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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ow Bridge-Steve Barakatt
유명 뉴에이지 작곡가 스티브 바라캇이 일본 순회 공연중 도쿄 오다이바의 레인보우 브리지를 보고 즉석에서 만든 노래
도시의 야경은 한 순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황홀한 도쿄의 야경에는 개항 후 쉼없이 달려온 근대의 시간이 켭켭이 쌓여 있습니다. 이십여년 먼저 개항했을 뿐인데 근대화에 성공하고 한국을 지배하기까지 했던 일본, 무엇이 일본과 우리의 차이를 만든 것일까요? 개항기와 메이지 시대에서 그 해답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최태성/역사교사: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4척의 함선, 바로 구로후네(黑船, 흑선)가 들어온 곳인데요. 지금 일본 모습의 첫 페이지를 열게 된 그 역사적 현장 요코스카의 우라가항에 제가 지금 와 있습니다.
1853년 6월 3일 우라가항 수평선에 낯선 흑선들이 나타납니다. 바로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해군의 증기선들 이었는데요. 일본인들에게는 공포와 불안이, 미군들에게는 팽팽한 긴장이 느껴집니다.
개항후 막부말기 당시 사회는 어땠을까요? 이곳은 에도 시대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마을입니다. (에도무라/일본 닛코). 마치 영화 세트장 속에 들어온 느낌입니다. 개항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십오년간은 견고했던 신분제가 흔들렸던 대혼란기였습니다.
최태성: 개항시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당시 최고 지배층이었던 사무라이에 대한 이해는 필수입니다. 저기 진짜 사무라이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진짜 사무라이 같아요.
촌마케라는 사무라이 특유의 상투머리를 한 사무라이들은 드러내놓고 두 개의 칼을 찰 수 있는 특권을 가졌는데요. 무인정권이던 에도시대, 경제적 사회적 특권을 가진 지배계층이었습니다.
최태성: 왜 검을 두 개나 차셨죠?
에치고야 분바에몽/사무라이 대역: 길이가 긴 검은 실내에서 다루기 불편하기 때문에 이 짧은 검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는 용도나 할복할 때 쓴다오.
최태성: 할복은 왜 하는건가요?
에치고야: 할복은 무사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라오
최태성: 사무라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할복을 한다고 하는데 너무 아플 것 같아요. 저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긴 합니다. 원래 그 목소리인가요?
에치고야: 그렇다오. 내 목소리는 원래 이렇다오.
에도 시대는 쇼군과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무라이를 정점으로 하는 신분제도로 운영되었습니다. 전체인구의 10%도 채 안되는 사무라이들의 특권과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이곳은 지방영주 즉 다이묘의 집입니다. 다이묘는 사무라이에게 영토와 재산특권을 보장해 주고 사무라이는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습니다.
에치고야: 다이묘(지방 영주)의 저택에 있는 방이라오.
최태성: 아, 그렇군요.
영주에 대한 사무라이 간의 충성심으로 에도시대는 지탱되었습니다. 차별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하급무사들이 먼저 서양문물에 눈을 뜨게 됩니다. 실제 막부말기 사상가들은 지방 하급무사출신이 많았습니다. 특유의 실용적 태도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입니다. 1868년 근대 일본 사회로의 진입을 선언한 메이지 유신이 단행됩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개항 이후 사무라이가 권력을 장악하던 막부체제를 무너뜨리고 강력한 입헌군주제와 적극적인 서구문물 수용을 주장한 정치 혁명). 그 결과 신분제가 폐지되고 징병제가 실시되었으며 막부가 아닌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국가가 만들어집니다.
최태성: 이렇게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함, 단순함이 돋보이는 분위기인데요. 바로 이런 단순함이 사무라이들이, 강자, 즉 서구의 문화를 빠르게 복잡한 것 하나도 없이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이런 것들은 조선의 문신들, 의리와 명분을 생각하면서 복잡했던, “조선의 문신들과는 좀 다른 차이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존질서에 비판적이고 변화에 적극적인 이들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되기 마련입니다. 개항의 충격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켰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무라이들은 이제 특권과 경제권을 내려놓고 각자의 살길을 도모해야 했습니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개인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입니다. 사무라이들은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요?
최태성: 개항과 메이지 유신은 사무라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에치고야: 사무라이는 이 검을 지니고 다닐 수 없게 돼 버린다오.
최태성: 칼을 차지 못하도록 했다네요. 실제로 칼을 못찼을 뿐 아니라 징병제가 시행되면서 사무라이 계층 자체가 소멸되는 것이죠. 이제 사무라이들은 생존을 고민해야 했던 것입니다.
에치고야: 검을 잃어버린 사무라이는 살아가기 위해서 도쿄의 긴자에서 세계 최초의 돈가스 가게를 열었다고 하오.
최태성: 돈가스?
에치고야: 그곳에 가보는 게 어떤가? 돈가스, 맛 있겠지 않소?
최태성: 당신의 선조도 정말 사무라이였나요?
에치고야: 나의 선조는 원래, 농민이었다오. 하! 하! 하!
최태성: 아, 농민이었군요. 진짜 사무라이 후손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그래도 덕분에 개항기 사회를 유쾌하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긴자/일본 도쿄).
새로운 트렌드가 태어나는 쇼핑의 거리 긴자, 에도 초기부터 도쿄의 중심지였던 유서 깊은 거리인데요. 서양에서 비롯됐지만 지금은 일본의 자랑이 된 메이지 시대의 음식을 만나러 갑니다. 첫번째는 사무라이 친구로부터 추천받은 바로 그곳입니다.
최태성: 개항과 관련된 음식을 소개시켜드리려고 하는데요? 여러가지 음식이 있잖아요. 그 중에서 제가 생각할 때 일본의 개항, ‘대표적인 음식은 이거다’ 라고 생각하는게 있거든요. 제가 그것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1895년부터 4대째 이어오고 있다는 이곳은 1964년 다시 지어졌습니다.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런 인테리어, 맛으로 승부하겠다는 자신스러움이 느껴집니다. 전통양식을 간소화한 경양식 전문 레스토랑입니다.
최태성: 이 식당의 원조 음식은 뭔가요?
식당 직원: 원조음식은 ‘포크 카츠레츠’입니다. ‘포크 카츠레츠’의 원조집입니다.
최태성: 그렇습니까. 그러면 제가 이거 한번 시켜서 먹어보겠습니다 이거 주세요.
창업주는 사무라이 출신이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식당을 열기까지 참 고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최태성: 근대 사실은 양반들이 요리를 만들면 사람들이 수근 수근 댈거 아니에요. 여기도 마찬가지예요. 사무라이가 요리를 만든다는 게 참 힘든 일이었죠. 이곳 도쿄에서는 직접 만들지 못하고 요코하마 개항장으로 이분이 가셨데요. 가서 요리를 배우려고 하는데 서양인들이 이때 많이 들어왔잖아요. 서양인들이 서양 커틀릿을 먹는 것을 보면서 ‘저것을 일본식으로 하면 맛있지 않을까’.
불교의 영향으로 1200년간 금지됐던 육식을 마침 메이지 일왕이 허용했습니다. 고기에 대한 거부감을 덜기 위해 달걀과 빵가루를 묻혀 튀겨냈으니 새로운 요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름만 커틀릿에서 비롯됐을뿐 일본 전통튀김요리의 요리법으로 전혀 새로운 요리가 탄생합니다. 먹는 방식도 고민했습니다. 정통서양코스요리와 달리 익힌 야채 대신 생양배추를 곁들이고 돈가스와 밥을 함께 먹도록 했습니다. 밥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인들이 고기와 야채를 같이 먹도록 고민한 결과였습니다. 이처럼 낯선 서양문화를 받아들일 때 일본의 혼을 더하는 문화수용방식을 화혼양재 라고 부릅니다. (화혼양재 (和魂洋才)-일본의 전통정신에 서양 기술을 더해 자신들 교유의 문화로 재해석하는 일본의 신문물 수용정신).
최태성: 돈가스가 나왔습니다. 이게 바로 원조 돈가스, 자, 바삭바삭 소리가 지금 들립니다. 서양 커틀릿과 전혀 다른 일본의 맛입니다. 되게 맛있어요. 고기를 씹으면 고기에 즙이 있어요. 고기즙도 쪽 나오면서요. 굉장히 호사를 누리면서 먹고 있습니다. 굉장히 맛있는데요.
화혼양재라는 철학이 더해져 돈가스는 전세계인이 즐겨먹는 근대 일본 음식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안에 일본 사회 내에 어떤 신분제의 변화라든지 일본인이 서양 것들을 받아들이는 자세라든지 그리고 일본의 맛으로 만들어내는 그들만의 정신이라든지 그리고 이걸 4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대요. 자신들의 기술, 장인정신을 지켜내려는 모습이라든지 정말 돈가스 하나에는 일본의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개항의 정신을 담은 음식, 돈가스 말고 또 있습니다. (긴자/일본 도쿄). 긴자 거리에는 화혼양재의 정신이 담긴 개항기의 음식, 바로 단팥빵의 원조집이 있습니다. 서양인들의 주식인 빵에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팥을 넣은 단팥빵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신기한 발명품이었습니다. 밥을 주식으로 먹어온 일본인들에게 빵은 낯선 서양의 맛입니다. 어떻게 일본인들의 마음을 돌릴까요.
최태성: 여기 지금 굉장히 많은 빵들이 있습니다. 일본 최초 그러니까 세계 최초가 되겠죠. 바로 최초의 단팥빵집입니다. 최초의 단팥빵이---
아이코 타케우치/점원: 세계 최초로 단팥빵을 만들었고요. 메이지 7년(1874년)부터 단팥빵을 만들고 있습니다.
화혼양재의 정신으로 일본의 발효법을 개발한게 비결입니다.
최태성: 여기 보시면요. 지금 특이한게 뭐냐면 ‘술로 빚었다’ 이렇게 나와있죠. 이 빵이 원래 이스트를 빼고 술로 빚었다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일본인 입맛에 맞게 만든 빵이라고 합니다. 맛있겠네요. 화혼양재의 맛, 맛보지 않을 수 없죠. 아이, 신난다. 먹는게 제일 좋아. 제가 단팥빵 맛을 봐야죠. 서양빵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빵이 쫄깃해요. 그리고 팥이 약간 좀 짭조름한 것도 있고 단맛도 있고요. 한국에도 맛있는 단팥빵 많잖아요. 그 맛하고 차이는 없는데 어쨌든 빵이 쫄깃 하다는 차이가 있는데 재미있는 건 뭐냐면 보시면 알겠지만 이게 빵이죠. 그 안에 팥이죠. 이게 뭐냐면 빵은 서양에서 팥은 중국에서 합쳐서 일본 것으로 만든 겁니다. 이게 바로 화혼양재, 일본의 정신은 그대로 있고 서양의 기술, 외국의 기술을 받아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본인의 정신, 화혼양재, 개항의 맛, 단팥빵입니다! (요코하마/일본).
서양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서양을 넘어서는 것이 그게 일본의 꿈이고 숙제였습니다. 가스등, 기차, 전신, 우편. 요코하마에서 마주치는 것마다 일본 최초입니다. 서양의 앞선 기술과 근대 기관들이 요코하마에서 1차 테스트를 거친 셈입니다. 근대 유산은 요코하마만의 특별한 매력으로 여행객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야마시타 공원/일본 요코하마). 요코하마 바로 앞에 있는 이 공원 역시 일본 최초의 임해공원입니다. 근처에 재미있는 모양으로 지나치기 힘든 석상이 하나 있습니다. (잔기리 스타일-메이지 초기 일본에 유행했던 근대식 머리로 짧은 머리에 가르마를 갈라 양 옆으로 넘긴 모양). 잔기리, 메이지 시대 때 최신 유행이었죠. 헤어스타일이라고 합니다.
최태성: 잔기리 스타일이요. 아주 열풍적으로 이거 안하면 굉장히 촌스러운 식으로 사람들이 인식을 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단발령, 1895년 을미개혁 때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전국적인 의병항쟁이 일어날 정도로 격렬한 저항이 있었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일본은 좀 달라요. 격렬한 저항보다는 격렬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모습들, 그런 것들도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요코하마의 명소가 여기 있습니다. 추억의 일본근대식 전통의 이발소가 지금도 손님을 받는다니 놀라웠습니다.
최태성: 안녕하세요.
시바가키 신타로/이용원 대표: 어서 오세요.
최태성: 저 질문이 있습니다. 이곳이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이발소인가요?
시바가키: 그렇습니다. 메이지 2년, 1874년에 창업하여 제가 5대째 운영하고 있는 이용원입니다.
최태성: 네, 제가 지금 제대로 찾아온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이용원이라고 해서 제 머리를 부탁드려보려고요.
1871년 메이지 정부는 법으로 단발을 선포합니다. 바로 그때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시바가키: 어떤 머리 하실 거예요?
최태성: 잔기리 스타일입니다.
시바가키: 잔기리 스타일! 알겠습니다.
최태성: 잔기리 스타일 해주시는데요.
잔기리 스타일은 에도식 상투와는 반대로 앞머리를 덮는 식입니다. 과연 140여년전 헤어스타일이 잘 어울릴까요. 5대째 이어져온 장인의 솜씨라니 기대해 보기로 했습니다. 점점 역사책 속의 개화파들을 닮아가는듯 했습니다.
최태성: 이렇게 반을 딱 잘라서 기름을 바른 다음에 반을 딱 갈라서 양 옆으로 넘기는 거예요. 이러니까 나오죠, 지금? 이게 바로 개항의 헤어스타일, 잔기리 스타일이 되겠습니다. 일본 현존 최고의 이발소에서 근대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껴본 유쾌한 체험이었습니다. 백여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 어느덧 모던 보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최태성: 자, 어떠세요. 여러분, 잔기리 스타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여기 지금 정확하게 가르마를 가르셨어요. 나름 또 잘 어울리는 모습 같습니다. 잔기리 스타일. 완벽해요 감사합니다.
재미 있는 건 메이지 일왕의 영향력입니다. 즉위 때만 해도 전통복장을 입었던 일왕은 메이지 유신이후 유럽식 군복과 서양식 헤어스타일을 선보였습니다. 덕분에 국민들의 지지하에 일본의 근대화는 속도를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없어질 위기에 처했던 전통도 있습니다.
최태성: 모든 일본국민들이 이 서구문물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모 같은 경우도 서구 근대문물이 들어오면서 이제까지 있었던 스모에 대한 굉장히 부정적인 인식들을 메이지 정부는 갖게 되죠.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모습 아니야’ 라고 하면서 스모를 금지시키는 법령을 내게 됩니다. 고대 신에게 바치는 제사의식에서 비롯된게 스모입니다. 1871년 메이지 정부의 금지령은 큰 반발에 부딪칩니다. 급기야 유명스모선수가 금지령을 어기고 공개스모대회를 열려하자 일왕은 발 빠르게 결단합니다. 스모대회에 직접 나와 스모 폐지령을 철회한 겁니다,
미래의 스모선수들을 키워내는 한 도장을 찾았습니다. 지금도 스모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밀고 넘어뜨리는 단순한 스포츠로 보이지만 상대를 미는 힘과 균형을 잡는 기술, 모두를 갖춰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만큼 기초체력이 중요하겠죠. 분명히 고된 훈련이지만 불평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그만큼 이들에게 전통스포츠 스모선수가 된다는 건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조기교육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스모를 향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최태성: 지금 여기 사부님 같으신데, 여쭈어 보겠습니다. 스모는 일본인들에게 어떤 스포츠입니까?
사쿠마 고이치/스모 지도자: 어떤 스포츠냐고 하면 일본의 무도에서 정신력, 기술, 체력 세가지 조건을 갖추기 위해 했던 것으로 옛날부터 사랑 받고 있는 스포츠입니다. (아이들에게) 잠깐 모여봐!
최태성: 안녕하세요
아이들을 직접 만나니,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우리 씨름의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엄마 한테 끌려왔나 봅니다.
사토료다/스모 교육생: 어릴 적에 스모교실에 들어와서 역대 요코스카(천하장사)와 스모역사를 배우면서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랑 아이스크림 걸고 경기 한판 하실래요?
최태성: 스모를? 나랑? 학생들 만나니까 또 도전하네요. 어딜가나 학생들은 다 똑같습니다. 도전을 해달라고 하는데 한번 해볼까요? 체격으로 봐서는 제가 좀 더 큰거 같긴한데, 오케이, 한번 해보죠! 아, 어떡해 학생들이 자꾸 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한번 해봤는데요. 많이 민망합니다. 굉장히 이게 타이트합니다. 타이트하고 무거워요. 묵직합니다. 샅바보다 무거운 느낌이 들거든요. 제대로 입은 걸까요? 선생님, 어떤가요?
사쿠마: 이 팔찌랑 윗옷이랑 안경 벗고 맨몸으로
최태성: 윗도리 벗으래요. 큰일났네, 다 벗으랍니다. 지금 바지 벗으란 얘긴 안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하라고 하니까---이럴줄 알았으면 운동 좀 하고 왔어야 했는데,
스모의 룰을 알기 위해 먼저 학생들의 움직임을 잠시 지켜봤습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신체일부가 땅에 닿거나 4.6m 씨름판 밖으로 밀어내면 승리입니다. 연습경기지만 진지한 태도로 사력을 다하는 모습이 감동스러웠습니다. 어느새 의욕은 저멀리 사라지고 청소년 선수들에게 창피나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시키리 라는 준비자세로 시합이 시작됩니다. 우리 씨름과 달리 일종의 기싸움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것인데요. 집중력과 힘이 대단해서 일차전은 역시 참패, 슬슬 승부욕이 발동해서 재도전했습니다. 제가 들배지기를 한 번 해보려고 했는데 완전 밀립니다. 완전 밀려, 마지막 인사까지 예를 다해야 하는데요. 근대화 물결에 맞서 지켜낸 전통스모의 매력을 잠사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최태성: 저 어땠나요?
스모 교육생: 손에 힘이 세고 밀어내기 힘들었어요. 강했어요.
최태성: 생각보다는 강했다. 그렇게 얘기 하네요. 이게 한국 씨름하고 다르게 막 때려요. 여기 지금 아파 죽겠어요. 어쨌든 늦은 밤까지 자신의 전통스모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을 보니까 자신의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이 대단하다. 아무리 일본이라지만 이런 모습들은 참 배울만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도 역시 우리의 전통이 있다면 굳건히 계승할 필요가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아픔을 이끌고 저는 졌으니까 아이스크림 사러 가겠습니다.
화혼양재의 유여함에도 스모를 지켜낸 고집스러움도 지금의 일본을 만든 동력이었습니다. (EBS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146회 일본 개항사-2부 “화혼양재, 돈가스와 스모”에서 정리)
① 일본은 한국보다 이십여년 먼저 개항했을 뿐인데 근대화에 성공하고 한국을 식민지로 하였다. 무엇이 일본과 우리의 차이를 만든 것일까? 일본의 개항기와 메이지 시대에서 그 해답을 찾아 보려고 한다.
② 1853년 6월 3일 미국 페리 제독이 이끄는 4척의 함선이 일본 요코스카의 우라가항에 나타납니다. 미국의 함포사격에 의해 일본은 무력으로 개항하게되었다. 미일통상조약에 의해 일본은 요코하마와 고베, 나가사키와 시모다, 하코다테 항구를 개항했다. 1868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선언한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은 개항 이후 사무라이가 권력을 장악하던 막부체제를 무너뜨리고 강력한 입헌군주제와 적극적인 서구문물 수용을 정치 혁명이었다. 그 결과 신분제가 폐지되고 징병제가 실시되었고 막부가 아닌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국가가 만들어진다. (에도시대(1603~1867)-메이지유신(1867~1877)).
③ 명치유신 이전에 일본사회는 무사(사무라이)층(5~6%), 농민(80%), 상공업자(5~6%), 천민(8~10%)의 신분제사회 였다. 개항의 충격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켰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무라이들은 이제 특권과 경제권을 내려놓고 각자의 살길을 도모해야 했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개인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이었다. 징병제가 시행되면서 사무라이 계층 자체가 소멸되어 이제 사무라이들은 생존을 고민해야 했다.
④ 세계 최초로 도쿄에 돈가스 식당 문을 연 사람은 사무라이 출신이었다. 생계를 위해 식당을 열기까지 참 고민이 많았다. 사무라이가 요리를 만든다는 게 참 힘든 일이었다. 이곳 도쿄에서는 직접 만들지 못하고 요코하마 개항장으로 가서 서양인들이 서양 커틀릿을 먹는 것을 보면서 ‘저것을 일본식으로 하면 맛있지 않을까’. 새로운 요리법으로 돈가스가 탄생한다. 일본 도쿄 돈가스 식당은 1895년에 문을 열어 지금 4대째 이어오고 있고 1964년 다시 지었다고 한다.
⑤ 개항의 또 다른 음식으로 세계 최초로 단팥빵 상점이 도쿄에서 창업했다. 서양인들의 주식인 빵에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팥을 넣은 단팥빵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신기한 발명품이었다. 밥을 주식으로 먹어온 일본인들에게 빵은 낯선 서양의 맛이었다. 어떻게 일본인들의 마음을 돌릴까. 빵은 서양에서 팥은 중국에서 합쳐서 일본 것으로 만든다. 도쿄의 이 빵상점은 1874년부터 단팥빵을 만들었다.
⑥ 메이지 초기(1867년) 일본에서 유행했던 헤어스타일이 있었다-서양식 잔기리 스타일. 이걸 안하면 굉장히 촌스러운 사람들로 인식을 했다. 한국은 1895년 을미개혁 때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전국적인 격렬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일본은 격렬하게 받아들였다. 일본 근대식 전통 이발소는 1874년에 요코하마에서 창업하여 현재 5대째 운영하고 있다.
⑦ 메이지 정부는 1871년 일본전통 스포츠인 스모 금지령을 내렸으나 큰 반발에 부딪쳤다. 유명 스모선수가 금지령을 어기고 공개스모대회를 열려하자 일왕은 스모대회에 직접 나와 스모 폐지령을 철회하였다고 한다, 서양문물에 충격을 받아 돈가스와 단팥빵을 발명했지만 전통을 지키려는 일본인들의 노력도 있었다. 일본이 개항후 서구 문물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차별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많은 하급 무사출신들이 먼저 서양문물에 눈을 떴고 기존질서에 비판적이고 변화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막부말기 사상가들은 지방 하급무사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⑧ 몇 년전에 일본의 한 신문사 여론조사에서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10인 중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포함된 걸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