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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주몽은 오이 , 마리, 협보와 함께 엄사수를 건너 갔다.
주몽이 드디어 모둔곡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마의를 입고 한 사람은 납의를 입고 한 사람은 수조의를 입었다. 마의를 입은 사람은 극재사, 납의를 입은 사람은 중실무골, 수조의는 소실묵거라고 하였다.
이 들과 함께 졸본천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다.
이 극재사의 아들이 고구려의 제위에 오르면서 또 하나의 태조가 되는 것이다.
부의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이 있듯 이 모든것은 영고탑에서 발원되었다.
영고탑은 신강 위구르에 우뚝 솟아 있는 천산산맥에 존재하였다.
천산산맥을 둘러싼 거대한 지역이 부여의 영역이었고 이곳에는 지금까지 영고탑과 관련된 지명이 살아 숨쉬고 있다.
천산산맥 주변의 지명들을 살펴 보면 탑성시(영고탑의 도시라는 뜻) , 탑리목 분지(영고탑이 나무 숲와 같이 무수히 솟아있는 분지), 타지키스탄(탑의 나라, 국가명이 영고탑을 의미하고 있다.), 타크라마칸 塔克拉瑪干 사막(영고탑 지역이 주몽과 함께 고구려를 건국한 극재사를 기리는 극랍마의 克拉瑪依 즉, 마의를 입은 자가 극재사라는 기념비적인 지명이다.)
등 각각 탑의 도시, 탑이 나무처럼 무성한 분지, 탑의 나라, 탑의 사막이란 뜻임을 헤아려 보면서 이 곳이 고구려의 발상지임을 고증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가 영고탑을 계승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표시하고 있다.
이 사람 克再思는 麻衣를 입고 주몽을 만난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타크라마칸 사막의 한자어가 塔克拉瑪干이고 克拉瑪依(마의를 입은 사람이 극재사라는 뜻)라는 도시도 있다. 克이란 지명이 이 지역의 특성이다.
타크라마칸 塔克拉瑪干 - 극납마의를 입은 자가 극재사이며, 이 극재사의 아들이 고구려 6대 태조무열제임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였고, 이 지역이 극재사 가문의 본 고향임을 세상에 알리었다.
융무 3년 2월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병을 방비 하였다.
그 10개의 성은
첫재, 안시는 개평의 동북 70리에
둘째, 석성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세째,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에
네째, 건흥은 난하의 서쪽에
다섯째, 요동은 창려의 남쪽에
여섯째,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에
일곱째,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여덟째,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에(옛 요동국이라함)
아홉째,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열째, 요택은 황하의 북안 왼쪽에 있었다.
또, 5년 봄 정월엔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았다. 고 했다.
위에 지도와 함께 설명했다. 이 요하가 황하임을 증명하였다.
융무 4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하여 그 땅을 성읍으로 삼고 지경을 개척하여 동으로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 살수에 다달았다.
이곳 창해는 한반도와 연해주 동쪽으로 우리민족의 영원한 동해이다. (지금도 동해니 일본해니 싸우고 있다.)
이때 남쪽 경계인 살수는 한나라와 국경 분쟁을 치루고 있었는데, 황하의 상류인 오르도스 지역으로서 현재의 지명은
寧夏회족자치주인데 우리 고려사 지리지에 분명히 寧州라고 기록 되어 있다. 이 곳에서 황하에 합류하는 지류의 이름이 살수이다.
현재 지명은 청수하로 불리우며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고 한 갈석산을 지나 흐르는 강이다.
역사 지명 -고려사 지리지- 참조 .
융무 7년 4월에 제가 고안연孤岸淵 에 가서 어조를 구경하다가 붉은 날개달린 백어를 얻었다.
융무 10년 8월 나라 남쪽에 비황이 생겨 곡식을 해쳤다.
이 기사는 고구려가 대륙에 존재하였다는 증거중의 하나 인데 한반도는 황충의 피해가 있을수 없는 지형이다.
이 孤岸淵 은 어느 곳의 호수일까? 석가가 설 하셨던 孤獨園에 있던 호수일까?.
다음은 조선중기 선비인 권필의 시집 석주집 7권에 나오는 귀절이다.
바위 가에 작은 그물을 물속에 던지니
가을이 오매 자린이 살찐게 참으로 좋아라 자린 ; 붉은 물고기의 비늘
돌아올 때는 언제나 석양이 다 질 무렵이라
안개낀 물가의 길에 옷은 비에 흠뻑 다 젖는다.
만다화 꽃비가 급고원에 내리니 급고원 ; 기수급고독원
그중에 선가의 불이문이 있어라
어이하면 일신의 일 떨쳐버리고
산사에서 향피우고 조석을 보낼꼬
융무16년 8월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나라를 들어 내항했다.
20년 관나부 패자 달가를 보내 조나를 쳐 그 왕을 사로잡았다.
22년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쳐 그 왕자 을음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
조나는 藻나라, 주나는 朱나라 이다.
연나는 연나라 이다. 이 기록은 한나라 이전의 춘추전국시대의 조나라 땅, 주나라 땅을 점령했다는 기록이다.
한나라의 땅이 점차 좁아지고 있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다음 지도는 춘추 전국시대에 고조선의 세력이 약해 졌을때 열국들이 생겨나와 혼란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그들을 통일했다는 진시왕의 나라 영역이다. 진시왕은 한의 장량의 공격을 받는등 쫒기다가 2대만에 멸망하고 초나라 항우에게 승리한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지만 그 영역이 고구려의 막강한 무력에 밀려 춘추전국시대보다 형편없이 줄어 드는 것을 볼수 있다.
다음 지도는 춘추전국시대 지도이다.
융무 46년 제가 동쪽으로 책성을 순수할때, 책성의 서쪽 계산에 이르러 백록을 잡고, 책성에서는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하고, 책성을 지키는 관리를 포상했다. 드디어 산석에 공을 새기고 돌아왔다.
50년 8월에 사람을 보내어 柵城을 안무하다.
산상제21년 기록에 " 한의 평주사람 하요가 백성 1000여호를 이끌고 의탁해 오니, 제는 이를 책성에 안치하였다." 는 기록을 보아
平州는 晉나라때 幽州 였다 하니, 유주는 지금의 북경부근으로 옛 우북평이 그 곳이다.
53년 제께서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에 들어가 6현을 탈취하였다.
한의 요동태수 경기가 맥인을 격파하였다.
이 시기는 후한 4대 화제 (88~ 105년)때로 그는 10세에 황제가 된 인물인데 이때부터 후한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55년 9월 제가 質山 남쪽에서 사냥을 하여 자색 노루를 잡았다.
57년 정월 한나라 안제(105~ 106)의 원복 대착식에 사신을 보내다.
안제는 후한 5대왕 유융으로 2년도 채 왕위에 앉지 못한 위인이다.
59년 3월 제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를 쳐 이를 군현으로 삼았다.
62년 8월 제께서는 남해를 순수하시고 10월에 남해에서 환도 하셨다.
이때 고구려는 동쪽으로 한반도 북부 지역을 완전히 확보하고, 지금의 훈춘지역인 책성에 기공비를 세웠으며 남으로는 청해성일대를 장악하고 고구려의 남해라 불렀으며, 백제와는 한수를 경계로 하였고, 동남으로 후한을 압박하여 하북성 일대인 현도를 장악하고 후한을 황하 이남으로 꼼짝도 못 하도록 눌러 놓은것을 알수있다.
< 한원>에 의하면 " 현도는 무제 원봉 4년(BC107)에 열렸다. 유주에 속한다. " 고 하였으니 지금의 북경유역을 말한다.
사실 이 시기에 한나라는 고구려의 후원아래 연명하던 한낫 제후국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기 부터 수나라, 당나라가 등장 할 때까지 대륙은 온통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의 판도였던 것이다.
이때 한나라가 멸망하면서 낙양땅에 생기는 나라가 바로 신라이고, 낙양성이 금성이며 동도이고, 장안이 서경이 된다.
66년 6월에 왕이 예맥과 더불어 한의 현도를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이곳 화려성의 위치는 지금 북경일대를 華北지방이라고 하니 북경인 현도군을 지나 더욱 남쪽으로 한나라를 밀어 부친것을 알수 있다.
8월에 소사에게 명하여 현량( 올바른 선비 )과 효순 ( 효자) 을 천거하고. 환(홀아비), 고(고아), 독(무자식)과 연로자로 무능한 이들을 탐방하여 의식을 베풀었다.
69년 봄에 한의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하여 예맥의 거수를 격살하고 병마와 재물을 빼앗았다. 왕이 아우 수성을 시켜 군사 2천을 이끌고 풍환과 요광을 영격할 때, 수성은 거짓항복으로 한군의 진영을 속인후, 험한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는한편, 군사 3천을 보내 그들의 본거지 현도, 요동 2군을 우회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명을 살획하였다.
4월에 열제께서 선비 8천명을 데리고 요대현을 공격하니,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에서 싸우다 죽었다. 이때 그의 수하 공조연 용단과 병마연 공손포는 스스로 풍을 위하여 막다가 함께 몰진하고 죽은자가 100여명이었다.
이 상의 기사에서 이때의 고구려의 무력의 막강함이 들어 난다. 고구려의 계속된 압박에 한나라는 전력을 다해 반격을 해 보았지만 도리어 그들의 성이 불타고 그 성주까지 몰진하고 말았다, 또한 고구려는 선비를 수족같이 부리고 있음을 알수있다.
또한 이 기사에는 중요한 정보가 들어있다.
濊貊의 渠帥 - 유라시아 제국사의 기사에 의하면 이때의 거수를 신강 위구르의 고성과 투루판의 王이었다고 고증해 주고있다.(유라시아 유목제국사 92쪽, 96쪽-사계절출판-)
유라시아 제국사의 기사를 옮겨보면,
서기 74년 후한의 경병과 두고가 투르판을 공격할때 그 곳은 두개의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동일한 왕가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투루판 인근의 남거사와 천산 건너편 기슭의 고성 방면에 있던 북거사였다.
" 북방의 몽골리아에서 두헌과 경병이 북흉노에 대하여 큰 승리를 거두자 북과 남의 거사(고성과 투르판)의 두 왕은 즉시 중국과 관계를 재개했다. (서기 89~ 90년)
이 기사에서 한의 유주자사 풍환등이 공격했던 예맥의 거수가 신강위구르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신강지역의 고구려는 즉시 왕의 아우 수성을 시켜 반격한 것 을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있다. 고구려는 신강위구르 지역을 중심으로 제국을 형성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해주는 기사이다.
(권제 15 고구려국 본기 제 3 -삼국사기 363쪽- )
10월에 열제께서 부여에 행행하시어 태후묘에 제사하고 곤궁한 백성을 위무하였다.
열제의 모후가 부여인 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제 26년(서기 667년) 고구려가 마지막 전투를 벌일때 당장 이적이 고구려의 서변 요새인 신성을 공격할때, 또 다른 당의 장수 고간은 金山에서 고구려군에게 대패하였다.
그 다음해 ( 668년) 또 당이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당의 장수 이적이 고구려의 부여성을 공격할때, 설인귀도 고구려군을 금산에서 격파하고 그 기세로 부여성을 함락시키니 부여강 주위의 40여성이 항복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곳 金山이 바로 우랄알타이 산맥을 말한다. 지금 지도에 우랄 알타이 산맥을 阿爾泰山, 기련산 서쪽에 있는 산을 阿爾金山이라 표기하고 있다.
고구려의 서쪽 강역이 신강 위구르임을 증명하는 지명이다.
이 곳이 고구려때 부여성이 있던 곳이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저호의 구( 자색 여우털 의복) 와 백응, 백마를 바치니 잔치를 하여 보냈다.
12월에 열제는 마한, 예맥등과 함께 1 만여기를 거느리고 가서 현도성을 에워 싸니 북부여 왕이 아들 위구대를 시켜 군사 2만을 데리고 한을 도왔다.
북부여는 대무신열제5년(22년) 대소왕이 괴유의 칼에 죽은후 고구려에 항복,
도읍의 백성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에 안치 하였는데 등에 문자가 있다하여 낙씨의 성을 하사했다. (하도 낙서는 우리 민족의 역사 기록이다, )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에 이르니 바로 연나라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의 명치 갑술(494년)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 마저 끊겼다.
고 했으니 이 시기에 한나라를 도와 고구려를 견제 하려 했음을 알수 있다.
70년 열제는 마한 예맥등과 더불어 요동을 공략하니 부여왕이 원병을 보내 현도군을 구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마한은 다음기사에 나오는 중마한이다.
정미 원년(-194)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 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 위만에게 패하여 바다로 들어 가더니 돌아 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이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르켜 중마한이라고 한다. 이에 이르러 변,진한의 두 한도 각각 자기들의 각 영토를 가지고 수도를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오래도록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도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 번조선왕 기준과 탁의 무리들은 서로 다른곳을 향해 가는데, 기준은 양자강 이남 동정호 부근의 익주 <고려사 지리지의 금마군 익주 - 지금의 장가계>에서 마한국을 건국하는데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게 망한다.
또한 한 무리 의 오가들은 대장군 탁의 고향인 월지로 가는데 이 곳이 대륙의 감숙성 돈황 지역이다. 이 월지는 마한이란 이름으로 고구려에 복속되는데 일부는 다시 아프카니스탄과 우즈벡 지역으로 가서 대월지국을 세우는데 후에는 쿠샨왕조가 된다고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인터넷 검색하면 (쿠샨왕조-서기 105년-250년경 카스피해에서 아프카니스탄, 타지키스탄을 지나 인도 갠지즈강 상류까지 대제국을 이루는데 월지민족이 건국하였다.)라고 나와있다.
또 다른 마한과 변한의 무리들은 천산유역과 청해성, 내몽고등에 여러 군소 국가를 이루는데 옥저, 낙랑, 말갈, 숙신, 여진, 읍루, 물길, 오손, 쿠차, 고창, 거사, 훈, 강거, 색, 사카등으로 동 서양의 학자들이 부르고 있다.)
90년 9월에 환도에 지진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의 유적지를 발굴한 것을 보면 지진에 의하여 묻혀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우리 고구려의 유적도 이 곳 신강 위구르지역의 땅 속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94년 8월 열제는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부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군의 처자를 약득 하였다.
이 시기의 기사를 보면 한은 부여와의 도움으로 서안평현의 대방군, 낙랑군등을 회복하여 국력이 신장된것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