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장군의 북정가(北征歌 )
白頭山石 磨刀盡(백두산석 마도진)
백두산 바위는 칼을 갈아 없애고
豆滿江水 飮馬無(두만강수 음마무)
두만강 수(물)는 말이 마셔 없애리라
男兒二十 未平國(남아이십 미평국)
남아 이십에 나라 평정치 못하면
後世誰稱 大丈夫(후세수칭 대장부)
후세에 뉘라서 대장부라 일커를까
남이장군(南怡, 1441~1468)이 여진을 토벌하고 돌아오며 읊은 시라 한다. 북의 여진을 정벌했다하여 북정가(北征歌 )로 불린다. 호연지기에 찬 이 시를 읽을 때면 애석한 맘 누를 길 없다.
태종의 외손자로서 17세(1457년, 세조 3)에 무과에 급제, 25세에 여진을 정벌, 26세(1467)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그를 세조는 적개(敵愾) 1등 공신으로 책봉하고,이듬해 병조판서로 임명하지만, 몇 달 뒤 세조가 죽자 그를 역모로 몰아 죽인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그가 좀 더 살아 만주 깊숙히 더 들어갔더라면 병자년의 수모는 격지 않았을 수도...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애석하게도 유자광이 그를 역모로 얽어 젊은 동량재를 형장의 이슬로 내몰았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 대궐에서 숙직하던 중 혜성(彗星)이 나타난 것을 보고, 남이가 '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하자,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역모를 획책한다고 모함하고, 또 이 시의 ‘미평국(未平國)’이란 부분을 ‘미득국(未得國)’으로 고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조작하여 참소를 한 것.
나라의 공신을 사실 확인도 없이 그렇게 쉽게 죽인 것이다. 병약한 예종의 장인이 실세 한명희였다는 사실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의 억울한 누명은 1818년 순조조에 관작(官爵)이 복작 됨으로 해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본관은 의령(宜寧). 조부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 ?~1454) . 조모 태종의 넷째 따님 정선공주(貞善公主). 부는 군수 남빈(南份).
정난(靖難) 및 좌익(佐翼) 1등 공신 좌의정 권람(權擥, 1416~1465)의 사위다.
남이의 옥사가 있기 이전에 일찍 요절한 부인 權씨가 혼인하기 전에 남이가 귀신을 몰아내 준 이야기가 야사로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