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여왕(眞聖女王)
신라의 세 번째 여왕이자 마지막 여왕 진성여왕은 각간 위홍의 보좌로 정사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위홍이 일찍 죽은 뒤 민란과 호족들의 발호가 극성을 부리고 최치원을 통한 개혁정책까지 무산되자 스스로 왕위에서 내려온 여걸이었다.
신라의 진성여왕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행실이 음란했으며 측근 정치로 나라를 망친 군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대의 기록인 최치원의 〈사사위표(謝嗣位表)〉에는 ‘사심이 없고 욕심이 적으며 몸에 병이 많았지만 한가함을 사랑하고 적당한 시기라야 말을 한다.’라며 여왕의 겸손한 인품을 찬양했고,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백월보광탑 비문에서는 ‘은혜가 바다같이 넘쳤다.’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진성여왕은 아버지 경문왕이 승하한 뒤 오빠인 헌강왕에 이어 등극한 정강왕이 요절하자 어쩔 수 없이 보위를 떠맡았다.
하지만 그녀가 떠맡은 신라의 현실은 극심한 천재지변과 함께 왕조의 말기 현상인 호족들의 득세와 각처에서 발생하는 민란으로 인해 정상적인 통치가 불가능했다.
여왕은 그런 암울한 상황 앞에서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고 당나라에서 돌아온 최치원을 등용하는 등 자구책에 힘썼지만 기득권층의 반발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자진하여 왕위에서 물러났다.
신라의 세 번째 여왕이 되다
진성여왕(眞聖女王)은 신라의 제51대 국왕으로 성은 김(金)씨, 휘는 만(曼) 또는 원(垣)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제48대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며 헌강왕과 정강왕의 누이동생이다.
경문왕은 먼저 세상을 떠난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벼락 맞아 무너진 황룡사 대탑을 무리하게 개축했는데, 그 와중에 발생한 지진과 홍수로 인해 기근이 일어나자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874년(경문왕 14년) 대탑이 완공되었지만 민심이 돌아선 상태에서 일어난 근종(近宗)의 반란으로 고심하다 병을 얻어 승하했다.
875년(헌강왕 원년), 경문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헌강왕은 왕실의 실력자 위홍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백성들을 위무했다.
그의 치세에는 천재지변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신라는 10여 년 동안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당시 서라벌에서 바닷가에 이르는 모든 집에 기와를 올렸고 숯으로 밥을 지어 먹었으며 도처에서 격양가가 울려 퍼졌다.
883년(헌강왕 9년)에 일본에서는 신라에 황금 3백 냥과 야명주 10개를 보내 우의를 다졌고, 당나라에서 일어난 황소의 난을 피하여 최치원을 비롯한 수많은 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인재들도 넘쳐났다.
그러나 886년(헌강왕 12년) 7월 헌강왕이 재위 12년 만에 승하하자 태자 김요가 몹시 어린 탓에 동생 정강왕이 보위를 이어받았다.
정강왕의 시기에는 그 동안 잠잠했던 천재지변이 다시 기승을 부리면서 신라를 위기로 몰고 갔다.
왕이 즉위한 그해 심하게 가뭄이 들더니, 이듬해 1월에는 한산주에서 모반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근심하다 병석에 누운 정강왕은 시중 준흥을 불러 유언을 남겼다.
내 누이는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도 남달라 사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예전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으로 섬기도록 하라.
정강왕이 재위 1년여 만에 승하하자 유언에 따라 887년(진성여왕 원년) 7월 진성여왕이 즉위했지만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을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급성장한 지방의 호족 세력이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왕권은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진성여왕은 즉위와 동시에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모든 주와 군의 조세를 1년간 면제시켰다.
또 황룡사에서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고 백성들과 함께 1백 명의 고승으로부터 설법을 들었다.
이어서 연인이자 숙부인 위홍을 각간으로 임명하여 흔들리는 나라의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각간 위홍은 진성여왕의 뜻을 받들어 승려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을 만들었다.
이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위홍이 향가 수집을 핑계로 당시 중앙 정부를 백안시하던 호족과 지방관들의 정세를 탐지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아울러 〈우적가〉, 〈찬기파랑가〉, 〈모죽지랑가〉, 〈처용가〉 등의 향가가 품고 있는 주술적인 힘에 기대어 난국을 평정하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진성여왕은 각간 위홍의 정치력에 의존하여 정사를 안정시키려 했지만 887년(진성여왕 1년) 2월 위홍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난국에 직면하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임금이 평소 각간 위홍과 간통했는데 그가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봉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진성여왕과 위홍은 신라 왕실의 전통에 걸맞게 근친혼이자 사실혼 관계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위홍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진 진성여왕은 황음과 색탐에 빠져들었다.
위홍의 죽은 뒤 여왕은 몰래 아름답게 생긴 소년 두 세 사람을 끌어들여 음란한 행위를 했다.
또 그 사람들을 중요한 직책에 앉히고 나라의 정책을 맡겼다.
그로 인해 아첨하는 무리가 방자하게 뜻을 폈다.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상벌이 공평하지 않아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해이해졌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시 여왕의 유모인 부호부인은 진성여왕을 더욱 타락시키면서 권력을 남용했다.
그로 인해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잡혀 들어가 모진 형벌을 받았고 충신들이 조정에서 쫓겨났다.
그러자 서라벌 경내에 다음과 같은 주문이 퍼졌다.
나무망국찰니나제(南無亡國刹尼那帝)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 부이사바하(鳧伊娑婆訶)
《삼국유사》 ‘기이편·진성여왕 거타지조’
이 주문에서 ‘찰니나제’는 진성여왕이요,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명의 관리이며, ‘우우삼아간’은 진성여왕을 모시는 세 명의 측근이고, ‘부이’는 유모 부호부인을 뜻한다.
곧 황음무도한 여왕과 측근들이 설치고 있으니 제발 나라를 망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기원하는 주문이었다.
대노한 진성여왕은 즉시 관리들에게 범인을 잡아오게 했다.
그러자 관리들은 대야주에 은거하고 있던 거인(居仁)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거인은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 당대에 신라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하늘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燕丹泣血虹穿日(연단읍혈홍천일)
鄒衍含悲夏落霜(추연함비하낙상)
今我失途還似舊(금아실도환사구)
皇天何事不垂祥(황천하사불수상)
연단의 피어린 눈물에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추연의 품은 슬픔에 여름에도 서리가 내렸다.
지금 나의 불행한 처지가 그들과 같으니
하늘은 어찌하여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는가.
이 시에서 연단(燕丹)은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 자객 형가를 보내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연나라 태자 단을 뜻하고, 추연(鄒衍)은 전국시대 제나라 출신으로 음양오행설을 창시했는데 연나라 혜왕이 그를 옥에 가두자 억울하다며 통곡하자 5월인데도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거인이 이 시를 짓자 과연 하늘이 분노했는지 갑자기 번개가 치고 구름이 몰리더니 거센 빗줄기와 함께 굵은 우박이 쏟아졌다.
깜짝 놀란 진성여왕은 그를 석방한 다음 사면령을 내려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죄수를 풀어주었고 승려 60명에게 도첩을 내렸다.
진성여왕의 치세에는 귀족들의 사치가 만연했던 반면 가난하게 사는 백성들이 많았다.
그처럼 현격한 빈부격차는 신라 사회를 바닥부터 금이 가게 한 주요 원인이었다.
일례로 《삼국유사》에는 진성여왕의 치세에 살았던 효녀 지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서른이 넘도록 혼인하지 않았던 지은은 눈 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귀족의 집에 노비로 팔려간다.
그 대가로 얻은 쌀로 밥을 지어 바치자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가 몹시 서러워했다.
마침내 두 모녀가 껴안고 통곡했는데, 이 슬픈 사연이 궁궐에까지 알려졌다.
진성여왕이 모녀를 가엾이 여겨 집과 곡식을 하사하고 군사를 보내 보호해 주었다는 내용이다.
당대는 또 신라 해적들의 전성기였다.
884년(헌강왕 10년)에 현춘이라는 해적 두목이 배 100여척, 병력 2,500여명을 이끌고 규슈 지역을 약탈하다 사로잡혔다는 기록이 있다.
893년(진성여왕 7년) 견당사 김처회는 바다에 빠져 죽었고 894년 최치원을 당나라에 보내려다가 도적이 많아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
황해에 해적들이 횡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진성여왕이 즉위한 887년(진성여왕 1년)에는 큰 흉년이 들었으므로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이 크게 늘어났다.
이듬해인 888년(진성여왕 2년)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금이 크게 줄어 국고가 텅텅 비었다.
경각심을 느낀 여왕은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했지만 지방관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전국 각처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도적떼가 판을 쳤다.
신라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중앙정부는 어느덧 지방에 대한 통제능력을 상실했다.
그로 인해 지방의 호족들은 저마다 군사를 양성하여 세력을 과시했고 왕권은 겨우 수도인 서라벌 주변에만 미칠 정도였다.
고인 물은 결국 썩기 마련, 마침내 889년에 사벌주(상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기록상으로 볼 때 한국사 최초의 민란으로 규정된다.
당시 진성여왕의 명을 받고 토벌에 나선 장수 영기가 반란군의 규모에 겁을 집어먹고 진군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지역의 촌주인 우연이 적과 맞서 싸우다 죽자 진성여왕은 영기를 처형하고 10살 남짓한 우연의 아들을 촌주로 삼았다.
이 민란의 평정 여부는 기록에 없다.
다만 그 후 현지에서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활동했으므로 이들의 세력에 편입되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진성여왕 재위 5년째인 891년(진성여왕 5년) 10월 북원(원주)의 군벌 양길이 궁예에게 1백여 명의 기병으로 북원(원주)과 명주(강릉) 관내를 공격했다.
892년(진성여왕 6년)에는 견훤이 무진주(광주)를 점령하고 왕을 자처하자 무주 동남의 군현이 항복했다.
894년(진성여왕 8년) 10월에는 궁예가 북원에서 600여 명을 이끌고 하슬라(강릉)를 침범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칭했고, 895년(진성여왕 9년) 8월에는 저족, 성천의 두 군을 취하고 철원을 비롯하여 10여 개의 군현을 장악했다.
이처럼 당시 궁예와 견훤은 공식적으로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후삼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896년(진성여왕 10년)에는 서남쪽에서 ‘적고적(赤袴賊)’이라 하여 붉은 바지로 옷차림을 통일한 도적떼가 나타나 서라벌 인근 모량리까지 쳐들어오기도 했다.
894년(진성여왕 8년), 진성여왕은 최치원이 건의한 〈시무 10조〉를 받아들이면서 그를 6등급인 아찬으로 등용했다.
아찬은 6두품이었던 최치원에게 임명할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이었다.
〈시무 10조〉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당대에 필요한 최선의 개혁안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성여왕의 안간힘은 최치원이 귀족들의 압력 때문에 외직인 태수로 밀려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자 여왕은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했고, 1년 뒤인 895년(진성여왕 9년) 10월, 큰오빠 헌강왕의 서자 김요(金嶢)를 태자로 봉했다.
《삼국사기》에는 효공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 헌강왕이 사냥 구경을 하다가, 길가에서 한 여인을 보았는데 자태가 아름다웠다.
왕이 마음속으로 그녀를 사랑하여 수레에 태우고 행재소에 와서 야합했는데 바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가 장성하자 체격이 크고 용모가 걸출하므로 이름을 요라고 했다.
진성왕이 이 말을 듣고 그를 궁에 불러들여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나의 형제자매의 골격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데, 이 아이는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 헌강왕의 아들이다.”라고 말하고, 곧 관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높이 봉했다.
한편, 《삼국유사》 ‘거타지조’에는 ‘아찬 양패가 왕의 막내아들(季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진성여왕에게는 최소한 두 명의 아들이 있었으리라 추측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
진성여왕은 897년(효공왕 원년) 6월 1일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년 이래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난다.
이는 나의 부덕한 탓이다.
어진 사람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진성여왕은 그와 함께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카 요의 인품이 신라의 종실을 일으킬 만하니 그로 하여금 나라의 재난을 진정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그 후 진성여왕은 북쪽 궁궐로 거처를 옮기고 반 년 동안 태상황으로 머물다 그해 12월 4일 승하했다.
진성여왕 사후 신라에는 다섯 명의 국왕이 보위에 올랐지만 이미 대부분의 영토는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37년 동안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신라는 결국 935년(경순왕 9년)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에게 귀부함으로써 56대 992년에 달하는 천년왕국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