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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축 우보만리 한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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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서울성곽 장충체육관-남산-남대문 답사기
우보만리 추천 0 조회 133 12.05.10 21: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울성곽 장충체육관-남산-남대문구간 답사기

 

장충체육관 옆부터 자유연맹까지는 옛 도성 흔적이 꽤 잘 남아 있다.

 

 

 

성벽: 장충체육관 옆

 

 

돌 뜨던 흔적

 

장충체육관 옆 성벽 시작점에 돌 뜨던 흔적이 있다.

옛날 돌을 캘 때는 바위에 먼저 구멍을 낸다.

그 다음 나무-주로 밤나무를 박아 넣고 물을 부으면

나무가 불어나는 힘에 바위가 쪼개 진다. 이걸 ‘돌을 뜬다’ 고 했다.

 

 

 

사진 : 돌 뜨던 흔적. 통나무를 넣으려고 구멍을 뚫었는데

돌의 결이 잘 맞지 않았는지 다른 데로 옮겨 뜨고 흔적만 남았다.

 

 

각서(刻書)

 

성벽 돌에 가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사진: 각서 흥해시면(興海 始面).

흥해는 지금 포항시 북구 흥해 읍이다.

이 글씨부터 시계 방향으로 흥해 사람들이 공사를 맡았다는 뜻이다.

이 구간 공사가 잘못되어 무너지면 흥해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
고쳐야 하는 공사실명제다.

 

 

 

십삼수음시(十三受音始)

 

 

 

사진 : 십삼수음시(十三受音始)

 

수음(受音)이란 ‘받음’ 이란 우리말을 이두(吏讀) 식으로 쓴 것이다.

따라서 이 각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십삼 구역에서 받았다-맡았다는 뜻이다.

어떻게 나누어 십 삼 구역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장충체육관에서 자유연맹 뒤 까지 약 1.5 km 가량 성벽이 이어 있다.

 

 

 

성벽이 끝나면 자유연맹 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자유연맹

 

옛날 반공센터다.

필자 고3때인 1968년 무장공비-김신조 일당이 침투하는 1.21 사태가 있었다.

그로 인해 예비군이 창설되고 각종 승공대회가 열렸다.

그 해 입시준비로 한참 정신 없을 때도 여기 하루 와서 교육 받던 기억이 난다.

 

 

 

사진 : 자유연맹 돌담.

 

저 돌담이 실은 성곽 돌이다.

박통 때 광희문 부근에 그나마 남아있던 성곽을 헐고 돌을 여기로 옮겼다.

인부들이 옮겨 쌓으면서 보니 글자가 새겨진 돌이 더러 나온다.

뭔지 잘 모르지만 글씨 부분이 겉으로 나와야만 될 것 같았나 보다.

그래서 자유연맹 돌담을 잘 살펴보면 각서(刻書) 경주시(慶州始)가 보인다.

 

 

 

경주 사람들이 쌓은 구간이란 뜻이다.

이제 길을 건너 국립극장 쪽으로 간다.

 

 

남산(南山)

 

국립극장에서 남산 순환도로를 따라 약 7-800 M 걸어가면

왼쪽으로 성벽이 이어져 오는 것이 보이고 오른 쪽으로 성곽을

따라 올라가는 계단-탐방로가 있다.

 

 

 

사진: 남산 성벽 탐방로

 

나무 계단은 약 250 m 정도지만 상당히 가팔라 오르는데 10분 정도 걸린다.

계단을 다 올라가면 탐방로가 끝난다. 그러면 선택을 해야 하는데

오른 쪽 성벽을 따라가려면 길이 없어 풀숲과 가시덤불을 헤쳐야 한다.

온 몸이 긁히긴 하지만 갈 수는 있어 필자는 몇 차례 해 보았다.

 

그러나 여럿 데리고 가는 안내답사 할 때는 아무래도 곤란하니

왼쪽 남산산악회 쪽으로 가서 산 꼭대기를 감싸 도는 기분으로 걸으면 된다.

왼쪽이라고 따로 길이 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남산 산책하는 사람들

발 자취를 살피면 그런대로 다니는 길이 보인다.

 

오른 쪽으로 긁힐 각오를 하고 성벽을 따라가던지

아니면 왼쪽으로 비교적 수월한 쪽을 가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철조망 쳐진 곳이 보이니 바로 AFKN 송신소다.

 

 

AFKN 송신소

 

 

사진; AFKN 송신소.

 

이중으로 철조망을 돌린 것이 장난 아닌데 휴전선 철책 기분이 난다.

성벽은 이 AFKN 송신소 위 능선 쪽으로 지나간다.

송신소 부지가 쓸데없이 넓다.

기능이야 이제 남산타워 송신탑에 흡수해도 되는  것 아닌가?

 

옛날 우리가 너무 못 살아 문화나 시민 휴식공간이니 하는 따위에

신경 끄고 살 때면 모르지만 지금은 하루 빨리 환수해야 마땅하다.

 

 

AFKN 송신소를 따라 돌다가 다시 순환도로로 내려 선다.

 

 

 

사진: 구글에 이 구간 루트를 표시했다.

 

순환도로를 따라 몇 분 걷다 보면 능선으로 올라서게 되고

길 좌우에 성벽이 연결된 것이 보인다.

 

필자 앞으로 젊은 부부가 걸으면서 여자가 신랑에게 코 먹은 소리로 묻는다.

 

“자기야! 남한산성이라고 또 있잖아. 근데 여긴 뭔 성이야?”

“응 그거…. 여긴 남산이니 ‘남산성’이지 뭐 ! “

 

한양에 성이 있었다는 것은 대부분 알 텐데 도성이 어디를 지나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고, 성벽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것조차 잘 모른다.

성벽을 다시 만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성벽 바깥을 걸어 본다.

 

 

 

이 구간은 아마 자유당 때나 60년대 제멋대로 다시 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성벽 자체는 엉망이지만 넝쿨이 우거진 것이

호젓한 산책길에 꽤 그럴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성벽이 끝나면 배드민턴 장이 나오고 그 한 면에 성벽이 있는데

한쪽 끝에 각서(刻書)가 보인다.

 

 

 

판관 최유원 까지는 읽히는데 더 이상은 모르겠다.

배드민턴 장을 벗어나면 팔각정 올라가는 길이 시작되고

팔각정과 타워로 가는 관광객으로 왁자지껄하다.

 

 

 

봉수대

 

꼭대기 바로 직전 오른 쪽에 남산봉수대 옛터 표석이 있는데 써 놓기를,

 

목멱산 봉수대 터 (木覓山 烽燧臺 址)

조선시대 횃불(밤)과 연기(낮)로 각 지방으로부터 신호를 받던

서울 남산 봉수대가 있던 곳

 

목멱산의 목멱(木覓)이란 우리 말 ‘마뫼’의 이두식 표기다.

마뫼의 ‘마’는 마파람에 게눈 감추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南)의 우리 고유어니, 마뫼란 곧 남산(南山)이다.

‘목멱’이 ‘마뫼’고 ‘마뫼’란 ‘남산’인 것이다.

 

정작 봉수대는 표석 있는 위치가 아니라 꼭대기 전망대 옆에 복원해 놓았다.

 

 

 

옛날 전국의 봉화는 남산-목멱산 봉수대로 집결했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꽃으로 신호했다.

 

평소에는 봉화 한 자루를 올리다가

적이 다가오면 두 자루

국경에 다다르면 세 자루

적이 국경을 건너면 네 자루

접전이 시작되면 다섯 자루를 올렸다.

 

조선 말기까지 상당히 열심히 봉수망을 유지해 왔다.

산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연결되는 만큼

국경에서 남산까지 신호가 오는데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난리가 났을 때는 제대로 구실을 하지 못 했으며

또 간단한 신호니 만큼 자세한 내막은 파발로 오는 장계를 기다려야 했다.

 

대표적으로 병자호란 때다.

1636년 12월 2일 만주 군대는 심양을 출발하여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다.

그 사흘 전 12월 6일 의주 근처 용골산에서 봉화 두 자루가 올라갔으니

적이 다가온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이 봉수가 서울 남산으로 전해지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졌으니

당시 도원수 김자점이 봉수가 함부로 올라가면 민심이 어지러워진다고

자기 본영이 있는 황해도 정방산 까지만 오도록 했다. 그리고는 적이

들어 왔다고 부하가 보고하자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목을 베려 들었다.

그 뒤 적이 침범한 것을 황연히 깨달았을 때는 봉수망이 이미 끊기고,

황급히 사람을 시켜 장계를 올리건만 도중에 적에게 빼앗겨 버린다.

 

국경 용골산 봉화는 12월 6일에 올라갔건만 정작 조정이 안 것은 12월 13일

의주부윤 임경업의 장계를 받고 나서였다. 그리하여 14일 오후 인조(仁祖)가

강화도로 피난 가기 위해 숭례문을 나가다가 적이 홍제원까지 들어 왔으며

또 강화 가는 길목인 양화나루(지금 양화대교)를 막았다는 보고를 듣고
길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남산에서 본 도성의 스카이라인

 

복원한 봉수대는 제 위치가 아니지만 도성의 스카이라인을 살피기는 괜찮다.

그 옆 전망대라고 만든 곳은 나무에 가려 앞이 잘 보이지도 않을 뿐 더러

사람들이 자리 깔고 앉아 뭘 꺼내 먹고 마시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봉수대 위에 올라가면 정면에 북악, 그 옆으로 보현봉과 삼각산 연봉

왼쪽으로 인왕산 다시 더 왼쪽으로 길마재, 오른 쪽으로 낙산이 보인다.

도성의 스카이라인은 동쪽 낙산에서 볼 때, 서쪽 인왕산에 올라갔을 때

북악에서 보았을 때가 각각 다른 느낌이 든다.

 

사진 특히 원경을 찍으려면 날씨가 반드시 좋아야 한다. 성벽 답사 다니며

남산을 여러 번 올랐건만 매번 흐려 남산에서 본 도성 사진이 없다.

 

 

남산 하산

 

남산 팔각정에서 숭례문 방향은 대개 성벽 안쪽으로 계단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계단을 걷는다는 것이 재미가 없고, 사람도 많을 뿐 더러

원래 성벽 답사란 바깥으로 돌아야 제 맛이 난다.

 

팔각정 뒤편에 성벽 바깥으로 뛰어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얕은 데가 있다.

 

 

 

일단 내려서면 옛날 식물원 자리-시립 도서관 근처까지

성벽과 같이 갈 수 있다.

 

 

 

 

경사가 급한데다가 제대로 길이 나 있지 않아 눈치 봐서 걸어야 한다.

안쪽 계단을 걷는 사람들이 뭘 자꾸 바깥으로 내 던졌는지 쓰레기도 많다.

그러나 뜻이 있다면 충분히 걸을 수 있다.

 

 

옛 식물원

 

다 내려오면 옛 남산식물원 자리가 나오는데 지금은 분수와 화단이 있다.

 

 

 

 

 

조선신궁(朝鮮神宮)

 

옛 식물원 자리에 일제 때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있었다.

 

 

 

사진은 해방 직후 미군이 찍었는데 일본 신사의 특징적 문(門)-

도리이(鳥居)가 아직 앞에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조선신궁(朝鮮神宮)에서 느닷없이 단군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우리 모두 한 분-단군의 자손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만

곳곳에 단군상을 만들고 경배하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일본 군국주의가 조상신앙으로 뭘 어째 보려다 이미 실패한 것을

우리가 지금 와서 따라 할 일이 있는가?

 

단군상을 때려 부시는 일부 몰지각한 개신교 교도들도 한심스럽지만

그 단군상을 곳곳에 세워야만 한다는 생각도 찬성할 수 없다.

신화는 신화에서 머물러야지 억지로 할 일이 아니다.

 

 

조선 신궁 계단

 

조금 더 내려와 과학탐구관 (70년대 초 어린이회관) 앞에 계단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일제가 조선신궁 세울 때 만든 계단이다.

 

 

 

 

자기네 조상신을 다른 민족-조선인들에게 강제로 섬기게 한 것은 웃겼지만

신궁을 참배하기 전 먼저 저 높은 계단을 올라가게 한 생각은 그럴 듯 하다.

공간을 구성하고 연출한 컨셉은 이해할 수 있다.

 

일제시대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막론하고 극소수 목사 외에는 모두 신사참배

(神社參拜) 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뭐가 다르냐면서 절을 올렸다.

일본 여신(女神) 아마데라스 오오가미(天照大神)에게 태연히 절 하던 교단이

오늘 날 자기 조상에 대한 제사는 왜 그렇게 혐오할까?

 

제사의식에는 귀신을 부르는 강신(降神), 귀신에 인사 드리는 참신(參神)

귀신을 배웅하는 사신(辭神) 등등 모든 절차가 분명히 귀신과 관계 있다.

다만 신사참배 드렸던 그 융통성(?)의 반의 반만 베푼다면 제사도 민속,

조상숭배 또는 그 어떤 식으로던 교회 체계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일제시대 신사참배에 대하여 일부 성직자들이 개인적으로 참회한 것 말고

기독교 교단 차원에서 반성했다는 소리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조선신궁 계단을 내려와 백범광장 오른 쪽으로 돌면 돈가스 집들이 나온다.

나는 여기 돈가스가 특별히 맛있는지 잘 모르겠던데 하여튼 많이 온다.

 

 

 

돈가스 집 지나면 예언업(豫言業)하는 사람들-점쟁이들이 집단으로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미아리 쪽으로 옮겨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이어 힐튼 호텔이 보인다.

 

힐튼 호텔 옆 성곽

 

힐튼 호텔 옆에서 남대문 쪽으로 다시 성곽이 나타난다.

 

 

 

 

곧 성벽이 끝나고 불탄 숭례문에 가림막을 쳐 놓았다.

 

이 날 답사는 남대문 앞 예전 도큐(東急) 호텔 앞에서 끝내고

일행과 함께 길 건너 남대문 시장 안경 골목 안 허름한 회집을 찾아 들어갔다.

 

 

남산 구간 답사로를 구글에 표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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