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룻기3장14~4장6절
제목 : 구속자 보아스
어제 말씀은 나오미가 룻을 재혼 시킬 생각으로 계획을 세워 며누리 룻에게 명령합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합니다.
룻의 순종은 하나님의 섭리가 임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룻은 보아스로 하여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는 말를 듣게 됩니다.
우리도 룻 처럼 “나는 당신의 종이며 주님만이 나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신다고 고백하며 나갈 때에 우리가 생각지 못하는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나오미와 룻의 마지막 대화입니다.
이제 보아스가 남은 모든 일을 성취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안식도 우리의 구속자이신 주님께 마침내 이루실 것입니다.
1. 보아스가 과 룻이 할 일(14~18절)
1)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나가게 했습니다(14절).
“[14]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새벽까지 그 발치에 누웠다가. - 룻은 보아스의 말에 따라 새벽 곧 성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잘 알아볼 수 없는 시간까지 보아스의 발치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처럼 룻이 보아스의 발치에서 잠을 잔 것으로 보아 이 두 사람은 순결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행동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전통을 따른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모리스(Morris)는 탈무드의 주석인 미쉬나(Mishna)를 인용하여 어떤 사람이 이방여인과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의심을 받게 되면,
그는 그 여인과 수혼(계대 결혼)을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보아스는 기업 무르는 모든 절차가 끝날 때까지 매사에 신중을 기하여, 자신과 룻 사이에 부도덕한 일이 발생했다는 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 모세율법에 기록된 바(신 25:5,6) 계대 결혼의 권리를 이행코자 취한 룻의 행위는 결코 부도덕한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룻이 보아스의 말을 좇아 타인의 눈길을 피해 새벽 미명 어둑어둑할 때에 보아스 곁을 떠난 것은 단지 그녀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자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룻과 보아스가 함께 밤을 지새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1)변명할 겨를도 없이 이방 여인 룻은 물론이요, 보아스의 평판에도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충분이 있었기 때문이며,
(2) 무엇보다도 세도 있는 보아스의 가까운 친족되는 사람들이 쓰러진 가문의 이방 여인 룻과 보아스의 결합을 극구 방해하게 될 빌미를 주기 때문이었습니다(Rowley).
2) 보아스가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줍니다(15절).
“[15] 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겉옷. - 혹자는 이 '겉옷'을 '커다란 어깨 걸치개'로 해석합니다(Keil).
본문에서 이 겉옷으로 보리를 싼 것으로 보아 단순한 겉옷이라기 보다는 외투에 걸쳐 덮는 '커다란 수건'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아마 이것으로써 룻이 어깨를 덮으면서 동시에 얼굴을 가리고 보아스의 타작 마당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리를 여섯 번 되어. - 몇몇 주석가들은 여기 여섯 번 된 것을 '오멜'로 생각합니다(Goslinga, Matthew Henry).
'오멜'(Omer)은 에바의 1/10로서, 1 오멜은 약 2.3l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6오멜은 약 14l(약 7되) 정도가 됩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보리를 줌으로써 자신의 말이 헛된 것이 아니라,
참말임을 확증시켜 주고 그녀를 안심 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안식년 규례'(출 23:10,11;레 25:2-7,20-22;신 15:1-15)에 따르면, 6년은 봉사와 수고의 기간이며 7년째는 안식과 해방의 순간입니다.
따라서 보아스는 룻에게 6번 보리를 되어 줌으로써,
수고와 노역의 긴 기간이 이제 다 되었음을 암시한 듯합니다.
비록 당시 룻은 히브리인들의 관습과 규례에 익숙치 못했으므로 그 의미를 잘 몰랐다고 해도, 룻으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은 나오미는 즉각 그 상징적 의미를 알았던 것같습니다(18절).
3) 룻이 시어머니에게 보아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알립니다(16절).
“[16] 룻이 시어머니에게 가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룻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알리고”
룻이 시어머니에게 왔을 때에, 나오미가 룻에게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에게 보아스가 자기에게 행한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4) 빈 손으로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십니다(17절).
“[17] 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 - 보아스도 분명 룻의 행동 배후에는 그녀의 시모 나오미의 세심한 배려와 조언이 있었음을 충분히 감지했을 것입니다.
따라서보아스는 룻에게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는 행위를 통해 자신도 나오미의 그러한 계획에 순순히 응할 용의가 있음을 암시해 주려한 것 같습니다.
“빈손으로”는 나오미가 한 탄하여 한 말입니다(1:21).
*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그의 떵 빈 마음을 보아스가 채워주심을 봅니다.
5)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8절).
“[18]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룻으로부터 간밤에 일어난 일의 시종을 들은 나오미는 룻에 대한 보아스의 호의와 애정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보아스의 신실한 인격으로 보아 조만간 약속을 이행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더 이상 다른 계획을 세우거나 안달할 때가 아님을 알았고, 오직 보아스의 조처를 기다리는 것이 최대로 현명한 방법임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나오미는 확신 있는 목소리로 룻에게 가만히 기다리라고 일렀던 것입니다.
이는 일의 결국이 하나님께 달렸음을 믿는 히브리적 신앙의 표현입니다..
*잠16:1,33 “[1]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33]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이처럼 인간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최선의 노력으로 다한 후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쓸모없는 염려와 불안에서 해방되는 것이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빌 4:6,7;벧전 5:7).
*빌4:6,7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2. 기업을 무르지 않기로 한 아무개(1~6절)
1) 보아스가 룻의 기업 무를자를 만납니다(1절).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성문에 올라가서. -고대의 성문 어귀에는 대체로 넓은 장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람들은 친구를 만나거나 새로운 소식을 논의했습니다(창 19:1;23:10;34:20;삼하15:2;느 8:1;시 69:12).
특별히 이곳은 성읍의 대표들, 특히 장로들이 백성들을 만나고 율법상의 판결을 내리던 곳으로 이용되던 장소였습니다(신 21:19;수 20:4).
때에 따라서는 왕이 이곳에서 직접 백성들의 송사를 맡아 다스리기도 했으며(삼하 19:8;왕상 22:10;렘 38:7;대하 32:6),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도 가끔 이곳에서 가르치고 훈계하며 예언하기도 했습니다(왕하 7:1;느 8:1,3;렘 17:19,20;36:10).
그래서 장로와 함께 성문에 앉는 것은 큰 명예로 여겨졌고(잠 31:23),
또한 성읍의 유력한 자만이 성문 어귀에 있는 의자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성문에서 압제하는 일은 곧 재판의 부패를 의미하였습니다(욥 31:21;잠 22:22).
이처럼 성문은 성읍 백성들에게 있어서 사회,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더불어 성문이 성읍의 시장터라는 사실을 근거하여 볼 때(왕하 7:1),
이곳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장소였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갔다는 사실은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율법상의 판결을 받기 위함이 틀림없습니다.
한편 여기서 '올라가서'라는 표현은 성문이 있는 높은 장소에 올라갔다기 보다(Pulpit Commentary) 장로들이 모여 판결하는 장소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Keil).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어떤 중요한 지역을 중심으로 나아갈 때, 위치와는 상관 없이 올라간다는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왕하 17:3;24:1;스 7:13;사 36:1).
아무개여 - 여기서 '아무개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펠로니 알모니'인데 문자적 번역은 힘들다.
영어로는 'such a one'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 말은 보아스가 그렇게 불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분명 보아스는 그 사람을 지명하여 그 이름으로 불렀을 것인데, 다만 본서의 저자가 이처럼 기록했을 뿐이다(Keil).
이와 같이 본서 저자가 첫 기업 무를자의 이름을 기록치 않은 것은 아마도 (1)룻의 남편이 될 뻔한 그 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여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였거나
(2)기록상 무심코 그 자의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처럼
했으리라 추정됩니다.
이리로 와서 앉으라. - 고대 사회에서 성문은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통행하는 유일한 출입구였습니다.
따라서 성문 앞은 늘 일을 보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따라서 만일 원하는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이곳에서 거의 찾을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도 이곳 성문 어귀에 앉았다가 원하는 사람을 찾았고,
그에게 '와서 앉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어떤 문제를 놓고 정식 재판을 받자는 일종의 재판 청구의 말이었습니다.
2)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옆에 않게 합니다(2절).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장로 - 일반적으로 장로라 하면 '자켄'이 사용되었으며,
구약에서는 '시브'가 한 번(스 5:5)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나이 든' 또는 '연장자'를 의미하는 '프레스뷔테로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장로'는 한 사회의 덕망 있는 연장자로서 어떤 친족, 지파, 지역 사회의 생활 가운데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자들을 가리킵니다<신 21:1-9강해, 성경에 나타난 장로직>.
이스라엘사회에서 장로들은 주로 백성들을 치리하는 일을 맡아 백성들 간에 다툼이나 법적인 분쟁이 생겼을 때 재판관 노릇을 함으로써 공의를 시행했습니다.
이외에도 지역 사회의 기강을 세우는 제반 업무 및 중요한 정치, 종교, 사법적인 일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했으며 때로는 군사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담당했습니다(수 8:10;삼상 4:3).
뿐만 아니라 국가의 왕을 선택하는 일에도 참여했습니다(삼상 8:4,5;삼하 3:17;5:3).
이러한 장로들의 역할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후 포로로 잡혀갔던 이방 땅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렘 29:1;겔 8:1).
십인을 청하여. - 여기서 장로 10인은 재판 사무를 완벽히 처리하기 위한 법적 성원수였던 것 같습니다(Cassel).
또는 충분한 증인의 수이기도 한데, 여하튼 장로10인으로 구성된 재판은 전혀 하자가 있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
후일 유대교는 이러한 전통을 따라 하나의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회원수를 장로 10인 이상으로 정했다.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 본절에 이 말이 언급된 것은 보아스가 베들레헴 성읍의 유력자(2:1)임을 실제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즉 보아스가 장로들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앉을 자리를 정해 준 것으로 보아 우리는 그가 장로들 중의 지도자급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보아스는 유다 지파의 족장이었던 나손(민 7:12)의 손자였으므로, 그의 조부가 소유한 재산을 상속받았을 뿐 아니라, 가문의 지위도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룻의 이야기를 합니다(3절)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기업 무를 자 - 2:20 주석 참조.
팔려하므로 - '마케라'를 번역해 보면 '팔려고 결심했다'란 의미가 됩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가까운 미래를 나타내는 진행형 곧 '팔 것이다'(is seling)로 번역하고 있습니다(KJV, NIV, RSV, Living Bible).
4) 기업 무를 자가 자기가 무르리라고 대답합니다(4절).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여기 앉은 자들. - 어떤 영역 성경은 '거민들'(inhabitants, KJV)로,
어떤 영역 성경은 '앉아 있는 자들'(those sitting, RSV, NIV)로 각각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만일 전자의 번역을 따르면 그곳에 있는 자들은 성읍에 사는 자들로서 구경나온 자들이며,
후자의 번역을 따르면 입회인(立會人)의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후 판결이 끝났을 때(9절) '장로들과 모든 백성들'이 증인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앉아 있는 자들'보다는 '거민들'로 옮기는 편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 나오미가 그 땅을 아직 다른 사람에게 팔지않았으므로 '무른다'는 것은 나오미가 팔려고 하는 그 땅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하여 그 기업의 땅을 팔 경우에 그는 반드시 그 기업의 땅을 친족, 곧 기업 무를 자(고엘)에게 먼저 팔아야 한다는 전통에 근거한 것입니다(Aalders, Goslinga).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땅은 계속 가문 중에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업 무를 자가 자기가 몰겠다고 합니다.
보아스는 속으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더 부칩니다.
5)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에게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5절).
“[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엘리멜렉에게는 본래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1:1,2). -말론과 기룐
따라서 엘리멜렉 사후(死後), 그 기업의 땅은 당연히 두 아들의 몫으로 상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두 아들마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기업의 땅은 가까운 친족의 순서를 따라
각각 나오미의 두 자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두 자부 중 하나(오르바)는 모압 땅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제 기업의 땅에 대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자는 룻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보아스는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 사실을 고지했고,
아울러 고엘로서의 의무를 완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룻과 계대 결혼하여 룻의 전 남편의 이름으로 그 기업의 땅을 잇게 하여햐 할 것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한편, 그런데 이전까지는 '기업 무르는 일'에 대한 언급만 있었으나,
이제는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그 형제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계대 결혼'(신 25:5)에 관한 내용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계대 결혼에 관한 율법은 본래 죽은 자의 형제에게 부여된 것이므로, 여기서 친족에까지 확대된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내용을 나오미가 거래의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라고주장하기도 합니다(Matthew Henry).
그러나 신명기의 계대 결혼에 관한 조항에서 언급된 '형제'(신 25:5)의 의미
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더욱 폭넓게 적용되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합니다.
*신25: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따라서 본절에서 보아스가 했던 말은 나오미가 내세운 조건도 아니고,
보아스가 첨가시킨 말도 아닙니다.
즉 그것은 율법의 확대 적용에 따른 것입니다(4:1-12 강해 참조).
6) 기업 무를 자가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무를 권리는 포기하고 보아스에게 물으라고 합니다(6절).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진 자는 단순히 나오미의 기업만 무르게 되면 자기에게 분명히 유익이 돌아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땅을 팔아도
'희년'이 되면 도로 찾을 수 있었으나(레 25:25-28),
어떤 사람이 상속자가 없는 친족의 땅을 무르게 되면 그것은 무른 자에게 영원히 속하게 되어 무른 자는 그의 기업을 확장시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자는 처음에는 선뜻 '무르리라'(4절)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5절에서 보아스의 다음 설명을 듣고 난 그 사람은
재빨리 마음을 바꾸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진 사람은, 룻과 계대 결혼하게 되어 아들을 낳게 되면 무른 그 땅이 룻을 통해 난 아들에게 상속되어 엘리멜렉 가문의 이름을 잇게 되므로 자신에게 유익은 커녕 손해만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Keil).
따라서 이 근족이 취한 자세는 하나님의 선한 율법까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이용하는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태도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진 자가 그 권리를 보아스에게 넘겨 준 이유로,
혹자는 룻이 모압 여인이며,
엘리멜렉 가정의 불행이 모압으로 이주한 탓이며,
말론과 기룐의 죽음 역시 모압 여인과 결혼한 탓으로 돌립니다(Cassel).
이외에 시리아역(the Peshitta)은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진 자가 아내를 갖고있었으므로 룻을 자기 아내로 맡게 되면 그들 사이에 논쟁과 싸움이 일고 후에는 재산 상속 문제가 까다롭게 되는 것 때문에 그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Matthew Henry).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본문상에 전혀 암시되어 있지 않은 사실 무근한 추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충실한 성경적 진술을 따라
그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이유는
재산상의 손해 때문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보아스의 호의를 확인한 나오미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후에 구속자(기업 무를 자) 보아스가 약속을 성취할 때를 기다립니다(17,18절).
그는 이 일을 매듭지을 때까지 쉬지 않을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의 안식은 보아스의 열심히 성취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구원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고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주님께서 하신 일을 빼고 나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14~16절).
나오미가 룻에게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보아스를 만난 이후 ‘이제 너는 누구냐’?는 물음입니다.
룻은 보아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말함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나일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기 전”나와 ‘들은 후’의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께서 내게 행하신 일들 중 어떤 것이 나를 가장 잘 설명해줍니까?
2) ‘더 가까운 기업 무를 자’의 이름이 숨겨집니다(4:1~6절).
죽은자의 기업을 세워야 하는 책임을 거절한 그의 이름이 ‘아무개’가 됩니다.
내 이름을 지키는 일만 중요한 줄 알았던 그의 이름은 하찮아지고,
누군가의 이름을 지켜주려 했던 ‘보아스’의 이름은 높아집니다.
이것이 죄인을 구속하신 예수님의 이름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유입니다(빌2:6~11).
3) 먼저 기업 무를 권리가 있던 사람은 재산상의 손실을 우려하여 권리를 포기합니다(4:6절).
하지만 보아스는 손해와 손실을 알고도 그 일을 선택합니다(7~10절).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하찮은 나를 위해 고귀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자기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십자가 위에서 남김없이 다 내어주셨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익과 효율을 따지는 요즘,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 있습니까?
모두가 들떠 소란한 이때 잠잠히 무릎 꿇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