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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50만분의 1이라는 생존 확률에 관한 얘기다. 실존 인물인 유태인 피아니스트 스필만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한 때 50만 명의 유태인들이 살고 있던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가 텅 빈 유령의 도시가 되어가는 동안 그 곳에서 살아 남는다. 그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많은 순간을 지나 50만분의 1이라는 확률 안에 들었고 그 후 이 때의 체험을 수기로 썼으며 바르샤바에서 88세까지 살다 죽었다.
소심한 피아니스트 스필만의 수기는 종전 직후인 1946년 『한 도시의 죽음』이란 제목을 달고 폴란드에서 처음 출간되었다가 발매 금지되었고 50년이 지난 후에 재출간되어 영화화되었다. 이 글은 비합리적이고 잔인한 폭력에 대한 분노보다는 시도 때도 없이 덮쳐 드는 일상화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생존의 몸부림에 초첨이 맞추어져 있고 그 묘사는 무덤덤하다. 폴란스키는 이러한 원작의 접근 방식과 스토리를 정공법으로 풀어, 결코 ‘오버’하지 않으면서 살아 남으려는 한 인간의 모습을 강조하여 영화에 담아낸다.
인류가 저지른 20세기의 죄악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 그것도 저명한 피아니스트의 수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보고 생존 확률 운운하면 격을 떨어뜨리는 것 같지만, 이 영화에서 휴머니즘을 표방한 <쉰들러 리스트>의 무게 잡는 접근, <인생은 아름다워>의 가슴 뭉클한 감동을 기대하거나 그런 코드로 영화를 평가하려고 한다면 오산이다. 영화에는 못 먹으면 배 고파서 고상함 따위는 집어 던지는, 죽이려고 하면 목숨을 구걸하는, 말 그대로 생존 확률 게임에서 이기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하나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수기와 영화가 무덤덤하게 죽음을 다루고 1차적 욕구를 강조했다고 해서 그 충격이 덜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충격이 배가된다. 예컨대, 구멍을 통해 게토로 물건을 밀반입하던 어린 소년의 죽음이 등장하는 원작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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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담 저쪽 편에서 경찰관이 아이의 몸을 후려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침내 내가 아이의 몸을 잡아 뽑는데 성공했을 때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다. 아이의 척추는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사실, 게토 사람들의 삶은 밀반입에 의지하고 있지 않았다.” | |
아이를 죽이는 무자비함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다. 그저 구멍에 낀 아이를 구하려고 했는데 구하지 못했고 잡아 뽑아보니 척추가 뭉개져 있었다고 말한 후 밀반입과 게토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묘사가 담담하게 이어지는 식이다. 영화 또한 툭하면 유태인들 가운데서 죽일 사람을 뽑아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심리학에서는 고전이 된 책으로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가 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극한 상황에 접한 인간의 심리를 살펴본 『삶의 의미를 찾아서』란 책이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진짜 무서운 것은 인간의 적응력이란 실로 대단해서 인간이 견뎌낼 수 없는 극한 상황이란 없으며 그 적응력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재가 바로 ‘무감각해지기’라고 말한다. 2차 대전의 유태인 학살이 정작 피부에 와 닿도록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가스실로 끌려가 죽은 사람들의 산더미 같은 시체나 비상식적인 폭력 자체가 아니라, 합법적인 살인의 또 다른 이름인 전쟁이 인간을 끔찍한 폭력 앞에서 무감각해지게 만든다는 것, 어떤 사람이건 간에 굶주리지 않고, 죽임 당하지 않고 살아 남으려는 본능에 충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50만분의 1로 살아 남으려면 가족의 죽음은 금방 잊고 먹을 것과 은신처를 찾아 다니며, 길거리에 널부러진 시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고 자신의 생존에 극도로 집중하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 거다. 그래서 수기와 영화의 담담함이 오히려 더 섬뜩하고 충격적으로 느껴진다. 유태인 학살을 다루고 있는 200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 『운명』역시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15세 소년의 묘사가 놀랍도록 담담하다. 15세 소년의 눈이라고 하기엔 너무 담담하여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어쨌든 이런 담담함이 폭력으로 인한 인간성 말살을 가장 웅변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합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결국 스필만의 원작이 지닌 담담한 태도와 생존 게임에서 살아 남으려는 한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 감독 폴란스키의 선택은 현명했다. 하지만, 영화가 원작의 의도를 잘 살려냈다고는 해도 나에겐 여전히 “척추가 뭉개져 있었다”는 단 한 줄의 글이 축 늘어져 죽은 어린 소년의 모습을 담은 영상보다는 훨씬 충격적이었다. 결국 글이라는 매체가 영화에 비해 우월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굳어져 버리는 듯하다. 그래도 재미있는 것은 원작에 밑지고 들어가는 이 불리한 게임에 기꺼이 응하는 감독이 1895년 이래 끊이지 않고 늘 있었다는 거다.
사족 - 실제 스필만과 영화 속의 스필만은 꽤 닮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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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 아워스>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잉크 묻힌 펜을 집어들고 까칠한 종이에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을 써내려 간다. “댈러웨이 부인은 직접 꽃을 사겠다고 말했다.”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 2001년 뉴욕에 살고 있는 클라리사는 맑고 아름다운 아침에 “내가 직접 꽃을 사겠어”라고 분주하게 외친다. <디 아워스>의 원작은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 『세월』이다. 『세월』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많은 설정을 빌려오고 그 소설을 쓰는 버지니아 울프의 실제 삶과 섞어 놓는다. 한 편의 영화와, 흥미로운 관계를 맺고 있는 두 편의 소설이 꼬여 들어가는 이 게임은 판화가 에셔의 이상한 계단이나 교묘한 띠를 연상시킨다.
연결고리 1 - 자기만의 방
여기 자기만의 방을 필요로 하는 그녀들이 있다. 1929년, 런던의 버지니아 울프는 셰익스피어에게 그와 같은 문학적 재능을 지닌 여동생이 있었더라도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조차 주어지지 않는 제도의 무게에 눌려 미쳐버렸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디 아워스>에서 1951년 LA의 브라운 부인은 남편과 아들에게서 벗어나『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싶어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처럼 침침하고 거대한 경치에.. 책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은밀하고 조용한 장소’를 쉽사리 찾지 못한다. 2001년 뉴욕. 에이즈에 걸린 연인을 뒤치닥거리하며 삶의 이유를 찾는 클라리사에게 자신의 솔직한 욕망을 위한 방은 없다. 소설『댈러웨이 부인』에서 화려한 파티를 주최하는 상류층의 속물 생활을 선택한 댈러웨이 부인은 젊은 날의 열정이나 옛사랑을 되찾을 영혼의 방을 갖지 못했다.
연결고리 2 - 두 개의 자살과 한 번의 자살 시도
버지니아 울프는 엄습하는 정신의 병을 두려워하며 우즈 강에 투신자살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13세부터 시작된 신경쇠약증은 30년 동안 오직 글로써 남성 중심주의 사회와 싸워온 부지런한 한 작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디 아워스>에서 에이즈에 걸려서도 글을 쓰며 고군분투해온 리처드는 더 이상 클라리사를 위해 살지 않겠다고, 또 생생하고 충격적인 무엇인가를 창조해내지 못했다고 창턱에서 미끄러져 내린다. 그리고 겉보기에 평온한 중산층 주부의 삶을 살지만 속으로는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던 브라운 부인은 책을 읽을 곳을 찾아 든 호텔에 앉아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가 몸을 던진 강물과 같은 물이 호텔방을 가득 채우는 꿈을 꾼다. 결국 삶을 절망적일 만큼 사랑한 그녀는 죽음 대신 자신의 진정한 삶을 찾아 가족을 떠난다.
연결고리 3 - 동성애
<디 아워스>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언니에게 금지된 쾌감이 느껴지는 짧은 키스를 한다. 브라운 부인은 쾌활하고 사교적인 이웃집 부인 키티의 입술을 스치면서 잠시 동안 그녀를 갈망한다. 클라리사는 그를 사랑하는 다른 한 명의 남자와 동시에 리처드를 사랑했고 여전히 그를 돌보지만 샐리라는 여성과 동거하고 있다. 『세월』을 쓴 마이클 커닝햄은 동성애자이며 그가 영감을 얻은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양성적인 마음이 가장 창조적인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세월들..
‘연결고리를 탐색하는 게임’이라는 말이 주는 건조한 느낌 때문에 <디 아워스>와 두 편의 소설이 머리는 있으되 가슴은 없는 지적 유희에 머문다고 생각지는 마시라. 영화와 두 편의 소설은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배경지식이 없거나, 복잡하지만 흥미로운 게임에 기꺼이 빠져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잘난 척 하는 지루한 작품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면서도 이런 저런 연결고리로 이어진, ‘토막토막 씹어져 있는 초여름 6월 하루’ 동안의 그녀들의 삶과 거기 드리워진 죽음, 사랑, 일상의 미세하거나 격렬한 욕망들, 고군분투하며 글을 쓰다 코트 주머니에 돌을 넣고 우즈 강에 몸을 던진 버지니아 울프와 그녀가 창조해낸 숨막힐 정도로 멋진 구절, 동성애자 작가 마이클 커닝햄, 그리고 그가 창조해낸 인물을 영화 <디 아워스>에서 연기하는 진지하고 열정적인 여배우들.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월’은 아름다운 6월 아침의 흥분된 기대감과 복종을 권하는 시간의 진중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다른 여성들의 삶을 비슷하게 되풀이하는 숨막힘 때문에 여자들은 때로 죽음을 생각하지만 세월은 그 삶을 아주 조금씩 바꾸어 놓는다. 그리하여 버지니아 울프는 강에 몸을 던졌고 댈러웨이 부인은 열정 대신 안정된 삶을 택했지만, 삶을 사랑했던 브라운 부인의 자살은 미수로 끝나고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죽음으로 오히려 자유를 얻는다. 복종을 권하는 무서운 시간 속에서 나의 삶이 구태의연한 생의 모습을 반복해도 미묘하게 변화고 있다는 깨달음. 이러한 삶의 모습은 한 편의 영화와 두 편의 소설이 갖는 이상한 관계와 닮아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두 권의 책을 읽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는 은근한 떨림이 남는다.
| <영화잡지 cineseoul Magazine 참고> |
첫댓글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