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7》
좌선에 치우쳤을 때 나타나는 병리현상
<인습적인 개념이나 관념으로 구성되어진 이 세상(일상 현실)> 즉 <각자의 상(想, saññā)으로써 인식되어진 이 세계>를 일컬어 불교에서는 빤냐띠(Paññati)라고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인습적인 개념이나 관념이 개입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 세계> 즉 <무상(無想, asaññā)의 세계>를 빠라마타(Paramattha)라고 합니다. 닙바나(Nibbhāna, 열반)는 빠라마타(Paramathā)입니다. 궁극의 실재세계입니다. 닙바나는 고통(번뇌)이 완전히 소멸된 지고(至高)의 행복이며, 불교의 궁극적 실천목표입니다.
누군가는, 우리가 사는 세상 저 너머, 혹은 수백만 광년 떨어져있는 미지의 그 어느 우주공간에 궁극의 실재세계, 닙바나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불교인들은 그러한 세계가 바로 자기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많은 수행자들이 ‘마음 안에서 또 다른 마음의 세계’, 즉 무상(無想, asaññā)의 세계, 빠라마타의 세계, 그 특별한 진리의 세계를 찾아 오랜 세월 이 산사 저 암자를 찾아 헤매기도 합니다.
<관념의 세계 ‘저 너머’에 진리의 세계가 있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마음 ‘저 너머에’ 또 다른 마음의 세계가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이나 가정 혹은 수행처에서 호흡 · 몸의 동작 · 심리현상 등에 주의를 기울여 알아차림 하는 이유는 <관념의 세계 ‘저 너머’에 진리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의 세계(일상 현실) ‘안에’ 진리의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두 세계는 안팎을 구분 지을 경계선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불교를 공부(수행)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마음의 실재를 깨닫는 것은 5살 아이에서부터 10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라도 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지금, 여기>가장 가까운 곳(몸과 마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관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 수행자들이 <마음 ‘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마음의 세계>를 찾아 헤매다 보면 자칫 ‘소의 등에 올라타고서 소를 찾는 목동의 어리석음’을 범하기 십상입니다. ’마음 저 너머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지금 이 순간의 이해‘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진리의 참성품을 언제 어디서라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걸으면서>도 깨달을 수 있고, <서서>도 깨달을 수 있고, <앉아서>도 깨달을 수 있고, <누워서>도 진리의 참성품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좌선일변도의 정적 수행에만 머물지 말고, 좌선과 함께 <걸음걸이>라는 일상의 행위에 아는 마음을 일치시켜 관찰하는 <걷는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행 · 명상 하면 <좌선>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선불교 전통에서는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실제로는 선방에서의 좌선수행을 통해 ‘한소식’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좌복 위에 오래도록 앉아 있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한국 선방에서는 수행자를 수좌(修座)라고 합니다. 앉아서 오래 닦는다는 뜻입니다. 오죽이나 오래 앉아 있기를 잘 했으면 ‘절구통수좌’라는 말까지 생겨났겠습니까?
테라와다불교권의 수행처에서는 경행(행선)과 좌선을 적당한 비율로 번갈아가며 실천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온 수행자들은 종종 스승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주로 좌선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승께 수행보고 할 때, 좌선의 경험은 상세하게 보고하는 반면 행선에 대해서는 별로 보고할 내용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한국 수행자들이 좌선을 선호하는 이유는 오랜 세월 몸에 베인 한국의 좌식문화 습관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매일 책상 앞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오랜 시간동안 컴퓨터를 하거나, 매일 오래도록 앉아서 <좌선>만 하다 보면 신체에 각종 병리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첫째, 무릎이 망가집니다. (이 승이 한때 미얀마의 어느 한 수행처에 있을 때 스승의 지시를 무시한 채 아침 08시부터 저물녘까지 명상홀 모기장 속에 반가부좌로 앉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집중이 잘되어 2시간 가량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 경험했던 특별한 체험을 기대하며 호흡을 기본으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온갖 현상에 마음을 집중시켰습니다. 3시간이 넘어서자 집중력이 흐트러지면서 다리가 저려왔습니다. 다른 수행자들이 점심 공양을 하러 간 사이에도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오후가 되자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저 수행자가 깊은 삼매에 들었나 보다. 한소식 하는가 보다. 그러나 사실 이 승의 몸에서는 불이 나고 있었습니다. 알아차림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고, 이왕 앉은 김에 앉은 자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시험해 보려는 마음으로 다리의 고통을 감내하며 버티고 또 버텼습니다. 수행과는 아무 상관없는 무모한 인내가 그 한계의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오후 다섯 시의 종소리와 함께 눈을 떴습니다. 번뇌의 소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단지 9시간을 버티어 냈다는 희열만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오른쪽 무릎이 잘 못 됐다는 것은 수행처를 떠난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온몸이 굳어지면서 혈액순환 장애가 나타납니다. 순환장애는 몸의 유연성과 심신의 활력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됩니다.
셋째, 위장 소장 대장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각종 소화기 장애를 겪게 됩니다. 그로 인해 만성변비나 위축성위염 등 소화기 계통의 질병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넷째, 초심자들의 경우에는 온갖 망상(생각)들이 밀림 속의 원숭이처럼 날뛰거나, 사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통제(제어)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용을 쓰다가 상기병(上氣病)에 걸리기도 합니다. 상기병 때문에 수행을 포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실제 이 승도 출가 초기에 상기병이 걸려 두피 전체가 짓물러 터진 적이 있었습니다. 상기병에는 약처방도 없습니다. 마음이 쉬어져야 났습니다. 수행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 졌을 때 상기병은 치유됩니다.
좌선은 삼매를 계발하는데 유용한 수행방식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고요한 숲 속으로 들어가 나무그늘 밑에서 선정을 닦으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좌선의 상태에서 삼매에 들거나 삼매로부터 출정(出定)하셨습니다. 그러나 좌선만으로는 완전한 삼매와 통찰지혜의 온전한 성숙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보리수 아래에서 좌선을 통해 정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좌선만으로는 부동의 삼매를 계발할 수 없습니다. 좌선으로만 얻어진 삼매는 온실 속의 화초 같아서 햇빛을 받으면(밖으로 나가면) 이내 시들어 버립니다. 여지없이 깨져버립니다. 그러나 <걷는수행>(행선)을 통해 얻은 삼매를 바탕으로 한 좌선삼매는 강력한 힘을 지닙니다. 좌선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계속 강한 삼매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한의학에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속의 습한 기운은 상승시키고, 몸속의 열기는 아래로 내리라는 뜻입니다. <걷는수행>(행선)은 의식을 신체의 최하단부인 발바닥에 둠으로서 열기를 낮출 수 있고, 화(火)의 성질을 지닌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또한 걸음걸이에 의한 원활한 혈액순환은 가라앉아 있는 무겁고 습한 기운을 상승시켜 활력을 유지하게 합니다. 정신활동이 많은 현대인들에게 <걷는수행>(행선)은 심신의 건강과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참으로 유용한 수행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