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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살[片箭] 복원 그 후
정진명(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애기살이 세상에 소개된 지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하며 우리의 전통 문화로 되살리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고, 실제로 활터보다는 도장을 비롯하여 어린이들 호기심을 채워주는 분야에서 강력한 수단으로 등장하여 자리잡는 실정입니다. 이제 언론에서도 그렇고 방송에서도 그렇고 우리의 전통 활을 생각하면 유엽전보다는 애기살을 더 쉽게 떠올리고 눈으로 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뜨거운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현상 가운데는 애기살을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하는 사례도 나타나서 애기살 연구에 앞으로 심한 장애를 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사실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지만, 사실 그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바꾸면 거짓이 되고, 거짓이 판을 치면 학문은 치명상을 입습니다. 따라서 100년만에 부활한 애기살의 건전한 비상과 발전을 위해서도 사실을 왜곡하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애기살 사법은 여러 가지 방안이 강구될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제시한 것은 그 동안 유세현 접장의 시작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실제 활쏘기 실습에서 얻어낸 경험을 토대로 하여 구성한 것입니다. 그 사법 구성에는 제 손등을 찍은 아찔하고 뼈아픈 경험까지 축적되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다면 처음 그런 실수를 한 저로서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앞서 연구한 사람들의 공을 무시하거나 반박하는 전제조건으로 하여 그 다음 자신의 입지를 확립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선배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스스로 함정을 파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하면 그 이후에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후학으로부터 똑같이 자신이 공격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제기한 덧살에 애기살 멕이는 방법은 마루깃을 안으로 넣고 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가장 무난한 방법으로 생각됩니다. 이 방법이 큰 문제가 있어서 사람이 다치거나 한다면 다른 방안을 찾아내서 기존의 그 방법을 비판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위험이 없는 좋은 방법이라면 비판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대안으로 찾아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소개하면 될 일이지 마치 앞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나기영 접장이 마루깃을 밖으로 내놓고 나머지 두 깃을 덧살 안으로 집어넣는 방법으로 애기살을 쏘더군요. 그래서 괜찮냐고 물었더니 마루깃을 안으로 넣을 때와 별 차이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황학정의 김경원 사범님도 이렇게 쏘더라고 하고 그 분으로부터 배운 방법이라고 하더군요. 황학정의 김경원 사범은 성순경 명무에게 애기살을 처음 소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황학정에서 애기살 때문에 갈등이 생겨 다른 정으로 이적을 하신 걸로 압니다. 물론 애기살 이외의 여러 요인이 중첩되었지만, 그 여러 이유 중에 애기살 파동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들었습니다. 황학정 김경원 사범의 애기살 내력도 성 명무에게 귀결됩니다.
덧살 먹이는 것도 <한국의 활쏘기>에서 2가지가 소개되었는데, 이것도 이후에 많은 소소한 방법들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애기살과 덧살을 먼저 장착한 다음에 오늬를 먹이는 방법이 점차 많이 이용하는 방법으로 자리잡는 듯합니다. 가장 먼저 제시되었던, 애기살을 먼저 시위에 끼우고 그 위로 덧살을 덮어 끼우는 방식은 특별히 불편한 점이 없는데 속도가 약간 느리다는 생각을 하는지 지금은 많이 쓰지 않습니다. 이런 것도 생각하면 방법상의 변화나 발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효율성을 찾아서 여러 가지 방법이 취사선택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여러 고민이 비교 발전하다보면 우리는 조선 후기의 애기살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애기살은 외국으로 뻗어가서 로마 병사들이 애기살을 쏘았다는 황당한 주장들이 페이스북에 떠돌더군요. 이를 걱정한 성명무님이 학자들은 뭐하는 것이며 온깍지궁사회는 이런 일들에 대한 대책이 있느냐고 마치 추궁하듯이 따져서 제가 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즉 페이스북 같은 인터넷 매체에서는 저마다 연구하여 주장할 수 있으나, 그것이 정식 학계의 근거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냐, 원천 자료가 뭣이냐를 따진다면 답은 명확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개별 연구자들의 성과가 정식 학계의 인정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천 자료 기록자에게 메일을 보내서 그근거를 요구하라고 하면 답이 돌아올 것이라고 제가 답했습니다. 영어를 우리말보다 더 잘하는 성 명무는 페이스북에 그런 자료를 올린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원천자료 작성자에게 확인해달라고 요구하는 메일을 수십 통 보냈습니다. 호주, 독일, 프랑스, 스페인 여러 사람들에게 보냈던 걸로 압니다. 몇 달 뒤에 성 명무에게 제가 그 결과를 물었습니다. 한 놈도 답글을 보내오지 않았다고 말하며 웃더군요. 이런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애기살을 욕심 내도 그것은 개인 차원의 일입니다. 학계에서 그런 개인들의 농단에 맞장구쳐줄 리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의 학문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저는 학자들의 그런 양심을 믿습니다. 애기살에 관한 글을 추적하면 가장 중요한 원천 자료는 1999년의 <한국의 활쏘기>와 2002년의 <국궁논문집>이 될 것입니다. 우리 말로 쓰였다고 해서 외국의 학자들이 무시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나온 자료를 이용해야만 애기살을 자신의 것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만약 인터넷에서 그 이전의 자료가 나온다면 그 원천 자료의 저자에게 문의를 하면 됩니다. 로마 병사들이 애기살을 쏘았다는 주장은,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석궁에 대한 묘사를 오독한 것일 것입니다. 석궁에 대한 기록을 읽다보면 애기살 방법과 유사합니다. 그러니 그런 아마튜어 식 접근법에서는 로마병사들이 애기살을 쏘았을지 몰라도 실제 역사학에 수용되기까지는 수많은 절차가 있고, 그런 절차를 애기살이 통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애기살은 한국의 역사이니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역사도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같은 동양권인 중국과 일본에서 애기살 자료가 나와도 그것은 그들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전쟁사에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본측의 기록은 설령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도, 의미 없는 일입니다. 애기살은 우리 나라의 활에 최적화된 도구이기 때문에 일본 활에 갖다대고 쏠 수는 있겠지만, 실제 전쟁에 활용할 수 없습니다. 일본활의 사거리는 60미터 정도인데, 그 거리를 보내는 어설픈 활로 애기살을 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이미 조총 사거리 80보 때문에 일본 활은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왕조실록의 대화를 보면 임진왜란 전부터 애기살은 일본에 노출되었습니다. 부산의 왜인 거리에서 아이들이 애기살 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보고한 장계가 왕조실록에 있습니다. 그에 대한 방지대책을 내리라고 왕이 비답을 내렸다는 기록이 딸려있죠. 이런 것을 보면 벌써 애기살은 왜인들에게 노출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것을 활용하지 못한 것은,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일본 활의 한계 때문에 실용성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총의 사거리에 비해 그들의 활은 애기살을 쏜다고 해도 특별한 의미를 낼 수 없습니다. 실제로 왕조실록에는 애기살의 근원을 추적해보니 중국의 책이라며 그 근거를 중국쪽에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중국에서는 화약 때문에 오래 전부터 병기가 재편되는 중이었고, 애기살이 있다고 해도 화약 병기에 밀려 자리잡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천보를 날아가는 우리 활에서만 애기살이 의미를 얻는 것이고, 1894년까지 엄연히 무기체계로 존재했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을 생생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기살을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그 어떤 시도도 허황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애기살은 한국만의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다 살펴보니 애기살을 고조선의 역사까지 끌고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주로 국수주의나 민족주의 계열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데, 어림 없는 일입니다. 초기 기록은 고려 때쯤이고, 이것이 역사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것은 태조 이성계의 기록입니다. 그런 것들이 많았는데 기록이 안 된 것인지, 태조가 왕이기 때문에 기록에 유리,해서 그런 건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애기살의 위용은 주로 고려 말부터 시작됩니다. 이 부분은 연구를 좀 더 해서 밝혀야 할 부분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뜻 있는 분들의 참여가 절실한 분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해석은 그 위에서 필 꽃에 불과합니다.
애기살은 사라진 지 100년만에 부활하여 이제 발전을 위한 첫걸음을 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사실이 중요하고, 그런 사실을 똑바로 본 뒤에 어떻게 이것을 우리의 삶으로 문화로 승화시킬 것이냐 하는 고민을 해야 할 때입니다. 아전인수 식 주장이나 소설쓰기식 추정은, 기분은 좋겠지만, 결국 애기살 연구의 큰 장애로 작용할 것입니다. 올바른 정보를 생산할 수 있도록 앞으로 당분간 노력해야, 어렵게 되살아난 전통 문화 애기살이 먼 훗날 보무도 당당히 우리의 한 문화를 샛별처럼 빛나게 하는 존재로 살아있을 것입니다.(온깍지 활 공부, 2018)
*참고로, 애기살의 전통을 잇기 위하여 온깍지동문회에서는 편전대회를 매년 연다. (온깍지 활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