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교의 세계관과 기독교 선교전략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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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수(Th.M과정)
목 차
Ⅰ. 시작하는 말/1
A. 문제제기/1
B. 연구방법 및 범위/1
Ⅱ. 라마교의 태동과 발전과정/2
A. 초기 라마교의 성립과 발전/2
1. 라마교 이전의 종교: 본교(本敎)/2
2. 라마교의 태동(胎動)/3
3. 파드마삼바바(Padmassambhava, 蓮華生)의 활동/3
4. 종카파(宗喀巴)의 개혁운동/4
B. 활불(活佛)사상과 법왕제(法王制)의 성립/5
1. 활불사상/5
2. 법왕제의 성립 : 판첸라마와 달라이 라마/6
Ⅲ. 라마교의 세계관과 그 영향/7
A. 라마교 세계관의 기초 : 윤회사상/7
B. 구원관 /8
C. 신관(신앙의 대상)/8
D. 인생관과 생활/ 9
E. 정교(政敎)일치의 정치관/10
Ⅳ. 라마교인의 세계관에 대한 분석/10
Ⅴ. 라마교에 대한 선교전략/11
A. 타종교인에 대한 기본적인 선교원리/11
1. 효과적인 접촉방법/11
2. 타종교인의 기본적인 전도원리/12
B. 라마교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 전달/13
1. 고(苦)의 원인 : 현상과 원인을 구분하라/13
2. 활불(活佛)과 부활(復活)의 비교/14
3. 달라이 라마의 성립 배경에 대한 한계 지적/15
C. 영적대결(Power Encounter)/16
D. 제자양육 /16
E. 전문인 선교/17
Ⅵ. 마치는 말/17
# 참 고 문 헌/19
Ⅰ. 시작하는 말
A. 문제제기
오늘날 대승불교, 소승불교와 함께 불교의 중요한 분파로 자리메김을 하고 있는 라마교(喇 敎)는 주로 티벳을 중심으로 발생하여, 몽골과 그 주변에서 사람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왔다. 티벳에서 발생한 이 불교의 종파를 일반적으로 라마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작 티벳인들은 라마교라는 명칭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라마교라는 명칭은 티벳불교를 잘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림짐작으로 부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상결등파(桑結登巴)]라고 부르는데 이는 곧 불교를 의미한다. 라마교는 티벳인들에게 있어서 민족종교로 인식되고 있으며, 라마교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하여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결집하고 있다. 그들은 라마교의 지도자들은 티벳인들은 라마교의 세계관과 신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일으키며, 생활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사가 티벳의 라마교인들에게 선교할 때는 필수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세계관은 무엇이며, 이러한 세계관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연구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선교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라마교인들의 내면에 자리잡고서 그들의 가치관과 행동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불교의 환생(還生)과 윤회(輪廻)사상이다. 예컨데 '활불(活佛)'이나 '라마(喇 )' 같은 개념들은 라마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들이다. 그런데 결국 라마교에서 활불을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근저에 불교의 환생의 교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최고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나 판첸라마가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도 환생과 윤회사상에 기초하여 그 권위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생사상에서 부터 라마교의 세계관, 인생관, 구원관등이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본 논문은 라마교에 대한 선교적인 목적의식을 가지고, 라마교의 세계관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선교전략을 제시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B. 연구방법 및 범위
라마교의 세계관에 대해서 고찰하고 선교전략을 수립할 때 먼저는 역사적(歷史的)으로 라마교의 성립과 발전과정을 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세계관을 도출하고, 분석하고, 그런 후에 선교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 연구의 제2장에서는 먼저 라마교의 태동과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제3장에서는 라마교의 세계관을 주제별로 살펴보고, 제4장에서는 이에 대해서 몇 가지의 비평적(批評的)인 분석을 할 것이다. 그리고 제5장에서는 기독교의 관점에서 선교전략과 메시지 전달방법들을 살필 것이다.
Ⅱ. 라마교의 태동과 발전과정
A. 초기 라마교의 성립과 발전/
1. 라마교 이전의 종교: 본교(本敎)/
티벳지역에서 라마교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티벳에는 전통종교인 본교(本敎)가 존재하고 있었다. 본교는 티벳지역의 민간 자연숭배에 기원한 일종의 샤마니즘이다. 본교(本敎)의 우주관은 대체로 중앙아시아와 북아시아의 계통의 샤마니즘에서 볼 수 있는 세 가지의 층(層)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천상계(天上界)와 지상계(地上界) 그리고 지하계(地下界)이다. 천상계는 '쓰빠(什巴)'라는 최고의 신(神)이 통치하며, 인간계는 '쨘푸(贊普)'라고 불리는 천신(쓰빠)의 아들이 다스리며, 지하계와 자연은 각종 정령, 용, 악마가 있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천상, 지상, 지하의 세 가지의 세계는 하나의 중심축을 가지고 꿰어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각 층은 중앙축과 연결된 우주역(관문, 입구, 구멍)이 있어서 이 우주역을 통하여 서로 다른 세계에 왕래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다른 세계 사이를 넘나들 수 있는 이 관문을 아는 존재가 샤만인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이 우주역 구멍을 통해서 천상계나 지하계로 이동(移動)하게된다. 특히 본교가 활동하던 티벳의 경우에 지상의 우주역과 천상의 우주역 사이는 밧줄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본교의 무당들은 이 밧줄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신(神)들이 있는 천상계에 왕래했고, 때로 점(占)을 치고, 병자(病者)의 영혼을 찾아 육신에 돌려놓는 일이나, 귀신(鬼神)을 쫒는데에 이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티벳에서는 본교의 승려들을 '천상의 밧줄을 가진 자들'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본교의 승려들 가운데는 주로 천상계와 지상을 연결하는 샤만을 백(白) 승려와 지상계와 지하계를 연결하는 흑(黑) 승려가 있었다. 이러한 관념들로 인해서 본교의 무당은 인간의 혼례, 장례, 질병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중국 서북부 티벳, 트루판 일대에서 불교가 자리를 잡기 이전까지 강력한 권한을 누리면서 지속되었다.
2. 라마교의 태동(胎動)
티벳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7세기 송첸감포(581-649)왕 때이다. 송첸감포왕에게는 중국과 네팔에서 맞이한 두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중국출신 당태종의 딸인 문성공주(文星公主)와 네팔 출신의 티춘(尺尊)왕비가 그들이다. 이중에서 문성공주는 원래는 송첸감포왕의 며느리였는데, 송첸감포왕의 아들인 궁송궁첸 왕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자, 며느리인 문성공주를 자신의 비(妃)로 맞아들이게 된다. 문성공주는 사별한 남편(궁송궁첸)을 위해 '라사'에 '라모체사(小招寺, 소소사)'를 건립하고, 불상을 안치했다. 또한 네팔출신의 티춘왕비는 송첸감포왕 사후에 ' 조캉사원(大招寺, 대소사)'를 건립하였다.
송첸감포왕 사후에 불교는 다시 황폐해 졌지만, 8세기 전반기에 '인티데축첸(704-754)왕'이 등극하면서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인티데축첸왕은 열성적인 불교신자인 중국출신 왕비 금성공주(金城公主)의 요청을 받아들여 사찰을 복원하고, 새로운 절들을 세우게 되었다.
3. 파드마삼바바(Padmassambhava, 蓮華生)의 활동
티벳에서 불교가 국교(國敎)로 인정된 것은 8세기 후반의 '티송데첸왕' 때이다. 티송데첸왕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기 위해서 당시 네팔에 있던 나란다사원의 대학장인 샨타라크시타(725-783)와 파드마삼바바(Padmassambhava, 蓮華座 또는 蓮華生, 蓮華大師라 칭함)를 초빙한다. 이 두 사람 중에서 특히 파드마삼바바(연화생)는 인도의 좌도밀교(左道密敎)의 권위자로서, 당시에 그가 가진 주술적인 능력을 통해서 전통종교인 본교(本敎)의 승려들을 제압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파드마삼바바는 인도불교의 교리와 티벳 본교의 신비한 무술(巫術), 주문, 축귀의식, 제사의식 등을 융합시켰다. 그는 티벳의 본교를 모두 불교와 융합시키기 위해서 티벳의 토착신(土着神)들이 모두 부처의 화신(化身)이라고 하는 본지불국토설(本地佛國土說)을 주장하였다.
이로인해서 티벳인들은 의식적인 면에서 불교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교리적으로는 자비(慈悲), 중생(衆生), 윤회(輪廻), 극락(極樂)과 같이 고달픈 현실생활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근거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파드삼바바의 활동으로 인도불교는 티벳의 본교와 혼합하면서, 자리를 잡게 되었고, 티송데첸왕의 국교 선언과 지원으로 최초로 승단이 조직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초기 라마교는 인도의 밀교(密敎) 교의를 기초로 하면서 전통적인 티벳의 본교의 의식과 혼합되어 형성된 새로운 불교종파로서 티벳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로서 파드마삼바바는 라마교의 실질적인 개조(開組)가 되었으며, 그로 부터 시작한 초기 라마교의 종파를 '닝마파(寧瑪派)'라고 부른다.
4. 종카파(宗喀巴)의 개혁운동
파드마삼바바(연화생) 이후 라마교는 크게 4개의 교파로 발전하게 되었다. 닝마파(寧瑪派), 까당파( 當派), 까쥐파( 擧派), 겔룩파(格魯派)가 그것이다. 닝마파는 파드마삼바바의 영향으로 초기 라마교 이후 발생한 것이다. 흔히 이들은 홍모파(紅帽派)라고 불렀다. 까당파는 11세기초에 아티샤(Atisa, 982-1054)가 라마교의 부흥운동을 펼치면서 탄생시킨 것이다. 까쥐파는 11세기 중엽 마르파(Marpa)가 인도에 가서 밀교의 대가인 나로파(Naropa)에게 금강승을 배우고 나서 탄생시킨 것이다. 까쥐파는 다른 종파들 보다도 더 밀교를 중시하며, 라마교의 종파들 중에서 가장 먼저 활불(活佛)제도를 채용하였다.
마지막으로 겔룩파는 14세기 후반과 15세기초에 총카파(宗喀巴, Tsong-kha-pa, 1357-1419)에 의해서 창립되었다. 총카파는 당시에 크게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라마교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종교개혁을 시도하였다. 종카파는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노란색 모자를 착용함으로서 다른 승려들과 구분하였다. 그래서 겔룩파를 황모파(黃帽派)라고 불렀다. 종카파 당시에 라마교는 좌도밀교의 성력숭배(性力崇拜) 경향으로 인해서 성적(性的)인 타락이 심했고, 승려들은 밀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배우자를 취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또한 사찰의 주지직은 대개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었고, 음주(飮酒)등으로 인해 수도생활은 제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이에따라 종카파는 라마교를 개혁하면서 음주를 줄이고, 승려들의 결혼과 사찰의 세습제를 반대하고, 독신(獨身)생활을 재도입하게 되었다.
총카파는 불교의 제의 형식에 있어서도 새로운 의식을 도입하였다. 예식은 축제와 같이 호화롭게 치러졌고, 특별한 종교행사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악기와 종, 그리고 깃발등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뿐만아니라 총카파는 라마교 승려 조직 안에서 엄격한 계급질서(hierarchy)을 세웠다.
이러한 종카파의 개혁은 중앙왕조의 신임을 얻어서 1415년 이후 급속하게 확산되어갔다. 그리고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전 티벳의 정치와 경제력을 보유하면서 다른 교파를 압도하게 되었다.
B. 활불(活佛)사상과 법왕제(法王制)의 성립
1. 활불사상
총카파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후 라마교의 주류를 이루는 황모파(겔룩파)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는 활불사상이었다. 이러한 활불사상을 근거로 황모파에서는 라마교 승려들 중에서 상위 4%정도에 해당하는 계층을 신(神)이나 불타(佛陀) 또는 보살(菩薩)들의 살아있는 화신(化身)으로 간주하였다. 라마교의 각 사원에는 이처럼 인간의 몸으로 화신되어서 존재하는 활불들이 있고, 이는 세인(世人)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보통 라마교의 수장(首長)으로 알려진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고, 판첸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이며, 1911년 중국혁명 이후 몽골의 수장이 되었던 '우르가 후크투타(Urga Hutukhta)는 매우 존경받는 라마승인 다라니티(Daranaty)의 화신으로 간주된 것들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활불사상이 표면에 등장하게 된 데에는 영적인 문제 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후계자의 문제가 더 큰 원인이 되었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티벳의 전반적인 실권을 가지된 황모 겔룩파는 승려들의 독신생활로 인해서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후계자 문제였다. 이전에는 승려들이 자신들의 아들들에게 직분이나 사찰을 세습하였는데, 이제 독신생활을 하게 되자 후계자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존재했던 까쥐파의 활불(活佛)사상을 도입하여, 그 상황에 맞는 독특한 새로운 교리를 창안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라마(喇 )'제도이다. 라마(喇 )란 티벳어의 음역으로서 그 뜻은 '높은 스승', '교사'를 의미한다.
활불사상은 라마교도들이 밀교의 환생 교리에 따라서 라마가 자기 영혼을 떠나서 자유롭게 다른 육체로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나온 것이다. 티벳에서는 일반적으로 덕이 높은 라마가 죽으면 그가 죽은 뒤 49일 후에 유아(幼兒)의 육체에 전생(轉生)한다고 믿는다. 이 전생의 능력은 많은 수행을 쌓은 상층계층의 라마들에게 해당되며, 일반 사람들은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라마교 승려들은 6종류로 구분이 된다. 그 승려들 중에서 상층계급에 속하는 4%정도의 승려들만이 활불이라 칭함을 받는다. 이들 4%정도의 활불 승려들은 '라싸'에 있는 3대 사원에서 경전과 학습, 토론, 질문 등을 통해서 새로운 지위를 확인받아야 한다.
야자키 쇼겐에 의하면 티벳에서 활불사상이 존재할 수 있었던 원인은, 이러한 현실적(現實的)인 후계자 문제 외에도 전통적인 본교(本敎)의 영향과 티벳인의 국민성(國民性)이 있다. 즉 일종의 샤마니즘인 본교의 가름침에 의하면 우주에는 무수한 영혼이 떠돌아다는데, 이 영혼들의 작용에 의해서 세상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생긴다. 그런데 이 영혼들을 달래고 복을 받기 위해서는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달라이 라마가 바로 그런 대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티벳의 국민성(國民性)은 대체로 영적인 권위(權威)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국민성이 활불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2. 법왕제의 성립 : 판첸라마와 달라이 라마
총카파의 종교개혁 이후 라마교의 승려들은 계급적인 구분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라마교 승려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은 두 사람의 최고 고승(高僧)에게 집중되었는데, 그들이 판첸라마와 달라이 라마이다. 이들 중에서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간주되고, 판첸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간주된다.
판첸라마(班禪喇 ) 는 불타의 화신이면서 세속적인 일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는다. 판첸라마는 불타의 화신이고 달라이 라마는 보살의 화신이므로 영적인 원리로 볼 때는 판첸라마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세속적인 권력은 달라이 라마가 소유하고 있으며, 라마교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달라이 라마는 '라사'의 포탈라 사원에서 활동하였고, 판첸라마는 쉬가츠(Shigatze) 근처의 타쉬룸포(Tashilhumpo) 사원에 거처하였다. 판첸라마는 현재까지 11대가 전승되어 오고 있으나 중국정부의 정치적인 이유로 북경에 억류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라마교를 대표하는 달라이 라마의 명칭은 제3대 달라이 라마에서 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달라이'는 몽골어(蒙古語)로서 '대해(大海)'라는 뜻이 있다. '달라이 라마'라는 명칭은 제3대 달라이 라마인 '소남걈초(1543-88)'가 당시에 몽골의 왕인 '알탄칸(Altan-Khann)'을 방문했을 때 받은 칭호이다. 소남걈초에게 수여된 '달라이 라마'라는 명칭은 이미 세상을 떠난 2명의 교주에게도 추서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현재까지 14대에 이르고 있으며, 제1대 달라이 라마는 '종카파'의 조카인 '게둔둡파(Dge-dungrub-pa, 1391-1475))'였다. 즉 겔룩파의 교조인 종카파가 그 법통을 이를 아들이 없으므로, 그 조카인 게둔둡파가 법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모든 불(佛) 중에서 가장 근본되는 근본불(根本佛)로 믿는 게둔둡파의 후계자들은 불교의 환생의 교리를 인용해서, 그의 스승인 게둔둡파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간주하였다. 이후에 라마교에서는 달라이 라마가 계속해서 후대 달라이 라마에게 환생한다고 믿는다.
Ⅲ. 라마교의 세계관과 그 영향
A. 라마교 세계관의 기초 : 윤회사상
라마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들이 있다면, 그것은 활불사상이나 달라이 라마같은 것들일 것이다. 그런데 라마교의 이러한 가장 근저에 기초를 이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환생과 윤회사상일 것이다. 결국 라마교에서 활불을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근저에 불교의 환생의 교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나 판첸라마가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도 환생과 윤회사상에 기초한 활불사상 때문이다. 이러한 환생사상에서 부터 라마교의 세계관, 인생관, 구원관들이 발전하게 된다.
달라이 라마에 의하면 윤회(輪廻)는 삼계(三界)에서 이루어진다. 삼계(三界)란 무색계(無色界), 색계(色界), 욕계(欲界)의 세 가지 세계를 말한다. 무색계에서 윤회하는 것은 선정(禪定) 수행의 가장 높은 수준의 결과이며, 색계(色界)는 무색계 보다 낮은 수준의 선정(禪定)의 결과로서 윤회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욕계(欲界)는 선정(禪定)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윤회하는 것으로서 보통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윤회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 세계 중에서 무색계와 색계는 신(神)들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욕계(欲界)에는 두 종류의 존재가 있다. 즐거운 세계에서 윤회하는 존재와 괴로운 세계에서 윤회하는 존재가 그것이다. 이중에서 행복한 윤회에 해당하는 윤회는 신(極樂에서 태어남), 아수라(準神), 인간이며, 불행한 윤회에 해당하는 윤회는 동물, 아귀(굶주려 죽은 영혼), 지옥이다.
이처럼 세상의 삶을 고통으로 보는 라마교의 입장과 윤회사상은 티벳인들로 하여금 열반이르도록 고통스러운 수련의 연마를 가져오게 하였고,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서 부처를 믿고, 라마교에 귀의하는 삶을 만들었다.
B. 구원관
사실 불교에서 구원론(救援論)이란 단어는 적합치 않다. 불교는 깨달음(覺)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종교개념으로 이해하기 쉽게 이것을 구원이란는 단어에 대입해 본다면, 불교에서는 구원 즉 깨달음의 과정에 이름에 있어서 일체의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존하는 것을 배격한다. 자신의 수행을 통한 스스로의 깨달음을 말한다. 수행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는가 하면 '윤회(輪廻)하는 세계의 모든 삶은 그 자체가 고통(苦痛)이며, 이러한 고통의 원인을 깨닫는 것(覺)' 이다. 뿐만아니라 더나아가서 고통스러운 세계에 집착(執着)하는 것을 끊고, 번뇌(煩惱)를 없앤 열반(涅槃)의 상태 또는 성불(成佛)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 이르도록 수행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라마교의 깨달음의 과정으로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런데 라마교는 다른 종파가 추구하는 수행방법들 외에도 열반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독특한 면이 있다. 그것은 탄드라 전통의 명상적이고 주술적인 다라니를 암송하므로서 오랜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라마교인들은 일상생활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손으로 돌릴 수 있는 '마니퇴'라는 원통형의 '기도바퀴'를 들고다니면서, 경전을 암송한다. 라마교의 불제자들은 마니퇴를 오른쪽 방향으로 돌리면서 관세음보살의 육자명주(六字名呪)인 '옴마니밧메훔(Om-ma-ni-pad-me-hum)을 암송하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그들은 '옴마니반메홈'이라는 여섯자를 중얼거리면서 마니퇴를 돌리면 원통 안에 있는 불경을 읽은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고 말한다.
C. 신관(신앙의 대상)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은 흔히 삼보(三寶)로 불리우는 불(佛, 부처), 법(法 , 부처의 가르침), 승가(僧伽, 의지의 대상이 성립하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들, 보살이나 성자들)이다. 이 세가지는 내용은 셋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부처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부처가 있기 때문에 부처의 가르침이 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가 형식상 신앙의 대상이라해도 궁극적인 신앙의 실체는 아니다. 부처는 그 길을 가르치는 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실체는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격신(人格神)을 인정하지 않고, 인과 율에 지배되는 '비인격적인 원리'를 궁극적인 실체로 본다.
그런데 라마교에서는 삼보(三寶) 이외에 달라이 라마(라마寶)를 추가함으로서 사보(四寶)를 신앙의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라마교에서 달라이 라마는 부처의 가르침의 전달자인 동시에 살아있는 부처(活佛) 자신이다. 또한 라마교는 인도 탄드라의 신비적인 교설에 입각해서 세상의 창조주로 믿어지는 아디불타(Adi-Buddha,阿提佛陀)를 신뢰한다. 이러한 사보(四寶)와 신관(神觀)은 인격적인 신에 대한 것을 전혀 부인하지는 않는 측면도 보인다.
D. 인생관과 생활
라마교인들은 철저한 윤회사상에 입각해서 인생을 이해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현재의 삶은 과거의 업보(業報)로서 된 것이며, 현재의 삶은 다음 생에 대한 준비과정이다. 따라서 티벳인들은 철저한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파리나 지렁이 같은 미물도 죽이지 않고, 만약에 파리가 찻잔에 빠지면 큰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법석을 피우면서 파리들을 안전지대로 대피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의 죽은 부모나 형제, 조상들이 파리나 짐승으로 환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라고 인정되는 달라이 라마에 대한 깊은 신앙으로 인해서, 라마교의 중심지인 '라싸'는 티벳의 정치, 경제뿐 아니라 정신적인 성지(聖地)로 여겨지고 있다. 라마교인들은 일생동안 라싸에 오는 것을 최대의 영광이라고 여기고, 순례의 길을 가면서 오체투지(五體投地)를 끊없이 반복한다.
티벳인의 생활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라마교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손으로 돌릴 수 있는 '마니퇴'라는 원통형의 '기도바퀴'를 들고다니면서, 경전을 암송한다. 이러한 마니퇴는 개인뿐 아니라 가정에 '경통문(큰 마니퇴)'을 설치하고, 손으로 돌린다. 라마교에서 이러한 마니퇴를 창안한 것은 티벳지역에 문맹자(文盲者)가 많기 때문이다. 경전을 읽을 수 없는 대중들이 마니퇴를 손으로 돌리면서(오른쪽 방향) '옴마니반메홈'이라는 여섯자를 중얼거리면 원통 안에 있는 불경을 읽은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고 말한다.
티벳인들은 한 가정에 형제들 중에서 1명을 절에 바쳐 시주하며, 가정마다 지붕에 경문깃발과 라마교 깃발을 걸어놓는다. 또한 그들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대부분 몸에는 호신용 부적인 불상이나, 경문, 사리, 옥, 비단 등을 지니고 다닌다. 또한 음식물에 있어서도 그들은 라마교에서 금하는 것을 철저히 지킨다.
E. 정교(政敎)일치의 정치관
달라이 라마에 의한 법왕제(法王制)가 확립된 이후 1959년 중국이 티벳을 자치구로 만들기 까지 약 500여년 동안 달라이 라마는 법왕으로서, 최고의 권력자 위치를 차지하면서 정교일치(政敎一致)를 유지해왔다.
달라이 라마가 티벳에서 종교와 정치의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된 것은 제5대 달라이 라마인 '윤텐걈초(Yon-tan-rgya-mtsho, 1589-1617) 때 부터이다. 보통 윤텐걈초는 '위대한 제5대 달라이 라마'라는 호칭을 듣는다. 그는 몽골의 군사적인 도움을 얻어서 티벳에서 황모파가 완전히 세속권력을 잡도록 했으며, 그 자신이 원수(元首)가 되었다. 또는 그는 티벳을 다스리는 동안 '라싸'에 거대한 '포달라궁'을 건축하였다. 또한 그는 이전의 모든 달라이 라마들을 신(神)과 같은 존재로 인식시켰다. 제5대 달라이 라마 이후 티벳에서 달라이 라마는 종교와 권력을 동시에 장하여 정교일치의 체제가 지속되었다.
현존하는 달라이 라마 14세는 1959년에 인도 북서부의 '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최고 지도자겸, 종교지도자로서 독립운동을 꾀하고 있으며, 세계 모든 티벳인들의 정신적이고 정치적인 중심이 되고 있다.
Ⅳ. 라마교인의 세계관에 대한 분석
라마교는 불교의 환생의 교리를 기초로 해서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활불사상이나 달라이 라마나 판첸라마같은 법왕제나 정교(政敎)일치의 정치관, 생활 등의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것들에 비추어서 필자는 몇 가지 라마교의 세계관에 대해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라마교의 인생관이나 구원관은 숙명적인 결정론적(決定論的)인 경향이 있다. 즉 그들은 환생의 교리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현재의 고통은 과거의 업(業)로 부터 오는 숙명적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현재의 고통을 고칠수 없고, 현재는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은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현재의 자기상황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과거탓으로 돌리는 수동적인 인생관에 머물게 한다. 자기개발의 능동적인 기회는 박탈된다.
둘째로 라마교는 계급적(階級的)인 사회구조를 파생시켰다. 총카파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후 라마교는에서는 승려들 사이에 계급(階級)의 구분이 생겼다. 그 최상층부에는 약 4%정도의 활불승려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위치에 있으면서 정치와 종교의 모든 기득권을 갖는다. 이러한 활불승려들은 결국 환생과 활불의 교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켜가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활불계층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일반인들은 이들을 뒷바라지 하는데 더 많은 노동력을 착취당할 뿐이다.
세째로 라마교가 티벳에서 발전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내면에는 라마교 이전에 존재했던 본교(本敎, Bon)의 샤마니즘적인 혼합(混合)의 요소가 있다. 예컨데 라마교의 축제 중에서 중요하게취급되는 것들 중의 하나가 '챰(tsam, 불교 이전부터 내려오는 고대의 휴일)'과 미륵(미래불)에 대한 예전이다. 그런데 총카파 이후에 라마교 예전에서는 축제일에 악기나 종, 깃발 등을 사용하였는데, '챰' 축제 동안에 라마들은 불교의 적들을 쫒아내기 위해서 무서운 형상의 악마 가면 등을 쓰고, 춤을 춘다.
이것은 초기 라마교를 정착시켰던 파드마삼바바(蓮華生)가 인도불교의 교리와 티벳 본교의 신비한 무술(巫術), 주문, 축귀의식, 제사의식 등을 융합시킨데서 비롯되었다. 심지어 그는 티벳의 본교를 모두 불교와 융합시키기 위해서 티벳의 토착신(土着神)들이 모두 부처의 화신(化身)이라고 하는 본지불국토설(本地佛國土說)을 주장하였다. 이로인해서 티벳인들은 의식적인 면에서 불교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교리적으로는 자비(慈悲), 중생(衆生), 윤회(輪廻), 극락(極樂)과 같이 고달픈 현실생활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근거를 갖게 되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라마교에 혼합(混合)주의적인 요소들이 공존함을 알 수 있다.
Ⅴ. 라마교에 대한 선교전략
A. 타종교인에 대한 기본적인 선교원리
1. 효과적인 접촉방법
존 시먼즈는 타종교인에 대해 복음을 전할 때 수용할 수 없는 방법과 효과적인 방법을 구분하였다. 타종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삼가야할 방법은 정면접근법과 타협의 방법이다.
정면접근법이란 다른 종교인에게는 어떤 접촉점이나 거점도 없으므로 직접적으로 공격하거나 논박고, 협박하고 때로는 정죄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이것을 제국주의적인 접근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타협의 방법이란 복음전달을 위해서 복음의 내용을 타종교와 혼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들은 수용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보다 효과적인 접촉방법들이 있다. 그것은 '마음 대 마음의 접근법', '접촉점 접근법' 그리고 '대조접근법'등이다. 첫째로 마음대 마음의 접근법이란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갖는 본성과 고통이라는 공통 분모 속에서 보편적인 접촉점을 찾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전도대상자의 종교적인 배경이 아니다. 하나의 종교인이기 앞서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고, 모든 인간이 소유한 본성과 문제를 통하여 복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밑으로 가면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모두들 같은 생리적인 필요들이 있으며, 모두들 근심으로 부터 안정과 자유를 누리기 원하며, 모두들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구가 있다. 또한 모든 사람은 자기 성취에 대한 갈망이 있고, 대부분 삶 속에서 비슷한 유혹들을 받는다. 모든 사람은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야 한다. 이 모든 보편적인 인간본성의 갈망은 동일한 것으로서 우리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
둘째로 접촉점 접근법은 마음대 마음의 접근법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 근본관심이 전도 대상자의 관심사에서 부터 출발한다는 점이 다르다. 예컨데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접촉을 시도했다면 이는 '마음 대 마음의 접근법'이다. 그러나 수험생을 향하여 그가 가장 관심있는 합격(合格)에 역점을 두고 '천국합격을 위한 조건'등을 제시한다면 이는 접촉점 접근법이다. 이 경우 '시험에 합격'이라는 포인트가 그의 마음과 정신으로 통하는 문이 된다. 전도 대상자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을 파악하여 그와 유사한 비유나 어휘를 사용하여 종교적인 부분으로 관심을 돌린다. 따라서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전도대상자가 관심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만일 처음 만난 전도대상자라면 내가 먼저 말하기 전에 그의 관심사를 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사람들의 관심과 어휘의 통로를 통하여 기쁜 소식을 나누는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대조 접근법이다. 이것은 기독교와 타종교의 유사점을 발견하기 보다는 대조점들을 발견하여 접근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논리적인 면이 있다. 따라서 전도자는 논쟁이 되지 않도록 인내력을 갖고 차근차근 설명해 가야 한다. 이 방법은 현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을 사로잡기 쉽다. 도 있다.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방법들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것이다. 실제 전도에서 어느 한 가지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면서 복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예컨데 처음에는 '마음대 마음 접근법'이나 '접촉점 접근법'을 통하여 전도대상자들의 마음을 열고, 그런 다음에 적극적인 태도로 복음의 특이한 진리들을 '대조 접근법'으로 적용할 수 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직접적인 '대조접근법' 보다는 이것을 응용한 방법이 좀 더 효과적인 결실을 많이 거두었다. 즉 대조 비교를 하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상대방의 종교적인 체계는 말하지 않고(머리 속에만 두고), 타종교와 차이나는 기독교의 특이성만을 쉽게 말해가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도 절약하고 논쟁도 없애며, 더 설득력있는 듯하다.
2. 타종교인의 기본적인 전도원리
시먼즈는 선교사가 타문화권 또는 타종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염두에 두어야할 기본적인 전도원리로 여섯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원리는 복음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즉 타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먼저 단순하고 기본적인 복음의 사실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거운 신학과 심오한 설명을 피하여, 쉽고 간결하며, 요점이 분명하게 전달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기본적을 기독교는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종교이다. 복음 자체가 희망적이요 기쁜 것이다. 부정적인 언어사용은 논쟁을 야기시키기 쉽다. 논쟁에서 이길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람은 잃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만일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며, 미래지향적으로 간증과 도전을 준다면 복음전달은 더 수월해질 것이다.
셋째는 복음전달에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적이 되는 것이다. 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강조하느냐'보다도, '누구를 강조하느냐'이다. 일반적으로 '무엇을'이나 '어떻게'에 강조점을 두면 필경은 논쟁으로 흐른다. 예컨데 '어떻게(How)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는 논쟁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많다. 오히려 '지금 우리 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Who)인가?'라는 것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복음선포에 훨씬 유리하다. '성육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성육신하신 분'이다. 따라서 전도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라는 것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사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단지 병고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신 분'이 중요한 것이다.
넷째는 조급하지 말라는 것이고, 다섯째는 타종교의 종단(宗團)보다도 개인자체에 관심을 두고 접근하라는 것이다. 타종교 교리나 종단에 관심을 두고 접근하면 논쟁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전도 대상자의 개인에 관심을 두고, 그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나 실존적인 문제등을 통해 접촉점을 갖는다면 보다 용이한 접촉을 이룰 수 있다. 어디서나 누구나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와 문제는 비슷한 면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티벳이나 몽골지역에서의 라마교의 경우에도 그 내면에서 샤마니즘의 신앙이 흐르고 있다. 또한 지식인인가 문맹자인가에 따라서 접근방법도 달라지고, 그들의 관심사도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을 믿는 것이다.
B. 라마교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 전달
지금까지 라마교의 세계관과 분석을 통하여 볼 때, 라마교에 대한 변증적인 복음의 메시지는 전달의 접촉점들을 몇 가지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고(苦)의 원인 : 현상과 원인을 구분하라!
불교에 의하면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영원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순간순간 찰라의 연속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영원한 것을 찾으려고 집착한다. 영원한 것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영원한 것을 잡을려고 집착하는데서 인간의 고통은 시작된다. 이처럼 인간은 진리에 대해서 무지의 상태에 있다.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이러한 무명의 상태에 있으면 이로인해서 고통이 생긴다. 따라서 이러한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은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하여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 석가는 이 방법을 깨달은 각자(覺者)였고, 스스로도 자신은 이 길을 가르치는 스승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이 진리에 대해 무지상태에 있게되었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집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인간의 죄성에 있다.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죄성이 있음을 깨달게(覺) 해야 한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간이 진리에 대해서 무명(無明)상태에 있으므로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왜 인간이 진리에 대해 무지한 상태'라는 상태(狀態)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무지의 상태가 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원인(原因)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죄(罪)이다. 죄로 인해서 인간의 마음의 눈이 가리운 것이다(사59:1-2)
그렇다면 전도자는 이것을 포인트로 해서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 욕망에 집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죄(罪)에 있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고통은 현상(現狀)이지 원인(原因)은 아니다. 가령 길거리에 지나가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모두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다. 기뻐서 울 수도 있다. 그러나 눈물만 보고 사람들은 슬퍼한다고 생각한다. 눈물이 현상이라면, 그것을 유발시킨 슬픈 이유나 기쁜 이유는 원인이다. 바로 이 원인이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고통은 욕망에 집착에서 오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죄성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다른 종교에도 동일한 원리로 적용된다.
2. 활불(活佛)과 부활(復活)의 비교
라마교의 가장 대표적인 교리는 활불사상이다. 반면 기독교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십자가와 부활일 것이다. 따라서 전도자는 직접적으로 활불의 한곙와 부활의 가치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달라이 라마의 활불사상을 볼 때 먼저 몇 가지의 문제점을 제기 할 수 있다. 먼저, 라마교에서 환생의 교리를 믿으며, 특히 제 1대 달라이 라마가 그 계승자에게 계속해서 환생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까지의 모든 달라이 라마는 결국 외형적인 모습만 다르다. 뿐이지 실상 제 1대 달라이 라마인 '게둔두트'인 것이다. 즉 겉 모양은 달라도 그 속의 인격은 동일 인물인 것이데, 그러면 왜 각 달라이 라마들의 성격, 인격, 사고, 행동들이 다르게 나타나는가? 겉 모양만 다를 뿐 동일 인물이라면, 인격이나 성격등 모든 면에서 일관성을 가져야 할 것이 아닌가? 둘째로 이 달라이 라마가 환생할 때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서 난다면, 즉 한 몸 속에 달라이 라마와 원래 그 몸의 주인인 인격이 동시에 존재 한다면, 첫번째의 문제는 해결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는데 , 그것은 '원래 그 몸의 주인이 되어야할 사람은 어디로 갔으며, 사후에 그는 무엇으로 환생한다는 말인가? 결국 달라이 라마의 활불사상은 자세히 보면 스스로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다음과 같은 면을 염두에 두고 공략하면 용이하지 않을까 한다. 먼저 이들에게 이러한 논리적인 모순을 설명하고, 이에 대비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단 이 때에 그들은 그들의 불교의 '인간 율'에 근거해서 '예수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십자가에서 죽은 불쌍한 사람'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복음 전달자는 예수가 전생의 업보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우주를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께서 윤회의 사슬에서 고통 당하는 인간을 구원하고 그 것을 절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보내신 것이며, 이 십자가의 보혈을 믿을 때에 라마교 신자도 비로소 모든 환생(윤회)의 고리로부터 해방되고 영원히 변치 않는 (윤회하지 않는)생명을 소유함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결정적으로 부활을 설명해야 한다. 즉 예수가 업보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요, 윤회의 사슬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해 왔고, 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부활로 증명됨을 말한다. 이때에 복음 전달자는 환생과 재생 그리고 부활의 차이를 말할 필요가 있다.
달라이 라마는 육신이 쇄하므로 다른 육신으로 환생 하는 유한한 환생이였고, 이러한 유한성은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은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서 환생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부활체로서 영원히 변치 않음을 알아야한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 예수는 죽은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렸다. 그것도 달라이 라마처럼 다른 사람의 몸을 빌어서 살아난 것이 아니고, 원래 그 몸 그대로 살린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모든 죽음과 우주를 지배하시는 영원한 하나님 이신 예수를 믿어야 할 것이다.
3. 달라이 라마의 성립 배경에 대한 한계 지적
라마교에서 달라이 라마는 신앙의 대상이로서 숭배된다. 달라이 라마는 관심음보살의 화신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라마교인들에게 있어서 달라이 라마는 절대적인 위치 있다. 그는 라마교의 신앙의 대상인 사보(四寶) 중 하나로서 인간이 아니라 신(神)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고찰한 바와같이 역사적으로 달라이 라마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성립이 되었으며, 달라이 라마 역시 불완전한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하여, 정직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달라이 라마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직접적인 원인이 총카파의 개혁이에 없어진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윤회, 환생사상을 기초로한 활불사상이 대두된 것이다. 더군다나 정치적인 필요성에 의해서 세속적인 왕권과 결탁하고, 정당성을 유지하려 했던 점들을 통해서 달라이 라마제도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해야 한다. 라마교의 3대 지도자인 '소난감초'는 는 몽골의 황제인 '알탄칸(Altan Khan)'으로 부터 종카파 대제자의 세 번째 환생으로 인정받고, '와치르다라 - 달라이라마(Wachirdala Dalai Lama)'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때부터 달라이 라마라는 명칭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에대한 답례는 3대 달라이 라마는 알탄칸에게 '쿠빌라이 칸'의 환생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이를통해서 양자는 서로의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이후에 3대 달라이 라마인 소난감초가 티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게되자, 라마교의 법에 따라서 그의 후계자를 결정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제4대 달라이 라마로 인정받은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알탄칸의 후손인 '윤덴감초(Yonten Gyyatso)'였던 것이다.
C. 영적대결(Power Encounter)
타종교인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 결국 그것은 영적인 면을 간과할 수 없다. 존 윔버와 피터 와그너 등은 이러한 선교현지에서 만나는 타종교인에 대해서 능력전도(Power Evangelism)를 주장하였다. 능력전도란 주로 치유, 기적, 표적, 기사 등 초자연적인 능력의 대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복음전도를 의미한다. 능력전도의 전형적인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찾을 수 있다. 윔버는 마가복음 1장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3대 사역은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치유이다. 이 중에서도 치유사역이나 귀신을 쫒아내는 일에 대부분의 많은 시간을 예수 그리스도가 할애했다는 것을 주목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제자사역과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많은 영적인 대결들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해 보이셨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이로 보건대 선교현장에서 능력대결이 선교사 사역의 모든 것이 되거나, 유일한 복음전달의 수단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라마교와 같이 불교권에서도 특히 주술적인 성격이 강한 지역에서는 더욱 성령의 능력이 요청된다.
D. 제자양육
선교를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삼는 일이다(마28:19-20). 제자훈련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이나 사도 바울의 사역에서도 그 원리는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12명의 제자를 택하시고 삼 년간 훈련시키셨다. 그리고 이들에게 땅끝까지 복음전파를 명령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12명을 통하여 세계를 본 것이다. 그런가하면 사도바울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제자를 양육했다. 디모데나 디도는 대표적인 바울의 제자들이다. 선교전략을 세울 때 결국 선교사가 가장 신경을 써서 치밀하게 준비할 부분이 제자양육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특별히 라마교 지역이면서, 사회주의 체제 아래 있는 티벳에서는 어떤 형태든지 제자양육은 필수적인 사역의 방법이다. 물론 그 접촉방법에 있어서 전문적인 직업을 통해서 접근한다해도 그 내용은 제자양육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라마교인들에게 선교를 하고자 할 때는 무엇보다도 먼저 선교사 스스로가 제자양육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있어야 한다. 자신이 배운 것만을 반복하는 제자양육이 아니라, 그 나라 실정에 맞게 양육의 과정을 설정하고 만들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한다.
E. 전문인 선교
현재 티벳은 중국의 영역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문인 선교사로서 진출하는 실질적인 라마교권 선교의 첫걸음이라고 할 것이다. 예컨데 학생으로서 진출하거나, 교수요원으로서 진출하는 것은 효과있는 방법이다. 이외에도 기술자나 전문직업을 통해서 진출할 수 있다.
Ⅵ. 마치는 말
오늘날 라마교는 티벳지역과 몽골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과 가치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어떤 형태이든 간에 라마교에 대한 세계관에 대해서 분석하고, 그에 상응하는 선교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선교적인 측면에서 라마교의 세계관에 대해서 접근하고 이를 조직적으로 분석하고 선교전략을 세운 자료는 한국에 아직은 충분치 않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들을 가지고 이 연구를 진행하여왔다.
라마교는 7세기에 인도의 밀교(密敎)가 티벳에 전파되어 티벳의 전통적인 종교인 본교(本校)의 의식과 혼합되면서 새로운 불교의 종파로서 뿌리내리게 되었다. 초기 라마교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은 인도의 좌도밀교의 권위자인 파드마삼바바(Padmassambhava, 蓮華生)였다. 그는 인도불교의 의식과 티벳의 전통종교인 본교의 신비한 샤마니즘적인 의식들을 결합시켰다. 이런한 혼합으로 인해서 티벳인들은 라마교를 이질감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혼합적이고, 성력(性力)숭배와 같은 퇴페적인 교리로 인해서 승려들이 타락하고 비난을 받게되자, 14세기 후반에 '총카파'라는 승려가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종단을 쇄신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종카파와 그의 추종자들을 겔룩파 또는 황모파라고 부른다. 이들은 승려들의 독신생활을 강조했고, 종단을 개혁을 단행했으며, 이들의 세력은 티벳에 있어서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종카파 이후 라마교는 후계자의 세습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독신생활을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이로인해서 활불사상이 발생하였고, 달라이 라마의 환생교리가 생겼다. 특히 라마교에서는 달라이 라마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간주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한다. 특히 제5대 달라이 라마 이후에는 종교뿐 아니라, 세속적인 정치권력까지 달라이 라마가 소유하게 되고, 이후에 달라이 라마에 의한 정교(政敎)일치의 형태가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라마교의 세계관에 가장 근저에 기초를 이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환생과 윤회사상이다. 결국 라마교에서 활불을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근저에 불교의 환생의 교리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달라이 라마나 판첸라마가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도 환생과 윤회사상에 기초한 활불사상 때문이다. 이러한 환생사상에서 부터 라마교의 세계관, 인생관, 구원관들이 발전하게 된다.
라마교의 세계관에 대한 비평적인 접근은 여러 각도에서 가능하겠지만, 본 연구에서는 세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째는 라마교의 인생관이나 구원관은 숙명론적인 결정론적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환생의 교리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현재의 고통은 과거의 업보로 부터 오는 숙명적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현재의 고통을 고칠수 없고, 현재는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은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현재의 자기상황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과거탓으로 돌리는 수동적인 인생관에 머물게 한다. 자기개발의 능동적인 기회는 박탈된다. 둘째로 라마교는 계급적인 사회구조를 파생시켰다. 총카파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후 라마교는에서는 승려들 사이에 계급(階級)의 구분이 생겼다. 그 최상층부에는 약 4%정도의 활불승려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활불승려들은 결국 환생과 활불의 교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켜가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활불계층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일반인들은 이들을 뒷바라지 하는데 더 많은 노동력을 착취당할 뿐이다. 중국 공산당 혁명이 하층민들에게 환영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라마교가 티벳에서 발전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내면에는 라마교 이전에 존재했던 본교(本敎, Bon)의 샤마니즘적인 혼합(混合)의 요소가 축제나 의식에 스며있음을 보았다.
라마교에 대해서 선교적인 접근을 할 때 처음에는 그들의 일반적인 관심사나 삶의 문제들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대화가 깊어지면 복음적인 변증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선교사는 가장 효과적인 핵심을 가지고 복음의 메시지를 설명하고 변증하여야 한다. 이에 대해서 본 연구에서는 인간의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서 영원한 것에 대한 집착(執着)에 진리에 대한 무지의 상태에 있지않고, 죄성에 있음을 밝혔다. 뿐만아니라 부활(復活)과 활불(活佛)의 차이를 비교함으로서 라마교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달라이 라마라는 법왕제도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성립되었는지를 밝히고 이를 지적할 것을 밝혔다.
이외에도 티벳지역에은 중국 공산당의 영향에 있으므로 직접적인 전도보다는 전문인(專門人)선교와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제자양육의 방법이 병행되어야 함을 제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향햐여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28:19-20)고 명령하셨다. 그 모든 족속 속에 라마교를 신봉하는 티벳과 몽골인들이 당연히 포함된다는 것은 말할 나뉘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 티벳과 몽골지역(특히 내몽골 지역)은 가장 복음화가 안된 지역들 중의 하나이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라마교권에 있는 아시아인에 대해서 좀 더 심도있고,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선교의 노력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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