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기대올 때
고영민
하루의 끝을 향해 가는
이 늦은 시간,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다 보면
옆에 앉은 한 고단한 사람
졸면서 나에게 기댈 듯 다가오다가
다시 몸을 추스르고, 몸을 추스르고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기대올 때
되돌아왔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흔들림
수십 번 제 목이 꺾여야 하는
온몸이 와르르 무너져야 하는
잠든 네가 나에게 온전히 기대올 때
기대어 잠시 깊은 잠을 잘 때
끝을 향하는 오늘 이 하루의 시간,
내가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한 나무가 한 나무에 기대어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기대어
나 아닌 것 거쳐
나인 것으로 가는, 이 덜컹거림
무너질 내가
너를 가만히 버텨줄 때,
순간, 옆구리가 담장처럼 결려올 때
오리
고영민
중국산 플라스틱 장난감 오리가 14년 동안 태평양과 알래스카, 북극
해와 대서양을 두루 헤엄쳐 다니고 있다 어릴 적 나도 목수 일을 하던
아버지가 태안 읍내에서 사가지고 온 노란 장난감 오리 하나가 있었
다 노란 오리는 1992년 화물선에 실려 미국으로 향하다 그만 넓은 태
평양 한복판에서 모두 놓쳐버렸다는데 냇가에 띄워놓고 장난을 치던
오리가 잠깐 사이 내 손에서 도망쳐 깊은 물로 둥둥 떠내려가던 샛노
란 기억의 한 점, 오리 가운데 1만 9,000여개는 남태평양으로 도망쳐
호주 하와이 남미 바닷가까지 헤엄쳐 떠내려가고 내가 가지고 놀던
오리는 옆구리를 누르면 이런 소리가 났다, 꽥,꽥,꽥,꽥,꽥,꽥, 북태평
양으로 향한 나머지 1만여 개는 알래스카와 러시아 사이의 베링 해협
을 지나 북극해까지 북상했다가 다시 한류를 타고 대서양으로 남하,
미 동부 해안을 지나고 플로리다와 중미 카리브 해까지 이르고 있다
꽥,꽥,꽥,꽥, 그 날 도망친 내 노란 오리는 지금쯤 어느 해류를 타고
세상의 가장 조용한 바다 한가운데를 유유히 헤엄치고 있을까 오리
군단은 올 가을 이후 카리브 해를 지나 영국으로 흐르는 멕시코 만류
를 타고 유럽 쪽으로 북상할 예정이라는데 나처럼 이 세상 모든 아이
들은 언젠가 맑은 개울가에서 한번 쯤 노란 오리 한 마리를 저도 몰래
놓쳐 버렸을 터, 팔을 뻗어도 닿지 않는 그 슬픈 손으로부터 영영 멀
어져 저 넓은 바다에 노랗게 둥둥, 한 무리로 다 모여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