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법
이 숙 영 (31회)
ssla10@hanmail.net
외갓집은 도심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초가집이다.
외할머니가 떠나고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추억에서 멀어져 가던 집이었다. 지난 봄부터 남문통 외가 근처에 있는 쑥뜸원에 다니면서, 언젠가 들러야지 하면서도 지나쳐왔던 터였다. 어버이날을 맞아 마음먹고 외가를 찾았다.
틈이 많이 벌어지고 구멍이 군데군데 나 있는 나무대문을 가만히 열고 들어서자, 아흔을 바라보는 외숙모가 놀라는 표정으로 맞아주셨다. 200년을 넘긴 이 고택은 부엌과 화장실만 조금 개조되었을 뿐 내 기억 속의 집 그대로였다.
“내가 살아있는 한 아무도 이 집을 허물지 못한다.”외숙모의 한풀이를 들으며 커피 한 잔을 들이마셨다. 조상들의 손 때가 묻은 이 집을 고집스레 지켜 온 외숙모의 마음고생이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쇄락해가는 집안을 휘돌아본 뒤 마당가로 내려섰다. 아버지를 만나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고 자식들에게 되뇌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버지는 제주공립농업학교 학생 시절 외가 근처에서 하숙을 했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집에 불러 외증조부에게 한문을 배우게 하였다. 아버지는 제주 첫 여성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 출신의 규수를 아내로 맞으면 집안을 개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어 여러 통의 편지로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90여 년 전의 연서 내용이 궁금해졌다.
마당에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이층마당이라고 불리던 조그만 뜰이 있다. 어머니는 결혼 초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친정에 머물렀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깔려오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퉁소 소리를 들으며,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던 어머니의 내밀한 사연이 이끼처럼 돋아있던 곳으로 올라갔다.
어머니가 농사일로 애월에 갈 때면 어린 나는 늘 남문통 외갓집에서 놀았고, 이층마당에 피어있는 채송화를 보려고 계단을 오르내리던 기억이 새롭다. 고목 한 그루가 가지를 넓게 드리운 채 변함없이 서 있다. 외가의 역사를 송두리째 품고 있는 이 나무가 어린 시절의 내 모습도 기억하고 있을 것만 같아서 살며시 다가가 안아본다. 가벼운 미풍에도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품이 옛 지인을 만난 표정이다. 나는 잠시 오월의 햇살 아래 하늘을 우러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떠오르는 물음이 있었다.
‘나는 눈물로 누굴 그리워 한 적이 있던가?’
며칠 전 제민일보의 문화면에 외갓집 사진이 실려 있었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인문학 강좌 ‘제주성안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주제로 주생활답사에 나서서 찍은 것이다. 사진 설명에는 「답사 참가자가 옛 제주도립병원 뒤 박판사집에 들러 언젠가 허물어 없어져버릴 공간을 기억하고자 천천히 둘러보고 있다.」라고 쓰여 있다. 어머니가 태어나서 자란 이 집이 오래 보전되어 외가에 대한 향수를 한껏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제주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아버지가 4․3사건으로 돌아가셨다.
관덕정 부근에 살던 우리 가족은 친할아버지의 부름을 따라 고향인 애월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판사로 있던 큰외숙부가 적극 반대했으나 어머니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집안을 개화시킬 것이라는 아버지의 기대와 믿음을 져 버릴 수 없는 약속 때문이었을까. 큰며느리 역할과 다섯 자녀를 혼자 키워야 하는 중년여인의 삶이 애월에서 시작되었다.
애월중학교 초대 음악교사로 부임하여 본도 최초 관악대를 창단(1947년)했고, 그 후 제주중학교에 재직중이던 큰오빠가 4․3사건 2년 후 몰아친 예비검속에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자, 어머니는 눈물을 참으며 부르짖었다. “집안의 주춧돌이 무너졌다.”20대 청춘이던 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어머니의 슬픔이 오죽했으리. 어머니는 큰오빠의 유품인 여러 종류의 관악기를 궤짝에 담아 고방에 간직했으나, 기타만큼은 건넌방 옷장에 두면서 아무도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철부지인 나는 몰래 옷장문을 열고 “띵”소리를 내면 안방에서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시간이 흐르자 어머니의 한은 기타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고등학생인 작은오빠가 기타를 배우려고 하자 악기에 대한 금지명령을 푼 것이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집안에 경사가 생겼다. 기타가 매우 귀하던 50년대, 기타를 잘 치던 어느 대학생이 집안 출입을 하더니 언니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기타를 밖으로 내 놓자 둘째사위가 들어왔노라고 동네 사람들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십여 년 전 아들이 서울에서 공부를 할 때 올라가 보니 방구석에 기타가 놓여 있었다. 청소도 잊은 채 기타를 끌어 안고, 오빠가 가르쳐 준 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린 시절의 회상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노래로 채워주며, 꿈을 잃지 않도록 보듬어주던 큰오빠가 문득 저편에 다가와 서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에겐 오직 어머니뿐이었다.
홀로 된 숙모님들은 동경․서울․제주시로 나가 살았지만 어머니는 일생 동안 애월을 지켰다. 가족의 불운에도 어머니는 늘 밝은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 시절, 학교에서 내 주는 생활통지표의 보호자란에 쓰여 있는 어머니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성이 박씨인 어머니에게, 당시의 한 야당 국회의원의 이름을 따서 ‘박순천 여사’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마을의 부인회장으로서, 국가의 정책 사업인 문맹퇴치 운동에 앞장서서 부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못마땅한 나라 정책에는 쓴 소리를 잘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당하고 꿋꿋한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우리 네 자매가 모이면 어머니의 열정과 재능에 대하여 얘기도 하지만,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나는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한다.
어머니는 일찌감치 사위들의 수의를 장만했다. 명주에 고운 물을 들이고 다듬이질을 하면서 여러 차례의 손질을 거쳐야 완성되는 수의, 사위들에게 줄 것이라고는 이것 뿐이라고 하시던 어머니의 수척해진 얼굴이 눈에 선하여 가슴이 아려온다. 수 년 전 병중에 있던 남편이 눈을 감자, 오랫동안 보관해 둔 수의를 내 놓으며 왈칵 치솟는 울음을 안으로 삼켰던 적이 있다.
어머니한테 처음으로 매를 맞았던 사건도 결코 잊을 수 없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한 지인이 모자를 선물했다. 작은언니 것은 갈색이고 내 것은 자주색이었다. “학교에 갈 때 꼭 쓰고 가야 한다.” 어머니의 말 한마디는 곧 법이었다. 작은언니는 신이 나서 잘 쓰고 다녔는데, 마음이 약한 나는 유별나게 모자를 쓰는 게 싫어서 그만 어머니의 법을 어기고 말았다. 학교에 갈 때 집에서 멀어지면 모자를 벗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화를 내며 매를 들었다.
“모자를 쓰기 싫다고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 사건 이후, 어머니의 법은 ‘모자를 쓰고 싶을 때만 써도 된다.’로 개정되었다. 그 때부터 모자를 써 본 기억이 없다. 구김살 없이 밝게 키우려는 홀어머니의 뜻을 내가 엄마가 되고나서야 깨달았다. 후회는 언제나 해도 늦다고 했던가.
지난 여름 모 수필문학회에서 주관하는 문학기행에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여름 모자를 하나 샀다. 집을 나서기 전에 모자를 쓰면서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 환하게 웃고 있는 사십대의 젊은 어머니가 보이는 듯 했다.
“어머니, 60년 만에 모자를 쓴 내 모습 어때요?”라고 중얼거리며 웃어보았다. 이제 모자를 하나 더 살 생각이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듬뿍 담아 쓰고 다닐 겨울 모자를…….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창가에 서면 나에겐 스승인 나무의 독백이 들리는 것만 같아서 빈 가슴이 겸손으로 채워진다.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덜어내면서도 꿋꿋하게 서 있는 나무에게서, 역경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셨던 어머니의 일생을 엿보게 된다. 단풍이 드는 잎새마다 푸르던 날들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듯, 늙어가는 내 육신과 정신 속에도 어머니의 세상을 살아가는 법이 새겨져 있다.
“잊히지 않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누가 말했던가.
어머니는 늘 그리움으로 내 곁에 살아 계시다.
- 2010년 가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