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동공취十方同共聚하여
개개학무위箇箇學無爲로다
차시선불장此是選佛場이니
심공급제귀心空及第歸로다
사방으로부터 함께 모여들어
모두 무위의 법을 배운다.
여기가 바로 부처를 뽑는 시험장이니
마음을 비워야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가리라. 단하천연丹霞天然 선사와 방龐 거사는 불법을 만나기 전에도 재가자의 신분으로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어느 날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함께 서울로 가던 중 한남도漢南道 거리의 주막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꿈에 흰 광명이 방 안에 가득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그 꿈이 하도 신기해서
과거시험과 관계있는 꿈인가 하여 해몽하는 사람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공空의 이치를 잘 아시게 될 징조입니다.”
이에 실망하고는 다시 서울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객사에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마침 행각하던 선승을 만나 함께 차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 납자가 물었습니다.
“두 분께서는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과거장에 가는 길입니다.”
“공부가 아깝습니다. 어째서 부처를 뽑는 집인 선불장選佛場에는 가지 않습니까?”
이에 두 사람은 그 꿈이 생각나서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부처를 어디서 뽑습니까?”
그러자 그 선승은 찻종지를 들어올리면서 말했습니다.
“알겠습니까?”
“높은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강서 땅의 마조 선사께서 지금 설법하고 있는데 도를 깨친 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 곳이 참으로 선불장입니다. 거기로 가십시오.”
이에 두 사람은 전생부터 선근이 있는지라 곧 길을 떠나 마조 스님 회상으로 가서 과거시험 공부가 아니라
부처 뽑는 공부를 결행하게 됩니다. 과거장으로 가던 길을 선불장 가는 길로 돌려 버린 것입니다.
오늘 해인총림은 새로운 선불장에서 결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 운집한 출격대장부인 결제대중들은
강단 있는 의지력과 비장한 용기를 가지고서 모든 방편들을 발로 차서 쳐부수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장 그 자리에서 불조의 말씀을 바로 알아듣고서 밖으로는 일체경계가 있음을 보지 않고
안으로는 자기가 있음을 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위로는 모든 성인이 있음을 보지 않고
아래로는 범부가 있음을 보지 않으며 맑고 맑아져서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 어찌 마음이 공한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이 경지에 이르면 방棒이나 할喝도 필요 없습니다.
나와 남이라는 시비도 없습니다. 당장에 이글거리는 화로 위에 떨어진 한 송이의 눈과 같을 것이니
이 어찌 선불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일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부처로 선발되려면 안목眼目을 갖추어야 합니다. 안목을 갖추지 못한다면 설령 천년을 선불장에서 지낸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미 옥당玉堂에 올라간 선비는 과거에 오를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급제 명단에 이름이 오르지 못한 이는 반드시 과거시험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중들이 오늘 선불장에 모였으니 제각기 화두를 참구하여 부처를 뽑아내는 시험에 합격하려고 한다면
이 한 철 동안 이륙시중二六時中 내내 새 선불장에서 간절한 의심으로 용맹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선불장’이라는 단 한 마디에 발심한 단하 선사의 출가 전 이름은 수재秀才였습니다.
객사에서 만난 그 이름없는 납자의 말에 따라 마조 선사 회상을 찾아간
수재와 방온龐蘊은 선사를 뵙고서 절을 하였습니다.
“그대들은 무엇을 하려고 왔는가?”
이에 수재는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치켜올렸습니다. 그러자 마조 선사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대의 스승은 석두희천石頭希遷 선사이시다.”
“그렇다면 석두 스님 계신 곳을 말씀해 주십시오.”
“여기로부터 남악南嶽으로 칠백리를 가면 희천希遷 장로가 돌 끝에 앉아 계신다.
그대는 그리로 가서 출가하라.”
수재는 그날로 길을 떠나 호남湖南에 도착하니 석두 선사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예! 마조 스님 회상에서 왔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왔는가?”
그러자 마조 회상에서 했던 것처럼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치켜올렸습니다.
그리하여 출가를 허락받고 불 때고 밥하기를 3년 동안 하였는데 어느 날 석두가 대중들에게 말했습니다.
“내일은 불전佛殿 앞의 풀을 깎으리라.”
이튿날 모든 대중들이 낫을 가지고 나왔는데 수재 행자만 삭도와 물을 가지고 화상 앞에 와서 꿇어앉아
머리를 감으니 화상께서 웃으며 머리를 깎아 주었습니다. 남들은 풀을 깎는다고 하니 낫을 가지고 왔지만
수재 행자는 무명초無明草인 머리카락을 깎는 줄 이미 알고 삭도를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행자 때 이미 이런 안목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재는 비로소 출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방온은 거사의 신분으로 정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승속僧俗을 떠나서 함께 탁마하고 열심히 정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단하가 방 거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방 거사는 말도 하지 않고 또 일어서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먼저 단하가 불자拂子를 들어올렸습니다. 이에 방 거사는 종망치를 들어보였습니다.
그러자 단하가 말했습니다.
“그것뿐인가? 또 있는가?”
이에 거사가 말했습니다.
“이번에 스님을 보니 공부가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남의 명성을 깎아내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아무렇지 않소이다.”
“요즈음 스님을 한번 주저앉게 만들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입을 틀어막자는 것이군.”
“스님의 입이 막힌 것은 본래 그렇거늘 아직도 내가 막았다고 의심합니까?”
이에 단하가 불자를 던져 버리고 나가니 방 거사가 불렀습니다.
“단하 스님! 단하 스님!”
그러나 단하천연 선사는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방 거사는 말했습니다.
“벙어리일 뿐만 아니라 귀까지 먹었구나.”
이런 두 사람만의 법거량이 <전등록>에 전해져 옵니다.
두 사람은 마조 스님과 석두 스님 회상을 번갈아 오가면서 열심히 정진하였습니다.
어느 날 방 거사가 마조 스님을 참방하고는 물었습니다.
“만법과 짝하지 않는 이가 누구입니까?”
“그대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셨을 때 그대에게 말해 주겠네.”
이 말 끝에 크게 깨치고는 “사방으로부터 함께 모여들어 모두 무위의 법을 배운다.
여기가 바로 부처를 뽑는 시험장이니 마음을 비워야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던 것입니다.
이 게송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하여 고인은 이렇게 착어着語하였습니다.
“시방동공취十方同共聚하니. 이 말은 철벽은산鐵壁銀山이로구나. 은산과 철벽이로다.”
“개개학무위箇箇學無爲라. 이 말은 일월조림日月照臨이로다. 해와 달이 밝게 비치도다”
“차시선불장此是選佛場이라. 이 말은 용사혼잡龍蛇混雜이로구나. 용과 뱀이 뒤섞였도다.”
“심공급제귀心空及第歸라. 이 말은 범성동거凡聖同居로구나.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사는구나.”
풍월산천공일가風月山川共一家이니
수래어하정용사誰來語下定龍蛇오
태백부증등편전太白不曾登便殿이어늘
필두작야자생화筆頭昨夜自生花로다
바람 달 산 개울 모두가 한 집이니
누가 와서 말을 하여 용과 뱀을 가리랴?
이태백은 대궐에 오른 적이 없는데
붓끝에서 어젯밤 꽃이 저절로 피었네.□
불기 2546(2002)년 음10월 15일 동안거 결제 및 선원 낙성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