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법(坐禪法)
1. 좌선의 요지(坐禪-要旨)
대범,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있어 망념을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어 화기를 내리게 하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 망념이 쉰즉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른즉 망념이 쉬어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리라.
그러나, 만일 망념이 쉬지 아니한즉 불 기운이 항상 위로 올라서 온 몸의 수기를 태우고 정신의 광명을 덮을지니, 사람의 몸 운전하는 것이 마치 저 기계와 같아서 수화의 기운이 아니고는 도저히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할 것인 바, 사람의 육근 기관이 모두 머리에 있으므로 볼 때나 들을 때나 생각할 때에 그 육근을 운전해 쓰면 온 몸의 화기가 자연히 머리로 집중되어 온 몸의 수기를 조리고 태우는 것이 마치 저 등불을 켜면 기름이 닳는 것과 같나니라.그러므로, 우리가 노심 초사를 하여 무엇을 오래 생각한다든지, 또는 안력을 써서 무엇을 세밀히 본다든지, 또는 소리를 높여 무슨 말을 힘써 한다든지 하면 반드시 얼굴이 붉어지고 입 속에 침이 마르나니 이것이 곧 화기가 위로 오르는 현상이라, 부득이 당연한 일에 육근의 기관을 운용하는 것도 오히려 존절히 하려든, 하물며 쓸데 없는 망념을 끄리어 두뇌의 등불을 주야로 계속하리요. 그러므로, 좌선은 이 모든 망념을 제거하고 진여(眞如)의 본성을 나타내며, 일체의 화기를 내리게 하고 청정한 수기를 불어내기 위한 공부니라.
2. 좌선의 방법
좌선의 방법은 극히 간단하고 편이하여 아무라도 행할 수 있나니,
1. 좌복을 펴고 반좌(盤坐)로 편안히 앉은 후에 머리와 허리를 곧게 하여 앉은 자세를 바르게 하라.
2. 전신의 힘을 단전에 툭 부리어 일념의 주착도 없이 다만 단전에 기운 주해 있는 것만 대중 잡되, 방심이 되면 그 기운이 풀어지나니 곧 다시 챙겨서 기운 주하기를 잊지 말라.
3. 호흡을 고르게 하되 들이쉬는 숨은 조금 길고 강하게 하며, 내쉬는 숨은 조금 짧고 약하게 하라.
4. 눈은 항상 뜨는 것이 수마(睡魔)를 제거하는 데 필요하나 정신 기운이 상쾌하여 눈을 감아도 수마의 침노를 받을 염려가 없는 때에는 혹 감고도 하여 보라.
5. 입은 항상 다물지며 공부를 오래하여 수승 화강(水昇火降)이 잘 되면 맑고 윤활한 침이 혀 줄기와 이 사이로부터 계속하여 나올지니, 그 침을 입에 가득히 모아 가끔 삼켜 내리라.
6. 정신은 항상 적적(寂寂)한 가운데 성성(惺惺)함을 가지고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을 가질지니, 만일 혼침에 기울어지거든 새로운 정신을 차리고 망상에 흐르거든 정념으로 돌이켜서 무위 자연의 본래 면목 자리에 그쳐 있으라.
7. 처음으로 좌선을 하는 사람은 흔히 다리가 아프고 망상이 침노하는 데에 괴로와하나니, 다리가 아프면 잠깐 바꾸어 놓는 것도 좋으며, 망념이 침노하면 다만 망념인 줄만 알아두면 망념이 스스로 없어지나니 절대로 그것을 성가시게 여기지 말며 낙망하지 말라.
8. 처음으로 좌선을 하면 얼굴과 몸이 개미 기어다니는 것과 같이 가려워지는 수가 혹 있나니, 이것은 혈맥이 관통되는 증거라 삼가 긁고 만지지 말라.
9. 좌선을 하는 가운데 절대로 이상한 기틀과 신기한 자취를 구하지 말며, 혹 그러한 경계가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을 다 요망한 일로 생각하여 조금도 마음에 걸지 말고 심상히 간과하라.
이상과 같이, 오래오래 계속하면 필경 물아(物我)의 구분을 잊고 시간과 처소를 잊고 오직 원적 무별한 진경에 그쳐서 다시 없는 심락을 누리게 되리라.
3. 좌선의 공덕
좌선을 오래 하여 그 힘을 얻고 보면 아래와 같은 열 가지 이익이 있나니,
1. 경거 망동하는 일이 차차 없어지는 것이요,
2. 육근 동작에 순서를 얻는 것이요,
3. 병고가 감소되고 얼굴이 윤활하여지는 것이요,
4. 기억력이 좋아지는 것이요,
5. 인내력이 생겨나는 것이요,
6. 착심이 없어지는 것이요,
7. 사심이 정심으로 변하는 것이요,
8. 자성의 혜광이 나타나는 것이요,
9. 극락을 수용하는 것이요,
10. 생사에 자유를 얻는 것이니라.
4. 단전주(丹田住)의 필요
대범, 좌선이라 함은 마음을 일경(一境)에 주하여 모든 생각을 제거함이 예로부터의 통례이니, 그러므로 각각 그 주장과 방편을 따라 그 주하는 법이 실로 많으나, 마음을 머리나 외경에 주한즉 생각이 동하고 기운이 올라 안정이 잘 되지 아니하고, 마음을 단전에 주한즉 생각이 잘 동하지 아니하고 기운도 잘 내리게 되어 안정을 쉽게 얻나니라.
또한, 이 단전주는 좌선에만 긴요할 뿐 아니라 위생상으로도 극히 긴요한 법이라, 마음을 단전에 주하고 옥지(玉池)에서 나는 물을 많이 삼켜 내리면 수화가 잘 조화되어 몸에 병고가 감소되고 얼굴이 윤활해지며 원기가 충실해지고 심단(心丹)이 되어 능히 수명을 안보하나니, 이 법은 선정(禪定)상으로나 위생상으로나 실로 일거 양득하는 법이니라.
간화선(看話禪)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혹 이 단전주법을 무기(無記)의 사선(死禪)에 빠진다 하여 비난을 하기도 하나 간화선은 사람을 따라 임시의 방편은 될지언정 일반적으로 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니, 만일 화두(話頭)만 오래 계속하면 기운이 올라 병을 얻기가 쉽고 또한 화두에 근본적으로 의심이 걸리지 않는 사람은 선에 취미를 잘 얻지 못하나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좌선하는 시간과 의두 연마하는 시간을 각각 정하고, 선을 할 때에는 선을 하고 연구를 할 때에는 연구를 하여 정과 혜를 쌍전시키나니, 이와 같이 하면 공적(空寂)에 빠지지도 아니하고 분별에 떨어지지도 아니하여 능히 동정 없는 진여성(眞如性)을 체득할 수 있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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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선법(坐禪法)]
좌선을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 원불교의 좌선법은 단전주법(丹田住法) 이다.
좌선을 할 때의 몸 가짐은 반가부좌 또는 결가부좌로 하고, 단정하고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호흡은 고르게 하되 들이 쉬는 숨은 조금 강하고 길게, 내 쉬는 숨은 조금 약하고 짧게 한다.
이와 같이 조심(彫心)·조신(調身)·조식(調息)이 되어야 좌선을 잘할 수 있게 된다.
①가능하면 환경이 고요하고 안전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한다. 시끄러운 곳이나 욕심이 일어나기 쉬운 곳은 피하는 것이 좋다. 겨울에는 지나치게 춥지않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통풍이 잘 되는 곳이 좋다.
②배가 부를때나, 배가 고플 때나, 잠이 부족할 때나, 지나치게 피로할 때는 피하는 것이 좋다.
③사치스런 옷이나, 떨어지고 더러운 옷이나, 너무 두껍거나 얇은 옷은 좋지 않다. 간편한 옷에 허리끈을 여유있게 하는 것이 좋다.
④앉은 자세는 좌복을 펴고 반가부좌 또는 결가부좌로 편안하게 앉고, 머리와 허리를 곧게하여 자세를 바르게 한다. 온 몸의 힘을 배꼽 아래 단전에 툭 부리고 적적성성한 마음을 갖고 숨을 고르게 한다.
⑤초보자는 눈을 반쯤 떠서 수마를 쫓는 것이 좋고, 어느 정도 힘을 얻었을 때에는 눈을 감고 하는 것이 좋다, 다리가 아플 때에는 조용히 바꾸되, 바구지 않고도 계속할 수 있도록 단련한다. 사심 잡념이 보통때보다 많이 일어나더라도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고 망념인 줄만 알면 자연히 없어지게 된다. 또는 한가지 생각에 집중하면 잡념이 차차 하나로 통일되므로, 통일된 이후에 무심이 되려고 하면 차차 사심 잡념이 없어지게 된다.
⑥좌선을 생활화하기 위해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좋다. 좌선이 잘 되면 차츰 무시선 무처선을 단련한다. 좌선도 하지 않으면서 무시선 무처선을 먼저 하려고 하면 결코 되지 않는다. 무시선 무처선은 좌선에 힘을 얻어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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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자신 대면하는 길
21세기를 살아가려면 적어도 두 가지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하나는 인터넷, 그리고 또 하나는 명상이다.
이제 이 말은 서구에서 뿐 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유효하다. 인터넷이 정보의 바다를 헤쳐나가기 위해 필요한 ‘디지털 도구’라면, 명상은 삭막한 디지털 세계에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아날로그식 무장’이라고 할 수 있다.
I보보스-디지털시대의 엘리트 J의 저자 데이비드 브룩스는 명상을 하기 위해 몰려가는 엘리트들의 행렬을 ‘소울 러시(soul rush)’라고 표현했다.
요즈음 선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현실에서의 번거로움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단지 명상의 적정주의(寂靜主義)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좌선은 명상이나 단순히 번뇌를 퇴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좌선은 “기운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마음과 기운을 단전에 주하되 한 생각이라는 주착도 없이 하여, 오직 원적 무별한 진경에 그쳐 있도록 함이니, 이는 사람의 순연한 근본정신을 양성하는 방법”이다. 즉 본래 청정하고 온전한 자신을 대면할 수 있도록 번뇌망상에 사로잡혀 주객이 바뀐 사람들로 하여금 본 고향을 찾아 ‘참 나를 찾아가는 길’로써 선(禪)의 강령은 식망현진(식망顯眞), 수승화강(水昇火降)이다.
새벽 좌선은 깨달음을 향한 새 출발
취침전 좌선은 하루의 때를 깨끗이 씻는 수행
선을 할 때의 표준으로 대산종사께서는 “적적한 가운데 성성함은 옳고(寂寂??是), 적적한 가운데 아무 생각 없는 것은 그르며(寂寂無記非),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은 옳고(??寂寂是), 성성한 가운데 산란함은 그르다(??散亂非)”고 하셨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생의 참된 삶과 가치를 찾아보지도 못한 채 죽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조용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참되고 값진 각자의 절대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과 지혜를 좌선의 실천으로 확립해 보자.
새벽녘의 좌선은 깨달음을 향한 새 출발이며, 취침전의 좌선은 하루의 때를 깨끗이 씻는 자기 수행의 생활인 것이다.
대종사님께서는 아침 좌선을 하지 않으면 밥을 굶도록 하셨다며 지금도 철저히 수행하시는 선진님을 모신 적이 있다.
또한 대산종사께서는 저녁에 잠자기 전에 꼭 짧게라도 선을 하라고 하셨다. 하루 중 언제 어디서라도 5분 혹은 10분이라도 좋고 30분, 50분이면 더더욱 좋다. 좌선이 생활화된 사람은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그 어느 장소에서라도 쉽게 선을 실천할 수 있어 무시선 무처선의 생활을 하게 된다.
<원불교대학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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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전 토굴속으로
박혜훈 교무의 정전강의 33
초창기 선진님들께서 대종사님을 모시고 공부하던 때의 한 장면이 떠올려진다. 동틀 무렵 새벽별이 반짝이는 한 공간에 대중이 모여 좌선을 하고 있다. 우주의 중심이 된 듯 반듯하게 앉은 모습에서 맑은 서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전날에 고된 일로 밀려오는 졸음과 싸우는 일부도 보인다. 좌선시간이 끝날 무렵 대종사께서 물으신다. "그대들이 이와 같이 오는 잠을 참고 좌선을 하고 있으니 장차 무엇을 하려 함인가." 대부분 단잠에 취해 있을 시각, 왜 이처럼 몸을 이기며 앉아 있는 걸까? 조용히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본 뒤 한 제자가 대답한다. "사람의 정신은 원래 온전하고 밝은 것이오나, 욕심의 경계를 따라 천지만엽으로 흩어져서 온전한 정신을 잃어버리는 동시에 지혜의 광명이 또한 매(昧)하게 되므로, 일어나는 번뇌를 가라 앉히고 흩어지는 정신을 통일시키어 수양의 힘과 지혜의 광명을 얻기 위함이옵니다."
좌선에 몰입하는 단 몇 시간 또는 몇 분의 공덕은 나머지 하루 일과 속에서 매몰되기 쉬운 참다운 자신을 잃지 않도록 밑받침이 되는 것이다. 온전한 정신과 지혜의 광명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첨예하게 부딪쳐오는 경계를 통해 본연의 자신을 잠시라도 잃지 않음으로 확인해가는 것이다.
정보와 지식의 홍수로 인해 채워야 할 것은 한정 없고, 채우지 못한 공허함이 모두 번뇌를 만든다. 또한 그 번뇌에 집착하여 몸과 마음이 불균형 상태로 치닫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닐까. 때문에 채우기 이전에 비움, 잔잔한 호수에 푸른 하늘과 숲이 그 모습을 그대로 비추이듯 우주자연과 함께하는 생생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유가 꼭 필요한 것이다.
좌선, 반좌(盤坐)로 편안히 앉은 후에 머리와 허리를 곧게 세운다. 몸과 마음에 불편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호흡을 자연스럽고 고르게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나 눈에 보이는 모습에 마음을 머물게 하지 않고 몸의 중심인 단전 속으로 호흡을 따라 갈 뿐이다. 도심을 피해 깊은 산속에만 있는 것이 토굴이겠는가. 마음의 번뇌를 놓고 단전이라는 굴레 없는 토굴에 머물 수 있다면 지금 여기 앉은 작은 공간이 우주 속에 장만된 거대한 토굴이지 않겠는가. 앉아서 하는 선, 좌선은 이렇게 누구나 쉽게 편히 할 수 있는 법이다.
살아있는 고요함, 어디에 묶이지도 흐르지도 않는 강인한 부드러움, 모순을 넘어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자신을 찾기 위해 앉아보자. 앉아서 온 몸과 마음이 자각함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 호흡 한 마음의 자각이 이 순간을 온전하게 하고 나의 하루를 온전하게 할 것이다.
천지만엽[千 : 일천 천, 枝 : 가지 지, 萬 : 일만 만, 葉 : 입 엽]
천 개의 가지와 만개의 잎. 여러 갈래로 나뉘어 어수선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소태산대종사는 사람의 정신이 욕심의 경계를 따라 천지만엽으로 흩어진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면서 정신수양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매[昧 : 새벽 매]
지혜가 어둡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 사물을 잘 잊어버리다. 치매 현상이 있다.
공덕[功 : 공 공, 德 : 큰 덕]
(1) 공로와 인덕(仁德). 악을 제거하는 것을 공(功), 선이 가득한 것을 덕(德)이라 한다. 착한 일을 많이 행한 힘 또는 선업(善業). 세상 사람들이 물질문명과 도덕문명의 혜택으로 편리하게 살게 되므로 여러 발명가와 도덕가에게 감사해야 하지만 물질문명은 그 공덕에 국한이 있고, 도덕문명은 그 공덕에 국한이 없다(《대종경》 교의품32). 덕을 쓰더라도 상 없는 대덕을 써야 영원히 그 공덕이 멸하지 않는다.(《대종경》 실시품26)
같은 것을 가지고도 국한 있게 쓰는 것보다 국한 없이 써야 공덕이 더 크다(《대종경》 변의품27). 선은 숨겨두는 것이 그 공덕이 커지고 악은 들추어내는 것이 그 뿌리가 얕아진다(《대종경》 요훈품24). 정산종사는 심공덕(心功德)ㆍ행공덕(行功德)ㆍ법공덕(法功德)을 밝히고 특히 법공덕을 모든 공덕 가운데 근본이 된다고 했다(《정산종사법어》 무본편18). 또 복을 짓되 상(相) 없이 지어야 큰 공덕이 된다고 했다(《정산종사법어》 무본편34).
(2) 좋은 일을 많이 쌓은 공(功)과 불도(佛道)를 깊이 수행한 덕. 불도를 닦아서 이룬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 미쳐가게 하는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번뇌(煩: 괴로워할 번, 惱 : 뇌 뇌)
사념(邪念)·망념(妄念)·잡념(雜念)·미혹(迷惑)·무명(無明) 등 경계에 끌려 다니거나,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소란케 하는 정신작용의 총칭. 부처마음을 보리심이라고 하는데 대해 중생마음을 번뇌심이라고 한다. 육체의 병은 몸을 괴롭혀 고통스럽게 하고, 번뇌는 마음을 괴롭혀 어지럽게 한다. 경계에 마음이 끌려다니면 번뇌심이 일어나고, 번뇌심이 일어나면 괴로움에 허덕이게 되고 온갖 죄업을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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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전주는 선법의 시작과 끝
마음은 찰나에 구백 번이나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다. 찰나가 75분의1초이니 1초에 마음이 육만칠천오백 번이나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좌선이란 이러한 마음을 일경(一境)에 주(住)하여 모든 생각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편을 따라 코끝에, 미간(眉間)에, 배꼽에, 기식(氣息)에, 불상(佛想)에, 월륜(月輪)에, 부정관(不淨觀)으로, 화두에, 묵조(默照)에, 단전(丹田) 등, 주(住 : 살 주)하는 법이 수 없이 많으나 원불교에서는 단전에 주하는 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단전주를 택한 이유는 마음을 머리나 외경에 주하면 생각이 동하고 기운이 올라 마음의 안정이 잘되지 않으나 마음을 단전에 주하면 생각이 잘 동하지 아니하고 기운도 잘 내리게 되어 마음의 안정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단전주는 수승화강이 잘 되어 건강상으로도 긴요한 법이라 일거양득하는 법인 것이다.
마음과 기운을 단전에 어떻게 주(住)할 것인가?
마음과 기운의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 마음과 기운은 따로 따로 작용하는 것이면서 마음이 가는데 기운이 따르고 기운이 가는데 마음이 따르는 것이며 마음과 기운은 원래 하나이다.
마음은 알아차리는 것이라면 기운은 느끼는 것이므로 단전에 기운이 주해지지 않으면 마음으로 알아차릴 수가 없고 마음이 단전에 주해지지 않으면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은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 생각이 일어나면 다른 생각은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다. 마음과 기운이 단전에 주해지면 다른 모든 생각들은 스스로 사라지고 단전에 주해진 그 마음과 기운을 바라보고만 있으면 주(住)한 바 없이 주하는 것이 되어 단전주하고 앉아 있으면 좌선이 되는 것이며 단전주하고 서 있으면 입선이 되고 단전주하고 누워 있으면 와선이 되며 단전주하고 걸어가면 행선이 되는 것이다.
단전주선(禪)은 지(止 : 그칠 지)와 관(觀 : 볼 관)을 함께 하는 선법이다. 마음을 단전에 주하는 것이 지(止)법이라면 단전에 주해져 있는 그 마음을 바라만 보는 것이 관(觀)법이다.
성품의 원리가 고요하고 두렷한 마음을 정신이라 하며 그 정신에서 분별이 나타날 때가 마음이니 단전에 마음을 주하면 분별심은 사라지고, 단전에 주(住)해진 그 마음을 관(觀)하고 있으면 주착심은 없어지는 것이다.
단전주를 바르게 하는 것이 선법(禪法)의 시작이요 끝이라 할 수 있다.
단전주법(丹田住法)
원불교에서 주장하는 좌선법으로 좌선할 때에 기운을 단전에 모으는 방법. 단전주선법(丹田住禪法)이라고도 한다. 마음을 단전에 모아 사심 잡념을 일으키지 않고 청정일심을 얻는 좌선법이다. 과거 불교에서 전해 내려오던 대표적인 좌선법이 간화선과 묵조선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20여년 간의 수행 끝에 단전주법을 주장하였다. 단전주법은 간화선이나 묵조선처럼 앉는 자세는 같으나, 간화선이 좌선할 때 화두를 들고, 묵조선이 원적무별한 상태에서 정진하는데 대하여, 단전에 정신 기운을 집중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는 세 개의 단전이 있다. 얼굴의 두 눈썹 사이를 상단전, 가슴의 두 젖꼭지 사이를 중단전이라고 한다. 보통 말하는 단전은 하단전을 지칭한다. 사람의 육신의 중심 부분이 하단전이다. 단전주법은 간화선과 묵조선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조화시킨 것이다. 단전주법은 묵조선에 가깝되, 마음을 단전에 집중하고 화두는 들지 아니한다. 화두는 좌선 시간이 끝날 무렵이나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잠간씩 연마한다. 단전주법은 처음에는 기단(氣丹)을 위주하되, 수행이 깊어지면 심단(心丹)에 주력한다. 심단이 되지 못하고 기단만 되면 자칫 몸에 병을 얻기 쉽다. 그래서 기단에서 출발하여 심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단전주가 잘 되면 수승화강이 잘 되고, 항상 성성적적한 기운으로 원기(元氣)가 충실해지며, 기단과 심단이 잘 되어 극락을 수용하게 된다. 좌선 할 때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단전에 기운을 집중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정신통일이 잘 된다. 날씨가 추울 때에도 단전에 기운을 모으면 추위를 덜 느끼게 된다. 사람 몸의 중심은 단전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단전주의 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단전주법은 인간의 심신을 건강하고 명랑하게 만들어 준다.
선법(禪法)
⑴ 좌선·참선하는 법. ⑵ 경론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부처님의 심인을 전해주는 것. 이심전심의 비법. ⑶ 스스로 참선을 통해서 마음을 찾고 깨치는 법.
일경[一境]
⑴ 같은 경계. 육경(六境) 또는 천만 경계 중에서 똑 같은 경계. 그러나 똑같은 경계라 할지라도 대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이를 일경사견(一境四見)·일경사심(一境四心)·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고도 한다.
⑵ 한 경계. 천만 경계를 모아서 하나의 경계가 되는 것. 이 한 경계 조차도 놓아버리면 곧 해탈 경계가 된다.
주[住 : 살 주]
(1) 머무르는 것. 머물러 사는 곳 즉 거처. 의(衣)ㆍ식(食)과 함께 인간이 살아가는 삼요소 중의 하나.
(2) 마음이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것.
방편[方便]
(1)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하는 편리한 수단.
(2) 불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교묘하고 자비심이 넘치는 수단. 방(方)은 방법, 편(便)은 편리ㆍ편용(便用)의 뜻. 정직을 방(方)이라 하고,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을 편(便)이라 하여, 일체중생을 불쌍히 여기어 자기 자신의 편안함이나 이익을 따지지 않는 것. 일체중생의 근기에 따라 때와 장소에 맞게 방법과 수단을 편리하게 사용한다. 부처님의 방편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천만방편이라 한다. 그런데 방편은 상대방이 방편인 줄 모르게 사용해야 한다. 만약 방편인 줄 알게 되면 그 방편은 술수(術數)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깨치지 못한 사람이 쓰는 방편은 술수가 되어 버리기 쉽다. 근기가 아직 성숙하지 못하여 깊고 묘한 법을 받기 어려운 중생을 진리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권도(權道)로 설한 낮고 보잘것없는 법문. 이 경우에 권가(權假)방편ㆍ선교(善巧)방편이라 한다. 불보살도 사람들의 지혜가 어두웠던 시대에는 방편을 많이 사용하나, 지혜가 밝은 시대에는 방편을 잘 쓰지 않고 직언 직설(直言直說)을 위주로 하게 된다.
중생제도에 목적을 둔 대승불교에서는 이 방편을 중요시하여 설법하는 장소와 상대에 따라 갖가지 방편이 설명되고, 경전에 따로 ‘방편품(方便品)’을 두는 예가 많다. 특히 《묘법연화경》의 ‘방편품’은 유명하다. 또 이 방편을 중시하여 보살의 실천수행의 덕목인 육바라밀(六波羅蜜)에 더하여 방편바라밀이 설정되기도 했다. 소태산대종사는 현대와 같이 인지가 발달한 시대에는 방편보다 직설을 위주로 모든 교법을 밝혀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방편을 모두 무용하다고 보는 견해는 아니다.
단전[丹田]
영단(靈丹)을 제조하고 저장하는 부위. 상ㆍ중ㆍ하 3단전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하단전을 가리키며, 배꼽 아래 세 치(臍下三寸) 정도되는 곳이다. 양생(養生)의 내단술(內丹術)에서는 상단전은 이마의 양미간(兩眉間)으로 이환(泥丸)ㆍ건정(乾頂)ㆍ천곡(天谷)ㆍ내원(內院)이라 부르며 신(神)의 본거, 중단전은 가슴의 심장 아래 한 치 들어간 곳으로 강궁(絳宮)ㆍ황당(黃堂)ㆍ토부(土府)ㆍ현규(玄竅)ㆍ단중(膻中)이라 부르며 기(氣)의 본거, 하단전은 배꼽 아래 하복부로 기해(氣海)ㆍ신로(神爐)ㆍ천근(天根)ㆍ곤로(坤爐)ㆍ토부(土釜)라 부르며 정(精 : 정할 정)의 본거로 본다.
하단전에 호흡과 의식의 집중으로 정을 만들면 기가 충실해지고(煉精化氣), 이에 따라 중단전에 기를 모으면 신이 충실해지며(煉氣化神), 상단전에 신이 모이면 도에 합한다(煉神合道)고 말한다. 기공(氣功)에서는 기를 체내에 돌려 순환시키는 주천(周天)의 방법을 취하고 있는데, 하단전에 모아진 기를 미관(尾關)을 거쳐 척추의 독맥(督脈)을 통해 올려 머리끝 곤륜(崑崙)에 이르고, 다시 앞의 임맥(任脈)을 통해 하단전으로 끌어 되돌림으로써 양생을 꾀한다.
원불교에서 단전은 하단전을 가리키며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원리로 설명한다. 단전주법에 의한 좌선을 통하여 신장의 물기운을 끌어올리고 심장의 불기운을 내림으로써 심신의 조화를 꾀한다. 《정전》 ‘좌선법’에서는 “마음을 단전에 주하고 옥지(玉池)에서 나는 물을 많이 삼켜내리면 수화가 잘 조화되어 몸에 병고가 감소되고 얼굴이 윤활해지며 원기가 충실해지고 심단(心丹)이 되어 능히 수명을 안보하나니, 이 법은 선정(禪定)상으로나 위생상으로나 실로 일거양득하는 법이니라” 했다.
수승화강(水昇火降)
좌선을 할 때, 몸의 물기운(水氣)을 위로 오르게 하고, 불기운(火氣)을 아래로 내리게 하는 것. 물기운은 청정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이며, 불기운은 시끄럽고 탁하고 어지러운 것이다. 좌선이란 마음에 있어서 망념을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어서는 화기를 내리게 하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망념이 쉬어야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르면 망념이 쉬어서 몸과 마음이 한결같이 편안하고 상쾌해진다. 수기가 오르는 사람은 항상 마음이 편안하고 기운이 맑으며, 화기가 오르는 사람은 마음이 요란하고 기운이 탁하다. 집에 불이 나면 빨리 꺼야하듯 화기가 오르면 빨리 수기를 올리고 화기를 내려야 한다. 화기가 잘 오르는 사람은 머리가 잘 아프고 화를 잘 내게 된다. 수기가 많은 사람은 항상 냉정하고 침착하며, 화기가 많은 사람은 항상 성급하고 남과 다투기를 잘 하게 된다.
기운[氣運]
(1) 생물이 살아 움직이는 힘.
(2)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히 차서 만물이 나고 자라는 힘의 근원. 오관(五官)으로 느끼기는 하나 눈에 띄거나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말한다. 정산종사는 영지(靈知)가 주가 되어 기운을 머금은 즉 동물이 되고, 기운이 주가 되어 영지를 머금은 것이 식물이라 했다(《정산종사법어》 원리편15).
(3) 시세가 돌아가는 형편.
두렷하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 맑고 온전하다는 뜻. 어떤 일이 헝클어지거나 애매모호하지 않고 확실하고 분명하다는 뜻. 보름달이 일그러지지 않고 둥글고 밝다는 뜻. 일원의 진리가 모자람이 없이 가득 차고, 애매함이 없이 확실하고 분명하다는 뜻이다.
망념[妄念]
망령된 생각. 망상(妄想)과 같은 말. 경계에 끌려다니는 중생의 마음. 분별시비심ㆍ사량계교심ㆍ시기질투심ㆍ삼독오욕심ㆍ번뇌망상심 등으로 정견을 하지 못하고 망견에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오관(五官)
사람의 다섯가지 감각기관.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의 감각 기능. 인체가 외계의 상태 및 그 변화를 지각하는 방법 또는 기능.
오관[五觀]
승려가 식사하기 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야 할 다섯 가지.
(1) 이 음식이 여기에 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생각함.
(2) 이 음식을 받을 만한 덕행을 갖추었는가를 생각함.
(3) 마음의 허물은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함.
(4) 이 음식을 약으로 여겨 몸의 쇠약을 면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함.
(5)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이 음식을 받는다고 생각함.
영지[靈知]
(1) 신령스럽게 앎. 신령스러운 지혜.
(2) 진리의 소소영령(昭昭靈靈)함을 나타내는 말.
(3) 정신에서 발현되는 지혜. 마음에 분별과 주착이 없는 가운데 영묘하게 앎이 나타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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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자연의 본래 자리를 찾아서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있어 망념을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어 화기를 내리게 하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좌선의 요지).
우주는 영과 기와 질로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소우주인 인간도 영과 기와 질로써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좌선을 하는데 조신(調 : 고를 조, 身 : 몸 신)과 조식(調 : 고를 조, 息 : 숨쉴 식)과 조심(調 : 고를 조, 心 : 마음 심)이 필요한데 질(質 : 바탕 질)을 고르게 하는 방법을 조신(調身)한다 하고, 기(氣)를 고르게 하는 방법을 조식(調息)이라 하고 기(氣)인 호흡을 고르는 것이며, 영(靈)인 마음을 고르게 하는 방법을 조심(調心)이라 하는 것이다.(調 : 고를 조)
조신(調身)의 목적은 조식(調息)에 있고, 조식(調息)의 목적은 조심(調心)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을 고르는 것은 호흡을 고르는데 도움이 되는 자세라야 하며 호흡을 고르는 것은 호흡을 고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마음을 고르는데 도움이 되는 호흡이라야 하는 것이다.
머리와 허리를 곧게 하고 에너지 소모가 가장 적게 되면서 편안한 자세가 몸을 고르는 조신(調身)의 방법이며, 호흡을 고르는 조식법(調息法)은 자세를 바르게 한 후 마음과 기운을 단전에 주(住)하고 단전으로부터 들고 나는 숨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이 관(觀 : 볼 관)하는 것이다.
이때 주의할 점은 마음이 들숨과 날숨을 따라 다니지 말고 단전에 주(住)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마음을 고르는 조심(調心)의 표준은 적적(寂寂 : 고요할 적)한 가운데 성성(惺惺 : 영리할 성)함을 가지고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을 가질지니, 만일 혼침에 기울어지거든 새로운 정신을 차리고 망상에 흐르거든 정념으로 돌이켜서 무위자연의 본래 면목 자리에 그쳐 있는 것이다.
마음은 멈추면(止) 적적해지고 바라만 보면(觀) 성성해 지는 것이다.
마음과 기운을 단전에 주하는 단전주를 통하여 마음을 멈추고 단전에 멈추어진 그 마음을 관(觀)하여 적적성성 성성적적을 표준 잡아 원적무별한 진경에 들어야 한다.
좌선을 하면 경거망동하는 일이 차차 없어지며, 육근 동작에 순서를 얻고, 병고가 감소되어지며, 기억력이 좋아지고, 인내력이 생겨나며, 착심이 없어지며, 사심이 정심으로 변하고, 자성의 혜광이 나타나는 것이며, 극락을 수용할 수 있고, 생사에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열 가지 공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좌선의 공덕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좌선의 원리와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좌선을 하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승의 지도가 필요한 것이다.
진성(眞性)
⑴ 우리들의 본래 마음·자성·성품·본성을 말한다. 거짓이 아닌 것을 진(眞)이라 하고, 변하지 않는 것을 성(性)이라 한다.
⑵ 우주 만물의 본체. 진여.
⑶ 인위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성질. 천부적·천성적인 성질. 순진하고 진실한 성질.
⑷ 의사성(疑似性)·유사성이 아닌 참된 증세의 병.
영·기·질(靈氣質)
우주 만유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를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 영(靈)은 우주 만유의 본체, 영원불멸하는 본래 성품. 기(氣)는 만유의 생생약동하는 기운, 개체를 생동케 하는 힘. 질(質)은 우주 만물의 바탕, 사물을 이루는 형체. 사람을 비롯한 우주 만물은 다 영·기·질의 세가지 기본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소우주(小宇宙)
인간의 입장에서 우주 전체를 대우주라 하고, 인간 개개인을 소우주라 하다. 이는 인간과 우주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성립되며, 대우주에 성립되는 법칙을 소우주인 인간에게 그것을 반영하여 성립시킬수 있고, 또한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대우주를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데에서 대우주 소우주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대우주를 축소하면 소우주가 되고, 소우주를 확대하면 대우주가 된다.
관(觀 : 볼 관)
⑴ 진리를 확실하게 깨치는 것, 도리를 달관하는 것.
⑵ 선정(禪定)에 들어가서 지혜로써 상대되는 경계를 자세히 식별하는 것.
⑶ 마음으로 형상 없는 세계를 확실히 보는 것, 허망이나 미혹을 잘 분별하여 보는 것.
혼침(昏沈)
⑴ 정신이 아주 혼미해 지는 것. 정신이 어지러워 사리분별을 잘못 하는 것. ⑵ 좌선할 때 정신이 적적성성하지 못하고 수마에 빠지거나 무기공에 떨어지는 것. ⑶ 마음이 울적하고 우울해 지는 것.
무위자연(無爲自然)
⑴ 무위의 진리를 깨친 경지. 깨달음의 세계는 집착을 떠난 공(空)의 세계이며, 진리 그 자체로서 절대자유의 경지이다. ⑵ 사람의 인위적인 힘을 들이지 아니한 천연 그대로의 자연. 곧 인공(人工)을 보태지 아니한 생긴 그대로의 자연. 사람의 마음의 입장에서 보면 지식·상식·예의·교양 등에 물들지 아니한 동심(童心)의 세계. 물질적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적 자연.
본래면목(本來面目)
사람마다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자성불(自性佛). 천연 그대로여서 조금도 인위적인 조작이 섞이지 않는 진실한 모습. 일체중생의 본래면목은 구족원성(具足圓成)한 것이다. 본분사(本分事)·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고도 한다.
적적성성(寂寂惺惺)
(1)선(禪)의 진경(眞境)을 나타내는 말. 적적은 고요하고 고요하여 일체의 사량 분별·번뇌 망상이 텅 비어버린 경지. 성성은 소소영령한 것. 좌선의 진경은 적적무기(寂寂無記)나 성성산란(惺惺散亂)이 아니고, 적적성성·성성적적한 경지이다.
(2)적적은 진리의 체(體), 성성은 진리의 용(用), 적적은 진공, 성성은 묘유, 적적은 공적, 성성은 영지.
원적무별(圓寂無別)
⑴ 마음 속에 번뇌 망상을 다 끊어버리고 청정무구한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서 일체의 사량 분별이 잠자는 상태. 선정(禪定)을 잘하면 원적무별한 자성을 찾아서 진리와 합일된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원불교에서는 살아서의 원적무별한 청정자성심 얻기를 강조한다.
⑵ 원적, 곧 열반을 얻으면 모든 차별이 없어진다는 말.
진경(眞境)
⑴ 우리의 자성(自性)·성품을 나타내는 말. 우리의 본래 면목이 곧 자성청정심이라 거기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고 오직 진실 그대로라는 뜻.
⑵ 실지 그대로의 경계. 실제의 경지.
착심(着心)
⑴ 사물에 집착하는 마음, 사랑하는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 등에 집착하는 마음.
⑵ 재색명리·처자권속·부귀영화 등 세속적 가치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 착심을 떼지 못하면 죄업의 바다에 빠지게 된다. 착심 떼는 공부가 생사 해탈 공부다.
자성(自性)
⑴ 사물(존재 또는 현상)의 본성·본체.
⑵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부처를 이룰 수 있는 본래성품. 일원상의 진리 그대로인 근본 마음. 자성청정심·본래면목·불성·본성 등 여러가지로 부른다. 자성을 세가지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
요란하지 않는 마음을 자성의 정(定),
어리석지 않는 마음을 자성의 혜(慧),
그르지 않는 마음을 자성의 계(戒)라고 한다.
고요한 마음·지혜로운 마음·바른 마음을 찾아 기르는 것이 곧 삼학수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