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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우리 궁궐 이야기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 - 19세기 중엽( 조선 순조 ) 때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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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은 단순히 임금만이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가장 으뜸이 되는 중심 공간이기도 하다는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임금이 나라를 상징하고, 나라를 대표했던 당대에 있어 그만큼 궁궐이 상징하는 의미는 각별하다
그러면 창덕궁이 포함된 조선 궁궐들은 어떻게 이어져 왔을까요?
조선왕조 518년의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조선의 궁궐도 수많은 역사적 부침을 거듭해 왔는데요.
조선 궁궐의 역사는 곧 조선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이번 회에서는 조선 궁궐과 창덕궁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조선 궁궐의 역사 - 경복궁에서 경운궁에 이르기까지
1392년에 고려(高麗)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 조선을 개창한 태조(太祖) 이성계는 재위 3년째 되던 1394년에 고려의 옛 수도인 개경(開京)에서 오늘날의 서울인 한양(漢陽) 으로 도읍을 옮겨 옵니다.
도읍을 옮겨 오면서 궁궐과 종묘(宗廟), 사직(社稷), 도성(都城) 등 조선이 앞으로 나라를 다스려 나가는 데 필요한 시설들을 건립하게 되는데 이때 처음 지어진 궁궐이 바로 경복궁(景福宮) 이었습니다.
태조때 처음 지어진 경복궁은
왕이 거처하는 연침 및 동서소침, 서소침, 및 왕의 집무실인 보평청 과 정전 등 모두 390여 칸에 달하는 규모로 당시 경복궁이라는 이름과 근정전(勤政殿), 사정전(思政殿), 강녕전(康寧殿),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 등 궁 내의 주요 전각의 이름은 당시 태조를 도와 조선왕조를 개창, 발전 시키는 데 앞장 섰던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에 의해 지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처음 지어진 경복궁에서
태조 7년이던 1398년에 태조의 첫 부인인 한씨 소생의 왕자인 정안대군 방원(후일 태종)이 왕자들을 제거하여 왕실에 역모를 도모했다는 구실로 정도전을 비롯한 일부 개국공신들과 태조의 둘째 부인 강씨 소생의 왕자인 방번과 세자 방석 형제를 제거하는 이른 바 '왕자의 난' 이 이 궁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골육상쟁 끝에 두 아들을 잃은 태조는
실의에 빠져 결국 둘째 아들 방과를 세자로 세웠다가,
얼마후에 세자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 그가 바로 2대 정종입니다.
하지만 정종은 골육상쟁이 나는 한양에 머무르는 것을 꺼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고려의 옛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갔고, 이 바람에 한양은 다시 빈 도시가 되어 당시 기록에 '한때 호랑이가 경복궁 근정전에 까지 드나들었을 정도' 였다고 하니 (정종실록), 얼마나 살벌한 도시가 되었는 지는 이 기록 내용만을 보더라도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황폐화되어가던 한성이
다시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정안대군이 3대 태종으로 즉위하면서부터입니다. 태종은 부왕 태조의 뜻을 이어받아 재위 5년이던 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재 천도하게 됩니다.
한양으로 재천도하게 되면서 경복궁을 수리하게 하고 새로 향교동이라는 곳에 새로운 궁을 짓게 되는데,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둘러보게 될 창덕궁(昌德宮)입니다.
즉, 정궁(법궁)인 경복궁에 대칭하여 동쪽에 창덕궁이라는 이궁을 세웠던 것입니다.
태종때 지어진 창덕궁의 규모는 경복궁에 비해 규모는 작았으나, 경복궁의 법도에 따른 일직선 배치에 비해서는 다소 자유롭게 배치 되었습니다.
태종은 경복궁 보다는 주로 이 궁에서 머무르게 되는데,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 끝에 오른 왕위가 다소 걸려서 인지 경복궁 보다는 창덕궁에 머무는 것을 더 즐겼다고 합니다.
창덕궁에 머물던 태종도 때때로 경복궁으로 옮겨오면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는데,
태종 12년인 1412년 경회루를 크게 증축하고 명당수를 파도록 명했다는 기록 (태종실록) 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종도 경복궁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종의 뒤를 이어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이 태종의 결단에 의해 4대 세종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한 세종은
곧 창덕궁으로 옮겨 왕위를 물러난 부왕을 위해 창덕궁 옆에 새로 수강궁을 짓고
자신은 창덕궁에서 머물며 정사를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나 태종이 승하한 이후 세종은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번갈아 옮겨 들기는 했지만 세종 32년의 업적은 대부분 경복궁에서 이루어 집니다.
또한 태조때 작게 지어진 경복궁의 규모가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도 바로 이 세종때였습니다.
따라서 경복궁이 크게 발전한 시기는 바로 세종때라고 할 수 있으며,
세종은 경복궁을 무대삼아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렸던 것입니다.
9대 성종때에 이르게 되면
당시 생존해 있던 할머니, 양어머니 (작은어머니), 어머니 등 세 분의 왕실 어른을 위해
세종때 지어진 수강궁 건물들을 크게 넓혀서 새로운 건물들을 짓고, 창경궁(昌慶宮) 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이때 지어진 창경궁은 때에 따라 창덕궁을 보조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며,
경복궁이 북쪽에 있는 궁궐이라 하여 북궐이라 불렸다면,
창덕궁과 창경궁은 그 동쪽에 위치했다 하여 동관대궐, 혹은 동궐이라고도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14대 임금이던 선조 25년이던 1592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은
우리나라, 중국, 일본등 동북아 3국이 많은 피해를 입혔던 당대의 큰 국제 전쟁이었습니다.
이때의 전란으로 인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등 궁궐 모두가 불에 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593년 의주에서 돌아온 선조가 당시 정릉동에 남아 있던 월산대군(성종의 친형) 사제에 머무는데 이 월산대군 사제가 임시 궁궐 역할을 시작하게 됩니다.
광해군때 경운궁(慶運宮) 이라 불리우다가 오늘날 덕수궁 (德壽宮)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는
이른 바 정릉동 행궁이 그것 이었습니다.
임진왜란때 불에 타 없어진 궁궐들은 대부분 광해군때 중건됩니다.
그러나 경복궁만은 많은 경제적 부담이 들어가는 데다 풍수지리상 이롭지 못하다는 반대 의견이 있어
이후 273년 뒤인 고종때 중건될 때 까지 빈 궁궐터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복궁을 대신하여 이후 정궁으로 사용되던 곳이 창덕궁이었습니다.
또 창덕궁, 창경궁 중건 이외에도 광해군때는 경덕궁(경희궁) 과 인경궁이 지어지게 되는데, 경덕궁은 이후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어 창덕궁 및 창경궁 (동궐) 에 대칭되는 서궐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우며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그후 고종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 경희궁등 이른 바 5대 궁궐이 갖추어 지게 되지만,
1896년 이후 고종은 경운궁에서 머무르며 혼란했던 당대의 역사들을 지켜보게 됩니다.
1910년 국권이 일제로 넘어가게 되면서 궁궐은 일제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거나 훼손당하는 수난을 겪게 됩니다. 1915년의 조선 물산 공진회를 개최하면서
경복궁의 많은 전각들을 훼손하고
1917년 창덕궁 화재때 경복궁 내전 건물들을 모조리 뜯어가는 가 하면
1926년에는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짓기까지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창경궁은 동, 식물원을 조성하여 창경원이라 격하하였고,
경희궁은 아예 건물 전체를 전부 없애 그 흔적마저 찾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좀처럼 제 모습을 되찾지 못하던 궁궐은
1983-86년 창경궁의 복원과 1990년대 경복궁 복원 사업을 계기로 더 활발한 복원과 보존 작업이 전개.
그러나 이러한 복원도 중요하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궁궐 유적이 더 이상 파괴되고 훼손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의 주의와 관심은 더더욱 중요하다는 데 있습니다.
19세기 수선전도에 나타난
조선시대 5대 궁궐의 모습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중에서
역사 속의 우리 궁궐 이야기 창 덕 궁
창덕궁 인정전 - 선정전으로 연결된 회랑 (선정전쪽에서 인정전쪽을 향해 촬영한 것임)
1392년 7월,
고려를 대신한 태조 이성계의 조선왕조 개창과 더불어 조선 궁궐의 역사도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왕조 역사와 더불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등 오늘날 우리가 5대 궁궐이라고 불리우던 궁궐들이 역사적 흐름 속에 잇달아 세워지면서 조선의 역사와맞물려 궁궐의 역사도 건립과 화재 소실, 그리고 중건이라는 부침의 순환을 거듭한 채 오늘까지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둘러볼 창덕궁의 역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창덕궁의 역사 (상)-
창덕궁에 대해 일제시대 사학자인 호암 문일평 선생(1888-1939)은 일찍이 창덕궁의 특징에 대하여
1. 조선왕조 초기의 건물인 돈화문이 유지되고 있고,
2. 후원과 같이 서울 제일의 심오하고 아름다운 대 정원을 가지고 있으며,
3. 궁궐 규모가 굉장히 화려하며.
4. 각 시대의 새 건물 및 옛 건물이 들어서 있고,
5. 궁궐 제도가 그대로 구체적으로 남아 있으니
자랑거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호암전짐 3권 (고건물 순례) 편-
이처럼 아름다운 건축이자 궁궐로 손꼽히는 창덕궁은
조선이 생긴 이래 두 번째 궁궐로 정궁, 즉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건립됩니다.
창덕궁이 처음 지어진 정확한 시기는 조선 3대 태종 5년이던 1405년 음 10월 19일의 일이었으며,
지금의 창덕궁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그보다 약 1주일 뒤인 10월 25일의 일이지만 왕자의 난과 같은 골육상쟁의 비극을 꺼렸던 태종의 뜻에 의해 지어졌다는 사실을 지난 회에 우리는 조선 궁궐의 역사에서 살펴 본 바 있습니다.
어쨌든 이때 지어진 창덕궁의 크기와 규모는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 기록을 보면 당시 창덕궁의 규모가 어떠했는 지 확인할 수 있습
(태조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 ?
창덕궁이 완공된 그 이듬해인 1406년인 태종 6년 4월에는 후원에 광연루 라는 누각이 건립되었고,
1411년인 태종 11년에 진선문과 그 안의 돌다리인 금천교가 들어섰으며,
정문인 돈화문이 지어진 것은 다시 그 이듬해인 태종 12년인 1412년의 일이었습니다.
창덕궁이 완성되자 태종은 줄곧 이 곳에 머물며 나랏일을 보았고,
때에 경복궁으로도 옮겨 들며 나랏일을 보는 등 필요에 따라 옮겨 드는 궁궐로 이용됩니다.
태종은 큰 비극을 겪은 끝에 왕위에 올랐기에 선뜻 경복궁에 머무르기가 꺼림칙 했던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태종의 다음 임금인 4대 세종 원년인 1419년에는 창덕궁 정전 3간을 헐고
그 자리에 정면 5간, 측면 4간의 큰 규모의 건물을 짓고 이름을 인정전이라 하였습니다.
세종은
경복궁에서 즉위하였으나,
부왕인 태종께 수시로 문안을 드리면서 나랏일을 보살피고자
창덕궁으로 옮겨왔고,
부왕 태종을 위해서는 창덕궁 옆에 수강궁이라는 별궁을 짓고
수시로 문안 드리면서 나랏일을 돌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창덕궁보다는 경복궁에 주로 머물렀습니다.
이후로 줄곧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면서 나랏일을 돌보기는 하였으나,
세종 재위 32년 동안의 조선 발전의 중심지는 뭐니뭐니해도 경복궁이었습니다.
경복궁에서 주로 훈민정음 창제와 같은 커다란 사실들이 벌어졌기에
창덕궁에서는 이렇다 할 사실들이 없었으며,
다만 세종이 창덕궁에 머무를 때에는 주로 광연루를 즐겨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태종 - 세종 연간을 거치면서 궁궐의 시설을 갖춘 창덕궁이었지만,
세조때 들어서면서는 여러 전각들의 이름이 지어지게 됩니다.
즉, 궁궐의 규모나 시설등은 갖추어졌지만, 정작 이렇다 할 이름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세조 7년이던 1461년에 들어와 붙여진 각 건물들의 이름들을
세조실록 및 궁궐지를 토대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조계청(보평청 으로 임금이 나라일을 돌보던 편전임)을 선정전(宣政殿)이라 하고,
그 뒤편의 동별실을 소덕당(昭德堂) 이라 하였으며,
서별당은 보경당(寶慶堂) 이라 하였다.
또한 정당, 즉 내전의 정침은 양의전(兩儀殿 - 훗날 대조전(大造殿)으로 이름이 바뀜)
그 동서쪽 침실을 여일전(麗日殿)과 정월전(淨月殿) 이라 하였으며,
그에 딸린 다락은 징광루(澄光樓)라 하고,
동서쪽 별당을 응복정(凝福亭)과 옥화당(玉華堂),
그에 딸린 다락을 광세전(光世殿) 이라 하였으며,
광연전 별실은 구현전(求賢殿) 이라 하였다.
세조때 각 전각의 이름이 붙여지고
그 2년 후인 세조 9년 (1463) 2월에는 창덕궁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고자 주변 민가들을 옮기도록 하였으며,
이때의 면적은 약 20만 3769평이었다고 합니다.
세조때 확장된 창덕궁은
계속해서 성종이 경복궁을 대신하여 이곳에서 나랏일을 보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대비를 위해 창경궁이 건립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으며,
창덕궁엔 별도로 예문관 대제학으로 있던 서거정에게 명하여 창덕궁에 딸린 문마다 이름을 둘씩 지어서 바치게 한 다음 직접 일일이 낙점하여 문액을 써서 달 게 하였는데,
이때가 성종 6년이던 1475년 음 8월 24일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단봉문(丹鳳門), 숙장문(肅章門), 금호문(金虎門) 등과 같은 많은 문의 이름들이 이때 지어져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불리워 오고 있습니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 역시, 창덕궁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자신의 향락을 즐기기 위해 후원쪽에 새로 서총대라는 놀이터를 짓고, 그 주변을 크게 넓히기 까지 하였습니다만, 중종 반정으로 인해 폐출되어 창경궁의 선인문 쪽으로 쫓겨나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후 중종때부터 선조 25년인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전까지
역대의 임금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번갈아 오가며 나랏일을 돌보지만,
창덕궁이 경복궁보다 더 많이 애용되었습니다.
왕자의 난이라는 골육상쟁의 발생지,
풍수지리설의 문제점과
경복궁 터전의 위치와 배치가 너무나 위압적이라는 점에서
역대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자연적이고 아름다운 후원을 지닌 창덕궁을 주로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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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성정각
희정당 동쪽에 있는 성경각은 본래 동궁전의 일원으로 세자가 학습을 하던 교실로 사용하던 곳이다.
그러나 1917년에 창덕궁에 화재가 발생하자 당시 순종황제가 연경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고
일제는 이곳을 자기 마음대로 내의원으로 사용하게 된다.
창덕궁 승화루와 삼삼와
성정각과 더불어 창덕궁의 동궁전 일원이었던 승화루와 삼삼와이다.
삼삼와는 기록에 의하면 세자가 공부를 할 때 필요한 서적을 보관하던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이곳 승화루는 일제시대 조선왕실이 감시를 당할 때 경찰 건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창덕궁 부용정
부용정은 특이하게도 기둥 두 개를 부용지에 만들어 놓아 엉덩이는 땅에 대고 두 다리를 연못에 담근 형상을 하고 있다. 부용정은 열십자(十) 건물로 북쪽이 다른 곳보다 한 단 높게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 앉아 젊은 선비들이 도량을 닦고 있는 주합루쪽을 바라보는 풍광은 그림같았을 것이다. 특히 왕에게 충성하는 믿음직한 젊은 관료들이 공부하고 있는 주합루를 바라보면 마음마저 든든했을 것이다.
창덕궁 사정기비각
부용지는 본래 땅 속에서 물이 솟아 난다고 합니다. 세조 때 우물을 네 개를 팠는데, 세월이 가면서 말라버리고 두 우물만 남았다고 합니다.
이후 숙종 16년(1690)에 두 우물을 수리하게 하고 그러한 연유를 비에 새겼다고 하는데, 그 비가 바로 부용지 서쪽에 있는 사정기비입니다.
창덕궁 부용지 이무기
사람들에 따라서는 용이라 하기도 하고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용지 남쪽에는 돌에 새긴 물고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
어변성룡'이라고 물고기가 변해서 용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곳 부용지 동쪽에 있는 주합루가 그 어렵다는 과거에 합격하고 조선을 이끌어나갈 관리들이 공부하는 곳입니다.
흔히 과거 급제를 등용문이라 하는데, 잉어가 용이된다는 뜻이죠, 그만큼 힘들고 어렵다는 이야기인데, 정면에 물고기(과거를 보러온 젊은 선비를상징)가 표현된 것을 보면 용으로 볼 수도 있으나 용이라고 하기에는 입 모양이나 눈의 위치, 지느러미 등이 석연치 않은 점도 있습니다.
창덕궁 주합루 어수문
부용정 남쪽에 새겨진 잉어
등용문이라는 이야기는 잉어가 용으로 변해 하늘로 승천한다는 것으로 과거 합격을 이루는 것이 그만큼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 규장각으로 사용하던 주합루 앞 부용정에 잉어가 새겨진 것은 이런 뜻을 담고 있으리라
창덕궁 영화당 앞 해시계(앙부일구)
앙부일구는 하늘을 쳐다보는 솥 모양의 시계란 뜻으로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데 솥 주위에 24절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는데 일년 내내 같은 각도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계절에 기울기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 기울기를 고려하여 과학적으로 만든 시계가 바로 앙부일구입니다.
창덕궁 주합루
창덕궁 영춘문
창덕궁 후원과 불로문 앞에 있는 영춘문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오고가는 통로 역할을 하던 문이다.
창덕궁 애련정
창덕궁 연경당
창덕궁 연경당 선향재
창덕궁 승재정
반도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숲속에 자리한 승재정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없으나 동궐도에 보면 초가지붕 형태의 정자가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반도지를 내려다보며 휴식을 취하거나 독서를 하던 곳으로 생각된다.
창덕궁 관람정
창덕궁 폄우사
반도지 위에 있는 폄우사는 순조의 큰 아들인 효명세자가 독서를 한 곳이라고 한다.
창덕궁 존덕정
앞에는 반도지를 뒤로는 반월지를 끼고 있으며, 특이하게도 지붕이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답사를 가면 항상 시간에 쫓겨 여유를 가지고 유물을 바라보지 못하고 서둘러 구조만 보고 사진을 찍고 발길을 돌리던 것이 본래 제 모습이었습니다.
창덕궁 취규정
창덕궁 취한정
창덕궁 소요정
창덕궁 옥류천 청의정
창덕궁 옥류천 태극정
창덕궁 옥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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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추석한가위..늘 만나도 반가운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 나누셨는지요?
잠깐 들렀다가.. 창덕궁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놓고 있네요.. 마냥 머물러있고만 싶은데..
미영샘! 창덕궁에서 수습동안 서로 협조 이해하고 고생했듯
계속 선배들과의사회생활중 제게 허점 등을 보시면 지적 부탁합니다
모범된 샘의 인간관계를 배우고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