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웅진천도 출처: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개설서 - 백제의 역사와 문화' 1. 문주왕의 즉위와 웅진천도
이에 문주는 한성에서 왕위에 올랐다. 문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문주가 데리고 온 신라군이 무력적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지휘체계가 무너진 백제군의 상황에서 볼 때 이 1만의 군대는 문주의 든든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둘째로 왕도의 함락으로 개로왕의 왕자들과 수많은 왕족들이 죽임을 당해 왕위를 계승할 인물이 없었다. 다행히 문주는 신라로 원병을 청하러 갔기
공주지역은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고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해 주는 천험의 요새지였다. 그리고 이곳을 관통하여 흐르는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아갈 수 있고, 또한 남쪽에는 곡창지대인 너른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관방 뿐 아니라 교통과 경제의 요충지로서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둘째로는 공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재지세력의 동향도 무시할 수 없다. 위기의 상황에서 권위가 떨어진 왕실로서는 새로이 천도하려는 지역의 재지세력들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이 시기에 공주 지역 재지세력의 존재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수촌리 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에서는 금동관·금동식리·환두대도·중국제 도자기 등을 여러 대에 걸쳐 부장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이 고분의 주인공들이 백제에서 상당한 정도의 세력을 지닌 가문출신자였음을 보여주는데 이 세력이 백씨(苩氏)였을 가능성이 크다. 웅진도읍기에 백씨 가문이 크게 두각을 나타낸 것은 웅진으로의 천도를 적극 지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2. 천도초기의 정치적 상황
이 시기 백제의 왕성은 공산성이었고 여기에 왕궁이 있었다. 공산성은 전체 둘레 2,660m인데, 대부분이 석성이고 토성은 동문지 부근의 내측 성벽 268m와 외측 성벽 467m이다. 조사 결과 외성은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확인되어 웅진시대의 모습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공산성 내부를 발굴한 결과 백제 유적으로는 동쪽 구역의 소규모 테뫼식 토성 부분과 추정왕궁지·임류각지(臨流閣址)·광복루 옆 광장·12각 건물터·굴립주 건물과 적심건물·서문터 옆 건물지·저장혈·백제 연못지[池塘] 등이 확인되었다. 그 중 왕궁지는 굴립주 건물지, 용수장 시설, 목곽고 등을 갖춘 쌍수정 앞 광장의 약 2,500여 평의 범위로 추정되고 있다.
☞ 2008년부터 연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공주 공산성(사적 제12호) 성안마을 유적 발굴조사에 의해 백제유적과 유물이 추가로 발굴되고 있다. 2011년 9월 9일 개최된 성안마을 유적(4차 발굴조사)에 대한 학술자문회의 및 현장설명회를 통해 공개된 백제시대 건물지 등 관련 유적이 제57회 백제문화제 기간 중 관람객들에게 큰 볼거리를 제공한데 이어 10월과 11월에는 백제시대 제작딘 옻칠한 갑옷과 마갑이 나와 전국적 이목이 집중된바 있다.
천도 이후 백제 왕실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하나의 과제는 한성에서 이주해온 귀족들과 민들을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안치하는 것이었다. 이를 방치하면 어떠한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문주왕은 먼저 대두산성을 수즙하여 한강 이북지역에서 이주해 온 민호들을 이주시켰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민들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조치가 취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임시적이나마 피난해 온 민들을 안치한 문주왕은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를 위해 2년(476) 8월에 해구를 병관좌평으로 삼아 군사권
이에 더하여 문주왕은 3년(477) 4월에 왜에서 귀국한 동생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461년에 왜국으로 간 곤지는 16년 만에 귀국한 것이다. 그의 귀국은 대다수의 왕족들이 죽임을 당한 상황에서 문주왕에게는 든든한 울타리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문주왕은 그를 내신좌평에 임명하여 국정 전반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문주는 장자 삼근을 태자로 봉하였다. 태자 책봉을 서두른 것은 후계구도를 미리 확정하여 후계를 둘러싸고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를 정치적 불안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조처로 생각된다. 이렇게 문주왕은 병관좌평 해구와 내신좌평 곤지를 축으로 하여 지배세력 사이에 세력균형을 이루려고 하였다.
사세에 밀린 해구는 마침내 은솔 연신과 손잡고 대두성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대두성에는 한북의 민호들이 정착하고 있었는데 연신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역 기반이 없던 해구는 연신과 결탁하였던 것이다. 해구와 연신이 반란을 일으키자 삼근왕은 좌평 진남으로 하여금 군사 2천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덕솔 진로가 정병 500명을 거느리고 가서 마침내 해구를 쳐서 죽였다. 다급한 연신은 처자도 버려두고 고구려로 달아나자 진로는 연신의 처자들을 모두 웅진의 저자에서 참형을 가하였다.
한편 천도 초기 백제는 대외적으로 고구려에 의해 해상권에 제약을 받고 있었다. 4세기 말 이후 백제는 초도나 백령도에서 바로 서진하는 서해 직항로를 활용하였다. 이 노선은 한성에서 출발하여 한강을 따라 祖江을 거쳐 서해로 나와 황해도 연안을 거쳐 백령도에서 곧장 서진하여 중국 登州에 이르는 노선이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한성을 점령함으로써 이 항로는 고구려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래서 문주왕이 2년 송에 보낸 사신은 고구려 군이 길을 막는 바람에 되돌아 와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의 대중국 외교 활동도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동시에 해상 무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도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王政의 물적 기반도 약화되었다. 따라서 중국왕조와의 교섭의 통로를 확보하는 것도 이 시기 백제가 풀어나가야 할 현실적인 과제의 하나였다.
----------------------------------------------------------------------------------- 제2장 왕권의 안정과 국력 회복 1. 동성왕의 즉위와 신진세력의 등용
한편 고구려의 압박이 가해지고 더구나 고구려의 방해로 중국과의 외교교섭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백제로서는 왜국과의 군사협력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동성왕의 아버지인 곤지는 개로왕 7년(461)에 왜로 건너가서 河內郡飛鳥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일정한 세력을 구축하였고, 또 왜 조정에 친백제 세력을 심어 두었다. 백제에서 새로이 정권을 잡은 진로세력은 재외(在倭)곤지계 세력들을 이용하려고 할 때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바로 동성인 것으로 판단하였다.
2) 신진세력의 등용
이들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이들을 달래는 목적에서 이곳으로 행차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금강유역에 기반을 가지고 있던 유력세력들을 등용하는 것이었다. 한성도읍기에 금강유역은 변방 지역의 하나였다. 그러나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짐에 따라 이 지역은 새 왕도의 중심이 되었고, 자연히 이 지역에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유력세력들의 동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또 이들이 아니면 남래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을 견제할 수 있는 것도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동성왕은 금강유역을 기반으로 한 세력
동성왕이 12년에 남제에 보낸 1차 국서에는 남래귀족인 姐瑾과 왕족 3명이 보이지만 2차 국서에서는 고씨·양씨·회씨 등 중국계 성씨를 가진 인물들이 나오고, 495년에 보낸 1차 국서에는 사씨·해씨·목씨 등 남래귀족과 찬수류 등 신진 귀족의 이름이 나오지만, 2차 국서에는 모씨·왕씨·장씨·진씨 등 중국계 성씨의 인물이 보이는 것은 동성왕이 남래귀족과 신진세력간의 균형 위에서 왕권의 안정기반을 이루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2. 왕실 권위의 회복
동성왕의 체제 안정화 의지는 왕·후·태수제의 실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동성왕은 재위 12년(490)과 17년(495)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공을 운 신하와 힘든 사행의 임무를 맡은 사신단에게 사가한 작호를 승인해 라고 요청하였다. 12년(490)에 보낸 국서 속에 나오는 7명의 인물 가운데 왕족인 여씨 출신은 3인이며 나머지 4인은 비왕족 출신이었다. 또 17년(495)에 보낸 국서에 나오는 8명의 인물은 모두가 비왕족 출신이었다. 동성왕의 왕·후제 실시는 웅진천도 초기의 불안한 정치정세를 안정시기키 위해 중앙의 실력자들에게 중국 왕조로부터 공인받은 작호를 수여하여 이들을 왕권 하에 편입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한편 동성왕은 백제의 국제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의 방해에도 구하고 남제와의 외교교섭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동성왕은 6년(484)에 고구려 장수왕이 남제로부터 표기대장군에 책봉되었다는 소식을 한 후 그 자신도 즉각 표를 올려 내속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는 제가 고구려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남제와의 통교는 동성왕 6년에는 내법좌평 사약사가 남제로 가다가 고구려군의 방해로 되돌아온 것에서 보듯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동성왕은 12년과 17년에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남제와의 외교도 긴밀히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동성왕은 남제는 물론 신라·가야·왜 세력도 적극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것은 곧 백제·남제·신라·가야·왜의 외교노선이 구축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백제가 고구려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커다란 기반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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