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학 40년의 역사와 우리의
미래
송 국 범
Ⅰ. 설립자의 생애와 교육 사상
설립자 정계훈은 1936년 1월
15일 충남 연기군 서면 봉암리 435번지에서 부친 정동준과 모친 윤정숙의 둘째 아들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3살
되던 해에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자가 된다. 6살까지 일어나지 못하는 중증 장애아였지만 외조모와 어머니 가족들의 헌신으로 간신히 걷기시작 한다.
어린 정계훈은 그 모습이 너무 싫어서 학교에 제일 일찍 등교하고 제일 늦게 하교하는 학생이 된다.
그 후 정계훈의 삶을 바꾼
사건은 아산군 영인면 영인 산에서 박재봉 목사가 인도하는 5일 동안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하느님의 준엄한 목소리를 듣게 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탈바꿈 된다. ‘육체적인 장애자라 하여 정신적인 장애가 되어 살아야 되겠느냐. 일어 서거라’ 이 한마디의 음성으로 밝은 삶으로 새 삶을
산다.
이 때 어린 정계훈은 하느님과 두 가지 약속을 한다. 첫째는 장애자로 태어나서 국방의 의무를 못하는 대신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의 의무를 충실히할 것과 둘째. 하느님을 일생 동안 섬긴다는 다짐을 한다. 이때부터 오늘까지 한 번도 이 뜻을 거스르지 않고 이행하고 있다.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하느님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설정해 나가고, 틈만 나면 야학을 통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훌륭한 교사가 되었다. 상록수 저자
심훈의 조카 심재영와 더불어 상록학원에서 농어민들을 위해 교육하고 서울에서 구두닦이 소년들을 모아 가르치는 등...첫 부임지로 대산 명지교회로
부름 받고 이곳에서도 목회와 교육을 동시에 하는 교역자가 되었다.
1974년 팔봉 어송교회로 부임하면서 너무도 안타까운 현실을
발견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대다수 학생들이 농촌에서 일을 하는 사실을 알고 이들에게 중학과정을 가르치는 작업에 들어간다. 배움에 갈증을 느낀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와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던져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위기가 닥쳐온다. 교회 측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교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것을 주문한다. 고심 끝에 학교를 선택한다. 그것은 학교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하느님의 진리를 가르친다면 처음 하느님과
약속한 두 가지 의무를 다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하기 위해서 함석헌 선생을 찾아가 좋은 말씀을 부탁했을 때 선생님은
‘선생은 가르치는 자요, 본을 보여주는 자요, 감화를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감화를 줄 수 없는 선생은 진정한 스승이 될 수
없다고 늘 말한다.
정계훈은 사회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주도적 역할을 한다. 1993년 서산에 YMCA를 창립하여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고 현재도 이사장으로 활동한다. 아마도 그의 교육사상은 중학교 때 허윤 선생님, 대학에서 이호빈 목사, 함석헌 선생으로 이어지면서
확고한 바탕이 마련되었고 교육 현실을 통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본다.
Ⅱ.
초창기
1966년 4월1일 웨슬레 중등구락부를 개교 한다. 많은 학생들이 올 것이란 희망은 학생 4명이 온
가운데서 초라한 개교식을 맞는다. 선생 7명에 학생 4명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이화학당은 2명가지고 시작했는데 우리는 그 배를 주었으니
감사한일이라고 감사예배로 개교를 맞은 팔봉중학교는 이튿날부터 학생들이 밀려와 40여명의 학생으로 늘어나면서 희망으로 부풀어 오른다. 1968년
고등공민학교로 승격 되고 설립자 정계훈 선생이 초대교장으로 취임 한다. 1971년 중학교 인가를 받기까지 배출된 인원은 274명이
된다.
중학교로 인가를 받고 보니 또 다른 아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등공민학교는 교사 자격증이 없어도 실력이 있는 사람을
선생님으로 채용할 수 있었는데 정식 중학교로 인가를 받고 보니 자격이 없는 상당 수 교사들이 떠나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중학교 인가를 받고
시달린 고통은 또 있다. 지역사회에서 과연 팔봉중학교를 보내야 하느냐 마느냐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잠재우기 위해서 온몸을 던진 교사들의
헌신에 의해서 고등학교 입시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며, 수석합격자가 연이어 나오는 사태로 지역의 명문으로 발돋움
한다.
초대교장에 부임한 구태성교장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점점 많아지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을 보완하고, 학생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학부모와의 밀접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전교생 가정방문을 매년 제도화 하고 1974년부터는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신뢰가 있어야 하며
정직한 사람만이 시 사회를 밝게 할 사람임을 강조하며 무감독 고사를 시행하기에 이른다. 또한 설립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활동으로 목사님을 초빙하여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도입하기도 했다.
선생님들의 월급 또한 미흡해서 선생님들의 이동 또한 빈번한 상황에서도 학생들에게 피해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며 초석을 다지는데 모든 역량을 다 쏟아 부었다.
Ⅲ. 안정과
성장기
1981년 4월2일 2대 교장으로 문국모 선생님이 취임 하면서 변화의 속도가 가속화 된다. 80년을
기점으로 학생 수도 900여명이 넘는 양적 팽창과 교직사회의 안정적 분위기, 그동안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명문학교로의 부상 등이 겹치면서 각종
아이디어가 분출 되면서 활발한 교육활동으로 이어진다. 꿈. 사랑의 날 운영(1980), 주인 없는 상점 운영(1980),자주의 날(1981),
자유토론(1981), 창학이념 수련(1982), 중학신문발행(1982), 학생회장 직접선거(1982)등을 통하여 공부벌레에서 참여하고 활동하는
무대로 이끌어 균형 잡힌 인간상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사회적으로는 교육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우리학교
전인순(국어) 교사가 민중교육지(1985)에 학생작품을 실었다는 이유로 해직되는 아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선생님의 입장에서 끝까지 고민하는 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86년 10월 6일 3대교장으로 김상순 교장이 취임한다. 안정과 화합을 중시하면서 그동안의 훌륭한
교육활동들을 더욱 내실을 다져나가는 작업에 치중하게 된다. 교육민주화의 물결로 희생되었던 전인순교사를 충남에서 1호로 받아드리는 용단을
발휘했고, 이후에 계속되는 교육민주화를 부르짖는 진보와 보수의 와중에서 학교를 안정적으로 이끌기 위한 노력이 많은 공감을 불러 오기도 했다.
1987년 수학여행에서 불의의 사고로 흔들릴 때 온몸을 던져 수습하는 모습으로 존경을 받았다.
Ⅳ.
전환기
1991년 3월1일 4대 교장으로 이길환 선생님이 부임한다. 90년대부터 농어촌 인구의 급속한 감소로
500명 이하로 줄기 시작하면서 가속화를 예감하고 있었다. 또한 사회, 경제적인 향상과 교육 과열 현상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시기였다.
여건이 좋다고 생각하는 도시로의 이동이 급격히 일어나고,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외국유학이 증폭되는 시기였다. 그런 와중에 1990년 손선화
학생이 태안고등학에 수석을 하고, 1993년에는 서령고등학교에 유용규 학생이 수석을 비롯하여 10등 안에 3명이 우리학교에서 나오고
1994년에는 교원대 부속고등학교에 이상미 학생이 수석과 동시 충북연합고사 전체 2위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며 실력 있는 학교 상을 확립한다.
이런 좋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학생 수가 감소하면서 새로운 시련을 맞이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Ⅴ. 새로운
시련과 도약을 위한 결단
1998년 3월1일 제 5대 교장으로 송국범 선생이 취임한다. 학생수의 급격한 감소와
이에 따른 과원 교사 문제로 새로운 변수를 맞이하면서 교육력을 결집 시키고자 교실개혁을 추진한다. 이런 와중에 농어촌 소규모 학교의 통. 폐합이
거론되는 등 우리를 압박하는 요인들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열린 교육을 도입하여 창의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학습자 중심교육에
정성을 기울인다. 전 교과 교과 교실제로 이동수업을 제도화 하고 학급내 수준별 교육을 도입하여 맞춤 교육에 정성을 기울인다. 그러면서
2000년대부터 학구내 초등학교의 감소추세가 가속화 하고 교육력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뜻으로 선생님 자녀들을 이곳으로 입학 시키는 등의 노력에도
불구 하고 큰 가시적 성과를 나타내지 못하는 중,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한 여러 대안모색을 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여론이 형성이 되어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2004년 여름방학이 시작 되기 전에 새로운 결단을 한다. 학생이 있는 한 끝까지 교육을 할 테니 선생님들 힘으로
학교를 일으켜 달라는 설립자의 주문이 떨어진다. 그동안 검토해온 모든 것들을 접는다는 말씀이 있자마자 학교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진지하게
검토하면서 장단기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팔봉비전 2010’ 프로젝트를 수립하고 2005년부터 시행에 들어가면서 가능성을 만들어 놓았다.
주변과,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일으키면서 2006학년도에 외지에서 9명의 학생이 입학 및 전학을 온 혁명적 사건이 일어나면서 관심의 초점으로
만들었다. 현재 3학급 규모를 9학급규모로 만든다는 야심에 찬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4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2005학년도에는 야심에 찬 계획에 힘입어 학교 숲가꾸기 지원, 학교도서관 건립, 복도 창호교체, 승압시설, 교육경비
보조, 농어촌 특성화 지정을 받는 등 2억여 원의 지원금을 받아 학교 환경개선이 대폭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원어민 교사 3명을 강사로 채용
학교운영비에서 9백만 원을 책정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팔봉비전
2010
우리지역의 학구내 인원의 급속한 감소로 학교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은
교육력을 높여 타지에서 찾아오는 학교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교육비전을 제시하고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현재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어 그 시행 1년 만에 외지학생 9명의 새 식구를 맞게 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학교’를 꿈꾸며 기틀을 다진 프로젝트를
제시하고자 한다
Ⅰ. 비전: 특성화된 차별화 교육으로 수요자가 감동하는
학교
Ⅱ. 목표: 작아서 아름다운 학교(최소 6학급-최대
9학급)
Ⅲ. 핵심중점
.외국어 특성화 프로그램 운영 .학원교육이 따로 필요 없는
프로그램 운영 .감성을 일깨워 주는 프로그램 운영 .기독교정신(사랑) 이념을 구현하는 프로그램 운영
Ⅳ.
추진계획
.2004: 준비 및 구상기(3학급) .2005: 기반조성 및 홍보기(3학급) .2006: 발전 및
신뢰 구축기(3학급) .2007: 도약 및 성취기(4학급) .2008-10: 안정 및 정착기(6학급-9학급)
Ⅴ.
추진내용
.원어민(3명)에 의한 무학년 수준별 영어회화 교육(월-목) .미국유학(단기 1년) 프로그램 운영
.방학 단기 해외 영어연수 프로그램운영 .방학 중 영어캠프 운영 .제2 외국어(중국어) 교육(전교생 의무적으로 주당 2시간) .방과후 기본도구
교과 수준별 무상 교육(20:30) .3자(학생. 학부모. 교사) 협약 이행 체결(진로. 성적) .졸업 인증제(컴퓨터. 한자. 독서) .10분
독서로 문 열기(08:30-40) .우리시 30편, 영시 10편 암송하기 .생명, 생태교육(텃밭 가꾸기, 갯벌, 사구, 철새 탐조, 숲체험)
.계발활동 활성화(연극, 사물놀이, 오카리나. 스포츠댄스, 수화, 미술) .수월성교육(심화반 집중지도) .무감독고사 활성화(1974년부터 시작)
.기독교정신(사랑) 체득
Ⅵ. 교육환경개선 사업(2005-2010) .
.학교
도서관 구축: 6천만 원
.복도 창호교체: 3천 5백만 원
.학교 숲 조성: 5천만 원
.승압시설: 1천 6백만
원
.다목적실 보완: 3천만 원
.원어민 강사 자체 수당 지원: 3천만 원
.원어민 강사채용(교육청
요청)
.홈페이지 구축: 3백만 원
.관리실 리모델링: 3천만 원
.교육방송시설: 1천 5백만 원
.교실
빔프로젝트 설치: 2천 5백만 원
.냉. 난방 시설: 3천만 원
.교실, 외벽 리모델링: 2억원
.화장실 증축:
1억원
.농어촌 특성화 지원금: 5천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