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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심론』의 선정론
3)지관쌍수
『금강심론』에서 설하는 지관쌍수(止觀雙修)는 일상삼매(ekatva-samādhi)와 일행삼매(eka-vyūha-samādhi)를 함께 닦는 것이다. 일상삼매가 관찰하는 지혜라면 일행삼매는 염염상속의 선정이며, 두 가지를 함께 닦지 않으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즉, 관찰의 지혜로써 성품을 보고 염염(念念)의 선정으로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다시 말해 "관찰하고 생각하되[觀而念之] 관찰의 일상삼매로 성품을 보고, 생각의 일행삼매로 진리를 깨친다."라고 설한다.
일반적으로 관찰의 일상삼매라는 것은 관(觀)과 혜(慧)에 해당하고, 생각의 일행삼매라는 것은 지(止)와 정(定)이라고 할 수 있다. 관찰의 관과 혜는 의미가 맞는데, 생각과 지(止)와 정(定)은 조금 어색하다. 생각의 '염(念)'이라는 것과 '지(止)'와 '정(定)'은 다른 의미일 수 있는데, 그러한 전거를 찾아 두 가지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37각분(saptatriṃśad-bodhī-pakṣā)의 칠각지(saptabodhy-aṅgāni)와 팔정도(aṣṭâṅga-mārga)에는 두 가지가 별도로 있다. 즉, 염각지(smṛti-saṃbodhy-aṅga)와 정각지(samādhi-saṃbodhy-aṅga)가 있고, 정념(samyak-smṛti)과 정정(samyak-samādhi)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염(念)'과 '정(定)'은 다른 의미이다.
각기 원어도 'smṛti'와 'samādhi'로 다르며, 같은 의미라면 두 가지를 나누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어원적으로 염(sati)은 기본적으로 기억‧인식‧의식 등의 뜻과 마음의 깨어남‧마음챙김‧주의력 등의 뜻을 의미한다. 또 기억하여 잊지 않으며 마음으로 늘 지키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
정(samādhi)은 집중의 뜻으로 더 높은 지혜와 해탈을 위한 조건이다. 즉, 올바른 생활에 따르는 마음이 집중된 명상의 상태라고 정의한다. 이렇게 염(念)과 정(定)은 기억과 집중으로 대별되며, 조금 다른 의미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도 벽산은 염(念)을 정(定)의 뜻으로 합하여 선정의 측면인 일행삼매로 설한다.
무주는 일상삼매와 일행삼매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삼매의 이름이라고 한다. 즉, 중국 선종의 초조 보리 달마(達摩, ?~528)로부터 육조 혜능(慧能, 638~713)에 이르기까지 순선(純禪)시대에 일관되게 설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특히 사조 도신(道信, 580~651)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이나 혜능의 『육조단경』에는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중요하게 설한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간단히 말하면 정혜쌍수(定慧雙修)와 같은 뜻이며, 일상삼매는 혜(慧)에 해당하고 일행삼매는 정(定)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위의 도신과 혜능의 어록은 『문수설반야경』과 관련되며, 초기 선종에서 경전의 내용을 설파한 것은 주목할 일이다.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법계는 한 모양[一相]이라 인연을 법계에 매어두는 것을 일행삼매라 한다. …선남자 선여인이 일행삼매에 들고자 하면, 응당히 조용한 곳에서 산란함을 버리며 모양을 취하지 않는다. 마음을 한 부처에 매어 오로지 명호를 부르며, 부처의 방향을 따라 몸을 단정히 바로 향한다. 능히 한 부처를 끊임없이 계속 생각하며 곧, 이 생각 중에 능히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불타를 보게 된다.
도신은 위와 같이 경전을 인용하며 일행삼매의 중요성을 전하는데, 또 "불심을 염하는 것은 바로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이고, 마음을 떠나 따로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며, 부처를 떠나 따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염불이란 곧 염심(念心)이며, 구심(求心)이 곧 구불(求佛)이다"라고 설한다. 이는 염(念)과 지(止)가 통하는 부분으로 불심을 염하는 것은 생각이 멈추어진 상태라는 뜻이다. 그리고 염심을 지심(止心)이나 정심(定心)으로 바꾸어 보면, 지(止)나 정(定)은 마음이 고요히 집중된 상태이므로 생각이 없는 것과 통한다. 이처럼 염(念)과 지(止)는 서로 같은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는데,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이 대상에 집중하여 잡스러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굳이 말하면 염(念)은 적극적인 집중의 측면이 있고, 지(止)와 정(定)은 소극적인 측면의 집중이라 할 수 있다. 정(samādhi)이 고정된 대상으로 다가가 그 내부로 들어가는 집중이라면, 염(smṛti)은 움직이는 대상을 향해 따라가며 바라보는 집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40업처의 십수념 가운데 불수념(佛隨念, Buddhânusmṛti)이 선정의 주제로 포함되는 것이다. 염은 대체로 마음의 기억과 자각을 의미하며, 그것은 주의력과 깨어있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염(念)은 정념의 의미와 함께 집중의 의미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벽산이 지(止)‧정(定)에 염(念)의 의미를 추가하여 일행삼매라고 한 것은 세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적극적인 수행의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둘째, 수행의 차제적인 면보다 원융적인 면을 보인 것이다. 셋째, 염(念)‧지(止)‧관(觀)을 결합한 정혜균등(定慧均等)의 수행을 주창한 것이다. 이것은 염‧지‧관의 수행을 결합한 일행삼매로써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법계가 일상(一相)이라는 것을 지혜로 관찰하여 앎이 일상삼매이며, 그것을 흔들림 없이 일념으로 수행하는 것이 일행삼매이다. 즉, 일상삼매로 깨치고 일행삼매로 수행해가는 지관쌍수(止觀雙修)를 실천하는 것이다. 또 주목할 것은 인용문처럼 일행삼매의 주요 방편이 염불수행이라는 것이다.
종보본(宗寶本) 『육조단경』에는 법을 부촉하는 부분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만약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려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깨달아야 한다. 만일 어떤 곳에도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또 취하고 버림도 없고 이익‧무성함‧무너짐 등의 일도 생각지 않으며, 한가로이 편안하고 고요하며 비고 융화하며 담박하니, 이를 일상삼매라 한다. 만약 일체처의 모든 행위에 곧은 마음이 순일하고, 도량에서 움직이지 않아 정토를 이루니 이것이 일행삼매다.
이는 『문수설반야경』에서 일행삼매를 위주로 설하는 것과는 다르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일상삼매를 어느 곳에도 치우침이 없는 반야의 중도 측면으로, 일행삼매를 어떤 상황에도 마음이 변하지 않고 움직임이 없는 일행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일상이란 능소를 떠난 상(相)인 까닭에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만약 상(相)을 취하거나 향한다면 이미 일상(一相)의 뜻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일상의 뜻을 굳건하게 실천하는 행(行)이 필요한데, 그러한 수행을 일행삼매라고 하는 것이다. 경전에 "마땅히 먼저 반야바라밀을 듣고 설한대로 수학해야 한다. 그런 후에 능히 일행삼매에 들어간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에 대한 내용은 『기신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진제(Paramārtha)역 『기신론』에서는 "일체부처의 법신과 중생의 몸이 평등하여 둘이 없음이 일행삼매다."라고 하였으나, 실차난타(Śikṣānanda)역 『기신론』에서는 "일체여래의 법신과 일체중생의 몸이 평등하여, 둘이 아닌 '한 모습임'을 알아 이를 일상삼매라 한다."라고 함으로써 일행삼매와 일상삼매가 혼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육조단경』에서도 또한 두 삼매가 명확히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몸으로 두 가지의 다른 측면으로 설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벽산이 선정과 지혜를 일행삼매와 일상삼매로 설한 것은 염(念)‧지(止)‧관(觀)을 통합한 적극적이고 원융적인 수행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지혜의 측면도 삼매로 수용하였다는 뜻이다. 삼학(śikṣā-traya)의 정(定)은 계와 혜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이며, 두 가지로는 계는 선정에 포함되어 정‧혜가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금강심론』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한다.
오직 가행공덕으로 가관적(假觀的) 일상삼매에서 견성적(見性的) 실상삼매로, 염수적(念修的) 일행삼매에서 증도적(證道的) 보현삼매로, 이 같은 관찰과 생각에서 실상을 증득하며 사유하고 닦아 얻는다.
이렇게 몸으로 증득하고 마음으로 깨닫게 된다.
인용문에는 일상삼매가 깊어지면 성품을 보는 실상삼매가 되고, 일행삼매가 깊어지면 진리를 증득하는 보현삼매가 된다고 설한다. 처음 시작은 임시적인 관념으로 하지만, 수행이 깊어지면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실증하는 단계가 된다. 즉, 임시적 관찰의 일상삼매가 익어서 지혜를 깨닫는 실상삼매가 되고, 염념으로 닦는 일행삼매가 익어서 진리를 증득하는 보현삼매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관의 수행이란 몸으로 증득하고 마음으로 깨닫는 정혜균등(定慧均等)의 수행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선정해탈과 지혜해탈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지와 관을 함께 닦음을 강조한 경론이나, 수행자들의 체험을 차례로 들어보기로 한다. 먼저 『마하지관』에는 "지(止)는 단멸로 해탈에 통하고, 관(觀)은 지혜로 반야에 통한다. 지와 관이 같은 것이 사상(捨相)이며 이것은 바로 법신에 통한다. 또 지(止)는 사마타이고 관(觀)은 위빠사나인데, 이것들이 같으므로 곧 우필차(upekṣā)이다."고 한다. "어찌 선정에 반야가 없고 반야에 선정이 없겠는가. 이것은 둘이 아니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닌 것은 법신이고 둘인 것은 선정‧지혜이다."라고 한다. 다시 말해지는 몸으로 체험하는 해탈의 측면이고, 관은 마음으로 깨닫는 반야 지혜의 측면이다. 여기서 지관쌍수(止觀雙修)의 중요한 단서를 말하는데, 제사선의 선지(禪支) 가운데 사념(捨念, upekṣā)이 바로 그것이다. 이 상태가 지와 관이 균등한 것이고, 지와 관이 같으므로 사상(捨相)이라 한다. 즉, 제사선에서 지와 관이 균형을 맞추어 심신이 평정하게 된 상태이다. 초기 경전에도 "평정으로 인해 청정해진 최상의 마음 챙김에 도달하며, … 깨끗하고 순수하며 부드럽고 준비된 빛나는 평정만이 남는다."라고 설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사선은 최적의 통찰을 위한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구사론』에는 재미있는 비유를 든다. 사정려는 선지(禪支)를 섭수하고 지와 관이 평등하여 저절로 일어나므로 '낙통행(樂通行)'이라 하며, 사무색정은 선지를 섭수하지 않고 지와 관이 평등하지 않아 어렵고 힘들게 일어나므로 '고통행(苦通行)'이라 한다. 이처럼 지관이 평등한 선정은 즐거움과 통하고, 지관이 평등하지 않은 선정은 괴로움과 통한다는 것이다.
또한 『기신론』에는 지관 가운데 하나만 닦으면 생기는 부작용을 나열하고 있다. 첫째, 지(止)만을 닦으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게을러진다. 둘째, 온갖 좋은 일을 하지 못하고 대비의 마음을 멀리 여읜다. 셋째, 만일 관(觀)만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의혹을 많이 낸다. 넷째, 제일의제에 수순하지 않아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와 관을 겸하여 수행해야 한다고 설한다.
초기 경전에도 깨달음의 성취에는 지와 관의 두 가지 수행이 있다고 한다. 지의 수행으로 마음이 개발되어 탐욕이 제거되며, 관의 수행으로 지혜가 개발되어 무명이 제거된다고 설한다. 이처럼 지와 관은 전불교를 통틀어 깨달음의 필수적인 양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수습차제(Bhavanakrama)』에는 "사마타 하나만 닦는 것으로 유가사(瑜伽師)의 장애를 근본적으로 멸하지 못하고, 번뇌의 현행을 잠시 굴복시킬 뿐이다. 진실로 반야의 광명이 발현되지 않으면 잠복된 번뇌의 수면들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한다."라고 설한다. 이처럼 지혜는 선정으로 더욱 빛나며, 선정은 지혜로 깊이를 더해 간다. 선정 없는 지혜는 분별지(分別智)에 떨어지며, 지혜 없는 선정은 맹목적일 수 있다. 비유하면, 선정은 기름에 지혜는 불에 견줄 수 있다. 지혜의 등불은 선정의 기름 속에서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초기 불교 수행을 전파시킨 고엔카(Goenka, 1924~2013)는 다음처럼 말을 한다. "세 가지 수행은 각기 삼각대의 세 다리처럼 서로를 지탱해준다. 다리가 모두 있어야 하고, 길이가 같지 않으면 삼각대를 세울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반드시 수행의 모든 측면을 균등하게 개발하기 위해, 계‧정‧혜 삼학을 함께 닦아야 한다." 그는 재가 수행자임에도 계를 중요시하고, 삼학을 함께 닦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상좌부의 아잔차(Ajahn Chah, 1918~1992)의 수행을 계승한 아잔 브람은 함께 닦는 것에서 나아가 지관(止觀)이 한 몸임을 말한다. "어떤 전통에는 두 종류의 수행으로 지와 관의 명상을 말한다. 실제로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과정의 나눌 수 없는 측면이다. 지는 수행에서 나오는 평화로운 행복이며, 관은 동일한 수행에서 생기는 분명한 이해이다. 지는 관으로 안내하고 관은 지로 안내한다." 또 "아잔차는 지와 관은 분리될 수 없으며, 이 두 가지는 정견‧정념과 바른 도덕적 행위 등과 따로 떨어져 계발될 수 없다고 늘 말했다. 그는 지와 관이 한 손의 손과 손바닥 같다고 말했다." 이것은 상좌부 전통에는 드물게 지관쌍수(止觀雙修)에서 나아가 한 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다. 실제로 수행하고 체험한 수행자들이 하는 말로써, 한 몸의 두 가지 특징으로 분리될 수 없고 한 손의 양면인 것이다.
<『금강심론』 수행론 연구/ 박기남(普圓)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