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옥주의 <다시 목련>을 <다시> 읽고
시집 표지 디자인은 중요하다, 는 것을 깨닫는다. 흔히 말하듯 첫인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고옥주 시인의 시집 <다시 목련>을 건성으로 한 번 쓰윽 훑어보고 한구석에 쳐박아 둔 것이 내 잘못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리 제목이 <다시 목련>이라지만 촌스럽게 목련 사진이 뭐란 말인가. 그리고 그 조그만 네모 안에 넣은 새의 사진은 또 뭔가. 아니, 애시당초 <다시 목련>이란 제목이 과연 시집 전체를 대표할만한 것인가? 기왕 시비를 건 김에 하는 말인데, 시집 제목 밑에 붙인 '허공과 바람과 별의 시'는 대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시집 표지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작품들을 읽어보기도 전에 이미 내 이해를 조건지웠다는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아무튼 그렇게 이 시집은 간단히 처리됐고, 나는 시간 낭비라는 커다란 죄를 범하지 않아도 되었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은 <시.6.토론토> 동인인 형주형에게서 이메일이 날아온 것이다. "바쁘냐? 바쁘지만 고옥주 시집 독후감 조금 나에게 보내줄래?" 형주형 특유의 수법이다. 온화한 (듯한) 말투. 부탁이지 절대로 강요가 아니라는 암시. 하지만 결코 소홀히 넘기지 못하게 만드는, 거역할 수 없는 준엄한 명령... 이렇게 나는 고옥주의 <목련>을 <다시> 집어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맨 앞에 나오는 시 <전망 좋은 방>에서부터 내가 걸려 넘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르고 지은 죄의 죗값까지 다 치르도록/이생을 견뎌내기>. 뭐라구? 이생을 견딘다? 그런데 시집 뒷표지에 '허공, 그 광활한 벌판을 채우는 사랑'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생을 사랑하기'가 아니라 '이생을 견뎌내기'? 게다가 '시간 속에선/갓 태어난 생명 외에 새로운 것이 없'고, '다른 생을 복제하며 아이들이 굵어지는 동안/낡고 지쳐 내 지난 생을 반복하는 나'라니? '아무리 젖어도 반짝이며 흘러가지 않는' '누덕누덕 기워진 강물'? 삶에 지치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지 않은가? 서둘러 다음 페이지를 넘겨본다. <시간의 환한 켜>. '가끔 시간 위로 고개를 내밀어 저 멀리/사랑함으로 온몸이 반딧불이처럼 환하던 때/그 빛에 부근의 얼음이 조금 녹고 있을 것 같은/그 시간을 보고 싶네'. 가만 있자, '시간' 위로, '그 시간'을 보고 싶다고? 그러니까 말하자면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시간들이 존재하는 셈인데, '가끔 시간 위로 고개를 내밀어'라고 할 때의 '시간'과 '그 빛에 부근의 얼음이 조금 녹고 있을 것 같은 그 시간을 보고 싶'다고 할 때의 '시간'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닐까? 나와 상관 없이 존재하고 흘러가는 우주의 시간, '갓 태어난 생명 외에 새로운 것이 없'는 시간, '보이지 않는 시간', '모든 순간들이 한꺼번에/꽁꽁 얼어붙어 있는 거대한 얼음덩어리에 가'까운 시간, '희미한 얼음 냄새'가 나는 시간, '부드러운 살'을 녹여버리는 시간 (<진화가 지루하여>), '홀로 선 풍경도/다른 풍경의 기억으로' 견뎌야 하는 시간 (<독도>), '거꾸로 돌리면/거대한 육지가 딸려 나올'지도 모를 시간 (<독도>), '모두 허공'이고 '헛디디면 몸 하나 걸릴 데 없는/성긴 허망'인 시간 (<정상, 심연, 사이>), 시인은 자신이 이런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런 시간은 과학이 제시하고 확증하는 우주적 시간이고,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에 아랑곳하지 않는 시간, 태초부터 시작되어 영원히 흘러가는 시간, '지루한' 진화의 과정을 동반하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을 배경으로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시간이 흘러간다. 그것은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즉 생명체가 체험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힘겨운 세상살이에 찌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는 '누덕 누덕 기워진 강물'처럼 느껴지는 시간이고, 이제는 과거의 추억에 묻혀 있는 지나간 사랑, 그러나 잊지 못하는 숨막히던 사랑을 생각할 때는 '사랑함으로 온몸이 반딧불이처럼 환하던 때'이자, '꽁꽁 얼어붙어 있는 거대한 얼음덩어리' 같은 우주의 시간마저 '조금 녹'일 수 있을 것 같은 시간이며, '허공에 돋'은 '새 살' 같은 시간이다. 요약컨대, <다시 목련>이라는 이 시집을 관통하는 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시간이다. '시간'이라고 했지만, '공간'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은 결국 같은 개념이다. '모두 허공'이고 '헛디디면 몸 하나 걸릴 데 없는/성긴 허망'인 공간이 있고, '네 안도 나의 영토'가 되는 공간 (<사랑 같은 것>), '낙엽이 몰려 쌓여' 이루는 공간 (<허공에 새 살 돋아>), '숨구멍 하나 남기고... 깊숙이/몸 숨기고 싶'은 '개펄' 같은 공간도 있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들(혹은 공간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그것을 관통하고, 비틀고, 휘젓는 시적 상상력이 서로 충돌하며 만들어 내는 긴장과 갈등. 나는 고옥주의 시세계를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영원의 시간과 찰나의 인생, 무한한 공간과 뻘밭 같은 생의 공간. 과연 여기에서 무엇이 생겨날 것인가?
고옥주의 <다시 목련>을 읽는 동안, 동시에 내가 대학 시절 탐독했던 Unamuno를 다시 읽고 있었다는 사실은 특이한 우연이다. 왜냐하면 고옥주 시인의 시세계를 이렇게 이해하게 된 것이 다분히 Unamuno의 영향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Unamuno는 그의 <Tragic Sense of Life>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Eternity, eternity! - that is the supreme desire! The thirst of eternity is what is called love among men, and whosoever loves another wishes to eternalize himself in him. Nothing is real that is not eternal... The vanity of the passing world and love are the two fundamental and heart-penetrating notes of true poetry. And they are two notes of which neither can be sounded without causing the other to vibrate." Unamuno의 책을 내려 놓고, <다시 목련>을 펼친다. 허공과 바람과 별이 있다. 그리고 서성이고 있는 '어느 사람 하나'도 있다(<나무, 겨울잠>). 그 사람은 '우리 모두 우주로 흩어지기 이전의 시공간으로' '별의 안부'를 보낸다. 그 메시지에는 '하나의 위로로는 턱없이 부족한' 하나의 외로움이 담겨 있다. '내 온 삶의 힘으로 네 죽음의 뿌리까지 끌어당기며/서글피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으니/저 환한 다른 생의 입구에서/뒤로 내민 내 손을 잡기까지/내 뒷모습을 견뎌다오' (<서울 오르페우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시가 Unamuno가 말하고 있는 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한다. 영원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청춘의 안타까운 노래와 스쳐간 눈빛'(<서울 에우리디케>)을 시인은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다. 아무리 '세상을 헤매다니며 이렇게 늙어 왔'어도 '어느 날 눈길 마음길 돌이키면 어제인 듯 손을 내미는' 사랑은 '그 많은 망각과 시간의 강을 건너/뒤돌아봐도' '여기서 시작된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고옥주의 시들은 '여기서 끝나는 거야'라고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시들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만이 이생을 영원으로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라는 것을.
시집을 손에 들고 다시 바라본다. 시집 앞표지에 붙인 '허공과 바람과 별의 시'가, 목련과 새의 사진이, 그리고 '다시 목련'이라는 제목이 더 이상 촌스럽지도 어색하지도 않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이 시집의 제목인 <다시 목련>에서 중요한 것은 '목련'이 아니라 '다시'일 것이라고. 시인 자신이 읽는다면 어처구니 없어 웃고 말 이 글을 이 시인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애정의 표시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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