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현충일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기리는 날
나는 버스로 지나칠 때마다 가보고 싶었던 전쟁기념관으로 갔다.
내리쬐는 햇살은 전쟁과는 상관없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어
어제의 전쟁의 댓가를 치른 연후에 얻은 평화와 자유가 값지기로
오늘의 나들이가 유달리 의미 깊게 느껴졌다.
내 나이 열일곱, 고등학교 2학년때 6.25가 터졌다.
월요일인 이튿날, 성동역에 있는 학교에 갔을 때
학교에서는 되돌아가라 하고, 트럭의 병사와 무기는 이상하게 후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석달 동안의 고초는 어린 나에게도 힘들었다.
귀찮게 찾아오는 좌익 학생의 등살에 못이겨
선친은 여기저기로 몸을 피하고
나는 나대로 생활에 보탬이 되게 한다고 자하문에서 자두를 받아
동대문에 가서 팔고, 자두가 없어지면 미아리고개를 넘어 호박을 받아 팔기도 했다.
무거운 호박을 머리에 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숨어계시던 선친이 돌아와 계셔 나는 반가워 소리내고 울고
선친은 선친대로 안쓰러워서 눈물을 흘리셨다.
아무리 재주껏 피해도 피해다닐 수만은 없었던 것이
타의에 의해 효제동에 있는 인민군 병원에 파송되었을 때
천진한 어린 인민군도 많이 보았다.
병원이 후퇴할 때 나는 한 꾀를 내어 집에가서 들고 갈 짐을 가지고 오겠다고 하고는
그 길로 선친과 함께 정처없이 길을 떠났다.
지금 생각하면 꿈길 같은 이야기....
신설동 어느 빈집에서 맞은 9.28수복 소식은 그야말로 감개무량이었다.
전쟁기념관에서는 1년내내 문화행사를 한다.
매월 첫주 목요일 오후2시에 있는 '이달의 호국인물현양행사'에 이어
5월 5일 어린이날 문화축제가 있고 오늘 6월 6일 현충일에는 글짓기.그림대회를 연다.
그래서 학부형과 어린이가 대부분, 그늘이라는 그늘은 모두 그들의 차지
보기에 좋다.
이순신 장군 놀이
어른 신하가 "적이 쳐들어옵니다!"하면
어린 학생이 "물리쳐라!!" 이 한마디 하는 장군 행세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거운 갑옷(?)을 입고 호연지기를 내보이는 순간
그래도 학부형이며 학생이 모두 즐거워 더위를 이긴다.
옥내의 전시실이며 옥외의 전시장 모두 넓고 볼 만하지만
나로서는 조금 힘들었다. 양산을 쓰고 지팽이를 짚고 카메라를 두르고
땀을 닦으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일단 쉬고 싶어도 앉을 자리가 없다.
그래서 핑게김에 식당에 가서 안락한 점심을 먹었다.
다시 기운을 차리고는 언제나 421번 버스를 타면 보게 되는 동상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이리저리 살펴 주위를 맴돌았다.
'사랑이다' 형제의 사랑....
전쟁도 사랑이라는 구실로 일어나는 사건이라면
평화란 값 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
한국전쟁의영화관 마지막에서 나온 자막
'Freedom is not free.'라는 대목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
평화가 값진 피의 代價라면 지금의 평화를 소중이 간직해야 하리.
9.28 서울 탈환을 위한 인천상륙의 포 소리가 지금도 내 귓가에 맴돈다.
공포와 희망이 엇갈린 砲소리였다.
분단된 우리나라에 진정한 평화는 언제 찾아올까.
첫댓글 동족상쟁의 625를 상기하도록 세운 전쟁기념관의 여러 모습을 담아 카페에 올려 주시니 감개무량합니다.
저 역시 중 1 때 전쟁이 발발하여 온갖 고난과 불안 속에 살었음을 기억합니다. 다시는 이런 불행이 오지
않도록 이런 전시관도 세우고 반공을 고취하는데도 요즘같이 종북 세력이나 북을 찬양 또는 고무 동조하는
세력들이 있다고 하니 정말 한숨만이 나옵니다. 어찌할고~한탄스런 일을, 정신 똑 바로 차리고 이번 대선에
잘 선택하여 우선 나라 안부터 안정시키고 다음이 경제고 교육이고 기타 등등~ 미약하나마 작인 일일지라도
이런 일에 앞장 서서 옳바른 행동을 취해 봅시다.
글쎄말입니다. 다 世流겠지만 온 국민이 정신을 차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우리 기독인만이라도 한마음이 되어야 겠지요. 우리 영락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항상 나라와 국민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