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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이대로 좋은가?(1-1)
갈라디아서 복음에 대한 담론
강 금성 목사
A. 들어가는 말
저는 어제 미국 B 대학에서 Ph D를 받고, P대학교 부총장을 지내시고 지금은 은퇴하신 O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만남은 같은 지방회 목사님의 주선으로, 제가 전한 복음이 상당히 중요한 것임을 알고, 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분에 의해 검토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1)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복음
제가 전한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복음"을 요약하면,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권능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첫째,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대신 살게 하며(갈 2:20), 둘째, 내 정욕과 탐심이 못 박히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게 하며(5:24), 셋째, 세상이 나에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힘으로(6:14) 우리로 더 이상 세상의 종노릇하지 않게 하여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합니다(2:19).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께서 내 죄를 담당하고 대신 죽으신 것으로만 전하고,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십자가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 결과 십자가를 통한 죄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은혜에는 눈멀게 하였습니다. 사영리나 전도폭발훈련에서 전하는 복음, 그리고 글 없는 책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이 모두 그렇습니다.
2)O 교수님의 견해
O 교수님은 제게 먼저 다음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죄는 무엇입니까?” “교만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을 드리자, “교만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재차 물으셨고, 저는 “교만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삶의 태도이며, 겸손은 하나님께 부종하는 삶의 태도라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마다 교만과 겸손에 대한 정의가 다르겠지만, 저는 교만과 겸손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떻든 O 교수님은 가장 먼저 제 교만을 질책하셨습니다. 사실 교만은 제가 가장 씨름하는 문제이고,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복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저와 다른 견해를 내놓으셨습니다.
①갈라디아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대적자들에 대한 것인데, 바울의 대적자를 저는 할례주의자로 보는데 반하여 O 교수님은 율법주의자라 하셨습니다.
②제가 위에서 말한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복음에 대하여, O 교수님은 갈라디아서에는 복음이 나타나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갈라디아 교회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며, 따라서 갈라디아서에는 복음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제가 말한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복음에 대하여 나타나 있지도 않은 복음을 임의로 만들어냈다는 뜻입니다.
③제가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십자가의 복음의 성경 근거로 제시한 갈 2:20, 5:24, 6:14절은 모두 바울 개인의 주관적 체험이며, 그러한 개인적 경험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객관적 사실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제가 전한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복음을 간접적으로 부인한 것입니다.
④사영리와 전도폭발 훈련에서 제시하는 복음, 그리고 글 없는 책이 참된 복음의 내용을 충분히 담고 있지 않다는 제 지적에 대해 O 교수님은 “아마 행위 때문에 그러는 것 같은데, 한국 교회가 윤리적 설교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가?”라고 반문하시며, 한국 교회가 전하는 복음에는 문제가 없다는 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위 내용에서 혹 제가 잘못 듣고 O 교수님의 의사를 왜곡시킨 것이 있지 않은지 염려스럽습니다. 저는 제 기억에 의존한 것이고, O 교수님은 녹음을 하셨고, 만남을 주선한 O 목사가 곁에서 들었으니 아마 이 내용은 사실과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O 교수님은 제가 전한 복음을 부정하신 것입니다. O 교수님은 제가 말한 복음이 본문에서 벗어난 자의적 해석이라는 결론을 내셨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그러한 O 교수님의 지적이 갈라디아서 본문에 의해 지지되는가를 검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B. 본론
O 교수님은 제가 말한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복음에 대해서 헬라어 원본을 두 번씩이나 읽으며 일일이 검토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일 몇 시간이나 기다리시면서 저를 만나 말씀해 주시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깊이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O 교수님의 말씀이 사실인지는 성경을 통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바울의 대적자에 대하여
갈라디아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대적자들을 저는 할례주의자로 보는데 반하여 O 교수님은 율법주의자로 보신다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는 갈라디아서 연구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대적자에 대한 다양한 연구 발표가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리차드 N. 롱에네커, 갈라디아서, wbc 주석, p. 125-136을 참고).
1)유대주의자. 교부 시대와 종교 개혁 기간 동안 일반적이며 거의 이의가 없었던 견해입니다. O 교수님과 저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들의 정체가 유대주의자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 안에도 율법주의자와 할례주의자가 있고, 그들의 의미는 다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고, 할례주의자는 할례와 유대 절기를 지키자는 것이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은 아닙니다.
2)두 전선 이론. 1919년 빌헬름 뤼트게르트(Wilhelm Lütgert)와 1929년 제임스 하디 로웁스(James Hardy Ropes)의 ‘두 전선 이론’은 갈라디아 문제 이해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이 이론은 갈라디아서가 두 유형의 대적자들에 맞서기 위해 쓰여졌다는 것인데, 그 두 대적자들은 바울의 메시지의 유대적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유대주의적 분파와, 바울의 자유에 대한 가르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영적 급진주의자들인 성령주의적 분파라는 것입니다.
3)제웨트 이론. 1971년 로버트 제웨트(Robert Jewett)는 벤티디우스 쿠마누스(Ventodius Cumanus, 주후 48-52년) 행정 장관 시기에 팔레스타인에 일어난 열심당 운동에 의거한 바울의 갈라디아 대적자들에 대한 설명을 제안했습니다. 주후 40년대 후반에서 66년 유대 전쟁 발발까지 열심당원들은 하나님이 메시아 시대를 도래시킬 것이라는 희망 하에서 이스라엘에서 모든 이방적 요소들을 제거하려 했고, 그들은 이방인에 대한 동정심을 가졌거나 교제하는 사람들을 반대했습니다. 이에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메시지를 보완하여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을 온전함으로 이끌려 했는데, 그것이 할례를 행하고 유대 절기를 지키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는 반 율법주의적 태도가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대적자들의 영향아래 있는 갈라디아 교회에 대해 바울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다음의 구절들을 보면 바울의 대적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실성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6:12-13)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5:2-4)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바울의 대적자들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할례를 받았으나 율법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대적자들이 율법주의자라기보다는 할례주의자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할례를 행한 이유는 박해를 면하려 함이었다는 점에서 제웨트의 이론을 생각나게 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이들을 향해 할례를 받으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지는 것이라 결론 내리고, 율법 안에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라고 합니다. 이로 볼 때 바울의 대적자들은 유대주의자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며, 그 가운데서도 할례주의자로 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 위에 할례를 행함으로 완전한 구원으로 나아가려 한 유혹 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2. 갈라디아서에서의 복음 문제
O 교수님은 갈라디아서에는 복음이 나타나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갈라디아 교회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며, 따라서 갈라디아서에는 복음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먼저 복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 결의(행 15:11)와 사도 바울의 언급(롬 1:16-17)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행 15:11)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롬 1:16-17)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예루살렘 공의회는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었고,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인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복음을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2: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3:5-6)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6)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3: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5:5-7)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이에서 보듯이 갈라디아서에는 복음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과 다릅니다. 바울은 대적자들의 영향 아래서 복음을 변케 하고 있는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가 전에 전했던 복음을 수차례 반복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
3. 바울의 개인적 경험을 객관화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
이에 따라 저는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복음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의롭게 되는 것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인가에 대해 저는 십자가의 권능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권능에 대해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은 현재 교회가 말하는 단순한 ‘죄 용서’와는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권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5:24-25)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6: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십자가는 첫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곳’입니다. 이 못 박힘을 통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합니다. 둘째, 육체 안에 있는 정과 욕심을 못 박은 곳입니다. 그렇게 자기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이후로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도록 합니다.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사는데, 그 삶은 예수의 삶이요, 성령 하나님의 삶입니다. 셋째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 박히고, 나도 세상을 대하여 못 박힌 곳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세상의 종노릇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 수 있습니다(2:19).
그런데 제가 제시한 이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O 교수님은 “이 십자가의 체험은 바울의 개인적인 것이며, 개인적인 경험을 객관화하여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자체에 그러한 주장이 옳지 않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바울은 1장 11절 이하에서 자신이 갈라디아에 전한 복음이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합니다. “(1:11-12)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계시는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바울은 개인적인 체험에 의존해 복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갈라디아에 전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얻은 것을 객관화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②바울은 2장 16절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2장 20절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라는 주어가 이 체험이 개인적인 것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한 절 건너 3장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복음을 변케 하려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현재 갈라디아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이 참 복음인지, 다른 복음인지를 아는 시금석은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개인적인 십자가의 경험을 갈라디아 사람들 전체에 객관화시키고 있습니다.
③바울이 십자가에서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이 못 박히는 것은 더 이상 바울 자신의 개인적 체험이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5:24-25)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십자가에서 정과 욕심이 못 박힌 것은 바울 자신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 전체라고 합니다.
④6장 14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못 박혔다는 간증을 합니다. 이처럼 2장 20절, 5장 24절, 그리고 6장 14절을 볼 때 십자가는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물론 그 은혜도 있다), ‘새로 지음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유일한 자랑거리였습니다. 그 말을 한 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6:15-16)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은 그에게서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이 규례를 행하는 모든 자’로 확대 적용합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 새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갈라디아 사람들은 물론이고(3:1),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5:24), 그리고 모든 자(6:16)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새로 지음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에게만 평강과 긍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전한 십자가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4. 현재 교회에서 많은 윤리적 설교를 하고 있으니 현재 전하고 있는 복음에 문제가 없다는 것에 대하여
저는 사영리와 전도폭발 훈련에서 제시하는 복음, 그리고 글 없는 책이 참된 복음의 내용을 충분히 담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반쪽 복음 혹은 사분의 일쪽 복음입니다. 이에 대해 O 교수님은 “아마 행위 때문에 그러는 것 같은데, 한국 교회가 윤리적 설교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가?”라고 반문하시며, 한국 교회가 전하는 복음에는 문제가 없다는 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죄 용서만을 말하는 복음에서 행하는 윤리적 설교는 율법적 설교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에서 십자가는 죄 용서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 실천을 요구하는 설교는 복음과 상관없는 율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전하는 십자가 복음 위에서 행하는 윤리적 설교는 복음적 설교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 자체가 윤리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을 새로 지음 받은 자가 되게 하여 윤리적 실천을 가능하게 합니다. 따라서 현재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 아래서 행하는 윤리적 설교는 율법적이 되어 그리스도인들을 종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행하는 윤리적 설교가 많을수록 그리스도인들을 억압하고, 두렵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이 회개와 윤리적 가르침을 꺼려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축복하고 소망을 주는 설교로 흐르도록 합니다. 그래서 회개와 행함 있는 믿음이 실종되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전한 복음의 토대에서 행하는 윤리적 설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를 주고 아들이 되게 합니다. 아무리 윤리적 설교를 들어도 그것이 자유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며 추구하게 만듭니다. 윤리 실천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그리고 다른 사도들이 전파했던 복음입니다.
C. 결어
바울에게 복음이 중요했던 것은 그 복음이 사람을 '새로 지음을 받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갈 6: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그런데 현대 교회가 전하고 있는 복음은 바로 이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했던 것은 그 십자가(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가 우리를 새로 지으심을 받도록 하기 때문입니다(갈 2:20, 5:24, 6:14).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하는 복음이 구원을 받게 하는 참 복음인지 저주를 받게 하는 다른 복음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말했던 것과 동일하게 그들이 전하는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여기서 십자가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을 '새로 지음 받게 하는 것'으로써의 십자가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새로 지음 받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열심인 사람은 바리새인처럼 외식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죄 용서만을 말하는 현대 교회의 복음은 사람을 새로 지음 받게 하는 것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교회를 죄인의 소굴이 되게 할 신학적 근거를 마련해 줍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이 무엇인가를 심사숙고하며, 사람을 새로 지음 받게 하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찾고 그 복음을 선포해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복음을 말하면서 그래도 진리를 분별할 줄 아는 분은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니까 곧 알아들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상은 많이 빗나갔습니다. 아마도 저같이 미천한 자를 통해 이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좀 더 영광스러운 분을 통해 이 복음이 전파되었다면 많은 이들이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여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그저 하나님께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부탁하기는 이 복음을 말하는 저는 무시하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과연 성경이 그러한가?”하는 열린 마음으로 연구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전했던 이 귀한 복음이 교회를 지배하고, 그로 인해 교회가 ‘새로 지음 받은 사람들’로 가득 차서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며, 세상의 빛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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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사님의 명쾌한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복음이 힘있게 전파될 수 있도록 함께 중보하겠습니다.
역시 우리 교수님이 최고입니다. 명찰만 최고인 사람들과는 다르시다는 확신이 듭니다. 이글을 읽으면서 십자가복음의 한쪽면만이 아닌 다른면 '새로 지음을 받게하는 십자가'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며 존경합니다. 목사님!!!!
신부동 교회에서 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큰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중보하겠습니다!!
아멘! 참된 복음이 널리 퍼져나가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살아있는 복음의 명확한 해석을 잘 읽고 이해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그 교수님 처럼 매우 다른 시각(잘 못된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올바른 성경해석을 해주신 강목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항상 목사님이 제시하시는 복음을 듣고, 읽다보면 마음이 명쾌해집니다. 힘내십시요^^
참된 진리가 선포되는 곳에서 예배드릴수 있는 큰은혜를 주신 아버지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아멘 ~~
목사님 멀리서 목사님의 사역을 응원합니다. 이 땅에 복음이 바르게 세워지길 기도합니다. 힘내세요~~
주님 이땅에주님의 진리의말씀이 선포되는데 막힘이없게 하옵소서..목사님사랑합니다,,힘내십시요^^
진리의 복음이 더욱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고 깨닳을수 있도록 목사님과 우리교회를 위해 더욱 눈물로 중보하겠습니다 ..! 목사님 힘내세요!
저는 확신합니다. 매일 매일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온전한 삶을 부르짖을 때,
부인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새 것에 대한 열망이 소용돌이 칩니다.
목사님! 우리 목사님! 막 자랑할겁니다!
하나님 말씀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보았습니다.. 이 진실된 복음이 제 안에 더욱 견고하게 이루어지길 갈망합니다.
주님의 복음이 올바로 이 땅위에 온전히 선포되기 위해,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예수님의 마음으로 선포하시는 목사님~! 힘내세요~!
이땅이 진리로 눈을 뜨게 되기를 중보합니다... 목사님이 선포하시는 진리가 많은 영혼들에게 흘러가게 하소서 !!!!!...
십자가의 복음이 희석되고 거짓 복음으로 물들은 이 땅의 교회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너무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 주시니 너무너무 감사하고 좋습니다.
복음과 행위,행함, 율법에 대해 이해가 바로 서가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온유함을 닯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교만은 하나님과 목사님만 아실텐데 또 누가 아실려나요? 극도로 교만한 사람만이 알 수도 있겠습니다 ㅠ
목사님~~존경합니다.
메마른 광야와 같은 사람들의 심령위에 세례요한과 같이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해 주시기 바랍니다. 너무 너무 귀한 목사님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교수님의 견해중 갈라디아서에 복음이 나타나 있지 않다고 생각 한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목사님 글을 읽으며 너무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어요^^
홧팅^^!!!
목사님 감사합니다.이땅이 진리로 눈을 뜨게 되기를 중보합니다
아버지, 복음에 대해 계시로 많은 이들에게 알게 하소서!
깨닫는 순간 그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복음에 대해
인정하며 찬양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실 주님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