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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 읽기 자료입니다.
5.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과 이후의 연구 작업
맑스는 자신의 일곱 권의 초고에 포함된 자료들을 높이 평가했다. 이미 앞에서 인용한 엥겔스게 보낸 편지에서처럼, 그것은 정말 ‘몇 가지 발전된 측면’을 가졌다. 그가 새롭게 성취해낸 이윤 이론에 대한 자신의 평가, 즉 “모든 측면에서 근대 정치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 그리고 가장 어려운 관계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요강3, 15)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평가의 일부분에 속한다. 라살에게 보낸 편에서도 그는 이것을 “15년간의 연구 결과, 따라서 내 생에 최고 기간”이라 말한다. 그리고 같은 편지에서 더 강력하게(여기에서 맑스는 기껏해야 ‘과학적’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즉 “…사회 관계의 중요한 관점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표현”(MEW 29, 566)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1859)에 나타나 있는 성취감이나, 그 개요 및 요약에 나타난 어감 등은 맑스가 이 노트들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맑스 자신이 평가한 것처럼−물론 그는 매우 겸손하지만−이 책의 위상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독특하다. 그러나 그것은 맑스가 결코 위대한 어떤 것을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성취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수록 아직도 더 성취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수고의 성과를 후자의 관점에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인생의 말미에 맑스는 자신의 ‘완성된 저작들’에 대해 제기된 물음에 대해, “그것들은 가장 먼저 씌어졌어야 했었다”라고 대답한다.(요강3,290)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고의 형태는 이러한 평가와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중심적인 문제의 내적 전개 순서에 관한 문제인데, 맑스가 엥겔스에게 써보냈듯이 “…나의 수고를 읽는 것은 나에게도 거의 일주일은 걸릴 걸세. 그 골칫거리는 수고(이것이^ 인쇄되면 상당히 두꺼운 책이 될 것인데)의 모든 것이 무와 양배추처럼 뒤죽박죽 되어 있다는 것이네. 그러나 더 큰 골칫거리는 수고의 뒷부분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었다는 점일세.”(MEW29, 566?) 그러나 그것은 단지 문체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 수고의 형태는 첨예한 문제를 야기했다. 이러한 내용의 계기, 즉 서술 형식(넓은 의미에서)과 글쓰기 스타일(좁은 의미에서)은 10여 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맑스가 매달려야 했던 복합적 갈등 요소들 중 하나였다. 이 이야기도 요강의 중요한 일부분을 이룬다.(요강3,290-291)
수고의 앞부분은 몇 가지 계획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들 중 하나는 서설(요강1, 80)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즉 그것은 “(1) 다소 모든 사회 구성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일반적, 추상적 규정성들…”에서 출발하여, 자본, 임노동, 토지 소유, 국가, 국제 무역, 세계시장 그리고 공황과 관련된 주제들을 포함하는 네 개의 부수적인 절들을 설명하는 데로 나아간다. 두 번째 계획은 「화폐에 관한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일반적, 추상적 규정성들’을 생략하는 것이다. 어쩌면 맑스는 여기에서 이미 서설과의 연관성을 포기한 듯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계획의 내용은 대체로 처음 것과 동일하게 나타났을 것이다(요강1, 220-221). 나머지 두 개의 부수계획은 더 깊이 있는 정밀함을 보여준다(요강1, 263, 279-286). 수고를 완성하기 전인 2월말쯤에 쓴 편지에서 맑스는 총 여섯 권이 될 책의 전반적인 계획을 그리고 있다(MEW 29, 549). 즉, 1. 자본, 2. 토지소유^, 3. 임노동, 4. 국가, 5. 국제무역, 6. 세계시장.(요강3,292-293)
4월초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맑스는 이 여섯 권의 책에 관한 계획을 분명하게 반복하고 있다(같은 책, 312쪽). 이와 동일한 구상이 이후의 편지에서도 계속 반복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맑스가 이 계획의 논리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는 증거는 없다. 사실상 수고의 여섯 번째 노트에서 전개되는 세계시장과 신용체제에 대한 논의는 자본론 3권에서 언급된다. 물론 맑스는 신용체제에 관해서 그것은 “이 저서(즉 [자본론])의 범위 안에 올 수 없는, 그리고 사실상 이 저서의 후속 편에나 속하는 주제”([자본론] 3권, 110)라고 말하였다.(요강3,292)
이 여섯 권의 저작 전체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이라는 포괄적 제목 안에서 계획되었지만, 독일인 출판업자에 의해 일련의 분책들로 출간되었다.(요강3,292)
따라서 현재의 수고는 이 전체 저작(opus)의 기본적인 골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요강]에 포함된 좀더 깊이 있는 책들에 대한 구상은, 오직 국가에 관해서만 쓰려고 했던 네 번째 책을 포함하여, 애초에 의도했던 내용과 관련된 포괄적인 관점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모스크바 출판사가 소유한 채 아직도 출간되지 않는 환율과 공황에 대한 1854년과 1855년의 수고는, 다시 말해 계획된 작업중 국제 무역과 세계시장에 해당하는 5권과 6권은, 요강과 자본론의 일부 내용 안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맑스는 이 여섯 권의 책을 거의 같은 분량의 크기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맑스는 일곱 권의 수고를 완성하기 전에 쓴 편지에서 “나는 여섯 권으로 나누어진 그 책 전체를 균등하게 쓰려고 의도한 바 없다네. 오히려 나는 뒤의 세 권에 대해서는 대강의 기초적인 마무리만 지으려 했지. 반면 기초적인 발전들을 온전히 포함하고 있는 앞의 세 권은 세세한 교정 작업이 필요할 거라네.”(MEW 29,554)라고 쓰고 있다.(요강3,292-293)
그러나 이러한 불균형은 이후의 논리 전개에서 핵심적인 논점이 된다. 1862년 말에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를 달아 독립적으로 출판하려고 했던 여섯 권의 책 중 제1권(‘자본’)은 그와 같은 비율로 된 수고다(MEW 30,630). 그러나 이 1권에서조차 책의 세부 구성은 매우 불균형하게 발전되었다.(요강3,293)
애초 6권으로 계획된 책들 중 (자본과 관련된) 첫 번째 권은−1858년 4월 2일 엥겔스에게 쓴 편지 속의 계획대로라면(MEW 29,312)−다음과 같은 4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었다. (a) 자본 일반 (b) 경쟁 (c) 신용 (d) ‘가장 완전한 형태(공산주의로 넘어가는 이행기)로서의 주식자본과 그것의 제반 모순들’. 그리고 이들 네 개의 절 중에서 첫 번째 절(즉 ‘자본 일반’)은 다시^ 1. 가치, 2. 화폐, 3. 자본 등의 세 부분으로 분할된다.(요강3,293-294)
[요강]의 핵심 부분은 정확히 이 세 부분의 내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첫 번째 두 부분은 「화폐에 관한 장」에 포함되며, 세 번째 부분은 「자본에 관한 장」에 포함된다. 그 전체적인 규모에서 볼 때 요강은 올림푸스산의 전체 모습과도 같이 방대한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원래 계획된 여섯 권 중 6분의 1에서 다시 그것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자본론 전3권 자체도 그 주제에 있어서는 원래 자본에 관해 구상된 네 권의 책 중 한 권에 지나지 않는다.(요강3,294)
이러한 불균형 문제가 한층 더 심각하게 나타난 데에는 두 가지의 결정적인 요인이 있다. 우선은 시간과 돈의 부족이다. 맑스는 계속되는 질병과 일부 보나파르트주의자(1860~61년의 전기간 동안)의 중상모략에 시달렸다. 또한 생활비 부족과 런던에서의 정치 활동 요구로 인해 여러 시기에 걸쳐 이 작업을 중단해야 했던 것이다. 다른 중요한 요인은 이 저술의 정치적 내용과 관련된 공중의 취향을 적절하게 고려하는 문제, 즉 이 저술의 예상 독자에 맞는 올바른 서술 방법을 찾는 문제였다.(요강3,294)
맑스는 1858년에 [요강]의 「화폐에 관한 장」을 2회에 걸쳐 다시 집필하였다. 개정된 부분을 살펴보면 논쟁점의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다리몽과 프루동주의자들에 대한 한두 마디 정도의 부드러운 언급을 제외하면, 이전의 뚜렷한 비판이 사라졌다. 그리고 생산양식의 역사적 이행으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문구들도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리카도에 대한 몇몇 신랄한 비판뿐이다. 그러나 매우 흥미롭게도 헤겔 철학의 어법 대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반적인 어조는 맑스가 어느 편지에서 “엄밀하게 과학적인, 즉 경찰의 엄격한 검열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썼던 그런 어투였다. 당시 독일에서는 레닌이 살았던 차르 치하의 러시아처럼^ 모든 인쇄물에 대한 경찰의 검열이 행해졌다(MEW 29, 551). 맑스는 이 수고를 1859년 2월에 “우리 당을 위해 과학적 승리가 달성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보낸다. “그러나 이것이 출판업자의 ‘망설임’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많은 독자들에게 팔릴지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증명되어야 할 겁니다.”(같은 책, 573)(요강3,294-295)
원래 맑스는 「자본에 관한 장」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첫 번째 분책 안에 넣으려 했었지만 이후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가 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출간 전에 라살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신도 알다시피 첫 번째 분책은 아직 중요한 장, 즉 「자본에 관한 장」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을 정치적 장 위에 펼쳐 놓았는데, 왜냐하면 실제적인 전투는 3권과 함께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처음부터 인민을 공포에 빠뜨리지 않는 타당한 조치로 보였답니다”(같은 책, 586)라고 말하고 있다.(요강3,295)
그러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가치와 화폐를 포함하고 있는)의 이 첫 번째 분책의 출간에 대한 반응은 공포와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침묵뿐이었다. 맑스는 라살에게 “만약 당신이 내가 이 저술의 독일어 출판에 대해 칭찬이나 인정 또는 많은 관심을 기대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실수한 것입니다. 나는 완전한 무시만을 예외로 한 채, 오히려 이 책의 판매에 상당한 상처를 줄 수 있는 어떤 것, 즉 공격이나 비판을 기대했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 독일 인민들은 나의 공산주의가 단순한 모방에 불과하다고 비난을 퍼부어 댔는데, 이번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그들의 지혜의 이론적 기초를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결국 독일에는 몇몇 경제학 관련 전문 잡지들이 있는데도 말입니다”(같은 책, 618)라고 쓰고 있다.(요강3,295)
그러나 물론 이것들은 부르주아지의 잡지들이었다. 그 저작의 서술에서 나타나는 비논쟁적이고, ‘얼밀하게 과학적인’ 방식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이 저작은 완전한 침묵의 음모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요강3,296)
이에 반해 미국에 있던 독일 언론은 이 저술을 폭넓게 다루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이 저술의 형식상의 다른 측면이 이 책의 광범위한 수용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곳의 노동자들에게 이 책이 너무나 이론적인 것으로 비추어지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같은 책, 618 등) 훨씬 후인 1862년에 맑스는 더 퉁명스럽게도 “그 저작의 서술 방식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MEW 30, 640)라고 쓰고 있다.(요강3,296)
더구나 독일에 있던 ‘당의 동지들’−비공식으로 계속 연락을 취해왔던 1848년의 혁명 전우들−도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맑스에게 개인적으로는 칭찬을 했지만, 그 책이 유통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같은 책, 640). 결국 이 저술은 이론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꼴이 되었다.(요강3,296)
「화폐에 관한 장」의 내용을 서술하는 방법에 대한 의문은 「자본에 관한 장」의 내용을 서술하는 그것과 달랐다. 전자에 있어서 주요 문제는 그 자체로 추상적이었고, 착취나 노동과 자본의 모순 등에 대해서도 불분명했다. 엥겔스가 적고 있는 것처럼, 가치 형태에 대한 맑스의 설명은 “전체 부르주아적 잡동사니 그 자체”였다. 즉 혁명적 합의들은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벌레를 꿴 낚시 바늘처럼 그 자체로 함의에 머물러 있었다(MEW 31, 308). 그러나 그 바늘을 드리우기 위해서는 두 번째 장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에서 요점은 더 이상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한’ 것이다. 문제는 그 다른 것이 무엇인가이다. 경제학 관련 전문 잡지들의 논평^을 기대하고 쓴 첫 번째 장의 경우 검열에 대비해야 했을지 모르지만, 침묵의 음모 이후에, 특히 이미 공개적으로 내놓고 혁명적이라고 말한 장이 검열 당국에 호의 속에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요강3,296-297)
맑스는 이 장의 정치적 내용을 직접적으로 노동계급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식으로 썼다고 말하였다.(요강3,297)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맑스는 실제적인 ‘대중화’와는 상이한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과학을 혁명적으로 만들려는 과학적 시도들은 결코 진정으로 대중적일 수 없다”(MEW 30, 640)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언급은 오히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보다 더 대중적으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는 저술들에 더 적절한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맑스에게 육체적 부담을 덜어주기보다는 오히려 구체적으로 의미 있는 사항들을 포괄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엄청난 부수 작업들을 필요로 했다.(요강3,297)
1861년 8월과 1863년 7월 사이에 맑스는 「자본에 관한 장」의 전반을 다시 썼다. 4절지 총 1,472쪽에 이르는 23권으로 된 수고는 후에 [자본론] 4권(즉 [잉여가치 학설사])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1863년과 1865년 사이에 정치경제학 이론사를 제외한 이 저술 모두가 새로운 자료를 추가하면서 다시 씌어졌다. [자본론]의 2권과 3권은 주로 이 수고에 기초한 것이다. 맑스는 1865년과 1867년 사이에 [자본론] 1권의 출간에 앞서 더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였고, 기존의 수고를 다시 쓰는 작업에 매진하였다.(요강3,297)
이 작업에 관해 맑스는 1861년 12월 엥겔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그것은 훨씬 더 대중적인 문체로 씌어졌고, 방법은 1부에서보다 훨씬 더 은폐되어 있다네”라고 쓰고 있다(MEW 30, 207). 이와 함께 맑스는 지대론과 재생산 도식에 관한 연구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작업의 요점은 정치경제학의 가장 복잡한 문제들과^ 가장 엄밀한 방법으로 분석된 저술들을 전문 교육을 받지 못한 독자들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형태로 내놓는 것이었다.(요강3,297-298)
“이 마지막 수고에서, 어쩔 수 없이 M-C와 C-Ms 부분을 제외한다면, 사태는 상당히 대중적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1863년 8월 엥겔스에게 보내는 서한, 같은 책, 368)(요강3,298)
“그 형식은 약간 상이해질 것이고, 어느 정도는 더 대중적이 될 것이네. 나로서는 결코 내 자신의 내적 충동을 발산하려고 한 것은 아니네. 그러나 처음으로 이 두 번째 부분은 직접적으로 혁명적인 임무를 가지고 있으며, 그런 만큼 내가 묘사하는 관계들도 역시 더 구체적이라네.”(같은 책, 565)(요강3,298)
1862년에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일련의 분책으로 출판하려는 초기의 계획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또한 이미 1858년 3월 엥겔스에게 예기했던 “자본에 관한 책”의 계획된 기본틀을 포기하였다. 즉 맑스는 처음의 계획대로 이 책을 (a) 자본 일반, (b) 경쟁, (c) 신용, (d) 주식자본으로 나누는 대신 요강의 「자본에 관한 장」의 하위 절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한다. 즉 그것은 생산과정, 자본의 순환 그리고 이 두 가지의 통일, 또는 잉여가치의 이윤, 이자, 지대로의 분할 등의 하위 절로 나누어진다. 물론 이들 각각은 더할 나위 없이 [잉여가치 학설사] 4권을 형성한다(MEW 30, 640과 31, 132). 사실상 포기된 것은 경쟁, 신용 그리고 주식자본에 관해 계획된 책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자본론] 전3권에서 하나의 장이나 하위 절로 나타나고 있다. 맑스가 경쟁, 신용과 주식자본에 관한 계획들을 실행하기 위해서 [요강]에 포함된 자료들을 수집한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진지한 시도를 수행했는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요강]의 두 번째 장으로 복^귀한 것이 축적된 자료를 폐기하거나 또는 이미 성립된 구조를 완전히 뒤바꾸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맑스가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시기에 쓴 편지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그가 이미 수고에서 달성한 작업들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새로 어떤 것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작업 내에서 사실상 이전의 정치경제학 모두를 전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MEW 30, 368, 280). 이와 별도로, 경쟁, 신용, 주식자본에 관한 의문들을 독립된 책들로서보다는 독립된 장으로 다루겠다고 한 결심은, 처음에 이미 그가 공표한 것처럼, 작업 전반을 불균등하게 발전시키고, 광범위한 틀만을 다루면서 파생된 부차적인 문제는 남겨둔 채 그 ‘기본 요소의 발전’에만 집중하겠다는 의도에서부터 일관되게 유지된다. 이것은 쿠겔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맑스는 더 깊이 있는 책들을 포기하는 대신, 처음 것, 즉 「자본 일반」에 관한 논의에만 자신의 관심을 집중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이 책은 영어로 ‘정치경제학의 원리’라 불려질 수 있는 것을 담고 있다네. 이 원리들은 기본적인 요소(그것의 첫 번째 절, 즉 가치와 화폐를 포함)이자 하나의 발전인데, 이후에 뒤따라오는 것(형편에 따라서는 사회의 경제 구조와 국가 형태의 관계는 제외하고)은 이것에 기초하여 쉽게 성취될 수 있을 것이네”(같은 책, 640)라고 쓰고 있다.(요강3,298-299)
그러나 [요강]과 [자본론] 사이의 연관성과 단절(transformation)이라는 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의문들은 이 책이냐 저 책이냐 혹은 이 책의 이 장이냐 저 장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맑스는 독일어 판 [자본론] 1권의 몇몇 장들도 2판에서 수정하려고 하였다. 더구나 그 변화의 핵심은 논의의 내적 구조, 내적 논리와 방법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맑스는 이것과 서술 방법 간의 변증법에 대해 오래 전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맑스는 [요강]을 완성한 뒤, 곧바로 헤라클리토스^의 철학 체계를 현존하는 미완성 유고들에 기초해 재구성한 라살의 저서를 읽을 시간을 가졌다. 맑스는 라살이 “헤겔 변증법에 대한 당신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암시”라고 할만한 어떤 것도 없이, 정통적 헤겔 철학의 노선을 따라 그 방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유감을 표시한 뒤, 재치 있게 “당신이 당신의 저술에서 극복해야만 했던 난점들은 모두 약 18년 전에 내가 훨씬 다루기 수월한 철학자, 즉 에피쿠로스−즉 원자들(fragments)에 기초하여 완전한 체계를 표현하는 것…그런데 철학 체계의 실제적 내적 구조는, 자신의 저술에 체계적인 형식을 부여했던 철학자들, 특히 스피노자의 경우조차도 그가 의식적으로 그것에 대해 말했던 형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에 관한 유사한 저술에서 쓴 것처럼 저에게는 훨씬 더 풍부했습니다”(MEW 29, 561)라고 덧붙인다.(요강3,299-300)
이 점은 맑스가 출판을 위해 개인적으로 준비한 [자본론], 특히 1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요강]의 내적 구조가 건축물의 비계(scaffold)처럼 표층에 놓여 있던 반면, [자본론]에서는 중심부에 놓여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양자의 내적 구조는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적 구조란 다름 아닌 유물변증법의 방법이다. [요강]에서 이 방법은 쉽게 눈에 띄는 반면, [자본론]에서는 더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생생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숨겨져 있다. 이것은 분명히 저 유명한 레닌의 아포리즘, 즉 “헤겔의 논리학에 대한 전반적인 학습과 이해 없이는 맑스의 [자본론], 특히 1장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반세기 후에 맑스주의자 중 어느 누구도 맑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레닌^ 전집], 37권, 180쪽)라고 한 말의 진의가 숨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직접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자본론]의 전반적 구성 자체가 연구 방법 그 자체였다는 점이다.(요강3,300-301)
물론 레닌이 이 아포리즘을 쓸 당시에 그는 [요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요강]이 출간된 지금, 문제는 [자본론]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헤겔의 [논리학]을 다시금 읽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실천상의 의문이다. 이론상 최선의 방법은 아마 [논리학]을 읽기 위해, 그리고 나서 [자본론]을 읽기 위한 예비단계로 [요강]을 읽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요강] 전반을 읽지 않고 [자본론]과 [논리학]의 관련성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확실한 이론적 논의들은 순서를 바꿔서, 또는 몇몇 이론적 주기에 맞춰 읽혀질 수 있다. 그러나 맑스가 [요강] 안에 적어 놓았듯이, 모든 이론적 의문들에 대해서 “실질적 주제는 …그 전제 조건으로서 마음속에 항상 담아둘 필요가 있다.”(요강1, 70-72) 그리고 400쪽에 다다르는 [자본론]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요강]의 800여 쪽과 [논리학]의 1000여 쪽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레닌의 진정한 의도를 잘못 이해하는 것일 수 있다. 아마 이것은 장기수에게나 가능한 계획일 것이다. 그렇게 하느니보다 오히려 [임금, 가격, 이윤]과 [모순론]을 읽는 것이 더 많은 이득이 될 것이다.(요강3,301)
[요강]의 많은 내용, 특히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혁명적’ 문구들은^ [자본론]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자본론] 1권에서 이런 문구들은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으며, 역사적 예증이나 관련 자료의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이런 사실은 분명히 [자본론]에서 사용된 서술 방법 탓으로 돌려야 할 것 같다. 즉 이 작업의 결과가 결정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경제학 전문 잡지들을 통해 직접적으로 여과될 필요 없이 노동계급에서 가장 의식 있는 사람들에 의해 수용되는 것이다. 이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그 표현은 무엇보다 구체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867년엔 그것이 ‘혁명적 문구들’을 위한 예증과 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만큼 성공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런 예증 없는 문구는 일반인에게 저자가 논점을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증거로 보였을 수 있다. 여기에서부터 하나의 예견, 즉 “껍데기는 산산이 벗겨져야 한다”는 테제가 신중하게 그리고 한때 나왔던 것이다. 만약 1917년 혁명이 미리 일어났었다면, [자본론]은 훨씬 큰 형식상의 잠재력을 가졌을 것이다.(요강301-302)
[요강]과 [자본론] 1권은 형식면에서 상호 대립적이다. 후자가 서술 방법의 모델이라면 전자는 연구 방법의 기록이다. 서술 ‘형식’으로 [요강]을 모방하는 것에는 불합리한 측면이 없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요강]을 읽을 수 있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형식으로 그 내용을 서술하고, 기본적인 개념을 만들어 낸 맑스의 노력 덕택이다. 1858년에는 맑스 자신을 제외하고 [요강]을 이해하고 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그 자신에게도 그것은 커다란 고충이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그리고 모든 의미에서 유일하고 낯선 지적 생산물이었으며, 먼 외계인의 사유처럼 보였음에 틀림없다. 누더기 옷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이 이방인은 런던 슬럼가의 아파트 쥐구멍에서 나와서 대영 박물관에 기어 들어가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하루^ 종일 저 멀리 뉴욕에 있는 신문사에 보낼 기사를 쓰고, 그 누구도 한 번도 읽지 않았을 애매모호한 논문들을 읽고, 모든 이들에게 외면당하는 방대한 정부 보고서를 읽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 자신조차 판독하기 어렵게 써 내려간 산더미 같은 메모장들을 갖고 밤샘작업을 한다. 헤겔? 애덤 스미스? 리카도? 프루동? 누가 알기나 했고 관심이나 가졌던가? 만약 맑스가 1858년 중반에 사망했다면(물론 가능성을 희박하지만), 이 7년여에 걸친 수고 노트들은 날인만 찍힌 많은 책들처럼 한 권의 책으로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대신 그는 1863년−그 추방자든 방문자든 간에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이 세계 도처에서 모여들었던 런던에서−임금노예의 해방은 그것의 동산(chattel) 형태인 노예제도의 폐지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던 일반 노동계급을 위해 정확하게 그 현실적 근거를 말할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맑스는 1864년 최초로 노동자들의 영향력 있는 기구였던 국제 노동자협회의 기본 강령을 마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그 연합 내에서 무역 조합 지도자들의 협소한 개혁주의와 공상주의자 및 무정부주의자의 반조합주의를 체계적 논증을 통해서 비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요강3,302-303)
또한 그는 여러 분파들, 경향들, 유토피아적 계획들, 그리고 음모들의 거대한 혼란과 초기 노동계급 운동의 표면에 등장한 거품과도 같은 무모한 생각들이 팽배하던 순간에도, 이미 마음속에 그 역사적 운동 전반에 대한 기본적인 틀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모순과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전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개념 전반을 가지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요강]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맑스가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이 그 개념의 현실성을 실천 속에서 끊임없이 증명해 냈기 때문이다. 1857년에 희망 없이 관념적 추상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이 오늘날에는 매우 구체적이고 거의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친근해졌다. ‘대변동, 공황’? 1857년의 공황은 역사상 최초로 세계적 과잉생산이 그 원인이었다. 그 이후로도 많은 공황이 있었고, 지금도 우리는 아마 최대의 그리고 최후의 위기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가치법칙에 의해 자본주의적 생산은 제한될 수 있는가? 미국 인구 1억 4천만 명 중 뉴욕, 시카고 그리고 L. A.의 인구와 맞먹는 사람들이 극빈자로서 정부의 구호 복지 기금에 의존해 연명하고 있다. 자본은 이들 노동력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짜낼 방도를 알지 못한다.” ‘사적 소유자로서의 개인의 폐지와 사회적 개인의 등장’? 1857년에는 공상적으로 보였던 이 일반론이 지금의 현실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실체를 보기 위해서는 베트남과 중국의 젊은이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발전들에 대해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충분하게 발전했다는 점이 아니라, 맑스가 무려 한 세기^ 전에 그것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의 ‘천재성’이 아니라 −이 말처럼 넌센스인 것은 없다− 그 연구 방법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다.(요강3,304-305)
이 일곱 권의 저술은 20년 동안, 또는 전시에 출판된 모스크바판을 고려한다면 30년 넘게, 독일어로만 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에 와서야 이 책의 영어본에 대한 요구가 등장하게 되었는가? 확실히 그 중요한 자극은 아주 오랫동안 태평스러웠던 영미 제국주의의 실용주의가 안과 밖으로부터 받는 일련의 새롭고 고통스런 충격에서 기인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대는 한 번 더 ‘변증법적’으로 바뀌었고, 그리고 오래 전 런던의 긴 겨울을 빠져 나온 이 저술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요강3,305)
마틴 니콜라우스
샌프란시스코
1972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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