것이 최선이다.
만인대등론에서 만생대등론, 만물대등론으로 나아가는 철학이 생극론이다. 생극론은, 상극인 모순이 사물의 본질이며 투쟁으로 모순을 해결한다는 변증법을 극복한 이론이다. 상극인 모순뿐만 아니라 상생인 조화도 사물의 또 다른 본질이며 ‘상생하며 상극’하고 ‘상극하며 상생’하는 ‘생극’으로 현실을 발전시킨다는 것이 생극론 철학이다. 따라서 변증법에서는 투쟁만 있으되, 생극론에서는 ‘상생이다가 상극’이거나 ‘상극이다가 상생’인 ‘역전’이 있는가 하면, ‘상생이면서 상극’이거나 ‘상극이면서 상생’이 서로 차이가 없는 ‘대등’을 이룬다. 그러므로 “생극론은 역전론이기도 하고, 대등론이기도” 해서 타당성과 유용성이 확대된다.
민족해방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작은 힘으로 큰 힘을 무너뜨렸으므로 역전이다. 역전은 양면으로 이루어진다. 강자는 큰 힘을 더욱 확대하려다가 패배하고 약자는 대등을 이룩하려고 해서 승리한다. 역전은 차등을 뒤집어엎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승패를 부정하고 대등을 실현하는 데까지 이른다. 인간과 동물, 식물의 관계양상도 생극론으로 따져보면 대등하다. 식물은 탄소동화작용으로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며 동물을 먹여 살리고 숨을 쉬도록 한다.
“식물이 없으면 동물은 살 수 없고, 생겨나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동물은 뛰어다니면서 한자리에 서 있는 식물을 괴롭힌다. 사람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식물에 더 많은 해악을 끼친다. 식물이 살 수 없게 생태계를 파괴하고, 지구의 온도를 높여 생물이 멸종되게 한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아차리면 만물영장론이 얼마나 편파적이고 자기중심주의인가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동식물과 달리 “사람은 생각을 점검하고 잘못을 반성하는 능력이 있다.” 따라서 “금수는 물론 초목까지 삶을 누리는 것이 善”이라고 하며 모두 대등하다고 했다. 홍대용의 <<의산문답(毉山問答)>>에는 ‘사람의 처지에서 만물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만물은 천하지만, 만물의 처지에서 사람을 보면 만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그러나 하늘에서 이것들을 보면 사람과 만물이 모두 균등하다’고 했다.
사람과 만물의 대등한 관계는 사회학문의 민주주의로 해결하지 못한다. 자연학문의 생태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자연학문의 생태주의는 사실판단에 머물러서 원인판단과 가치판단에 이르는 인문학문의 철학적 통찰력을 획득하지 못한다. 따라서 세 갈래 학문을 하나로 아우르는 대등생극론 철학이 긴요하다. 저자의 학문 이론과 철학의 요체를 한마디로 말하면 대등생극론이라 할 수 있다.
대등생극론은 인간과 생물, 만물의 3단계로 대상이 확대된다. 모든 사람이 서로 대등한 관계를 이루며 상생하고 상극하는 ‘만인대등생극론’은, 모든 생물이 서로 대등한 관계를 이루며 상생하고 상극하는 ‘만생대등생극론’에 귀속되고, 이것은 다시 모든 것이 서로 대등한 관계를 이루며 상생하고 상극하는 ‘만물대등생극론’에 귀속된다. 그러므로 저자의 대등생극론은 사실상 만물대등생극론이라 할 수 있다.
9. 저자는 대등생극론을 이론 자체로 말하거나 학문방법론을 설파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끊임없이 우리 삶과 문학과 관련하여 학문학을 말하며, 역사적 사실과 국제적 관계를 사례로 들어서 생극론과 대등론의 이치를 입증한다. 삶과 앎이 함께 가는 학문론을 펼치고 근대 이후의 다음 시대를 열어가는 미래철학을 제시한다. 각 분과학문의 여러 전공자들이 제각기 말하는 인류 평화와 지구촌의 지속 가능성에 관한 여러 주장들을 총괄하여 대등생극론 철학을 거대 이론으로 수립함으로써, 한국 철학 전통으로 세계철학사의 새 지평을 개척하는 창조력을 발휘했다.
저자의 학문학은 구체적으로 문학이론 또는 문학사 중심의 역사철학을 거점으로 삼지만, 결코 문학이나 인문학문의 의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총론의 학문학은 세계 학문사는 물론 인류 문명사의 대전환을 기획하고, 각론의 문학사는 세계문학 이론의 판도를 바꾸어놓은 것은 물론, 인간사의 문제를 넘어서 우주 만물의 삼라만상을 아우르는 총체이론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인류의 현실적인 삶 전반을 성찰하고 다음 시대를 전망하는 철학적 통찰로서 학문의 일반이론을 창조적으로 제시해 놓은 저서로 인식해야 마땅하다.
저자의 학문론이 학문 일반이론 구실을 하는 까닭은 3가지 요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누구나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 논리로 저술해서 대중들과 정책 입안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대중매체인 유튜브 강의를 통해 세상과 널리 소통하고 있는 점이다. 둘은 인류 문명사의 전환과 같은 거시적인 문제를, 분과학문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통학문적 총체이론으로 수미일관되게 해결하고 있는 까닭이다. 셋은 일시적인 문제해결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와 인류를 넘어서 우주의 천지만물에 두루 유익한 보편적 거대이론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과학문으로는 자생적 한국문학사 이론으로 세계문학사의 보편성을 해명하고, 학문 일반으로는 한국 철학으로 서구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문명사를 새롭게 전환하는 역사철학을 창출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앎의 지혜 학문의 위 아래 공사>>는 제목이 표방하는 것과 같이 크게 두 학문 공사로 이루어져 있다. 위에서 학문학을 기획하는 설계 작업과, 아래에서 문학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시공 작업을 유기적으로 수행한 노작이다. 아래위의 설계 공사와 시공 공사가 맞물려 학문의 상하 공사가 마치 강증산의 ‘천지공사’처럼 이루어져, 다음 시대에 도래할 미래 문명과 개척해야 할 새 학문의 청사진을 제시해 두었다. 그러므로 저자의 학문 공사는 잠자고 있는 학계의 판도가 지진을 일으키며 대전환이 일어나길 촉구하는 학문 설계로서 메타학문론이라 할 수 있다.
학문 공사는 문명 공사로 이어지는 까닭에 사실상 다음 시대의 새 문명 창조를 기획하는 데까지 이른다. 따라서 이 저서 한 권으로 저자의 방대한 학문 세계와 역사철학을 일목요연하게 포착하며 미래 문명을 구체적으로 전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학문에 입문하는 초학자일수록 이 책을 먼저 읽고, 일생의 학문 계획을 수립하는 실천 지침으로 삼는 것이 긴요하다. 그래야 학문을 혁신하고 새 문명을 창조할 수 있다. 진정한 창조학은 메타학문으로서 ‘학문공사’이자, 다음 시대를 열어가는 문명 전환론으로서 ‘문명공사’라 해야 마땅하다.

첫댓글 학문의 위 아래 공사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