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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호세아6장1~11절
제목 : 하나님이 바라시는 인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5:15)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힘써 알자’고
권유하지만 그들의 회개에 진정성이 없습니다.
달라지지 않은 그들의 삶이 이를 증명합니다.
1. 이스라엘의 피상적 회개(1~3절)
1)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1절)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뉩니다.
(1)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호세아 선지자의 권면으로 보는 견해(Keil).
(2)회개의 날에 백성들 서로가 뉘우치며 권면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
이상의 두 가지 견해 모두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 이것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태도를 독백과 대화체의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서 미래에 있을 백성들의 회개에 더 잘 부합되는 것 같습니다(Harper, Ewald, Cheyne).
즉, 1~3절은 ‘이스라엘의 참된 회개가 아니라 파상적인 회개에 대한 선지자의 비판’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를 찢으셨으나. - '찢다'의 히브리어 '타라프'는 사자가 먹이를 찢는
것처럼 심판이 가혹함을 암시합니다(5:14;시 50:22).
‘찢으셨으나’는 5:14의 ‘움켜갈지라’와 같은 단어로, 상처의 중함을 의미합니다.
*5:14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시50: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낫게 하실 것이요. - 5:14에서 예언된 멸망과 형벌은 이미 성취된 것으로 언급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가 있을 경우 심판의 자리에서 고침을 받게 될 것임이 선언됩니다.
이는 백성들을 치료하고 회복시켜 주시는 여호와의 사랑과 주권적인 섭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신 32:39).
*신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한편 이것은 여호와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백성들의 참된 회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달려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2)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2절)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빠르고 확실하게 성취될 것임을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이 숫자들은 매우 짧거나 적은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가장 중요하거나 확실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왕상17:12;왕하 9:32;잠 30:15;사 17:6;암 4:8).
그런데 유대인 학자들은 이를 연대기적으로 해석하여
'이틀'을 애굽과 바벧론 포로기로
'삼일'을 로마의 속박과 관련시키거나(Kimchi),
또는 솔로몬 성전, 스룹바벧 성전, 메시야에 의해 세워질 성전의 '세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Rashi).
이와는 달리 많은 교부들과 주석 학자들은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적용시킵니다.
즉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은 3일만에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Theodoret, Given, Calvin, Butler).
결국 본 구절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도덕적인 회복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즉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스라엘을 여호와께서 다시 소생시킬 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릴 것임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사 26:19;겔 37:1-14).
*사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 직역하면 '그의 얼굴 앞에서'입니다.
이는 여호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의 섭리와 보호 아래서 살게 되리라는 의미입니다(창 17:18;렘 30:20).
*창17: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렘30:20 “그의 자손은 예전과 같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그를 압박하는 모든 사람은 내가 다 벌하리라”
3)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3절).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힘써 여호와를 알자. - 여호와를 '아는 것'(다아트)은 우상 숭배와 배교로부터 돌아서려는 강한 열성을 내포합니다(4:1,6).
*4:1,6 “[1]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것은 계명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 된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힘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다프'는 '추적하다', '뒤따르다'란 뜻으로 여호와를 알고 섬기는 일에 온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열심히 좇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신 30:2,3).
*신30:2,3 “[2]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 '나오심'의 히브리어 '야차'는 해가 떠오르는 것을 나타냅니다(창 19:23;시 19:5).
본 구절은 여호와의 임재가 새벽처럼 틀림없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사 58:8;60:2).
*사58: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60: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비와 같이. - 여기서 '비'(게쉠)는 퍼붓거나 흡족하게 내리는 비로서(스
10:9,13) 10월 초부터 2월 말 사이에 오는 겨울비를 가리킵니다.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 '늦은 비'(말코쉬)는 추수하기 전 3-4월 중에 내리는 봄비로서 곡물의 수확에 가장 중요한 비입니다.
한편, '땅을 적시는'에 해당하는 '요레'는 원래 '이른 비'(former rain, KJV)를 뜻하나, 여기서는 하필 미완료형(또는 칼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마른 땅을 적시는'이란 의미를 갖습니다.
이와 같이 만물을 소성하게 하는 겨울비와 봄비처럼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힘써 아는 백성들에게 풍요로운 은총과 축복을 내리십니다(레 26:4;신 11:14).
*레26:4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2. 하나님의 반응(4~6절)
1)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4절).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 이 같은 여호와의 질문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에브라임과 유다를 회개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은 모두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포자기나 절망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호와의 관심이 백성들에게 집중되어 있으나,
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대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인애'(헤세드)는 여호와를 사랑하는 데서 오는 충성이며,
이웃을 온유하게 대하는 자비입니다(2:19;4:1).
*2: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4:1]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이스라엘의 인애는 '아침 구름'(아난 보케르)과 '이슬'(탈) 같아서 쉽게 사라지고 맙니다(13:3).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이는 그들의 신앙이 매우 변덕스럽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곧 경건의 가변성과 회개의 불완전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들의 선행과 충성이 피상적이고 일시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2)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라(5절).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이스라엘의 이율배반적인 태도는 급기야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습니다.
'치다'의 히브리어 '하차브'는 도끼로 나무를 베거나, 연장으로 파내거나 잘라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자는 이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조각하여 만드는 행위로 보았습니다(Jerome, Luther, Given).
그러나 이것은 심판의 직접적인 행위, 즉 파괴를 가져오는 잘라냄을 뜻합니다. 곧 선지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이
능력의 심판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사 11:4;49:2;렘 1:10).
*사11: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한편 70인역(LXX)은 '(거짓) 선지자들을 베어 넘어지게 했다'라고 번역합니다.
내 입의 말로. - '선지자들로'와 의미가 같습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을 의미합니다(히 4:12).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 원문에는 '네 심판',
곧 에브라임과 유다에게 내려지는 심판임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 심판은 마치 빛처럼 나갑니다(goes forth as the light,RSV).
즉 백성들 위에 내려지는 여호와의 심판은
햇빛과 같이 분명하게 임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심판은 명백하게 옳으며 의롭고 완전합니다.
3) 나는 인애를 원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절).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뿐만 아니라 이웃을 향한 진실한 사랑까지도 포함합니다.
만약 사랑과 진실 없이 위선적이고 공허한 제사와 번제를 드린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된 의식과 허울 좋은 희생을 역겨울 정도로 미워하십니다(사 1:11-17;암 5:21-24;미 6:6-8).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의식적인 제사와 제물보다도 더없이 나은 것입니다(막12:33).
*막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한편,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경건과 형식주의를 책망하고 긍휼과 자비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9:13;12:7).
*마9:13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2: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며 인애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이스라엘의 반역과 악행 고발(7~11절)
1)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7절).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 '아담처럼'(like Adam, Keil, Lange, Pusey).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언약을 파기하였습니다(롬 5:14).
*롬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이와 같이 에브라임과 유다도 여호와를 배반하고 언약을 지키지 않은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솽). - 이 단어는 앞의 '아담'을 장소로 생각하게 만듭니다(11:8 비교, Admah). 그러나 여기서 '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패역한 행동을 한 장소를 나타냅니다(시 14:5).
*시14:5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즉 넓게는 가나안 땅이고, 좁게는 벧엘이나,
단과 같이 우상 숭배로 더럽혀진 장소를 말합니다.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가드'는 신실치 못한 결혼 관계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반역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5:7).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한 죄악 된 위치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2)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8절).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 '길르앗'은 원래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기업으로 얻은 요단 동편의 넓은 땅을 가리킵니다(수 13:8,11,25,31).
그런데 본 구절에서는 그곳이 고을, 즉 '성읍'(키르야)으로 표현되고 있어서 해석상 어려움이 제기되었습니다.
한편 학자들은 '길르앗'을 '라못 길르앗'(수 21:38)으로 보거나(Henderson), 또는 길르앗의 중요 성읍인 '미스바'(삿 10:17,18)로 생각합나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길르앗 전체 지역이 행악자들로 가득 찬 범죄 집단임을 묘사하기 위하여 하나의 성읍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즉 길르앗 지역 전체가 행악자의 성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후자의 견해가 더 적합하게 보입니다.
어쨌든 길르앗 지역의 사람들은 매우 흉폭하고 살인적인 특성을 지닌 것으로 기록됩니다.
그 증거로 길르앗 사람 오십 명이 베가의 반역에 동참하여 브가히야를 살해한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왕하 15:25).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 원문은 '피흘림의 발자취가 뒤따른다'라는 뜻으로서 보다 생생하게 피의 현장을 묘사해 줍니다.
이는 유혈과 살인으로 얼룩진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상황을 극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살인 행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단지 살인자로 가득 찬 길르앗의 패역한 모습을 상기시킬 뿐입니다.
3)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9절).
강도 떼(게두딤) -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도적의 무리를 가리킵니다(7:1).
제사장의 무리. - '무리'의 히브리어 '헤베르'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서로 연합하는 동료나 단체를 뜻합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기 위하여 서로 협력해서 모였음을 암시합니다.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 '세겜'은 길르앗과는 달리 요단 서편에 위치한
레위 지파의 성읍이자 도피성으로서(수 20:7;21:21) 사마리아로부터 벧엘에 이르는 길못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세겜은 제사장들의 살인 장소로 언급되었습니다.
즉 제사장들의 무리는 이스라엘의 북쪽으로부터 예배 장소인 벧엘로 가는 순례자들을 세겜 길에서 살인하였습니다.
살인의 목적은 아마 약탈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의 탐욕과 잔인성을 보여줍니다.
혹자는 이 살인을 제사장들의 거짓 가르침과 사회적 착취에 대한 과장법으로 생각합니다(Chrisholm).
그러나 본 구절은 세겜 길을 점거하고 순례자들을 살인한 강도 행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 원문에 있는 '키'는 원인을 나타내지 않고, '확실히'(NASB)란 뜻으로 제사장들이 진정 사악을 행했음을 심각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악'의 히브리어 '짐마'는 주로 성적인 범죄에 사용되었으나(레18:17;19:29;삿 20:5,6) 여기서는 계획적인 책략에서 비롯되는 사악함을 의미합니다(Harper).
즉 제사장들의 온갖 가증스러운 행위가 의도적인 범죄였음을 시사합니다(잠 10:23;21:27).
4)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습니다(10절).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이스라엘 집에서 - 이는 여로보암 성소가 있는 벧엘을 가리킵니다(왕상 12:25-30). 그런데 종교의 중심지인 벧엘에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북왕국 전체의 타락을 증거합니다.
가증한 일(솨아루리야) -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일을 가리킵니다(렘 5:30;18:13).
이는 이스라엘의 범죄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증오스럽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에브라임은...더렵혔느니라 - '행음'(제누트)의 결과는 더럽혀지는 '부정'(타메)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제적인 음행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의 깊이 빠진 죄악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한편, '에브라임'은 한 지파가 아닌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입니다(4:17;5:3).
5)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11절).
유다여.- 원문에는 이 말 앞에 '감'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감'은 '또한', '똑같이', '마찬가지로'등의 뜻입니다.
유다 역시 이스라엘과 같은 형벌의 운명에 처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유다의 죄악이 진정 이스라엘보다 크거나 같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 '사로잡힘'의 히브리어 '쉐부트'는 자유가 상실되고 고통으로 억압받는 포로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사로잡힘이 앗수르나 바벧론에 의한 포로됨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배반하고 비참하게 된 이스라엘의 고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돌이킴'(슈브)은 포로에서의 정치적 귀환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진노를 돌이켜 은총과 축복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Keil, Lange, Harper).
한편 본 구절을 7:1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있으나(RSV, NEB) 별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추수할 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치르'는 곡물의 수확을 뜻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상징합니다.
즉 의인은 구원받고 악인은 멸망을 당하게 되는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렘 12:13;51:33;욜 3:13).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리라'(갈 6:7)는 말씀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정하였느니라 - 이는 심판이 유다에게도 임하도록 미리 정해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유다를 사용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Hitzig), 이스라엘과 똑같이 범죄하였던 유다 역시 심판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가장된’ 회개에 속지 않으십니다(3,5절).
이스라엘이 주장하는 인애가 쉬사라지는 구름과 이슬처럼 얼마나 피상적이고 공허한지를 드러내십니다.
진실함도 꾸준함도 없는 그들의 인애에 실망하십니다.
위기 때만 도와달라고 하는 그들의 기회주의적인 신앙을 책망하시고 회개의 진정성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회개의 열매’와 함께 드리는 나의 진실한 고백입니다.
2) 제사보다는 인애를, 번제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6절).
‘인애’없이 언약은 유지될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앎’이 없는 예배는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화려한 의식만으로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대체할 수 없고, 교리적 순결과 충성으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규모와 활동을 자랑하기 전에, 끊어진 영적 교재를 회복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이스라엘은 언제든 돌아가기만 하면 치유되고 하나님이 ‘지체 없이’, ‘어김없이’응답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1~3절).
그들이 진정 바란 것은 참회보다는 ‘빠른’(이틀 후에)
회복에, 하나님보다는 ‘풍요’(비,땅)에 있었습니다.
고백은 진지했지만, 바알종교에 물든 신앙일 뿐입니다.
자신의 변화는 없이,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뜻을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해주시기를 바라고 있다면 우리는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만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일 뿐입니다.
2) 이스라엘의 악행은 그들의 회개와 신앙이 얼마나 형식적고 위선적인지를 잘 보여줍니다(7~11절).
하나님은 지도자들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의 언약 위반과 악행을 고발하며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생명의 장소인 도피성은 행악의 성읍이 되고, 세속적 욕망에 경도된 제사장 무리는 살인도 서슴지 않을 만큼 사악합니다.
역주행하면서 안전을 기대할 수 없듯이, 언약을 어기면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지도자들이 돈과 명예와 권력앞에 인애와 진리와 정의를 포기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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