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가 아닌 사명으로 삼은 은혜
2024. 2. 18(주일낮예배) 사사기 15:15-16, 사도행전 20:22-24
여러분은 돈을 얼마나 가져야 부자라고 생각하는가? 한국사람들이 생각하는 부자는 100억 이상의 자산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2023년 12월 17일에 발간한 2023년 한국 부자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 중에 100억-300억의 고자산가는 3만 2천명이고, 300억 이상 초고자산가가 9천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100억 이상의 부자가 무려 4만 1천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자들은 평균적으로 부동산과 금융자산의 비율을 각각 56.2%, 37.95로 나뉘어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부자는 평균적으로 40억 정도의 현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는 이 보고서를 읽고 참 많은 생각을 하였다. 제일 먼저 생각에 난 것은 우리나라에는 ①돈 많은 사람이 참 많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고, 그와 동시에 생각난 것은 ②그런데 왜 나는 돈이 없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생각한 것은 ③만약 내가 100억의 자산가로서 38억의 현금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삶을 살까? 하는 것이었다.
만약 여러분이 100억의 자산가라면 어떤 삶을 살겠는가? 이스라엘의 12명의 사사 중 마지막 사사는 삼손이다. 단 지파 마노아의 아들로 태어난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라 땅에 있는 마노아를 찾아가셔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는 ①포도주와 독주를 마시게 하지 말며, ②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고, ③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노아가 낳은 아들인 삼손은 나실인이다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실인 삼손에게 큰 힘과 능력을 주었다. 그래서 사사기 15장을 보면 삼손은 유대 사람이 두려워 떠는 블레셋 사람을 나귀 턱뼈로 1천명을 죽인다. 말이 쉬워서 1천명이지 나귀 턱뼈로 사람을 죽인다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삼손은 지쳐서 목말라 할 때 하나님은 레히의 우묵한 곳에서 물을 터뜨려서 그 물을 마시고 다시 힘을 얻어 승리케 하여 주었다. 하나님이 삼손에게 힘을 주시고, 또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승리케 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면 삼손은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였겠는가? 삼손은 블레셋 사람 1천명을 죽인 후에 노래를 부른다. 그의 노래 가사를 같이 읽기 바란다.
(삿 15:16)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떠는 블레셋 사람 1천명과 싸워서 승리한 삼손은 하나님이 나를 도우셨다가 아니라, 내가 천명을 죽였도다 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삼손은 자기에게 있는 그 놀라운 힘과 능력으로 자기를 과시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삼손은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머리카락은 잘라지고, 눈알은 뽑혀서 연자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그런 삼손이 블레셋 다곤 신전에서 큰 제사가 있을 때 끌려나게 된다. 그때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이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고 다곤신을 경배하며, 또 삼손에게 재주를 부려보라고 조롱할 때 삼손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קָרָא).
여기서 부르짖는다(קָרָא)는 말의 의미는 창세기 4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의 후손이 점점 더 강성해져 간다. 그래서 죄의 비참이 더 뚜렷하게 보여질 때 셋이 에노스를 낳았을 때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4:26). 여기서 불렀더라가 קָרָא(카라)이다. 부르짖다는 단어는 일반적으로는 초대하다. 이름을 부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창세기 4장에서 불렀더라는 말은 죄의 비참을 알게 되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는 모습을 불렀더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가인의 후손이 점점 번성해져 가며 죄악이 물들어 갈 때에 셋이 에노스를 낳았을 때 언약의 백성이 하나님만 의지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모두 다곤을 경배하고, 삼손을 조롱할 때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다는 것이다.
삼손의 모습이 대단해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 삼손이 왜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여 부르짖었는지 사사기 16장 28절을 읽기 바란다.
(삿 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삼손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곤을 경배하는 자들을 심판케 해 달라고 부르짖지 않았다. 삼손은 나의 두 눈을 뽑은 그 블레셋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도록 한번만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삼손은 하나님께 힘을 구하고, 그 힘으로 자기 원수를 갚는 도구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삼손의 최후의 모습이다.
뭔가 좀 씁쓸하지 않는가? 이스라엘 사사는 12명이다. 그 중에 11명의 사사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와 싸워서 승리하고, 몇 년을 다스린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인 삼손은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블레셋과 싸움을 하다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하나님이 나실인 삼손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온전한 승리와 평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삼손은 온전한 승리를 가지지 못했는가? 1950년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터커 교수가 설명하는 죄수의 딜레마 라는 경제학 이론이 있다. 공범인 2명의 죄수를 각각 따로 조사실에서 조사를 한다. 그래서 둘 다 자백하지 않으면 각각 징역 1년, 둘 다 죄를 자백하면 각각 징역 3년, 둘 중 한 명은 자백하고, 한 명은 자백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자백한 사람은 석방을 받지만, 자백하지 않은 사람은 10년의 형을 받는다.
<죄수의 딜레마 도표참조>
도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내가 자백하지 않고 침묵하면 1년형을 받던지, 10년형을 받는다. 그런데 내가 자백하면 석방을 받던지, 3년형을 살게 된다.
만약 여러분이 조사를 받았다면 자백을 하겠는가? 침묵하겠는가? 둘 다 자백을 하지 않으면 1년의 형을 살 수 있다. 그런데 실험결과를 보면 80% 이상이 자백한다. 그리고 재미난 것은 공범이 조사실에 들어가기 전에 서로 만나게 해 준다. 그래서 작전을 짜게 한 후에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아도 두 사람다 자백을 한다. 왜냐하면 나는 약속대로 침묵하였는데 상대방이 자백하면 나는 10년형을 받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겠는가? 죄수의 딜레마는 경제학 이론이다. 그래서 두 명의 죄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배신으로 큰 손해를 입을 것같아 협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삼손이 만약 죄수딜레마에 참여하였다면 자백했겠는가? 침묵했겠는가? 정말 놀라운 것은 제가 앞에서 부르짖었다(קָרָא)는 단어를 설명해 드렸다. 그런데 삼손이 나오는 성경에서 קָרָא를 부르짖다로 해석한 부분은 2번 나온다. 그 한번이 나귀턱뼈를 블레셋 사람과 싸울 때 목마른 삼손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레히의 샘물), 또 한번 다곤 신전에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부르짖는 것이었다. 그랬던 삼손은 그 은혜를 모두 자기 삶의 도구로만 사용하였다. 삼손은 오직 자기이익에 눈이 어두워져 있었다.
이러한 삼손은 왜 하나님이 자신을 나실인으로 세워 주었는지? 하나님이 큰 힘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그 큰 힘으로 블레셋을 다 쫓아내는 일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삼손의 삶이 안타깝지 않는가? 사도행전 21장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다. 바울이 배를 타고 두로에 도착했을 때 제자들을 찾아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그때 제자들은 성령에 감동되어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행 21:4)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두로를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 빌립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빌립의 4명의 딸은 바울의 허리띠로 자기 손과 발을 묶고 유대사람들이 이같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줄 것이다(행 21:15)고 예언한다. 빌립의 딸들은 예언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바울이 어떠한 고난을 받을 것인가?를 정확하게 알려준 것이다. 그렇게 바울은 성령에 감동된 두로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권면을 들었고, 또 가이사랴에서는 예언하는 빌립의 딸들에게 결박당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는 예언을 들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이 에베소를 지날 때 에베소 장로들은 바울과 함께하기를 원하였다. 그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행 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사랑하는 에베소 장로와 눈물로 이별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아니 두로에서 제자들이 말하고, 또 가이사랴에서 빌립의 딸들이 환란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 하여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또 삼천층의 천국을 보는 은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은혜를 체험한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과 천국의 그 기쁨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명이 된 것이다. 그랬던 바울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8)는 하나님 말씀의 성취를 이루는 귀한 일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받았는가? 그리고 그 은혜가 내 삶에 도구가 되어져 있는가? 아니면 사명이 되어져 있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나의 삶의 도구로 사용하면 자신을 자랑하고, 성공에 만취한 삶을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사명으로 여기면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말씀이 사명이 된 복된 성도로 늘 승리하며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