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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문학사
희곡, 시나리오 편
남진원(시인. 문학평론가)
제1절 희곡
1.강릉 희곡사 서설
2.강릉농악과 강릉관노가면극
3.강릉 희곡의 현대사
제2절 시나리오
1.신봉승
2.김은숙
강릉 희곡사
제1절 희곡
1.강릉 희곡사 서설
강릉 희곡의 연원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일반적으로 희곡에 대한 기원을 살펴보면 신화나 전설에서 비롯되어 굿, 놀이, 연극으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화에는 중국의 ‘반고’와 ‘여와’ 이야기가 전해오고 우리의 경우에는 단군신화, 마고신화 등이 전해온다.
신화에서 한걸음 나아간 것이 굿이고 놀이 문화이다. 놀이 문화에서 또 한 걸음 나아가면 연극, 영화, 드라마로 이어진다. 연극은 희곡에 의해 연출되고 영화 드라마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생성, 방영된다.
신화를 보면 모두 공통점이 인간의 탄생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인간의 탄생을 제시하는 그 이면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행복과 구원 등을 희망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 수 있다. 굿의 행위는 인간의 소망을 목적으로 한다. 언어를 통해 신에게 전하면서 춤을 추고 소리(노래)를 전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질병과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고 행복하기 위한 인간의 기원적 행위이다. 개인의 사회에서 인간이 마을 단위로 모여 생활하게 되자 굿은 마을 단위의 축제로서 다양한 문화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굿은 사회가 변화하면서 일반인이 직접 참여하는 놀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놀이는 그야말로 마을의 축제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춤놀이, 탈놀이, 줄타기나 인간 탑 쌓기 놀이 등이 생겨났다. 사람들의 생활기반이 ‘마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자 한곳에 정착하여 오래도록 사는 기반이 농업생산이었다. 농업은 사람들의 삶에서 식량 생산이라는 기능을 했던 것이다. 자연히 농사의 고담함을 덜어내고 풍년을 빌고 하늘에 감사의 기쁨을 전하는 놀이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마을 단위의 농악놀이였다.
이 농악은 특히 강릉지역에서 전승과 발달이 잘 이루어졌다. 또한 강릉에서는 극놀이의 발달도 있었는데 무언극으로 하는 관노가면극이었다.
극놀이는 상층민과 하층민의 경계를 지우는 역할이 있었다. 즉, 하층민은 극놀이에 참여한 반면 상층민은 스스로 참여 하기보다는 즐기고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극놀이 중에 탈놀이는 현실을 풍자하는놀이로 변모 발전하였다.
강릉의 희곡사는 강릉 농악과 관노가면극, 강릉 현대 희곡사의 순으로 거론하려고 한다.
2.강릉농악과 강릉관노가면극
1)강릉농악
해방 전의 강릉 농악은 염근수가 상당히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동아일보 강릉지국의 기자로 일하던 염근수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신이 국내 여러 군데를 다녔으나 강릉만큼 농악대를 위해 힘쓰는 곳이 없다고 말하였다. 해마다 단오 때가 되면 농악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상을 주는 것이 놀랍다고 기록하였다.
해방 후에는 농악의 구성이 미약했다. 일제강점기 때 전쟁물자 부족으로 놋쇠로 만든 기물을 모두 거두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8년 상쇠 박기하는 왕산농악대를 이끌고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때 이화장에서 축하 공연을 하였다. 그해 서울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 행사에 〈강릉유천농악대〉가 강원도대표로 참가하였다. 1950년 6․25 동란으로 농악대는 그 원래의 모습을 갖추기 어려웠지만 1958년 제1회 전국민속경연대회 권태경 상쇠가 월호평농악대를 이끌고 경연대회에 참가하였다. 이로써 강릉 농악은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1960년대의 강릉농악은 새로운 전환의 시대였다. 강릉농악은 1961년 서울에서 시행된 제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국가적인 공식행사에서의 수상은 강릉농악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1962년 제4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69년 대구에서 시행한 제1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는 장려상을 받았다.
1970년대는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미신타파라는 이름으로 민속고유의 신앙과 전통 민속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1977년 수원에서 개최된 제1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강릉농악의 상쇠인 박기하씨가 평창백옥포 농악대를 이끌고 참가하여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1978년에는 춘천에서 개최하자 평창농악을 이끌고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
1980년대는 박기하씨의 농악에 대한 열정이 인정되어 주목을 받았다. 1985년에는 강릉농악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박기하씨는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86년 제4회 강원도민속예술대회에서 강릉농악이 종합우수상을 수상하였다. 1986년에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릉농악의 효과적인 보존, 전승을 위해 〈강릉농악보존회〉가 구성되었다.
1990년대는 전승체계를 확립하면서 대외적으로는 활동 영역을 넓히고 국제적인 교류까지 이어졌다. 1994년부터 〈강릉농악보존회〉가 강릉 시내 초등학교 어린이 농악경연대회를 창설하여 체계적인 전승체계를 형성하였다. 1996년에는 강릉농악대가 일본 돗토리현 산업박람회에 초청되어 15일간 공연을 하였다. 사천초등학교 농악대는 세계어린이 민속축제에 참가하였고 명주초등학교 농악대는 일본 돗토리현 박람회에 각각 참가하여 국제적인 교류를 확대하였다. 이외에 고등학교 대학교 농악대도 구성하여 대회에 참여하여 수상을 하였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일반농악대까지 구성하여 활발하게 농악 계승발전이 이어지고 있다.
2000년대의 강릉농악은 공연 전문성을 위하여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 상설공연단을 조직하여 국내외 공연(중국, 일본, 멕시코, 베트남 등)과 소외계층을 찾아가는 공연을 하고 있다. 강릉농악보존회는 2011년 강원무형문화제전에서 대상을 받는 등 노력을 더욱 기울이고 있다.
강릉농악의 내용은 지신밟기, 다리밟기굿, 두레굿과 질먹기, 화전놀이, 집들이 고사굿, 걸립굿, 뱃놀이 등이다.
강릉농악의 특징은 첫째로 농사풀이이다. 이는 농악의 생산 연행적 근간을 말하는 사례이다. 8소고, 8법고, 8무동이 논갈이부터 벼베기, 방아찧기에 이르기까지 수십 가지의 모의 농경 연행으로 합작과 유기적 연대를 이룬다. 이는 농사 과정을 역동적이고 창의적으로 형상화한 농경문화의 차별화된 연행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로 고사반告祀盤을 상쇠가 주도하여 정월대보름 걸립굿을 할 때 가정에서 농악대를 위해 쌀과 실 등을 장만하면 순례하면서 안녕을 기원하는 고사반을 친다. 강릉농악의 고사반은 다른 지역 구연내용보다 길고, 내용도 다양한 점이 특징이다. 셋째, 세시 풍속 연행으로 다양하게 진행된다. 정초 지신밟기, 정월대보름 달맞이, 횃불싸움, 다리밟기를 하고, 2월 초엿새 좀상날에는 농악대 쇠절금으로 마을에 놓인 나무다리를 서로 뺏기도 하면서 이긴 마을과 진 마을 간에 농작의 풍흉년을 점친다. 음력 3월에는 화전놀이를 가는 데 ‘꽃다림’이라 하여 여성들과 농악대도 하루 종일 음식을 차려서 먹고 즐긴다. 음력 5월 대관령국사성황제의 길놀이를 선도하고, 두레 농악이라 할 수 있는 모심기, 질먹기 농악을 하며, 이후에는 뱃놀이를 한다. 넷째, 전체적으로 빠르고 박력 있는 쇠가락과 세련된 춤사위를 구사하는데, 마치 전 과장에서 뛰어다니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악기 편성에서 소고와 법고가 확연히 구분되며, 무동까지 각 8명씩 구성된다. 오동고리받기는 강릉농악의 힘과 기량을 보여 준다. 다섯째, 조직과 운영에서 보유자 및 마을 농악대원들로 하나의 대표 농악대를 구성한다. 마을 농악대는 각자의 체계를 유지하면서 대외적으로 강릉농악의 전형성을 갖추고 기량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강릉농악을 이끈 주요 지도자로는 박기하(1920-2017)와 김용현(1929-2003), 정희철(1934- )등을 꼽을 수 있다.
2)강릉관노가면극
신화에서 비롯된 굿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극놀이가 개최된다. 놀이에는 춤놀이, 탈놀이, 줄타기, 인간 탑 쌓기 등의 놀이를 들 수 있다. 농악이 본격화되면서부터는 농악놀이가 시작되었다. 그 저변에는 모두 신을 즐겁게 하고 구원과 희망 소원이라는 동질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극놀이 중에 탈놀이는 춤이 병행되어 ‘탈춤’으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강릉의 극놀이에는 무언극인 관노가면극이 있다.
강릉관노가면극은 강원도 강릉지방에서 단오제의 일환으로 전승되는 가면극으로서,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강릉단오제 속에 포함되어 있다. 강릉관노가면극은 지역명과 연희자의 신분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명칭이다. 이외에 ≪강릉관노가면희(江陵官奴假面戱)≫, ≪강릉서낭신제가면극(江陵城隍神祭假面劇)≫, ≪강릉가면희(江陵假面戱)≫, ≪강릉탈춤≫, ≪강릉관노탈놀음≫ 등의 명칭이 있다. 강릉관노가면극은 토착적·자생적 가면극을 지칭하는 마을굿놀이 계통의 가면극으로 볼 수 있다.
강릉관노가면극은 강릉단오제에서 관노(官奴)들에 의해 연행되던 가면극이었다. 과거에는 음력 5월 1일에 여러 가지 색깔의 천으로 장식한 나뭇가지인 괫대를 세우고 대성황당의 앞마당에서 가면극을 행했는데, 4일과 5일까지 계속 연행했다.
김동하·차형원의 제보를 통해 볼 때 관노가면극은 1910년까지 지속적으로 연행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하여 맥이 끊겼다. 이후 강릉관노가면극은 1965년 민속학자 최상수의 권고로 당시 춘천여고 교사이던 정의윤이 춘천여고생들을 지도하여 1965년도 제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복원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의윤이 1960년대 후반 강릉여고로 전근 온 후부터는 강릉여고에서 관노가면극을 놀았다. 그 후 강릉교대에서도 이 놀이를 논 적이 있다. 1976년도에는 관동대에서, 1990년도에는 강릉대에서 이 놀이를 시작하여 현재까지 계속 전수하고 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릉시 유천동의 보유단체는 1983년 2월부터 장정룡의 지도로 연습을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춘천여고와 강릉여고에서 복원한 관노가면극은 놀이의 고증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 자주 지적되었다. 그래서 이후 관동대와 강릉대, 그리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유천동의 보유단체에서는 1966년 김동하·차형원의 제보로 고증한 임동권의 무형문화재 지정보고서에 의하여 연희를 충실히 복원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관노가면극은 단오제 기간 중 5월 1일 본제(本祭) 때부터 놀기 시작한다. 1928년 여름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의 조사에 의하면, 5월 1일 괫대(花蓋)를 장식하여 세우고 대성황당의 앞마당에서 가면극을 행하고 4일 5일까지 계속했는데, 5일은 오전 8시부터 대성황당 앞에서 가면극을 공연하고 다시 약국성황(藥局城隍)과 소성황(素城隍)에서 기도와 연극을 행한 후 온 길을 되돌아서 성내(城內)의 시장·전세(田稅)·대동(大同)·사창(司倉)의 여러 관청 앞에서도 성대하게 연희하고, 해질 무렵 신대와 괫대를 받들어 여성황(女城隍)에 이르러 이곳에서도 연희한 후 신대를 대성황당 안에 봉안했다고 한다.
강릉관노가면극은 제1과장 장자마리춤, 제2과장 양반광대·소매각시춤, 제3과장 시시딱딱이춤, 제4과장 소매각시 자살과 소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의 가면극 가운데 유일하게 묵극(黙劇)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다른 지방의 가면극은 각 과장의 내용이 서로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는 데 반해, 강릉관노가면극은 각 과장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양반과 소매각시를 중심으로 한 서사적인 내용의 연희가 진행된다.
첫 번째 과장인 장자마리춤은 벽사적 의식무로, 장자마리 둘이 마당닦기춤을 통해 놀이판을 정화한다. 장자마리들은 의상에 곡식 이삭과 해초인 말치를 매달고 있고, 불룩한 배를 통해 잉태한 모습을 보여 주며, 둘이 모의적인 성행위의 동작을 한다. 즉 장자마리춤은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고을굿인 단오제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제2과장 양반광대·소매각시춤 과장은 소매각시를 차지해서 다정하게 노는 내용이다. 제3과장 시시딱딱이춤 과장은 시시딱딱이들이 양반과 소매각시의 사랑을 훼방 놓는 내용이다. 제4과장 소매각시의 자살과 소생 과장은 소매각시가 자살했다가 다시 살아나는 내용이다. 양반이 시시딱딱이들을 쫓아버린 후에 소매각시를 끌고 와서 시시딱딱이와 놀아났다고 나무란다. 소매각시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완강히 부인하면서 양반에게 용서를 비는데, 그래도 양반이 화를 풀지 않자 소매각시는 양반의 긴 수염에 자기의 목을 매어 자살한다. 이때 장자마리들과 시시딱딱이들이 소매각시의 죽음을 확인하고, 서낭신목을 모시고 와서 빌자 소매각시가 소생하는 내용으로 결말을 맺는다.
이러한 행복한 결말은 서사적 전개와 함께 강릉관노가면극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다른 지방의 가면극에서는 먹중과 노장의 갈등, 노장과 소무의 갈등, 양반과 말뚝이의 갈등, 영감과 할미의 갈등 등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한다. 갈등을 갈등으로만 제시하며, 할미의 죽음과 같은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강릉관노가면극은 소매각시의 소생으로 모두가 즐거워하며 춤을 추면서 결말을 맺는다.
이와 같이 서사적인 내용으로 연희가 전개되고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가면극은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현재 북한 지역인 강원도의 통천지방에도 서사적인 내용을 갖고 있으며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가면극이 전승되고 있었다. 통천가면극은 모두 3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비교적 짧은 가면극인데, 말뚝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일관된 줄거리를 유지하면서 진행된다. 제1과장에서 말뚝이가 양반에게 쫓겨났다가, 제2과장에서 도승의 도움으로 양반에게 복수할 방법을 모색하며, 제3과장에서 양반을 내쫓는 데 성공하고 마누라도 다시 만나 즐긴다는 줄거리가 전 과장을 통하여 유기적인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바로 강원도 지방의 가면극인 강릉관노가면극과 통천가면극에서만 서사적인 내용과 행복한 결말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사적 내용과 행복한 결말은 강원도 가면극의 특징이라고 지적할 수 있고, 예능보유자였던 김동하·차형원의 제보에 의한 연희고증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지방의 가면극에서는 양반의 권위에 대한 풍자가 주로 말뚝이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데 반하여, 강릉관노가면극에서는 소매각시가 양반 권위의 상징인 수염에 목을 맴으로써 그 권위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원래 관노가면극의 반주악기는 날라리(태평소)·꽹과리·북·장구·징 등이었고, 무당들이 반주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관노가면극의 반주악기는 꽹과리·북·장구·징으로 구성되고, 장단은 질꼬내기(길군악)·굿거리장단·삼채장단만으로 연주된다.
춤사위는 기본사위춤·마당닦기춤·직선사위춤·맞춤·너울질춤·회돌이칼춤·어르기춤·가세치기·고개치기 등이 있다. 마당닦기는 장자마리의 배불뚝이춤으로, 허리에 두른 둥근 테를 양손으로 잡고 좌우로 미는 동작이다. 처음 동작은 크게 뛰며, 두 번째 동작은 제자리에서 테만 당기면서 뛴다. 맞춤은 소매각시의 춤사위로서, 양손을 턱 아래에 모아 고개를 오른쪽으로 뒤로 돌려 한 번 끄덕하고, 다시 고개를 왼쪽으로 뒤로 돌려 한 번 끄덕한다. 너울질은 몸을 오른쪽으로 90도 돌려서 오른팔을 앞으로 뻗은 후 손바닥을 엎었다 뒤집었다 하면서 무릎을 약간씩 굽혔다 폈다 하며 춘다. 이때 반대쪽 어깨를 약간씩 앞으로 살짝살짝 당겨준다. 이것을 좌우로 반복한다. 이는 전체 등장인물이 추는 춤사위이다. 어르기는 시시딱딱이가 추는 춤으로 양팔을 어깨 높이로 들고 오른발을 힘차게 앞으로 내딛으면서 왼발을 뒤로 든 후 고개와 손목을 세차게 흔드는 춤사위이다. 다시 양팔을 어깨 높이로 들고 오른발을 오른쪽 옆으로 힘차게 내딛으면서 왼발을 왼쪽으로 든 후 고개와 손목을 세차게 흔든다. 다음에는 왼발도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 동작을 취한다.
가세치기는 시시딱딱이의 춤사위로 먼저 양발을 모아 다리를 굽혀 앉은 후 팔을 안쪽으로 늘어뜨려 모았다가, 이후에 높이 도약하면서 팔을 머리 위로 똑바로 뻗어서 올리는 춤사위이다. 고개치기는 장자마리가 오른쪽 다리를 들고 양쪽 무릎 사이로 머리와 팔을 넣었다가 하늘을 향해 양팔을 쭉 폈다가 내리면서 다리를 제자리로 놓는 춤사위이다. 장자마리는 발을 바꿔가며 이 동작을 반복한다. 강릉관노가면극이 1909년경 전승이 중단된 이후 1965년에 다시 복원할 당시, 경기도 양주별산대놀이의 춤사위가 많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후 장자마리의 '마당닦기춤', 양반광대의 '직선사위춤', 양반광대와 소매각시가 어울려서 추는 '맞춤(對舞)'과 '어깨춤', 시시딱딱이의 '너울질춤' 등 강릉관노가면극의 독자적인 춤사위를 복원했다.
강릉관노가면극에 사용하는 가면은 양반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 등 3종이며, 장자마리는 가면은 쓰지 않고 검은 베로 된 포대를 뒤집어쓰고 얼굴에 눈 2개와 코 1개를 뚫어 놓는다.
한국의 가면극은 크게 본산대놀이 계통과 마을굿놀이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본산대놀이로부터 전파된 가면극들을 말한다. 애오개, 사직골 등에 있었던 산대놀이를 흔히 본산대놀이라 부르는데, 이는 양주와 송파 등지의 별산대놀이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본산대놀이는 조선 후기 서울 근교에서 반인(泮人) 등이, 삼국시대 이래 전승되어 온 산악·백희 계통의 가면희와 연희를 재창조해 만들어낸 가면극이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대부분의 가면극이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이다. 황해도의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 서울과 경기도의 양주별산대놀이·송파산대놀이, 경상남도의 고성오광대·통영오광대·수영야류·동래야류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마을굿놀이 계통의 가면극이다.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은 마을굿 전통 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본산대놀이 계통의 가면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토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마을굿놀이 계통의 가면극으로 하회 이웃 마을인 병산의 별신굿탈놀이, 경상북도 경산의 자인팔광대놀이, 경상북도 영양군 주곡동의 가면극 등을 꼽을 수 있다. 고을굿인 강릉단오제에서 연행되는 강릉관노가면극 역시 마을굿놀이 계통의 가면극이라 할 수 있다.
마을굿놀이 계통의 가면극들은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과 많이 다르다. 하회별신굿탈놀이와 강릉관노가면극의 경우, 그 연희 내용과 등장인물들이 다른 지방의 가면극과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그 이유는 하회별신굿탈놀이나 강릉관노가면극이 마을굿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발전했기 때문이다. 물론 하회별신굿탈놀이의 파계승마당이나, 양반·선비마당에서 유학과 유학자를 조롱하는 내용, 강릉관노가면극의 소매각시라는 명칭 등에서 알 수 있듯이, 후대에는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도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영향을 일부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강릉관노가면극은 원래 관노들에 의해 연희되던 탈놀이이다. 뿐만 아니라 관노의 우두머리가(首奴)가 단오제의 제관 중 종헌관(終獻官)으로 참여했고, 관노인 나팔수가 태평소를 불고 놀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강릉단오제에서 관노들이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갑오경장(1894) 때 공식적으로 공사노비법(公私奴婢法)을 혁파함으로써 점차 관노가면극의 전승이 위축되다가 1909년경에는 전승이 단절되었다. 또한 실제로 연희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관노가면극을 복원하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다행히 임동권이 1966년 김동하·차형원을 찾아내어 관노가면극을 복원할 수 있었다. 이들은 관청의 이속(吏屬)이었는데, 김동하는 21세 때 차형원은 17세 때 마지막으로 관노가면극을 보았다고 한다.
김동하(金東夏, 1884-1976/ 가면 제작)는 1965년 추진된 관노가면극의 재연에 상당한 공헌을 했으며, 관노가면극에 대하여 소상하게 알고 있는 관계로 1967년에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가 작고했다. 차형원(車亨元, 1890-1972/ 양반광대)은 관노가면극에 대하여 매우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의 증언 내용은 오늘날 관노가면극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67년에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가 작고했다.
현재 강릉에서 관노가면극을 전수하고 있는 단체는 강릉시 유천동의 주민들로 구성된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강릉관노가면극보존회를 비롯하여 관동대학교·강릉대학교·강릉문화원 소속의 주부단체인 임영회·경포초등학교 등이다.
유천동의 보존회는 1993년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권영하(權寧夏, 1918-1997/ 양반광대)를 중심으로 25명의 주민들이 관노가면극을 활발하게 전수하고 있다.
2000년 김종군(金鐘群, 1942- )이 추가로 인정되었으며, 전수교육조교로 주영건(朱寧健), 안병현 등이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채록된 강릉관노가면극의 대본은 다음과 같다.
(1)〈임동권본〉(『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19호 강릉단오제』, 문화재관리국, 1966)
〈임동권본〉은 임동권이 1966년 6월 23일 김동하와 차형원·함종태·장대연 등의 구술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임동권본〉은 강릉관노가면극 연희본 중 가장 먼저 기록된 연희본으로서, 1966년 8월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의 일부로 작성되었다. 이 연희본은 등장인물과 가면의 재질·특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제1과장 장자마리, 제2과장 양반·소매각시, 제3과장 시시딱딱이, 제4과장 양반과 소매각시 화해 등 모두 4과장으로 구성되었다. 이 연희본에서는 강릉관노가면극의 반주를 무격(巫覡)이 했으며, 가면 보관과 관리는 관노청(官奴庁)에서 맡아서 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2)〈향토교본〉(『향토교본』, 문왕출판사, 1970)
〈향토교본〉은 강릉관노가면극을 '강릉탈춤'이라 표기했다. 〈향토교본〉은 다른 대본과 달리 과장을 분류하고 있지 않으며, 배역별로 기술했다. 그리고 등장인물로는 장대말이 2인, 양반광대 1인, 소매각시 1인, 수수딱때기 1인이 등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대본에서는 특히 수수딱때기, 즉 현재의 시시딱딱이의 존재가 2인인 것과 달리 1인이 등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향토교본〉에는 다른 연희본이나 현재 연행하는 관노가면극과 내용이 다른 부분도 존재한다. 이 대본에서는 양반광대 수염에 소매각시가 목을 매면, 양반광대가 소매각시를 업고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3)〈최철본〉(「강릉 단오제 연구」, 『아세아연구』 14-4,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71)
〈최철본〉은 강릉관노가면극을 '관노가면희(官奴假面戱)'라 칭하며 전체 4과장으로 분류하고 있다. 〈최철본〉에는 전체 연행의 소요시간과 가면의 재질, 가면의 보관, 전체 연행 순서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본에서는 등장인물 중 시시딱딱이를 '시시딱대기'라 표기했다.
(4)〈최상수본〉(『산대·성황신제가면극의 연구』, 성문각, 1985)
〈최상수본〉은 최상수가 1942년과 1958년에 김동하(金東夏)·김도수(金度洙)·김돌이(金乭伊) 노인들로부터 구술을 채록한 것이다. 〈최상수본〉에서는 강릉관노가면극을 '강릉가면희(江陵假面戱)'라 칭하며 제1 장자말과장, 제2 양반과장, 제3 시시딱떽이과장으로 분류했다. 〈최상수본〉에서는 다른 연희본과 달리 가면의 재질이 종이이며, 등장인물로는 장자말 2인, 양반, 소매각시, 시시딱떽이 2인이 있었다. 또한 가면의 형태 역시 현재의 모양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5)〈전경욱본〉(『강릉단오제 실측조사보고서』,문화재관리국, 1994)
〈전경욱본〉은 1994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실시한 강릉단오제 실측조사의 결과 채록된 연희본이다. 이 연희본은 등장인물의 세부 동작과 춤사위를 잘 묘사하고 있다. 〈전경욱본〉은 제1과장 장자마리춤 과장, 제2과장 양반광대·소매각시춤 과장, 제3과장 시시딱딱이춤 과장, 제4과장 소매각시 자살과 소생 과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연희본은 가면극의 순차적 순서에 따라 연희 동작을 찍은 사진과 놀이판에서 움직임을 보여주는 도표가 첨부되어 있다.
(6)〈국립문화재연구소본〉(『강릉단오제』,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국립문화재연구소본〉은 전통문화의 연구와 보존을 위한 중요무형문화재 기록화 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연희본이다. 1999년을 민속지적 현재로 삼아 가면의 형태, 등장인물의 성격, 춤사위, 내용 등을 기록했다. 여기서는 가면극의 내용 전개에 따라 네 과장으로 구분했다. 제1과장은 장자마리춤 과장, 제2과장은 양반과 소매각시춤 과장, 제3과장은 시시딱딱이춤 과장, 제4과장은 소매각시 자살소동과 소생 및 화해 과장으로 분류했다.
(7)〈강릉관노가면극보존회본〉(『강릉관노가면극 전수교본』, 해람기획, 2000)
〈강릉단오제보존회본〉은 관노가면극보존회에서 가면극 전수를 위해 만든 연희본이다. 이 연희본은 〈임동권본〉이 4과장으로 구분한 것과 달리 제1과장 장자마리 개시, 제2과장 양반광대·소매각시 사랑, 제3과장 시시딱딱이의 훼방, 제4과장 소매각시 사랑소동, 제5과장 양반광대·소매각시 화해로 구분되어 있다. 특히 2000년에 제작된 『강릉관노가면극 전수교본』의 경우 기본 춤사위, 과장별 춤사위 등의 그림을 삽입하여 무보(舞譜)를 완성했으며, 각 배역별 춤의 특징, 탈과 복식의 실측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의 가면극은 크게 본산대놀이 계통의 가면극과 마을굿놀이 계통의 가면극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강릉관노가면극은 안동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같은 마을굿놀이 계통의 가면극으로서, 고을굿인 강릉단오제에서 유래하여 발전한 가면극이다. 그러나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마을주민인 농민들이 놀았고, 강릉관노가면극은 관노들이 놀았기 때문에 전승주체가 차이를 보인다.
또한 다른 지역의 가면극은 각 과장의 내용이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는 데 반해, 강릉관노가면극은 각 과장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양반과 소매각시를 중심으로 한 서사적인 내용이 특징이다.
그리고 강릉관노가면극의 양반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의 삼각관계는 처용설화의 처용, 처용의 아내, 역신의 삼각관계와 매우 유사하다. 처용이 역신에게 아내를 뺏겼다가 다시 찾는 것이나, 양반광대가 시시딱딱이에게 소매각시를 뺏겼다가 다시 찾는 것이 구조상 일치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3. 강릉 희곡의 현대사
강릉문학사에서 현대 희곡 부문은 그 활동이 미미하였다. 1960년대부터 극히 소수의 작가가 희곡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것도 연극의 극단을 운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대본이 쓰여지고 전문적인 작가는 김정개와 신봉승, 고성주, 김광덕 등이 고작이다.
강릉문학사에서 희곡을 이야기하자면 강릉연극사와 극단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서술되어야 할 것이다.
극단을 창단하며 대본집필과 연출을 한 사람들은 김동호, 신성구, 안호혁, 김헌기, 김성찬, 강석수, 권대혁 등이 있다.
강릉문단에서 희곡은 1960년대에 등장한다. 1966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한 김정개(金政介. 1928 ∼ )에 의해서 희곡의 문이 열렸다. 김정개는 함흥 출생으로 196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인형 4남매」가 당선하여 등단하였다. 강릉문화원장, 강릉문인협회장, 예총 강릉지부 부지부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강릉 관동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강원도 문학상, 강원도 문화상, 법무부장관 표창, 인권주간 국무총리상, 교정대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주로 그리스도 정신을 바탕으로 한 현대 인간의 윤리성을 추구하고 있다. 희곡으로는 「천지개벽」,「아담과 뱀」,「반세계」,「철기시대」,「외딴섬」,「챗바퀴도는 다람쥐의 외출」 등이 있다.
1970년대부터 강릉의 희곡사는 강릉연극과 함께 시발점을 갖고 출발하였다. 1970년대 초에 연극 활동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그것도 서울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근우회〉는 연극 써클 단체인데 서울에 있는 강릉 출신의 대학생들로 이루어졌다.
1972년에는 관동대학교에 근무하던 김정개의 노력으로 대학 써클인 「길」연극 동호회가 발족되었다. 본격적인 활동은 1977년 김동호에 의해서였다. 극단「소리」의 창단이 그것이다.
경향신문 1976년 7월 21일자〈문화의 향훈(香薰) 따라 천리길(21), 강릉 전통 잃은 文鄕〉에 따르면 강릉의 희곡은 김정개(金正介)가 명맥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한다. 가뭄에 콩나듯 서울에서 청탁이 오면 써 보내는 외에 관동대학교, 간호전문학교 등에서 매년 1~2편 공연되는 작품의 선정과 연출을 홀로 맡아야 했다. 1975년 가을 강릉여성단체협의회 회원들로 「맹진사댁 경사」를 공연한 것이 크게 호평을 받아 1976년에는 몰리에르의 「수전노」를 공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여성단체의 연극을 계기로 민간연극운동에 대한 희망이 생겼다.
1980년대는 한국 연극 협회 강릉 지부가 설립되고 1987년 8월 교사이던 신성구는 극단 「사람」을 창단하였다. 이 당시 함께 참여했던 사람은 시인 권순인이었다.
신성구는 직접 희곡을 쓰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연출하였다. 당시에 9일 동안 12회의 공연을 가졌다. 관객수는 예상이외의 성과를 올렸다.
신성구는 강릉의 희곡과 연극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1987년 도내에서 처음으로 연극 전문 소극장을 마련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극단 「사람」은 1990년도 중반까지 총 30회에 이르는 정기 공연을 가졌다. 뒤이어 1989년 안호혁이 극단 「시민」을 창단하고 안호혁 작품인 희곡 「갈매기의 방황」을 구 시청 앞에 위치한 카페 〈노래 마을〉에서 공연하였다. 1989년 7월 10일에는 한국 연극 협회 강릉 지부가 정식으로 인준을 받고 지부장에는 손종대가 선임되었다.
1990년에는 한국연극협회 강릉지부 창립 기념 및 단오제 경축으로 존·파울즈 작 「콜렉터」를 정시영 연출로 공연하였다.
1990년대는 강릉 연극의 전성기였다. 연극 공연을 위한 희곡은 전문 작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극단 대표가 대부분 써서 출연, 공연하였다.
1991년 중반기에는 극단 『사람』의 단원이었던 김헌기가 독립하여 극단 작은 무대를 창단하여 「신의 아그네스」를 대학로 카네기홀에서 공연하였다. 1991년 12월에는 춘천 교육 대학 연극부 출신인 김성찬이 극단 『사람』에서 활동하다 역시 독립하여 극단 『누리』를 창단하여 김성찬 연출의 「품바」를 공연하였다. 이후 극단 『사람』을 시작으로 극단 『누리』, 극단 『시민』 등이 창단되었다.
1992년 중반에 강릉 대학 알 극회 출신인 강석수가 극단 『연하사[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를 창단함으로써 강릉에는 강원도 내에서 가장 많은 다섯 개의 극단이 활동하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양적인 면에서는 괄목하였만 질적인 면에서는 만족할만한 성과가 없었다. 극단 『사람』은 1992년 9월 1일에 극단 『사람들』로 명칭을 바꾸었다. 극단 『시민』은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공연을 끝으로 해체되었다. 또한 극단 『연하사』와 극단 『작은 무대』는 합동 공연으로 「홍도야 우지마라」를 공연한 후, 극단 『연하사』는 해체되었고 극단 『작은 무대』는 활동을 중지했다.
1992년에는 강릉 시민의 오랜 숙원이었던 강릉 문화 예술관이 개관하면서 강릉 지역의 연극은 보다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92년 3월에 강릉 문화 예술관이 개관하였다. 개관 기념 공연으로 극단 『시민』의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공연되었다. 1992년 4월에는 강릉을 대표해서 극단 『사람』의 「나릿가 사람들」이 전국 연극제 도 예선 대회에서 장려상과 무대 미술상을 수상하였다. 이는 강릉 연극계 최초의 대외 수상이었다. 1995년에는 극단 『사람들』이 강원 연극제에서 신성구 극본, 연출 「무동이의 하늘」로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인천에서 열리는 제13회 전국 연극제에서 강원도 대표 자격으로 출전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수상하지는 못했다.
1994년에는 박종범이 극단 『짚시』를 창단하였다. 1998년에는 청주 대학교에서 연극을 전공한 김동석이 극단 『꿈하늘』을 창단하였다. 이로써 1990년대에는 연극 단체로 극단 『짚시』, 『진또배기』, 『꿈하늘』, 극단 『사람들』 등이 활동하였다.
1990년대 중반을 거쳐 2010년까지 강릉 연극은 대외적인 수상이나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10년 동안 강릉은 연극의 불모지로 인식되어 왔다. 춘천이나 원주, 속초에도 못 미치는 침체기가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고성주(1942-2008)는 아동극을 쓰면서 희곡작가로 활동했다. 고성주는 강릉사범학교와 명지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아동 극본을 많이 쓰는 작가다.『월간 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이래, 대한민국 문학상, 한국어린이도서상, 한국동극문학상, 눈솔상, 박홍근아동문학상, 한국희곡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1985년 한국극작가협회 사무국장을 지냈고 2001년 한국아동문학인협회 부회장을 지냈고 이때는 창신초등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2005년에는 제23회 한국희곡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09년에는 아동극작가협회 회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희곡집 『위대한 유산』(지성의 샘. 2017)이 있고 동극집『희망의 속삭임』,『노란 은행잎의 꿈』,『외로운 별』,『슬픔이 가득한 가을이야기』등이 있고 이밖에『1등이 있으면 꼴찌가 있어야 할 텐데』(2004)가 있다. 『아동극의 이해와 연출』(지성의 샘. 2006)을 냈고 서울 반포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서울에서 또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 사람이 김광덕과 신봉승이다.
김광덕은 본명은 ‘김동기’이고 1968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꿈꾸는 연습』이 당선되었다. 서울예술대학교 극작과에서 공부하고, 극단 ≪아름다운사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문예진흥원 창작지원 및 국립극장 창작극 공모에 당선하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마차」로 데뷔한다. 이때부터 김광덕은 연출가로 두각을 나타낸다. 그리고 2005년 제1회 함세덕 희곡상, 2011년 〈거창연극상〉,〈세계초연희곡상〉, 2012년 〈제6회 차범석 희곡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김광탁희곡집 1』, 『미운 남자』등이 있다.
신봉승의 첫 희곡은 2001년에 공민왕 비사를 쓴 「파몽기(破夢記)이다. 이때가 신봉승이 67세때이다. 이 작품은 국립극단에 의해 공연되었다. 2007년에는 사도세자의 비극을 담은 극본 「노망과 광기」가 발표되고 2009년에는 얼룩진 현대사의 아이러니를 희화한 작품 「달빛과 피아노」가 나왔다. 이 극본은 현대를 소재로 쓴 작품이다. 2011년에는 희곡 「이동인의 나라」가 나오고, 면암 최익현의 생애를 담은 작품「너희가 나라를 아느냐」가 대학로 예술극장대강당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다.
강릉 지역에서도 2006년 서울 롯데 월드에서 활동하던 심원경, 김영미가 힘을 합쳐 극단 『붐아트 컴퍼니』를 창단하였다. 뮤지컬이라는 장르로 연극 동호회 회원들이 모여 연극 공연 활동에 불을 지폈다.
2006년 12월 14일 서울 예술 대학 연극과를 졸업한 권대혁은 극단 『산울림』, 『쎄실』 등에서 활동하던 중 돌연히 귀향하면서 극단 『백향 씨어터』를 창단하였다. 「단오 서낭」, 「5월의 신목」 등 강릉 지역 내에서 자생되고 전해지는 고유의 문화를 소재로 연극 무대에 선보이며 리얼리즘 연극을 표방하며 꾸준히 활동을 하였다
2011년 봄 『백향 씨어터』는 연극 협회 정식 인준을 받아 그해 제28회 강원 연극제에 「장군 슈퍼」라는 작품으로 처음 출전하여 연출상에 권대혁, 최우수 연기상에 전인혁, 대상이라는 3관왕을 수상하며 명실공히 강원도를 대표하는 극단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11년, 제29회 원주 전국 연극제에 대한 강원 연극인의 열망은 그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 그동안 10년이 넘게 강릉 연극은 변방으로 도내에서 주목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백향 씨어터』 이름마저 생소했던 변방의 신생 극단이 전국 연극제 강원도 대표권을 획득하여 도 대표로 출전하게 되었으니 사뭇 놀랄만한 일이었다. 2011년 원주 전국 연극제는 전 좌석이 유료임에도 불구하고 치악 예술관 1,300석을 꽉 채우며 만석으로 매진되는 기염을 토하며 극단 『백향 씨어터』는 강릉 연극사 최초로 전국 연극제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2011년 여름 전국 연극제의 열기와 흥분이 채 가시기 전에 극단 『백향 씨어터』는 강릉 사투리 보존회와 공동으로 ‘2011 강릉 문화의 달’ 행사 일환으로 강릉 사투리를 무대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시도했다. 권대혁 대표가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홍장야우」는 강릉 지역의 고유 설화인 강릉 경포호의 「홍장 고사(紅粧 故事)」를 소재로 한 연극으로서 지역 설화의 우수성과 강릉 지역 특유의 사투리를 콘텐츠화 하고 무대화하는 새로운 가능성과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홍장 고사」 공연은 1회로 강릉 문화 예술 회관 대극장이 전석 만석이었으며 자리가 부족해서 계단에 앉아 보거나 서서 관람을 하는 진풍경까지 연출되었다. 이후 2012년 3월 극단 『붐아트 컴퍼니』는 연출 및 배우 부재라는 지역 연극의 정체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활동을 중단했다.
2012년 10월 8일 강릉시는 구 만민 교회를 리모델링하여 강릉의 문화 예술인들과 시민들이 공연을 발표하고 기획할 수 있는 120여 석 정도의 복합 문화 공간인 작은 공연장 ≪단≫을 개관했다. 극단 『백향 씨어터』는 개관 전인 10월 1일~10월 7까지 이양구 작, 권대혁 연출의 「별방」을 총 10회 공연으로 기획했다. 소극장 개관에 즈음하여 주변의 우려가 무색하리만큼 10회 전석 만석을 기록하여 1,400명이 넘는 시민들이 공연을 관람했다.
연극 인구 저변 확대 및 연극 활성화에 다시 불을 지핀 『백향 씨어터』는 이후 속초 극단 『굴렁쇠』와 연합하여 2018 동계 올림픽 성공 기원 무대 연극 「삼도봉 미스테리」를 준비하여 지역 연극의 정체성 확립과 더불어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였다. 공연은 속초 『두드림』 소극장에서 2012년 12월 21~25일까지, 강릉은 작은 공연장 『단』에서 12월 27~12월 30일까지 상연되었다. 2014년 현재 강릉 지역에는 극단 『꿈하늘』과 『백향 씨어터』 두 개의 극단이 명맥을 유지하며 활동하고 있다.
제2절 시나리오
- 신봉승 . 김은숙 -
강릉의 시나리오 작가를 들면 신봉승과 김은숙이다. 매우 소수이지만 그 활동은 어느 지역에 못지않을 정도로 대단하다.
1. 신봉승(1933-2016)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인 신봉승은 시나리오 작가로 더 잘 아려져 있다. 시나리오 작가 신봉승은 한국 문단사에서 신봉승은 역사물을 쓴 시나리오 작가로써 명성을 크게 떨쳤다.
시나리오는 희곡보다 훨씬 이전에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작가 신봉승에 의해 이루어졌다. 신봉승은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강릉사범학교에 다니면서 최인희 시인과 황금찬 시인으로부터 문학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
신봉승은 강릉사범학교에 다닌 이후, 경희 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57년 『현대 문학』지에 시 「이슬」로 유치환의 추천을 받았다. 1961년 『현대문학』에 「현대 시의 생성과 이해」로 조연현으로부터 평론 추천을 받았다.
1961년 시나리오 「두고온 산하」가 국방부 시나리오 현상 모집에 당선된 이후 라디오 및 TV 드라마 작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역사 에세이스트, 대중가요 작사가, 희곡 작가 등으로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였다.
한국예총 강릉지부장을 역임한 신봉승은 시나리오 작가 협회 회장을 지냈다.
한양대, 동국대, 경희대 강사를 지내고 추계 영상 문예 대학원 석좌교수, 대종상 청룡상 심사위원장, 공연윤리위원회 부위원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했다.
1999년에는 강원국제관광 EXPO 총감독을 지내기도 하였다.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으로 드라마 작가의 자리를 굳혔다. 그 후 라디오 및 영화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역사 에세이스트, 대중가요 작사가, 희곡 작가 등 예술 전반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한국방송대상, 4회에 걸쳐 청룡(青龍) 영화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한국펜문학상, 위암 장지연상, 1988년 대한민국 문화 예술상을 수상하였다. 2011년 제6회 동곡상 문화 예술 부문, 2012년 제25회 경희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98년 보관 문화 훈장을 받았다.
신봉승은 전48권으로 이루어진 실록 대하소설 『조선왕조 500년』을 비롯, 『난세의 칼』(전5권),『찬란한 여명』[전5권], 소설1905(전 2권),『왕건』[전3권], 『이동인의 나라』[전3권], 『한명회』[전7권] 등 많은 대하소설과 『머나먼 해협』을 비롯한 5권의 TV시나리오 선집, 시집 『초당동 소나무떼』, 『초당동 아라리』, 역사 에세이집 『문묘18현』, 『국가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세종,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 자전 에세이집 『역사가 지식이다』, 희곡집 『노망과 광기』, 시나리오와 영화의 이론과 체험을 담은 저서 『시나리오 작법』, 『영상적 사고』, 특히 그가 투병 중에 쓴 자전 에세이집 『역사가 지식이다』,또 희곡작법인 「TV 드라마. 시나리오 창작의 길라잡이」가 〈도서출판 선〉에서 출간되는 등 150여권의 작품집을 내었다.
신봉승은 현실의 여러 가지 문제를 많은 역사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해결을 모색하게 하는 기능을 한 작가이다.
2. 김은숙(1973- )
김은숙(金銀淑, 1973년 ~ )은 대한민국의 시나리오 작가이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강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김은숙은 2003년 데뷔 이후 SBS에서 주로 로맨틱 코미디 물을 내놓았다. 2012년 SBS 연기대상 공로상을 받았다.《파리의 연인》,《시크릿 가든》등을 통해 스타작가로 인정을 받고 있다. 2015년부터는 SBS를 떠나 KBS2 TV로 자리를 옮겼다. 시나리오《태양의 후예》에 이어 tvN 《도깨비》를 연이어 히트 시켰다. 2016년엔 제7회 대한민국 대중 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을 받고 KBS 연기대상 작가상을 수상하였다. 2017년엔 제53회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대상을 받았다. 김은숙은 드라마의 무대를 자주 강릉으로 하여, 문향 강릉을 널린 알린 공로도 있다. 강릉이 낳은 시나리오 작가, 김은숙이 국민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준 문학적 성과는 괄목하고 그것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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