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서벌(1939 - 2006) 선생, 그리고 류제하(1940 - 1991) 선생
남진원
벌써 40여 년 전이구나 서벌 선생을 뵌 것은 서울의 한국시조시인협회 모임에서였다. 그때 옆의 문인들이 서벌 선생을 ‘시조의 맹장’이라고 알려주셨다.
나는 전에 현대시학에서 이미 서벌 선생의 시조와 평론을 읽은 바가 있었다. 시조에 대한 평론을 현대시학에 연재하였는데 그 필법이 독특하였다. 순수한 우리 말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법이었다. 대학교수들이 쓰는 글과는 판이하게 차별감이 들어났다. 그래서 무척 신선했던 기억이 난다. 시문학에는 또 금성출판사에 근무하던 류제하 시조시인이 작품 평을 연재하셨다. 서벌 선생과 류제하 선생은 그 당시 문명을 날리는 걸출한 중진 그룹이었다. 아쉽게도 두 분은 오래전부터 이 세상 분이 아니다. 서벌 선생은 서울살이의 각박한 삶에서 처절한 절망과 한이 배어 나오는 아픔이 작품에 배어있다. 류제하 선생은 당시 건강이 안 좋아 만나면 얼굴이 매우 창백해 보이셨다. 그래도 작품 쓰기에는 선비의 단단한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조의 명장이이셨다. 내가 1976년 샘터시조상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연락을 주신 고마운 분이였다.
나는 두 분이 돌아가셨을 때 문상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늘 죄책감이 있다. 내 삶 역시 60이 될 때까지 어렵고 힘든 생활이었기 때문에 옆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강원도문화상 수상식에 갔을 때에도 돈이 없어 서울에서 사진사들이 내려와 찍은 수상 기념 사진값도 보내지 못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문화상 수상자들은 모두들 부유하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생활에 여유가 어느 정도 있는 교수들이나 부유한 집들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내가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서벌 선생의 시조 작품을 읽으면 더욱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서 울
서벌
내 오늘
서울에 와
萬坪 寂寞을 산다(買)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까부다
바닥난
호주머니엔
주고 간 벗의 명함…
읽으면 가슴이 저며오는 시조 작품이다.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 멋스러움의 기개까지 서려 있는 작품이 아니던가.
만 평 적막을 산 것으로 문을 열었는데 그 시적 전개가 얼마나 시원하고 통쾌한가 말이다.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까보다’ 고 하며 가난의 아픔을 시원하게 토로하고 있다. 고려말부터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누가 이렇게 시원하게 가난의 배설을 통쾌하게 나타냈단 말인가. 그저 음풍농월에 젖어 술찌꺼기 같은 작품들만 써놓은 부류가 옛날에도 많았지만 지금도 그런 부류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종장을 보라! 화룡점정이 아닌가
내가 정선에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받으니 서벌 선생이셨다. 어니에 계시냐고 물으니 정선읍에 오셨다고 하셨다. 반가운 마음에 문래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던 내게 전화 연락을 하신 것이다.
나는 정선으로 가서 선생을 뵙고 돌아왔다. 그 후 1980년을 전후하여 어느 날인가, 강릉대학교에서 중잉일보사와 함께 시조 문학강연과 시조낭송이 있었다. 그때 서울에서 이태극 박사와 서벌 선생 등이 내려오셨다. 나도 닝송자로 나셨다. 그날은 만나서 함께 잠을 자면서 시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때 강릉문인협회 회장은 김원기 선생이었는데 잠시 오셔서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셨다.
경남 고성 낫질에서 태어나셨고 어려운 살림에 학교를 못 다니고 절에 가서 한학을 스님께 배우셨다고 했다. 그러니 순전히 독학을 한 셈이었다. 그러니 돈 없고 빽 없이 올라온 서울살이가 얼마나 형극의 길이었겠는가.
어머니는 고성의 난장에서 고기를 파셨다고 하셨는데 참으로 힘든 날이었다고 하셨다. 그 모습을 시조로 절절하게 나타내셨다. 아버지는 술 중독이 되어 누워 계시고 어머니가 고기 장수로 나선 것이었다.
이런 가난 덕분인지, 속사모곡이란 명시조가 탄생하였다. 어머니의 속살이 썩어들어가는 아픔이 노래 되어 풀어져나온다.
續 思母曲
서벌
고성 장터 생어물로 청춘 다 판 울 엄매야,
독주로 쳐져 앉은 아버지 패망 때문에
모반은 늘 몇 천원어치 눈물 피땀이던가.
눈만 뜨면 못산다고 벼락치던 우뢰소리.
사는 길 지름길이 그다지도 천리던가.
무서운 그 울부짖음 뉘 산 메아리 됐노.
시방도 고성 장터 이 다 빠진 울 엄매는
다닥다닥 생선 몇 손 千金으로 담아 이고
다 못 헬 밀물결 안개 가명오명 울먹이리.
1940년대와 1950년대는 가장 혹독한 시기였을 것이다. 정권의 무능과 부정부패, 가난에 굶주림은 비단 서벌 선생의 가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시대 90%의 국민들은 가난으로 질곡의 삶을 이어갔던 것이다. 어찌 이 작품이 서벌 선생의 가족만을 위한 작품이겠는가. 그 시대의 적나라한 반영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가혹할이 만치 어려운 생활은 서울살이에서도 지속되었던 가 보다 사람을 만나면 일자리의 주선이 아니라 거들먹거리는 인간들의 명함 만이 주머니에 꽉 찼으니 말이다.
이런 서벌 선생에게도 비단결 같은 사랑이 있었으니 그 시조의 결에 묻어나는 가락을 음미해 보시라.
낚시 心書
서벌
냇가에 나와 앉아 낚시를 드린 날은
하늘도 하나 푸른 못으로나 고여내려
임 생각 올올의 줄은 千의 낚시 되는가
느닷없이 찌가 떨어 잡아 채는 잠깐 사이
비늘빛만 눈을 가려 아득한 천지간을…
임이여, 그렇게 들면 내 마음은 대바구니
저승도 내 먼저 가 설레는 물무늬로
이제나 저제나 하고 이리 앉아 기다리리
法悅의 꽃수레 몰아 목넘어 올 그때꺼정
戀歌
서벌
아내여, 우리 방은 한알의 복숭아 ㅅ 속
그 안의 너와 나는 희디흰 두알 씨앗
銀漢의 푸른 구비로 떠밀려 내려간다
내가 서벌 선생을 뵈었을 때 제일 먼저 선생의 시조 작품을 말한 것이 바로 이 [연가] 였다. 내가 이 작품을 [현대시학]에서 본 것 같다. 선생께서도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시조였다고 하니 매우 좋아하시는 모습이셨다.
나는 아버님이 좋은 직장을 가도록 교육대학에 까지 가게 하여 안정된 교직에서 지내도록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가서 직장을 그만 두겠다고 선언을 하다시피 하고 안정된 교직을 박차고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들개처럼 거친 황야에서 살아왔다. 지금도 어려운 살림살이지만 후회는 없다. 다만 내 아내에게만 큰 죄를 지은 것만 빼고는 .....
내 친구들은 모두 62세 정년 퇴직을 하고 조용히 살지만 내 삶은 70이 된 이제부터 아닌가. 사회 활동도 누구보다 활발하고 문단 생활도 꾸준히 하여 창작의 작업도 내년 2024년이면 반 백년, 50년이나 되었으니 원로 작가가 아닌가.
그러니, 가난은 내가 어려운 삶을 살게 했지만 나를 지혜로운 길로 안내해 주는 거대한 문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지금도 가난하지만 감히 단언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라고 .......
말이 헛나가고 두서 없었지만, 두서 없으면 어떠랴. 내 일생에 있어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두 분 문사를 들라고 하면 서슴없이 서벌 선생과 류제하 선생은 드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서벌 선생은 지금 고향의 고성에 <서벌 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돌아가셨지만 많은 위안도 될 것 같아, 나 역시 기쁘기 한량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