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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Alto Cedro voy para Marcané El cariño que te tengo Cuando Juanita y Chan Chan Limpia el camino de paja De Alto Cedro voy para Marcané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탄생
원래 '부에나 비스타’클럽은 1930-4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쿠바의 수도 하바나 동부의 고급 사교장이었다. 이 시기,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각국의 자본이 고수익을 낳는 사탕수수 재배와 고급 시가 생산을 위해 몰려들면서 카바레, 클럽과 같은 사교장들이 번성하기 시작했고 쿠바 최고의 뮤지션들이 이 곳에 모여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러나 쿠바 혁명이 일어나자 '부에나'를 비롯한 여러 클럽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간 백인 손님들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연주를 하던 연주자들은 갈 곳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고, 쿠바 음악의 황금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던 1996년, 기타리스트이자 월드뮤직의 대부로 불리우는 프로듀서 라이 쿠더(Ry Cooder)는 런던에 있는 음반사 '월드 서킷'의 사장 닉 골드(Nick Gold)와 함께 아프리카와 쿠바 기타리스트들의 합동연주를 기록하고자 1996년 쿠바로 향하였다. 그러나 함께 오기로 했던 아프리카 연주자들이 비자문제로 인해 파리에 주저앉게 되자, 이 두 사람은 연주자를 모두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한 명 한 명 연주자를 끌어 모으던 이들은 오디션을 하면서 평균연령 60세가 넘는 노인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신들린 노래와 연주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에 지어진 하바나의 허름한 에그램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진 이들의 녹음은 편집 없이 라이브로 진행되었고 불과 6일만에 끝이 났다. 앨범은 영화스러웠던 옛 클럽의 이름을 따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라 명명되었으며 '월드서킷/논서치(World Circuit/Nonesuch)’레이블을 통해 출시되었다. 맘보, 볼레로, 단손 등과 같은 쿠바음악의 본류와 함께 아프로-쿠반 재즈와 라틴 재즈의 진수를 보여준 이 음반은 발매와 동시에 클래식과 팝, 재즈계로부터 열렬한 환호와 찬사를 받았다. 그 후 콤파이 세군도(1907년생, 기타/보컬), 이브라힘 페레(1927년생, 보컬), 루벤 곤잘레스(1919년생, 피아노), 오마라 포르투온도(1930년생, 보컬), 엘리아데스 오초아(1946년생, 기타) 등 쿠바음악의 노장들로 구성된 이 특별한 밴드는 빌보드 차트와 월드뮤직 차트를 강타하며, 1997년 그래미상에서 베스트 트로피컬 라틴 퍼포먼스 부문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영화 '베를린천사의 시’와 '파리 텍사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일의 명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는 오랜 친구였던 라이 쿠더의 소개로 동명의 다큐멘터리 필름을 통해 이들의 삶과 음악을 조명함으로써 2000년도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Viva La Musica Cubana! ? Time ![]() 영원히 묻혀버리는 듯 했던 쿠바음악 황금기의 전설적인 음악과 연주는 이렇게 한 장의 음반과 한 편의 영화로 인해 다시 되살아나게 되었다. 70세를 훌쩍 넘긴 '부에나 비스타'의 뮤지션들은 모두가 쿠바음악의 산 증인들이나 다름없다. '손'이 아닌 '혼'으로 연주하는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 루벤 곤잘레스(1919년생), 쿠바의 '냇 킹 콜'과 '에디뜨 피아프'로불리우는 보컬리스트 이브라힘 페레(1927년생)와 오마라 포르투온도(1930년생).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깊은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 이들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스스로 즐기기 위해서 음악을 한다. 이러한 그들의 음악 속에는 식민지배, 혁명, 독재와 경제적 제재 등으로 얼룩진 순탄치 않은 역사, 그러한 고난 속에서도순수함을 잃지 않은 쿠바사람들의 낙천적인 모습이 녹아들어 있다. 카리브해를 닮은듯느릿하고 유장한 라틴리듬, 삶의 애환을 묵묵히 담아내는 서정적인 멜로디, 감미롭지만 애수가 깃든 보컬...음악을 삶이자 동시에 신앙처럼 여기면서 살아왔기에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들려주는 이들의 음악은 헤아릴 수 없이 깊고 그윽한 감동을 준다. 그리고 2001년 2월 이들은 미수교국인 한국에 순수한 열정과 경이로운 연륜으로 영혼을 울리는 음악을 선사하기도 했다.
Buena Vista Social Club 멤버 소개 이브라힘 페레 Ibrahim Ferrer : 1927년생, 보컬리스트
72세에 첫 데뷔 앨범
이브라힘은 1927년 산티아고의 한 사교 댄스 클럽에서 태어났다. 12세에 어머니를 잃은 그는 어려서부터 먹고살기 위해 거리에서 노래를 해야 했다. 1941년 산티아고의 한 악단에 들어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노래를 부르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1950년 파초 알롱소(Pacho Alonso)가 이끄는 밴드에서 리드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전업 뮤지션이 되었으며 쿠바음악의 전설적인 존재인 '오르케스타 데 차핀(Orquesta de Chapin)'과 '베니 모레(Benny More)'의 밴드에서 객원주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59년 알롱소의 밴드는 '로스 보쿠코스(Los Bocucos)'라고 이름을 바꿔 하바나로 진출하였으며, 커피원두를 분쇄하는 소리에 기원을 둔 필론(pilon) 리듬을 개척하면서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브라힘은 이들과 20년 이상을 함께 활동하며 손(son)과 구아라차(guaracha) 그리고 빠른 템포의 곡들을 불러 인기를 누렸지만, 자신의 솔로 앨범 녹음을 하기까지는 40여 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하루 하루의 연주로는 생활을 지탱하기 힘든 쿠바의 다른 뮤지션들처럼 이브라힘도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이 하바나 구시가지에 위치한 허름한 아파트에서 소량의 연금으로 생활을 지탱하고 있었으며, 부족한 부분은 구두를 닦는 것으로 꾸려나가고 있었다. 1996년 라이 쿠더와 함께 '부에나 비스타'의 앨범작업을 추진하면서 지나간 시절의 볼레로 가수를 찾고있던 프로듀서 후안 마르코스 드 곤잘레스(Juan de Marcos Gonzalez)는 마침 하바나의 거리를 한가로이 걷고 있던 이브라힘을 발견했다. 그리하며 이브라힘은 '부에나 비스타' 앨범의 '도스 가르데니아스(Dos Gardenias)'를 통해서 진정한 볼레로 가수로서의 재능을 활짝 펼치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채찍질하여 왔지요. 그리고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젊었을 때 나는 나의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세계를 여행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1962년에 유럽에 갔었던 것이 유일한 기회였습니다.쿠바 미사일 위기가 터졌을 때 나는 파리와 동유럽에서 파초 알롱소의 밴드와 함께 연주하다가 발이 묶였죠. 모든 것들이 해결되고 나서야 겨우 집으로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 35년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어요. 지금 나는 삶에 대한 의욕이 넘칩니다. 나는 지금 노인의 몸으로 청년 시절에 꾸었던 꿈속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루벤 곤잘레스 Ruben Gonzalez : 1919년생, 피아니스트 ![]() 1919년 산타 클라라에서 태어난 루벤은어렸을때부터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보여 15세의 나이에 시엔푸에고(Cienfuego) 컨서바토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 그는 낮에는 의사로 일하고 밤에는 음악을 하려는 계획으로 의대에 진학하였으나 너무나 강렬한 쿠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하바나로 가서 전업 뮤지션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듣고있는 모든 쿠바 음악의 연원을 찾을 수 있는 음악의 황금기였던 1940년대, 이 시기에 걸쳐 쿠바음악에 혁명을 일으켰던 천재 음악가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즈(Arsenio Rodriguez)는 젊은 피아니스트 루벤의 연주를 우연히 듣고 감탄하여 함께 연주할 것을 제의하였다. 아르세니오는 많은 조언을 통해 루벤의 연주스타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쿠바음악의 싱코페이션(syncopation)을 터득하는 동시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연주를 해야한다고 말했다. 또한 다른 연주자들이 무엇을 하건 상관하지 말고 누가 듣더라도 루벤 곤잘레스의 음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라고 충고하였으며, 루벤은 그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해갔다. 그리하여 루벤은 이미 40-50대에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로 평가받는 루이즈 릴리 마르티네즈(Luis 'Lili' Martinez), 페루친(Peruchin)과 함께 트리오를 구성하여 활동하면서 미국 재즈의 자유로운 즉흥연주와 아프리카 리듬을 결합시킨 맘보(mambo)를 발전시킴으로서 쿠바음악의 미래를 형성해가기 시작하였다. 그 후 탱고 뮤지션들과 함께 파나마와 남미를 순회하다가 하바나로 돌아와 '트로피카나'와 같은 클럽에서 연주를 계속하던 루벤은 1960년대 초 차차차(cha-cha-cha)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엔리끄 요린(Enrique Jorrin)을 만나 25년 동안 함께 활동했으며, 그가 죽은 80년대 중반 은퇴하였다. 그 후 하바나에서 단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그는 습기에 벌레까지 먹은 피아노를 집에서 치워버린 관계로 가끔 피아노를 치러 에그램 스튜디오에 들르곤 했다. 마침 그 곳에서는 ‘부에나’의 음반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라이 쿠더와 프로듀서들은 루벤이 매우 특별한 피아니스트임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관절염을 앓으며 몇 년 동안 피아노도 없이 지냈던 루벤의 다시 되살아난 터치와 테크닉은 놀라운 경지였고, 라이 쿠더는 "내 일생동안 들어본 중에서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에게 이끌려 50년이 넘게 뮤지션으로 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지 않았던 첫 솔로 앨범 < 오마라 포르투온도 Omara Portuondo : 1930년생, 보컬리스트 ![]() 오마라의 가족사를 살펴보면 마치 신대륙 개척사의 무용담을 듣는 듯 하다.부유한 스페인계 집안 태생인 오마라의 어머니는 같은 계층의 사람과 결혼하는 대신에 흑인이자 쿠바의 국가대표 야구선수였던그녀의아버지와 사랑에 빠져 도망을 쳤다. 당시 쿠바에서 흑백간의 결혼은 인정받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가정은 평화와 화합의 장소였고 여느 쿠바 집들처럼 음악이 넘쳐흘렀다. 가난해서 축음기조차도 없었지만 오마라의 부모는 언제나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이것이 오마라에게는 음악레슨이 되어 주었으며 지금의 주요한 레퍼토리를 형성하게 하였다. 오마라의 부모가 자주 불렀던 '라 바야메사(La Bayamesa)'와 같은 곡은 콤파이 세군도의 연주로 <<부에나…>> 음반에 담겨있기도 하다. 오마라는 언니와 함께 하바나의 전설적인 클럽인 '트로피카나'에서 무용수로 활동을 시작해서 주말마다 아메리칸 재즈 스탠더드 곡들을 노래하였다. 이 당시 오마라와 함께 연주하였던 뮤지션들의 연주스타일 - 아메리칸 재즈의 영향을 받은 쿠바풍의 보사노바는 필링(스페인어로 filing)이라 불리우는 것으로 오마라는 곧 '필링의 피앙세'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오마라는 여성 보컬 콰르텟인 '쿠아르테토 라스 다이다(Cuarteto Las D’Aida)'를 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냇 킹 콜, 에디뜨 피아프와 함께 공연하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1959년 오마라는 아메리칸 재즈와 쿠바음악에 두 분야에 걸쳐 모험적인 시도를 한 솔로 데뷔 앨범인 <<마지아 네그라(Magia Negra)>>를 냈으며 동료들과 함께 미국 마이애미로 가서 활동하다 쿠바가 미사일 위기로 인해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고립되기 시작할 무렵, 같이 활동하던 언니를 미국에 남겨두고 서둘러 쿠바로 돌아왔다. 혁명 후 몇 년 동안은 카스트로가 사회주의적 이상향으로서 추구한 서방세계와의 단절로 인해 쿠바역사에 있어서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음악에 있어서도 많은 뮤지션들이 망명을 해버려 채워지기 힘든 간격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오마라는 쿠바에 남아 밴드와의 공연이나 음반작업을 계속하였다. 사탕수수 수확기록을 세우기 위해 전국민이 들판으로 징집되어 일하는 동안 이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으며, 몇몇 사회주의 국가와 프랑스 일본 등지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오마라는 1995년 다른 음반작업으로 인해 쿠바에 왔었던 라이 쿠더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오마라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음반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던 에그램 스튜디오에 우연히 들렀을 때 쿠더는 즉석에서 그녀를 프로젝트에 포함시켰다. 쿠더는 볼레로 곡인 '베인테 아뇨스(Veinte Anos)'를 콤파이 세군도와 함께 불러달라고 오마라에게 요청하였고, 이 곡은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그 후 오마라는 다음 앨범 < '쿠바의 에디뜨 피아프'라 불리 우기도 하는 오마라는 쿠바 음악계가 오랫동안 품어온 보석과도 같은 존재이다. 넓은 음역과 유연함을 갖춘 천부적인 목소리를 지닌 오마라는 손(son), 발라드(ballade), 볼레로(bolero), 구아라차(guaracha)에서 재즈에 이르는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특유의 음색과 표현력으로 능란하게 소화해낸다. 또한 청중들과 음악적인 교감을 나누는 데에도 뛰어나, 진솔하면서도 열정이 담긴 노래로 감동을 주곤 한다. 지금은 꽉짜인스케줄로 세계 각국에서 공연하고 있지만 국보급의 보컬리스트로서 '트로피카나'를 비롯한 하바나 일대의 클럽에서도 정기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오마라 포르투온도는 이제까지 고립되어온 카리브해의 작은 섬 쿠바에서 떠오른 세계적인 디바가 되었다. "나는 '부에나 비스타' 열풍이 생겼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지요. '부에나…’는 두가지 면에 있어서세계인의 감성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사랑과 행복을 느끼고 싶어하고, 쿠바의 음악이 바로 그것들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콤바이 세군도 : Compay Segundo 1907년 생 기타, 보컬 ![]() 전자악기의 전성기라서인지 요새 우리가 보는 가수들은 연주가 서툴고 노래도 잘 못한다. 화려한 옷과 분장, 춤으로 잠시 사람들의 주의를 돌리며 얼렁뚱땅 넘어갈 순 있지만 속인다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결국은 듣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들어버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이 이 노인이 만들어낸 음악에 열광한다. 기분 좋은 음색으로 가장 편안하게 가슴에 와 닿는 리듬을 택할 줄 아는 본능 같은 것이 흐르기 때문이다. 애절하지만 끈적거리지 않고 또 놀랄 만큼 정확하다. 나이 어린 소년 소녀가 들려주는 혀 짧은 어리광으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인생을 충분히 느끼고 즐긴 사람들만이 보여주는 원숙함과 부드러움이 가득하다. 엘리아데스 오초아 : Eliades Ochoa 1946년 생 기타, 보컬 ![]() 음악가정에서 태어나 불과 여섯 살 때부터 노래와 기타연주를 시작했다. 쿠바에서 가장 뛰어난 기타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스스로가 만들어낸 독특한 스타일의 음악을 9현 기타를 사용해 연주하고 있다.
'산티아고의 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던 엘리아데스 오초아. 그러나 무엇보다도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에서 활화산 같은 기타 연주와 함게 포효하는 목소리로 'Chan Chan'을 부르던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자료제공: 스플래쉬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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