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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姜尙)
태조 1권, 1년(1392 임신/명홍무(洪武) 25년) 7월 28일(정미) 3번째기사
태조의 즉위 교서
중외(中外)의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 기로(耆老), 군민(軍民)들에게 교지를 내리었다.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아서 군장(君長)을 세워, 이를 길러 서로 살게하고, 이를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 그러므로 군도(君道)가 득실(得失)이 있게 되어, 인심(人心)이 복종과 배반함이 있게되고, 천명(天命)의 떠나가고 머물러 있음이 매였으니, 이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홍무(洪武) 25년(1392) 7월 16일 을미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이 말을 합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기를, ‘왕씨(王氏)는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없이 세상을 떠남으로부터 신우(辛禑)가 사이를 틈타서 왕위를 도적질했다가, 죄가 있어 사양하고 물러갔으나, 아들 창(昌)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므로 국운(國運)이 다시 끊어졌습니다.
다행히 장수(將帥)의 힘에 힘입어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으로써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하였으나, 곧 혼미(昏迷)하고 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므로, 여러 사람이 배반하고 친척들이 이반(離叛)하여 능히 종사(宗社)를 보전할 수 없었으니, 이른바 하늘이 폐하는 바이므로 누가 능히 이를 흥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직(社稷)은 반드시 덕(德)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고, 왕위는 오랫동안 비워둘 수가 없는데, 공로와 덕망으로써 중외(中外)가 진심으로 붙좇으니, 마땅히 위호(位號)를 바르게 하여 백성의 뜻을 안정하게 하소서.’하였다.
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이 책임을 능히 짊어질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요청도 거절할 수가 없으며, 하늘의 뜻도 거스릴 수가 없습니다.’하면서, 이를 고집하기를 더욱 굳게 하므로, 나는 여러 사람의 심정에 굽혀 따라, 마지못하여 왕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高麗)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하게 한다. 이에 건국(建國)의 초기를 당하여 마땅히 관대한 은혜를 베풀어야 될 것이니, 모든 백성에게 편리한 사건을 조목별로 후면(後面)에 열거(列擧)한다.
아아, 내가 덕이 적고 우매하여 사정에 따라 조치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데, 그래도 보좌하는 힘을 힘입어 새로운 정치를 이루려고 하니, 그대들 여러 사람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게 하라.
1. 천자는 칠묘(七廟)180)를 세우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181)를 세우며, 왼쪽에는 종묘(宗廟)를 세우고 오른쪽에는 사직(社稷)을 세우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그것이 고려 왕조에서는 소목(昭穆)182)의 순서와 당침(堂寢)의 제도가 법도에 합하지 아니하고, 또 성밖에 있으며, 사직(社稷)은 비록 오른쪽에 있으나 그 제도는 옛날의 것에 어긋남이 있으니, 예조(禮曹)에 부탁하여 상세히 구명하고 의논하여 일정한 제도로 삼게 할 것이다.
1. 왕씨(王氏)의 후손인 왕우(王瑀)에게 기내(畿內)의 마전군(麻田郡)을 주고,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하여 왕씨(王氏)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나머지 자손들은 외방(外方)에서 편리한 데에 따라 거주하게 하고, 그 처자(妻子)와 동복(僮僕)들은 그전과 같이 한 곳에 모여 살게 하고, 소재관사(所在官司)에서 힘써 구휼(救恤)하여 안정된 처소를 잃지 말게 할 것이다.
1. 문무(文武) 두 과거(科擧)는 한 가지만 취하고 한 가지는 버릴 수 없으니 중앙에는 국학(國學)과 지방에는 향교(鄕校)에 생도(生徒)를 더 두고 강학(講學)을 힘쓰게 하여 인재를 양육하게 할 것이다.
그 과거(科擧)의 법은 본디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뽑았던 것인데, 그들이 좌주(座主)183)니 문생(門生)이니 일컬으면서 공적인 천거로써 사적인 은혜로 삼으니, 매우 법을 제정한 뜻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중앙에는 성균정록소(成均正錄所)184)와 지방에는 각도의 안렴사(按廉使)가 그 학교에서 경의(經義)에 밝고 덕행을 닦은 사람을 뽑아, 연령, 본관(本貫), 삼대(三代)와 통(通)한 바 경서(經書)를 갖추어 기록하여 성균관장(成均館長)에게 올려, 둘째 시험장에서 통한 바 경서를 시강(試講)하되 《사서(四書)》로부터 《오경(五經)》과 《통감(通鑑)》이상을 통달한 사람을, 그 통달한 경서의 많고 적은 것과 알아낸 사리(事理)의 정밀하고 소략한 것으로써 그 높고 낮은 등급을 정하여 제일장(第一場)으로 하고, 입격(入格)한 사람은 예조(禮曹)로 보내면, 예조에서 표문(表文), 장주(章奏), 고부(古賦)를 시험하여 중장(中場)으로 하고, 책문(策問)185)을 시험하여 종장(終場)으로 할 것이며, 삼장(三場)을 통하여 입격(入格)한 사람 33명을 상고하여 이조(吏曹)로 보내면, 이조에서 재주를 헤아려 탁용(擢用)하게 하고, 감시(監試)는 폐지할 것이다. 그 강무(講武)하는 법은 주장(主掌)한 훈련관(訓鍊觀)에서 때때로 《무경칠서(武經七書)》186)와 사어(射御)의 기술을 강습시켜, 그 통달한 경서의 많고 적은 것과 기술의 정하고 거친 것으로써 그 높고 낮은 등급을 정하여, 입격(入格)한 사람 33명을 출신패(出身牌)를 주고, 명단을 병조(兵曹)로 보내어 탁용(擢用)에 대비하게 할 것이다.
1. 관혼상제(冠婚喪祭)는 나라의 큰 법이니, 예조에 부탁하여 경전(經典)을 세밀히 구명하고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일정한 법령으로 정하여 인륜(人倫)을 후하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을 것이다.
1. 수령(守令)은 백성에게 가까운 직책이니 중시(重視)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대간(臺諫), 육조(六曹)로 하여금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공평하고 청렴하고 재간이 있는 사람을 얻어 이 임무를 맡겨서 만 30개월이 되어, 치적(治績)이 현저하게 나타난 사람은 발탁 등용시키고, 천거된 사람이 적임자(適任者)가 아니면 천거한 사람[擧主]에게 죄가 미치게 할 것이다.
1. 충신(忠臣), 효자(孝子), 의부(義夫), 절부(節婦)는 풍속에 관계되니 권장(勸奬)해야 될 것이다. 소재관사(所在官司)로 하여금 순방(詢訪)하여 위에 아뢰게 하여 우대해서 발탁 등용하고,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旌表)하게 할 것이다.
1. 환과고독(鰥寡孤獨)은 왕정(王政)으로서 먼저 할 바이니 마땅히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해야 될 것이다. 소재관사(所在官司)에서는 그 굶주리고 곤궁한 사람을 진휼(賑恤)하고 그 부역(賦役)을 면제해 줄 것이다.
1. 외방(外方)의 이속(吏屬)이 서울에 올라와서 부역에 종사함이 기인(其人) 187)과 막사(幕士)와 같이 하여, 선군(選軍)188)을 설치함으로부터는 스스로 그 임무가 있었으나, 법이 오래 되매 폐단이 생겨서 노역을 노예(奴隷)와 같이 하니, 원망이 실로 많다. 지금부터는 일체 모두 폐지할 것이다.
1. 전곡(錢穀)의 경비(經費)는 나라의 떳떳한 법이니, 의성창(義成倉), 덕천창(德泉倉)등의 여러 창고와 궁사(宮司)는 삼사(三司)189)의 회계(會計) 출납(出納)하는 수효에 의뢰하고, 헌사(憲司)의 감찰(監察)은 풍저창(豊儲倉)과 광흥창(廣興倉)의 예(例)에 의거하여 할 것이다.
1. 역(驛)과 관(館)을 설치한 것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에 사명(使命)이 번거롭게 많아서 피폐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민망스럽다.
지금부터는 차견(差遣)하는 공적인 사행(使行)에게 〈관(官)에서〉급료(給料)를 주는 일을 제외하고는, 사적인 용무로 왕래하는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을 논할 것없이 모두 공급(供給)을 정지하게 하고, 이를 어긴 사람은 주객(主客)을 모두 논죄(論罪)하게 할 것이다.
1. 배를 탄 군사[騎船軍]는 위험한 곳에 몸을 맡기고 힘을 다하여 적을 방어하니,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해야 될 처지이다. 그 소재관사(所在官司)로 하여금 부역을 감면해 주게 하고 조호(助戶)190)를 더 정하여 윤번으로 배를 갈아타게 하고, 그 생선과 소금에서 나는 이익은 그들이 스스로 취(取)하도록 허용하고 관부(官府)에서 전매(專賣)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1. 호포(戶布)를 설치한 것은 다만 잡공(雜貢)을 감면하기 위함인데, 고려의 말기에는 이미 호포(戶布)를 바치게 하고 또한 잡공(雜貢)도 징수하여 백성의 고통이 적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는 호포를 일체 모두 감면하고, 그 각도에서 구은 소금은 안렴사(按廉使)에게 부탁하여 염장관(鹽場官)에게 명령을 내려 백성들과 무역하여 국가의 비용에 충당하게 할 것이다.
1. 국둔전(國屯田)은 백성에게 폐해가 있으니 음죽(陰竹)의 둔전(屯田)을 제외하고는 일체 모두 폐지할 것이다.
1. 고려의 말기에는 형률(刑律)이 일정한 제도가 없어서, 형조(刑曹), 순군부(巡軍府), 가구소(街衢所)191)가 각기 소견을 고집하여 형벌이 적당하지 못했으니, 지금부터는 형조는 형법(刑法), 청송(聽訟), 국힐(鞫詰)을 관장하고, 순군(巡軍)은 순작(巡綽), 포도(捕盜), 금란(禁亂)을 관장할 것이며, 그 형조에서 판결한 것은 비록 태죄(笞罪)를 범했더라도 반드시 사첩(謝貼)192)을 취(取)하고 관직을 파면시켜 누(累)가 자손에게 미치게 하니, 선왕(先王)의 법을 만든 뜻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형(刑)을 판결하는 관원은 무릇 공사(公私)의 범죄를, 반드시《대명률(大明律)》193)의 선칙(宣勅)을 추탈(追奪)하는 것에 해당되어야만 사첩(謝貼)을 회수하게 하고, 자산(資産)을 관청에 몰수하는 것에 해당되어야만 가산(家産)을 몰수하게 할 것이며, 그 부과(附過)194)해서 환직(還職)하는 것과 수속(收贖)해서 해임(解任)하는 것등의 일은 일체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죄를 판정하고, 그전의 폐단을 따르지 말 것이며, 가구소(街衢所)는 폐지할 것이다.
1. 전법(田法)은 한결같이 고려의 제도에 의거할 것이며, 만약 증감(增減)할 것이 있으면 주장관(主掌官)이 재량하여 위에 아뢰어 시행할 것이다.
1. 경상도(慶尙道)의 배에 싣는 공물(貢物)은 백성에게 폐해가 있으니 또한 마땅히 감면할 것이다.
1. 유사(有司)가 상언(上言)하기를, ‘우현보(禹玄寶)·이색(李穡)·설장수(偰長壽)등 56인이 고려의 말기에 도당(徒黨)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해서 맨처음 화단(禍端)을 일으켰으니, 마땅히 법에 처하여 장래의 사람들을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하나, 나는 오히려 이들을 가엾이여겨 목숨을 보전하게 하니,
그 우현보·이색·설장수등은 그 직첩(職帖)을 회수하고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해상(海上)으로 옮겨서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우홍수(禹洪壽)·강회백(姜淮伯)·이숭인(李崇仁)·조호(趙瑚)·김진양(金震陽)·이확(李擴)·이종학(李種學)·우홍득(禹洪得)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장(杖) 1백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며,
최을의(崔乙義)·박흥택(朴興澤)·김이(金履)·이내(李來)·김묘(金畝)·이종선(李種善)·우홍강(禹洪康)·서견(徐甄)·우홍명(禹洪命)·김첨(金瞻)·허응(許膺)·유향(柳珦)·이작(李作)·이신(李申)·안노생(安魯生)·권홍(權弘)·최함(崔咸)·이감(李敢)·최관(崔關)·이사영(李士潁)·유기(柳沂)·이첨(李詹)·우홍부(禹洪富)·강여(康餘)·김윤수(金允壽)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장(杖) 70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며,
김남득(金南得)·강시(姜蓍)·이을진(李乙珍)·유정현(柳廷顯)·정우(鄭寓)·정과(鄭過)·정도(鄭蹈)·강인보(姜仁甫)·안준(安俊)·이당(李堂)·이실(李室)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에 방치(放置)할 것이며, 성석린(成石璘)·이윤굉(李允紘)·유혜손(柳惠孫)·안원(安瑗)·강회중(姜淮中)·신윤필(申允弼)·성석용(成石瑢)·전오륜(全五倫)·정희(鄭熙)등은 각기 본향(本鄕)에 안치(安置)할 것이며,
그 나머지 무릇 범죄한 사람은 일죄(一罪)로서 보통의 사유(赦宥)에 용서되지 않는 죄를 제외하고는, 이죄(二罪) 이하의 죄는 홍무(洪武) 25년(1392) 7월 28일 이른 새벽 이전으로부터 이미 발각된 것이든지 발각되지 않은 것이든지 모두 이를 사면(赦免)할 것이다.”
교서(敎書)는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정도전은 우현보(禹玄寶)와 오래된 원한이 있었으므로, 무릇 우씨(禹氏)의 한집안을 모함하는 것은 도모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그 실정(實情)에는 맞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10여인으로써 원례(援例)로 삼아 극형(極刑)에 처하려고 하여, 조획말절(條劃末節)이라 하여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안경공(安景恭)으로 하여금 이를 읽게 하고는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어찌 극형(極刑)에 이르겠는가?
마땅히 모두 논죄(論罪)하지 말라.”하였다.
도전 등이 감등(減等)하여 과죄(科罪)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한산군(韓山君)195)과 우현보와 설장수는 비록 감등하더라도 또한 형벌을 가할 수는 없으니, 결코 다시 말하지 말라.”
도전등이 다시 나머지 사람들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곤장을 받은 사람은 죽지않을 것이라 여겨, 이를 강제로 말리지 아니하였다.
註180]칠묘(七廟): 주대(周代)의 천자(天子)의 종묘(宗廟). 곧 태조(太祖)의 종묘와 삼소(三昭), 삼목(三穆)의 총칭.註181]오묘(五廟): 제후(諸侯)의 종묘(宗廟). 곧 태조(太祖)의 종묘와 이소(二昭), 이목(二穆)의 총칭 註182]소목(昭穆): 종묘(宗廟)에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 천자(天子)는 태조(太祖)를 중앙에 모시고, 2세, 4세, 6세는 소(昭)라 하여 왼편에, 3세, 5세, 7세는 목(穆)이라 하여 오른편에 모시어, 3소, 3목의 칠묘(七廟)가 되고, 제후(諸侯)는 2소, 2목의 오묘(五廟)가 되며, 대부(大夫)는 1소, 1목의 삼묘(三廟)가 됨 註 183]좌주(座主): 고려 때 감시(監試)의 급제자가 시관(試官)을 일컫는 경칭(敬稱).註184]성균정록소(成均正錄所): 성균관(成均館)의 직원(直員)이 시정(時政)을 뽑아 적어서 보관하던 곳 註185]책문(策問): 시무(時務)의 문제(問題).註186]《무경칠서(武經七書)》: 일곱 가지의 병서(兵書). 곧《손자(孫子)》, 《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 《위료자(尉繚子)》, 《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 《육도(六韜)》,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임.註187]기인(其人): 고려 초기에 향리(鄕吏)의 자제(子弟)를 뽑아 서울에 데려와서 볼모로 삼는 한편, 그 출신 지방의 사정에 관한 고문을 삼았음.註188]선군(選軍): 고려 때 군사를 뽑는 일을 맡아 보던 관아.註189]삼사(三司): 고려 때 전곡(錢穀)의 출납과 회계의 사무를 맡아 보던 관아 註190]조호(助戶): 봉족(奉足).註191]가구소(街衢所): 순검군(巡檢軍)에게 체포된 범금자(犯禁者)를 구치(拘置) 치죄(治罪)하는 일종의 구류소(拘留所)와 같은 것임.註192]사첩(謝貼): 직첩(職牒) 註193]《대명률(大明律)》: 중국 명대(明代)의 기본적인 형법전(刑法典).註194]부과(附過): 공무상 과실이 있을 때에 곧 처벌하지 않고 관원 명부에 적어 두는 것.註195]한산군(韓山君): 이색.
○敎中外大小臣僚、閑良、耆老、軍民:
王若曰, 天生蒸民, 立之君長, 養之以相生, 治之以相安。 故君道有得失, 而人心有向背, 天命之去就係焉, 此理之常也。 洪武二十五年七月十六日乙未, 都評議使司及大小臣僚合辭勸進曰: “王氏自恭愍王無嗣薨逝, 辛禑乘間竊位, 有罪辭退, 子昌襲位, 國祚再絶矣。 幸賴將帥之力, 以定昌府院君權署國事, 而乃昏迷不法, 衆叛親離, 不能保有宗社, 所謂天之所廢, 誰能興之者也。 社稷必歸於有德, 大位不可以久虛。 以功以德, 中外歸心, 宜正位號, 以定民志。” 予以涼德, 惟不克負荷是懼, 讓至再三, 僉曰: “人心如此, 天意可知。 衆不可拒, 天不可違。” 執之彌固, 予俯循輿情, 勉卽王位。 國號仍舊爲高麗; 儀章法制, 一依前朝故事。 爰當更始之初, 宜布寬大之恩, 凡便民事件, 條列于後。 於戲! 予惟寡昧, 罔知時措之方, 尙賴贊襄, 以致惟新之治。 咨爾有衆! 體予至懷。 一, 天子七廟, 諸侯五廟, 左廟右社, 古之制也。 其在前朝, 昭穆之序、堂寢之制, 不合於經, 又在城外, 社稷雖在於右, 其制有戾於古。 仰禮曹詳究擬議, 以爲定制。 一, 以王氏之後瑀, 給畿內麻田郡, 封歸義君, 以奉王氏之祀, 其餘子孫, 許於外方從便居住, 其妻子僮僕, 完聚如舊。 所在官司, 務加矜恤, 毋致失所。 一, 文武兩科, 不可偏廢。 內而國學, 外而鄕校, 增置生徒, 敦加講勸, 養育人才。 其科擧之法, 本以爲國取人, 其稱座主門生, 以公擧爲私恩, 甚非立法之意。 今後內而成均正錄所, 外而各道按廉使, 擇其在學經明行修者, 開具年貫三代及所通經書, 登于成均館長貳所, 試講所通經書, 自四書五經《通鑑》已上通者, 以其通經多少, 見理精粗, 第其高下爲第一場; 入格者, 送于禮曹, 禮曹試表章古賦爲中場; 試策問爲終場, 通三場相考入格者三十三人, 送于吏曹, 量才擢用, 監試革去。 其講武之法, 主掌訓鍊觀, 以時講習武經七書及射御之藝, 以其通經多少、藝能精粗, 第其高下, 入格者三十三人, 依文科例, 給出身牌, 以名送于兵曹, 以備擢用。 一, 冠婚喪祭, 國之大法。 仰禮曹詳究經典, 參酌古今, 定爲著令, 以厚人倫, 以正風俗。 一, 守令, 近民之職, 不可不重。 其令都評議使司、臺諫、六曹各擧所知, 務得公廉材幹者, 以任其任, 滿三十箇月政績殊著者, 擢用, 所擧非人, 罪及擧主。 一, 忠臣、孝子、義夫、節婦, 關係風俗, 在所奬勸。 令所在官司, 詢訪申聞, 優加擢用, 旌表門閭。 一, 鰥寡孤獨, 王政所先, 宜加存恤。 所在官司, 賑其飢乏, 復其賦役。 一, 外吏上京從役, 如其人、幕士、注選軍之設, 自有其任, 法久弊生, 役如奴隷, 怨讟實多, 自今一皆罷去。 一, 錢穀經費, 有國之常法。 義成、德泉等諸倉庫、宮司, 仰三司會計出納之數, 憲司監察如豐儲、廣興倉例。 一, 驛館之設, 所以傳命, 近來使命煩多, 以致凋弊, 誠可憫焉。 今後除差遣公行廩給外, 私幹往來者, 勿論尊卑, 悉停供給, 違者, 主客皆論罪。 一, 騎船軍, 委身危險, 盡力扞禦, 在所矜恤。 其令所在官司蠲免賦役, 加定助戶, 輪番遞騎; 其魚鹽之利, 聽其自取, 毋得公榷。 一, 戶布之設, 只爲蠲免雜貢。 前朝之季, 旣納戶布, 又收雜貢, 民瘼不小。 今後戶布, 一皆蠲免。 其各道燔煮之鹽, 仰按廉使下鹽場官, 與民貿易, 以充國用。 一, 國屯田有弊於民, 除陰竹屯田外, 一皆罷去。 一, 前朝之季, 律無定制, 刑曹、巡軍、街衢各執所見, 刑不得中。 自今刑曹, 掌刑法、聽訟、鞫詰, 巡軍掌巡綽、捕盜、禁亂。 其刑曹所決, 雖犯笞罪, 必取謝貼罷職, 累及子孫, 非先王立法之意。 自今京外刑決官, 凡公私罪犯, 必該《大明律》, 追奪宣勑者, 乃收謝貼; 該資産沒官者, 乃沒家産。 其附過還職、收贖解任等事, 一依律文科斷, 毋蹈前弊; 街衢革去。 一, 田法, 一依前朝之制, 如有損益者, 主掌官擬議申聞施行。 一, 慶尙道載船貢物, 有弊於民, 亦宜蠲免。 一, 有司上言: “禹玄寶、李穡、偰長壽等五十六人, 在前朝之季, 結黨謀亂, 首生厲階, 宜置於法, 以戒後來。” 予尙憫之, 俾保首領。 其禹玄寶、李穡、偰長壽等, 收其職貼, 廢爲庶人, 徙諸海上, 終身不齒; 禹洪壽、姜淮伯、李崇仁、趙瑚、金震陽、李擴、李種學、禹洪得等, 收其職貼, 決杖一百, 流于遐方; 崔乙義、朴興澤、金履、李來、金畝、李種善、禹洪康、徐甄、禹洪命、金瞻、許膺、柳珦、李作、李申、安魯生、權弘、崔咸、李敢、崔關、李士潁、柳沂、李詹、禹洪富、康餘、金允壽等, 收其職(貼)〔牒〕, 決杖七十, 流于遐方; 金南得、姜蓍、李乙珍、柳廷顯、鄭㝢、鄭過、鄭蹈、姜仁甫、安俊、李堂、李室等, 收其職牒, 放置遐方; 成石璘、李允紘、柳惠孫、安瑗、姜淮中、申允弼、成石瑢、全五倫、鄭熙等, 各於本鄕安置。 其餘凡有犯罪者, 除一罪常宥不原外二罪已下, 自洪武二十五年七月二十八日昧爽已前, 已發覺未發覺, 咸宥除之。
敎書, 鄭道傳所製。 道傳與禹玄寶有宿怨, 凡可以陷禹氏一門者, 無所不圖, 未稱其情, 至是, 以十餘人爲援例, 謀置極刑, 以爲條畫末節以進。 上使都承旨安景恭讀之, 驚駭曰: “此輩何至極刑? 宜皆勿論。” 道傳等請減等科罪, 上曰: “若韓山君、禹玄寶、偰長壽, 雖減等, 亦不可加刑, 愼勿再言。” 道傳等再請餘人杖決, 上謂受杖者不至於死, 不强止之。
태조 3권, 2년(1393 계유/명홍무(洪武) 26년) 1월 1일(정미) 1번째기사
백관의 조하를 받고,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하여 새해 축하의식을 가지다.
처음으로 명나라에서 제정한 관복을 입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황제의 정조(正朝)를 하례하고 비로소 조정(朝廷)387) 제도의 관복(冠服)을 입었다.
예(禮)를 마치고 난 뒤에 임금이 전(殿)에 앉아서 중외(中外) 관원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전문(箋文)을 올리고, 각도의 도절제사(都節制使),안렴사(按廉使),목사(牧使),도호부사(都護府使)들이 모두 전문(箋文)을 올리고 방물(方物)을 바쳤다.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 조박(趙璞)은 역대의 제왕이 학문을 하고 정치를 하는 강목(綱目)의 그림을 바치고, 교주강릉도안렴사(交州江陵道按廉使) 정탁(鄭擢)은 사상보(師尙父)388)가 단서(丹書)389)를 받들어 무왕(武王)을 경계한 그림과《대학연의(大學衍義)》 2부를 바쳤으며, 알도리(斡都里)는 산 범[生虎]을 바쳤으므로, 이내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내렸다.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이 술잔을 받들어 헌수(獻壽)하였다.
“정월 초하루 새해의 아침에 신등은 큰 경사를 감내하지못하여 삼가 천세수(千歲壽)를 올립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천세(千歲)를 세 번 불렀다.
임금이 술잔을 다 비우고 여러 신하들에게 앉기를 허락하니, 여러 신하들이 두 번 절하고 자리에 나아가 앉아서 한껏 즐기고 파(罷)하였다. 해가 지매 군기감(軍器監)으로 하여금 불놀이[火戲]를 설치하게 하고 이를 구경하였다.
註387]조정(朝廷):중국 註388]사상보(師尙父):강태공(姜太公).註389]단서(丹書):중국 고대의 황제(皇帝)와 전욱(顓頊)의 도(道)가 기재되어 있다는 적작(赤雀)이 물고 온 글.
○丁未朔/上率群臣賀帝正, 始服朝制冠服。 禮畢, 上坐殿受中外朝賀。 都評議使司上箋, 各道都節制、按廉、牧、都護府使, 皆上箋獻方物。 楊廣道按廉使趙璞獻《歷代帝王爲學爲治綱目之圖》, 交州、江陵道按廉使鄭擢獻《師尙父奉丹書戒武王之圖》及《大學衍義》二部, 斡都里獻生虎。 仍賜宴群臣, 左侍中趙浚奉觴稱壽曰: “元正首祚, 臣等不勝大慶, 謹上千歲壽。” 群臣皆三呼千歲。 上盡觴, 許群臣坐, 群臣再拜就坐, 極歡而罷。 暮, 使軍器監設火戲, 觀之。
세종 51권, 13년(1431 신해/명선덕(宣德)6년) 3월 17일(신사) 3번째기사
무묘를 세우고자 박아생의 상서에 대해 논의하다
사직(司直) 박아생(朴芽生)이 상서(上書)하기를,
“삼대(三代) 이상에서는 문(文)과 무(武)를 한결같이 하였기때문에, 고굉(股肱)의 대신들이 들어오면 정승이 되고, 나가면 장수가 되었으며, 천하를 다스리는 데도 순연 부잡(純然不雜)하였습니다.
삼대 이하로 오면서 문무를 함께 일으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유신(儒臣)들과 계책을 세우고, 군사 문제를 다스리는 일은 무신(武臣)들과 계책을 강구하여 천하를 편안히 다스려 왔던 것이니, 그 유래가 유구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을 숭상하고 무를 폐지할 수 없으며, 무만을 닦고 문을 폐지해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하옵기에 문무의 이치를 놓고 그 하나만을 고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공자(孔子)는 선성(先聖)의 뒤를 이어 장래 학문의 길을 열어 만대에 법을 전해주신 까닭에, 예로부터 지금까지 온 천하 각국에서 문묘(文廟)를 세우고는 제향하고 있으며, 여망(呂望)은 무후(武侯)의 재능으로 백성을 도탄(塗炭) 속에서 건져내어 각기 편히 그 업(業)에 종사하고 연수(年壽)를 누리게 하였으며, 난세(亂世)를 다스려 정도(正道)를 되찾게 하였은즉, 그 공로도 혁혁하거니와 또 신비한 글을 후세에 전했기 때문에 옛날의 성군(聖君)들이 무묘(武廟)를 세워 제향하던 것을 후세에 와서 다만 문(文)의 숭상만을 일삼고 이내 이를 폐하고 말았으나, 이는 문무의 도(道)를 다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태종대왕께서 하늘이 내신 성인(聖人)으로 즉위하신 지 수년이 못되어 만사가 다 잘 다스려지매, 비로소 무과(武科)로 인재를 선발하는 법을 실시하시니 이는 문을 숭상하며 무를 연수(鍊修)하는 길을 다함이요,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선발하는 법도 더할 수 없이 다한 것입니다.
신이 다행하게도 무묘도(武廟圖)를 얻어 바치오니, 원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무묘(武廟)를 훈련관(訓鍊觀) 북쪽에 세우고, 아울러 둑소(纛所)도 이것에 옮겨, 무거(武擧)의 무리로 하여금 제향에 참사하게 하시면 문무의 길이 갖추어질 것입니다”하니,
명하여 이를 상정소(詳定所)에 내리고, 또 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고제(古制)를 참고하게 하였다.
임금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의 논의를 보고 말하기를,
“문무(文武)란 본래 두 가지가 아닌 것인데, 만약 무성왕묘(武成王廟)를 따로 세운다면, 이는 상도(常道)에 벗어나는 일이다”하니,
상정소제조(詳定所提調) 맹사성(孟思誠), 허조(許稠), 정초(鄭招)등이 이를 검토 평론해 올리기를,
“옛부터 문묘를 세우고 공자(孔子)를 제사해 온 것은, 오로지 문만을 위함이 아니요, 이는 곧 하늘같으신 성인으로서 만대에 교훈을 남겨, 수많은 제왕의 스승이 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따로 무묘(武廟)를 세울 것 같으면, 이것은 공자는 문을 전업으로 하고, 태공(太公)은 무를 전업으로 한 것이 되어, 문무를 하나로 보는 본의가 아닐 것입니다.
하물며 본조에서는 무과의 시험을 당하여 아울러 경서까지 시험하고 있사온즉, 이는 문무를 둘로 다루지 않는 것이며, 무묘를 세운 부당성을 온공(溫公) 이 이미 밝힌 논문이 있사온 즉, 이제 무엇을 다시 논의하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司直朴芽生上書曰:
三代而上, 文與武爲一, 而股肱大臣, 入則爲相, 出則爲將, 其理天下也, 純然不雜。 三代而下, 文武竝興, 而治國則策儒臣, 治軍則策武臣, 以安天下, 其來尙矣。 若然則崇文廢武, 未可也; 修武廢文, 亦未可也。 是故文武之理, 不可守一。 孔子繼往聖、開來學, 垂法萬世, 自古迄今, 天下諸國立文廟以祭享之。 呂望、武侯之材, 拯民於塗炭之中, 躋民於仁壽之域, 足以拔亂反正, 其功赫然, 而且傳秘書於後世, 故古之聖君, 建武廟以祭享之, 及乎後世, 但事崇文, 因而廢之, 不可謂盡文武道也。 我太宗大王天縱聖憲, 卽位不數年, 而萬事乃理, 始設武科取人之法, 崇文修武之道盡矣, 設科取士之法至矣。 臣幸得武廟圖以進, 願令攸司設武廟於訓鍊觀之北, 幷移纛所, 令武擧之徒參祭, 文武之道備矣。
命下詳定所, 又令集賢殿參考古制。 上覽司馬溫公議曰: “文武非二致也。 若別立武成王廟, 其不經甚矣。” 詳定所提調孟思誠ㆍ許稠ㆍ鄭招等議曰: “自古建文廟以祀孔子者, 非爲專文, 乃以天縱之聖, 垂訓萬世, 爲百王之師故也。 今若別立武廟, 則是孔子專文, 太公專武, 而非文武一體之道也。況本朝當試武科之時, 幷試經書,則非以文武爲二也。且建武廟之非,溫公已嘗著論,今何更議,” 上然之。
세조 3권, 2년(1456 병자/명경태(景泰)7년) 3월 28일(정유) 3번째기사
집현전직제학 양성지의 춘추대사, 오경, 문묘종사, 과거, 기인등에 관한 상소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상소(上疏)하기를,
“신(臣)이 엎드려 보니, 주상 전하께서는 상성(上聖)의 자질로서 대위(大位)에 영광스럽게 오르시어 고금(古今) 치란(治亂)의 자취와 민속(民俗)의 간난(艱難)한 일을 통찰(洞察)하지 않음이 없으시고 소간(宵旰)831)으로 부지런히 도치(圖治)하셔서 우리 조선 억만년 태평성업의 기틀을 닦으시니, 진실로 삼한(三韓)에서 한 번 번성할 때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조정의 득실(得失)과 민간의 이병(利病)을, 대신(大臣)은 꾀하고 대간(臺諫)은 이를 논의하며, 기타의 시종(侍從)하는 직사(職事)들도 논사(論思)함에 있는데, 신은 용렬한 자질로써 경악(經幄)832)을 시종함을 얻어서도 조금의 성효(成効)도 없어 성덕(聖德)에 보답함이 없음을 부끄러워합니다. 무릇 국가의 크고 작은 일은 미충(微衷)이라도 상량하여 확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만(萬)의 일(一)이라도 비익(裨益)됨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 감히 편의(便宜) 24사(事)를 가지고 조목을 기록하여 바치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감(聖鑑)하여 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1. 춘추(春秋)의 대사(大射)입니다.
대개 금인(金人)833)은 요(遼)나라의 풍속을 이어받아 3월 3일과 9월 9일에 하늘에 절하고 버드나무를 쏩니다.
이것은 비록 중원(中原)의 제도는 아니더라도 또한 번국(藩國)의 성사(盛事)입니다. 우리 동방(東方)은 해동(海東)에 웅거(雄據)하여 삼국(三國)으로부터 전조(前朝)834)에 이르기까지 교천(郊天)835)과 향제(饗帝)836)를 하지않음이 없었습니다.
이제 진실로 그 옛 것을 다 따르지 못하더라도 요(遼), 금(金)의 고사(故事)를 조금 모방하여 3월 3일과 9월 9일은 친히 교외(郊外)에 거둥하시어 대사례(大射禮)를 행하고, 해마다 상례로 삼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거의 우리의 무위(武威)를 크게 떨치고 사기(士氣)도 또한 증가하여 스스로 일국일대(一國一代)의 풍속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1. 오경(五京)을 증치(增置)하는 것입니다.
대개 요(遼), 금(金), 발해(渤海)도 아울러 오경(五京)을 세웠고, 전조(前朝)도 사경(四京)을 세웠는데, 본조(本朝)에서는 단지 한성(漢城), 개성(開城)의 양경(兩京)만을 설치했을 뿐이니, 대동산해(大東山海)의 험함과 주부(州府)의 성함을 가지고서 단지 양경만을 두었으니 어찌 흠결(欠缺)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원나라 세조(世祖)는 우리에게 의법은 본속(本俗)을 따를 것을 허락하였고, 고황제(高皇帝)도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성교(聲敎)를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동교(東郊) 땅은 진실로 복리(腹裏)에 비할 것이 아닌때문입니다.
빌건대 경도(京都)인 한성부(漢城府)를 상경(上京)으로 삼고, 개성부(開城府)를 중경(中京)으로 삼고, 경주(慶州)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전주(全州)를 남경(南京)으로 삼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삼고, 함흥(咸興)을 북경(北京)으로 삼아, 각각 토관(土官)을 설치하고 군병(軍兵)을 가정(加定)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거의 형세의 승(勝)함을 얻어 위급(危急)할 때에도 또한 족히 의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악진해독(嶽鎭海瀆)입니다.
대개 일대(一代)의 흥(興)함에는 반드시 일대(一代)의 제도가 있었으며, 본조(本朝)의 악진해독(嶽鎭海瀆),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제사는 모두 삼국과 전조의 구제를 의방해서 한 것이므로 의논할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용흥강(龍興江)은 우리 태조(太祖)께서 흥운(興運)하신 땅이고, 묘향산(妙香山)에 이르러서는 단군(檀君)이 일어난 곳이며, 구월산(九月山)에는 단군사(檀君祠)가 있고, 태백산(太白山)은 신사(神祠)가 있는 곳이며, 금강산(金剛山)은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장백산(長白山)은 선춘령(先春嶺)의 남쪽 갑산(甲山)의 북쪽에 있어 실로 나라의 북악(北岳)이 됩니다.
임진(臨津)은 나라의 서쪽 관문이고, 용진(龍津)은 나라의 동쪽 관문이며, 낙동강(洛東江)은 경상도의 대천(大川)이고, 섬진(蟾津)은 전라도의 대천입니다. 박천강(博川江)은 곧 옛 대령강(大寧江)이며, 보리진(菩提津),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전(祀典)에 있지아니 합니다.
또 동해, 남해, 서해의 신사(神祠)는 모두 개성(開城)을 기준하여 정하였기 때문에 또한 방위(方位)가 어긋납니다.
빌건대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고정(考定)을 상세히 더하게하고, 삼각산(三角山)을 중악(中岳)으로 삼고, 금강산을 동악(東岳)으로 삼고, 구월산(九月山)을 서악(西岳)으로 삼고, 지리산(智異山)을 남악(南岳)으로 삼고, 장백산(長白山)을 북악(北岳)으로 삼고, 백악산(白岳山)을 중진(中鎭)으로 삼고, 태백산(太白山)을 동진(東鎭)으로 삼고, 송악산(松嶽山)을 서진(西鎭)으로 삼고, 금성산(錦城山)을 남진(南鎭)으로 삼고, 묘향산(妙香山)을 북진(北鎭)으로 삼을 것입니다.
또 동해신(東海神)을 강릉(江陵)에, 서해(西海)는 인천(仁川)에, 남해(南海)는 순천(順天)에, 북해(北海)837)는 갑산(甲山)에 이제(移祭)하고, 용진(龍津)을 동독(東瀆)으로 삼고, 대동강(大同江)을 서독(仙)으로 삼을 것입니다.
한강(漢江)을 남독(南瀆)으로 삼고 두만강(豆滿江)을 북독(北瀆)으로 삼고,
또 목멱산(木覓山), 감악산(紺岳山), 오관산(五冠山), 계룡산(鷄龍山), 치악산(雉岳山), 오대산(五臺山), 의관령(義館嶺), 죽령산(竹嶺山)을 명산(名山)으로 삼고, 웅진(熊津), 임진(臨津), 보리진(菩提津), 용흥강(龍興江), 청천강(淸川江), 박천강(博川江), 낙동강(洛東江), 섬진강(蟾津江)으로 대천(大川)을 삼아 예(例)에 따라 치제(致祭)하여【양진(楊津) 두 곳, 덕진(德津) 두 곳, 가야진(伽耶津), 주흘산(主屹山), 우불산(亐佛山), 우이산(牛耳山), 비백산(鼻白山), 장산곶이[長山串], 아사진(阿斯津), 송곶이[松串], 비류산(沸流山), 구진(九津), 익수(溺水)는 개혁함이 옳습니다】
일대의 사전(祀典)을 새롭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사전(祀典)에 실린 산천은 고금으로 모두 34인데, 옛 것을 따른 것이 17, 이제(移祭)한 것이 4, 새로 오른 것이 13, 영구히 고칠만한 것도 또한 13입니다.
1. 번부악(蕃部樂)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대개 중국의 악(樂)은 아악(雅樂), 속악(俗樂), 여악(女樂), 이부(夷部)838)등의 악이 있는데, 본조(本曹)에서 사용하는 것은 헌가(軒架), 고취(鼓吹), 동남(童男), 기녀(妓女), 가면잡희(假面雜戱)등의 제도(制度)가 있으니, 대저 악(樂)이란 형상[象]을 이루는 것입니다.
태조께서 천운을 타고 흥기하심으로부터 태종, 세종께서 서로 이으시니 동린(東隣)의 헌침(獻琛)과 북국(北國)의 관색(款塞)으로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만들어 아악(雅樂), 속악(俗樂)이 모두 바르게 되었으나 홀로 번악(蕃樂)은 아직 의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성상께서 용비(龍飛)하여 대위(大位)에 새로 등극하시어 일본(日本), 여진(女眞)의 사자가 와서 즉위를 하례하는 자가 항상 수백인이 궐정(闕庭)에서 절하고 뵈오니, 해동(海東)의 문물(文物)이 이때보다 성함이 있지 않았습니다.
빌건대 일본의 가무(歌舞)로써 동부악(東部樂)을 삼고, 여진의 가무로써 북부악(北部樂)을 삼아서 일본악(日本樂)은 삼포(三浦)의 왜인에게 익히게 하고, 여진악(女眞樂)은 5진(五鎭)의 야인에게 익히게하되, 그 의관제도(衣冠制度)가 괴이(怪異)하고 기초(譏誚)의 형상이라 하지말고, 동사(東使)에게 잔치하면 겸하여 북악을 쓰되 동악은 쓰지않고, 북사(北使)에게 잔치하면 겸하여 동악을 쓰되 북악은 쓰지않으며, 중국사신[中國使]에게 잔치하면 아울러 동악, 북악을 쓰고 나아가 조정에서도 이를 쓰고 종묘(宗廟)에도 주악하게 하여, 태평한 다스림을 분식(賁飾)하고 우리 조종(祖宗)의 업(業)을 빛나게 하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1. 관례(冠禮)를 의행(議行)함입니다.
대개 예전에 남자는 20세이면 관(冠)을 한 것은 성인(成人)의 도(道)를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송(宋)나라 말년에 진사(進士) 윤곡(尹穀)은 성중(城中)에 갇혀 있으면서 관례(冠禮)를 행하여 향인(鄕人)이 이를 기롱하자 대답하기를, ‘아이들[兒曹]로 하여금 관대(冠帶)하게 함은 선인(先人)을 지하에서 뵙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으니, 그 관례(冠禮)를 중하게 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동방(東方)은 고려[前朝]명종(明宗)때에 원자(元子)가 관례를 행하였고 그 뒤로는 듣지못하였으니, 빌건대 예관(禮官)에 명하여 고례(古禮)를 전채(傳採)하고 겸하여 시왕(時王)의 제도를 상고하여 위로는 종실(宗室)로부터 아래로는 사대부(士大夫)의 자제(子弟)에 이르기까지 나이 13세이면 관례(冠禮)를 행하게하여 입자(笠子), 두건(頭巾), 사모(紗帽)로써 삼가(三加)839)를 하고, 혹은 사모(紗帽), 복두(복頭), 양관(梁冠)을 사용하며, 그 미관자(未冠者)는 입학(入學)을 불허하게 하고, 혼가(婚嫁),종사(從仕)에 능히 선왕(先王)의 제도를 회복하여 크게 외국의 누(陋)를 변하게 하소서.
1. 복색(服色)을 정하는 것입니다.
대개 복색의 제정은 상하(上下)를 분별하려는 소이(所以)이니 풍속을 한결같이 하는 것을 엄하게 하지않을 수 없습니다.
원나라 사람들은 흰 것[白]을 숭상하고, 명(明)나라 사람은 검은 것[黑]을 숭상하며, 일본에 이르러서는 푸른 것[靑]을 숭상하여 모두 일정한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 동방은 조관(朝冠)과 공복(公服)을 실상은 중국(中國)을 의방하였으되, 상시(常時)에는 백의(白衣)를 입기를 좋아하니 마음대로 잡색(雜色)을 쓰는 것은 심히 비리(鄙俚)합니다.
빌건대 공복(公服)의 제도에 따라 당상관(堂上官)이상을 한 색으로 하고, 6품 이상을 한 색으로 하고, 유품원(流品員), 성중관(成衆官), 의관자제(衣冠子弟)를 한 색으로 하고, 제위군사(諸衛軍士)를 한 색으로 하고, 경중과 외방[京外]의 양인(良人), 이서(吏胥)를 한 색으로 하고, 공사천구(公私賤口), 공장(工匠)을 한 색으로 하여, 이로써 품질(品秩)을 따라 점차로 입게 하든가?
혹은 한 색을 순용(純用)하게 해서 국속(國俗)을 정제(整齊)하시고
여복(女服)에 이르러서는 또한 모두 상정(詳定)하게 하소서.
1. 복요(服妖)를 금하는 것입니다.
대개 의상(衣裳)의 제도는 남녀(男女)와 귀천(貴賤)을 분별하려는 소이(所以)이니, 하민(下民)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나라안의 여자들이 장의(長衣)입기를 즐겨 남자와 같이하나, 그러나 장의를 의상(衣裳)의 사이에 입어 3층(層)을 이루게 하고 점점 서로 본따서 온나라가 모두 그러하니, 의심컨대 이것은 곧 사문(史文)에 이른바 ‘복요(服妖)’라는 것입니다.
전일에 중국[中原]의 여자가 많이 좌임(左衽)840)하는 옷을 입었는데, 보고 듣는 자가 모두 길조(吉兆)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제 여자가 남복(男服)을 입는 것도 또한 어찌 경사로운 징조라 하겠습니까?
더구나 후세(後世)에 있어서도 여자는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을 입는 것이 가장 고법(古法)에 가깝게 되는데, 만약 이와같이 마음대로 한다면 남녀의 의복은 스스로 제도를 같이하여 이르지않은 바가 없을 것이니, 어찌 지금 바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빌건대 유사(攸司)에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금지하게 하고, 그래도 여전히 입는 자는 그 옷을 거두어, 동서(東西) 활인원(活人院)에 나누어 두었다가 가난하고 병든 자의 옷으로 쓰소서.
1. 전대(前代)의 임금과 재상(宰相)을 제사하는 것입니다.
신(臣)이 그윽이 명나라 제사(諸司)의 직장(職掌)을 보니, 관원을 보내어 역대(歷代)의 군상(君相)을 제사하는데 대뢰(大牢)841)로써 쓰니 심히 성거(盛擧)입니다.
본조는 역대의 군왕이 도읍하였던 곳에서 산제(散祭)하는데도 혹은 당연히 제사지내야 할텐데 제사하지않는 것이 있고 혹은 배향(配享)한 대신(大臣)이 없어 흠전(欠典)된 것같으니, 바라건대 매년 봄, 가을로 동교(東郊)에서 전 조선왕(朝鮮王) 단군(檀君), 후조선왕(朝鮮王) 기자(箕子), 신라(新羅)의 시조(始祖), 태종왕(太宗王), 문무왕(文武王),【두 왕은 고구려, 백제를 통합하였음】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 영양왕(영陽王),【수병(隋兵)을 대패(大敗)시킴】
백제(百濟)의 시조, 고려(高麗)의 태조(太祖), 성종(成宗), 현종(顯宗), 충렬왕(忠烈王) 이상 12위(位)를 합제(合祭)하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김인문(金仁問),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백제의 흑치상지(黑齒常之)와 근일에 정한 전조(前朝)의 배향 16신(配享十六臣)과 한희유(韓希愈), 나유(羅裕)【합단(哈丹)을 막는데 공이 있었음】, 최영(崔瑩), 정지(鄭地)【 왜구(倭寇)를 막는 데 공이 있었음】등을 배향(配享)하게 하소서.
1. 전대(前代)의 능묘(陵墓)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신(臣)이《속육전(續六典)》을 보니, 고려(高麗)의 태조,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元宗) 4능(陵)은 각각 수호(守護)하는 자 2호(戶)를 정하여 초채(樵採)를 금하게 하고, 태조의 능(陵)에는 1호를 더하게 하였으니 심히 성덕(盛德)입니다.
그러나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역대 군주(歷代君主)가 비록 모두 공덕(功德)이 백성에게 있지않았더라도 또한 모두 일국(一國)의 인민이 함께 임금으로 모셨으니, 그 있는데를 살피지못한 자는 그만이지만, 그 능묘가 여고(如古)하되 호리(狐狸)로 하여금 능히 곁에 구멍을 뚫게하고 초채(樵採)하는 자로 위를 다니게 하면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빌건대 유사(有司)로 하여금 전조선(前朝鮮), 후조선(後朝鮮), 삼국, 전조(前朝)가 도읍했던 개성(開城), 강화(江華), 경주(慶州), 평양(平壤), 공주(公州), 부여(扶餘)와 김해(金海), 익산(益山)등지의 능묘가 있는 곳을 자세하게 심방(尋訪)하게 하여 그 공덕이 있는 자는 수릉(守陵)에 3호(戶)를 두고, 별다른 공덕이 없는 자는 2호를 두되, 정비(正妃)의 능묘에도 역시 1호를 두어, 부세(賦稅)를 견감(蠲減)하고 요역(徭役)을 면제하며 그 초소(樵蘇)842)함을 금하게하고, 이어서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춘추(春秋)로 살펴보고 치제(致祭)하게 하소서.
1.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입니다.
대개 동방(東方)은 기자(箕子)가 수봉(受封)한 이후로부터 홍범(洪範)843)의 유교(遺敎)가 오래도록 떨어지지아니하여, 당(唐)나라에서는 ‘군자(君子)의 나라’라 하고, 송(宋)나라에서는 ‘예의(禮義)의 나라’라 칭하였으니,
문헌(文獻)의 아름다움은 중국[中華]을 모의(侔擬)하였으되, 문묘(文廟)에 배식(配食)한 자는 오직 신라의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고려의 안향(安珦) 3인뿐입니다.
신이 들으니, 학사(學士) 쌍기(雙冀)는 전조(前朝)에 있어서 처음으로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문풍(文風)을 진작(振作)하였고, 문헌공(文獻公) 최충(崔沖)은 또 구재(九齋)를 설치하여 재생(諸生)을 교육하였으며,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본조의 문충공 권근(權近) 에 이르러서는 그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사람마다 모두 만세(萬世)의 수범(垂範)이 될 만하다고 하였으니, 빌건대 모두 선성(先聖)에 배향(配享)하여 후인(後人)을 권장하게 하소서.
만약 ‘동방의 현자(賢者)가 어찌 옛사람과 같을 수가 있느냐?’고 한다면,
공자, 맹자의 뒤에도 또한 정(程), 주(朱)844)가 있었고, 또 어진자되기가 이같이 어려우면 후인이 어찌 성현(聖賢)을 배우겠습니까?
중국의 배향자(配享者)는 과연 모두 공자, 맹자, 정(程), 주(朱)와 같으며 동방의 선비는 모두 중국사람만 같지못하겠습니까?
대저 임금[人主]은 모름지기 일대 정사를 시행하여 권징(權懲)하는 뜻을 보인뒤라야 사람이 보고 들으며 동(動)하고, 풍속(風俗)을 옮겨 고칠 것입니다.
1. 무성(武成)을 입묘(立廟)하는 것입니다.
대개 문무(文武)의 도(道)는 천경지위(天經地緯)845)와 같으니 편벽되게 폐할 수 없습니다.
당(唐)나라 숙종(肅宗)은 태공(太公)을 높여서 무성왕(武成王)을 삼아 입묘(立廟)하여 향사(享祀)하기를 문선왕(文宣王)846)과 더불어 비등하게 하여 뒤에는 역대(歷代) 양장(良將) 64인을 배향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은 선성(先聖)의 제사를 위로는 국학(國學)으로부터 아래로는 주군(州郡)에 이르렀으되, 무성왕(武成王)은 사우(祠宇)가 없고 단지 둑신(纛神)847) 4위(位)만을 제사지내니 어찌 궐전(闕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훈련관(訓鍊觀)은 곧 송나라의 무학(武學)이니, 빌건대 둑소(纛所)848)를 훈련관에 병합하고 무성묘(武成廟)를 세워서 제례(祭禮)와 배식(配食)은 대략 문묘(文廟)의 제도에 따르고, 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의 유금필(庾黔弼), 강감찬(姜邯贊), 양규(楊規), 윤관(尹瓘), 조충(趙沖), 김취려(金就礪), 김경손(金慶孫), 박서(朴犀), 김방경(金方慶),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方實), 최영(崔瑩), 정지(鄭地), 본조(本朝)의 하경복(河敬復), 최윤덕(崔閏德)을 배향하게 하소서.
1. 공신(功臣)을 배향(配享)하는 것입니다.
대개 본조의 전후 5공신(五功臣)은 모두 충의위(忠義衛)에 속(屬)하고, 삼조(三朝)에 원종(原從)한 사람도 또한 모두 유죄(宥罪)하여 뒤에 등록하였으니, 원(元)나라의 사겁설(四怯薛)과 송(宋)의 녹수룡(錄隨龍)과 더불어 은총(恩寵)을 더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들으니, 전조(前朝)의 배향대신(配享大臣)은 공신이라 칭하여 매양 큰 은례(恩禮)로써 반드시 자손을 녹용(錄用)하였습니다.
본조(本朝)의 오묘(五廟)에도 모두 배위(配位)를 두었으니 모두 다 공은 왕실(王室)에 있고 은택(恩澤)은 생민(生民)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빌건대 5공신의 예(例)에 따르든가, 혹은 원종(原從) 제인(諸人)의 사호(賜號)에 따라 배향공신(配享功臣)은 모두 유후(宥後)849)하고 세록(世祿)850)하게 하소서.
또 전조와 본조의 장상(將相)으로서 공덕이 백성에게 있는 자의 자손도 또한 수방(搜訪)하여, 특별히 은명(恩命)을 더하면, 전인(前人)은 명명(冥冥)한 속에서 감격하고 후인(後人)도 또한 능히 만세(萬世)에 권장할 것입니다.
1. 문익점(文益漸), 최무선(崔茂宣)의 사우(祠宇)를 세우는 것입니다.
대개 신이 들으니, 성인(聖人)이 제례(祭禮)를 제정할 제, 백성에게 본받게 〈착함〉을 베풀면 제사하였고, 능히 대환(大患)을 막으면 제사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에는 예전에 목면(木綿)의 종자(種子)가 없었는데, 전조의 문익점(文益漸)이 봉사(奉使)로 원(元)나라에 체류하여 비로소 얻어다심어서 드디어 일국에 널리퍼져서 지금은 귀천(貴賤), 남녀(男女)할 것없이 모두 면포(綿布)를 입게 되었습니다.
또 신라(新羅)때부터 단지 포석(砲石)의 제조만 있고 역대(歷代)로 화약(火藥)의 법이 없었는데, 전조말에 최무선(崔茂宣)이 처음으로 화포(火砲)의 법을 원(元)나라에서 배워 가지고 돌아와 그 기술을 전하니, 지금은 군진(軍鎭)에서 사용하여 이로움이 말할 수 없습니다.
최무선(崔茂宣) 공은 만세(萬世)토록 백성의 해(害)를 제거하였으며, 문익점(文益漸)의 공은 만세토록 백성의 이(利)를 일으켰으니, 그 혜택을 생민(生民)에게 입힘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빌건대 2인의 관향(貫鄕)인 고을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봄, 가을에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행하고, 그 자손은 공신으로 칭하여 유죄(宥罪)하고 녹용(錄用)하게 하소서.
1. 시신(侍臣)의 음자(蔭子)851)입니다.
대개 본조에서 승음(承蔭)852)하는 법(法)은 곧 당(唐)나라의 자음(資陰)과 송나라의 임자(任子)의 뜻이니, 그 사대부(士大夫)를 대우하는 은덕이 지극합니다.
그러나 그 법은 3품이상의 관원외에는 단지 일찍이 대간(臺諫)과 정조(政曹)를 경유한 자의 아들만을 승음(承蔭)하여 신참(新參)한 지 수일이면 곧 감찰(監察)에 제배(除拜)되어 음덕이 자손에게 미치나, 어떤 이는 수십년을 시종(侍從)하였어도 음덕이 후손에게 미치지못한 자가 있으니 참으로 가석(可惜)합니다. 더구나 《송사(宋史)》에서는 재집(宰執),시종(侍從),대간(臺諫)을 아울러 말하였으니, 빌건대 4품이하, 6품이상의 관각(館閣) 양제(兩制)에 시종한 제신(諸臣)의 아들은 특별히 승음(承蔭)을 허락하소서.
1. 문무(文武)의 과법(科法)입니다.
대개 지금 문과(文科)의 초장(初場)에서 강경(講經)할 때,《사서(四書)》, 《오경(五經)》외에《한문(韓文)》,《유문(柳文)》등의 글같은 것을 임의(任意)로 시강(試講)하니 참으로 정규(定規)가 없고, 중장(中場)은 아울러 고부(古賦)를 시험하니 본래 급무(急務)가 아닙니다.
또 진사(進士)를 이로써 뽑으며 종장(終場)은 제사(諸史)와 시무(時務)를 비록 참작하여 출제(出題)하나 역대의 일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권도(權道)의 말로 대답하기를, ‘한(漢)나라, 당(唐)나라의 다스림을 어찌 족히 오늘날에 논할 수 있겠는가?’하고, 취하는 자도 또한 뜻[意]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사학(史學)이 불명(不明)하여 심히 불가합니다.
또 무과(武科)시험에《사서(四書)》,《오경(五經)》을 아울러 강하게 함도 미편(未便)하니, 빌건대《무경칠서(武經七書)》853)외에는《장감(將鑑)》,《병감(兵鑑)》,《병요(兵要)》,《진설(陣說)》만을 강(講)하고, 문과(文科)는《사서》,《오경》외에《좌전(左傳)》,《사기(史記)》,《통감(通鑑)》,《송원절요(宋元節要)》,《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만을 강하며, 중장을 표(表), 전(箋)을 시험하여 신자(臣子)로 임금섬기는 글을 익히게하고, 교조(敎詔)를 시험하여 군상(君上)이 영하(令下)하는 글을 익히게하며, 종장(終場)에는 역대와 시무를 번갈아 출제하되, 만일 금년에 역대(歷代)를 시험하였으면 명년에는 시무(時務)를 시험하여, 이것으로 제도를 정하여 과거(科擧)의 법을 새롭게 하소서.
1. 아들을 보내어 입학(入學)하는 것입니다.
대개 자제(子弟)의 입학은 그 이로움이 여섯 가지 있으니, 어진 사우(師友)를 얻어 의난(疑難)을 질문함이 하나요, 어진 사대부에게 친자(親炙)854)하여 그 기질(氣質)을 훈도(薰陶)함이 둘이며, 인심(人心),풍속(風俗)과 피차의 형세를 알지못하는 것이 없음이 셋이오, 친히 문헌(文獻)의 아름다움과 예악(禮樂),명물(名物)을 보고 점점 습속(習俗)의 누(陋)를 고침이 넷이요, 혹은 분전(墳典)855)을 구구(購求)하여 궐유(闕遺)를 보충함이 다섯이요, 인하여 중국의 어음(語音)을 배움으로써 상역(象譯)856)의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 여섯입니다.
이제 비록 주청(奏請)하더라도 윤허(允許)를 받기어려울 것 같으니,
바라건대 입조(入朝)하는 행리(行吏)때마다 집현전(集賢殿), 예문관(藝文館),교서관(校書館), 성균관(成均館), 승문원(承文院)가운데서 학문이 정숙(精熟)하고 문장이 민섬(敏贍)857)하며 기국(器局)이 굉원(宏遠)한자 각 1인을 선택하여 취차(就差)하여 들여보내 유학(遊學)하게한다면 거의 소견(所見)이 넓어지고 소득도 또한 많아져서 모두 국가의 유용(有用)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1. 기인(其人)의 법(法)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대개 고려[前朝]의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하고 토호(土豪)를 호장(戶長)으로 삼아 향직(鄕職)을 설치하고는 인하여 모든 군리(郡吏)의 자손으로 하여금 ‘기인(其人)858)’이란 칭호로 분번시위(分番侍衛)하게 하니,
곧 옛날에 아들을 볼모[質子]로 하는 뜻입니다.
뒤에 이르러서는 보기를 천례(賤隷)같이하여 고역(苦役)을 하게 하였으니 심히 무리(無理)한데에 미쳤습니다. 또 기인(其人)이 번상(番上)할 때 혹은 백성에게 포화(布貨)를 거두고 혹은 전산(田産)을 팔아서 바리에 싣고오니, 이에 부상(富商), 대고(大賈)는 그 값을 받고 그 구실[役]을 대신하되 그 값은 6삭(朔)에 45필(匹)이니, 이것은 백성(百姓)의 고혈(膏血)을 긁어서 경사(京師)의 유수(遊手)859)하는 사람에게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대저 향리(鄕吏)로 간활(姦猾)한 자가 비록 많으나, 그러나 일읍(一邑)의 서무(庶務)와 함께 상공(上供)하는 모든 일과 조운(漕運),영송(迎送)하는 긴고(緊苦)의 업무를 하지않음이 없으니, 그 차마 고역(苦役)까지 또 시키겠습니까? 더구나 3정1자(三丁一子)860)를 가려서 이서(吏胥)를 삼았고, 정과(正科)에 등제(登第)한데 이르러서는 어엿한 벼슬에 올라서 나라의 장상(將相)이 된 자가 진실로 일족(一族)에 그치지않사오니, 또한 선비는 농가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어찌 반드시 천례(賤隷)로 더불어함께 고역(苦役)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만약 구실[役]이 중함으로 기인이 아니면 당할 수 없다고 한다면,
신의 뜻은 기인의 여력(膂力)이 아니더라도 당할 사람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백성의 고혈을 긁어서 부인(富人)으로 그 일을 대신하게 하고, 부인(富人)도 또한 그 값으로써 신목(薪木)861)을 바꾸어 이바지하고 그 나머지로 이(利)를 삼으니, 그 백성으로 긁음이 어떻겠습니까?
이제 제사(諸司)의 외방노자(外方奴子)는 3정(丁)을 1호(戶)로 삼아, 1호(戶)는 5년에 한 번 번상(番上)하되, 비자(婢子)는 1년에 1필(匹)의 포목[布]만을 수납하였으니,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기인(其人)의 법을 파하고, 선상노자(選上奴子)862)를 가정(加定)하게하여, 3노자(三奴子)로써 기인의 구실[役]을 대신하게 하소서. 이같이 하면 관가의 일이 진실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신의 말이 불가하다면 우선 수년동안 시험하소서.
1. 의논하여 분대(分臺)를 파(罷)하는 것입니다.
대개 대신(臺臣)을 분견(分遣)하는 것은 본래 수령(守令)의 탐포(貪暴)함을 규찰(糾察)하고 민생의 휴척(休戚)을 살피는 것이니, 그 명분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으며, 그 위령(威令)이 어찌 한때에 미연(靡然)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본국의 8도(道)에는 3백34주(州)를 설치하여 도(道)에는 각각 관찰사(觀察使), 도사(都事)를 두고, 주(州)에는 각각 수령(守令), 교관(敎官)이 있으며, 혹은 소윤(少尹), 판관(判官)이 있고, 절제사(節制使), 처치사(處置使)가 있으며, 진(鎭)에는 병마사(兵馬使), 만호(萬戶), 천호(千戶)가 있고, 또 수륙(水陸)에 찰방(察訪), 검률(檢律), 교유관(敎諭官)이 있어 그 수가 적지않은데, 또 대원(臺員)을 보내니 어찌 백성은 적은데 관(官)은 많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의 관찰사는 곧 이른바, ‘외방의 헌사(憲司)’로서 수령을 출척(黜陟)하는 자인데, 어찌 반드시 다시 대관(臺官)을 보내어 관찰사의 권한을 가볍게 하겠습니까?
관찰사의 권한만 가볍게 할 뿐아니라, 도리어 수령으로 더불어 동심(同心)하여 내용을 덮어두고 분대(分臺)의 거핵(擧劾)을 회피하여, 분대로 하여금 단지 대강(大綱)만을 거핵하게 할뿐이니, 더욱 보내지않음만 같지못합니다.
만약에 적당하지못한 일이나 숨겨있는 일을 적발하게 한다면, 그 흐르는 폐단은 취모멱자(吹毛覓疵)863)하여 관리로 하여금 벌벌 떨게하여 그 수족(手足)을 편히둘 수 없게 할 것이며, 더욱 소민(小民)에게 능상(陵上)864)하고 고알(告訐)하는 풍습을 기르게 할 것입니다.
근일 입법(立法)한 초기인데도 오히려 과중(過中)한 폐단이 있거늘,
어찌 다른 때에 영영 한 가지 폐단도 없음을 알겠습니까?
대저 국가의 정령(政令)은 진실로 부드럽게 나약할 수도 없고 또한 급박하게 몰아 내릴 수도 없습니다.
한(漢)나라 선제(宣帝)와 당(唐)나라 선종(宣宗)은 모두 강명(剛明) 총찰(聰察)로써 정치를 하였으되, 한(漢), 당(唐)의 왕업은 드디어 쇠잔하였으니,
그렇다면 강명하고 총찰함이 마치 원기(元氣)를 작상(斲喪)865)하는 부근(斧斤)866)이 되는 것 같지않다고 어찌 말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관유(寬裕)로써 정사를 하시고 가급(苛急)한 것을 귀하게 여기지마시며, 근일의 분대(分臺)의 법을 파하시고, 전일의 행대(行臺)의 법[規]을 따르시어, 그 수령의 불법은 오로지 관찰사에 위임하여 고핵(考劾)하고 전최(殿最)867)하게하면, 자연히 관리는 탐잔(貪殘)하는 습속을 감히 자행하지못하며 백성은 그 생업에 편안할 것입니다.
1. 주군(州郡)의 노비(奴婢)입니다.
대개 외방(外方)의 관노(官奴)는 그 수효가 고르지 않습니다.
가령 경주 향교(慶州鄕校)같은데는 수백호(數百戶)에 이르고, 평양(平壤)의 관노(官奴)도 또한 수천호인데, 잔군(殘郡)868)은 수효가 10호도 차지못합니다. 공부(貢賦)와 빈려(賓旅)의 번거로움은 타군(他郡)과 더불어 심히 비슷하지 않아서, 혹은 인리(人吏)869)의 아내가 도로(道路)에 부대(負戴)하는 자가 있으니, 진실로 고르지 못합니다.
빌건대 제사(諸司)의 노비로 잔군(殘郡)과 또 그 인근(隣近)에 있는 자를 잔군(殘郡)에 헤아려주고, 이어서 타군(他郡)의 수효가 넘치는 관노로서 그 사(司)에 충급(充給)하면, 거의 노일(勞逸)이 고르고 주군(州郡)도 충실할 것입니다.
1. 백정(白丁)을 구처(區處)하는 것입니다.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 달달(韃靼)’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 국가에서 그 제민(齊民)하는 데 고르지 못하여 민망합니다.
백정(白丁)이라 칭하여 옛 이름[舊號]을 변경하고 군오(軍伍)에 소속하게 하여 사로(仕路)를 열어주었으나, 그러나 지금 오래된 자는 5백여년이며, 가까운 자는 수백년이나 됩니다. 본시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유속(遺俗)을 변치 않고 자기들끼리 서로 둔취(屯聚)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혼가(婚嫁)하는데, 혹은 살우(殺牛)하고 혹은 동량질을 하며, 혹은 도둑질을 합니다.
또 전조(前朝)때,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하니, 가장 앞서 향도(嚮導)하고 또 가왜(假倭)노릇을 해가면서, 처음은 강원도에서 일어나더니 경상도에까지 만연(蔓延)하여 장수를 보내어 토평(討平)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대소(大小)의 도적으로 체포된 자의 태반이 모두 이 무리입니다.
친척(親戚)과 인당(姻黨)이 팔도(八道)에 연면(連綿)하여, 적으면 기근(饑饉)되고, 크면 난리를 일으키니, 모두 염려가 됩니다.
빌건대 이제부터는 따로 1호(戶)도 짓지못하게 하고, 모두 갑사(甲士), 시위(侍衛), 진군(鎭軍)의 봉족(奉足)을 삼아 일일이 끼어살게 하고, 이어서 그 다른 군으로 왕래함을 금하며, 그 홀로 산골짜기에 거처하면서 혹 자기들끼리 서로 혼취(婚娶)하거나 혹은 도살(屠殺)을 행하며, 혹 구적(寇賊)을 행하고 혹은 악기(樂器)를 타며 구걸하는 자를 경외(京外)에서 엄히 금(禁)하여, 그것을 범한 자는 아울러 호수(戶首)를 죄주고 또 3대(三代)를 범금(犯禁)870)하지않는 자는 다시 백정이라 칭하지말고, 한가지로 편호(編戶)871)하게 하면, 저들도 또한 스스로 이 농상(農桑)의 즐거움을 알게되어 도적이 점점 그칠 것입니다.
1. 제주(諸州)의 판관(判官)입니다.
대개 관(官)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는 것은 본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이제 큰 주(州)는 부서(簿書)872)가 구름처럼 쌓이고 사객(使客)이 떼를 지어 모이니 수령 한 몸으로는 어느 겨를에 농사를 권장하며, 어느 틈에 송사를 청리(聽理)하겠습니까?
의창(義倉)이 염산(斂散)을 호활(豪猾)한 이에게 위임하여 백성의 해(害)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빌건대 경기(京畿)는 수원(水原), 양주(楊州)에, 경상도는 선산(善山), 성주(星州), 김해(金海), 밀양(密陽)에, 전라도는 광주(光州), 남원(南原)등의 고을에 특별히 판관(判官)을 두게 하소서.
1. 제진(諸鎭)에 위(尉)를 두는 것입니다.
대개 진(秦)나라 법(法)에 매양 군수(郡守)는 치민(治民)을 하고 위(尉)는 치병(治兵)을 하였으며, 전조(前朝)에서는 서북면(西北面)에 분도장군(分道將軍)을 설치하여 병사(兵事)를 주관하고, 또 진장(鎭將)을 두고 또 현위(縣尉)를 두었습니다.
이제 8도(八道) 61처(處)에 모주(某州),모도(某道)라 일컫고, 또 모진(某鎭)이라 일컬으며, 혹은 좌우익(左右翼)을 영도(領導)하고 혹은 스스로 한 진(鎭)이 되어, 모두 군병(軍兵)을 두고 단련(團鍊)하게 하여 불우(不虞)를 경계하니, 진실로 양법(良法)입니다.
그러나 수령은 부서(簿書)를 회계(會計)하고 사객(使客)을 지대(支待)하며,
전곡(錢穀)을 출납(出納)하고 사송(詞訟)을 청리(聽理)하며, 농사(農事)를 권장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모든 민사(民事)를 오히려 판리(辦理)할 수 없는데, 또한 어찌 전심(專心)으로 치병(治兵)하여 위급(危急)한 때에 대비하겠습니까? 빌건대 각진(各鎭)의 예(例)에 따라 위(尉)를 두되, 만약 모두 둘 수가 없다면, 그 판관(判官)이 있는 곳은 또 무장(武將)으로 교차(交差)하고,
판관이 없는 곳은 특별히 위(尉)를 설치하게 하소서.
1. 경도(京都)의 사보(四輔)입니다.
대개 경도는 곧 이른바 ‘북한산성(北漢山城)’입니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있어서는 3국이 교전(交戰)하던 땅이며, 고려 [前朝]가 3국을 통합하고 본조(本朝)가 도읍을 정 한 뒤로는 이곳을 가지고 사방(四方)을 공제(控制)하니, 예전에는 사방으로부터 중앙(中央)을 서로 다투었으나,
이제는 중앙에 있으면서 그 형세를 알 만합니다.
삼산(三山)은 북을 진압하고, 한강[大江]은 남을 에워싸고 서(西)에는 임진(臨津)을 두고 동(東)에는 용진(龍津)을 두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도리(道里)가 고르며, 조운(漕運)이 모이고 축목(畜牧)이 편리하여 경도의 사면 수십 리의 땅을 두고 보면, 그것이 천작(天作)의 땅임을 알 만합니다.
또 석성(石城)이 호거(虎踞)873)하고 조시(朝市)가 기포(碁布)874)하며, 궁궐(宮闕)은 엄숙(嚴肅)하고, 여엄(閭閻)은 은부(殷富)875)하니, 진실로 만세(萬世)의 왕업을 이룩할 것입니다.
단지 이제 중외(中外)에 익진(翼鎭)을 열치(列置)하였으되, 경도(京都)의 기내(畿內)에는 단지 3진(鎭)만을 설치하였으니 참으로 미편(未便)합니다.
또 부평부(富平府)는 비록 옛 안남(安南)땅이라 하더라도 오늘에 있어서는 실제 관계되는 것이 없는데, 원평부(原平府)는 임진(臨津)의 험한 곳에 웅거하고, 또 교하(交河)를 제휴하고 풍덕(豊德)을 끌음으로써 왜구(倭寇)를 해구(海口)에서 액수(扼守)876)할 만합니다.
수원부(水原府)는 본시 관찰사(觀察使)의 관사를 둔 땅이며, 전조(前朝)에 홍적(紅賊)877)이 남하(南下)할 때에는 여기를 경유하여 사통오달(四通五達)할 땅이니, 빌건대 전조의 좌보(左輔), 우보(右輔)의 예(例)에 따라 양주(楊州)를 후보(後輔)로 삼고, 수원(水原)을 전보(前輔)로 삼고, 광주(廣州)를 좌보(左輔)로 삼고, 원평(原平)을 우보(右輔)로 삼으면, 전후좌우에 모두 거진(巨鎭)이 있으되 동남의 2진(二鎭)은 강외(江外)에 있고, 서북의 2진은 강내(江內)에 있어, 남북의 형세가 고르고 경사(京師)가 더욱 장대(壯大)할 것입니다.
또 경성(京城)의 10문(十門)은 동대문(東大門)외에는 모두 옹성(擁城)이 없으니, 모름지기 풍년을 기다렸다가 아울러 축조(築造)하게 하소서.
혹자는 이르기를, ‘저 도적으로 하여금 내지(內地)에 이르게 하면, 나라는 나라가 아닐텐데 어찌 축성에 힘쓰겠는가? 더구나 승평백년(昇平百年)에 어찌 도적이 있겠는가?’하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신이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은 성곽(城郭)의 나라입니다. 수초(水草)를 따라 행국(行國)878)할 수는 없으니, 그 성곽을 갖추는 일은 완만(緩慢)하게 할 수 없습니다. 고려의 현종(顯宗)은 거란(契丹)에게, 고종(高宗), 원종(元宗)은 몽고(蒙古)에게, 공민왕(恭愍王)은 홍적(紅賊)에게 모두 성(城)의 나쁨으로 인하여 무궁한 치욕을 당하였습니다. 공민왕(恭愍王)과 고종 , 원종의 시대는 그만두더라도 현종(顯宗)때에는 어찌 당당하지 못해서 이런 환난(患難)이 있었으며, 더구나 전일에 중국(中國)에서도 또한 변란이 있었겠습니까?
혹은 이르기를, 만일 ‘주진(州鎭)에 성(城)이 있어도 족히 적(賊)을 무휼(撫恤)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몽인(蒙人)에게 중국이〈침입당한 것이〉 어찌 장성(長成)이 없어서이겠습니까?
만일 말하기를, ‘강역(疆域)이 서로 이웃하지않으면 세력이 서로 미치지않는다’고 한다면, 달달(達達)879)에게 연경(燕京)이 어찌 수천 리만 되겠습니까? 다만 적인(敵人)의 침공이 없을 뿐이니, 다만 우리의 방비가 있음을 믿을 뿐입니다. 어찌 수천리의 대국으로서 그 만의 하나라도 무사함을 요행으로 여기겠으며, 또 어찌 백년토록 무사할 것을 알겠습니까? 이것은 신이 깊이 생각하고 지나치게 염려하여 권권(拳拳)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1. 제도(諸道)에 진(鎭)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대개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방금 진(鎭)을 설치하였으나, 또 마땅히 설치할 곳이 여덟이고, 마땅히 감할 곳이 하나이며, 합병하여 1진(鎭)으로 할 곳이 둘이고, 스스로 1진이 될 곳이 하나입니다.
평안도 자성(慈城)같은 곳은 여연(閭延), 무창(茂昌), 우예(虞芮)의 적로(賊路)의 요충(要衝)이 되니, 마땅히 스스로 1진이 될 만한 곳입니다.
대저 제도(諸道)의 주군(州郡)에 모두 익진(翼鎭)을 설치하였는데, 이미 요긴한 군(郡)이 아니면 각각 자체가 하나의 진으로 될 필요가 없으며, 황해도 장연(長淵), 풍천(豊川), 강령(康翎)과 옹진(甕津)은 마땅히 각각 합병하여 1진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또 경기(京畿) 부평부(富平府)는 반드시 진(鎭)을 설치할 곳이 아니며, 평안도 희천(熙川)에 이르러서는 적유령(狄踰嶺)이 웅거(雄據)하고, 박천(博川)은 대강(大江)이 있으며, 삼등(三登)은 평양(平壤)의 동북로(東北路)의 요해(要害)이며, 함길도(咸吉道) 회령(會寧), 동창(童倉)의 구거(舊居)와 황해도 서흥(瑞興)은 절령(岊嶺)에 웅거하고, 경기 수원(水原)은 남로(南路)의 요충(要衝)이며, 원평(原平)은 임진(臨津)에 의지하고, 경상도 울산(蔚山)은 왜선(倭船)이 이르러 정박하는 곳이며, 또 왜인(倭人)이 거류(居留)하고 있으니,
모두 마땅히 진(鎭)을 설치할 곳입니다.
소신(小臣)은 계유년880) 겨울부터 상지(上旨)를 외람되게 받고 경기지도(京畿地圖)와 팔도지도(八道地圖)를 고정(考定)하였으니, 이로써 모든 경내(境內)의 산천의 액색(阨塞)과 도로(道路)의 원근(遠近)과 일체 주진(州鎭)의 일을 강구하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감히 관견(管見)을 진달(陳達)하여 두세 번에 이르니, 엎드려 바라건대 예감(睿鑑)으로 수찰(垂察)하소서”하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註831]소간(宵旰):소의간식(宵衣旰食).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함註832]경악(經幄):경연 註833]금인(金人): 금나라 사람.註834]전조(前朝):고려조 註835]교천(郊天):왕이 천신(天神)에게 제사지내던 일. 동지에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하고 하지에 북교의 땅에 제사하였음 註836]향제(饗帝):선왕(先王)께 합제(合祭)하는 것 註837]북해(北海):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 註838]이부(夷部):오랑캐 음악 註839]삼가(三加):관례때 세 번 관(冠)을 갈아 씌우던 의식. 초가(初加)에는 입자(笠子), 단령(團領), 조아(條兒), 재가에는 사모(紗帽),단령, 각대(角帶), 삼가에는 복두(幞頭), 공복(公服)을 썼음 註840]좌임(左衽) :왼쪽으로 여미는 것 註841]대뢰(大牢):나라 제사에 소, 양, 돼지를 아울러 제물로 바치는 일 註842]초소(樵蘇):나무를 찍고 풀을 벰 註843]홍범(洪範) :중국《서경(書經)》의 한 편. 기자(箕子)가 천지(天地)의 대법(大法)을 베풀어서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준 것 註844]정(程), 주(朱):정자(程子)와 주자(朱子) 註845]천경지위(天經地緯):만세에 변하지않는 상리(常理) 註846]문선왕(文宣王):공자(孔子)의 존칭 註847]둑신(纛神):군사에 관한 일을 주관하던 무(武)의 신(神) 註848]둑소(纛所):둑기(纛旗:대장기)를 세워놓던 곳 註849]유후(宥後):후대를 사유 註850]세록(世祿):대대로 녹봉을 내림 註851]음자(蔭子):음직(蔭職)을 받아 관직에 임명되던 문무관(文武官)의 후손 註852]승음(承蔭):특별히 음관(蔭官)으로 임용(任用)함 註853]《무경칠서(武經七書)》: 중국의 7가지 병법에 관한 책《육도(六鞱)》,《손자(孫子)》,《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위료자(尉繚子)》,《이위공문대(李偉公問對)》를 말함 註854]친자(親炙):친히 배우는 것 註855]분전(墳典):3황(皇), 5제(帝)의 서(書). 곧 고전(古典)이란 뜻 註 856]상역(象譯):번역註857]민섬(敏贍):빠르고 풍부한 것 註858]기인(其人):신라때부터 지방자치 세력의 유력한 사람으로, 중앙에 뽑혀와서 볼모로 있으면서 그 고을 행정의 고문(顧問)을 맡아보던 사람. 지방의 세력을 견제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으로 신라의 상수리(上守吏)에서 유래한 것임 註859]유수(遊手): 농사를 짓지않고 놀고 먹는 사람. 대개 농업이외의 상업, 수공업, 재예(才藝)등에 종사하는 자들을 통칭하는 말임 註860]3정1자(三丁一子):조선조때 향리(鄕吏) 1호(戶)에 세 아들이 한꺼번에 역(役)을 서게되면, 그 중 한 아들의 역(役)을 면제해 주던 일 註861]신목(薪木):땔나무 註862]선상노자(選上奴子):각 지방에서 골라뽑아서 서울의 중앙 관아(官衙)로 올려보내던 노비 註 863]취모멱자(吹毛覓疵):일부러 남의 잘못을 찾는 것 註864]능상(陵上):상관을 넘보는 것 註865]작상(작喪):깍아없애는 것 註866]부근(斧斤):도끼 註 867]전최(殿最):관원들의 근무성적을 심사하여 우열을 매기는 일. 성적을 고사(考査)할 때 상(上)을 최(最), 하(下)를 전(殿)이라 하였음 註868]잔군(殘郡):쇠잔한 고을 註869]인리(人吏):아전 註870]범금(犯禁):금법을 범함註 871]편호(編戶):호적에 올려있지않던 사람이나 외국인을 호적에 올려 일반민으로 만들던 것 註872]부서(簿書):관청의 장부와 문서 註873]호거(虎踞):범처럼 도사리고 앉음 註874]기포(碁布):바둑돌을 늘어놓은 것같이 정제한 모양 註875]은부(殷富):풍성하고 넉넉함 註876]액수(扼守):중요한 곳을 굳게 지킴 註877]홍적(紅賊):홍건적 註878]행국(行國):나라를 옮김 註879]달달(達達):달달족(達達族) 註880]계유년:1453 단종원년.
○集賢殿直提學梁誠之上疏曰:
臣伏覩主上殿下以上聖之資, 光登大位, 古今治亂之跡、民俗艱難之事, 靡不洞照, 宵旰圖治, 以基我朝鮮億萬年太平之業, 誠三韓一盛際也。 方令朝廷得失、民間利病, 大臣謀之, 臺諫論之, 其他侍從之職, 在於論思, 臣以庸劣, 獲侍經幄, 愧無寸効上報聖德。 凡國家大小之事, 罔不商確於微衷, 而思有以裨益乎萬一, 敢將便宜二十四事條錄以獻, 惟聖鑑財幸。 一, 春秋大射。 蓋金人承遼俗, 於三月三日、九月九日拜天射柳。 此雖非中原之制, 亦藩國之盛事也。 我東方雄據海東, 自三國至于前朝, 郊天饗帝, 無不爲之。 今固不能悉遵其舊, 稍倣遼、金故事, 於三月三日、九月九日親幸郊外, 行大射禮, 歲以爲常。 如是則庶幾張皇我武, 士氣亦增, 而自成一國一代之風俗矣。 一, 增置五京。 蓋遼、金、渤海竝建五京, 前朝又建四京, 而本朝則只有漢城、開城兩京而已, 以大東山海之險、州府之盛, 而只置兩京, 豈不欠哉, 況元世祖許我以儀從本俗, 高皇帝使我以自爲聲敎, 是東郊之地, 固非腹裏比也。 乞以京都漢城府爲上京, 開城府爲中京, 慶州爲東京, 全州爲南京, 平壤爲西京, 咸興爲北京, 各設土官, 加定軍兵。 如是則庶幾得形勢之勝, 而緩急亦足以賴矣。 一, 岳、鎭、海、瀆。 蓋一代之興, 必有一代之制, 本朝岳鎭海瀆名山大川之祀, 皆倣三國及前朝之舊而爲之, 多有可議者焉。 龍興江我太祖興運之地, 至於妙香山檀君所起, 九月山有檀君祠, 太白山神祠所在, 金剛山名聞天下, 長白山在先春嶺之南甲山之北, 實爲國之北岳。 臨津國之西關, 龍津國之東關, 洛東江慶尙大川, 蟾津全羅大川, 博川江卽古大寧江, 以至菩提津、五臺山, 皆不在祀典。 且東、南、西海神祠, 皆自開城而定之, 亦乖方位, 乞命禮官詳加考定, 以三角山爲中岳, 金剛山爲東岳, 九月山爲西岳, 智異山爲南岳, 長白山爲北岳, 白岳山爲中鎭, 太白山爲東鎭, 松岳山爲西鎭, 錦城山爲南鎭, 妙香山爲北鎭。 又移祭東海神於江陵, 西海於仁川, 南海於順天, 北海【鴨綠江上流。】於甲山, 以龍津爲東瀆, 大同江爲仙, 漢江爲南瀆, 豆滿江爲北瀆。 又以木覔山、紺岳山、五冠山、雞龍山、雉岳山、五臺山、義舘嶺、竹嶺山爲名山, 熊津、臨津、菩提津、龍興江、淸川江、博川江、洛東江、蟾津爲大川, 依例致祭, 【楊津二處、德津二處、伽耶津、主屹山、亏弗山、牛耳山、鼻白山、長山串、阿斯津、松串、沸流水、九津、溺水可革。】 以新一代祀典。 是則山川之載祀典者, 古今皆三十四, 而仍舊者十七, 移祭者四, 新陞者十三, 可永革者亦十三矣。 一, 設蕃部樂。 蓋中國之樂, 有雅樂、俗樂、女樂、夷部等樂, 本朝所用, 有軒架、鼓吹、童男、妓女、假面雜戲等制, 大抵樂者, 象成者也。 自太祖乘運而興, 太宗、世宗相繼而作, 東隣獻琛, 北國款塞, 制禮作樂, 雅俗皆正, 而獨蕃樂未之議焉。 方今聖上龍飛, 新登大位, 日本、女眞之使來賀卽位者, 常數百人, 稽顙闕庭, 海東文物, 未有盛於此時者也。 乞以日本歌舞爲東部樂, 女眞歌舞爲北部樂, 日本樂習於三浦倭人, 女眞樂習於五鎭野人, 其衣冠制度, 不爲怪異譏誚之狀, 燕東使則兼用北樂, 而不用東樂, 燕北使則兼用東樂而不用北樂, 燕中國使, 則竝用東、北樂, 于以用之朝廷, 奏之宗廟, 賁飾太平之治, 以光我(且)〔祖〕宗之業, 不勝幸甚。 一, 議行冠禮。 蓋古者男子二十而冠, 所以將責成人之道也。 宋末進士尹穀, 在圍城中行冠禮, 鄕人譏之, 答云, ‘欲令兒曹冠帶, 見先人于地下。’ 其重冠禮如此。 東方則前朝明宗時, 元子行冠禮, 其後無聞焉。 乞命禮官博採古禮, 兼考時王之制, 上自宗室下至士大夫之子弟, 年十三行冠禮, 以笠子、頭巾、紗帽三加, 或用紗帽、幞頭、梁冠, 其未冠者不許入學, 婚嫁從仕, 于以克復先王之制, 丕變外國之陋。 一, 定服色。 蓋服色之定, 所以辨上下, 一風俗不可不嚴也。 元人尙白, 大明尙黑, 以至日本尙靑, 皆有一定之制焉。 吾東方朝冠公服, 實倣中國, 而常時好著白衣, 任用雜色, 甚爲鄙俚。 乞依公服制度, 堂上官以上爲一色, 六品以上爲一色, 流品員、成衆官、衣冠子弟爲一色, 諸衛軍士爲一色, 京外良人、吏胥爲一色, 公私賤口、工匠爲一色, 以此依品漸次穿着, 或純用一色, 以齊國俗, 至於女服, 亦皆詳定。 一, 禁服妖。 蓋衣裳之制, 所以別男女貴賤也, 非下民之所敢擅便者也。 今國中女子喜着長衣若男子然, 或以長衣着於衣裳之間, 成爲三層, 轉相慕效, 擧國皆然, 疑此卽史文所謂服妖者也。 前日中原女子多服左衽之衣, 見聞者皆以爲非吉兆, 今女着男服, 亦豈嘉祥也哉, 況後世唯女服上衣下裳, 最爲近古, 若如此從心爲之, 則男女衣服, 可以自相制度, 無所不至矣, 何至今不變乎, 乞命攸司定限禁止, 其如前穿着者, 收其衣分置東西活人院, 以爲貧病者之服。 一, 祭前代君相。 臣竊觀大明諸司職掌, 遣官祭歷代君相, 用以大牢, 甚盛擧也。 本朝以歷代君王散祭所都, 而或有當祭不祭者, 又或無配享大臣, 似爲欠典。
乞每年春秋於東郊, 合祭前朝鮮王檀君、後朝鮮王箕子、新羅始祖、太宗王、文武王、【二王統合麗、濟。】高句麗始祖、嬰陽王、【大敗隋兵。】百濟始祖、高麗太祖、成宗、顯宗、忠烈王以上十二位, 以新羅金庾信ㆍ金仁問、高句麗乙支文德、百濟黑齒常之, 近日所定前朝配享十六臣及韓希愈、羅裕【禦哈丹有功。】崔瑩、鄭地。【禦倭寇有功。】 等配享。 一, 護前代陵墓。 臣觀《續六典》, 高麗太祖、顯宗、文宗、元宗四陵, 各定守護二戶, 使禁樵採, 太祖陵加一戶, 甚盛德也。 然臣竊惟歷代君主, 雖未能皆有功德於斯民, 亦皆一國人民所共主也, 其不省所在者則已矣, 其陵墓如古, 而使狐狸穴於傍樵採行於上, 豈不可悶也哉, 乞令有司於前ㆍ後朝鮮, 三國、前朝所都開城、江華、慶州、平壤、公州、扶餘及金海、益山等處所在陵墓, 字細尋訪, 其有功德者置守陵三戶, 別無功德者置二戶, 正妃陵墓亦置一戶, 略蠲征徭, 禁其樵蘇, 仍令所在官春秋省視致祭。 一, 文廟從祀。 蓋東方自箕子受封以後, 《洪範》遺敎久而不墜, 唐爲君子之國, 宋稱禮義之邦, 文獻之美侔擬中華, 而配食文廟者, 獨新羅之薛聰ㆍ崔致遠, 高麗之安珦三人而已。 臣聞學士雙冀, 在前朝始設科擧, 以振文風, 文獻公崔冲又設九齋, 以敎諸生, 至於文忠公李齊賢、文忠公鄭夢周, 本朝文忠公權近, 其文章道德, 人皆可以垂範萬世, 乞皆配享先聖, 以勸後人。 若曰, ‘東方賢者, 焉能如古之人,” 則孔、孟之後, 亦有程、朱, 且賢者如是其難也, 則後人何學爲聖賢乎, 中國之配享者, 果皆如孔、孟、程、朱乎, 東方之士, 皆不可如中國人乎, 大抵人主須施一大政事, 以示勸懲之義, 然後可人人觀聽, 而風移俗易矣。 一, 武成立廟。 蓋文武之道, 如天經地緯, 不可偏廢。 唐肅宗尊太公爲武成王, 立廟享祀, 與文宣王比, 後以歷代良將六十四人配享。 吾東方先聖之祀, 上自國學下至州郡, 而武成王無祠宇, 只祭纛神四位, 豈非闕典歟, 今訓鍊觀卽宋朝武學也, 乞幷纛所于訓鍊觀, 而立武成廟, 祭禮配食, 略依文廟制度, 又以新羅之金庾信、高句麗之乙支文德、高麗之庾黔弼ㆍ姜邯賛ㆍ楊規ㆍ尹瓘ㆍ趙冲ㆍ金就礪ㆍ金慶孫ㆍ朴犀ㆍ金方慶ㆍ安祐ㆍ金得培ㆍ李方實ㆍ崔瑩ㆍ鄭地, 本朝之河敬復ㆍ崔閏德配享。 一, 配享功臣。 蓋本朝前後五功臣, 皆屬忠義衛, 三朝原從之人, 亦皆宥罪錄後, 與元之四怯薛、宋之錄隨龍恩無以加矣。 然臣聞前朝配享大臣, 稱爲功臣, 每大恩禮, 必錄子孫。 本朝五廟, 俱有配位, 皆功存王室, 澤及生民者也。 乞依五功臣例, 或依原從諸人賜號, 配享功臣竝令宥後世祿。 且前朝及本朝將相, 有功德於民者之子孫, 亦使搜訪特加恩命, 則前人感激於冥冥之中, 而後人亦克勸於萬世矣。 一, 文、崔立祠。 蓋臣聞聖人之制祭禮也, 法施於民則祀之, 能禦大患則祀之。 吾東方舊無木綿種, 前朝文益漸奉使留元, 始得而種之, 遂流遍一國, 至今無貴賤男女, 皆衣綿布。 又自新羅只有砲石之制, 而歷代無火藥之法, 前朝末崔茂宣, 始學火砲之法於元, 東還而傳其術, 至今軍鎭之用, 利不可言。 茂宣之功, 萬世除民害也, 益漸之功, 萬世興民利也, 其澤被生民, 豈曰小哉, 乞於二人鄕貫官立祠宇, 春秋令本官行祭, 其子孫稱爲功臣, 宥罪錄用。 一, 侍臣蔭子。 蓋本朝承蔭之法, 卽唐之資蔭、宋朝任子之意也, 其待士大夫之恩至矣。 然其法三品以上官外, 只許曾經臺諫、政曹者之子承蔭, 新參數日纔拜監察, 而蔭及子孫, 而或有侍從數十年, 蔭不及後者, 誠爲可惜。 況《宋史》以宰執、侍從、臺諫竝言之, 乞四品以下六品以上, 館閣兩制, 侍從諸臣之子, 特許承蔭。 一, 文武科法。 蓋今文科初場講經之時, 四書、五經外, 如《韓文》、《柳文》等書任意試講, 實無定規, 中場則竝試古賦, 本非急務。 又進士以此取之, 終場則諸史時務, 雖參酌出題, 至論歷代之事, 權辭以對曰, ‘漢、唐之治, 何足論於今日,’ 取之者亦不以爲意, 以此史學不明, 甚爲不可。 且武科試竝講四書、五經, 亦爲未便, 乞武經七書外, 只講《將鑑》、《兵鑑》、《兵要》、《陳說》, 文科則四書、五經外, 只講《左傳》、《史記》、《通鑑》、《宋元節要》、《三國史記》、《高麗史》, 中場試表、箋, 以習臣子事上之文, 試敎詔以習君上令下之文, 終場歷代時務迭出爲題, 如今年試歷代, 明年試時務, 以此定制, 以新科擧之法。 一, 遣子入學。 蓋子弟入學, 其利有六, 得賢師友, 而質問疑難, 一也, 親炙賢士大夫, 而薰陶其氣質, 二也, 人心風俗, 彼此形勢, 無不知之, 三也, 親見文獻之美, 禮樂名物以漸改習俗之陋, 四也, 或購求墳典, 以補闕遺, 五也, 因以學中國之語音, 以正象譯之訛, 六也。 今雖奏請, 似難蒙允, 乞於入朝每行李, 擇集賢、藝文、校書、成均、承文院中, 學問精熟, 文章敏贍, 器局宏遠者各一人, 就差入送, 以之游學, 則庶幾所見旣廣, 所得亦多, 而皆可爲國家有用之才矣。
一, 革其人法。 蓋前朝太祖統一三韓, 以土豪爲戶長, 設鄕職, 仍使諸郡吏之子孫, 稱爲其人, 分番侍衛, 卽古之質子之意也。 逮至于後, 視爲賤隷, 使之苦役, 甚無理也。 且其人番上之時, 或斂民布貨, 或賣其田産, 駄載而來, 於是富商大賈受其直而代其役, 其直六朔四十五匹, 此則刻民之膏血, 而供京師遊手之人也。 大抵鄕吏姦猾者雖多, 然一邑庶務與夫上供諸事、漕運、迎送緊苦之務, 無不爲之, 其忍又使爲苦役乎, 況三丁一子, 選爲吏胥, 至于登正科、躋顯仕, 爲國將相者, 固非一族, 亦士出於農之意也。 何必與賤隷, 同爲苦務哉, 若以役重, 非其人不可當, 則臣之意, 以謂非其人膂力, 有以當之也。 剝民膏血以富人代其事也, 富人亦以其直易薪木而供之, 以其餘爲利, 其剝民何如也, 今諸司外方奴子, 三丁爲一戶, 一戶五年一番上, 婢子則一歲只納一匹布, 乞自今罷其人之法, 只令加定選上奴子, 以三奴子代一其人之役。 如是則官家之事, 固無不成矣。 若以臣之言爲不可, 姑試數年。 一, 議罷分臺。 蓋分遣臺臣, 本以察守令之貪暴也, 察民生之休戚也, 其爲名豈不美哉, 其威令豈不靡然於一時哉, 然本國八道就設三百三十四州, 道各有觀察使、都事, 州各有守令、敎官, 或有少尹、判官, 有節制、處置使, 有鎭兵馬使、萬戶、千戶, 又有水陸察訪、檢律、敎諭官, 非不多而又遣臺員, 豈不民少而官多乎, 況今之觀察使, 卽所謂外憲, 而黜陟守令者也, 何必更遣臺官, 以輕觀察使之權乎, 非徒觀察使之權輕也, 反與守令同心掩覆, 而避分臺之擧劾矣, 使分臺但擧大綱而已, 則不如不遣之爲愈也。 若至於發姦擿伏, 則其流之弊, 吹毛覓疵, 使官吏畏首畏尾, 不得措其手足, 益長小民陵上告訐之風矣。 近日立法之始, 尙有過中之弊, 安知異時永永無一弊乎, 大抵國家政令, 固不可柔懦以爲之, 而亦不可急迫以御下也。 漢宣帝、唐宣宗, 皆以剛明聰察爲治, 而漢、唐之業遂衰, 然則剛明聰察, 豈非適足爲斲喪元氣之斧斤乎, 伏望殿下以寬裕爲政, 而勿以苛急爲貴, 罷近日分臺之法, 遵前日行臺之規, 其守令不法, 專委觀察使, 考劾而殿最之, 自然官吏不敢恣貪殘之習, 而民安其業矣。 一, 州郡奴婢。 蓋外方官奴, 其數不等。 假如慶州鄕校奴婢至數百戶, 平壤官奴亦數千戶, 殘郡則數未盈十。 而貢賦賓旅之煩, 與他郡不甚相遠, 或有人吏之妻, 負戴於道路者, 誠爲不均。 乞諸司奴婢之在殘郡且隣近者, 量給殘郡, 仍以他郡剩數官奴, 充給其司, 則庶幾勞逸均, 而州郡實矣。 一, 區處白丁。 蓋白丁或稱禾尺, 或稱才人, 或稱韃靼, 其種類非一, 國家憫其不齒於齊民也。 稱白丁以變舊號, 屬軍伍以開仕路, 然而至今遠者五百餘年近者數百年。 本非我類, 遺俗不變, 自相屯聚, 自相婚嫁, 或殺牛, 或訴乞, 或行盜賊。 且前朝之時, 契丹來侵, 最先(鄕)〔嚮〕導, 又詐爲倭形, 始起於江原道, 蔓延于慶尙道, 至遣將以討平之。 在今大小賊人之被捉者, 太半皆此類也。 親戚姻黨連綿八道, 小則饑饉, 大則兵興, 皆可慮也。 乞自今不令別作一戶, 皆定爲甲士、侍衛、鎭軍奉足, 使之一一俠居, 仍禁其往來他郡, 其獨處山谷, 或自相婚娶, 或行宰殺, 或行寇賊, 或作樂丐乞者, 京外痛禁, 其犯者幷罪戶首, 又三世不犯禁者, 不復稱白丁, 而使同爲編戶, 則彼亦自此知農桑之樂, 而盜賊稍息矣。 一, 諸州判官。 蓋張官置吏, 本以爲民也。 今大州簿書雲委, 使客坌集, 守令以一身何暇勸農事, 何暇聽詞訟, 義倉斂散, 委之豪猾, 斯民之害不可勝言。 乞於京圻水原ㆍ楊州、慶尙道善山ㆍ星州ㆍ金海ㆍ密陽、全羅道光州ㆍ南原等州, 特設判官。 一, 諸鎭置尉。 蓋秦法每郡守以治民, 尉以治兵。 前朝於西北面, 設分道將軍, 以主兵事, 又有鎭將、有縣尉。 今八道六十一處, 稱某州道, 又稱某鎭, 或領左右翼, 或自爲一鎭, 皆置軍兵, 使之團鍊, 以戒不虞, 誠良法也。 然守令簿書期會、使客支待、出納錢穀、聽理詞訟、勸農興學, 一應民事, 尙未能辦, 亦安能專心治兵, 以備緩急乎, 乞於各鎭, 依例置尉, 若未能皆置, 則其有判官處, 又武交差, 無判官處, 特令置尉。 一, 京都四輔。 蓋京都, 卽所謂北漢山城也。
在三國之時, 則三國交戰之地, 及前朝統三、本朝定都之後, 則以之控制四方, 昔自四方而爭中央, 今在中央而制四方, 其形勢可知也。 三山鎭北, 大江繞南, 西有臨津, 東有龍津, 土地沃繞, 道里適均, 漕運所會, 畜牧所使, 在京都四面數十里之地而觀之, 則可知其天作之地矣。 且石城虎踞, 朝市碁布, 宮闕嚴肅, 閭閻殷富, 誠萬世之業也。 但今中外列置翼鎭, 而京都畿內, 只設三鎭, 實爲未便。 且富平府, 雖古安南之地, 在今日實無所係, 原平府據臨津之險, 又可以提交河挈豐德, 而扼倭寇於海口也。 水原府本觀察置司之地, 前朝紅賊之南下, 必由乎此, 而四通五達之地也。 乞依前朝左右輔例, 以楊州爲後輔, 水原爲前輔, 廣州爲左輔, 原平爲右輔, 則前後左右皆有巨鎭, 而東南二鎭在江外, 西北二鎭在江內, 南北之勢均, 而京師益壯矣。 且京城十門, 東大門外, 皆無擁城, 須待豐年幷築之。 或者以爲, “使彼賊至於內地, 則國不國矣, 何用城爲, 況昇平百年, 有何盜賊,” 然臣以爲吾東方, 城郭之國也。 旣不能逐水草爲行國, 則其城郭之備, 不可緩也。 前朝顯宗之於契丹, 高、元之於蒙古, 恭愍之於紅賊, 皆因城惡以貽無窮之恥。 恭愍、高、元之時則已矣, 顯宗之時, 豈不堂堂而有此患乎, 況前日中國亦有變乎, 儻曰, “州鎭有城, 賊不足恤”, 則蒙人之於中國, 豈無長城乎, 儻曰, “疆域不與之隣, 勢不相及”, 則達達之於燕京, 豈但數千里乎, 但無敵人之侵耳, 但恃吾之有備耳。 豈有以數千里之大國, 而僥倖其無事於萬一哉, 又安知百年無事乎, 此臣所以深思過慮, 拳拳不已者也。 一, 諸道置鎭。 蓋臣竊料, 方今置鎭, 又當置者八、當減者一、可倂爲一鎭者二、可自爲一鎭者。 一如平安道慈城, 爲閭延、茂昌、虞芮賊路之衝, 當自爲一鎭者也。 大抵諸道州郡, 皆設翼鎭, 旣非要郡, 則不必各自爲一鎭, 黃海道長淵與豐川、康翎與瓮津, 當各倂爲一鎭者也。 且京畿富平府, 不必置鎭處也, 至於平安道熙川據狄踰嶺, 博川有大江, 三登則平壤東北路要害, 咸吉道會寧童倉舊居, 黃海道瑞興據岊嶺, 京畿水原南路要衝, 原平據臨津, 慶尙道蔚山, 倭船到泊之處, 且有留居倭人, 皆當置鎭者也。小臣自癸酉冬,叨受上旨,考定京畿及八道地圖,以此凡境內山川阨塞道路遠近,一切州鎭之事,靡不講究,故敢陳管見,至于再三,伏惟睿鑑垂察。上嘉納。
세조 24권, 7년(1461 신사/명천순(天順)5년) 6월 5일(갑술) 1번째기사
안지등 여러 신하와 대귀로 한시를 읊다
좌의정(左議政) 신숙주(申叔舟)가 화종을 준 것을 사례(謝禮)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검교 찬성(檢校贊成) 안지(安止)가 김제(金堤)로부터 왔는데, 우의정(右議政) 권남(權擥)은 안지가 은문(恩門)5072)이고, 또 일찍이 가르침을 받았기때문에 맞이하여 술을 마시었습니다. 신도 또한 가서 참석하였는데, 하사(下賜)하신 술잔이 그때 마침 이르렀습니다. 성상의 은혜가 망극합니다”하였다.
임금이 화위당(華韡堂)에 나아가〈신숙주를〉불러서 이를 묻고, 곧 안지,
권남 및 병조판서(兵曹判書) 한명회(韓明澮), 이조참판(吏曹參判) 성임(成任) ,도진무(都鎭撫) 이윤손(李允孫), 강곤(康衮), 우승지(右承旨) 유자환(柳子煥) ,좌부승지(左副承旨) 홍응(洪應), 우부승지(右副承旨) 이문형(李文炯)을 불러 술자리를 베푸니, 안지등이 임금에게 술을 올리었다.
안지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김구(金鉤)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고, 안지에게 어의(御衣) 1령(領)을 내려주니 안지가 입고 춤을 추었다. 명하여〈안지〉의 사위 황맹수(黃孟粹)에게 관작 1품계를 더하여주게 하였다. 안지가 연귀(聯句)5073)를 올리기를,
“살아서 성주(聖主)를 만나니, 오히려 늦은 것이 원망스럽도다”하니,
임금이 곧 말하기를,
“옛 친구와 서로 기쁘게 노는데, 아직 초반도 안되었구나!”하고,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계속하게 하니, 신숙주가 말하기를,
“낚시를 위수(渭水)가에 드리우고 이미 80이 되었네”하고,
권남은 말하기를,
“어찌 성상의 은혜가 지금같이 넓고 큰 줄을 생각했으리오”하고,
한명회가 말하기를,
“지금 노성(老成)한 신하에게 예(禮)를 두텁게 함이여!”하고,
성임은 말하기를,
“창성(昌盛)한 때에 손뼉을 치며 춤을 추니, 성상의 구레나룻이 소산(蕭散)하구나!”
하고, 이문형은 말하기를,
“호호탕탕하니, 노인이라고 이름하기가 어렵도다.”
하고, 유자환은 말하기를,
“권아(卷阿)5074)에게 화답하여 시를 지으니 어찌 한적하게 노닐지않겠습니까?”하고, 홍응은 말하기를,
“순(舜)임금과 문왕은 억년(億年)이 지나가도 참으로 꼭 같다네”하고,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은 말하기를,
“공적(功績)을 높이어 천만년의 수(壽)를 드립니다”하니,
임금이 성임에게 명하여 이것을 쓰게 하고, 이문형에게 명하여 서문(序文)을 짓게 하였는데, 그 서문은 이러하였다.
“천순5년 신사5075) 여름 6월초5일 갑술(甲戌)에 임금이 화위당(華韡堂)에 나아가 옛 신하 안지를 부르시었다.
안지는 늙어서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 집에 있었는데, 이때 나이가 78세였다. 인하여 좌의정 신숙주이하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화위당에 입시(入侍)하게 하고 술자리를 벌이고 아악을 베풀었다.
술이 이미 취하였는데, 안지에게 어의(御衣) 1령(領)을 내려주니, 안지가 공경하게 받아서 입고 춤을 추고, 여러 신하가 서로 번갈아 일어나서 헌수(獻壽)하였다.
성상께서 안지에게 판중추원사를 제수하고 또 그 사위에게 벼슬을 더하여 주시었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기이한 만남이다.
안지가 시(詩) 1귀를 올리니, 성상이 화답(和答)을 내려주고 자리에 있는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글귀를〉채우게 하였다.
이미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지자, 성상이 말하기를, ‘말의 뜻과 음절(音節)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으니, 가히 볼만하다.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짓게 하라’ 하고, 곧 신(臣)에게 서문을 짓도록 명하셨다.
신은 가만히 생각하건대,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은 옛부터 어려운 일이고, 노인(老人)을 중히 여기고 유교(儒敎)를 숭상하는 것은 더욱 제왕(帝王)의 성덕(盛德)이다.
안지는 3대(三代)의 임금을 섬기면서, 유교의 도를 높이고, 유악(帷幄)의 고문이 되었고, 사국(史局)에서 역사를 편찬하는 것을 총괄하였고, 학예(學藝)의 모범이 되었으며, 과거(科擧)의 제형(提衡)으로 1대(代)의 유가(儒家)의 종장(宗匠)5076)이 되었다.
이제는 늙었으나, 전하(殿下)께서 그 옛일을 생각하고 그 나이를 존중하고 그 학문을 숭상하여, 직질(職秩)을 높이고 상(賞)을 후하게 하시어 하사하시는 것이 치우치게 많았다. 안지가 이에 은혜를 받고는 감격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니, 백발(白髮)이 파파(皤皤)하고 단심(丹心)이 경경(耿耿)5077)하였다.
이것은 비록 주(周)나라 임금의 잘 양호(養護)하는 것이라든가 한(漢)나라 황제의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기뻐하며 한 자리에서 화답(和答)하며 노래 부르는 것에 이르러서는 순(舜) 임금의 조정에서나 있었던 옛일이지 주나라나 한나라에서는 미치지 못할 바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의 성덕(盛德)이 널리 퍼지고 어진 소리가 멀리까지 미치어,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며 양육(養育)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진이를 존중하고 늙은이를 공경하는 데 이르러서는 비록《시전(詩傳)》이나 《서전(書傳)》에 기재된 것도 더함이 없을 것이다.
장차 부암(傅巖)의 늙은이5078)와 위빈(渭濱)의 늙은이5079) 또한 모두 목을 길게 뻗치고 눈을 씻고 볼 것이니, 우리 전하를 위하여 쓰일 것이다.
지혜와 계책이 하늘로부터 나와서 나라를 위하는 시귀(蓍龜)5080)가 왕화(王化)를 돕고, 민생(民生)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신이 엎드려 성(盛)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삼가 성상의 명을 받았으나 능히 큰 휴명(休命)을 포장(鋪張)5081)할 수 없어서 삼가 대강의 줄거리만 기술하고 태사씨(太史氏)5082)로 하여금 상고하게 하여 다른 날 문자문손(文子文孫)5083)도 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註5072]은문(恩門):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자기의 시관(試官)을 일컫던 말. 평생 문생(門生)의 예를 다하였음 註5073]연귀(聯句):한시(漢詩)의 대귀(對句).註5074]권아(卷阿):《시경(詩經)》의 편명. 내조(來朝)한 제후(諸侯)들을 기린 시(詩)임 註5075]천순5년 신사:1461 세조7년 註5076]종장(宗匠):경학(經學)에 밝고 글을 잘하는 사람 註5077]경경(耿耿):빛나는 모양 註5078]부암(傅巖)의 늙은이:부암은 땅이름으로서 부열(傅說)이 토목공사를 한 곳이고, 부열은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정승인데, 고종이 꿈에 성인(聖人)을 얻었으므로 백방으로 구하다가 부암에서 죄수들과 함께 길을 수리하고 있는 부열을 얻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註5079]위빈(渭濱)의 늙은이:강태공(姜太公), 즉 여상(呂尙)이 위수(渭水)가에서 낚시질하고 있을 때 문왕(文王)의 부름을 받고 재상이 되어서 공을 세웠다는 고사(故事).註5080]시귀(蓍龜): 점을 칠 때 쓰는 시초(蓍草)와 귀갑(龜甲)을 말하는데,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함을 말함 註5081]포장(鋪張):펼쳐서 관대하게 찬양함 註5082]태사씨(太史氏):사관(史官) 註5083]문자문손(文子文孫):문(文)을 좋아하는 후손(後孫).
○甲戌/左議政申叔舟謝賜畫鐘, 仍啓: “檢贊成安止來自金堤, 右議政權擥以止恩門, 且所嘗受業, 邀而觴之。 臣亦往參, 賜鐘適至, 上恩罔極。” 上御華韡堂, 召問之, 卽召止、擥及兵曹判書韓明澮、吏曹參判成任、都鎭撫李允孫ㆍ康袞、右承旨柳子煥、左副承旨洪應、右副承旨李文炯設酌, 止等進酒。 以止判中樞院事, 金鉤同知中樞院事, 賜止御衣一領, 止服以舞。 命加女壻黃孟粹爵一階, 止進聯句曰: “生逢聖主猶嫌晩。” 上卽曰: “故友相歡未始半。” 命諸臣續之, 叔舟曰: “垂釣渭濱已八十。” 擥曰: “豈料睿恩今渙汗。” 明澮曰: “方今優禮老成臣。” 任曰: “抃舞昌辰鬢蕭散。” 文炯曰: “蕩蕩難名老老仁。” 子煥曰: “載賡卷阿何判奐,” 應曰: “舜文億載眞同符。” 桂陽君璔曰: “宗勳獻壽於千萬。” 命任書之, 文炯序之, 序曰:
天順五年歲在辛巳夏六月甲戌, 上御華韡堂, 召舊臣安止。 止老退居于第, 時年七十八。 仍召左議政申叔舟以下諸臣, 入侍于堂, 置酒張樂。 酒旣醺, 賜止御衣一領, 止拜受, 衣之以舞, 諸臣迭起上壽。 除止判中樞院事, 又爵其女壻, 眞罕世之奇遇也。 止上一句, 上賜和, 命在座諸臣足之, 旣成篇。 上曰, “語意音節似出一手, 可觀也。” 其令文臣續成, 卽命臣序之。 臣竊惟君臣相遇, 自古爲難, 而重老崇儒, 尤帝王之盛德也。 安止歷事三朝, 宗主斯文, 承顧問於帷幄, 摠編摩於史局, 作範藝苑, 提衡文場, 爲一代儒家之宗匠。 今老矣, 殿下念其舊, 尊其年, 尙其文, 高秩厚賞, 齎予偏重。 止於是受恩感激, 歌頌蹈舞, 華髮皤皤, 丹心耿耿。 是雖周王之善養, 漢帝之賜食, 無以過之, 至於君臣相悅, 賡歌一堂之上, 則是虞庭舊事而周、漢之所未及也。 恭惟聖上盛德廣運, 仁聲遠被, 優游涵泳, 無物不養, 至於尊賢敬老, 雖《詩》、《書》所載, 蔑有加矣。 將見傅巖之叟、渭濱之老, 亦皆延頸拭目而爲我殿下用也。 稽謀自天, 爲國蓍龜, 扶王化, 澤民生, 有不可勝言者矣。 臣伏覩盛美, 恭承寵命, 不能鋪張洪休, 謹述梗槪, 使太史氏有所稽焉, 異日文子、文孫, 其有所觀乎,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명성화(成化)4년) 10월 23일(기유) 4번째기사
사헌부에서 안침과 조수무의 실직을 거둘 것을 건의했으나 윤허치 않다
사헌부에서 계달하기를,
“지난번에 신등이 사록(司錄) 안침(安琛), 도사(都事) 조수무(趙秀武)가 모두 등급을 넘어 벼슬을 받은 것을 가지고 감히 천총(天聰)을 번독하였더니,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사헌부의 규찰하는 뜻은 매우 아름다우나 혹시 살피는 때도 있고 혹시 살피지 아니할 때도 있으니, 이와 같이 하면 어떻게 조정을 바르게 하겠는가? 사헌부는 그것을 살피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등은 생각하건대, 작록(爵祿)은 임금이 아랫사람을 제어하는 권세입니다. 한 세상을 수작(酬酢)144)하는 것은 반드시 덕이 크고 작음과 공이 많고 적음으로써 작록을 줄 것인데, 만약 벼슬이 덕에 차지아니하고 녹(祿)이 공에 맞지아니하면 임금이 마땅히 거용(擧用)하고 가볍게 주지아니할 것이며,
신하에 있어서는 비록 일자반급(一資半級)일지라도 그 사이에 낮추고 높일 수 없습니다.
삼가《원육전(元六典)》145)을 상고하건대, ‘경전(經傳)에 밝고 행실을 닦아 도덕(道德)이 겸비(兼備)하여 사범(師範)이 될만한 자와, 지식이 시무(時務)에 통하고 재주가 경제(經濟)에 합하여 일에 공을 세울만한 자와, 문사(文辭)를 익히고 필찰(筆札)을 공부하여 문한(文翰)의 임무를 이룰만한 자와, 율산(律算)146)에 정밀하고 이치(吏治)147)에 통달하여 백성에게 임하는 직책을 감당할만한 자와, 꾀는《육도(六韜)》148),《삼략(三略)》149)에 깊고 용맹은 삼군(三軍)에 뛰어나서 장수(將帥)가 될만한 자와, 활쏘고 말달리기에 익숙하고 봉석(捧石)에 공교하여 군무(軍務)를 맡을만한 자와, 천문(天文), 지리(地理),복서(卜筮), 의약(醫藥)가운데 한 가지 재주를 전공한 자를 제도(諸道)의 감사(監司)가 자세히 찾아 물어서 뽑아써서 갖추도록 하라’고 하였고,
《속육전(續六典)》에는, ‘동반(東班),서반(西班)의 행직(行職)가운데 실직(實職)을 지내지아니한 자는 첨설직(添設職)150)과 다름이 없으니, 이제부터는 일찍이 지낸 실직에 따라 제수한다’고 하였으니, 이제 법을 세운 본의를 보건대, 현(賢)과 공(功)으로써 특지(特旨)로 뽑아쓰는 외에 실직(實職)3등을 뛰어올려서 제수하는 것은 진실로 이런 예가 없습니다.
오직 이경동(李瓊仝), 박양(朴良)은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로서 좌랑(佐郞)으로 뛰어올려 제수되었으니, 신등은 생각하건대, 두 사람은 벼슬에 오른 날이 오래고 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공의(公議)가 닿기때문에 감히 논박(論駁)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특히 한때에 한 것이고 정한 법이 아닌데, 이로 인하여 예(例)를 삼아서 드디어 법을 이루면 심히 옳지못합니다. 하물며 산관(散官), 영직(影職)으로는 간전 포도(墾田捕盜), 제언전제이장(堤堰田制里將), 멸화군공(滅火軍功)과 같이 그 종류가 매우 많고, 또 친척이나 부형(父兄)의 남은 자급(資級)을 대신받아 하루도 근무한 일이 없으면서 집에 앉아 계급을 더하여 대부(大夫)에 이른 자가 자못 많습니다.
이제 안침과 조수무는 달리 공(功)이나 능력이 없는데도 모두 정사를 잡은 대신의 친척이나 이웃이 되는 까닭으로 차례를 뛰어넘어 벼슬을 받았으니, 고쳐서 바로잡지아니하면 정사를 하는 시초에 점점 퇴폐하여져 법을 이루어서, 산관(散官)을 헛되게 더한 무리가 권세에 인연하여 처음에는 8품을 얻었다가 다음은 5품, 다음은 3품을 얻어, 인아(姻婭)151)와 친구가 하루아침에 통현(通顯)152)에 오르기가 어렵지 아니합니다.
청컨대 조수무등의 함부로 준 실직(實職)을 특별히 거두어서 요행을 바라고 외람됨을 범하는 문을 막으소서”하니,
어찰(御札)로 이르기를,
“대체(大體)를 살피지아니하고 소절(小節)을 살피는 것은 옳지못하다.
또 대신은 나라의 줄기인데, 구하기에 수고롭고 맡기면 편하니, 의심을 품을 수 없다. 참으로 죄가 있으면 죄를 주는 것이 옳다.
대체에 힘쓰고 대신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하였다.
註144]수작(酬酢):응대(應對) 註145]《원육전(元六典)》:《경제육전(經濟六典)》.註146]율산(律算):법률과 수학 註147]이치(吏治):정사(政事) 註148] 《육도(六韜)》:주(周)나라 태공망(太公望)이 지은 병서(兵書) 註149]《삼략(三略)》:황석공(黃石公)이 지은 병서(兵書) 註150]첨설직(添設職):고려말 조선초에 공로(功勞)가 있는 사람에게 새로 벼슬자리를 주거나 승직(陞職)시키려하여도 실직(實職)이 없을 때 차함(借銜)으로 주던 벼슬 註151]인아(姻婭) :모든 친척 註152]통현(通顯):높은 벼슬자리.
○司憲府啓: “日者, 臣等將司錄 安琛 、都事 趙秀武 , 竝越等受職, 敢瀆天聰, 御書曰: ‘憲府糾察之意甚嘉, 然或有時而察, 或有時而不察, 如是則何以正朝廷, 憲府其察焉。’ 臣等以爲, 爵祿人主所以御下之柄, 而酬酢一世者。 必以德之大小、功之多少而爵祿之。 若位不滿德, 祿不稱功, 人主當擧而進之, 未嘗輕與, 在人臣雖一資半級, 不可低昻於其間。 謹稽 《元六典》 : ‘經明行修道德兼備可爲師範者, 識通時務才合經濟可建事功者, 習於文辭工於筆札可備文翰之任者, 精於律算達於吏治可堪臨民之職者, 謀深 《韜》 、 《略》 勇冠三軍可爲將帥者, 習於射馳工於捧石可任軍務者, 天文、地理、卜筮、醫藥或攻一藝者, 諸道監司, 詳悉訪問, 以備擢用。’ 《續六典》 : ‘東、西班行, 職未經實職者, 與添設職無異, 自今從曾經實職除授。’ 今觀立法本意, 以賢以功特旨擢用外, 超授實職三等者, 固無此例。 唯 李瓊仝 、 朴良 , 以藝文待敎, 超授佐郞。 臣等以爲, 二人登仕日久, 且中重試, 公議所屬, 故未敢論駁, 固有罪矣。 然此特一時所爲, 非有定制, 而因以爲例, 遂爲成法, 甚不可也。 況散官、影職, 如墾田捕盜、堤堰田制里將、滅火軍功, 厥類甚多, 又代受親戚父兄餘資, 無一日從事之勤, 而在家增秩, 以至大夫者頗多。 今 琛 、 秀武 , 無他功能, 皆以執政大臣親戚隣里之故, 越次受職。 若不改正, 則正始之初, 轉廢成法, 虛增散官之輩, 因緣權勢, 初得八品, 次五品, 次三品, 姻婭親舊, 一朝置之通顯不難也。 請特收 秀武 等濫授實職, 藺僥倖冒濫之門。” 御札曰: “不察大體而審小節, 則不可也。 且大臣, 國家之幹, 求之斯勞, 任之斯逸, 不可懷疑。 眞有罪則罪之可也, 務存大體, 勿輕大臣。”
예종 4권, 1년(1469 기축/명성화(成化)5년) 윤2월 26일(신사) 3번째기사
8도 관찰사에게 어진 이를 천거할 것을 유시하다
어제(御製)로 8도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예로부터 명철(明哲)한 임금이 정사를 세우고 나라를 경영하는데에 어찌 일찍이 어질고 능한 자를 뽑거나 유체(幽滯)567)한 이를 거두어 채용하지아니하였던가?
흠명(欽明)한 당(唐) 요(堯)임금은 희화(羲和)568)에게 명하여 악(岳)569)에 있게 하였고, 준철(濬哲)한 우(虞)나라 순(舜)임금은 원개(元凱)570)를 올려서 정승으로 삼았으며, 이윤(伊尹)은 정조(鼎俎)571)의 천한 몸으로 은(殷)나라 아형(阿衡)572)이 되었고, 여망(呂望)573)은 고기낚는 지아비로서 주나라 상보(尙父)가 되었으니, 항상 전대(前代)의 풍속을 생각하고 흠모(欽慕)하는 마음을 가졌다. 나는 과매(寡昧)하면서도 큰 자리를 이어받아서 마음을 조심하고 몸을 가다듬어 날마다 삼가하여 여러 인재와 더불어 모든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바라는데, 많은 인재와 어진사람이 이르지아니하니, 어찌 아름다운 박옥(璞玉)574)이 광채를 감추었으며, 양공(良工)을 만나지 못하였는가?
굳은 절개를 마음에 가져서 꿋꿋하게 흔들리지 아니함인가?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소부(所部)에 혹은 학업이 넉넉하고 영민하며 글재주가 빼어나고 아름답거나, 혹은 재주가 장략(將略)을 감당할 만하고 기운이 날래고 굳센 자를 찾아내어서 일일이 뽑아 기록하여 이름을 갖추어 계문(啓聞)하면, 내가 장차 다시 시험하여 조정에 두겠다. 모든 인재를 다 등용하여 시대에 버림이 없고 이로써 다스림을 구하면 거의 바라는 바에서 멀지아니할 것이니, 힘써 뛰어난 인재를 얻어서 내 뜻을 맞추게 하라”하였다.
註567]유체(幽滯):숨어서 세상에 못나오는 사람 註568]희화(羲和): 희씨와 화씨. 요(堯)의 신하 註569]악(岳): 벼슬 이름 註570]원개(元凱):순의 신하. 註571]정조(鼎俎): 음식을 만드는 것 註572]아형(阿衡):재상 註573]여망(呂望):주(周)나라 강태공(姜太公) 註574]박옥(璞玉):다듬지 아니한 덩어리 옥.
○御製諭八道觀察使曰:
自古明君哲后, 立政經邦, 何嘗不選賢與能, 收採幽滯, 唐堯欽明, 命羲和以居岳; 虞舜濬哲, 升元凱而作相; 伊尹鼎俎之媵, 爲殷之阿衡; 呂望釣魚之夫, 爲周之尙父。 常想前風, 載懷欽佇。 予以寡昧, 嗣大歷服, 小心勵己, 日愼一日, 冀與群材, 共康庶績, 而彙茅寂寞, 投竿罕至, 豈美璞韜彩, 未値良工, 將介石在懷, 確乎難拔, 可令州縣, 搜揚所部, 或學業優敏, 文材秀美, 或才堪將略, 膂力驍壯, 一一採錄, 具以名聞, 予將更試, 寘之周行。 衆材畢擧, 與時無棄, 以此求治, 庶幾非遠, 務得卓異, 稱予意焉。
성종 4권, 1년(1470 경인/명성화(成化)6년) 4월 15일(계해) 4번째기사
세조때 주나라의 태공망의 사당을 세우려 한 일을 정승에게 의논하게 하다
승정원(承政院)에 전지하기를,
“세조(世祖)께서 장차 무성왕(武成王)365)의 사당을 세우려하여 의논이 이미 정하여졌었는데,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지금 남긴 뜻을 받들어 건치(建置)하고자하니 여러 정승(政丞)과 의논하고, 또 옛 제도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하였다.
註365]무성왕(武成王):주(周)나라 태공망(太公望). 곧 강태공(姜太公).
○傳于承政院曰: “ 世祖 將建 武成王 廟, 議已定, 未及施行。 今承遺意, 欲建置, 其與諸政丞擬議, 又令考古制, 以啓。”
성종 10권, 2년(1471 신묘/명성화(成化) 7년) 6월8일(기유) 3번째기사
사헌부대사헌 한치형이 올린 시의 17조에 대한 상소문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한치형(韓致亨)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엎드려 보건대 주상전하(主上殿下)께서는 불세(不世)의 자질로서 마땅히 하려고하는 기미[幾]가 있어, 언로(言路)를 열고 간쟁(諫諍)을 가납하시며,
도유우불(都兪吁咈)1338)하여 치도(治道)에 예정(銳精)1339)하시니, 우리 백성의 병폐가 일체(一切)로 제거되어, 국가의 형세가 편안하기 반석(盤石)과 같습니다.
진실로 족히 태평(太平)한 기틀이 되었는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치도(治道)에 지극하지 못함이 있어 백성의 병폐가 되는 일을 물리치지 못함이 있을까 하여, 늘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청납(聽納)하고 보치(補治)할 말을 구(求)하시니, 우리 동방(東方)에 만세의 복(福)입니다.
그러나 다스림이 당(唐), 우(虞)에 이르지못하면 선치(善治)라고 이를 수가 없고, 덕(德)이 요(堯), 순(舜)에 이르지못하면 성인(聖人)이라 이를 수 없는 까닭으로, 옛날 사람은 요(堯), 순(舜)의 도(道)가 아니면 감히 임금의 앞에 진달하지 못하였고, 필부필부(匹夫匹婦)라도 요(堯), 순(舜)의 은택(恩澤)을 입지않음이 있으면, 그 마음이 부끄러워서 저자[市]에서 종아리를 맞는 것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인신(人臣)이 된 자는 진실로 마땅히 요(堯), 순(舜)의 성(聖)을 군상(君上)에게 바라고, 인주(人主)도 또한 마땅히 당(唐), 우(虞)의 다스림[治]을 스스로 기약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등은 모두 용렬하고 노둔한 자질로 다행히 성명(聖明)을 만나, 언관(言官)으로 벼슬아치 수에 들었으나, 일찍이 족히 나라를 이익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언(一言)도 없이 앉아서 대창(大倉)의 곡식만을 허비하였으니, 이것은 옛사람이 부끄럽게 여겼던 것만이 아니고, 또한 전하께서 기다려 보는 뜻도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추요(芻蕘)1340)의 비루(鄙陋)함을 헤아리지않고, 그윽이 농고(聾瞽)1341)의 진부(陳腐)함을 본받아 삼가 시의(時宜)1342)17조(條)를 아래에 기록하여 올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재량하소서.
1. 삼대(三代)1343) 이전에는 사도(斯道)1344)가 해가 중천(中天)에 뜬 것과 같아, 석씨(釋氏)의 교(敎)라고 이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한(漢)나라의 명제(明帝)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에 들어왔는데, 그 설(說)은 대저 청정(淸淨),과욕(寡慾)으로 세상을 떠나 풍속을 끊는 것을 종(宗)으로 삼되, 기거는 반드시 산에서 하고 음식은 반드시 빌어먹으며, 초연히 출세간(出世間)1345)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법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오근(五根), 십계(十戒), 이십번뇌(二十煩惱)의 설(說)이 있는데, 이것은 곧 한 개의 별다른 종류의 도리(道理)이고, 이미 그 도(道)를 채우면 반드시 산림(山林)에 깊이 들어가, 벽곡(辟穀)1346)하고 면벽(面壁)1347)하여 황연(怳然)1348)히 그들이 말하는 허무(虛無), 적멸(寂滅)의 묘(妙)를 터득한 연후에야 비로소 부처의 무리라고 이를 수 있습니다.
어찌 여염에 잡되게 처하여 시끄럽게 떠드는 속세에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한갓 그 형상만 있고 진실로 그 마음이 없으면, 석씨(釋氏)의 무리에서 반드시 말하기를, ‘우리의 무리가 아니니 명고이공지(鳴鼓而攻之)1349)하는 것이 옳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아아, 지금의 중은 지계(持戒)1350)하고 조심(操心)하는 자가 1백명중에 한두 명도 없습니다. 무리가 모두 무지(無知)하여, 역사(役使)를 피하는 무리가 중이 되었으니, 군역(軍役)을 가하지않고, 죄(罪)가 있어도 면할 수 있으며,
처자(妻子)는 인연하여 보존할 수 있고, 전재(錢財)도 인하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에 모두 사모하고 추창하니, 구실[役]이 있는 군정(軍丁)이 차역(差役)을 도면(逃免)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도적(盜賊)들도 또한 거짓으로 중의 형상을 하여서 그 몸을 비호합니다.
이 때문에 훔치는 자, 음란한 자, 장사하는 자, 송옥하는 자와 해태(懈怠)하고 방일(放逸)한 무리가 여염에 편만(遍滿)하여 거의 군액(軍額)을 넘게 되었으며, 그들이 스승으로 삼아야할 청정(淸淨), 과욕(寡慾), 이세(離世), 절속(絶俗)하는 근본 계행을 돌보지아니하니, 석가씨(釋迦氏)가 영험이 있다면 또한 반드시 그들과 함께 무리가 됨을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지난 무인년1351)에 회암(檜巖), 유점(楡岾) 두 절의 역사를 잠깐 일으키는데 도첩(度牒)을 받으려는 자가 6만3천여인이었고, 기타 간경도감(刊經都監),
의묘(懿廟)의 부역(赴役)에서 도첩을 받은 그 수(數)도 무궁(無窮)하니, 이로써 추측하건대, 무인년1352)으로부터 지금까지 14년간에 함부로 머리를 깍은 자가 그 몇 만만(萬萬)이 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양종(兩宗)1353)에서 법에 의하여 불경을 시험본 자는 겨우 12인 뿐이니, 비록 불경을 시험하고 전곡을 납부하는 법이 있더라도 또한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법을 세우고서 쓰지않으면, 세우지않은 것만 같지 못합니다.
저들이 비록 그 도(道)에 정려(精勵)한다하더라도 국가(國家)에는 진실로 이익됨이 없거든, 더구나 본계(本戒)를 훼멸(毁滅)하고 국법을 만홀히 버리는 것이겠습니까? 한갓 방종하고 스스로 방사하여 하지못하는 것이 없는데,
또한 하필이면 그 스스로 하는데에 맡겨 양민(良民)을 무용(無用)한 땅에 버려두십니까?
이제 만약 환속(還俗)하는 법(法)을 세워서 금제(禁制)하지 않는다면, 형세가 장차 중들[僧徒]은 날로 성하고 군졸(軍卒)은 날로 줄어들 것이니, 전하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만약에 이르기를, ‘선왕(先王) 때에도 또한 이것은 있었다’고 하여, 차마 버리지못한다고 하면 또한 말할 것이 있습니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무왕(武王), 주공(周公)은 그 달효(達孝)이시도다!
대저 효(孝)라는 것은 사람의 뜻을 잘 잇고, 사람의 일을 잘 전술(傳述)하는 것이다’하였고, 진서산(眞西山)은 이를 평론(評論)하기를, ‘마땅히 지수(持守)할 것을 지수함은 진실로 계술(繼述)함이고, 마땅히 변통(變通)할 것을 변통(變通)하는 것도 또한 계술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상(商)의 바탕[質]과 주(周)의 문채[文]는 때를 따라서 손익(損益)하였으며, 여름에 베옷을 입고 겨울에 갓옷을 입는 것은 기후의 한난(寒煖)에 인연함이니, 취하고 버리는 뜻[意]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때를 따르는 의의(意義)가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 그 근원이 비록 선왕때부터 있었다하더라도 그 폐단은 전하의 시대에 이르러서 생겼습니다.
불이 성성(星星)하되 벌판을 태운다면 끄지않을 수 없고, 물이 연연(涓涓)1354)하되 하늘까지 뒤덮는다면 터놓지않을 수 없습니다.
한 농부가 있는데 그 아비가 심어 놓은 것을 그 아들이 김을 매면서 그 쭉정이를 보고 이르기를, ‘아비가 심은 것이니 차마 버리지 못하겠다’하고,
그 가라지[莠]를 보고 이르기를, ‘아비가 심은 것이니 차마 제거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옳겠습니까? 무엇이 이것과 다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옛 전장(典章)을 신명(申明)하고 겸하여 새로운 조항(條項)을 세우시어, 이미 전에 법을 어기고 머리를 깎았다든가 도첩(度牒)이 없는 자로 나이가 50이하는 환속(還俗)하고, 이제부터는 법을 어기고 피역(避役)하여 중이 된 자는 그 부모(父母), 동복(同腹), 인리(隣里), 관리(官吏)를 과죄(科罪)함으로써 군액(軍額)을 충실하게 하면 국가에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1. 사장(社長)이 무리를 모아, 뭇사람[衆]을 미혹(迷惑)하는 것은 제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유(類)는 모두 시정(市井)의 무식한 무리인데, 망령되게 인연(因緣)과 화복(禍福)의 설(說)을 사모하나, 장사하는 것이 그들의 업(業)이고 속이는 것이 그들의 마음인데도 한결같이 아미타승(阿彌陁僧)만 하면 불도(佛道)를 이루고 죄악(罪惡)을 소제(消除)한다고 생각하여, 바로 사(社)를 대도(大都)의 여염(閭閻) 가운데에 창건하고 염불소(念佛所)라고 칭하면서 그 업차(業次)를 버리고, 분연(紛然)히 무리를 모아 치의(緇衣), 치관(緇冠)하여 남자는 동쪽으로 여자는 서쪽으로 하니, 그 형상을 보면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며, 그 거처(居處)하는 것을 보면 절도 아니고 집도 아닙니다.
아침이면 시리(市利)를 속이고, 저녁이면 부처에 귀의(歸依)하여, 기이한 형태와 괴이한 형상으로 잡답(雜沓)하게 주선(周旋)하여, 징[錚]을 울리고 북[鼓]을 치며, 파사(婆裟)1355)하여 용약(踴躍)하므로, 가동(街童)과 거리의 부녀자가 돌아보며 흠모하니, 이목(耳目)으로 익숙하게 익혀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다투어 서로 추창하여 붙습니다.
이미 국가의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는 뜻을 거슬렸고, 또 석씨(釋氏)의 이세(離世), 절속(絶俗)하는 도(道)도 아니니, 또한 어떠한 풍속입니까? 만일 그 도(道)로써 천하를 바꾼다면 반드시 집집마다 절이 되고 사람마다 중이 된 뒤라야 족할 것입니다.
불씨(佛氏)의 말을 요약하면, ‘여래(如來)’라 하고, ‘보살(菩薩)’이라 하고,
‘아미타불(阿彌陁佛)’이라 하니, 그 마음을 구하는데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아아, 마음을 과연 뭇사람으로 더불어 북을 쳐서 구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침에는 장사를 속이는 행동을 하고 저녁에는 부처에 의지하여서 그 죄를 소멸한다면, 무릇 십악(十惡)을 범한 자로 누가 한결같이 염불(念佛)하여 그 죄를 면할 수가 없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여서 마음을 구할 수가 있고, 성불(成佛)할 수 있으며, 악을 소멸할 수 있다면, 이는 누구를 속임입니까? 하늘을 속임이 아니겠습니까?
성인(聖人)이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마땅히 백성을 인(仁)으로써 물들게 하고 백성을 의(義)로써 연마하게 하며 백성을 예(禮)로써 절제할 따름인데, 어찌 그 황탄한 행실에 맡기어 그 올바르지 아니한 풍속을 기르며 다스리려는 것이 옳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유사(攸司)에 명하여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것을 통렬히 금하여서 유신(維新)의 교화를 맑게 하소서.
1.《주역(周易)》에 말하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서 건곤(乾坤)이 정해지고, 낮고 높은 것이 베풀어져서 귀하고 천한 것이 자리 잡았다’고 한 것은 상하(上下)의 분수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반드시 먼저 상하의 분수를 변별한 뒤라야 백성의 뜻이 정(定)해지고 예의(禮義)를 둘 바가 있는데, 이제 공(公), 경(卿), 대부(大夫)들이 부귀에 익숙하여 큰 집[大第]을 다투어 지으면서 심상(尋常)1356)하게 여겨 한도(限度)가 없고, 재력(財力)을 다하여야 그칩니다.
주분(朱粉)을 휘황(輝煌)1357)하게하고, 교려(巧麗)하게 새기고 깎아 장식한 것이 거의 궁궐(宮闕)보다 더 지나치되, 스스로 참월한 것이 그르다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는데, 더구나 장사하는 무리와 노예(奴隷)의 미천한 신분으로도 한 번 돈과 재물[錢財]이 있으면 또한 분수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집과 사택을 다투어 일으키어, 번화(繁華)한 것만을 힘써 숭상하니, 칸 수(間數)의 많음과 화려하게 꾸민 것이 또 경대부(卿大夫)보다 뛰어납니다.
이에 서인(庶人)의 집이 조정의 신하의 집을 능가하고, 조신(朝臣)의 집이 궁궐과 같이 사치스럽고 크기가 절조가 없으며, 염폐(廉陛)1358)가 엄격하지 못하다하여 참람된 풍습을 점점 자라게 할 수는 없으니 작은 연고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치도(治道)에 예의(銳意)하사, 사냥을 물리치고 쓸데없는 비용을 덜어 절검(節儉)하는 것으로 정치를 하며 힘쓰셨는데도, 풍속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신등은 통심(痛心)합니다.
대저 치체(治體)1359)는 시속(時俗)에서 숭상하는 것을 바르게 하는데 있습니다. 시속에서 숭상하는 것이 사치하고 참람되면서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집이 사치하고 큰 것은 마음과 뜻이 사치하고 큼이며, 집이 높고 큰 것은 심지(心志)가 높고 큰 것입니다. 공양(恭讓)과 충정(忠貞)으로써 그 몸을 윤택하게 하지 아니하고, 사태(奢泰)와 고대(高大)함으로써 그 집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신(人臣)의 도리(道里)가 아닙니다.
더구나 재목(材木)이 산림(山林)에 있는 것은 세월(歲月)로써 이룰 수가 없으며 풍속의 사치스럽고 큰 것은 한도가 없으니, 이루기 어려운 재목으로써 무한한 용도(用度)에 응하는 것도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옛날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는 일찍이 풍속이 사치하고 참람된 것을 미워하시고, 간각(間閣)의 제도(制度)를 세우시니, 대군(大君)은 60간(間), 공주(公主), 왕자(王子)는 50간, 종친(宗親), 문무관(文武官) 2품이상은 40간, 3품 이하는 30간, 서인(庶人)은 10간(間)으로써 억지로 제도를 정하여, 그 분수를 넘고 제도에 지나친 집은 아울러 철거하게 하였습니다.
신등은 이 법을 신명(申明)1360)하시어 영구히 불간(不刊)1361)하는 법전(法典)을 삼고, 감히 이것을 지키지 않는 자는 율(律)에 의하여 논단(論斷)하여 지은 집을 철거(撤去)하며, 이미 전에 지은 것도 아울러 모두 철거하여서
사치하고 참람된 풍습을 막기를 청합니다.
1. 양계(兩界)는 국가의 울타리[藩籬]이며 도적의 문호(門戶)입니다.
조종(祖宗) 이래로 항상 거주하는 백성이 조밀하지 못하고 군액(軍額)이 더욱 적어질까 염려하여, 남쪽의 백성을 많이 옮기어서 채웠으나, 그러나 영안도(永安道)는 땅이 야인(野人)에 연접되고 길이 또 길고 막히어, 갑자기 완급(緩急)한 일이 있으면 남쪽의 군사가 응원하기가 쉽지못하니, 요(要)는 마땅히 먼저 토병(土兵)으로 채워서 북쪽 문을 굳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평안도(平安道)같은데에 이르러서는 영안도(永安道)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사명(使命)의 내왕(來往)에 호송(護送)하는 것의 초선(抄選)과 기재(騎載)를 내며 공돈(供頓)하는 비용이 다른 도의 10배(倍)나 되니, 백성은 애오라지 살 수가 없어 인연(人煙)이 드물며, 종일토록 가도 혹 인가(人家)를 보지 못하매, 족히 한심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국가를 위하는 큰 계획은 마땅히 먼저 백성의 힘을 너그럽게 하고 군정(軍丁)을 충족하여서, 다른 날 만일(萬一)의 방비를 굳게 할 것인데, 재상(宰相)의 집은 그 장실(壯實)한 자를 가려서 반당(伴倘)을 삼아 그 수효는 거의 이졸(吏卒)보다 지나치니, 군현(郡縣)은 날로 축나고 군액(軍額)은 날로 감(減)하여 작은 연고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조정(朝廷)에서는 보기를 심상(尋常)하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고을에는 보이는 이졸이 없고 군(軍)에는 장실한 군정이 없으니, 수효가 있는 백성으로 무궁한 역사(役使)를 이바지하려면 또 어느 겨를에 갈고 심어서 우러러 섬기고 구부려 기르는 바탕을 삼겠습니까?
이것은 마땅히 사민(徙民)하여 그 빈 곳을 채워야 하는데도 도리어 겨우 있는 백성으로 재상의 집에 취역(就役)하게 하여 방어(防禦)하는 군졸을 손삭(損削)하니, 나라의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신등은 양계(兩界)의 거민(居民)은 반당(伴倘)1362)을 허락하지 말고, 그 이전에 차정(差定)한 자도 또한 마땅히 추탈(追奪)하여, 군액(軍額)을 채워서 주군(州郡)을 충실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1. 환자(宦者)가 권세를 쓰는 것이 국가에 근심이 됨은 그 내력이 오래되었습니다.
성주(成周)를 상고하건대 혼인(閽人)은 중문(中門)의 금(禁)함을 지키고, 시인(寺人)은 여궁(女宮)의 경계[戒]를 관장하되, 그 임무는 내외(內外)를 소제(掃除)하고 언어(言語)를 출납(出納)하는데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총재(冢宰)로써 거느리게 하여, 그 사사로운 뜻을 일압(昵狎)하고, 도리가 아닌 간섭을 막았습니다.
한(漢)나라 초기에도 오히려 옛 뜻이 있어, 재상(宰相)으로 궁중을 감독하게 하니, 문제(文帝)때에 이르러서는 환관(宦官)도 오히려 재상을 알기를 두렵게 여기었습니다. 등통(鄧通)이 총행(寵幸)으로 조금 태만함이 있으므로, 승상가(丞相嘉)1363)가 격소(檄召)1364)로써 책망하기를, ‘소신(小臣)이 임금을 만홀히 여겨 불경(不敬)함은 참형하여 마땅하다.’고 하니, 임금이 사자를 시켜 절부(節符)를 갖게 하여 등통(鄧通)을 불러 승상에게 사죄하게 하고서야 벌을 면했습니다. 이것은 한(漢)나라, 주(周)나라의 성한 때에는 근습(近習)의 폐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동한(東漢)때에 비로소 중상시(中常侍)1365)인 조절(曹節), 왕보(王甫)로 정사에 참여하게 하니, 국병(國柄)을 도둑질하여 농락하고 해내(海內)를 탁란(濁亂)시켰습니다.
당태종(唐太宗)은 전세(前世)의 폐단을 거울삼아, 내시성(內侍省)을 3품관(三品官)으로 세우지못하게 조칙하여, 단지 수문(守門), 전명(傳命)만 하도록 하였을 따름이더니, 숙(肅), 대(代)1366) 이 후로 다시 옛 제도가 없어지고,
어조은(魚朝恩)에게 명하여 신책병(神策兵)을 관장하게 하고, 토돌승최(吐突承璀)에게 명하여 초토사(招討使)로 삼으니, 이로부터 정원진(程元振), 왕수징(王守澄), 구사량(仇士良), 양부공(楊復恭), 한전회(韓全誨)가 서로 계승하여 용사(用事)1367)하매, 형세가 더욱 교횡(驕橫)하여, 스스로 ‘정책국로(定策國老)’라 일컫고, 천자(天子)를 지목하여 문생(門生)이라 하였습니다.
손으로는 왕작(王爵)을 잡고 입으로는 천헌(天憲)1368)을 머금어, 성사(城社)1369)를 의빙하여 형상(刑賞)을 도둑질하며 농락하매, 혹은 어진이를 상(傷)하게 하고 유능한 이를 해(害)롭게 하며, 혹은 난(亂)을 선동하고 화(禍)를 이루니, 그 폐단은 명황(明皇)에서 시작하여, 숙(肅), 대(代)에 성하고, 덕종(德宗)에 전성하여, 소종(昭宗)에 극진하였습니다.
주전충(朱全忠)은 소종(昭宗)에게 청하여, 병사를 일으켜 죽이기를 전후로 아울러 162인이나 하였으니 어찌 그것이 참혹하지 않겠습니까?
분변할 것을 일찍이 분변하지 못한 연유입니다.
저들이 비록 스스로 구한 재화라 하더라도 또한 인주(人主)가 어거하여서 그 도(道)를 잃은 것이니, 그러한 자의 소이(所以)는 말미암음이 있어 그런 것입니다. 대개 환자(宦者)는 무리가 모두 견식이나 성품이 영리하고, 말솜씨가 유창하여 밝혀주고, 안색(顔色)을 잘 살피고 엿보아 지취(志趣)를 받들고 비위를 낮추어 명을 받으면 어기고 거슬리는 근심이 없고, 일을 시키면 뜻에 맞고 만족스럽게 하는 능함이 있어, 그 편벽(便僻)되고 측미(側媚)1370)하는데 익숙하여 쉽게 인군의 덕을 옮기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말은 쉽게 인군의 청정(聽政)을 고혹하게 하니, 상지(上智)의 군주(君主)가 스스로 물정(物情)을 밝게 알아 심원(深遠)한 것을 염려하고 근심하지 않으면, 누구인들 술수 속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이러므로 감언(甘言)과 비사(卑辭)가 때를 따라 따름이 있고, 침윤(浸潤)1371)하고 부수(膚受)1372)함은 때를 따라 청납(聽納)함이 있는 것이 순료(醇醪)137 3)를 마시면서 그 취(醉)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같아서 출척(黜陟)하고 형상하는 권병이 점점 옮기어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아, 환시(宦寺)는 조석(朝夕)으로 함께 거처하고, 군신(群臣)의 진퇴(進退)는 때가 있으니, 어둡고 어두운 속에서 몰래 사라지고 슬그머니 뺏는 것을 소소(昭昭)한 즈음에 분명하게 따지고 드러나게 간하여 보았자 이것도 말단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조종의 태조(太祖), 태종(太宗)께서는 집안을 교화(敎化)하여 나라를 세우고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되, 환시를 봉군(封君)하였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다시 국보(國步)1374)를 맑게 하시고, 전균(田畇)을 봉군(封君)하기로 시도하셨으나 언관(言官)이 집요하게 옳지 못하다하니, 얼마 있다가 파(罷)하시고 말년(末年)에야 도로 봉군하였으니, 이것은 특별히 일시(一時)의 은혜[恩]이지 만세(萬世)의 법(法)은 아닙니다.
이 뒤로부터 인순(因循)하여 예(例)를 이루어, 봉군(封君)한 것이 하나가 아니고 당상(堂上)도 또한 많습니다만, 예전을 상고하고 지금을 증험하건대 폐단을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대군(大君)은 명(命)1375)이 있어, 나라를 세우고 집을 계승하였으니, 여기에 소인(小人)은 쓰지말라’고 하였는데, 정자(程子)는 이를 해석하기를, ‘사려(師旅)를 일으켜 성공(成功)함은 일도(一道)가 아니니, 모두 군자(君子)로 기필할 것이 아니다.
소인(小人)은 평상시에 쉽게 교만하고 뽐내는데,
더구나 그 공(功)을 믿고 뽐내는 것이겠는가?’ 하였습니다.
대군(大君)은 은상(恩賞)하는 권한[柄]을 가지고서 군려(軍旅)의 공(功)을 결정하되 소인(小人)을 공이 있다하여 임용할 수가 없으니, 임용한다면 반드시 나라를 어지럽게 할 것입니다.
소인이 공을 믿고서 나라를 어지럽힌 자는 옛적에도 있었으니, 금백(金帛)으로 상(賞)줌이 옳을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수계(垂戒)1376)한 뜻이 깊고도 원대하오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역대(歷代)의 폐단을 거울로 삼으시고, 본조(本朝)의 고사(故事)를 참작하여, 그 양단(兩端)을 잡으시고 그 중도(中道)를 쓰시어, 한결같이 환시(宦寺)를 봉군(封君)하고 당상(堂上)이 되게 하는 것을 아울러 개정(改正)하시면, 조정(朝廷)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1. 3공(三公)의 직임은 예(例)로 제수할 수가 없습니다.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를 세웠으니, 이들이 바로 3공(三公)이요, 도(道)를 논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음양(陰陽)을 조화시켜 다스리는 것이니, 관직은 꼭 갖추지 아니하여도 되며 그 사람만 있으면 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소사(小師), 소부(小傅), 소보(小保)는 3고(三孤)라 하니, 3공의 다음 관직으로 교화를 크게 하여 공손하게 생각하고 천지(天地)를 공경하여 나 한 사람을 돕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공(公)은 도(道)를 논하고, 고(孤)는 교화를 크게 함이니, 공(公)은 음양을 조화시켜 다스리고, 고(孤)는 천지를 공경하고 생각함이며, 공은 앞에서 논하고 고는 뒤에서 보필하니, 공과 고의 직임은 그 중함이 이와 같습니다. 성왕(成王)은 주공(周公), 소공(召公)을 사(師), 보(保)로 삼고 태부(太傅)는 궐(闕)하였습니다.
주공(周公)이 죽으니 소공(召公)은 그대로 보(保)1377)로 삼았으되, 사(師),부(傅)는 모두 궐하였으니 3공과 3고는 모두 적당한 사람이 없으면 궐하였을 뿐입니다. 당시의 인재를 상고하건대 주공(周公), 소공(召公) 이외에도 태공(太公)1378), 필공(畢公), 영공(榮公), 태전(泰顚), 굉요(閎夭), 산의생(散宜生), 남궁괄(南宮括)의 무리가 모두 순일(純一)한 덕(德)을 갖춘 신하이었습니다. 그 십란(十亂)1379)의 반열(班列)에 참여하였는데, 어찌 사(師), 부(傅)의 직임에 부족하다하여서 주공이 죽으매 차라리 그 사, 부를 궐할지언정 보직하지 않았으니, 어찌 3공은 비상(非常)한 덕(德)을 기다려 정중(鄭重)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3공의 지위는 백책(百責)1380)이 모이는 곳이니, 울려서 흔들리고 치고 두드리는 것은 진정(鎭定)하려 하고, 쓰고 달고 바싹 마르고 축축히 젖은 그것을 조제(調劑)하려 하며, 서리어 어긋나고 어지럽게 맺은 것은 그것을 풀려 하고, 어둡고 더러운 것은 그것을 헤아려 들이려 하였으니, 반드시 이윤(伊尹)이 탕왕(湯王)을 도운 것같이 한 뒤에야 아형(阿衡)이라 이를 만하며, 주공(周公)이 주(周)나라를 도운 것같이 한 뒤에야 태재(太宰)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렇지않다면 혁혁(赫赫)한 사윤(師尹)을 백성이 모두 쳐다볼 뿐이며, 솥의 발이 부러져 공속(公餗)을 엎은 것과 같아서 그 형상만을 번지르르하게 할 뿐이니, 경솔하게 제수하고 예천(例遷)하심이 옳겠습니까?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선건전곤(旋乾轉坤)1381)하시어 공(功)은 창조하고 지킴은 겸하여, 3공이 아니면 대공(大功)을 보답할 수 없다하여, 우선 권전(權典)을 좇고, 3공의 직위는 궐(闕)하는 즉시 예천(例遷)하게 함은 영세(永世)의 법이 아니었습니다.
이로부터 인연이 되어 그대로 예수(例授)하니, 일찍이 3공을 거친 이가 열이 넘은 것이 오래입니다. 과연 예수(例授)하여 마지아니하고 무궁(無窮)토록 함이 옳겠습니까? 신등은 청컨대 다시는 예수(例授)하지 말아서 3공의 지위를 높이시면 조정(朝廷)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1. 각사(各司)의 관리(官吏)가 녹을 받음에 반드시 중기(重記)1382)에 올려 상고하는 것은, 신등은 그윽이 선비를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염유(冉有)가 공자(孔子)에게 묻기를, ‘선왕(先王)이 법을 제정함에 형벌은 대부(大夫)에게까지 올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대부는 죄(罪)를 범하여도 형벌을 가(加)할 수가 없습니까?’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무릇 다스리는 군자는 예(禮)로써 그 마음을 어거하여야 하니, 염치(廉恥)의 절도[節]로써 붙이게 하여야 한다. 그런 까닭에 예전의 대부(大夫)는 그가 청렴하지 못하고 더러운데에 연좌됨이 있는 자는 불렴오예(不廉汚穢)라 이르지 않고 부궤불식(簠簋不飾)1383)이라 말하였고, 음란(淫亂)하고 분별이 없는데에 연좌된 자는 음란무별(淫亂無別)이라 이르지않고 유박불수(帷簙不脩)1384)라 말하였으며, 무력하여 임무를 이겨내지 못하는 데에 연좌된 자는 파연불승임(罷軟不勝任)이라 이르지않고 하관불직(下官不職)1385)이라 말한 것은 부끄럽게 여기는 소이(所以)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제《경국대전(經國大典)》에 해유(解由)의 법(法)이 있는 것은 휴흠(虧欠)을 상고하여 수수(授受)를 밝게 하는 소이이니, 진실로 부득이한 법입니다. 그러나 녹을 받는 날에 반드시 먼저 해유(解由)를 상고하여야만 급록(給祿)하는 까닭으로 해유(解由)가 나오지않는 자는 비록 해를 마치도록 근고(勤苦)하였더라도 두곡(斗斛)의 녹(祿)을 받지못합니다.
그 입법(立法)한 것이 이미 상밀(詳密)한데도 호조(戶曹)에서 아울러 중기(重記)를 고상(考上)하는 법을 세웠으니, 대저 녹(祿)이란 유공(有功)함을 갚는 것이며, 관직(官職)이 있는 자는 녹을 먹지않을 수 없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말하되 ‘먹을 것을 주지않겠으니, 그 마음을 면려(勉勵)하라.’고 한다면, 진실로 사람을 대접하는 유(類)가 아니니, 그것이 어찌 현사(賢士), 대부(大夫)를 대우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사습(士習)의 염오(廉汚)와 풍속(風俗)의 미악(美惡)은 반드시 위에서 인도(人道)하는 여하(如何)에 있고,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에 관계되니, 그것은 진실로 일시(一時)의 편리(便利)함을 취하여서 국가 만세(萬世)의 대계(大計)를 잊을 수 없음도 또한 명백합니다.
예전의 대신(大臣)은 그 죄가 있다고 정하여도 오히려 감히 물리치지 못하고, 정한 대로 호응하여서 그 마음을 부끄럽게 여겨 가만히 염치의 절도(節度)를 함양한 까닭으로 아랫사람도 또한 절행(節行)으로 위에 보답하지않음이 없었습니다.
이제 성상(聖上)께서 용비(龍飛)하는 처음을 당하여 진실로 마땅히 염치로써 아래를 대우하셨는데, 유사(有司)에서 염려하고 방지하는데에 지나쳐 항상 주는 녹을 주지 않는 것으로 여기니, 저는 반드시 옹손(饔飱)1386)의 염려가 있으나 족히 그 직사(職事)를 면강하게 하고 두곡(斗斛)의 곡식으로 사대부(士大夫)를 조종(操縱)하고 권징(勸懲)하는 방법으로 삼는데 이른 것은 옛날의 염치로써 선비를 대접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대저 해유(解由)의 법(法)은 진실로 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해유(解由)가 없으면 직위를 제수하지 않음은 옳지만, 직위를 제수하고서 녹(祿)을 주지않는 것은 옳지못합니다. 중기(重記)하는 법(法)과 같은 것은 모름지기 기한(期限)을 미리 정하고, 기한 안에 필수(畢修)하지 못하면 죄줌이 옳고 내침이 옳으나, 무슨 마음으로 먼저 이기(利器)를 삼게하여 선비를 대접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모든 이와 같은 일들은 일체 파하여 버리시고, 마땅히 예의(禮義)로 아랫사람을 우대하여 염치(廉恥)의 풍속(風俗)을 배양(培養)하게 하소서.
1. 난신적자(亂臣賊子)는 천지(天地)에 용납되지못하는 것으로 사람마다 얻어서 이를 죽여야 하니, 비록 구족(九族)을 다 죽인다하더라도 인신(人臣)의 분원[憤]을 흔쾌히 하기에 족하지 못하며, 대개 천하고금으로 동일하게 미워하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국가에 연고가 많아, 음모하고 반역(反逆)하는 무리가 옛보다 더욱 많으니, 무릇 조정(朝廷)에 있는 신하는 분한(憤恨)을 머금고 이를갈지 않음이 없고, 적족(赤族)1387)의 형벌[刑]이 있기를 헤아렸는데도, 세조(世祖), 예종(睿宗)께서 광대(廣大)하게 포함(包涵)하여, 그 형벌이 본인에게 그치셨습니다. 조손형제(祖孫兄弟)도 또한 죽임을 용서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천지가 생육(生育)하는 지극한 어짐이며, 그 연좌(緣坐)되어 배역(配役)한 데에 있는 사람도 또한 죽이지 않음을 다행하게 여겨 먹고 숨쉬기를 천지 사이에서 얻은 이가 이미 많습니다.
다시 전하의 지극한 덕을 입고 또한 많이 방면(放免)되었으니, 이는 그 처음에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하게 생각하였는데, 또 어찌 감히 방면할 것을 마음먹었겠습니까? 이제 중외(中外)의 관리가 잇달아 자주 모두가 연좌(緣坐)된 사람이니, 신등은 이것이 모두 상의(上意)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이것은 전조(銓曹)1388)의 허물입니다.
비록 천의(天意)가 이 사람에게 관작을 더하려 하더라도 인신(人臣)은 마땅히 법으로 아뢰어 논박하는데, 하물며 천의(天意)에서 나온 것이 아닌데도 반드시 써야만 옳겠습니까?
신등은 일찍이 난적(亂賊)의 요얼(妖孼)이 다시 세상에 서용되어 전하(殿下)의 청명(淸明)한 다스림을 더럽힌 것을 분하게 여겨 감히 함묵(含默)하지못하고 한두 번 상달(上達)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에 곧 전교하기를, ‘난신(亂臣)에 연좌(緣坐)되었어도 대성(臺省)1389)과 정조(政曹)1390)외에는 모두 서용하기를 허락한다’하셨는데, 대성과 정조외에도 또한 허다한 청반(淸班)과 현질(顯秩)이 있으니, 낭관과 수령같은 것을 비교하면 이 교시가 있음은 사사로이 간절하게 통분(痛憤)하지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일국(一國)이 넓고 인사(人士)가 많아 등용할 사람이 없지않으며, 관(官)은 허위(虛位)1391)가 아닌데, 반드시 난적(亂賊)의 족속을 서용하여 조정의 부끄러움을 삼아야 하겠습니까?
신등은 그윽이 두려워하건대 이 사람을 한 번 쓰면 국법(國法)이 마침내 무너지고 조정(朝廷)이 마침내 경(輕)하게 되어, 그 폐단은 장차 나라가 그 나라가 아닌 데에 이를 것이니,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닌 줄로 여겨집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다시 삼사(三思)하고 유념하시어 연좌된 사람을 가볍게 쓰지말고, 이전에 제수한 것도 한결같이 모두 개정(改正)하시어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삼으시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1. 관(官)을 설치하여 직분을 나눈 것은 백성을 위하는 소이(所以)인데도 임용하는데에 혹 실인(失人)1392)하여 마침내 백성을 병들게 함에 이르니, 중외(中外)의 관원이 모두 그러하되 수령(守令)이 더욱 심합니다.
옛날에 한(漢)나라에서 사람을 쓰는데는, 반드시 먼저 임민(臨民)1393)하는 직임을 시험하였습니다.
선제(宣帝)가 일찍이 말하기를, ‘나와 더불어 한 가지로 다스릴 자는 그 어진 2천석(二千石)1394)이다’하였으니, 2천석(二千石)이라 이른 것은 군국(郡國)의 이질(吏秩)이 2천석(石)에 맞는 까닭이었습니다.
이 때를 당하여, 주읍(朱邑)은 북해(北海)로부터 들어와서 대사농(大司農)이 되었고, 공수(龔遂)는 발해(渤海)로부터 들어와서 수형도위(水衡都尉)가 되었으며, 윤옹귀(尹翁歸)는 동해(東海)로부터 들어와서 우부풍(右扶風)이 되었고, 한연수(韓延壽)는 동군(東郡)으로부터 들어와 좌풍익(左馮翊)이 되었으며,
황패(黃覇)는 영천(穎川)으로부터 징소되어 경조윤(京兆尹)이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군국(郡國)에 순량(循良)한 관리가 많았고, 후세에 양리(良吏)를 말하는 자는 한(漢)나라를 일컬어 으뜸을 삼으니, 진실로 포상(褒賞)의 법을 행함은 수령(守令)의 마음을 격려하는데 있을 뿐입니다.
오직 한(漢)나라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고, 우리 조정의 열성(列聖)께서도 서로 이어서 상벌(賞罰)의 권병(權柄)을 밝게 하고, 출척(黜陟)하는 법(法)을 엄격히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는 일찍이 수령을 우대(優待)하여 그 고만(考滿)1395)으로 천전(遷轉)할 때에는 반드시 우직(右職)을 제수하여 총이(寵異)하셨습니다.
32년의 태평(太平)한 다스림을 두었으니, 그 외리(外吏)를 가볍게 대우함이 옳지 못한 것이 명백합니다.
신등은 삼가 새로 정한《대전(大典)》을 상고하건대 문관(文官) 4품이상으로 수령을 거치지않으면 자급을 올릴 수 없게 한 것은, 수령의 직임을 중하게 하여 외방(外方)을 경시(輕視)하는 폐단을 구(救)하는 소이였습니다.
그런데도 포상(褒賞)하는 법[典]이 행해지지못하고 격려(激勵)하는 방책을 세우지못하고서, 수령의 직임을 다하도록 책(責)하려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제 내리(內吏)를 보건대 전옥(典獄)의 관리는 죄수를 주관하는데에 지나지 않고, 전생(典牲)의 관리는 희생을 관장하는데에 불과하며, 기타 백사(百司)의 관리도 또한 각각 관장하는 것이 있으니, 당초에 호양(浩穰)139 6)하고 번극(繁劇)한 업무가 없는데도 사만(仕滿)1397) 9백이면 으레 전반(前班)에 승급되나, 수령(守令)은 홀로 구중(九重)과 근심을 나누며, 직책은 백성과 가장 가까이하는데도 사만(仕滿) 1천8백이면 같이 산직(散職)에 제수됩니다. 혹 파직(罷職)되는 자에게 만일에 이르기를, ‘너는 이미 6년을 앉아서 처자식을 봉양하였기에 이제 한산(閑散)1398)에 두니, 마땅히 불가함이 없을 것이다’하고, 당초에 지난 때의 근심을 나눈 수고로움을 논하지않는다면, 그 어찌 수령의 마음을 권려하는 것이겠으며, 수령이 직사를 다하지 않은데 고혹하여 우리 백성이 병폐를 받음이 없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세종께서 남기신 뜻을 추숭하고, 한씨(漢氏)의 고사(故事)를 절충하시어, 그 수령의 대우를 내리(內吏)보다 낫게 하시고, 그 사만(仕滿)으로 천전(遷轉)을 하며, 그 등제(等第)를 상고하여 십고십상(十考十上)1399)인 자는 특별히 우직(右職)으로 제수하고, 기타 개만(箇滿)1400)한 자도 또한 마땅히 우대하여 천직하시며, 만일 백성을 사랑하고 염개(廉介)1401)하여 드러나게 성적(聲績)이 있는 자는 차례를 밟지 않고 탁용(擢用)하면, 거의 사람마다 모두 스스로 분발하고 수령(守令)도 모두 순량(循良)할 것입니다.
1. 무격(巫覡)1402)이 행세(行世)하여 온 지는 그것이 오래되었으니, 진실로 하룻만에 다 제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 중려(重黎)는 지천(地天)의 통함을 끊고, 상인(商人)1403)은 감가(酣歌)1404)의 춤을 경계하였습니다.
대개 성왕(聖王)의 세상은 천하(天下)가 편안하며, 치법(治法)이 날로 밝으니, 저들의 구구(區區)한 술책은 물리칠 필요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끊고 경계하여 조금도 용납하지 않은 것은 또한 그것이 나의 다스림을 해(害)하며 나의 덕화를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였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항상 이를 근심하여, 몰아서 성밖에 다 내쫓아 요망(妖妄)한 풍속을 단절함으로써 방자하게 행할 수없게 하였는데도, 세월을 따라 금하는 기강이 조금 누그러지니 무녀(巫女)가 다시 경성(京城)의 편호(編戶)사이에 잡거(雜居)하게 되어, 감히 사족(士族)의 집을 유인하면서 따로 신당(神堂)을 세워서 조부(祖父)의 신(神)이라 일컬으며, 귀신(鬼神)을 첨독(諂瀆)하여 마침내 풍속을 이루었으며, 심한 자는 노복(奴僕)을 주어서 역사(役使)를 충당하고, 사족(士族)의 부녀(婦女)에 이르러서는 조금만 질병(疾病)이 있어도 피방(避方)한다고 일컬어, 자칫하면 세월(歲月)을 지내면서 부도(婦道)를 휴손(虧損)하니,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병든 사람을 불러모아서 역려(疫癘)1405)가 여리(閭里)에 뻗쳐 번지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소애(少艾)1406)를 불러 모으고는 ‘현수(絃首)’라 이름하고, 주육(酒肉)이 모이는 장소가 되어 가무(歌舞)의 풍악을 자행하고, 여염(閭閻)을 떠들썩하게 하여 음란함을 가르치는 것을 일삼는 것이겠습니까? 또 영혼이 보인다고 공창(空唱)하여 놀래어 듣는 이가 있으니, 그 요망하고 허탄함이 또 심합니다.
특히 이 뿐만 아닙니다. 남자가 화랑(花郞)이라 호칭(號稱)하고, 그 무사(誣詐)하는 방법을 쓰면서 사람의 재화(財貨)를 낚아 취함이 거의 여무(女巫)와 같되, 꾀하는 방법이 더욱 허깨비 같으며, 기타 이치에 어긋나서 도리를 저버리고 사녀(士女)를 우롱(愚弄)한다든가 사람으로 하여금 사혹(邪惑)하게 하여 예속(禮俗)을 패훼(敗毁)하는 자가 또 하나 둘로 헤아릴수 없습니다.
신등은 듣건대 빙탄(氷炭)은 그릇을 같이 못하고 훈유(薰蕕)는 방을 같이 못한다고 하니, 지극한 이치에 이르고자 하면 마땅히 좌도(左道)를 내쳐야 할 것입니다. 이제 전하(殿下)께서는 소의간식(宵衣旰食)1407)하시고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시며, 대중(大中)의 도(道)를 회홍(恢弘)하시어, 일국(一國)의 사람이 바야흐로 눈을 닦고 청명(淸明)한 정치를 바라는데, 요망(妖妄)한 무리를 경성(京城)에 잡거(雜居)하게 하여 수선(首善)1408)의 땅을 더럽힐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등은 엎드려 원하건대 세종조(世宗朝)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무릇 무격(巫覡)이 있는 곳이 보이면 다 성밖으로 몰아내어 음란한 말을 쫓고 방사한 말을 그치게 하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1. 골육(骨肉)의 은혜는 천성(天性)이니, 마땅히 높이고 마땅히 내리지 말아야 하며, 마땅히 후(厚)하게 하고 마땅히 박(薄)하게 하지말아야할 것입니다. 예전에 주공(周公)이 관숙(管叔)으로 하여금 은(殷)나라를 감독하게 하였으나 마침내 보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이가 맹자(孟子)에게 묻기를, ‘알고서 시켰으면 이것은 어질지 못함이며, 알지못하고서 시켰으면 이것은 지혜롭지 못함이니, 인(仁)과 지(智)는 주공도 다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맹자(孟子)가 대답하기를, ‘주공은 아우이며, 관숙은 형(兄)이니, 주공의 과실도 또한 마땅하지 않느냐?’하였고,
공자(孔子)는 구경(九經)을 논(論)하기를, ‘그 위(位)를 높이고 그 녹(祿)을 중히 여기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함께 하는 것은 친한 이를 친하게 권하는 것이며, 관직의 권위를 크게 하고 착실하게 맡겨두는 것은 대신(大臣)을 권려(勸勵)하는 것이다’하였습니다.
친한 이를 친하게 하는데는 단지 지위를 높이고 녹봉을 중하게 하는 것만 말하였으나, 관직의 권위를 성하게 하고 착실하게 맡기는 데는 반드시 대신을 존경하는 일을 말하였습니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찬수하여 만세(萬世)의 법을 삼았으나 ‘제후(齊侯)가 그의 아우 연(年)으로 하여금 와서 방문하게 하였다’하였으니, 공자(公子)로 일컫지아니하고 아우[弟]라 일컬음은 그 총애하는 사사로움을 기롱한 것이며,〈은공(隱公)이 허락하지않은 것을 공자휘(公子翬)가 간청하여 한 것이므로〉‘휘(翬)가 군사를 거느려 송공(宋公)한테로 응원하였다’하고
공자(公子)라는 것을 제거함은 이상지계(履霜之戒)1409)를 삼가한 것입니다. 대개 일로써 맡기면 반드시 득실이 있고, 잃음이 극진하면 책임이 반드시 따르게 되니, 은혜가 여기서 상(傷)하는 것이므로 성인(聖人)의 뜻이 작고도 또 원대합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태조(太祖), 태종(太宗)께서는 상경(常經)을 세우시고 인기(人紀)를 베푸시되, 전선(銓選)하는 조목에 바로 이르기를, ‘종친(宗親)은 일을 맡기지 말라’하여, 친한 이를 친하게 하는 도리를 다하셨은즉, 조종(祖宗)의 뜻도 또한 알 만합니다.
성인(聖人)의 가르침이 이미 저와 같고, 조종(祖宗)의 법도 또 이와 같거늘, 간간이 우애(友愛)의 돈독함으로 말미암아 혹 병권을 전장(典掌)하게 하고 혹은 부시(赴試)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상법(常法)이 될 수 없으며, 상경(常經)이 될 수없는 것인데, 그것이 만세(萬世)의 법이 되겠습니까?
법을 세우고 후세에 전하는 교훈은 계승할 만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공자(孔子)의 가르침과 선왕(先王)의 법과 같이 하여, 그 위(位)를 높이고 그 녹(祿)을 중히 여기며, 좋고 싫어하는 것을 함께 하고, 다시는 일로써 맡기지 마시어 친한 이를 친하게 하는 도리를 돈독히 하시면 이륜(彝倫)에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1.《경국대전(經國大典)》안에, 문무관(文武官) 2품이상의 양첩자손(良妾子孫)은 정3품에 한정하고, 천첩자손(賤妾子孫)은 정5품에 한정하며, 6품 이상의 양첩 자손은 정4품에 한정하고, 천첩자손은 정6품에 한정하며, 7품 이하로부터 무직인(無職人)까지의 양첩 자손은 정5품에 한정하고, 천첩 자손과 천인(賤人)으로 양인(良人)이 된 자는 정7품에 한정한다고 하였으나, 그 주(註)에 이르기를, ‘2품 이상의 첩자(妾子)는 사역원(司譯院), 관상감(觀象監), 전의감(典醫監), 내수사(內需司), 혜민서(惠民署), 도화서(圖畵署), 산학(算學), 율학(律學)에 재주를 따라서 서용(敍用)한다’하였으니, 이것은 그 직위에 진실로 한품(限品)1410)이 있고, 또한 잡무(雜務)에만 서용(敍用)함이니,
그 귀천(貴賤)의 분별을 명백히 하고, 적서(嫡庶)의 분수를 엄하게 한 것의 지극함이온데, 근자에 강주(姜籌)의 첩자(妾子) 강대생(姜帶生)을 풍저창주부(豊儲倉主簿)로 삼고, 조득림(趙得琳)의 첩자(妾子) 조성(趙成)을 선전관(宣傳官)으로 삼았으며, 그리고 이백상(李伯常)의 첩자 이인석(李引錫) 형제(兄弟)도 또한 모두 허통(許通)1411)하셨습니다.
대저 풍저창주부는 동반(東班)의 현질(顯秩)이며, 선전관(宣傳官)은 근시(近侍)의 직임이며 또한 일국의 청선(淸選)인데, 반드시 첩자를 제수하였으니 신등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강대생은 무슨 공능(功能)이 있으며, 조성도 또한 무슨 현명(賢明)함이 있기에 반드시 부득이하여 임용하시옵니까?
비록 2인으로 하여금 과연 공(功)과 또 어짐이 있더라도 국법(國法)을 훼손할 수는 없으며, 조정(朝廷)을 욕되게 할 수 없거든, 하물며 뛰어나게 기록할 만한 일도 있지 않은데 국법을 훼손하면서까지 현질(顯秩)에 서용(敍用)하였으니, 신등은 통심(痛心)합니다.
대저 법을 세우는 것은 만세(萬世)에 드리워 보이는 것이며, 조정은 이 풍화의 근원인데,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처음에 먼저 첩의 자식을 서용하여, 풍화의 근원을 더럽히고 만세(萬世)의 법을 훼손하셨으니, 이 법이 한번 무너져서 다른 날에 조성, 강대생과 같이 등용하기를 구하려는 자가 있으면, 전하께서는 장차 무엇으로써 대우하시겠습니까?
대저 성인의 법은 장차 1세를 뇌롱(牢籠)1412)하여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분수밖의 소망을 두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대전(大典)》의 한품(限品)1413)의 법도 또한 그 하나의 일이니, 반드시 법밖의 은혜를 베풀어서 한두 명의 수자(竪子)의 환심(懽心)을 거두려 하심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깊이 생각하시어 이 법을 지키기를 금석(金石)과 같이 굳게하시고, 이 영(令)을 행하기를 4시(四時)와 같이 미덥게 하시어, 빨리 두 사람의 직사(職事)를 파(罷)하시고, 이백상(李伯常)의 아들도 또한 허통(許通)하지말아서 조정(朝廷)을 높이시고 분수가 아닌 소망을 억제하게 하소서.
1. 작(爵)1414)으로 명덕(命德)하고, 관(官)1415)으로 치사(治事)하니, 동자(童子)에게 가(加)함은 불가한 것입니다.
옛일을 상고하건대 고요(皐陶)가 대우(大禹)를 위하여 임관(任官)을 논하기를, ‘모든 관원은 빈 곳이 없으니, 천공(天工)은 벼슬하는 사람이 그것을 대신한다’하였고 주(周)의 성왕(成王)은 치관(治官)을 바로잡기를, ‘명왕(明王)1416)은 정사를 세움에 있어 그 관직을 따르지 아니하고, 그 사람됨을 중히 여기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관직을 설치하고 직분을 나누는 것은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진실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이것은 천직(天職)을 비게 하는 것이므로, 국가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이와 같이 중할 뿐만 아니라 선비가 스스로 지킴도 또한 감히 배우지 않고서는 모진(冒進)1417)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전에 공보문백(公父文伯)이 하대부(下大夫)가 되었더니, 그 어미가 이르기를, ‘노(魯)나라는 쇠(衰)하였다. 동자(童子)로 하여금 관직을 갖추게 한 것은 아직 듣지못하였다’하고, 공자(孔子)가 칠조개(漆雕開)로 하여금 벼슬하게 하였더니, 칠조개가 말하기를, ‘나는 이것을 자신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매, 공자(孔子)가 그들을 모두 어질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사물(事物)의 당연(當然)한 이치(理致)는 반드시 배운 연후라야 밝아지며, 구장(舊章)을 성헌(成憲)한 것도 또한 반드시 익힌 연후라야 알게 되니, 배우지아니하고 익히지 아니하면 그 무엇으로써 일을 의논하여 제정하겠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성왕(聖王)이 사람을 쓰는데는 대현(大賢)에게는 대관(大官)을 제수하고, 소현(小賢)에게는 소관(小官)을 제수하여 각각 그 직분에 맞게 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은 서정(西征)하고 북벌(北伐)하면서부터 당상관(堂上官)이 많았으니, 혹 훈용(勳庸)의 적자(嫡子)는 현우(賢愚)를 불문(不問)하고 당상관에 예수(例授)되매, 이에 조정(朝廷)의 위에는 당상(堂上)이 그 반(半)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 모든 공신(功臣)의 자제(子弟)는 강보(襁褓)를 면하지못하였어도 이미 산관(散官)을 주어, ‘아무랑[某郞]’이라 부르고, 나이 15세가 못되어도 녹관(祿官)을 주어, 어린애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오직 이록(利祿)만을 알고, 다시 예의(禮義)가 있음을 알지 못하며, 그 부형(父兄)은 또 말하기를, ‘어떻게 우리의 자제(子弟)를 이롭게 하랴?’하고, 백단(百端)으로 구하여 경영하니, 관질(官秩)이 이미 조사(朝士)의 위에 월등합니다.
비록 종친(宗親)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성인(成人)이 되기를 기다려야 직위를 제수하는데, 홀로 공신(功臣)의 아들만이 이와 같이 함이 옳겠습니까?
국가에서는 그 폐단을 알고,《경국대전》에 20에 동반(東班)을 제수하는 법을 세웠으니, 거의 바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20이 못되었는데 동반을 준 자와 15가 못되었는데 군직(軍職)을 준 자를 아직 개정하지않았으니, 흠사(欠事)가 아니겠습니까?
신등은 청컨대 한결같이 태거(汰去)하여서 이제부터는 나이 15세가 못되었으면 비록 산관(散官)이라도 또한 주지않는 항법(恒法)을 정하고, 만일 법을 어기고 모수(冒授)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전조(銓曹)를 죄주고 아울러 그 부형(父兄)을 논(論)함으로써 관작(官爵)을 외람(猥濫)되게 하는 폐단을 막기를 바랍니다.
1. 사습(士習)은 아름답지않을 수 없으며, 민속(民俗)은 두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성제(聖帝), 명왕(明王)은 삼강(三綱)을 세우고 사유(四維)1418)를 펴지않는 이가 없었고, 풍속을 보호하기를 원기(元氣)를 보호하듯 하고, 명절(名節)을 중히 하기를 귀신(鬼神)을 중히 여기듯 하였습니다.
《주례(周禮)》의 사씨지관(師氏之官)에 ‘삼덕(三德)으로 국자(國字)를 가르쳤다’하였는데, 첫째는 지극한 덕이라 하였으니 도(道)의 근본이 되고, 둘째는 민첩한 덕이라 하였으니 행실의 근본이 되며, 세째는 효도하는 덕이라 하였으니 역악(逆惡)을 아는 것입니다.
또 삼행(三行)으로써 가르쳤는데 첫째는 효행(孝行)이라 하여 부모(父母)를 친히 하였고, 둘째는 우행(友行)이라 하여 현량(賢良)을 높이었으며, 세째는 순행(順行)이라 하여 사장(師長)을 섬기었으니, 옛적에 선비를 가르친 바는 반드시 먼저 덕행으로써 하였습니다.
또 향삼물(鄕三物)로써 만백성을 가르쳐서 우수한 사람은 빈객으로 천거하였는데,〈향삼물(鄕三物)이란〉1은 육덕(肉德)이니, 지(智), 인(仁), 성(聖), 의(義), 충(忠), 화(和)이요, 2는 육행(六行)이니, 효(孝), 우(友), 목(睦), 인(婣), 임(任), 휼(恤)이며, 3은 육예(六藝)이니,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입니다.
옛날에 사람을 가르치는 소이(所以)도 또한 반드시 먼저 덕행으로써 하였으니, 이러므로 선비는 자기를 위하는 학문[爲己學]을 하여 남이 알아주는 것[人知]을 구하지 않았으며, 백성은 효제(孝悌)로써 마음을 삼고, 순박한 기풍에 애여(藹如)하였습니다.
민자건(閔子騫)같은 이는 계씨(季氏)가 자기를 비(費)1419)의 재(宰)1420)로 삼으려 함을 듣고 이르기를, ‘나를 위해 제발 거절하겠다. 만일 다시 나를 부른다면, 나는 반드시 문상(汶上)1421)에 가있을 것이다’하였고,
동자(董子)1422)는 말하기를, ‘그 의(誼)를 바르게 하고 그 이(利)를 꾀하지 않으며, 그 도(道)를 밝게 하고 그 공(功)을 계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을 돈독히 함이 이와 같으니, 그 아비가 집정(執政)을 맡았으면 정시(庭試)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유(韓維)의 염퇴수도(恬退守道)1423)같은 것은 예부(禮部)에서 제일(第一)로 아뢰었으나, 차례를 넘어 스스로 진술함을 즐겨하지않았으며, 범진(范鎭)같은 이는 급급히 진취(進取)하지 않았으니, 그 조행(操行)이 이와 같은데, 지금의 선비는 과연 어떠합니까?
왕상(王祥)1424)과 같은 이는〈계모가 병이 드니 엄동 때인데도〉옷을 벗고 얼음에 누우매 두 마리 잉어가 스스로 뛰어 나왔고, 효아(孝娥)의 아비가 물에 빠져 애호(哀號)하매, 강(江)에 몸을 던져 시신(屍身)을 안았었으니, 그 효성이 이와 같았습니다.
장공예(張公藝)는 9대[九世]가 모여서 동거(同居)하였으며, 전진(田眞)의 형제는 차마 재산을 나누지못하였으니, 순후한 풍속이 이와 같은데, 지금의 백성은 과연 어떠하옵니까? 9관(九官), 12목(十二牧)이 제제(濟濟)히 서로 겸양함은 우조(虞朝)의 풍교가 성함이고, 선비[士]는 대부(大夫)가 되는 것을 겸양하고 대부는 경(卿)이 되는 것을 겸양함은 주나라 조정[周廷]의 교화가 아름다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백성은 삼대(三代)1425)의 직도(直道)로써 행하는 자들로 강충(降衷)1426)과 병이(秉彝)1427)가 항성(恒性)같이 있는데, 어찌 교화할 수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단지 인군(人君)의 친히 거느리고 교도(敎導)하는 여하에 있을 뿐입니다.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요(堯)순(舜)은 천하를 인(仁)으로써 거느렸는데 백성이 여기에 따랐고, 걸(桀)주(紂)가 천하를 포악한 것으로써 거느렸는데 백성이 여기에 따랐다.’하였고,《맹자(孟子)》에, ‘군자(君子)의 덕(德)은 바람과 같고 소인(小人)의 덕은 풀과 같아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쓰러진다’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묻기를 좋아하고 착한 것을 즐거워하시며. 덕을 귀하게 하고 선비를 높이시며,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시며, 충신(忠臣)과 열부(烈婦)의 묘(墓)를 봉(封)하고, 효자(孝子)와 순손(順孫)을 정려(旌閭)하소서. 또 각도 관찰사에게 하교(下敎)하여, 《소학(小學)》《삼강행실(三綱行實)》을 널리 간행하게 하여, 어른과 어린이가 없이 모두 배우게 하시며, 삼덕(三德)과 삼행(三行), 육덕(六德)과 육행(六行)을 알게 하고, 재물을 다투고 은혜를 상(傷)하는 자에 이르러서도 징계하시며,
치무(馳騖)1428)하여 구차하게 승진(昇進)하려는 자는 파출(罷黜)하고 사치한 것을 믿고 의리를 멸(滅)하는 자는 억제하시며, 참소하고 아첨하며 면전(面前)에서 아첨하는 자는 물리치시어, 사람의 착한 마음을 감발(感發)1429)하게하고 사람의 방일한 뜻을 징창(懲創)1430)하심으로써 민풍(民風)을 바루고 사습(士習)을 바루게 하시며, 교화(敎化)를 먼저 하도록 힘쓰소서.
또 능히 혈구지도(絜矩之道)1431)를 추광(推廣)하여, 백성이 하고자 하는 바는 들어주고, 싫어하는 것은 베풀지 말며, 씀씀이를 절약하고 인민을 사랑하시며,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부세(賦稅)를 박(薄)하게 하며, 우러러서는 족히 부모(父母)를 섬기게 하고, 구부려서는 족히 처자(妻子)를 기르게 하면,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하고 풍속이 전이(轉移)하여, 천지(天地)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萬物)이 제 삶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훈증(薰蒸)1432)이 투철(透徹)하고 융액(融液)이 두루 미치게하여, 모든 복된 물건과 이룰 만한 상서는 다 이루지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1.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하여야 나라가 편안하다’하였고,《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아래를 후하게 하여야 집이 편안하다’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집을 편안히 하며, 그 근본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마땅히 어떻게 할 것입니까? 조조(晁錯)의 말에 있기를, ‘인정(人情)은 수(壽)하려하지 않는 이가 없으므로 삼왕(三王)이 살게하여 상(傷)하지않게 하였고, 인정은 부(富)하려하지 않는 이가 없으므로 삼왕이 후(厚)하게 하여 곤(困)하지 않게 하였으며, 인정은 편안하려하지 않는 이가 없으므로 삼왕이 부우(扶佑)하여 위태롭지않게 하였고, 인정은 일락(佚樂)하려하지않는 이가 없으므로 삼왕이 그 힘을 절제하여 다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삼왕이 민심을 굳게 뭉쳐서 조복(祚福)을 유구(悠久)하게 전한 것이다’하였고,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짐(朕)이 억조만민의 임금이 되어 날로 부귀(富貴)하게 하려 한다.
만약에 예의(禮義)로써 가르쳐 젊은이는 어른을 공경하고, 아내는 남편을 공경하게 하면 모두 귀(貴)하게 될 것이며, 요역(謠役)을 경(輕)하게 하고 부세(賦稅)를 박(薄)하게 하여 각각 생업(生業)을 다스리게 하면 모두 부(富)하게 될 것이다. 만약에 집을 주어 사람이 넉넉하다면 짐(朕)은 비록 관현(管絃)을 듣지 않더라도 즐거움이 그 속에 있을 것이다’하였으며, 일찍이 공경(公卿)에게 일러 말하기를, ‘옛날에 우(禹)임금이 산을 뚫어 물을 다스렸으되 백성이 비방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백성과 이익을 같이 한 까닭이며, 진시황(秦始皇)이 궁실(宮室)을 경영함에 백성이 원망하여 배반한 것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자기만 이롭게 한 까닭이다. 대저 미려(美麗)하고 진기(珍奇)한 것은 진실로 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이나, 만약에 방종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위망(危亡)한데 이를 것이다. 짐이 한 전각을 영조(營造)하고자 재용(材用)이 이미 갖춰졌으나 진(秦)나라를 거울삼아 그쳤었는데, 낙양궁(洛陽宮)의 수선에 이르러서는 순행(巡幸)을 대비하여서이다’하니, 장현소(張玄素)가 상서(上書)하여 간(諫)하기를, ‘폐하(陛下)께서 처음 낙양(洛陽)을 평정할 때에 무릇 수씨(隋氏)의 궁실(宮室)로 굉대하고 사치한 것은 모두 헐게 하였는데, 10년이 못되어 다시 영선(營繕)을 더하면, 어찌 전일(前日)에는 미워하고 오늘은 본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창이(瘡痍)1433)의 무리를 역사시켜 수(隋)가 망한 폐단을 답습한다면 또 양제(煬帝)보다 심할까 염려됩니다’하매, 태종(太宗)이 장현소(張玄素)더러 이르기를, ‘경(卿)은 나더러 양제(煬帝)만도 못하다고 이르나, 어떻게 걸(桀)주(紂)와 같다고 하느냐?’하니 대답하기를, ‘만약에 이 역사를 그만두지않는다면 또한 어지러운데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일 뿐입니다’하매 태종이 말하기를, ‘내 생각이 익숙지못하여 바로 이에 이르렀다’하고, 방현령(房玄齡)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짐(朕)은 낙양(洛陽)이 국토의 중앙이므로 조공(朝貢)하는 길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려고 뜻한 까닭에 영조하게 하였더니, 이제 장현소의 말한 것은 진실로 이치가 있다. 후일에 혹 낙양(洛陽)에 이르러 비록 노숙(露宿)하더라도 또한 상(傷)할 것이 없으니, 즉시 역사를 파(罷)하라’하였습니다.
이로부터 20년간 풍속이 소박(素朴)하여 옷에는 금수(錦繡)1434)가 없었고, 공사(公私)에도 넉넉히 주게 하였습니다.
대개 토목(土木)의 역사는 백성을 수고롭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재화를
손상하니, 비록 풍년(豊年)이 들더라도 진실로 경거(輕擧)히 할 수 없거든,
더구나 때가 어려운데도 행동은 여유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나라는 근년 이래로 사신(使臣)이 왕래하여 백성이 이미 수고로왔습니다. 광릉(光陵), 영릉(英陵), 창릉(昌陵), 봉선사(奉先寺), 내불당(內佛堂)의 역사를 서로 잇달아 일으켰고, 의경묘(懿敬廟), 삼청전(三淸殿)을 지은 것은 그만두고라도 대창(大倉)같은 것은 일이 부득이한 것이 아닌데도 반드시 흉년(凶年)에 시행하고 또 그 백성의 사는 곳은 철거하여 곡식을 쌓는 곳을 삼으시니, 신등은 소이를 모르겠습니다.
지난해에 흉년이 들어 사방에서 기근(飢饉)이 들었는데, 가령 금년에는 조금 풍년이 들었다하여도 오히려 족할 수가 없거든, 하물며 이제 우택(雨澤)이 흡족하지 못하여 금년의 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창고(倉庫)가 빈 것도 오히려 충당하여 쌓을 것이 없고, 비록 풍년이 들었더라도 또한 반드시 짓지는 못할 것인데, 하물며 흉년이겠습니까?
옛적에 노인(魯人)이 장부(長府)라는 창고를 고쳐 만들려 하였더니, 민자건(閔子騫)이 말하기를, ‘옛날 것을 그대로 두면 어떻단 말인가? 무엇때문에 꼭 고쳐지어야 하는가?’하니, 이를 듣고 공자께서 말하기를, ‘그 사람은 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말을 하면 반드시 사리에 맞는다’하였으니,
성인(聖人)이 민력(民力)을 중하게 한 뜻을 볼 만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완급(緩急)을 상략(商略)하시어, 이 역사를 정지하도록 명하여 민력을 쉬게하소서.
1. 내수사(內需司)의 누락(漏落)된 노비(奴婢)를 진고(陳告)하는 일은 바루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대저 사가(私家)의 노예(奴隷)는 그 부리는 것이 고되고 그 바치는 것이 중(重)하여, 사사로이 향리(鄕里)에서 우대를 받지 못하고, 공(公)으로는 주군(州郡)에서 보호를 받지 못하니, 인정(人情)은 이를 피하고자 합니다.
만약 내수사(內需司)의 노비(奴婢)가 되면, 여염(閭閻)에서 추중(推重)되고 수령(守令)이 우대(優待)하니, 이졸(吏卒)이 침노할 수 없으며 신역(身役)도 또한 무겁지 않으므로 인정(人情)이 즐거워 재미붙일 만한 것입니다.
인정은 영화를 좋아하지 않음이 없고, 미워하고 욕하는 것도 또한 중(重)한 것을 피하고 경(輕)한 것에 나아가지 않음이 없습니다. 과연 참으로 소속된 종을 당초 쇄환(刷還)할 때에 어찌 싫고 꺼려하여서 지금에 이르도록 도피(逃避)하여 누락(漏落)하였겠습니까?
인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반드시 누락된 자가 없을 것이며, 비록 있다하더라도 또한 어찌 많겠습니까?
진고(陳告)하는 자를 상고하건대, 김사(金賜)가 진고한 것이 370여구(口), 석중(石衆)이 180여구(口), 김남리(金南利)가 6백여구(口), 백동(白同)이 5백여구(口)가 되니, 그 무리는 7, 8인에 지나지 못하나. 항상 진고로써 업(業)을 삼아서 그 아는 바 누락(漏落)한 수(數)의 많음이 이와 같습니다.
무릇 사람의 이목(耳目)이 미치는 바는 유한(有限)한데, 어찌 5, 6백인의 근각(根脚)을 알아서 아무는 바로 아무 시[某寺] 노비(奴婢)의 소생(所生)이라 하겠습니까? 대개 간사(奸詐)한 무리가 날로 시문(市門)을 의지하여 영생(營生)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인심(人心)의 하고자하는 바에 순응하여 각사노비(各司奴婢)의 염역자(厭役者)를 꾀어 말하기를, ‘네가 어찌 임무를 감당하여서 공역(供役)하겠느냐? 나의 지도(指導)를 따라서 너의 근각(根脚)이 변하는 것만 같지못하다. 내가 고(告)할 터이니 너는 응하기만 하면, 너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본궁 노비(本宮奴婢)에 오르게 할 것이다. 그러면 다행하지 않겠느냐?’하면, 이에 듣는 자가 흔모(欣慕)하기를, ‘내가 장차 그 방법을 얻겠다.’하고, 제족(諸族)에게 돌아다니며 유인하여 소리를 같이 하고 서로 응하며, 각각 재화(財貨)를 내어서 고(告)한 자에게 뇌물을 주므로, 고한 자의 집은 이로부터 부자가 됩니다.
이미 고한 뒤에 만약 관리가 법에 의거하여 조금 난색(難色)이 있을 것 같으면 따라서 겁을 주기를, ‘사가(私家)의 송사도 또한 결단하는데, 어찌 위[上]에 속한 일에 치의(致意)하지 아니하고 엄체(淹滯)함이 이와 같으냐?’ 하면, 관리도 또한 죄책(罪責)당할까 겁을 먹어 일이 비록 명확하지 못하더라도 왜곡하여 성취합니다. 그러나 사가(私家)의 노비는 혹 그 주인이 힘써 변별하여 다투지만, 만약에 공처(公處)의 노비는 처음부터 변쟁(辨爭)하는 자가 없어 그 탈속(奪屬)하기가 더욱 쉬우니, 이것이 고하는 자의 간술(奸術)이 쉽게 행해지는 소이입니다.
이름은 비록 진고(陳告)라고 하나 실상은 옮겨 기록하는 것인데, 반드시 포백(布帛)으로 상(賞)을 주니, 이는 부고(府庫)의 재물만 허비할 뿐인데도 그것이 옳겠습니까?
조이생(趙異生)과 같은 무리가 선두안(宣頭案)1435)을 위조(僞造)하여 일이 발각되어 죄를 입은 것도 또한 한 증험입니다.
만일 각사(各司)의 정안(正案)1436)을 상고하여 보면 결정하여 붙인 수만(數萬)의 노비(奴婢)의 부모(父母), 조부모(祖父母)가 모두 별달리 그 이름이 있고 별도의 그 역사가 있어서, 감로사(甘露寺)등 절의 노비(奴婢)와 같은 성격이 아니니, 반드시 노력(勞力)하여 변별할 것은 아닙니다.
각사(各司)의 노비도 또한 국가의 노비입니다. 어찌 반드시 저를 옮기어 이에 붙여서 국폐(國幣)를 헛되게 버리어 간민(奸民)의 자뢰가 되게 하겠습니까? 신등은 청컨대 진고(陳告)로써 이미 붙인 노비(奴婢)는 이전(已前)의 정안(正案)을 상고하여, 부조성명(父祖姓名)을 아울러 개정하게 하고, 상포(賞布)를 도로 거두시며, 이제부터는 현재 각사정안(各司正案)에 붙인 것은 진고할 수 없게 함으로써 간민(奸民)의 모리(謀利)하는 계교를 막으시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1. 간쟁(諫諍)하는 말은 따르지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위징(魏徵)에게 묻기를, ‘근년에는 조신(朝臣)들이 어찌 일을 논하지 않느냐?’하니 대답하기를, ‘폐하(陛下)가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면 반드시 말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대저 신하로 순국(殉國)하는 자는 적고 애신(愛身)하는 자가 많으니, 저들이 죄를 두려워하는 까닭으로 말하지않습니다’하매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그렇다. 인신(人臣)이 뜻을 어기는 말을 하게 되면 자칫 형주(刑誅)하기에 이르니, 탕화(湯火)를 밟고 백인(白刃)을 무릅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우(禹)임금이 창언(昌言)1437)에 절하였음은 진실로 이것을 위함이다’하였고, 당(唐)나라 덕종(德宗)이 육지(陸贄)더러 이르기를, ‘간관(諫官)이 일을 논하여 능히 조금 신밀(愼密)하면 스스로 자랑하고 허물을 짐(朕)에게 돌리어 스스로 이름을 취한다. 짐이 즉위한 이래로 일을 논한 것을 본 것이 매우 많은데 모두가 뇌동(雷同)1438)하므로, 시험으로 질문(質問)을 더하였더니, 곧 말이 궁하였다’하니 육지가 대답하기를, ‘아래가 된 자는 충성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위가 된 자는 다스려지기를 구하지않는 이가 없으나, 그러나 아래는 항상 위에 상달(上達)하기가 어려움을 괴로워하고, 위는 항상 아래에 알리기가 어려움을 괴로워하니, 이와 같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구폐(九弊)를 버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른바 구폐(九弊)라는 것은 위에 그 여섯 가지가 있고, 아래에 그 세 가지가 있으니, 남에게 이기는 것을 좋아하며, 허물 듣기를 부끄러워하며, 말 잘하는 이를 초빙하며, 총명한 것을 자랑하며, 위엄을 사납게 하며, 강퍅(剛愎)1439)함을 자행하는 것, 이 여섯 가지가 군상(君上)의 폐단이며, 아첨하는 것과 고망(顧望)1440)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신하(臣下)의 폐단입니다.
중훼(仲虺)1441)가 성탕(成湯)을 찬양하되, 그 허물이 없는 것을 일컫지 아니하고 그 허물을 고치는 것을 일컬었고, 윤길보(尹吉甫)가 주선(周宣)1442)을 가송(歌頌)하되, 그 궐(闕)함이 없는 것을 아름답다하니하고 그 궐함을 보충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간(諫)하는 자의 광무(狂誣)는 나의 능서(能恕)를 밝게 하고, 간하는 자의 누설(漏洩)은 나의 능종(能從)을 드러나게 하며, 한결같이 이렇게 함이 있으면 모두 성덕(盛德)이 되는 것입니다’하매, 덕종(德宗)이 자못 그 말을 썼으니, 전하께서는 총명(聰明)한 자질로써 정일(精一)한 학문(學問)을 더하시어 무릇 언관(言官)이 일을 논하는 것은 매양 우납(優納)을 더하시고, 말이 비록 맞지 않더라도 또한 죄를 가하지않으심은 진실로 동방 만성(萬姓)의 복(福)입니다.
그러나 당태종(唐太宗)은 영명(英明)한 임금이라 호칭(號稱)하되 오히려 위징(魏徵)의 말에 자뢰하여서 정관(貞觀)지치(之治)1443)를 이루었고, 고려(高麗)를 정벌하려는데 이르러서는 위징이 불가(不可)하다 하였습니다.
위징이 죽으매 태종이 위징의 공(功)을 생각하여, 위징의 아들 위숙옥(魏叔玉)을 상주(尙州)1444)하도록 허락하고, 몸소 비(碑)를 만들어 세웠는데, 마침 참언(讒言)이 한 번 일어나서, 혼인을 정지시키고 비(碑)를 넘어뜨려 버렸으며 고려(高麗)를 정벌하여 공(功)이 없는데에 미치자 바로 깊이 뉘우치고 탄식하기를, ‘위징이 만약 있었다면 짐으로 하여금 이런 행동이 있게 하지않았을 것이다’하였으니, 어찌 그 의혹함은 쉽고 뉘우침은 빠르옵니까?
대저 양약(良藥)은 입에는 쓰되 병(病)에는 이로우며, 충언(忠言)은 귀에는 거슬리되 행함에는 이롭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간하는 자의 말은 처음에는 불의(拂意)1445)하는 것같되 타일(他日)에 이로운 것이 하나둘로써 계교할 수 없거든, 하물며 그 말이 국계(國計)가 될지언정 일신(一身)의 계교가 되지않았으니, 태종의 뉘우침도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은 간함을 따르면 성스러워진다’하였습니다.
만약 임금이 말을 내면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데 경대부(卿大夫)가 감히 그 그릇됨을 교정하지 못하고, 경대부가 말을 내면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데 사(士) 서인(庶人)이 감히 그 그릇됨을 교정하지 못하며, 서로 아첨하며 서로 기뻐하기를 힘쓴다면 그 어찌 인민(人民)과 사직(社稷)을 보존하겠습니까? 국가의 일은 장차 날로 그릇될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간하는 것을 따르는 아량을 더욱 넓히시고,
뜻을 거슬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당나라 태종이 위징의 간하던 것을 생각하는 마음을 생각하시어 시종(始終)을 삼가하시면, 인민이 심히 다행하고 사직도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신등이 진달한 시의(時宜)의 각 조목은 모두 옛 상도(常道)를 인순(因循)하여 그 대체(大體)를 잃었으나, 전하께서 그 명(命)을 새롭게 복응(服膺)하시어 마땅히 그 정사를 새롭게 하시었습니다.
《주역(周易)》태괘(泰卦)의 구이(九二)에 주공(周公)의 치태(治泰)의 도를 논하기를, ‘빙하(馮河)1446)를 쓰면 벗을 잃는데, 중용의 덕행을 숭상하므로 그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인정(人情)은 옛 상도에 친압하고 다시 변(變)하는 것을 꺼리니, 만약 빙하(馮河)의 용기가 없다면, 특히 분발하여 그 폐단을 혁파할 수 없는 까닭으로 ‘빙하(馮河)’라고 썼으며, 예로부터 법을 세우고 일을 제정할 때, 인정(人情)에 끌려 행하지못하는 것이 많은 까닭으로 벗을 잃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신등은 먼저 인순지폐(因循之弊) 16조목을 진술하고 종간(從諫) 1절로 끝맺었으니, 대개 전하께서 행하는데 용결(勇決)하시고 의심이 없게 하려 함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밝게 결단하시어 옛 것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새롭게 하시며 지치(至治)를 일으키시면, 우리나라에 심히 다행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註1338]도유우불(都兪吁咈):도유는 찬성, 우불은 반대의 뜻인데, 요(堯)임금이 군신(群臣)과 정사를 의논할 때에 쓰인 말. 전(轉)하여, 군신(君臣)간의 토론, 심의의 뜻으로 쓰임 註1339]예정(銳精):정신을 한 군데로 모아 일에 힘씀.註1340]추요(芻蕘):꼴꾼과 나뭇군. 곧 천한 사람.註1341]농고(聾瞽):귀머거리와 소경. 곧 무지함을 가리킴 註1342]시의(時宜):시대에 적의한 것.註1343]삼대(三代):하(夏), 은(殷), 주(周).註1344]사도(斯道):유교(儒敎)의 도덕 註1345]출세간(出世間):속세(俗世)를 떠남.註1346]벽곡(辟穀):화식(火食)은 아니하고 생식(生食)만하는 일.註1347]면벽(面壁):좌선(坐禪)하는 일註1348]황연(怳然):황홀하여 얼빠진 모양.註1349]명고이공지(鳴鼓而攻之):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북을 치면서 성토함 註1350]지계(持戒):계행(戒行)을 지킴.註1351]무인년:1458 세조4년 註1352]무인년:1458 세조4년.註1353]양종(兩宗):교종(敎宗)과 선종(禪宗).註1354]연연(涓涓):물이 쫄쫄 흐르는 모양.註1355]파사(婆裟):너울너울 춤추는 모양 註1356]심상(尋常):범상(凡常).註1357]휘황(輝煌):광채가 빛나서 눈이 부시게 번쩍임 註1358]염폐(廉陛):청렴의 단계 註1359]치체(治體):정치하는 대체 註1360]신명(申明):거듭 밝힘.註1361]불간(不刊):깎아 없애지못함.註1362]반당(伴倘):조선조때 왕자, 공신이나 당상관의 문무 신료들이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데리고 다니던 수종인으로, 그 녹은 나라에서 주었음.註1363]승상가(丞相嘉):승상인 신도가(申屠嘉).註1364]격소(檄召):징소(徵召)하는 글을 보내어 부름註1365]중상시(中常侍):관명(官名). 진(秦)나라때 중상시관(中常侍官)을 설치하여 환자(宦者)를 쓰기도 하고 혹 사인(士人)을 쓰기도 하였으며, 한(漢)나라에서는 그것을 인하여 시중(侍中), 중상시(中常侍)를 두었는데, 궁중의 일을 인도하고 왕의 고문에 응대(應對)하는 것을 맡아 보았음.註1366]숙(肅), 대(代):당(唐)의 숙종과 대종.註1367]용사(用事):권세를 마음대로 부림 註1368]천헌(天憲):조경의 법령 註1369]성사(城社):성호사서(城狐社鼠)를 말하는데, 즉 안전한 곳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는 뜻으로서 간신(奸臣)이 임금 곁에서 임금의 권세를 이용한다는 말임.註1370]측미(側媚):마음이 간사하여 아첨을 잘함 註1371]침윤(浸潤):점점 배어 들어감 註1372]부수(膚受):살을 에이는 듯이 통절(痛切)함.註1373]순료(醇醪):좋은 막걸리 註1374]국보(國步):나라의 운명 註1375]명(命):천명(天命).註1376]수계(垂戒):경계를 보임 註1377]보(保):태보(太保).註1378]태공(太公):태공망(太公望).註1379]십란(十亂):무왕(武王)을 도운 열 사람의 신하 註1380]백책(百責):백가지 책임 註1381]선건전곤(旋乾轉坤):천지를 회전한다는 뜻으로, 천하의 형세를 일신(一新)함을 말함 註1382]중기(重記):전곡이나 노비등을 출납하거나 납공(納貢)할 때 기록하는 장부 註1383]부궤불식(簠簋不飾):제기(祭器)가 깨끗하지않다는 뜻으로 청렴하지못한 신하를 일컬음 註1384]유박불수(帷簙不脩):부인의 품행이 좋지못함.註1385]하관불직(下官不職):하관(下官)이 그 직임을 다하지못함.註1386]옹손(饔飱):아침밥과 저녁밥.註1387]적족(赤族):일족이 모두 살해됨.註1388]전조(銓曹):이조(吏曹)와 병조(兵曹).註1389]대성(臺省):사헌부와 사간원.註1390]정조(政曹): 이조와 병조.註1391]허위(虛位):실지의 업무가 없는 지위.註1392]실인(失人): 쓸 만한 사람을 놓침 註1393]임민(臨民):백성을 다스림 註1394]2천석(二千石):한대(漢代)의 군(郡)의 태수(太守)를 일컬음.註1395]고만(考滿):관리의 임기 만료 註1396]호양(浩穰):광대(廣大)한 모양.註1397]사만(仕滿):근무기간 註1398]한산(閑散):한산인(閑散人). 품계만을 가지고 직무없이 한가하게 지내는 사람 註1399]십고십상(十考十上):관원의 성적이 열 번 고사(考査)에 열 번 모두 상(上)의 성적을 얻은 것.註1400]개만(箇滿):고만(考滿). 임기가 만료된 것.註1401]염개(廉介):청렴결백함.註1402]무격(巫覡):무당과 박수.註1403]상인(商人):상나라 사람 註1404]감가(酣歌):술을 마시고 흥겨워 노래 부름.註1405]역려(疫癘):전염병 註1406]소애(少艾):젊고 아름다운 사람 註1407]소의간식(宵衣旰食):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정복을 입고, 해가 진 후 저녁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함을 비유함 註1408]수선(首善):모범이 되는 곳의 뜻으로, 서울을 이름.註1409]이상지계(履霜之戒): 서리가 내리는 것은 얼음이 얼 징조이므로, 징조를 보고 미리 화란(禍亂)을 방지하여야 한다는 경계임.註1410]한품(限品):어떤 일정한 관직에 한정된 품질(品秩).註1411]허통(許通):벼슬길을 열어줌.註1412]뇌롱(牢籠):통합함.註1413]한품(限品):한품서용(限品敍用).註1414]작(爵):작위(爵位).註1415]관(官):관계(官階).註1416]명왕(明王):명철한 임금.註1417]모진(冒進):함부로 나아감.註1418]사유(四維):예의염치(禮義廉恥).註1419]비(費):읍명(邑名).註1420]재(宰):읍재(邑宰).註1421]문상(汶上):문수(汶水)의 유역. 제남(齊南)과 노북(魯北)사이에 있는 강.註1422]동자(董子):동중서(董仲舒).註1423]염퇴수도(恬退守道):명예에 뜻이 없어 벼슬을 사직하고 도(道)를 지킴 註1424]왕상(王祥):진(晉)나라 때의 효자 註1425]삼대(三代):하(夏),은(殷),주(周) 3대를 말함.註1426]강충(降衷):한 쪽으로 치우치지않는 바른 덕과 진심을 하늘로부터 받은 것.註1427]병이(秉彝):상도(常道)를 굳게 지킴 註1428]치무(馳騖): 치빙(馳聘). 부산하게 이곳저곳 돌아다님 註1429]감발(感發):감동하여 분발함.註1430]징창(懲創):징계(懲戒).註1431]혈구지도(絜矩之道):사람을 생각하고 살피어서 바른 길로 향하게 하는 도덕적 규범.註1432]훈증(薰蒸):훈훈한 기운註1433]창이(瘡痍):백성의 질고(疾苦).註1434]금수(錦繡):수를 놓은 비단 註1435]선두안(宣頭案):내수사(內需司)에 속한 노비들을 20년마다 자세히 조사하여 새로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는 원적부(原籍簿).註1436]정안(正案):공천(公賤)의 등록원부.註1437]창언(昌言):도리에 맞는 좋은 말.註1438]뇌동(雷同):아무 생각없이 남의 의견을 따름 註1439]강퍅(剛愎):성미가 까다롭고 고집이 셈 註1440]고망(顧望):형세를 관망하고 거취를 결정하지 아니함.註1441]중훼(仲虺):은(殷)탕왕(湯王)의 재상.註1442]주선(周宣):주나라 선왕.註1443]정관(貞觀)지치(之治):중국 당(唐)나라 태종의 연호인 정관(貞觀:627∼649)시대에 이룩한 빛나는 정치. 개원(開元:현종의 연호 713∼741)의 치(治)와 함께 중국역사의 가장 황금시대였음.註1444]상주(尙州):천자의 딸을 아내로 삼음.註1445]불의(拂意):뜻을 거역함 註1446]빙하(馮河):황하를 걸어서 건넘. 즉 무모한 용기.
○司憲府大司憲韓致亨等上疏曰:伏覩主上殿下, 以不世之資, 當有爲之幾, 開言路, 納諫諍, 都兪吁咈, 銳精治道, 吾民之病, 一切除去, 國家之勢, 安如盤石, 固足爲太平之基。 而殿下尙以治道有未至, 民瘼有不祛, 每虛懷聽納, 以求補治之言, 吾東方萬世福也。 然治不至唐、虞, 不可謂之善治; 德未至堯、舜, 不可謂之聖人。 故古之人, 非堯、舜之道, 不敢以陳於王前; 匹夫、匹婦, 有不被堯、舜之澤, 其心愧恥, 若撻于市。 然則爲人臣者, 固當以堯舜之聖, 望於君上, 而人主亦當以唐、虞之治, 自期也。 臣等俱以庸駑, 幸逢聖明, 備位言官, 曾無一言足以益國、利民, 而坐費大倉之粟, 是不唯古人之所恥, 亦非殿下見待之意也。 故不揆芻蕘之鄙, 竊效聾瞽之陳, 謹以時宜十七條, 錄進于左狀, 惟上裁。 一。 三代以前, 斯道如日中天, 無所謂釋氏之敎也。 至漢明帝時, 始入中國, 其說大抵以淸淨寡慾、離世絶俗爲宗, 而居必山, 食必乞, 超出世間, 而不自累焉。 至如治心之法, 有五根、十戒、二十煩惱之說焉。 是乃一箇別種道理, 而已充其道, 則必深入山林, 辟穀、面壁, 怳然如得其所謂虛無、寂滅之妙, 然後始可謂之佛之徒矣。 豈可雜處閭閻, 喧鬧塵垢之間, 而爲之哉? 徒有其形, 而苟無其心, 則於釋氏之徒, 必曰: “非我徒也。 鳴皷而攻之, 可也。” 云爾。 嗚呼! 今之僧人持戒操心者, 百無一二, 類皆無知避役之徒, 以爲: “僧人軍役不加, 有罪可免, 妻子因可保也, 錢財因可興也。” 於是皆慕趨之, 非但有役軍丁, 逃免差役, 至於盜賊, 亦假僧形, 以庇其身。 是以, 盜者、淫者、販鬻者、訟獄者, 懈怠放逸之徒, 遍滿閭閻, 殆過軍額, 不顧其師, 淸淨寡慾、離世絶俗之本戒, 使(釋伽氏)〔釋迦氏〕如有靈焉, 亦必羞與爲徒矣。 去戊寅歲, 檜巖、楡岾兩寺之役暫興, 而欲受度牒者, 六萬三千餘人, 其他刊經都監、懿廟赴役受度牒, 其數無窮。 以此推之, 自戊寅至今十四年間, 擅便剃髮者, 不知其幾萬萬矣, 而兩宗依法試經者, 僅十二人而已。 雖有試經、納錢之法, 亦何益哉? 法立而不用, 不如不立之爲愈也。 彼雖精於其道, 於國家誠無益矣, 況毁滅本戒, 漫棄國法? 徒爲放縱, 自肆無所不爲, 則亦何必任其自爲, 而棄良民於無用之地乎? 今若不立還俗之法, 以禁制之, 則勢將僧徒日盛, 軍卒日減。 殿下誰與守國乎? 若曰: “先王時亦有之, 所不忍去之。” 則抑有說焉。 孔子曰: “武王、周公, 其達孝矣乎! 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也。” 眞西山論之曰: “當持守而持守, 固繼述也; 當變通而變通, 亦繼述也。” 蓋商質、周文, 隨時損益; 夏葛、冬裘, 因氣寒煖。 非有意取舍而然也, 隨時之義, 如是而已。 其源, 雖自先王之時而有之, 其弊, 則至于殿下之時而生焉。 如火之星星而燎原, 不可不滅; 如水之涓涓而滔天, 不可不決。 有一農夫於此, 其父旣種, 其子當耘, 見其秕曰: “父之所種, 不忍去之。” 見其莠曰: “父之所植, 不忍除之。” 則可乎? 何以異於是? 伏望殿下, 申明舊典, 兼立新條, 已前違法剃髮, 無度牒者, 則年五十以下還俗; 自今違法避役爲僧者, 則其父母、同腹、隣里、官吏科罪, 以實軍額, 國家幸甚。 一。 社長之群聚惑衆, 不可不除也。 類皆市井無識之徒, 妄慕因緣、禍福之說, 商賈其業, 欺詐其心, 以爲一念阿彌陁僧, 可以成佛道, 可以消除罪惡。 乃創社於大都閭閻之中, 稱爲念佛所, 棄其業次, 紛然群聚, 緇衣、緇冠, 男東、女西。 視其形, 非僧、非俗; 視其處, 非寺、非家。 朝則罔市利, 暮則歸依佛, 奇形、怪狀, 雜沓周旋, 鳴錚、擊鼓, 婆娑踴躍, 而街童、巷婦, 環視欣慕, 耳目習熟, 以爲當然, 爭相趨附。 旣戾國家化民成俗之意, 又非釋氏離世、絶俗之道, 亦何等風俗也? 如以其道, 易天下, 則必家家爲寺, 人人爲僧, 然後足矣。 要之, 佛氏之言曰 “如來”, 曰 “菩薩”, 曰 “阿彌陁佛”, 不過求其心而已。 嗚呼! 心果可與衆, 鳴鼓而求之乎? 朝爲欺詐罔市之行, 而暮依於佛, 以消其罪, 則凡十惡大憝者, 孰不能一念佛, 而免其罪乎? 如是, 而可以求心、可以成佛、可以消惡, 是誰欺, 欺天乎? 聖人之治天下國家也, 當漸民以仁, 磨民以義, 節民以禮而已。 豈可任其荒誕之行、長其不經之俗, 而以爲治乎? 伏望, 亟命攸司, 痛禁非僧、非俗之流, 以淸維新之化。 一。 《易》曰: “天尊地卑, 乾坤定矣; 卑高以陳, 貴賤位矣。” 言上下之分, 不可易也。 故必先辨上下之分, 然後民志定, 而禮義有所措。 今公、卿、大夫, 狃於富貴, 競起大第, 務出尋常, 罔有限度, 窮財力而止。 輝煌朱粉, 巧麗雕琢之飾, 殆過於宮闕, 而不自怪僭擬之爲非也。 況販鬻之徒、奴隷之微, 一有錢財, 亦不計涯分, 爭起第舍, 務崇繁華, 間數之多、靡麗之飾, 又出於卿、大夫之右。 於是乎, 庶人之第, 陵朝臣, 朝臣之第, 侔宮闕, 奢泰無節, 廉陛不峻, 僭濫之風, 漸不可長, 非細故也。
殿下卽位以來, 銳意治道, 斥田獵、省冗費, 務以節儉爲治, 而俗尙如此, 臣等痛心。 夫治體, 在乎正俗、尙俗。 尙奢僭而求治之善者, 未之有也。 宅第之奢泰, 心志之奢泰也; 宅第之高大, 心志之高大也。 不以恭讓、忠貞, 潤其身, 而以奢泰、高大, 潤其屋, 非人臣之道也。 況材木之在山林, 不可以歲月成, 而俗之奢泰無限, 以難成之材, 應無限之用, 不亦難乎? 昔世宗大王, 嘗疾俗尙奢僭, 立間閣之制: 大君六十間, 公主、王子五十間, 宗親、文武官二品以上四十間, 三品以下三十間, 庶人十間, 勒爲定制。 其踰分過制之家, 竝令撤去。 臣等請申明是法, 永爲不刊之典, 敢踰此者, 依律論斷, 撤所起第舍, 已前所起, 竝皆撤去, 藺奢僭之風。 一。 兩界, 國家之藩籬, 寇賊之門戶也。 祖宗以來, 常慮居民之未稠、軍額之尙少, 多徙南民以實之。 然永安爲道, 地連野人路, 又脩阻脫有緩急, 南兵未易應援。 要當先實土兵, 以固北門, 可也。 至如平安, 又非永安之比。 使命之來往, 護送之抄、騎載之出、供頓之費, 十倍他道, 民不聊生, 人烟鮮少, 終日之行, 或不見人家, 言之足爲寒心。 爲國大計, 宜先寬民力、足軍丁, 以爲他日, 萬一之備固也, 而宰相之家, 擇其壯實者, 以爲之伴, 其數殆過於吏卒, 郡縣日耗、軍額日減, 非細故也。 而朝廷視爲尋常, 由是邑無見吏、軍無實丁, 以有數之民, 供無窮之役, 又何暇耕耘食力, 以爲仰事、俯育之資乎? 是宜徙民, 以實其虛, 而反使僅存之民, 就役於宰相之家, 以損削防禦之卒, 非國之善計也。 臣等請兩界居民不許爲伴倘, 其已前差定者, 亦宜追奪, 以充軍額, 以實州郡。 一。 宦者用權, 爲國家患, 其來久矣。 稽之成周, 閽人守中門之禁, 寺人掌女宮之戒, 其任不過掃除內外, 出納言語而已。 然猶以冢宰領之, (十)〔干〕其私意之昵、非道之干。 漢初, 猶有古意, 以宰相, 得監宮中, 至文帝時, 宦官猶知宰相可畏焉。 鄧通寵幸, 少有怠慢, 丞相嘉得以檄召而責曰: “小臣慢上不敬, 當斬。” 上使使, 持節召通, 謝丞相, 乃免, 此漢、周盛時, 所以無近習之弊也。 東漢, 始以中常侍曹節、王甫, 使與政事, 竊弄國柄, 濁亂海內。 唐太宗監前世之弊, 詔以內侍省不立三品官, 但令守門、傳命而已。 肅、代以後, 無復舊制, 命朝恩, 管神策兵; 命承璀, 爲招討使。 自是程元振、王守澄、仇士良、楊復恭、韓全誨相繼用事, 勢益驕橫, 自稱定策國老, 目天子, 爲門生。 手握王爵, 口含天憲, 依憑城社, 竊弄刑賞, 或傷賢、害能; 或煽亂、致禍, 其弊始於明皇, 盛於肅、代, 成於德宗, 極於昭宗。 朱全忠請昭宗, 擧兵誅之前後幷百六十二人, 何其慘矣! 由辨之不早辨也。 彼雖自求之禍, 而亦人主馭之失其道也。 所以然者, 有由然矣。 蓋宦者, 類皆識性儇利、語言辨給, 善候伺顔色、承迎旨趣, 受命則無違忤之患, 使令則有稱愜之能。 其便僻、側媚之習, 易以移君德; 讒譖、諛佞之言, 易以惑君聽。 自非上智之主, 燭知物情, 慮患深遠, 誰能不陷於術中? 是以, 甘言、卑辭, 有時而從, 浸潤、膚受, 有時而聽, 如飮醇醪, 不覺其醉, 而黜陟、刑賞之柄, 潛移而不自知也。 嗚呼! 宦寺, 朝夕與居; 群臣, 進退有時。 潛消默奪於冥冥之中, 而明爭顯諫於昭昭之際, 抑末矣。 恭惟我朝, 太祖、太宗化家爲國, 論功行賞, 而宦寺封君無聞焉。 我世祖大王再淸 國步, 試封田畇, 而言官執以爲不可, 則尋罷之, 末年還封焉。 是特一時之恩, 而非萬世之法也。 自是以後, 因循成例, 封君非一, 堂上亦多, 稽古、證今, 漸不可長。 《易》曰: “大君有命, 開國承家, 小人勿用。” 程子釋之曰: “師旅之興, 成功非一道, 不必皆君子也。 小人, 平時易致驕盈, 況挾其功乎?” 大君持恩賞之柄, 以正軍旅之功, 小人則不可以有功而任用之, 任用之必亂邦也。 小人恃功而亂邦者, 古有之矣, 賞之以金帛, 可也。 聖人垂戒之意, 深且遠矣。 伏惟, 殿下監戒歷代之弊、斟酌本朝故事, 執其兩端, 用其中道, 一應宦寺封君、堂上, 竝令改正, 朝廷幸甚。 一。 三公之任, 不可例授也。 《周書》曰: “立太師、太傅、太保, 玆惟三公, 論道經邦, 爕理陰陽, 官不必備, 惟其人。” 又曰: “少師、少傅、少保, 曰三孤。 貳公弘化, 寅亮天地, 弼予一人。”
夫公論道, 孤弘化, 公爕理陰陽, 孤寅亮天地; 公論於前, 孤弼於後。 公、孤之任, 其重如此。 成王, 以周、召爲師、保, 而太傅則闕焉。 周公沒, 召公仍爲保, 而師傅則皆闕焉; 三公、三孤, 皆無其人, 則闕焉而已。 考之當時人才, 周、召之外, 亦有太公、畢公、榮公、泰顚、(閎矢)〔閎夭〕、散宜生、南宮括之徒, 俱以一德之臣, 參其十亂之列, 豈不足爲師傅之任, 而周公沒, 寧闕其師傅而不之補焉。 豈非三公所以待非常之德, 鄭重而然歟? 嗚呼! 三公之位, 百貴所萃, 震撼、擊撞, 欲其鎭定; 辛甘、燥濕, 欲其調劑; 盤錯、棼結, 欲其解紓; 黯暗、汚濁, 欲其茹納。 必若伊尹之相湯, 然後可謂之阿衡; 周公之相周, 然後可謂之太宰。 不然則赫赫師尹, 民具爾瞻而已; 鼎折足、覆公餗, 其形渥而已。 其可輕授而例遷之哉? 恭惟, 我世祖大王旅乾轉坤, 功兼創守, 謂非三公, 無以報大功, 姑從權典, 而三公之職, 隨闕例遷, 非永世之法也。 自是, 因仍例授, 曾經三公過十久矣。 果可例授不已, 而至於無窮乎? 臣等請勿復例授, 以尊三公之位, 朝廷幸甚。 一。 各司官吏受祿, 必考上重記, 臣等竊以爲, 非待士之道也。 昔冉有問於孔子曰: “先王制法, 刑不上於大夫, 然則大夫犯罪, 不可以加刑乎?” 子曰: “不然。 凡治君子, 以禮御其心, 所以屬之以廉恥之節也。 故古之大夫, 其有坐不廉汚穢者, 不謂之不廉汚穢, 曰簠簋不飾; 坐淫亂無別者, 不謂之淫亂無別, 曰帷簙不脩; 坐罷軟不勝任者, 不謂之罷軟不勝任, 曰下官不職, 所以愧恥之也。” 今《經國大典》有解由之法, 所以考虧欠, 明授受, 固不得已之法也。 然於受祿之日, 必先考解由, 乃給祿, 故有不出解由者, 雖終歲勤苦, 而不得受斗斛之祿。 其爲立法, 旣已詳密, 而戶曹又立幷考上重記之法。 夫祿者所以報有功, 有官職者不得不食祿固也, 而必曰: “不給食, 以勉勵其心。”, 則固非所以待人類, 其何以待賢士、大夫乎? 故士習之廉汚、風俗之美惡, 未必非上之人導之如何, 而治亂安危係焉。 其不可苟取一時之便利, 而忘國家萬世之大計, 亦明矣。 古之大臣, 定有其罪, 猶不敢斥, 然正以呼之, 以愧恥其心, 而陰有以養其廉恥之節, 故下之人亦不敢不以節行報上。 今聖上, 龍飛之初, 固當以廉恥遇下, 而有司過於防慮, 以爲不給常祿, 彼必有饔飧之慮, 而足以勉其職事, 至茵斛之粟, 操縱士大夫, 爲勸懲之術, 非古者廉恥待士之道也。 夫解由之法, 固不可廢也。 然無解由則不除職可也, 不可除職而不給祿也。 若重記之法, 須預定期限, 限內不畢修, 罪之可也, 黜之可也。 何(心)〔必〕先爲之利器, 以待士哉? 伏望, 諸如此等事, 一切罷去, 要當禮義遇下, 以培養廉恥之俗。 一。 亂臣賊子, 天地所不容, 人人得以誅之, 雖赤九族之誅, 不足以快人臣之憤, 蓋天下古今之所同惡也。 不幸國家多故, 陰謀、反逆之徒, 比古尤多, 凡在廷之臣, 罔不含憤切齒, 以擬赤族之刑, 而世祖、睿宗包涵廣大, 誅止其身, 祖孫、弟兄亦皆貸死。 此誠天地生育之至仁, 而其在緣坐配役之人, 亦以不死爲幸, 得食息於天地之間, 斯已多矣。 復蒙殿下之至德, 亦多放免, 是其初以不死爲幸, 又何敢以放免爲心乎? 而今中外之官, 頻頻皆緣坐之人, 臣等未知是皆出於上意乎? 不然, 是銓曹之過也。 縱天意, 必欲加官此人, 而人臣法當奏駁, 況非出於天意, 而必用之, 可乎? 臣等嘗憤亂賊之孽復用於世, 累殿下淸明之治, 不敢含默, 一再上達, 未蒙兪允。 其後乃傳曰: “亂臣緣坐, 臺省、政曹外, 皆許敍用。” 臺省、政曹之外, 亦有許多淸班、顯秩, 如郞官守令之比, 而乃有是敎, 未知所以, 私切痛憤。 夫以一國之廣、人士之繁, 用非無人、官不虛位, 而必用亂賊之屬, 以爲朝廷之羞。 臣等竊恐, 此人一用, 而國法遂毁、朝廷遂輕, 其弊將至於國非其國, 誠非細事也。 伏望, 更留三思, 勿輕用緣坐人, 已前所授, 一皆改正, 爲宗社大計, 幸甚。 一。 設官、分職, 所以爲民, 而用或失人, 遂至於病民, 中外之官皆然, 而守令爲尤甚。 昔漢之用人, 必先試臨民之任, 宣帝嘗曰: “與我共理者, 其惟良二千石。” 其曰二千石, 以郡國之吏秩, 中二千石故也。 當是時, 朱邑由北海, 入爲大司農; 龔遂由渤海, 入爲水衡都尉; 尹翁歸由東海, 入爲右扶風; 韓延壽由東郡, 入爲左馮翊; 黃覇由穎川, 徵守京兆尹。 由是, 郡國多循良之吏, 而後之言良吏者, 稱漢爲首, 誠以褒賞之典行, 而有以激守令之心耳。 不唯漢爲然, 我朝列聖相承, 明賞罰之權、嚴黜陟之法, 而世宗大王嘗優待守令, 其考滿當遷, 必授右職, 以寵異之。 有以成三十(三)〔二〕年太平之治, 其不可以外吏而輕待之也, 明矣。
臣等謹稽新定《大典》, 文官四品以上不經守令不得陞資, 所以重守令之任, 而救外輕之弊也。 然而褒賞之典未行, 激勵之方未立, 而欲責守令之盡職, 不亦難乎? 今以內吏觀之, 典獄之官, 不過主囚; 典牲之吏, 不過掌牲。 其他百司之吏, 亦各有所掌, 初無浩穰繁劇之務, 而仕滿九百, 例陞前班。 守令獨分憂九重, 職最親民, 而仕滿一千八百, 類除散職, 或有罷職者。 如曰: “汝旣六年坐養妻孥, 今置閑散, 宜無不可。” 初不論曩時分憂之勞, 其何以勸守令之心乎? 無惑乎守令之不職, 而吾民之受病也。 伏望, 追惟世宗之遺意, 折衷漢氏之故事, 其待守令, 優於內吏, 其仕滿當遷, 考其等第, 十考十上者, 特除右職, 其他箇滿者, 亦宜優遷。 如有仁民、廉介, 顯有聲績者, 不次擢用, 則庶乎人皆自奮, 而守令皆循良矣。一。 巫覡之行乎世, 其來久矣, 誠不可一日而盡去之者也。 古者, 重黎絶地天之通, 商人戒酣歌之舞, 蓋聖王之世, 天下寧謐, 治象日昭, 彼區區之術, 似不必祛也。 然必絶之、戒之, 未嘗少容者, 亦懼其害吾之治、亂吾之化也。 世宗大王常患此, 驅而盡出之城外, 以斷妖妄之俗, 使不得肆行。 而因仍歲月, 禁網少弛, 巫女復得以雜居京城編戶之間, 敢誘士族家, 別立神堂, 稱爲祖父之神, 諂瀆鬼神, 遂成風俗。 甚者給與奴僕, 以充役, 使至以士族之婦女, 少有疾病, 稱爲避方, 動經歲月, 虧損婦道, 非美事也。 況招聚病人, 至令疫癘, 延及閭里者乎? 招集少艾, 名曰: ‘絃首。’ 叢酒肉之場, 恣歌舞之樂, 喧咽閭閻, 以誨淫爲事者乎? 又有空唱示靈, 驚駭聽聞, 其妖誕又甚矣。 非特此也。 有男人號稱花郞者, 售其誣詐之術, 漁取人財貨, 略與女巫同, 而爲術益幻, 其他悖理而背道, 愚弄士女, 使人邪惑, 敗毁禮俗者, 又不可以一二數也。 臣等聞, 氷炭不同器, 薰蕕不同室。 欲臻至理, 宜黜左道。 今殿下, 宵衣旰食, 勵精圖治, 恢弘大中之道, 一國之人, 方拭目, 淸明之治, 不可使妖妄之徒, 混雜於京城, 以汚首善之地也。 臣等伏願, 依世宗朝故事, 凡見在巫覡, 盡驅出城外, 放淫辭、息邪說, 幸甚。 一。 骨肉之恩, 天性也, 當隆而不當殺, 宜厚而不宜薄者也。 昔者周公使管叔監殷, 而終不能保焉。 或有問孟子者曰: “知而使之, 是不仁也, 不知而使之, 是不智也。 仁、智, 周公且未盡也。” 孟子對曰: “周公弟也; 管叔兄也。 周公之過, 不亦宜乎?” 孔子論九經曰: “尊其位、重其祿, 同其好惡, 所以勸親親也; 官盛、任使, 所以勸大臣也。” 於親親, 則但言尊位、重祿, 而官盛、任使, 則必於大臣言之。 孔子修《春秋》, 以爲萬世法, 而於齊侯, 使其弟年來聘, 不稱公子而稱弟, 以譏其寵愛之私; 於翬帥師會宋公, 則去其公子, 以謹履霜之戒。 蓋任之以事, 則必有得失, 失之極, 責必隨之, 恩斯傷矣。 聖人之志, 微且遠矣。 恭惟, 太祖、太宗立經、陳紀, 而於銓選之條, 乃曰: “宗親勿任事。” 以盡親親之道, 則祖宗之意, 亦可知矣。 聖人之訓旣如彼, 祖宗之法又如此, 而間因友愛之篤, 或使之典兵, 或使之赴試, 固不可以爲常法也。 不可爲常者, 其萬世之法乎? 立法垂訓, 爲可繼也。 伏願殿下, 一如孔子之訓、先王之法, 尊其位、重其祿, 同其好惡, 勿復任事, 荑親親之道, 彝倫幸甚。 一。 《經國大典》內: “文武官二品以上, 良妾子孫, 限正三品, 賤妾子孫, 限正五品; 六品以上, 良妾子孫, 限正四品, 賤妾子孫, 限正六品; 七品以下, 至無職人, 良妾子孫, 限正五品, 賤妾子孫及賤人爲良者, 限正七品。” 註云: “二品以上妾子, 許於司譯院、觀象監、典醫監、內需司、惠民署、圖畫署、算學、律學, 隨才敍用。” 是則其職固有限品, 而亦只於雜務敍用, 其所以明貴賤之別, 嚴嫡庶之分, 至矣。 近姜籌之妾子帶生爲豐儲倉主簿, 趙得琳之妾子成爲宣傳官, 而李伯常之妾子引錫兄弟, 亦皆許通。 夫豐儲倉主簿, 東班之顯秩也; 宣傳官, 近侍之任, 亦一國淸選也。 而必以妾子見授, 臣等未知帶生有何功能, 成亦有何賢, 而必不得已而用之耶? 縱使二人, 果有功且賢, 國法不可毁也, 朝廷不可辱也。 況非有顯顯可錄之事, 而至毁國法, 以敍顯秩? 臣等痛心。 夫立法, 所以垂示萬世, 朝廷是風化之源, 而殿下卽位之初, 首敍妾息, 以汚風化之源, 以毁萬世之法。 此法一毁, 而他日有欲如成、帶生之求用者, 殿下將何以待之? 夫聖人之法, 將欲牢籠一世, 使天下之人, 不敢有分外之望。 今《大典》限品之法, 亦其一事也, 而必欲施法外之恩, 以收一二竪子之懽心, 非計之善也。 伏望殿下更留三思, 守此之法, 堅如金石, 行此之令, 信如四時, 亟罷二人職事。 伯常之子, 亦勿許通, 以尊朝廷, 以抑非分之望。 一。 爵以命德, 官以治事, 固不可加之童子也。 稽之於古, 皋陶爲大禹, 論任官曰: “無曠庶官, 天工, 人其代之。” 周成王董正治官曰: “明王立政, 不惟其官, 惟其人。” 夫設官、分職, 所以代天理民, 苟非其人, 是曠天職, 非惟國家用人, 如是其重也, 士之自守, 亦不敢不學而冒進也。 昔公父文伯爲下大夫, 其母曰: “魯, 其衰矣。 使童子備官, 而未之聞也。” 子使漆雕開仕, 開曰: “吾斯之未能信。” 孔子皆賢之。 蓋事物當然之理, 必學然後明之; 舊章成憲, 亦必習然後知之。 不學、不習, 則其何以議事以制乎? 故聖王之用人也, 大賢授之大官, 小賢授之小官, 使之各稱其職。 我朝, 自西征、北伐, 堂上官旣多, 或有勳庸之嫡子, 不問賢愚, 例授堂上官, 於是朝廷之上堂上, 居其半焉。 且凡功臣子弟, 未免襁褓, 已授散官, 呼爲某郞; 年未十五, 授以祿官。
自幼及長, 唯知利祿, 不復知有禮義, 其父兄又曰: “何以利吾之子弟?” 營求百端, 不出家, 官秩已出朝士之右。 雖宗親, 必待成人, 乃授以職, 獨功臣之子如此, 其可乎? 國家知其弊, 於《經國大典》, 立二十授東班之法, 庶幾正之。 但年未二十授東班者及未十五授軍職者, 尙不改正, 得非欠事乎? 臣等請一皆汰去, 而自今年, 未十五, 雖散官亦不授, 定爲恒法, 如有違法冒授者, 必先罪銓曹, 竝論其父兄, 藺官爵猥濫之弊。 一。 士習, 不可不美; 民俗, 不可不厚。 是以, 聖帝、明王, 莫不立三綱、張四維, 護風俗如護元氣, 重名節如重鬼神也。 《周禮》師氏之官, 以三德敎國子: 一曰至德, 以爲道本; 二曰敏德, 以爲行本; 三曰孝德, 以知逆惡。 又以三行敎之: 一曰孝行, 以親父母; 二曰友行, 以尊賢良; 三曰順行, 以事師長。 古之所以敎士者, 必先於德行也。 又以鄕三物, 敎萬民而賓興之: 一曰六德, 智、仁、聖、義、忠、和; 二曰六行, 孝、友、睦、婣、任、恤; 三曰六藝, 禮、樂、射、御、書、數。 古之所以敎民, 亦必先於德行也。 是以, 士爲己學, 而不求人知; 民以孝悌爲心, 而淳風藹如也。 如閔子騫聞季氏以己爲費宰曰: “善爲我辭。 如有復我者, 吾必在汶上。” 董子曰: “正其誼, 不謀其利; 明其道, 不計其功。” 其篤志如此, 其父任執政, 不就庭試。 如韓維之恬退守道, 禮部奏第一, 而不肯越次自陳; 如范鎭之不汲汲於進取, 其操行如此, 今之士, 果如何哉? 如王祥之解衣、臥氷而雙鯉自躍, 孝娥之父溺哀號而投江抱屍, 其孝誠如此。 張公藝之九世同居, 田眞兄弟之不忍分財, 其厚俗如此。 今之民果如何哉? 九官、十二牧濟濟相讓, 虞朝之風盛矣; 士讓爲大夫, 大夫讓爲卿, 周廷之化美矣。 然而今之民, 卽三代所以直道而行者, 降衷、秉彝, 若有恒性, 安有不可化之人乎? 只在人君躬率敎導之如何耳。 《大學》曰: “堯、舜率天下以仁, 而民從之; 桀、紂率天下以暴, 而民從之。” 《孟子》曰: “君子之德, 風也; 小人之德, 草也。 草上之風, 必偃。” 伏願殿下, 好問、樂善, 貴德、尊士, 崇節義, 敦孝悌, 封忠臣、烈婦之墓, 旌孝子、順孫之閭。 又下敎各道觀察使, 廣刊《小學》、《三綱行實》, 人無大小, 皆令學之, 使知三德、三行、六德、六行。 至於爭財傷恩者懲之, 馳騖苟進者黜之, 怙侈滅義者抑之。 讒諂面諛者退之, 感發人之善心, 懲創人之逸志, 以正民風, 以正士習, 務以敎化爲先, 而又能推廣絜矩之道, 民之所欲與之, 所惡勿施, 節用、愛人, 輕徭、薄賦, 使之仰足以事父母, 俯足以育妻子, 則可以挽回世道, 轉移風俗, 天地可位, 萬物可育, 薰蒸透徹, 融液周徧, 諸福之物、可致之祥, 莫不畢至矣。 一。 《書》曰: “民惟邦本, 本固邦寧。” 《易》曰: “厚下安宅。” 然則欲安其宅, 而固其本, 當如何哉? 晁錯有言曰: “人情莫不欲壽, 三王生之而不傷; 人情莫不欲富, 三王厚之而不困; 人情莫不欲安, 三王扶之而不危; 人情莫不欲佚, 三王節其力而不盡。 此三王所以固結民心, 而傳祚悠久者也。” 唐太宗曰: “朕爲兆民之主, 日欲使之富貴。 若敎以禮義, 使之少敬長、婦敬夫, 則皆貴矣; 輕徭、薄賦, 使之各治生業, 則皆富矣。 若家給人足, 朕雖不聽管絃, 樂在其中矣。” 嘗謂公卿曰: “昔禹鑿山治水, 而民無謗讟者, 與民同利故也; 秦始皇營宮室, 而民怨叛者, 病人以利己故也。 夫美麗珍奇, 固人之所欲, 若縱之不已, 則危亡立至。 朕欲營一殿, 材用已具, 鑑秦而止, 至於修洛陽宮, 以備巡幸。” 而張玄素上書諫以爲: “陛下初平洛陽, 凡隋氏宮室之宏侈者, 皆令毁之, 曾未十年, 復加營繕, 何前日惡之, 而今日效之也? 陛下役瘡痍之卒, 襲亡隋之弊, 恐又甚於煬帝矣。” 太宗謂玄素曰: “卿謂我不如煬帝, 何如桀、紂?” 對曰: “若此役不息, 亦同歸于亂耳。” 太宗曰: “吾思之不熟, 乃至。” 於是顧謂房玄齡曰: “朕以洛陽土中, 朝貢道均, 意欲便民, 故使營之, 今玄素所言, 誠有理。 後日或至洛陽, 雖露居, 亦無傷也, 卽罷役。” 由是二十年間, 風俗素朴, 衣無錦繡, 公私富給。 蓋土木之役, 非但勞民, 亦且傷財, 雖豐歲, 固不可輕擧之也。 況時屈而擧贏乎? 我國, 比年以來, 使臣往來, 民旣勞止。
如光陵、英陵、昌陵、奉先寺、內佛堂之役, 相繼興作, 而懿敬廟、三淸殿之作則已矣。 若大倉則事非不得已, 而必擧於凶年, 又撤其民居, 以爲積穀之所, 臣等未知所以。 去歲、凶荒, 四方飢饉, 假令今歲稍稔, 尙未能足, 況今雨澤未洽, 今年之事, 亦未可知耶? 況空倉、虛庫, 猶未能充積, 雖在豐年, 亦不必作, 況凶年乎? 昔魯人爲長府, 閔子騫曰: “仍舊貫, 如之何? 何必改作?” 子曰: “夫人不言, 言必有中。” 聖人重民力之意, 可見矣。 伏願殿下, 商略緩急, 命停是役, 以息民力。 一。 內需寺漏落奴婢陳告事, 有不可不正者。 夫私家之奴隷, 其使也苦, 其貢也重。 私不見優於鄕里, 公不見護於州郡, 人情所欲避者也。 若內需司奴婢, 則閭閻推重, 守令優待, 吏卒不能侵也, 身役亦非重也, 人情所樂附者也。 人情莫不好榮而惡辱, 亦莫不避重而就輕, 果眞應屬之隷, 當初刷還之時, 何所厭憚, 而至于今, 逃避漏落乎? 以人情推之, 必無漏者, 雖有之, 亦豈多哉? 考之陳告者, 如金賜所陳三百七十餘口, 石衆一百八十餘口, 金南利六百餘口, 白同五百餘口, 其類不過七、八人, 常以陳告爲業, 而所知漏落之數, 其多如此。 凡人耳目所及有限, 何以知其五六百人根脚, 而以爲某乃某寺某奴婢之所生乎? 蓋奸詐之徒, 日倚市門, 思所以營生之術, 順人心之所欲, 而誘各司奴婢之厭役者曰: “汝何能堪任, 而供其役乎? 不如從我指導, 變汝根脚。 我告之, 汝應之, 則可使汝一朝升爲本宮奴婢, 不其幸乎?” 於是聞者欣慕曰: “我將得其所矣。” 轉誘諸族, 同聲相應, 各出財貨, 以賂告者, 而告者之家, 自此而富。 至於旣告之後, 若官吏據法, 少有難色, 從而刦之曰: “私家之訟, 亦且斷之, 何不致意於屬上之事, 而淹滯如是也?” 官吏亦(刦)〔怯〕於罪責, 事雖不明, 曲爲成就。 然私家奴婢, 或其主力辨而爭之; 若公處奴婢, 則初無辨爭者, 其奪屬尤易, 此告者之奸術所以易行也。 名雖陳告, 實則移錄, 而必賞以布帛, 是空棄府庫之財而已, 其可乎哉? 如趙異生輩, 僞造宣頭案, 事覺被罪, 亦一驗也。 如考各司正案, 則彼決屬數萬奴婢之父母、祖父母, 皆別有其名, 別有其役, 而非甘露等寺之奴婢, 不必勞力以辨之也。 彼各司奴婢, 亦國家奴婢爾。 何必移彼、屬此, 而空棄國幣, 以資奸民乎? 臣等請, 將陳告已屬奴婢, 而考已前正案內父祖姓名, 竝令改正, 還徵賞布, 自今現付各司正案者, 毋得陳告, 藺奸民謀利之計, 幸甚。 一。 諫諍之言, 不可不從也。 昔唐太宗問魏徵曰: “比年, 朝臣何不論事?” 對曰: “陛下虛心采納, 必有言者。 凡臣徇國者少, 愛身者多, 彼畏罪, 故不言。” 太宗曰: “然。 人臣關說忤旨, 動及刑誅, 與夫蹈湯火、冒白刃者, 亦何異哉? 禹拜昌言, 良爲此也。” 唐德宗謂陸贄曰: “諫官論事, 少能愼密, 例自矜衒, 歸過於朕, 以自取名。 朕卽位以來, 見論事甚多, 皆是雷同, 試加質問, 遽卽辭窮。” 贄對: “爲下者, 莫不願忠; 爲上者, 莫不求理。 然而下恒苦上之難達, 上恒苦下之難知, 若是者何? 九弊不去故也。 所謂九弊者, 上有其六, 而下有其三: 好勝人、恥聞過、聘辯給、衒聰明、厲威嚴、恣剛愎, 此六者, 君上之弊也; 諂諛、顧望、畏愞, 此三者, 臣下之弊也。 (仲尫)〔仲虺〕贊揚成湯, 不稱其無過, 而稱其改過; 吉甫歌頌周宣, 不美其無闕, 而美其補闕。 諫者之狂誣, 明我之能恕; 諫者之漏洩, 彰我之能從。 有一于此, 皆爲盛德也。” 德宗頗用其言。 殿下以聰明之資, 加精一之學, 凡言官論事, 每加優納, 言雖不中, 亦不加罪, 俗方萬姓之福也。 然唐太宗號稱英明之主, 尙賴魏徵之言, 以成貞觀之治。 至於欲伐高麗, 而徵以爲不可。 徵沒, 太宗思徵之功, 許以徵子叔玉尙主, 親製碑樹之, 會讒言一起, 而停婚、仆碑。 及伐高麗無功, 乃深悔嘆曰: “魏徵若在, 不使朕有是行也。” 何其疑之易, 而悔之速也? 夫良藥苦口而利於病,忠言逆耳而利於行。
故諫者之言, 初若拂意, 而他日之利, 有不可以一二計焉者。 況其言爲國計, 非爲一身計也, 太宗之悔, 不亦宜乎? 《書》曰: “惟木從繩則正, 后從諫則聖。” 若君出言自以爲是, 而卿大夫莫敢矯其非, 卿大夫出言自以爲是, 而士庶人莫敢矯其非, 交相諂諛, 務以相悅, 則其何以保人民、社稷? 而國家之事, 將日非矣。 伏願殿下益恢從諫之量, 有忤旨之時, 必思唐太宗思魏徵之諫之心, 愼終如始, 則人民幸甚, 社稷幸甚。 臣等所陳時宜各條, 皆因循故常, 失其大體, 然殿下新服厥命, 當新厥政。 《易》泰之九二, 周公論治泰之道曰: “用馮河, 朋亡, 得尙于中行。” 蓋人情狃於故常, 憚於更變。 若無馮河之勇, 則不能挺特奮發, 以革其弊, 故曰 “用馮河”; 自古立法、制事, 牽於人情, 卒不能行者多矣, 故曰 “朋亡。” 臣等先陳因循之弊十六條, 而終之以從諫一節, 蓋欲殿下行之勇決而無疑也。 伏願殿下离明夬斷, 革舊、鼎新, 以興至治, 東方幸甚。上嘉納之。
성종 47권, 5년(1474 갑오/명성화(成化)10년) 9월 26일(무인) 3번째기사
유생 이종근등이 상소하여 문묘를 배알하고 인재를 시험하여 취하기를 청하다
유생(儒生) 이종근(李從根)등이 상소하기를,
“‘십실(十室)4423)의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5백년 큰 도읍가운데 어찌 유신(有莘)4424)에서 밭을 가는 이윤(伊尹)과 위빈(渭濱)에서 낚시질하는 강태공(姜太公)같은 자가 없겠습니까? 좋은 옥(玉)이 반드시 형산(荊山)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좋은 말[馬]이 반드시 기북(冀北)4425)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인재(人材)가 없는 곳이 없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진전(眞殿)4426)과 문묘(文廟)가 서로 거리가 겨우 1리인데, 만약 전하께서 진전에 제사하고 문묘에 제사하지 아니하면 전하께서 스승을 높이고 전통(傳統)을 중히하는 뜻에 어찌 한 흠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노(魯)나라를 지나다가 공자(孔子)를 제사하였고, 우리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서도(石)4427)에 거둥하여 문묘에 배알하고 과거를 보여 인재를 뽑았으니, 이는 고금에 거룩한 일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 멀리 옛일을 상고하고 가까이는 지금을 이어 닦아서 문묘를 겸하여 배알하고 인재를 시험해 취하시면 신등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의 다행입니다.”하니,
전지하기를,
“이 땅에 인재(人才)가 적어서 취사(取士)4428)할 수가 없다. 다만 세조께서 알성(謁聖)4429)한 전규(前規)를 원상(院相)에게 물어보라”하자,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홍윤성(洪允成), 윤자운(尹子雲)이 아뢰기를,
“병자년4430)에 세조께서 여기에 순행해 이르러 알성(謁聖)하지 아니하고 평양에 이르러 알성하였으니, 먼 데 있는 도(道)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경도(京都)4431)는 성균관(成均館)이 있고 개성부는 기내(畿內)4432)에 있으니, 평양의 먼 도에 비할 것이 아니므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하고,
도승지 신정(申瀞)이 아뢰기를,
“세조께서는 평양에 뜻이 있었으므로 여기에 머무를 겨를이 없었으나,
전하께서는 이 도성(都城)4433)에만 거둥하셨으니,
청컨대 알성(謁聖)하고 겸하여 유생을 잔치하소서.”하니,
전지하기를,
“가(可)하다”하였다.
註4423]십실(十室):열집 註4424]유신(有莘):옛 중국의 땅 이름 註4425]기북(冀北):말의 산지임 註4426]진전(眞殿):목청전 註4427]서도(石):평양 註 4428]취사(取士):과거시험 註4429]알성(謁聖):문묘 배알 註4430]병자년: 1456 세조2년 註4431]경도(京都):서울 註4432]기내(畿內):경기 안 註4433]도성(都城):개성부.
○儒生 李從根 等上疏曰:
十室之邑, 必有忠信, 況五百年大都之中, 豈無耕 有莘 釣 渭濱 者乎, 良王不必在於 荊山 , 良馬不必在於 冀北 , 人材之無處無之, 亦猶是也。 眞殿 與 文廟 相去僅一里, 若殿下祭眞殿而不祀文廟, 則殿下隆師重傳之意, 豈非一欠歟, 昔 漢 高 過 魯 , 而祀 孔子 , 越我 世祖大王 幸石, 而謁文廟取人才, 此古今盛事也。 願殿下遠稽諸古, 近述諸今, 兼謁文廟, 試取人才, 則非徒臣等之幸, 抑亦國家之幸。
傳曰: “此地人才少, 不可取士也。 但 世祖 謁聖前規, 其問諸院相。” 申叔舟 、 韓明澮 、 洪允成 、 尹子雲 啓曰: “丙子年, 世祖 巡臨于此, 不謁聖, 至 平壤 謁聖, 以其遠道也。 今京都有成均館而 開城府 在畿內, 非 平壤 遠道之比, 不必爲也。” 都承旨 申瀞 啓曰: “ 世祖 志在 平壤 , 不遑於此, 今殿下只幸此都, 請謁聖兼饗儒生。” 傳曰: “可。”
성종 72권, 7년(1476 병신/명성화(成化) 12년) 10월 21일(신묘) 8번째기사
박효원 등이 명군병, 선명후암군병, 현비병의 세 개의 병풍을 바치다.
병풍의 내용
이보다 앞서, 현명(賢明)한 임금과, 앞서는 현명했다가 암군(暗君)이 된 이와, 현비(賢妃)의 사적(事跡)을 세 개의 병풍6668)에 그려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제목(題目)을 나누어 시(詩)를 짓게하고, 또 장령(掌令) 박효원(朴孝元), 응교(應敎) 유순(柳洵), 진사(進士) 성담수(成聃壽)에게 명하여 사적과 시를 그 위에 쓰도록 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효원등이 써서 바치니, 어의(御衣) 각각 한벌씩을 내리고 이어 선온(宣醞)6669)을 대접했다.
○명군병(明君屛)
신농도(神農圖)
신농(神農)은 천지(天地)의 도(道)를 알고 인성(人性)에 밝아서 천하(天下)를 가지게 되었다. 옛날에는 백성들이 나물먹고 물마시며, 나무열매를 따먹고 소라[蠃],조개[蚌] 따위의 고기를 먹고 살았었는데, 신농은 인민(人民)이 많아서 그것으로는 오래 먹고살기 어렵다고 여겼다.
그래서 백성에게 오곡(五穀)심는 것을 가르치고 뇌사(耒耜)6670)와 서호(鉏鎒)6671)를 만들어서 풀밭을 개간하게 한 연후에 오곡이 흥성하게 되었다. 영을 내리기를,
“장부(丈夫)들이 장성하여 경작(耕作)을 아니하면 천하에 주리는 자가 있을 것이고, 부인(婦人)들이 많이 있으면서 길쌈을 아니하면 천하에 추위에 떠는 자가 있을 것이다”하였다.
그래서 신농이 몸소 농사짓고 후비(后妃)가 몸소 길쌈하여 천하에 솔선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그 옛날 염제(炎帝)6672)가 천하를 다스리며,
신교로써 신공(神功)을 세웠네.
백성들의 배부름과 주림은 농사에 달렸으며,
세상사람 춥고 따뜻함은 여공(女工)에 달려있네.
옥이나 구슬비도 세상엔 소용없어,
농사짓고 길쌈함을 백성과 함께 했네.
천년을 두고 삼퇴례(三推禮)6673)를 다행히 보겠구나.
신농의 법을 취하여 시종을 보전하고 싶네.”하였다.【현석규(玄碩圭)】
제요도(帝堯圖)
제요(帝堯)는 황수(黃收)6674)와 치의[純義]6675), 동거(彤車)6676)와 백마(白馬)를 사용하고, 모자(茅茨)6677)를 가지런하게 자르지아니하고 흙으로 만든 계단이 세 층이었으며, 임금의 도리에 힘쓰면서 정사(政事)를 펴는 궁(宮)을 지어 구실(衢室)이라 하였으며, 비방(誹謗)하는 나무를 세워 온 세상 사람들이 하고싶은 말을 다할 수있게하고, 진선(進善)하는 기(旗)를 세워 온세상 사람들이 그 재주를 다할 수 있게 하였으며, 간고(諫鼓)6678)를 조정(朝廷)에 걸어두고 세상에서 임금의 잘못을 충간할 수 있게 하였다.
한 사람의 백성이 주려도 내가 주리게 했다고 여기고 한 사람의 백성이 추위에 떨어도 내가 춥게했다고 여기니, 그로 해서 백성들이 추대하기를 해와 달같이 하고 친하기를 부모같이 하였다.
어떤 노인(老人)이 땅을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휴식하네. 밭에 농사지어 먹고 우물의 물길어 마시는데, 임금이 우리에게 무슨 힘이 되는가?”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날마다 눈이시게 옛 역사 읽어봐도,
제요(帝堯)같은 어진 성군, 세상에 다시없네.
흙 계단 띠 지붕의 검소한 생활이며,
비방하는 나무에다 간고(諫鼓)까지 설치했네.
온누리 화평케한 지극한 정치,
사악(四岳)6679)에게 모든 것을 자문하였네.
높고 넓은 그의 덕이 하늘처럼 커,
멀거나 가깝거나 한맘으로 귀의하네하였다.【홍응(洪應)】
제순도(帝舜圖)
제순(帝舜)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먼 곳 사람을 구휼(救恤)하고 가까운 곳 사람을 친하며, 묻기를 좋아하여 이언(邇言)도 살피기를 좋아하며, 나쁜 것은 덮어주고 좋은 것은 드러내주며, 양단(兩端)6680)을 잡아 그 중도(中道)를 백성에게 적용했다.
당시 해와 달이 유난히 빛나고 경운(卿雲)6681)이 모였다.
순(舜)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며 남풍시(南風詩)를 노래하기를,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불만을 풀어주도다. 남풍의 때맞음이여, 우리 백성의 곡식을 풍부하게 하여주네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온 세상이 역수(曆數)6682)가 돌아옴을 칭송하니,
그 중화(重華)6683) 오래도록 높이높이 우러르네.
경운은 뭉게뭉게 천장(天丈)6684)에 드리우고,
서일(瑞日)은 찬란하게 진의(袗衣)에 비치도다.
많은 업적 이룩될 때 단면(端冕)이 장엄하고,
오현금을 타는 곳에 봄바람 살랑살랑.
남풍 한 곡조에 민온(民慍)이 다 풀리니,
넓고 큰 인덕(仁德)이 천하에 두루 찼네”였다.【홍귀달(洪貴達)】
대우도(大禹圖)
우(禹)는 오음(五音)으로 정사를 처리하였다.
종(鍾),고(鼓),경(磬),탁(鐸),도(鞀)를 매달아놓고 사방의 선비를 기다리는데, 순거(簨簴)6685)에 새기기를,
“과인(寡人)을 도(道)로써 가르치려는 자는 고(鼓)를 치고, 의(義)로써 논(論)하려는 자는 종(鍾)을 치고, 일을 고(告)하려는 자는 탁(鐸)을 흔들고, 근심을 말하려는 자는 경(磬)을 두드리고, 옥송(獄訟)이 있는 자는 도(鞀)를 흔들라.”하였다.
한번 밥먹을 동안에 여남은 번씩 일어나고, 한번 목욕하는 동안에 서너번씩 머리를 움켜쥐고서 천하의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밖에 나가다가 죄인(罪人)을 보고서 수레에서 내려 사연을 물으면서 눈물을 흘리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죄인이 도를 따르지않았는데, 군왕(君王)께서 어찌 하여 슬퍼하십니까?”하니, 우왕이 말하기를,
“요(堯), 순(舜)때의 사람은 다 요, 순과 같은 마음으로 마음을 가졌는데, 과인이 임금이 되고서는 백성이 각자가 자기의 마음으로 마음을 가진다.
그래서 슬퍼한다”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그 당시의 발자취가 천하에 두루두루,
갖은 고생 겪으면서 큰 업적을 이룩했네.
북과 종을 치게 하여 다스리는 도리,
도(鞀)와 탁(鐸)을 울리게 하여 민간 실정 펴게했네.
안타깝게 죄를 물어 깊은 사랑 남기었고,
토악(吐握)6686)하며 사람맞아 지성을 보이었네.
요, 순 때만 못하다고 수치로 여긴 마음,
지금까지 그 덕화를 이름하기 어려워라”하였다.【홍귀달(洪貴達)】
성탕도(成湯圖)
탕(湯)은 들에 나갔다가 야인(野人)이 사면(四面)에 그물을 펴놓고 축원하기를,
“천하 사방에서 모두가 나의 그물로 들어오라.”하는 것을 보고,
탕임금은 그물의 삼면(三面)을 제거하고 빌기를,
“좌(左)로 가고 싶으면 좌로 가고 우(右)로 가고 싶으면 우로 가고, 그렇지않은 자는 나의 그물로 들어오라.”하였더니,
제후(諸侯)들이 듣고 이르기를,
“탕의 덕(德)이 지극하다.”하고,
귀의(歸依)한 것이 40여 나라였다. 그 당시 7년이나 크게 가물었었는데,
태사(太史)가 점을 치고서 하는 말이,
“마땅히 사람을 제물로 기도해야 합니다”하니, 탕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를 비는 것은 백성을 위함인데, 만약 사람을 제물로 기도해야 된다면 내가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하고,
드디어 재계(齋戒)하고, 손톱 깎고 머리를 자르고 소거(素車)와 백마(白馬)로, 몸에 흰 띠[茅]를 두르고 몸소 희생(犧牲)6687)이 되어 상림(桑林)의 들에 나아가 기도하면서 여섯 가지 일로 자책(自責)하기를,
“정치를 절도(節度)있게 못했는가? 백성이 직업(職業)을 잃었는가?
궁실(宮室)이 사치스러운가? 여알(女謁)6688)이 기세를 부리는가?
포저(苞苴)6689)가 성행(盛行)하는가? 참부(讒夫)6690)가 번창하는가?”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방 수천리에 큰 비가 내렸다. 시(詩)에 이르기를,
“하(夏)나라 덕이 쇠할 때, 해도 망하고자,6691)
인심과 천명이 성탕에게 돌아갔네.
칠년의 가뭄에 백성 근심 간절했고,
여섯 가지 일 두려워하여 자신 책망 세밀했네.
한결같은 지성은 힐향(肸蠁)6692)이 감동하고,
온 들에는 단비가 흠뿍 쏟아졌네.
그물에 빌 때부터 어진 마음 커져서,
상나라의 혁엽(奕葉)6693)이 터전을 마련했네”하였다.【현석규(玄碩圭)】
상고종도(商高宗圖)
고종(高宗)은 즉위(卽位)하여 은(殷)나라를 부흥(復興)시키기를 생각하였으나 보좌(補佐)를 얻지못하여 2년이나 정사(政事)를 말하지않고 총재(冢宰)에게 재결(裁決)하게 하고, 국가의 기풍을 관찰하고 있었다.
고종이 꿈에 성인(聖人)을 얻었는데, 이름은 열(說)이었다.
그래서 꿈에 본 것을 가지고 신하와 관리들을 대조해 보았으나 모두 아니었으므로, 이에 그 모습을 그려서 그 형상을 가지고 백공(百工)을 시켜 시골에서 찾게하여 부암(傅巖)이란 바위 밑에서 열을 찾았는데, 같이 대화를 하여 보니 과연 성인이었다.
그를 등용하여 재상(宰相)을 삼았더니 은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시(詩)에 이르기를,
“높고 높은 탕왕의 덕 견줄 데가 없더니,
고종의 빛난 업적 전대에 못지않네.
삼년동안 말이 없이 치도(治道)를 생각했고,
어느 날 밤 뜻밖에도 대현(大賢)을 꿈꾸었네.
큰 솥을 조화시키는 양념이 되었으며,
넓은 내를 건너게 하는 수운(水運)역할하였네.
만약 서미(胥靡)6694)가 암혈(巖穴)속에 묻혔더라면,
은나라가 어떻게 육백년을 누렸으랴!”하였다.【홍귀달(洪貴達)】
주문왕도(周文王圖)
문왕(文王)때에 여상(呂尙)이란 이가 있었는데, 나이 80여세에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였다.
문왕이 사냥을 가려고 점을 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사냥할 것은 용(龍)도 아니며, 이무기[彲]도 아니며, 범[虎]도 아니며, 곰[熊]도 아니고, 왕자(王者)의 보좌(補佐)입니다”하였다.
드디어 사냥을 나가 반계(磻溪)에 이르러서 과연 여상을 만나 같이 수레를 타고 돌아와 스승을 삼았다. 일찍이 못을 파다가 썩은 뼈가 나왔는데,
명하여 장사(葬事)하게 하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이것은 주인이 없는 것입니다.”하니, 문왕이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천하(天下)의 주인이고 제후(諸侯)는 한 나라의 주인인데, 과인(寡人)은 진실로 뼈의 주인이다.”하고,
드디어 장사지내 주었다. 천하에서 그 말을 듣고,
“서백(西伯)6695)의 인덕(仁德)은 썩은 뼈에까지 이르렀는데, 하물며 산 사람이겠는가?”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주(周)나라의 기업(基業)조성 문왕 때 높았으니,
삼분한 천하에서 하나를 차지했네.
기산(岐山)까지 감화된 덕화에 봉황이 울었으며,
위수에 어린 상서는 보필을 얻었도다.
천자의 덕은 영대(靈臺)에서 전파되고,6696)
주역(周易)의 이치는 유리(羑里)에서 연구했네.6697)
묻지 말라, 생민이여. 성인 은혜입은 것을,
구원의 마른 뼈도 그 은혜 입었다네.”하였다.【김유(金紐)】
무왕도(武王圖)
무왕(武王)이 주(紂)를 칠 때 상교(商郊)에 진(陣)을 치고 하늘의 큰 명을 기다렸는데, 주가 저의 군사를 수풀처럼 거느리고 와서 목야(牧野)에서 마주쳤으나, 무왕의 군사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고 앞장선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쥐고서 뒤따른 저희 군사를 치면서 달아나니,
피가 흘러 방앗고가 뜰 정도였다.
한번 융복(戎服)을 입고 온 천하를 평정했는데, 이에 상(商)나라의 옛 정치를 되돌려주어 정치는 옛 법대로 따르게 하고, 기자(箕子)의 옥살이를 풀어주고 비간(比干)의 무덤을 봉해 주며, 녹대(鹿臺)의 재물을 흩어 주고,
거교(鉅橋)의 곡식을 풀어서 사해(四海)에 크게 나누어주니,
만백성이 열복(悅服)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천심과 인심에 순응하여 독부(獨夫)6698)를 문죄(問罪)하니,
앞섰던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쥐고 달아났네.
땅속의 넋들도 응당 한을 풀었으며,
구속했던 충신들 모두 풀려났네.
말과 소는 목야로 돌려보냈고,
재물과 곡식은 외로운 백성에게 나눠주었네.
만약 기자(箕子)를 찾아 홍범(洪範)6699)을 전하지 않았다면,
이륜(彝倫)의 차례가 정해졌을까?”하였다.【이극배(李克培)】
한문제도(漢文帝圖)
문제(文帝)는 처음엔 대왕(代王)에 봉(封)해져서 대(代)에서 검박하게 지냈다. 주발(周勃)등이 이미 여러 여씨(呂氏)6700)를 주벌(誅伐)하고 대왕(代王)을 맞이하여 천자(天子)로 세우려 할 때 왕이 송창(宋昌)에게 명하여 참승(驂乘)6701)케하고 장무(張武)등 6인에게 전거(傳車)를 타고 장안(長安)에 가게하고, 대저(代邸)6702)에 이르러서 천자에 즉위(卽位)하였다.
그날 저녁에 미앙궁(未央宮)에 들어가서 그날 밤 송창을 제수(除授)하여 위장군(衛將軍)을 삼아 남북군(南北軍)을 진무(鎭撫)케하고, 다시 전전(前殿)에 좌정(坐定)하여 조서(詔書)를 내려 천하(天下)에 대사(大赦)하였다.
원년(元年 B.C.179)에 천리마(千里馬)를 바치는 자가 있었는데,
문제가 말하기를,
“앞에는 난여(鑾輿), 뒤에는 속거(屬車)로, 길행(吉行)은 하루에 50리, 사행(師行)은 하루에 30리를 가는 것인데, 짐(朕)이 천리마를 타고서 혼자 먼저 어디를 가겠는가?”하고,
그 말과 가지고온 도리비(道里費)6703)를 주고 하조(下詔)하기를,
“짐은 바치는 물건을 받지않을 것이다. 사방에 명하여 바치지말게 하라.”하였다. 조회 때마다 낭종관(郞從官)이 서소(書疏)를 올리면 연(輦)을 멈추고 그 말을 받아들이지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 말이 쓸 수 없으면 그냥 두고, 그 말이 쓸만하면 채택하여 칭찬하지않은 것이 없었다.
시(詩)에 이르기를,
“본래의 공검함이 백성에 임할 만한데,
더구나 교만과 사치를 받아들이지 않음에랴!
기이한 물건이 뜻을 빼앗지 못하고,
착한 말이라야 마음에 들어가네.
취화(翠華)6704)가 머무는 곳은 모두 아름다운 명,
단조(丹詔)6705)가 내리는 때엔 모두가 덕음이었네.
앉아서 제봉(提封)6706)을 이루어 부유함을 열었으니,
비로소 청정함이 백성을 깊이 감화시킨 줄 알겠네”하였다.【최숙정(崔淑精)】
당태종도(唐太宗圖)
태종(太宗) 때에 기내(畿內)에 황충(蝗蟲)이 있었다.
임금이 원중(苑中)에 들어갔다가 황충을 보고 몇 마리를 잡아서 빌기를,
“백성은 곡식으로 생명을 부지하는데, 네가 곡식을 갉아먹으니,
차라리 나의 폐장(肺腸)을 파먹어라.”하고,
그것을 삼키려 하니, 좌우에서 간(諫)하기를,
“그것은 악물(惡物)이니, 병환이 될까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짐이 백성을 위해 재앙을 받는다면 어떤 병인들 피하겠느냐?”하고,
드디어 그 황충을 삼켰는데, 그 해에 황충의 재앙이 없어졌다.
임금은 궁녀(宮女)가 너무 많이 깊은 궁중에 갇혀 있음을 민망하게 여기어,
“소제(掃除)하는 일외에 소용이 무엇인가?”하고서,
액정(掖庭)의 서문(西門)에 관리를 보내어 가려서 내어보내게 했는데,
전후(前後)하여 나간 것이 3천여명이었다. 또 임읍(林邑)에서 오색(五色)의 앵무(鸚鵡)를 바치고, 신라(新羅)에서는 미녀(美女) 2명을 바쳤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임읍의 앵무도 오히려 스스로 괴롭고 추운 것을 말하며, 제 나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친척을 멀리 떠나온 두 미녀이겠는가?”하고,
앵무와 함께 각각 사신을 딸려서 돌아가게 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업성(鄴城)6707)의 궁전에 석양이 비끼니,
진저(晉邸)의 풍운이 천하에 가득했네.
십만의 의병은 일표(日表)6708)를 따랐고,
삼천의 궁녀는 초방(椒房)6709)에서 나왔네.
고향그리는 농(籠)중의 새를 놓아보내고,
농사해치는 황충을 입으로 삼켰네.
이 모두 인의(仁義)를 힘써 행한 효과이니,
정관(貞觀)의 다스림6710)은 당(唐), 우(虞)6711)에 비등했네.”하였다.
【임원준(任元濬)】
○선명후암군병(先明後暗君屛)
오부차도(吳夫差圖)
오왕(吳王) 합려(闔廬)가 월(越)나라를 치니,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마주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켰다.
영고부(靈姑浮)가 창으로 합려를 쳤는데, 합려가 그 상처의 병으로 죽으려 할 때 그의 아들 부차(夫差)에게 말하기를,
“월나라를 잊지말라.!”하였다.
부차가 왕이 되고서는 사람을 뜰에 세워 놓고 출입을 할 때는 반드시 자기에게 이르게 하기를,
“부차야, 너는 월왕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는가?”하면,
곧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감히 잊지않았습니다.”하고,
언제나 월나라를 보복하기로 마음을 먹고 이에 정병(精兵)을 모두 동원하여 월나라를 쳐서 부초(夫椒)에서 격파시켰다.
월왕은 이에 갑병(甲兵) 5천을 데리고 회계(會稽)에 서식(棲息)6712)하면서 서시(西施)를 바치고 군사가 물러나도록 청하니,
오왕이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를 허락했다【선명(先明)】
시(詩)에 이르기를,
“오나라와 월나라가 번갈아 서로 삼켜,
이기고 진 승부가 한 판국 그림이라.
두 나라 산하에 군대가 들끊었고,
선왕의 해골은 핏발로 얼룩졌네.
원수를 못갚으면 마음이 편할손가?
서로가 경계하여 변치 않길 맹세했네.
부초(夫椒)로 달려가서 설욕을 하였으니,
회계는 그 당시 안중에 없었네.”하였다.【서거정(徐居正)】
부차가 이미 서시(西施)를 얻고는 3백길[丈] 높이의 고소대(姑蘇臺)를 쌓고 그 위에서 잔치놀이를 하니, 오자서(伍子胥)가 간(諫)하기를,
“신(臣)은 오래지않아 이곳에 미록(麋鹿)이 놀게될까 걱정입니다”하였는데, 왕(王)은 듣지않고 촉루검(蜀鏤劍)으로 죽게하니, 죽어가면서 말하길,
“나의 무덤[墓] 위에 가(檟)를 심어서 기구(器具)6713)를 만들 수 있게 하고, 나의 눈을 뽑아 오나라 동문(東門)에 걸어두고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킴을 보게 하라”하니, 왕이 성을 내며 말하기를,
“나[孤]6714)는 대부(大夫)로 하여금 볼 수 없게 하겠다.”하고,
오자서의 시체를 가져다가 치이(鴟夷)6715)에 담아서 강물에 던졌는데,
오나라가 마침내 월나라에게 멸망당했다.【후암(後暗)】
시(詩)에 이르기를,
“부초에서 혈전하여 성공하고 돌아와,
미녀들을 데리고 높은 대에 노닐었네.
너울너울 춤추는 소매 하늘로 올라가고,
구성진 노래소리 기러기에 섞여오네.
그 당시 미인들은 적막하게 되었는데,
지금 강위에는 달만이 배회하네.
가련타, 그 옛날 동문에 눈을 매달라는 오자서도,
성난 파도되어 언덕을 치며 맴도네.”하였다.【유순(柳洵)】
한무제도(漢武帝圖)
무제(武帝)는 처음 즉위(卽位)하여, 현량(賢良)하고 방정(方正)하며, 직언(直言)으로 극간(極諫)하는 선비를 등용하려고 친(親)히 책문(策問)하였고, 신불해(申不害), 한비(韓非), 소진(蘇秦), 장의(張儀)의 말을 하는 자는 모두 파출(罷黜)하라는 조칙(詔勅)을 내렸다.
임금이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조관(趙綰)이 그의 스승 신공(申公)을 추천하니, 임금이 사자(使者)를 시켜 안거포륜(安車蒲輪)6716)을 받들고 비단에 구슬[璧]을 더하여 그를 맞이하였다.【선명(先明)】시(詩)에 이르기를,
“지극한 말은 중론에서 듣고,
현량과의 책문(策問)으로 사방의 문을 열었네.
소진, 장의 배척하고 이단(異端)을 멀리하며,
주공, 공자 표장하여 유학을 숭상했네.
구휼하는 조서내려 은혜가 흡족했고,
폐백으로 어진이맞는 예절이 은근했네.
만약 힘써 실천으로 정치근본 삼았더면,
높은 업적 어이하여 한나라 명군에 그쳤으랴!”하였다.【임사홍(任士洪)】
무제는 방사(方士)인 공손경(公孫卿)의 말을 듣고, 장안(長安)의 감천(甘泉)에 비렴관(蜚廉觀), 계관(桂觀), 통천대(通天臺)를 짓게하고, 공손경으로 하여금 부절(符節)을 가지고 기구를 베풀어 놓고서 신인(神人)을 기다리게하며, 모든 궁실(宮室)을 넓히고, 백량대(柏梁臺)를 짓고 승로반(承露盤)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20장(丈)이고 크기는 7위(圍)이며, 구리[銅]로 만들었다. 위에 선인장(仙人掌)이 있어 이슬을 받는데, 거기에 옥(玉)가루를 타서 마시면 오래산다고 했다. 무제가 후씨(候氏)6717)에 가서 중악(中岳) 태실(太室)에 제(祭)를 지냈는데, 종관(從官)들이 산밑에서 만세(萬歲)소리 삼창이 들리는 듯하다하므로 조칙(詔勅)하여 태실사(太室祠)를 증축(增築)하게하였다.
그리고 동해상(東海上)에 순행(巡行)하여 신선(神仙)을 찾으며 태산(泰山)을 봉하고 숙연산(肅然山)에 제사지냈다.
그리고 다시 동북(東北)으로 갈석(碣石)까지 갔다가 돌아왔다.【후암(後暗)】
시(詩)에 이르기를,
“백척의 동대는 자줏빛 연기에 싸이고,
시신은 언제고 백량편(柏梁篇)6718)을 받드네.
신마(神馬)가 음보(音譜)전함6719)을 이미 즐겼는데,
흉노가 변경 침범함을 다시 한하였네.
제사파한 감천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약없는 봉도(蓬島)에서 신선을 찾을쏜가?
소고울리며 횡분(橫汾)한 즐거움6720)을 그 누가 알 것인가?
오늘날 다시 찾으니 옛일이 되었구려”하였다.【월산대군(月山大君)】
진무제도(晉武帝圖)
무제(武帝)가 처음 즉위(卽位)한 것은 위(魏)나라의 각박(刻迫)하고 사치(奢侈)한 뒤였으므로, 이를 인덕(仁德)과 검소(儉素)로써 바로잡으려고 하였다.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수레끄는 소의 청사(靑絲)6721)로 된 가슴걸이가 끊어졌습니다.”하니,
명하기를,
“청마(靑麻)로 대치하라.”하였다.
또 태의(太醫) 사마정거(司馬程據)가 치두구(雉頭裘)를 바쳤는데,
무제는 궁전(宮殿)앞에서 불사르게 하고, 내외(內外)에 칙명(勅命)하여,
감히 이상한 기교(技巧)와 기이한 의복(衣服)을 바치는 자가 있으면 죄를 주게하였다.【선명(先明)】시(詩)에 이르기를,
“동작대(銅雀臺)는 기울어서6722) 왕기가 쇠하니,
진왕이 창업하여 정신을 차릴 땔세.
사치한 전조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였고,
어질고 검소함은 천하가 다 알았네.
꿩털의 갖옷은 불에 던지고,
푸른 실 가슴걸이를 새로 고쳐 갈았네.
석두성(石頭城)6723) 한구석에 항복의 기를 세우게 했으니,
성공한 그 의기를 버리지 마오.”하였다.【김흔(金訢)】
무제가 이미 오(吳)나라를 평정하고서는 자못 놀이를 일삼아 정사(政事)를 게을리 하였다. 손호(孫皓)6724)의 궁인(宮人) 5천명을 선발하여 궁(宮)에 들이게하여 액정(掖庭)6725)이 만인(萬人)이 될 정도였다.
늘 양거(羊車)를 타고서 마음내키는대로 다니며 편리한 대로 잔치를 베풀고 거기서 자기도 하니, 궁인(宮人)들이 저마다 댓잎을 문에 꽂고 소금물을 땅에 뿌려서 임금의 수레를 유도하였다.【후암(後暗)】시(詩)에 이르기를,
“금릉(金陵)6726)을 파하고부터 차츰 교만해져,
여색에 빠지므로 정사에 게을렀네.
오천명의 궁녀를 오궁(吳宮)에서 선발했고,
열둘의 누대는 진전(晉殿)에 드높았네.
짐연(鴆宴)을 베풂은 탐욕에서 온 것인데,6727)
양거가 가는 곳에 몇 밤이나 보냈던가?
유연(流連)6728)함은 원래 포상의 계획이 못되는 것,
오마(五馬)의 집안에 화는 끊이지않았네.6729)”하였다.【서거정(徐居正)】
당현종도(唐玄宗圖)
현종(玄宗)이 처음 즉위하여서는 풍속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하여 수레와 복식(服飾)을 제한하여 유사(有司)로 하여금 금은(金銀)의 완구(玩具)를 녹여서 군국(軍國)의 용도에 공급하게 하였으며, 주옥(珠玉)과 금수(錦繡)를 궁전앞에서 태우게 하였다.
또 주옥을 캐는 것과 조각을 하여 완구를 만드는 것을 금하였으며, 직금방(織錦坊)도 다시 폐지시켰다. 현종은 원중(苑中)에 보리를 심어놓고 황태자 이하를 거느리고 몸소 수확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종묘(宗廟)에 올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손수하는 것이며, 또한 너희들로 하여금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하고,
이어 시신(侍臣)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말하기를,
“근년에 사람을 시켜 볏모[苗稼]를 순시하여 검사하게 했으나 대답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않은 것이 많으므로, 내가 직접 심어서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또 《춘추(春秋)》에는 맥(麥),화(禾) 글자를 쓰지않았으니,
이는 어찌 옛사람이 중하게 여김이 아니겠느냐?”하였다.【선명(先明)】
시(詩)에 이르기를,
“처음에 임금이 되고선 승평에 뜻을 두어,
현단복 면류관으로 정사에 힘을 썼네.
뜰앞에서 구슬태워 검소한 덕을 밝히었고,
원중에 보리심어 제사에 이바지했네.
백년의 풍속이 마침내 귀화되어,
그 당시 황손도 농사를 이해했네.
끝까지 본심대로 욕심을 막았던들,
때묻지않은 그 마음이 자연히 밝았으리”하였다.【이극기(李克基)】
현종이 제위(帝位)에 있은 지 해가 오래되자 차차 사치의 욕심이 늘어나고 정사(政事)에 게을러져서 수왕(壽王)6730)의 비(妃) 양씨(楊氏)를 맞아들여 귀비(貴妃)를 삼고, 오로지 음악과 미색(美色)으로 즐겼다.
잔치[酺宴]를 할 때마다 먼저 태상아악(太常雅樂)으로 좌부(坐部), 입부(立部)6731)를 베푼 뒤에, 북과 취주악으로 된 호악(胡樂)6732)과 교방(敎坊)6733), 부현(府縣)의 산악(散樂)6734)과 잡희(雜戱)6735)로써 계속하였다. 또 산거(山車)6736)와 육선(陸船)6737)으로 악기(樂器)를 싣고 왕래(往來)하며, 또 궁인(宮人)을 동원하여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으로 춤추게 하였다.
또 무마(舞馬) 1백필(匹)로 하여금 잔을 물고 축수(祝壽)케하고, 또 물소[犀]와 코끼리[象]를 입장(入場)시켜 절도 하고 춤도 추게하니, 안녹산(安祿山)이 보고 기뻐하였다.
안녹산이 범양(范陽)에서 반역(叛逆)하자 임금이 재상(宰相)을 불러 대책을 상의하니, 양국충(楊國忠)이 촉(蜀)으로 피난하자는 계책을 먼저 제안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옳게여겨, 오직 양귀비와 그의 자매(姊妹), 황자비(皇子妃)와 주황손(主皇孫), 그리고 친근한 환관(宦官)과 궁인(宮人)들만을 데리고 영추문(迎秋門)으로 나갔다.
마외역(馬嵬驛)에 이르자 장사(將士)들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모두 분노(憤怒)를 터뜨렸고, 진현례(陳玄禮)등은 화근(禍根)이 양국충때문이라 하여 그를 죽였다.
임금이 떠들썩함을 듣고 문에 나가 위로하고 대오(隊伍)를 수습하게 하였으나 군사(軍士)들이 응하지않았다.
임금이 고역사(高力士)를 시켜 이유를 물으니, 진현례가 대답하기를,
“양국충이 모반(謀叛)했으니, 귀비(貴妃)를 받들 수 없습니다.
원컨대 폐하(陛下)는 은정(恩情)을 끊고 법을 바로잡으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짐(朕)이 마땅히 스스로 처리하겠다.”하였다.
고역사가 나아와 말하기를,
“장사(將士)가 이미 양국충(楊國忠)을 죽였는데 귀비(貴妃)는 폐하의 곁에 있으니, 그들이 어찌 감히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장사가 편안하면 폐하도 편안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이에 불당(佛堂)에서〈귀비를〉교살(絞殺)하게 하고 시체를 실어다 마외역 뜰에 두고서 진현례등을 불러 들어와보게 하니,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비로소 대오를 정돈하고 떠날 차비를 하였다.【후암(後暗)】
시(詩)에 이르기를,
“양귀비가 궁중에 들어오면서부터
원앙전에 비단 장막이 항상 가려있었네.
호아(胡兒)가 목욕한 뒤에 추한소문 많았고6738),
척리(戚里)6739)가 교만해지니 일이 벌써 어긋났네.
비고(鼙鼓)가 홀연히 연새에서 일어나고,6740)
용여(龍輿)는 놀라서 금관성(錦官城)으로 향하였네.6741)
가련타, 예상곡을 즐기던 때에,
그 어찌 만리 피난길에 고생할 줄 알았으랴!”하였다.【이숭원(李崇元)】
당덕종도(唐德宗圖)
덕종은 양암(諒闇)6742)중에 있을 때는 모든 일을 예법에 따랐다.
이에 앞서 여러나라에서 길들인 코끼리를 여러번 바쳤는데, 임금이 말하길,
“코끼리는 사료(飼料)를 소비시키고 물성(物性)이 다른데,
무엇에 쓸 것인가?”하고,
명하여 형산(荊山)의 남쪽에 놓아주게 하였다.
그리고 표놜(豹貀), 투계(鬪雞), 응견(鷹犬) 따위도 모두 놓아주고,
또 궁녀 수백명도 내보내니, 중외(中外)에서 모두 기뻐하였다.
치청(淄靑)의 장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서로 돌아보고 말하기를,
“훌륭한 임금이 나왔다. 우리도 귀속할 수 있을까?”하였다.
또 조명(詔命)하기를,
“조집사(朝集使) 2명을 인솔하고 변방사람의 질고(疾苦)를 살피게 하라.”
하였다.【선명(先明)】시(詩)에 이르기를,
“진기한 짐승들을 길들여서,
먼 곳에서 중역(重譯)6743)을 거쳐 궁궐에 바쳤네.
천리밖에서 온 괴이한 물건 혐의쩍게 여겼으며,
백여명의 궁녀들을 모두 내어보냈네.
조야에서 서로가 성주라 일컬었고,
치청의 군사들은 깊은 인덕을 느끼었네.
조집사를 맞이하여 자문을 내리니,
사해의 궁한 백성 억울함을 걱정함이네.”하였다.【임사홍(任士洪)】
덕종(德宗)초년에 최우보(崔祐甫)가 정승이 되어 관대(寬大)함을 힘썼다. 그래서 당시에는 정치의 명성(名聲)이 널리 퍼져 정관(貞觀)6744)의 기풍(氣風)이 있다고 하였었다.
그런데 노기(盧杞)가 정승이 되고서는 의사(疑似)6745)함을 가지고 군신(群臣)을 이간(離間)시키고, 임금에게 권하여 아랫사람을 엄하고 각박하게 다스리도록 하니, 중외(中外)에서 실망하였다.
당시 양하(兩河)6746)에서 전쟁이 일어나 한달의 경비가 백만민(百萬緡)6747)이 넘어 국고(國庫)가 지탱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부상(富商)의 돈[錢]을 조사하여 만민(萬緡)을 제하고 그 나머지를 차용하여 군용(軍用)에 공급(供給)하기로 하고, 장안(長安)의 상인(商人)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색출(索出)하여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면 문득 매를 때리니, 사람들은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백성이 그 때문에 파시(罷市)하고 서로 몰려와서 재상(宰相)이 탄 말[馬]을 가로막고 직접 노기(盧杞)에게 항의하니, 노기가 처음에는 그들을 위로하며 설득시키다가 막을 수 없는 형편이 되므로 말을 빨리 몰아 그 자리를 도망하였다.
경원(涇原)의 군사가 난리를 일으키자 임금이 봉천(奉天)으로 피난하였는데, 행궁(行宮)의 행랑[廡] 아래에다 각 도(道)에서 공헌(貢獻)한 물건을 쌓아놓고 현판을 달기를,「경림대영고(瓊林大盈庫)」라 하였다.
궁중(宮中)에서 외부의 물건을 살 때는 환관(宦官)을 시켜서 사오게하고 그를 궁시(宮市)라 하였는데, 남의 물건을 억지로 사면서 홍자색(紅紫色)으로 염색한 헌 옷과 낡은 비단을 척(尺), 촌(寸)쯤 찢어서 주고는, 이에 진봉문호(進奉門戶)6748)와 각가전(脚價錢)6749)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떤 농부(農夫)가 나귀[驢]에 나무를 싣고가는데, 환관이 궁시라 하면서 나무를 뺏고 또 진봉문호를 요구했다. 농부가 말하기를,
“나의 부모와 처자는 내가 파는 나무로 생계를 이어가는데, 지금 이 나무를 너에게 주고 값은 받지않고 돌아가게하니, 네가 값을 주려고하지 않는다면 나는 죽을 뿐이다.”하고, 드디어 그 환관을 구타하였다.【후암(後暗)】
시(詩)에 이르기를,
“근래에 비정(秕政)6750)이 처음보다 더 심하여,
뜻은 크나 재주가 없는데, 시기는 웬 말,
황옥(黃屋)6751)이 몽진함이 작은 일이 아닌데,
경림에 붙인 방은 누굴 위한 자랑인가?
상인의 돈 긁어들여 은혜는 별로 없고,
궁시를 베풀어서 원망을 많이 샀네.
이 마음의 어둡고 어리석음은,
노기의 간사함을 모른 것이네.”하였다.【서거정(徐居正)】
○현비병(賢妃屛)
주문왕후비도(周文王后妃圖)
주문왕(周文王)은 성덕(聖德)을 타고났고, 또 성녀(聖女)인 사씨(姒氏)를 맞이하여 비(妃)를 삼았다.
갈담시(葛覃詩)는 후비(后妃)가 자작(自作)한 것이다. 그 시에 이르기를,
“칡넝쿨 골짜기에 뻗어 그 잎새 무성하다.
꾀꼬리 날아 숲에 모여 사이좋게 지저귀네.
칡넝쿨 골짜기에 뻗어 그 잎새 더부룩하다.
이걸 베고 이걸 쪄서 가는 베짜고 굵은 베짜니 그 옷이 싫지않네.
사씨(師氏)6752)께 아뢰고 근친(覲親)가리라.
평복도 빨고 예복도 빨아,
이것 모두 빨아 놓고 부모님께 문안가려네.”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주나라 후한 덕이 민심에 사무쳐서,
팔백년 기업이 이남(二南)6753)에서 비롯됐네.
문왕이 천명을 새롭게한 것을 알려면,
태사의 명성 계속됨을 보아야하리.
검소한 갈포는 천고에 빛나고,
종사(螽斯)6754)의 경사는 백명의 아들이네.
성모라야 성자를 낳을 수 있으니, 무왕의 장한 업적 지금까지 빛나네.”하였다.【이승소(李承召)】
주선왕강후도(周宣王姜后圖)
강후(姜后)는 어질고 덕이 있었다. 선왕(宣王)이 일찍이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났는데, 강후가 잠이(簪珥)6755)를 벗고 영항(永巷)에서 대죄(待罪)하면서 그 부모(傅母)를 시켜 왕(王)에게 말하게 하기를,
“첩(妾)이 재덕(才德)이 없어서 군왕(君王)으로 하여금 체통을 잃고 조회(朝會)를 늦게함으로써, 군왕이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덕(德)을 잃음을 드러나게 했습니다.
진실로 여색을 좋아하면 반드시 사치를 좋아하고 욕심내키는대로 하게됩니다. 난(亂)이 일어날 때에 그 난의 일어난 원인을 캐면 비자(婢子)에게서 일어났으니, 감히 비자의 죄를 청합니다.”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덕이 없어서 스스로 허물이 생긴 것이지 부인의 죄가 아닙니다.”하고,
곧 강후를 돌아오게 하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여 아침일찍 조회하고
저녁 늦게 물러오게 되어서 드디어 중흥주(中興主)로 이름이 났다.
시(詩)에 이르기를,
“훌륭한 모든 신하가 모였다 돌아가고,
두어 길 아침해가 동위(彤闈)6756)에 올라왔네.
예로부터 여색을 즐김은 정치에 누가 되고,
편안함만 생각하면 화의 계기가 된다네.
자신이 죄책을 도맡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허물을 면케 했네.
혁혁하게 중흥한 그 업적은,
어진 후비가 잘못을 고쳐줌에 있었음을.”하였다.【박효원(朴孝元)】
제효공부인도(齊孝公夫人圖)
부인은 맹희(孟姬)이며, 예(禮)를 좋아하고 지조가 곧았다.
효공(孝公)이 낭야(琅琊)에 놀이를 갔을 때에 맹희가 따라갔는데, 수레가 달리다가 맹희는 추락하고 수레가 부서졌다.
효공이 사마입거(駟馬立車)로 맹희를 태워 오게하니,
맹희가 시어자(侍御者)로 하여금 장막을 베풀어 자신을 가리우게 하고,
부모(傅母)로 하여금 사자(使者)를 〈효공께〉보내어 아뢰기를,
“첩(妾)은 들으니,‘후비(后妃)가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안거치변(安車輜輧)6757)을 타며, 당(堂)에 내려갈 때는 반드시 부모나 아보(阿保)를 따르게하고, 진퇴(進退)를 하면 패옥(佩玉)을 울리며, 집안에서는 옷매무시를 단단히 하고, 들에서는 장막으로 가리운다’고 하니, 이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한결같이 하여 스스로를 단속하는 것입니다.
지금 입거(立車)에 덮개가 없으니, 감히 명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들에서 장막이 없으니, 감히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체통을 잃음이 많으니, 무례하게 살기보다는 일찍 죽는 것만 못합니다.”하였다.
사자가 달려와 고(告)하니, 공(公)이 다시 안거(安車)를 가져가게 했는데, 도착했을 때는 이미 스스로 목을 매어달았었다.
부모가 구원하여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부모가 말하기를,
“사자가 왔고 수레에 덮개가 갖추어졌습니다.”하여,
맹희가 소생한 연후에 타고 돌아갔다.
시(詩)에 이르기를,
“당시의 군왕이 한가히 지내면서,
비빈을 데리고서 마음껏 노닐었네.
예사 때도 언제나 조행을 지킬텐데.
불시라고 그 어찌 예의를 벗어나료,
일찍이 이 몸은 가볍기가 잎새같음을 알았고,
예부터 큰 절개는 태산보다 중하다네.
늠름한 청풍은 영원히 어제처럼,
만대의 인간에게 완고함을 일깨우네.”하였다.【이파(李坡)】
초번희도(楚樊姬圖)
번희(樊姬)는 장왕(莊王)의 부인이다. 장왕이 즉위(卽位)하여 수렵(狩獵)을 즐겼는데, 번희가 간하였으나 듣지않으므로 이에 금수(禽獸)의 고기를 먹지 아니하니, 왕이 잘못을 고치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였다.
왕이 어느 날 조회(朝會)를 늦게 파하였는데,
번희가 뜰에 내려가 영접하면서 묻기를,
“어째서 늦었습니까? 시장하고 피로하지 않으십니까?”하니,
왕이 말하기를,
“어진이와 대화하였으므로 시장하고 피로함을 모르겠소.”하였다.
번희가 말하기를,
“왕께서 어진이라고 한 이는 누구입니까?”하므로,
왕이,
“우구자(虞丘子)요.”하니, 번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왕이 묻기를,
“희(姬)가 웃음은 무슨 이유요,”하니,
대답하기를,
“우구자가 어질긴 어지나 충성스럽지는 못합니다.
지금 우구자는 초(楚)나라의 재상(宰相)이 된 지 10여년에 천거한 것이 자제(子弟)가 아니면 족형제(族兄弟)이지 어진이를 추천하고 불초(不肖)한 자를 물리쳤다함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어진이의 길을 막은 것입니다.
어진이를 알고도 추천하지않았으면 이는 충성스럽지 못함이고,
어진이를 알지못하였다면 이는 지혜롭지 못함이니,
첩이 웃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우구자에게 그대로 이르니, 우구자가 자리를 옮겨앉으며 대답을 못하였다.
그리고 곧 피사(避舍)6758)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손숙오(孫叔敖)를 맞이하게하여 추천하니, 왕이 영윤(令尹)을 삼았는데,
초나라를 다스린 지 3년에 장왕(莊王)이 패왕(覇王)의 노릇을 하였다.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초왕(楚王)이 패왕노릇 한 것은 번희의 힘이다.”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장왕이 호시(虎視)6759)하며 패권을 도모함은,
번희가 은밀히 내조한 공이었네.
짐승의 고기 한 점도 맛보지아니함은,
사냥만 즐기는 삼풍(三風)6760)을 경계코자 함이로다.
우구자가 어진이의 진로 막음을 비웃었는데,
감히 임금의 은총믿고 후궁을 함부로 대하랴!
손숙오를 맞아들여 영윤을 삼아,
훌륭한 임금되게하여 무궁토록 빛냈도다.”하였다.【이승소(李承召)】
한원제풍소의도(漢元帝馮昭儀圖)
소의(昭儀)는 선발(選拔)되어 궁(宮)에 들어왔다.
원제(元帝)가 어느 날 범기르는 우릿간에 가서 짐승들을 싸움시켰는데,
궁녀들은 모두 앉았었다.
곰이 우릿간에서 뛰어나와 난함(欄檻)을 잡고 어전(御殿)에 올라가려하니, 좌우의 귀인(貴人)들은 모두 놀라서 달아나는데, 풍첩여(馮婕妤)6761)가 곰을 가로막고 섰으므로 좌우 사람들이 곰을 때려 죽였다.
원제가 첩여에게 묻기를,
“사람의 심정으로는 누구나 다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곰을 가로막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첩(妾)은 들으니,‘맹수(猛獸)는 사람을 만나면 멈춘다’고 합니다.
첩은 곰이 어좌(御座)에 이를까 염려되었으므로 몸으로 막았던 것입니다.”하니, 원제가 감탄을 하고 그로 인해 경중(敬重)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상림원 놀이에 훌륭한 일이 겹치니,
삼천의 미인들 구름처럼 따랐네.
우리에 있던 곰이 난함에 달려드니,
궁녀가 모두 놀라 정신없이 달아났네.
죽음을 무릅쓰고 짐승앞에 막아서니,
이 한몸 모두가 임금위한 충성일세.
구구한 보좌관들 얼굴이 두껍구나!
천자의 감탄이 풍소의(馮昭儀)에게 기울었네.”하였다.【박효원(朴孝元)】
한성제반첩여도(漢成帝班婕妤圖)
첩여(婕妤)는 훌륭한 재주로서 사리에 능통했다.
처음에 후궁(後宮)에 선발되어와서 소사(小使)가 되었었는데,
얼마 안되어 크게 사랑을 받아 첩여가 되었다.
임금이 후정(後庭)에 노닐면서 첩여와 함께 연(輦)을 타려고 하니,
사양하기를,
“옛 그림을 보건대 현성(賢聖)한 임금은 모두 명신(名臣)이 곁에 있었는데, 삼대(三代)6762) 이후의 못난 임금들은 사랑하는 여자를 옆에 두었으니, 지금 함께 연을 탄다면 그와 같지 않겠습니까?”하니,
성제는 그 말을 옳게여겨 그만두었다. 태후(太后)가 듣고 기뻐하기를,
“옛날엔 번희(樊姬)가 있더니, 지금은 반첩여(班婕妤)가 있구나”하였다.
조비연(趙飛燕)의 자매(姉妹)가 총애를 받으면서 교만하고 투기하여 첩여를 참소하기를,
“사술(邪術)을 끼고서 저주(詛呪)합니다.”하였다.
임금이 첩여를 돌아보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첩은 들으니, 죽고 삶은 명이 있고 부하고 귀함은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올바름을 닦아도 오히려 복을 받지못하는데, 사술을 하여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가령 귀신이 앎이 있다면 신자(臣子)아닌 자의 허소를 받지않을 것이고, 만일 앎이 없다면 하소해본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하니,
임금이 그 대답을 옳게여기고, 가엾게 생각하여 황금(黃金) 1백근을 하사(下賜)했다. 시(詩)에 이르기를,
“연(輦)을 사양하던 때에는 임금의 은총이 융성하여,
한궁(漢宮)의 비빈들이 높은 풍도 사모했네.
한 점의 쉬파리가 깨끗한 몸에 생겼구나.
한 쌍의 비연(飛燕)6763)이 후궁에 들어왔네.
일찍이 죽고 삶은 천명임을 알았는데,
어찌 화와 복을 하늘에 빌겠는가?
황금을 헛된 상에 쓰지않는데,
장신궁(長信宮)은 해마다 무장이 비었네6764)”하였다.【강희맹(姜希孟)】
한명제명덕마황후도(漢明帝明德馬皇后圖)
황후(皇后)는 이미 궁위(宮闈)6765)의 황후가 되어서도 더욱 겸손하고 자숙하여 항상 대련복(大練服)을 입고 치마[裙]에는 단[緣]을 붙이지않았다.
초하루, 보름으로 여러 궁인들이 조청(朝請)6766)할 때의 황후의 웃옷[袍]이 거치른 것을 바라보고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여겼다가 가까이 가서 보고서는 웃었다. 황후가 겸사로 말하기를,
“이 비단은 특히 염색하기에 편의하기 때문에 입는 것이다.”하니,
육궁(六宮)이 모두들 탄식하였다.
황후는 길쌈하는 집을 만들어 탁룡원(濯龍園)안에서 누에를 기르며 자주가서 살펴보면서 그것을 오락(娛樂)으로 삼았다. 시(詩)에 이르기를,
“정숙한 규범은 부드럽고 곧으며,
황후의 높은 지위로도 조심하고 겸손했네.
화려한 의복 멀리하고 대련군을 입었고,
감옥의 죄수들도 황후의 인정에 감동했네.
언제나 검소한 덕은 궁중에서 먼저했는데,
어찌 사친에게 권세와 영화를 주었으랴,
이로부터 평생에 누에길쌈 중히 여겨,
어헌(魚軒)6767)이 때때로 탁룡원에 행차했네.”하였다.【노공필(盧公弼)】
당태종문덕장손황후도(唐太宗文德長孫皇后圖)
황후(皇后)는 천성(天性)이 인효(仁孝)하고 검소(儉素)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황제(皇帝)와 조용히 고사(古事)를 상의하면서 헌체(獻替)6 768)하여 도움이 된 것이 매우 많았다.
임금이 혹 죄가 아닌 것을 가지고 궁인(宮人)에게 꾸중을 하면 황후도 겉으로 노여워하면서 직접 추국(推鞫)하기를 청하고, 구속하여 가두어 두라고 명하였다가 임금의 노여움이 풀리기를 기다려 서서히 변명을 해주니, 그로 해서 궁중(宮中)에 형벌의 남용됨이 없었다.
임금이 어느 날 조회(朝會)를 하고 노여워하기를,
“이 촌늙은이를 꼭 죽이겠다.”하므로, 황후가 묻기를,
“누구입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위징(魏徵)이 늘 조정에서 나를 욕보인다.”하였다.
황후가 물러나와 조복(朝服)을 입고 뜰위에 섰으니,
임금이 놀라 그 까닭을 물었다. 황후가 말하기를,
“첩(妾)은 들으니,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하는데,
지금 위징의 곧음은 폐하(陛下)께서 밝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첩이 감히 하례하지 않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이에 기뻐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문덕황후 겸손함은 타고난 천성이라,
함홍광대(含洪光大)함이 곤원(坤元)에 합하네.6769)
조용히 임금을 이해시켜 노여움 가시게 하고,
시서 읽기를 좋아하며 도의를 지키었네.
현상(賢相)이 빠짐을 보고 임종시에 천거하고,6770)
궁인이 꾸중받자 가두기를 자청했네.
만약 태후의 보필한 힘이 아니었다면,
간관(諫官)을 죽였다는 이름이 임금을 그르쳤으리”하였다.
【(손순효(孫舜孝)】
송인종광헌조황후도(宋仁宗光獻曹皇后圖)
황후(皇后)는 성품이 인자하고 검소하며 농사를 중하게 여겨 일찍이 금원(禁苑)에서 곡식을 심고 친히 누에를 길렀다. 경력(慶曆)6771)중에 위졸(衛卒) 몇 사람이 밤에 난(亂)을 일으켜 집을 넘어 들어와 침전(寢殿)을 두드렸다. 황후가 그 때 임금을 모셨었는데, 변(變)을 듣고 급히 일어나서 임금이 나가려고 하니, 황후가 문을 닫고 가로막으며, 도지(都知) 왕수충(王守忠)을 급히 불러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오게 하였다.
황후는 도적이 반드시 불을 지를 것으로 예측하고 몰래 사람을 보내어 물을 가지고 그들의 뒤를 따르게 했는데, 도적이 과연 횃불을 들어 주렴[簾]에 불을 질렀으나 즉시 물을 부어 불을 껐다. 시(詩)에 이르기를,
“인자하고 순박함은 타고난 천성,
백성들의 어려움을 자신만은 알고 있네.
금원에 봄 깊으니 보리가 무성하고,
공상에 뽕잎이 다하니 누에가 다 자랐네.
간등(諫燈)6772)에서 벌써 간함을 들을 줄은 알았으나,
변을 당하고 바야흐로 기발한 지혜에 놀랐네.
천추에 끼친 자의 새로운 그림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리키며 거듭 감탄케하네”하였다.【박효원(朴孝元)】
송영종선인고황후도(宋英宗宣仁高皇后圖)
황후(皇后)가 신종(神宗)을 낳았는데, 신종이 즉위하고 높여서 황태후(皇太后)를 삼았고, 철종(哲宗)이 위(位)를 계승하고서는 태황태후(太皇太后)를 삼아 권세(權勢)가 청정(聽政)6773)과 같았다.
정시(廷試)에서 사람을 선발하는데, 유사(有司)가 천성(天聖)6774)의 고사(故事)를 따라 임금과 황후가 모두 전(殿)에 나오기를 청하니, 황후가 이를 만류하였다. 또 문덕전(文德殿)에서 책보(冊寶)6775)를 받으라고 청하니,
황후가 말하기를,
“모후(母后)가 당양(當陽)6776)함은 국가(國家)의 미사(美事)가 아니다.
더구나 천자(天子)의 정아(正衙)6777)에 어찌 나아갈 수 있겠는가?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감도 만족하다.”하고,
고사(故事)를 힘써 행하며 외가(外家)의 사은(私恩)은 억제하였다.
그리고 문사원(文思院)의 봉상(奉上)하는 물건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종신토록 하나도 취하지않으니, 사람들이 여자중의 요(堯), 순(舜)이라고 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천성의 유풍이 좋다할 게 못된다는,
선인황후 겸손함은 더할 수 없네.
수렴을 하면서 편전에 나아감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책보를 받는다고 정아에 나갈쏜가?
은전은 외척에게 이르지않았고,
공로는 마땅히 왕가에 있어야지.
여러 해된 새 법을 모두 제거했으니,
요, 순이라 일컬음이 그 어찌 과장이랴!”하였다.【노공필(盧公弼)】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성담수(成聃壽)는 천성이 담박(淡泊)하여 사물(事物)에 대하여 욕심내는 것이 없었다. 부모가 일찍 죽으니, 가산(家産)은 모두 아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태연하게 생활하였다. 어린 세 아우를 길러 혼인(婚姻)을 시켜주고 어루만지며 사랑하기를 부모 못지않게 하니, 사람들이 많이 칭찬하였다.”
註6668]세 개의 병풍:세 개의 병풍이란 명군병(明君屛), 선명후암군병(先明後暗君屛), 현비병(賢妃屛)을 말한다. 아래에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註6669]선온(宣醞):임금이 내리는 술. 註6670]뇌사(耒耜):쟁기와 보습 註6671]서호(鉏鎒):호미 註672]염제(炎帝):신농씨(神農氏). 註6673]삼퇴례(三推禮):임금이 농사짓는 일을 솔선수범하는 뜻으로, 적전(籍田)에서 세 번 밭갈이하는 의식 註6674]황수(黃收):황색의 면관(冕冠) 註6675]치의[純義]:검은 색의 옷 註6676]동거(彤車):붉은 수레 註6677]모자(茅茨):띠로 엮어만든 지붕 註6678]간고(諫鼓):신문고(申聞鼓)같은 것.註6679]사악(四岳):요(堯)임금때 사방(四方)의 제후(諸侯)를 통솔하던 관직(官職) 註6680]양단(兩端):두 가지 일의 실마리 註6681]경운(卿雲):상서로운 구름註6682]역수(曆數):천명(天命) 註6683]중화(重華):순(舜)임금의 공덕(功德)을 칭송하여 일컫는 이름 註6684]천장(天丈):임금의 근위병(近衛兵).註6685]순거(簨簴):악기를 다는 틀 註6686]토악(吐握):토포악발(吐哺握髮)의 준말로, 밥을 먹거나 머리를 감을 때에 손님이 오면 먹던 밥을 뱉고 감던 머리는 움켜쥐고 나가서 마중함을 말함 註6687]희생(犧牲):제물 註 6688]여알(女謁):여자가 임금의 사랑을 믿고 권세를 부려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히는 일 註6689]포저(苞苴):뇌물 註6690]참부(讒夫):아첨하는 무리 註6691]해도 망하고자:하(夏)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걸(桀)은 폭군으로서, 해를 가리키며, “저 해가 없어져야 나도 망할 것이다.”했는데, 당시 백성들이 그의 폭정에 못견디어, “저 해는 언제나 없어질 것인가?”했다는 고사에서 인용이 된 말임 註6692]힐향(肸蠁):소리를 아는 벌레 이름으로, 영감(靈感)이 감통(感通)한다는 뜻으로 쓰여짐 註6693]혁엽(奕葉):누대(屢代)의 자손 註6694]서미(胥靡):부열(傅說)의 별칭 註6695]서백(西伯):문왕의 작호(爵號) 註6696]천자의 덕은 영대(靈臺)에서 전파되고:문왕(文王)이 영대(靈臺)를 지을 때 백성들이 그 덕에 감동되어 아들처럼 와서 도운 고사에서 온 말 註6697]주역(周易)의 이치는 유리(羑里)에서 연구했네:문왕(文王)이 주(紂)에게 감금되어 유리옥(羑里獄)에 갇혀있을 때《주역(周易)》을 연역(演譯)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 註6698]독부(獨夫):주(紂)를 가리킴 註6699]홍범(洪範):천하를 다스리는 큰 법으로, 우(禹)임금이 만든 것인데, 정치(政治),도덕(道德),천문(天文)등에 관한 내용임 註6700]여러 여씨(呂氏):당시의 외척(外戚) 세력자인 여산(呂産), 여록(呂祿)등을 가리킨 말 註6701]참승(驂乘):옆에서 왕을 모시고 탐 註6702]대저(代邸):대왕의 관저 註6703]도리비(道里費):오는 도중의 비용 註6704]취화(翠華):천자(天子)의 기치(旗幟) 註6705]단조(丹詔):임금의 조칙(詔勅) 註6706]제봉(提封):영지(領地), 즉 사경(四境)을 거느림 註6707]업성(鄴城):위(魏)의 서울 註6708]일표(日表):제왕(帝王)의 의표(儀表) 註6709]초방(椒房):후비(后妃)의 궁전(宮殿) 註6710]정관(貞觀)의 다스림:정관(貞觀)은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연호(年號)로, 태종때의 정치를 말함 註6711]당(唐), 우(虞):요(堯)와 순(舜)의 시대를 함께 이르는 말 註6712]서식(棲息):궁실(宮室)을 갖추지못하고 움막에서 짐승처럼 생활함을 가리킴 註6713]기구(器具):관(棺)을 말함 註6714]나[孤]:왕이 자신을 일컫는 말 註6715]치이(鴟夷):말가죽으로 만든 큰 자루 註6716]안거포륜(安車蒲輪):부들로 바퀴를 싸서 편하게갈수 있게 만든 혼자타는 수레 註6717]후씨(候氏):지명(地名) 註6718]백량편(柏梁篇):백량대부(柏梁臺賦)를 말함 註6719]신마(神馬)가 음보(音譜)전함:한무제(漢武帝) 태초(太初)4년에 한혈마(汗血馬)를 얻고서 서극천마가(西極天馬歌)를 지은 고사가 있음 註6720]횡분(橫汾)한 즐거움:뱃놀이하며 즐겼다는 말로, 횡분(橫汾)은 한무제(漢武帝)의 추풍사(秋風辭)에,‘중류를 가로질러[橫中流]……분하를 건너다[濟汾河]’란 말을 줄인 것임 註6721]청사(靑絲):푸른 무명실 註6722]동작대(銅雀臺)는 기울어서:여기서는 위(魏)나라가 망한다는 뜻으로, 동작대(銅雀臺)를 위나라의 조조(曹操)가 지었으므로 일컬어진 것임 註6723]석두성(石頭城):오(吳)나라 손호(孫皓)가 항복한 성(城) 註6724]손호(孫皓):오나라의 마지막 임금. 註6725]액정(掖庭):후궁 註6726]금릉(金陵):오나라 수도 註6727]짐연(鴆宴)을 베풂은 탐욕에서 온 것인데:진(晉)나라 선제(宣帝)가 현석도(玄石圖)에,“소가 말을 계승한다.[牛繼馬]”고 한 말을 믿고 우씨(牛氏)를 꺼려 어느날 그의 장수였던 우금(牛金)에게 짐주(鴆酒)를 먹여 독살(毒殺)시켰는데, 이는 우씨(牛氏)가 사마씨(司馬氏)를 대신하여 군주(君主)가 될까 의심한 때문이었음 註6728]유연(流連):유연황망(流連荒亡)의 준말로, 주색(酒色)과 수렵(狩獵)에 탐닉(眈溺)하여 반성(反省)할 줄 모른다는 말 註6729]오마(五馬)의 집안에 화는 끊이지않았네:진(晉)나라 선제(宣帝)가,“소가 말을 계승한다[牛繼馬]”고 한 현석도(玄石圖)의 말을 믿고 우씨(牛氏)를 꺼려 우금(牛金)을 짐살(鴆殺)시켰으나 선제의 손부(孫婦)인 공왕비(恭王妃) 하후씨(夏侯氏)는 끝내 소리(小吏) 우씨(牛氏)와 간통하여 원제(元帝)를 낳았다. 오마(五馬)는 원제의 5형제를 말하는데, 원제가 처음에는 낭야왕(琅邪王)으로 있으면서, 서양왕(西陽王), 여남왕(汝南王), 남돈왕(南頓王), 팽성왕(彭城王)등의 형제와 협력하여 마침내 제위(帝位)에 올랐다. 당시 동요(童謠)에,“오마가 강을 건너 한 말은 용이 되었네.[五馬渡江 一馬爲龍]”한 데에서 일컬어진 말임. 여기의 시에서는 사실상 무제의 대가 끊긴 것을 뜻한 것임 註6730]수왕(壽王):현종의 아들 註 6731]좌부(坐部),입부(立部):음악(音樂)을 양부(兩部)로 나누어 당하(堂下)에서 입주(立奏)하는 자를 입부기(立部伎), 당상(堂上)에서 좌주(坐奏)하는 자를 좌부기(坐部伎)라 함 註6732]호악(胡樂):호인의 음악 註6733]교방(敎坊):장악원(掌樂院) 註6734]산악(散樂):민간의 음악 註6735]잡희(雜戱):광대놀이 註6736]산거(山車):산 모양을 화려하게 꾸민 수레 註6737]육선(陸船):배모양으로 만든 꽃수레 註6738]호아(胡兒)가 목욕한 뒤에 추한 소문 많았고:호아(胡兒)는 안녹산(安祿山)을 가리킨 말로, 안녹산이 양귀비(楊貴妃)가 쓰는 목욕탕에 들어가 목욕한 것을 이름 註6739]척리(戚里):여기서는 양귀비(楊貴妃)의 형제(兄弟), 자매(姉妹)를 가리킴 註6740]비고(鼙鼓)가 홀연히 연새에서 일어나고:비고(鼙鼓)는 기병(騎兵)이 마상(馬上)에서 치는 북. 안녹산(安祿山)이 반역(叛逆)을 일으킴을 가리킨 말 註6741]용여(龍輿)는 놀라서 금관성(錦官城)으로 향하였네: 용여(龍輿)는 임금이 타는 수레. 당현종(唐玄宗)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서촉(西蜀)으로 간 것을 말함. 註6742]양암(諒闇):거상(居喪) 註6743]중역(重譯):이중 통역. 제3국과의 언어가 통하지않아 이중통역을 거치는 일 註6744]정관(貞觀):당(唐)태종(太宗)의 연호 註6745]의사(疑似):분간하기 어려움 註6746]양하(兩河): 하남(河南)과 하북(河北) 註6747]백만민(百萬緡): 민(緡)은 돈꿰미의 단위. 註6748]진봉문호(進奉門戶): 궁에 바칠 물건 註6749]각가전(脚價錢): 심부름값 註6750]비정(秕政): 학정(虐政) 註6751]황옥(黃屋): 임금의 수레 註6752]사씨(師氏): 보모(保姆) 註6753]이남(二南):《시경(詩經)》국풍(國風)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가리키는데, 왕화(王化)의 기초가 되는 가장 아름다운 시풍(詩風)이라하여 일컫는 말 註6754]종사(螽斯): 여치과에 속하는 곤충. 한 번에 아흔 아홉개의 알을 낳는다하는데, 문왕(文王)의 아들이 아흔 아홉이므로, 비유로 일컬어지는 말 註6755]잠이(簪珥): 비녀와 귀고리 註6756]동위(彤闈): 궁궐(宮闕). 궁전(宮殿)을 붉게 칠하였으므로 일컬어진 말 註6757]안거치변(安車輜輧): 앉아서 타는 수레로, 덮개가 있는 것 註6758]피사(避舍): 피삼사(避三舍)의 준말로, 곧 상대에게 양보한다는 뜻임註6759]호시(虎視): 호시탐탐(虎視眈眈)의 준말 註6760]삼풍(三風):《서경(書經)》이훈(伊訓)에서 말한 세 가지의 나쁜 풍습. 즉 무풍(巫風), 음풍(淫風), 난풍(亂風) 註6761]풍첩여(馮婕妤): 첩여는 소의(昭儀)되기 전 직명 註6762]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 註6763]한 쌍의 비연(飛燕): 조비연(趙飛燕)의 자매를 가리킴 註6764]장신궁(長信宮)은 해마다 무장이 비었네: 반첩여(班婕妤)가 조비연(趙飛燕)의 질투를 피하여 장신궁(長信宮)에서 태후(太后)를 봉양(奉養)하고 있음을 가리킨 말 註6765]궁위(宮闈): 중궁(中宮) 註6766]조청(朝請): 조회(朝會)를 뜻한 말로, 봄에는 조(朝), 가을에는 청(請)이라 함 註6767]어헌(魚軒): 물고기 가죽으로 장식한 왕후의 수레 註6768]헌체(獻替): 임금에게 선(善)을 권함 註6769]함홍광대(含洪光大)함이 곤원(坤元)에 합하네: 황후(皇后)의 덕을 일컫는 말.《주역(周易)》곤괘(坤卦)에 있는 말로, 땅의 덕은 무엇이든 포용(包容)하지 않음이 없음을 뜻함인데, 여기서는 장손황후(長孫皇后)의 덕을 거기에 비한 것임. 註6770]현상(賢相)이 빠짐을 보고 임종시에 천거하고: 장손황후(長孫皇后)가 임종시에, 물러나있는 방현령(房玄齡)을 버려두지말라고 태종(太宗)에게 권유한 것을 말함 註6771]경력(慶曆): 인종(仁宗)의 연호 註6772]간등(諫燈):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망석(望夕)에 장등(張燈)을 하려하니, 조황후(曹皇后)가 이를 간하여 중지시킴을 말함 註6773]청정(聽政): 정사(政事)를 청단(聽斷)함 註6774]천성(天聖): 송(宋)인종(仁宗)의 연호 註6775]책보(冊寶): 옥책(玉冊)과 금보(金寶) 註6776]당양(當陽):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림 註6777]정아(正衙): 선정전(宣政殿)의 이칭(異稱).
○先是命採明君、先明後暗君、賢妃事跡, 畫爲三屛, 令文臣分題作詩, 又命掌令朴孝元、應校柳洵、進士成聃壽書事跡與詩于其上, 至是孝元等書進, 賜御衣各一領, 仍饋宣醞。
其明君屛。
《神農圖》: 神農知天地之道, 明於人之性, 以有天下。 古者民茹草飮水, 采樹木之實, 食蠃蚌之肉。 神農以謂人民衆多, 難以久養。 敎民種五穀, 爲耒耜鉏鎒以墾草莽, 然後五穀興。 令曰: ‘丈夫壯而不耕, 天下有受其飢者, 婦人豐盈而不織, 天下有受其寒者。’ 故神農親耕, 后親織, 以爲天下先。 詩曰:
“炎帝當年撫域中, 却將神敎立神功。 生民飢飽關農務, 天下寒溫在女工。 雨玉雨珠非世用, 親耕親織與民同。 千年幸覩三推禮, 願取神農保始終。”【玄碩圭。】
《帝堯圖》: 帝堯黃收純衣, 彤車白馬, 茅茨不剪, 土階三等勤於君道, 作布政之宮曰衢室, 立誹謗之木, 使天下得盡其言, 建進善之旌, 使天下得盡其才, 置諫鼓於朝, 使天下得攻其過。 一民飢, 曰我飢之也, 一民寒, 曰我寒之也。 由是百姓戴之如日月, 親之如父母。 有老人擊壤而歌曰: “日出而作兮, 日入而息兮。 耕田而食兮, 汲井而飮兮, 帝何力於我哉,” 詩曰:
“日日昏花史傳親, 聖中無若帝堯仁。 土階還有第茨儉, 謗木仍兼諫皷陳。 允協萬邦臻至理, 曰吁四岳動咨詢。 巍巍蕩蕩天爲大, 遐邇歸心無異人。”【洪應。】
《帝舜圖》: 帝舜畏天而愛人, 恤遠而親近, 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時日月光華, 卿雲叢聚。 舜彈五絃之琴, 詠《南風》之詩曰: ‘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詩曰:
“海內謳歌曆數歸, 重華千載仰巍巍。 卿雲藹藹垂天仗, 瑞日輝輝照袗衣。 庶績凝時端冕儼, 五絃和處惠風微。 南薰一曲舒民慍, 皞皞熙熙遍九圍。”【洪貴達。】
《大禹圖》: 禹以五音聽治, 懸鐘、皷、磬、鐸、鞀以待四方之士, 爲銘於簨虡曰: ‘敎寡人爾者擊鼓, 論以義者擊鐘, 告以事者振鐸, 語以憂者擊磬, 有獄訟者搖鞀。’ 一饋十起, 一沐三握, 以勞天下之民。 出見罪人, 下車問而泣之, 左右曰: ‘罪人不順道, 君王何爲痛之,’ 禹曰: ‘堯、舜之人, 皆以堯、舜之心爲心, 寡人爲君, 百姓各自以其心爲心, 是以痛之,’ 詩曰:
“當年足跡遍寰瀛, 辛苦腁胝績用成。 擊皷撞鐘聞理道, 搖鞀振鐸達民情。 哀矜問罪存深愛, 吐握迎人見至誠。 恥俗不如堯、舜世, 至今功化妙難名。”【洪貴達。】
《成湯圖》: 湯適野, 見野人張網四面, 祝曰: ‘自天下四方, 皆入吾網。’ 湯乃去其三面, 祝曰: ‘欲左, 左, 欲右, 右, 不用命者, 乃入吾網。’ 諸侯聞之曰: ‘湯德至矣。’ 歸者四十餘國。 時大旱七年, 太史占之曰: ‘當以人禱。’ 湯曰: ‘吾所爲請雨者, 民也, 若以人禱, 吾請自當。’ 遂齋戒剪爪斷髮, 素車白馬, 身嬰白茅, 以身爲犧, 禱于桑林之野, 以六事自責曰: ‘政不節歟, 民失職歟, 宮室崇歟, 女謁盛歟, 苞苴行歟, 讒夫昌歟,’ 言未已, 大雨方數千里。 詩曰:
“夏德將衰日欲亡, 人心天命屬成湯。 七年荒旱憂民切, 六事兢皇責己詳。 一念至誠通肸蠁, 四郊甘雨澍汪洋。 自從祝網仁心大, 便做商家奕葉長。”【玄碩圭。】
《商高宗圖》: 高宗卽位, 思復興殷, 而未得其佐, 〔三〕年不言政事, 決於冢宰, 以觀國風。 高宗夜夢得聖人, 名曰說。 以夢所見視群臣百吏, 皆非也, 於是審厥象, 俾以形使百工營求之野, 得說於傅巖中, 與之語, 果聖人也。 擧以爲相, 殷國大治。 詩曰:
“湯德巍巍不可肩,高宗燁燁亦光前。三年不語心治道,一夜無端夢大賢 忽作鹽梅調巨鼎,便爲舟楫濟洪川。若敎胥靡終巖穴,殷社焉能六百年!”【洪貴達。】
《周文王圖》: 文王時有呂尙者, 年已八十餘, 釣於渭上。 文王將獵卜之, 卜人曰: “所獵非龍, 非彲, 非虎, 非熊, 而王者之輔也。” 遂出畋, 至磻溪, 果遇呂尙, 同車而歸, 立爲師。 嘗鑿沼得朽骨, 命葬之。 左右曰: “此無主矣,” 文王曰: “天子主天下, 諸侯主一國, 寡人固骨之主矣,” 遂葬之。 天下聞之, 曰: “西伯仁及朽骨, 況生者乎,” 詩曰:
“造周基業至文隆, 天下三分有一中。德感歧陽鳴有鳳,祥凝渭涘獵非熊。皇風時向靈臺播,易象曾從羑里窮。莫問生民游聖澤,九原枯骨尙恩蒙。”【金紐。】
《武王圖》: 武王代紂, 陳于商郊, 俟天休命, 紂率其旅若林, 會于牧野, 罔有敵于我師。 前徒(例)〔倒〕戈, 攻于後以北, 血流漂杵, 一戎衣天下大定。 乃反商政, 政由舊, 釋箕子囚封比干墓, 散鹿臺之財, 發鉅橋之粟, 大賚于四海, 而萬姓悅服。 詩曰:
“應順天人問獨夫, 倒戈攻北是前徒。 壤泉毅魄應銷恨, 縲絏忠臣得脫軀。 已放馬牛歸野牧, 更分財粟及民孤。 若非訪道傳《洪範》, 未識彝倫敍得無。”【李克培。】
《漢文帝圖》: 文帝初封代王, 守薄于代。 周勃等旣誅諸呂, 迎王立之, 王命(宋旦)〔宋昌〕驂乘, 張武等六人乘傳, 從詣長安, 至代邸, 遂卽天子位。 卽夕入未央宮, 夜拜宋昌爲衛將軍, 鎭撫南北軍, 還坐前殿, 下詔書赦天下。 元年有獻千里馬者, 帝曰: “鑾輿在前, 屬車在後, 吉行日五十里, 師行三十里, 朕乘千里馬, 獨先安之,” 於是還其馬與道里費, 而下詔曰: “朕不受獻也。 其令四方毋獻。” 帝每朝郞從官上書疏, 未嘗不止輦受其言, 言不可用置之, 言可用採之, 未嘗不稱善。 詩曰:
“由來恭儉足爲臨,況復驕奢不受侵。異物未能售喪志,善言方得沃虛心。翠葉停處皆休命,丹詔飛時盡德音。坐致提封開富庶,始知淸淨化民深。”【崔淑精。】
《唐太宗圖》: 太宗時, 畿內有蝗。 上入苑中見蝗, 掇數枝, 祝之曰: “民以穀爲命, 而汝食之, 寧食吾之肺腸。” 擧手欲呑之, 左右諫曰: “惡物或成疾。” 上曰: “朕爲民受災, 何疾之避,” 遂呑之, 是歲蝗不爲災。 上以宮女衆多幽閟可憫: “灑掃之餘, 亦何所用”, 於是遣官於掖庭西門簡出之, 前後所出三千餘人。 林邑獻五色鸚鵡, 新羅獻美女二人, 上曰: “林邑鸚鵡, 猶能自言苦寒, 思歸其國, 況二女遠別親戚乎,” 幷鸚鵡各付使者而歸之。 詩曰:
“鄴城宮殿已斜陽, 晋邸風雲滿八荒。 十萬義兵隨日表, 三千宮女出椒房。 放回思土籠中鳥,(含)〔呑〕却傷農口裏蝗。最是力行仁義效,致令貞觀比虞唐。”【任元濬。】
先明後暗君屛。
《吳夫差圖》: 吳王闔廬伐越, 越王句踐迎擊大敗之, 靈姑浮以戈擊闔廬, 闔廬病傷且死, 告其子夫差曰: “必毋忘越。” 夫差旣立, 使人立於庭, 苟出入必謂己曰: “夫差! 而忘越王之殺而父乎,” 則對曰: “唯。 不敢忘。” 常以報越爲志, 乃悉精兵, 以伐越, 敗之夫椒。 越王乃以甲兵五千, 棲於會稽, 進西施請退軍, 吳王乃許行成。【先明】 詩曰:
“吳曾呑越越呑吳,勝敗輸贏一局圖。兩地山河兵爛熳,先君髑髏血糢糊。讎如未復心寧忍,動必相箴誓不渝。直向夫椒能一雪,會稽當日目中無。”【徐居正。】
夫差旣得西施, 築姑蘇臺高三百丈 遊宴其上, 子胥諫曰: “臣恐不久爲麋鹿之遊。” 王不聽, 賜屬鏤之劍以死, 將死曰: “樹吾墓上以檟, 令可爲器, 抉吾眼置之吳東門, 以觀越之滅吳也。” 王慍曰: “孤不使大夫得有見也。” 乃取子胥之尸, 盛以鴟夷, 而投之於江, 吳終爲越所滅。【後暗】 詩曰:
“血戰夫椒得意歸,旋携春色上高臺。飄飄舞袖凌雲去,杳杳歌聲雜雁來。當日舘娃殊寂莫,至今江月獨俳徊。可憐千載東門目,猶作驚潮擊岸回。”【柳洵。】
《漢武帝圖》: 帝初卽位, 擧賢良方正直言極諫之士, 親策問之, 詔申、韓、蘇、張之言者皆罷之。 上雅尙儒術, 趙綰薦其師申公, 上使使者奉安車蒲輪, 束帛加璧迎之。【先明】 詩曰:
“至言當訪衆論聞,發策賢良闢四門。屛黜蘇張排異術,表章周孔右斯文。賑窮下詔仁恩洽,束帛徵賢禮意勤。若使力行爲治本,隆功何止漢明君!” 【任士洪。】
帝用方士公孫卿言, 令長安、甘泉作蜚廉桂觀、通天臺, 使卿持節設具而候神人, 益廣諸宮室, 起栢梁臺, 作承露盤, 高二十丈, 大七圍, 璘爲之。 上有仙人掌以承露, 和玉屑飮之, 云可以長生。 帝如候氏, 禮祭中岳太室, 從官在山下聞若有言萬歲者三。 詔加增太室祠, 遂東巡海上求神仙, 封泰山, 禪肅然。 復東北至碣石而還。【後暗】 詩曰:
“百尺銅臺入紫烟, 侍臣長奉《栢梁篇》。 已娛神馬傳音譜, 更恨匈奴賁戍邊。 祠罷甘泉還灑淚, 藥無蓬島可求仙, 誰知簫鼓橫汾樂, 今日重尋事已遷!”【月山大君。】
《晉武帝圖》: 帝初卽位, 承魏氏刻迫奢侈之後, 欲矯以仁儉。 有司言: “御牛靑絲靷斷”, 詔: “以靑麻代之。” 大醫司馬程據獻雉頭裘, 帝命焚之於殿前, 勅內外, 敢有獻異技異服者罪之。【先明】 詩曰:
“銅雀臺傾王氣衰, 晋王開創勵精時。 奢華欲矯前朝弊, 仁儉還應四海知。 已用雉裘投烈熖,更將牛靷替靑絲。石頭一片降幡竪,莫遣功成意氣。”【金訢。】
武帝旣平吳, 頗事遊宴, 怠於政事。 詔選孫皓宮人五千入宮, 掖庭殆將萬人。 常乘羊車, 恣其所之至便宴寢, 宮人競以竹葉揷戶, 鹽汁灑地, 以引帝車。【後暗】 詩曰:
“一破金陵氣轉驕, 色荒無乃倦臨朝。 五千歌舞吳宮選, 十二樓臺晋殿高。 鴆宴向來貪愒日, 羊車隨處幾經霄。 流連不是苞桑計, 五馬蕭墻禍不銷。”【徐居正。】
《唐玄宗圖》: 玄宗初卽位, 以風俗侈靡, 制乘輿服御金銀器玩, 令有司燒毁, 以供軍國之用, 其珠玉錦繡, 焚於殿前。 又禁採珠玉及爲刻鏤器玩, 復廢織錦坊。 帝於苑中種麥, 率皇子以下, 躬自收穫, 謂曰: “此將薦宗廟。 是以親之, 亦令爾等知稼穡之艱難也。” 因分賜侍臣等曰: “比歲令人巡檢苗稼, 所對多不以實, 故自種植以觀其成。 且《春秋》書無麥禾, 豈非古人所重也,”【先明】 詩曰:
“初臨九五志昇平, 端冕垂衣更勵精。 庭下焚珠昭儉德, 苑中種麥供粢盛。 百年流俗終歸化, 當日皇孫亦解耕。 畢竟操存能窒慾, 未塵心鑑自昭明。”【李克基。】
玄宗在位歲久, 漸肆奢慾, 怠於政事, 納壽王妃楊氏爲貴妃, 專以聲色自娛。 每酺宴先設太常雅樂坐部立部, 繼以皷吹胡樂敎坊府縣散樂雜戲。 又以山車ㆍ陸船載樂往來, 又出宮人舞霓裳羽衣。 又敎舞馬百匹銜盃上壽, 又引犀象入場或拜或舞, 安祿山見而悅之。 祿山叛於范陽, 上召宰相謀之, 楊國忠首唱幸蜀之策。 上然之, 獨與貴妃姊妹、皇子妃、主皇孫及親近宦官、宮人, 出迎秋門。 至馬嵬驛, 將士飢疲, 皆憤怒, 陳玄禮等以禍由楊國忠, 殺之。 上聞喧嘩, 出門慰勞, 令收隊, 軍士不應。 上使高力士問之, 玄禮對曰: “國忠謀叛, 貴妃不宜供奉。 願陛下割恩正法。” 上曰: “朕當自取之。” 高力士進曰: “將士已殺國忠, 而貴妃在陛下左右, 豈敢自安, 將士安, 則陛下安矣。” 上乃命縊殺於佛堂, 輿尸置驛庭, 召玄禮等入視之, 軍士皆呼萬歲, 始整部伍爲行計。【後暗】 詩曰:
“一自楊妃入禁圍, 鴛央金殿鎖羅幃。 胡兒浴後聲多醜, 戚里驕來事已違。 鼙鼓忽從燕塞動, 龍輿驚向錦城飛。 可憐耽玩霓裳日, 那料間關萬里歸!”【李崇元。】
《唐德宗圖》: 德宗在諒闇中, 動遵禮法。 先是諸國屢獻馴象, 上曰: “象費豢養, 而違物性, 將安用之,” 命縱於荊山之陽。 及豹貀鬪鷄鷹犬之類, 悉縱之, 又出宮女數百人, 中外皆悅。 淄、靑將士投兵相顧曰: “明主出矣! 吾屬猶反乎,” 又詔曰: “引朝集使二人, 訪遠人疾苦。”【先明】 詩曰:
“奇獸魁然性自馴, 遐方重譯獻楓宸。 尙嫌異物來千里, 幷出宮娥過百人。 朝野爭歡稱聖主, 淄靑相顧感深仁。 爲迎朝集垂淸問, 四海窮民恐未伸。”【任士洪。】
德宗初年, 崔祐甫爲相, 務崇寬大。 故當時政聲蕩然, 以爲有貞觀之風。 及盧杞爲相, 以疑似離間群臣, 勸上以嚴刻御下, 中外失望。 時兩河用兵, 月費百餘萬緡, 府庫不支。 括富商錢出萬緡者, 借其餘以供軍, 大索長安商賈所有貨, 意其不實, 輒加榜棰, 人不勝苦。 百姓爲之罷市, 相率遮宰相馬自訴, 盧杞始慰諭之, 勢不可遏, 疾馳得免。 涇原兵作亂, 上幸奉天, 於行宮廡下, 貯諸道貢獻之物, 榜曰瓊林大盈庫。 宮中市外間物, 以宦官爲使, 謂之宮市, 抑買人物, 以紅紫染故衣敗繒, 尺寸裂而給之, 仍索進奉門戶及脚價錢。 嘗有農夫以驢負柴, 宦者稱宮市取之, 又就索門戶。 農夫曰: “我有父母妻子, 待此然後食, 今以柴與汝, 不取直而歸, 汝尙不肯, 我有死而已。” 遂毆宦者。【後暗】 詩曰:
“年來秕政比初加, 志大才疎性忌何, 黃屋蒙塵非細事, 瓊林揭榜爲誰誇, 商錢取括寬恩少, 宮市開張斂怨多。 最識此心愚暗處, 不知盧杞是奸邪。”【徐居正。】
賢妃屛。
《周文王后妃圖》: 周文王生有聖德, 又得聖女姒氏以爲之妃。 《葛覃》之詩, 后妃所自作也。 其詩曰: “葛之覃兮, 施于中谷, 維葉萋萋。 黃鳥于飛, 集于灌木, 其鳴喈喈。 葛之覃兮, 施于中谷, 維葉莫莫。 是刈是穫, 爲絺爲綌, 服之無斁。 言告師氏, 言告言歸, 薄汚我私, 薄澣我衣。 害澣害否, 歸寧父母。” 詩曰:
“周家厚德在民心, 八百年基自二南。 要識文王新景命, 須看太姒嗣徽音。 儉昭絺綌輝千古, 慶篤螽斯則百男。 聖母也能生聖子, 丕承武烈照來今。”【李承召。】
《周宣王姜后圖》: 姜后賢而有德。 宣王嘗早臥晏起, 姜后脫簪珥待罪於永巷, 使其傅母通言於王曰: “妾之不才, 至使君王失禮而晏朝, 以見君王樂色而忘德也。 夫苟悅色, 必好奢窮慾。 亂之所興也, 原亂之興, 從婢子起, 敢請婢子之罪。” 王曰: “寡人不德, 寔自生過, 非夫人之罪也。” 遂復姜后而勤於政事, 早朝晏退, 遂成中興之名。 詩曰:
“濟濟群臣會且歸, 數竿朝日上彤闈。 由來樂色爲治累, 斗覺懷安是禍機。 直以此身當罪責, 庶敎君子免愆違。 須知赫赫中興業, 正在賢妃一格非。”【朴孝元。】
《齊孝公夫人圖》: 夫人孟姬, 好禮貞一。 公遊於琅琊孟姬從, 車奔, 姬墮車碎。 孝公使駟馬立車載姬以歸, 姬使侍御者舒帷以自障蔽, 而使傅母應使者曰: “妾聞妃后踰閾必乘安車輜輧, 下堂必從傅母阿保, 進退則鳴玉環佩, 內飾則結紐綢繆, 野處則帷裳擁蔽, 所以正心一意, 自斂制也。 今立車無輧, 非所敢受命者也, 野處無帷, 非所敢久居也。 二者失禮多矣, 無禮而生, 不若早死。” 使者馳以告, 公更取安車, 比其反也, 則自經矣。 傅母救之, 不絶。 傅母曰: “使者至, 輜輧已具。” 姬氏蘇, 然後乘而歸。 詩曰:
“當日君王自在閑, 故携妃嬪恣遊觀。 尋常每守操存地, 顚沛那踰禮義關, 早識此身輕似葉, 由來大節重於山。 淸風澟澟長如昨, 驚起人間萬代頑。”【李坡。】
《楚樊姬圖》: 樊姬, 莊王之夫人也。 莊王卽位好狩獵, 樊姬諫, 不止。 乃不食禽獸之肉, 王改過, 勤於政事。 王嘗聽朝罷晏, 姬下庭迎(日)〔曰〕, ‘何罷晏也, 得無飢倦乎,’ 王曰: “與賢者語, 不知飢倦也。” 姬曰: “王之所謂賢, 何也,” 曰: “虞丘子也。” 姬掩口而笑。 王曰: “姬之所笑, 何也,” 曰: “虞丘子, 賢則賢矣, 未忠也。 今虞丘子相楚十餘年, 所薦非子弟則族昆弟, 未聞進賢退不肖, 是蔽君而塞賢路。 知賢不進, 是不忠, 不知其賢, 是不智也, 妾之所笑, 不亦可乎,” 王悅以告虞丘子, 虞丘子避席不知所對。 於是避舍, 使人迎孫叔敖而進之, 王以爲令尹, 治楚三年, 莊王以覇。 史書曰: “楚王之覇, 樊姬之力也。” 詩曰:
“莊王虎視覇圖雄, 爲有樊姬密贊功。 獸肉不曾嘗一臠, 禽荒深欲戒三風。 笑他丘子防賢路, 敢恃君恩擅後宮, 迎得叔敖爲令尹, 使君榮顯耀無窮。”【李承召。】
《漢元帝馮昭儀圖》: 昭儀以選入宮。 帝嘗幸虎圈鬪獸, 後宮(曹從)〔皆坐〕。 熊逸出圈, 攀檻欲上殿, 左右貴人皆驚走, 而馮婕妤直當熊而立, 左右擊殺熊。 帝問婕妤: “人情皆驚懼, 何故當熊,” 對曰: “妾聞猛獸得人而止。 妾恐至御座, 故以身當之。” 帝嗟嘆, 以此敬重焉。 詩曰:
“上苑遊觀勝事重, 三千粉黛藹雲從。 圈熊忽逸來(樊)〔攀〕檻, 宮女皆驚走失容。 萬死獨能當獸立, 一身都是愛君忠。 區區傅輩顔堪厚, 天子咨嗟只屬馮。【朴孝元。】
《漢成帝班婕妤圖》: 婕妤賢才通辨。 始選入後宮爲小使, 俄而大幸爲婕妤。 帝遊於後庭, 嘗欲與婕妤同輦, 辭曰: “觀古圖畫, 賢聖之君, 皆有名臣在側, 三代之下末主, 乃有女嬖, 今欲同輦, 得無似之乎,” 帝善其言而止。 太后聞而喜曰: “古有樊姬, 今有班婕妤。” 趙飛燕姊妹有寵, 驕妬譖訴婕妤云: “挾邪詛祝。” 上顧問, 婕妤對曰: “妾聞死生有命, 富貴在天。 修正尙未蒙福, 爲邪欲以何望, 且使鬼神有知, 不受不臣之訴, 如其無知, 訴之何益, 故不爲也。” 上善其對而憐之, 賜黃金百斤。 詩曰:
“辭輦當時帝眷隆, 漢家妃嬪慕高風。 蒼蠅一點生昭質, 妖燕雙飛入後宮。 早斷死生緣賦命, 敢將禍福訴天公, 黃金不用施虛賞, 長信年年武帳空。”【姜希孟。】
《漢明帝明德馬皇后圖》: 皇后旣正位宮闈, 愈自謙肅, 常衣大練, 裙不加緣。 朔望諸姬主朝請, 望見后袍, 疎麤以爲綺縠, (執)〔就〕乃笑。 后辭曰: “此繒特宜染色, 故用之耳。” 六宮莫不嘆息。 后置織室蠶於濯龍中, 數往觀視, 以爲娛樂。 詩曰:
“從容閨範自柔貞, 坤極居尊戒滿盈。 衣斥奢華便大練, 獄因冤濫感皇情。 每將儉德先閨閫, 肯爲私親借勢榮。 自是平生重蠶織, 魚軒時向濯龍行。”【盧公弼。】
《唐太宗文德長孫皇后圖》: 皇后性仁孝儉素好讀書。 嘗與帝從容商略古事, 而獻替裨益弘多。 上或以非罪譴怒宮人, 后亦陽怒, 請自推鞫, 因命囚繫, 俟上怒息, 徐爲申理, 由是宮閫之中, 刑無枉濫。 上嘗朝怒曰: “會須殺此田舍翁。” 后問爲誰, 上曰: “魏徵每廷辱我。” 后退具朝服立于庭上, 上驚問其故。 后曰: “妾聞主明臣直, 今魏徵直, 由陛下之明故也, 妾敢不賀,” 上乃悅。 詩曰:
“文德謙恭稟性溫, 含洪光大合坤元。 從容啓沃雷霆霽, 好讀《詩》《書》道義存。 賢相見遺臨訣薦, 宮人當譴請囚原。 若非太后扶持力, 殺諫之名誤至尊。”【孫舜孝。】
《宋仁宗光獻曺皇后圖》: 皇后性慈儉, 重稼穡, 嘗於禁苑種穀親蠶。 慶曆中衛卒數人夜作亂, 越屋叩寢殿。 后方侍帝, 聞變遽起, 帝欲出, 后閉閤擁持, 趣呼都知王守忠, 使引兵入。 后度賊必縱火, 陰遣人挈水踵其後, 賊果〔擧〕炬焚簾, 水隨滅之。 詩曰:
“至仁純儉實天資, 民事艱難只自知。 禁苑春深分麥隴, 公桑葉盡長蠶絲。 諫燈已覺能回聽, 應變方驚喜出奇。 千載遺蹤新樣畫, 令人指點重嗟咨。”【朴孝元。】
《宋英宗宣仁高皇后圖》: 皇后生神宗, 神宗立, 尊爲皇太后, 哲宗嗣位, 尊爲大皇太后, 權同聽政。 廷試擧人, 有司請循天聖故事, 帝后皆御殿, 后止之。 又請受冊寶於文德, 后曰: “母后當陽, 非國家美事。 況天子正衙, 豈所當御, 就崇政足矣。” 力行故事, 抑絶外家私恩。 文思院奉上之物, 無問巨細, 終身不取其一, 人以爲女中堯、舜。 詩曰:
“天聖風流不是多,宣仁謙抑更無加。垂簾尙愧臨便殿,受冊何心就正衙!恩數未曾推外戚,勳勞應已在王家。年來新法除還盡,堯舜稱名豈謾誇!”【盧公弼。】
【史臣曰: “聃壽性恬淡, 於物無所求。 父母早沒, 家産盡推與弟。 家甚貧窶, 處之晏如也。 幼孤三弟養育婚嫁, 撫愛不啻如父母, 人多稱之。”】
성종 91권, 9년(1478 무술/명성화(成化)14년) 4월 8일(기해) 4번째기사
심원이 국가의 정황에 대해 상소하다
주계 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이 상서(上書)하였는데, 이러하였다.
예전에 상(商)나라 탕왕(湯王)은 여섯 가지 일로 자기를 꾸짖자, 하늘에서 비가 내렸고8316), 송(宋)나라 경공(景公)은 덕(德)있는 말 세 가지를 하자,
형혹성(熒惑星)이 자리를 옮겼다고 하는데8317), 이제 전지(傳旨) 가운데의 열 가지 일은 오늘날의 깊은 병통이 아닌 것이 없으니, 전하께서 이미 아시는데 신이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구언(求言)의 전교를 받으니, 마음으로 시사(時事)의 근심할 만한 것을 알면서 어찌 차마 잠자코 있겠습니까?
신이 어릴 때에 농장(農莊)에서 자라서 백성의 일을 눈으로 보았는데, 농부와 홍녀(紅女)8318)의 어렵고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무릇 조도 경비(調度經費)는 비록 나라의 정한 제도가 있어서 일찍이 많이 거두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겠지만 탐학(貪虐)한 수령과 간교한 아전들이 별도로 많은 명목을 만들어서 함부로 거두는 것은 어찌 능히 다 금하였겠습니까? 깊고 먼 시골의 백성들은 일찍이 발길이 성읍(城邑)에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진실로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을지라도 능히 현리(縣吏)에게 스스로 분변하는 자가 적은데, 하물며 능히 자사(刺史)의 뜰에 가서 스스로 분변하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백성이 궁해도〈세금〉거두는 것은 더욱 급하게 하니, 아아 전하께서 비록 어진 마음을 가지고 계시며 인자하다는 소문이 있으면서도 백성들이 은혜를 입지 못하고 사정(事情)이 위에 통하지 아니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또 권문(權門)의 종[奴]들이 재산을 많이 저축하여 때를 타서 사채(私債)를 거두고 놓는데, 이식(利息)을 취하는 것이 절도가 없으며 추수함에 미쳐 빚을 독촉하는 무리가 연달아 와서 집 주인의 위엄을 빌어 호소할 데 없는 백성을 침해하므로, 개와 닭도 편히 쉬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농가에서는 풍년의 괴로움이 흉년보다 심하니,
어찌 백성이 궁하고 또 원망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근래에 고을에서 군사를 징발하는데에 비록 친상(親喪)을 당하여 3년상(三年喪)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탈정기복(奪情起復)8319)한다고 하니, 심히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신이 또 듣건대, 유사(有司)에서 풍수설(風水說)의 요망한 말에 의거하여 국도(國都)에 관계가 있는 산기슭의 땅에는 모두 사람의 집짓는 것을 금하고 혹은 이미 지은 집을 철거까지 한다고 하니, 후손에게 남길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전하는 군사에게 상제(喪制)를 마치도록 허락하여 풍속을 돈독하게 하고, 산기슭의 인가(人家)를 금하지 말게 하여 요사한 말을 물리치며, 권문(權門)의 사채(私債)를 금하여 궁한 백성을 살게 하소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만약 사채를 금하면 가난한 자가 의뢰할 곳이 없으니, 아직 그대로 두어서 궁(窮)하고 굶주리는 것을 구제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궁한 백성을 진제(賑濟)하는 것은 바로 수령의 책임이며 권문에서 사사로이 할 바가 아닙니다.
예전에 대부(大夫)의 집에서는 닭,돼지를 기르는 이(利)도 살피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사채를 놓는 일이겠습니까?
지금 백성가운데 사천(私賤)이 십중팔구가 되고 양민(良民)은 겨우 한둘 뿐인데, 편하고 부유(富裕)한 자는 모두 사천이고 빈곤한 자는 모두 공천(公賤)과 양민입니다.
그러한 까닭은 무릇 수령이 부임할 적에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아는 이나 알지못하는 이가 모두 술과 고기를 가지고 전송하면서 그 노비(奴婢)를 잘 보호해 주기를 청하니, 상하(上下)에서 풍속을 이루어 이름하여 ‘칭념(稱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수령이 된 자는 모두 그 문벌(門閥)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에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 무릇 공역(公役)이 있으면 공천과 양민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고 사천에게는 미치지 아니하므로, 양민과 공천은 견디지 못하여 대개 도망쳐 숨어서 사천에게 품팔이하는 자가 많으니, 비록 대대로 전(傳)하는 땅과 집이 있을지라도 보존하지 못하고 모두 권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천은 날로 편하고 부유하며, 향린(鄕隣)의 생활할 바를 잃는 것을 이용하여 무릇 환난(患難)이 있으면 다투어 서로 헐뜯고 모함하는데, 하물며 서로 구호하겠습니까?
이로써 양민과 공천은 날로 더욱 유리(流離)하여 부자(父子)가 서로 보호하지 못하고 부부가 서로 돌보지 못하니, 민생(民生)의 어려움이 오늘보다 심함이 없으며, 나라의 근본이 튼튼하지 못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신이 살피건대, 지금 경외관(京外官)의 고만(考滿)8320)의 오래고 빠름이 이미 다른데,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처음에 하교(下敎)하기를, ‘육조낭관(六曹郞官)으로 고만(考滿)한 자는 모두 수령으로 제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지하고 행하지 아니하시니, 이로써 수령의 임명이 더욱 천해졌고, 또 수령에서 경직(京職)에 제수된 자가 얼마 안 되어, 또 수령에 임명되면 두번 세번 보외(補外)8321)되어 오랫동안 승직(陞職)되지않으니,
수령이 된 자가 어찌 불우(不遇)함을 탄식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조금의 재예(才藝)가 있거나 세력을 가진 자는 모두 수령이 되기를 원하지아니하니, 만일 어버이를 위하는 자가 아니면 대개는 불령(不逞)하고 무식(無識)한 무리로서 처자(妻子)를 먹여 살리기 위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백성들에게 함부로 세금을 거두어 사리(私利)를 취하고 권세가(權勢家)에게 뇌물을 주는 것만 알 뿐이니, 그 임금의 근심을 나누어서 다스림을 함께 하며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불쌍하게 여기는 일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지난번 김주(金澍)의 일이 또한 징험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는 지금 수령들의 예사일인데, 단지 김주만 불행히 실패하였을 뿐이다’라고 하니, 그렇다면 수령이 될 만한 사람을 얻기가 또한 어렵지 아니하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고만(考滿)의 월수(月數)를 개정하여 경외관(京外官)의 차이가 없게 하여, 수령으로서 고만한 이는 먼저 육조 낭관으로 제수하고 육조의 고만(考滿)한 자는 먼저 수령으로 제수하며, 또 좌병(座屛)8322)에 8도 고을의 수령의 이름을 써서 상시로 보고 살피며, 가끔 제비를 뽑아서 공명 정직(公明正直)하고 대체(大體)를 잘 아는 신하를 비밀히 보내어 바로 그 고을에 이르러 백성의 병폐를 조사하여서 출척(黜陟)을 가하면, 수령의 탐혹(貪酷)함이 없어지고 순리(循吏)8323)가 많아질 것입니다.
지금 비록 어사(御史)를 보내지만, 맡는 바가 많고 전교를 받는 것이 은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윤명(綸命)8324)이 겨우 내리자마자 소문이 먼저 이미 사방에 전달되니 아무리 밝게 살피는 어사일지라도 어디로 쫓아가서 거핵(擧覈)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감사(監司)가 된 자가 모두 말하기를, ‘한 도의 수령이 최(最) 8325)에 해당되는 자가 몇이나 있겠는가? 만약 참되게 출척(黜陟)한다면 온전한 사람이 없을 것이지만, 허다한 고을의 뒤에 와서 현재의 수령을 대신할 자도 이와 같지 아니할 것을 어찌 알겠는가? 모두 내치면 맞이하고 전송하는 폐단만 더할 것이니, 차라리 용납해 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며 인순고식(因循姑息)하여 풍속을 이루었으니,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물며 감사가 갈리는 것은 겨우 주기(周期)8326)이니, 고을을 순행해 살피는 것이 겨우 한두 번에 지나지 아니하는데, 어찌 능히〈수령의〉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다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한 가지 일과 한 가지 허물로써 갑자기 출척(黜陟)을 가한다면, 어찌 그릇되지 아니하겠습니까?
지금을 위하는 계책으로는 감사를 신중하게 임명하여 그 벼슬에 오래 있게 하고 기년(期年)으로 바꾸지말게 하면, 수령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자세히 알 수 있어 출척이 그릇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서 반드시 유현(遺賢)8327)이 없을 것이다. 만일 있다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라고 하나, 신은 홀로 그렇지 아니하다고 생각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십실(十室)의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이 있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만이 어찌 홀로 그러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오직 좌우에게 구하기를 독실히 아니하고 쓰기를 오로지 아니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신이 듣고 보아 기억하는 자도 오히려 두서넛이 있으니, 함양현(咸陽縣)에 사는 정여창(鄭汝昌), 태인현(泰仁縣)에 사는 정극인(丁克仁), 은진현(恩津縣)에 사는 강응정(姜應貞)이라고 하는데, 모두 성현(聖賢)의 무리입니다.
신의 듣고 본 바로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천만 사람의 듣고 보는 것이겠습니까? 아아! 부열(傅說)8328)이 고종(高宗)8329)을 만나지아니하였으면 일개 농부(農夫)로 있었을 것이며, 여상(呂尙)8330)이 문왕(文王)을 만나지아니하였으면 일개 어옹(漁翁)일 뿐이었을 것인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신이 또 보건대, 효자 경연(慶延)은 사직(社稷)의 기국(器局)이며 백리지재(百里之才)8331)가 아니므로, 전하께서 특별히 불러보시자 당시에 중외(中外)의 유식한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한 세대가 흥(興)하는데는 반드시 한 세대의 신하가 있는 것인데, 성상이 성명(聖明)하여 즉위한 날이 오래되었으나 아직 인재를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경연을 불러 보시니 반드시 합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급을 뛰어 올려서 6품 벼슬을 임명하자 듣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장차 크게 쓰고자하기 때문에 두루 거쳐서 시험하려는 것이다’라고 하며, 궁촌(窮村)의 등용되지 못한 선비들이 모두 격앙(激昻)하여 목을 늘이고 기다렸는데, 마침내 이산현감(尼山縣監)으로 돌아가자 듣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침정(沈靜) 온후(溫厚)하며 편벽(便僻)하고 첩급(捷給)8332)한 재주가 없어서 세상에서 물리치는 바가 되었으니, 진실로 슬프고 한스럽다. 젊어서 벼슬을 구하지 못하고 늙어서 벼슬에 오르면 마침내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6기(六期)8333)를 지나면 이미 지나치게 늙을 터인데, 생애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한즉 이 일은 자못 선비를 권려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지금 인재얻는 문(門)이 적지아니하니, 이를테면 과거(科擧), 보거(保擧)8334) , 이임취재(吏任取才), 음취재(蔭取才)등의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는 학문(學文)은 많으나 실무(實務)의 경험은 적으며, 보거는 인아(姻娥)8335)의 연고가 아니면 뇌물과 청탁의 무리이며, 이임취재와 음취재는 가벼이 보고 마음을 쓰지아니하니 한갓 문구(文具)8336)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로써 인재를 얻고자 한다면 소홀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전하께서 본래 마음을 알고있는 덕(德)이 높은 선비를 불차탁용(不次擢用)8337)하여 좌우에 두고, 각각 덕업(德業)이 충분히 갖추어져서 족히 사표(師表)가 될만한 자가 있으면 천거하게 하며, 그 다음은 뜻이 독실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마음이 어질고 행실이 닦여진 자를 모두 인견(引見)하고 경사(經史)와 시무(時務)를 물어서 과연 어진가를 살핀 뒤에 임용(任用)하면 천거하는 자가 사사로이 쓰이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세종조(世宗朝)에는 공경대부(公卿大夫)로 부유(富裕)한 자가 심히 드물었고 풍속이 검소함을 숭상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이제까지도 이를 칭송하는데, 이제는 위로는 공경대부부터 아래로 여항(閭巷)에까지 호협(豪俠)한 자들이 서로 화식(貨殖)하기를 다투어서 작은 이익을 극진히 헤아리며 사치를 서로 숭상하고 남의 것을 부러워하여 남과 같게 하기를 애쓰며, 잔치에는 먼 지방의 진미(珍味)가 상에 가득하고 혼인에는 먼저 장획(臧獲)8338) 재산을 논하기 때문에, 시속(時俗)을 따라 사치를 아니하는 자가 드뭅니다.
퇴폐한 풍속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탄식할 만합니다.
신은 청컨대 공경대부들에게 모든 사치에 관계되는 일을 일체 금하게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전고(前古)의 제왕(帝王)으로 어진 이를 써야 옳다는 것을 알지못하는 이가 없었으나, 그 누가 어진 사람인지 알지못하였으며 알게 됨에 미쳐서는 또 뜻이 맞지 아니함이 많았습니다.
간사한 이를 버려야 옳다는 것을 알지못하는 이가 없었으나, 그 누가 간사한가를 알지 못하였으며 알게 됨에 미쳐서는 또 용인(容忍)함이 많아서 나라를 망하는데에 이르게 한 자가 많았습니다.
신이 모르기는 하나, 전하께서는 지금의 집정자(執政者)를 모두 어질다고 여기십니까? 어진이와 어질지못한 이가 섞였다고 여기십니까?
비록 어질지못한 이가 많으나 어진이를 얻지못하였으므로,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부득이하여 인원을 갖춘 것이라고 하십니까?
또는 조종(祖宗)께서 이미 전에 들어 써서〈전하께〉주었으므로 마땅히 어질고 어리석음을 묻지아니하고 아울러 용납하여 조종의 뜻을 저버리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당(唐)나라 요(堯)임금같은 성인(聖人)은 간사한 이와 광관(曠官)8339)을 용납하는 실수가 없었을 듯하나, 사흉(四凶)8340)이 벼슬에 있었으므로 다음의 순(舜)임금이 곧 이들을 죄주었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 세조(世祖)와 당나라 태조(太祖)는 모두 창업(創業)한 불세출(不世出)의 임금이라 마땅히 사람을 임명하는데에 실수가 없었을 것이라 하겠으나, 한 때의 공신(功臣)이 끝내 몸을 보전하지못하거나 혹은 벼슬을 맡지못하였으며, 혹은 그 병권(兵權)을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보면 비록 조종의 훈신일지라도 진실로 이윤(伊尹)8341), 여상(呂尙), 자방(子房)8342)같은 무리가 아니면 권세를 빌려주어서 은혜를 상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진평(陳平)8343)의 재주는 가히 더불어 초(楚)나라를 도모할 수는 있었으나 더불어 수성(守成)8344)할 수는 없었으니, 기묘한 계책은 많으나 그 중(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조께서는 하늘이 준 용지(勇智)와 일월(日月)처럼 밝음으로써 사람을 쓰는데에 구비(具備)한 것을 구하지아니하고 장점과 단점을 비교하고 헤아려서 한 가지 재주에 이름이 있는 자는 쓰지아니함이 없기때문에 한 때의 선비가 반린부익(攀鱗附翼)8345)하여 모두 등용되었는데, 이제 성명(聖明)이 세조에게 미치지못하면서 그 신하들을 모두 쓰고자하니, 그 벼슬을 옮기는 즈음에 어긋나고 잘못됨이 없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세조께서 무인년8346)에 예종(睿宗)에게 훈계하시기를, ‘나는 어려움을 당하였으나 너는 태평할 것이다. 일은 세상을 따라 변하는 것인데, 만약 네가 내 행적(行跡)에 국한되고 변통할 줄을 모르면, 이른 바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워 맞추는 격이다’라고 하셨고,《전(傳)》에 이르기를, ‘사시(四時)의 차례는 공(功)을 이루어놓은 자는 물러난다’고 하였으며,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신하가 총애(寵愛)와 이익으로 이루어 놓은 공(功)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나라는 영구히 아름다움을 보전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전하는 살피소서.
아아! 예로부터 임금은 누구라도 곧은 사람을 등용하고 굽은 사람을 버리고자 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거처가 존귀(尊貴)하고 몸을 엄하게 가지며 여러 신하와 더불어 접하는 데에는 절차가 있으니, 단정하고 공손하지아니함이 없으므로, 응대(應對)에 능숙하고 말을 꾸며서 잘하는 자가 사랑을 받게되어 혹 간사한 것을 충성된 것으로 여기고 속이는 것을 곧은 것이라 여기니, 이에 주(周)나라 사윤(師尹), 진(秦)나라 이사(李斯), 당(唐)나라 이임보(李林甫), 양국충(楊國忠),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 진회(秦檜), 한탁주(韓,胄)의 무리가 그 뜻을 펴게 된 것입니다.
아아! 그 때를 당하여 임금이 능히 스스로 알고 밝게펴서 유전(流傳)하지못하였으므로 후세 사람들을 슬프게 하였는데, 또한 후세에서 지금을 보는 것이 지금에서 예전을 보는 것이 되지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오직 전하는 살피소서.
신이 듣건대 학교는 왕정(王政)의 근본이며 정치를 내는 근원이라고 하는데, 이제 안으로는 국학(國學)8347)으로부터 밖으로는 향교(鄕校)에 이르기까지 스승이 된 자는 거개가 부유(腐儒)로서 겨우 구두(句讀)만을 해득(解得)하였으므로, 비록 10년에 이를지라도 옮겨서 승직(陞職)을 하지 못합니다.
이로써 교화(敎化)가 허물어지고 인재(人才)가 쇠모(衰耗)하여 능히 서로 숭상하지 못하며, 유학(儒學)을 배우는 자는 경서(經書)에 정숙(精熟)한 것을 스스로 누(累)라고 여기며 전적(典籍), 교수(敎授)가 될까 두려워합니다.
지금을 위하는 계책으로는, 어진 공경(公卿)들로 하여금 각각 경서에 밝고 행실을 닦아서 사표(師表)가 될 만한 자를 천거하게 하여, 전하께서 모두 인견(引見)하고 경서를 강(講)하게 하여 그 사람의 고하(高下)에 따라서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관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각도의 향교에 나누어서 가르치게 하며, 국학(國學)에서는 차례로 승천(陞遷)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러서 우천(右遷)8348)하게 합니다.
그리고 일찍이〈대사성〉을 지낸 자는 또한 지사(知事)의 벼슬로서 윤차(輪次)로 관(館)8349)에 출사(出士)하여 학도(學徒)를 가르치게 하고, 외방(外方)에는 감사(監司)로 하여금 훈도(訓導)를 검핵(檢覈)하게 하여, 그 직책에 능한 자를 추천하여서 교수(敎授)에 보임(補任)하고, 교수로서 그 직책에 능한 자는 매년 각도에서 1인씩 초탁(超擢)8350)해 서용(敍用)하게하며, 고(考)에 비록 한 번이 중(中)일지라도 파출(罷黜)하여 풍속과 교화를 진흥시키소서.
전하께서 즉위(卽位)한 이래로 공(功)이 같아도 상(賞)을 주는 것에 높고 낮음이 있었으며, 죄는 같은데 형벌에 가볍고 무거움이 있는 것이 많았으니, 어찌 상벌(賞罰)이 적중함을 잃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부렴(賦斂)이 과중한 것과 공역(工役)이 번거로운 것과 혼인이 때를 잃는 것과 하정(下情)8351)이 위에 통하지못하는 것은 수령에게 달려있고 수령의 근본은 감사에게 있는데, 감사를 옳은 사람을 얻고 상벌이 적중함을 얻는 것은 쓰고 버리는 여하에 달렸습니다.
지금의 폐단을 구제하려는 자들이 모두 법을 엄하게 하고자 하는데, 법이 세밀할수록 폐단이 많은 것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전 진(秦)나라 말기에 이미 옳은 사람을 얻지못하고 다만 법에만 맡기니 법 밖의 간사함이 심하므로, 법이 세밀하지 못하다고 하여 다시 가혹하고 엄한 법을 만들어서 그 흐름이 백성으로 하여금 수족(手足)을 놓을 바가 없게 하여〈나라가〉흙이 무너지는 듯한 형세가 되어 구(救)할 수 없게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겠습니까?
인재를 얻는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인재를 얻는 것이 급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바지함이 학교에 있는 것은 알지못하며, 사람들이 모두 학교가 근본이 되는 것은 알면서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동중서(董仲舒)8352)가 말하기를, ‘임금이 된 이는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百官)을 바르게 하며,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백성을 바르게 하면, 멀고 가까운 지방이 감히 한결같이 바르지 아니함이 없어서, 요사한 기운이 그 사이를 틈탈 수 없고 음양(陰陽)이 순조롭고 풍우(風雨)가 때를 맞춘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천년토록 바뀌지아니할 정론(定論)입니다.
오직 성명(聖明)께서 여기에 뜻을 두시면, 오늘의 재이(災異)가 상탕(商湯)의 가뭄이나 태무(太戊)의 상곡(桑穀)8353)과 같이 다시 종묘(宗廟)와 생민(生民)의 복이 되지아니할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註8316]상(商)나라 탕왕(湯王)은 여섯 가지 일로 자기를 꾸짖자, 하늘에서 비가 내렸고:상(商)나라 탕(湯)임금이 즉위하자 7년동안 가뭄이 계속되었으므로, 스스로 재계(齋戒)하고 회생이 되어 상림(桑林)에서 여섯 가지 일을 가지고 스스로 꾸짖었더니, 천리에 구름이 모여들어서 수천리의 땅을 적셨다는 고사.註8317]형혹성(熒惑星)이 자리를 옮겼다고 하는데:춘추시대 송(宋)나라 경공(景公)때에 형혹성(熒惑星)이 심성(心星)을 침범하니, 경공이 이를 근심하여 사성(司星) 자위(子韋)를 불러 물었는데, 경공이 자위와 더불어 말하면서 덕(德)있는 말 세 가지를 하였더니, 자위가, “하늘이 반드시 인군(人君)께 세 가지 상(賞)을 내려서 오늘 저녁에 마땅히 형혹성이 30리[舍]를 옮겨 갈 것입니다”하였는데, 과연 이날 저녁에 형혹성이 30리를 옮겨갔다고 하는 고사. 형혹성이 나타나면 재화(災禍)가 일어난다고 함 註8318]홍녀(紅女):길쌈하는 여자 註8319]탈정기복(奪情起復):상중에 벼슬에 나가는 일 註8320]고만(考滿):관리의 임기가 찬 것 註8321]보외(補外):높은 지위에 있는 관원(官員)이 잘못이 있을 때에 지방의 수령(守令)으로 좌천(左遷)시켜서 징계(懲戒)하는 일 註8322]좌병(座屛):자리에 치는 병풍 註8323]순리(循吏):법을 잘 지키고 열심히 일하는 수령 註8324]윤명(綸命):임금의 명령 註8325]최(最):전최(殿最), 즉 고사(考査)의 상등을 말함. 전최라는 것은, 관찰사가 각 고을 수령(守令)의 실적을 조사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일로서, 성적을 고사할 때 상(上)을 최(最), 하(下)를 전(殿)이라고 하여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시행하였음 註8326]주기(周期):만1년 註8327]유현(遺賢):등용되지않은 어진이 註8328]부열(傅說):은(殷)나라때 정승 註8329]고종(高宗):은나라 임금 註8330]여상(呂尙):주(周)나라 강태공(姜太公) 註8331]백리지재(百里之才):고을을 다스릴 만한 제능 註8332]첩급(捷給):민첩하고 말에 능숙함 註8333]6기(六期):6년의 임기 註8334]보거(保擧):높은 관원이 담당관아(官衙)의 관원가운데에서 재주가 있거나 공로가 많은 사람을 자기가 책임지고 임금에게 천거하던 일 註8335]인아(姻婭):사위집 편의 사돈 및 동서집 편의 사돈의 두루 일컬음. 사위의 아버지 곧 사돈을 인(姻)이라 하고, 여자 형제의 남편끼리 곧 동서끼리를 아(婭)라고 함 註8336]문구(文具):형식적인 이름만 있는 것 註8337]불차탁용(不次擢用):차례를 밟지않고 벼슬에 올려서 씀 註8338]장획(臧獲):종 註8339]광관(曠官):직무를 태만히하는 관리 註8340]사흉(四凶):요대(堯代)의 네 사람의 악인(惡人). 공공(共工), 환도(驪兜), 삼묘(三苗), 곤(鯀)을 일컬음 註8341]이윤(伊尹):은(殷)나라의 유명한 재상 註 8342]자방(子房):한(漢)나라 창업공신인 장양(張良) 註8343]진평(陳平):한(漢)나라 개국공신 註8344]수성(守成):창업한 나라를 지킴 註8345]반린부익(攀鱗附翼):용의 비늘을 끌어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는다는 뜻으로, 영주(英主)를 섬겨 공명(功名)을 세우는 것 註8346]무인년:1458 세조4년 註8347]국학(國學):성균관 註8348]우천(右遷):높은 자리로 영전함 註8349]관(館):성균관 註8350]초탁(超擢):남을 뛰어넘어 뽑아씀 註8351]하정(下情):민정(民情). 註8352]동중서(董仲舒):전한(前漢)때의 학자 註8353]상곡(桑穀):은(殷)나라 태무(太戊:中宗)때에 뽕나무와 닥나무 두 그루가 조정에 났는데, 하루 저녁에 한 아름이 되었다. 임금이 이를 두려워하여, 재상 이척(伊陟)의 말에 따라 덕(德)을 닦았더니, 두 그루의 나무가 말라 죽었다는 고사
○朱溪副正深源上書曰:
昔商湯以六事自責, 而天乃雨, 宋景公有善言三, 而熒惑徙舍。 今傳旨中十事, 無非今日之深患, 而殿下旣知之, 臣復何言, 然承求言之敎, 心知時事之可憂, 而安忍默默也, 臣少時長於農莊, 目覩民事, 其農夫紅女之艱苦, 不可勝言。 夫調度經費, 雖曰國有定制未嘗厚斂, 而貪宰猾吏別作多少物目, 橫斂濫收者, 其能盡禁歟, 幽遠之民, 其足迹未嘗至城邑, 苟有不得其所, 能自辨於縣吏者鮮矣, 況能自辨於刺史之庭乎, 由是民窮而斂愈急, 嗚呼! 在殿下雖有仁心仁聞, 而民不被澤, 情不上通者, 良以此也。 又有權門僕隷, 多蓄私債, 乘時斂散, 取息無度, 迨秋成, 督逋之徒項背相望, 假家主之威, 侵虐無告, 雖雞犬亦不得寧息。 故農家豐年之苦, 甚於凶年, 奈之何民不窮且怨也, 臣聞近來州郡之發兵也, 雖有親喪願行三年者, 竝奪情起復, 甚非美事也。 臣又聞有司據風水妖說, 乃於國都有干山麓之地, 幷禁人作舍, 或至撤已構家, 甚非燕翼昭謀之道也。 願殿下許軍士終喪制, 邇風俗, 勿禁山麓人家, 以闢邪說, 禁權門私債, 以蘇窮民。 或曰: “若禁私債, 則貧者無所仰給, 莫若姑存之, 以救窮餓”, 臣以爲不然。 賑濟窮民, 乃守令之責, 非權門所得私也。 古者大夫之家, 雞豚且不察, 況私債乎, 今者齊民之中, 私賤十居八九, 良民僅一二, 而安富者摠是私賤, 貧困者摠是公賤(是公賤)與良民, 所以然者, 凡守令之赴任也, 公卿大夫知與不知, 皆持酒肉而餞之, 請其奴婢完護, 上下成俗, 名之曰: “稱念。” 爲守令皆亦多出於其門, 故不敢不從, 凡有公役, 皆令公賤良民當之, 不及於私賤, 良民公賤不能支, 率多逃遁, 以傭諸私賤, 雖世傳田宅亦不能保, 盡歸諸權門。 由是私賤日益安富, 而利其鄕隣之失所, 凡有患難, 爭相擠陷, 況於相周乎, 以是良民公賤日益流離, 父子不相保, 夫婦不相顧, 民生之艱, 莫甚今日, 邦本可謂不固矣。 臣按今之京外官考滿之久速旣異矣, 而殿下卽位之初, 下敎曰: “六曹郞官考滿者, 幷除守令。” 俄而寢不行, 以是守令之任益賤, 而又自守令除京職者未幾, 而又任守令再三補外, 久未陞職, 則爲守令者安得無坎壈之嘆, 故稍有才藝挾勢者, 咸不願守令, 苟非爲親者, 則率皆不逞無識之徒, 爲妻孥口腹之養者, 但知橫斂於民, 以營私賄權而已。 其於分憂共理, 勤政恤民, 末如之何。 曩者金澍之事亦驗矣。 人皆曰: “此當今守令之常事也, 但金澍不幸見敗耳。” 然則守令之得人, 不亦艱哉, 臣請改考滿月數, 不使京外官有異, 而守令考滿者, 首除六曹郞官, 六曹考滿者, 首除守令, 而又於座屛書八道州郡守令之名, 常時觀省, 往往抽韱, 密遣公明正直深知大體之臣, 直抵其郡, 詢訪民瘼, 以加黜陟, 則守令之貪酷戢, 而循吏多矣。 今也雖遣御史, 所掌多而受敎不密, 故綸命纔下而先聲已達於四境, 雖明察御史, 何從而擧覈, 臣聞爲監司者莫不曰: “一道守令當最者有幾, 若誠爲黜陟, 則無全人矣, 許多州郡, 後來繼今者, 又安知不如是也, 與其盡黜以滋迎送之弊, 不若容之爲愈也”, 姑息成風, 莫之奈何。 又況監司之遞僅及周期, 巡審州郡不過一再, 何能悉知其賢否也, 猶以一事一過奄加黜陟, 安得不謬也, 爲今之計, 愼任監司而久其職, 不以期遞, 則得以詳知守令賢否, 而黜陟不謬矣。 臣聞人皆曰: ‘我國褊小, 必無遺賢。 如有之, 安得不知,” 臣獨以爲不然。 傳曰: “十室之邑, 必有忠信”。 我國何獨不然, 惟在左右求之不篤, 用之不專耳。 以臣耳目所記, 尙有數三, 居咸陽縣曰鄭汝昌, 居泰仁縣曰丁克仁, 居恩津縣曰姜應貞, 皆聖賢之徒也。 臣所聞見猶且如此, 況以千萬人之耳目乎, 嗚呼! 說不遇高宗, 一農夫耳, 呂不遇文王, 一漁翁耳, 誰得以知之, 臣又見孝子慶延, 社稷之器, 非百里之才也, 殿下特召見之, 當時中外有識者, 皆以爲一 ‘代之興, 必有一代之臣, 上有聖明, 卽位日久, 猶未得人, 而今乃召慶延, 必有所合。’ 俄而超階任以六品職, 聞之者皆曰: “將欲大用, 故歷試耳”, 窮村遺逸之士, 莫不激昻, 延佇以待之, 竟以尼山縣監歸, 聞之者皆曰: “此人沈靜溫厚, 無便辟捷給之材, 乃爲世所擯, 良可嗟恨。 少不干祿, 臨老待價, 竟何益哉,” 今若經六期, 已過老矣, 生涯幾何, 然則此擧殆非勸士之道也。 今得人之門, 不爲少矣, 有曰科擧, 曰保擧, 曰吏任取才、蔭取才。 然科擧則多文而少實, 保擧則若不是姻婭之故, 是賄謁之徒, 若吏任、蔭取才, 則慢不致意, 徒爲文具耳。 乃欲以此得人, 可謂踈矣。 爲今之計, 擧殿下素所知心碩德之士, 不次擢用, 置諸左右, 令各擧有德業充備足爲師表者, 其次篤志好學, 材良行修者, 皆引見之, 訪以經史時務, 以審其果賢, 然後乃任用, 則薦者不得容私矣。 臣聞在世宗朝, 公卿大夫富者甚鮮, 俗尙儉素, 民到于今稱之, 今也上自公卿大夫, 下至閭巷, 豪俠爭相殖貨, 計盡錙銖, 以華侈相高, 歆羡於人, 營營思齊, 至於燕飮, 則遐方珍味, 狼藉於案, 婚娶則先論臧獲財産, 故不隨俗奢靡者鮮矣。 頹敝風俗, 一至於此, 良可歎也。 臣請公卿大夫凡干華侈之事, 一切禁之便。 臣按前古帝王莫不知賢可用, 而不知其誰爲賢, 及其知也, 又多不合。 莫不知邪可去, 而不知其誰爲邪也, 及其知也, 又多容忍, 以至於敗國者多矣。 臣未知殿下以今執政者爲皆賢耶, 賢不肖混耶, 雖多不肖, 然賢旣不能得, 位旣不可虛, 不得已備員耶, 抑以爲祖宗旣用之於前以貽之, 固當不問賢愚而幷容之, 以不負祖宗之意耶, 唐堯之聖, 似無有容奸曠官之失, 而四凶在位, 舜乃罪之, 漢高祖ㆍ世祖、唐之太祖, 皆創業不世之主, 宜無任人之失, 然其一時功臣, 終不能保, 或不任事, 或收其兵權。 觀此則雖祖宗勳臣, 苟非伊、呂、子房之輩, 不可假權而傷恩也。 故陳平之才, 可(興)〔與〕謀楚, 而不可與守成, 以其多奇計而未有其中也。 我世祖以天錫勇智日月之明, 與人不求備, 校長量短, 名一藝者無不庸, 故一時之士攀鱗附翼, 而咸得其用, 今聖明不及世祖, 而欲盡用其臣, 無奈遷轉之際舛錯失當耶, 故世祖於戊寅年訓睿宗曰: “予當屯而汝當泰。 事隨世變, 若汝局於吾迹, 而不知變通, 則所謂圓鑿而方枘也。” 傳曰: “四時之序, 成功者去。” 《經》曰: “臣罔以寵利居成功, 邦其永孚于休”, 惟殿下察之。 嗚呼! 自古人主誰不欲擧直而措枉, 然居尊持嚴, 其與群臣接之有時, 問對有節, 莫不端恭捷給眩姸沽寵, 故或以奸爲忠, 以詐爲直, 此周之師尹、秦之李斯、唐之林甫ㆍ國忠、宋之安石ㆍ秦檜ㆍ侘胄之輩, 得以肆其志也。 嗚呼! 當其時人主不能自知, 而昭布流傳, 使哀後人, 又安知後之視今, 不爲今之視古耶, 惟殿下察之。 臣聞學校, 王政之本而出治之源, 今也內自國學, 外至鄕校, 爲師表者, 率皆腐儒, 僅解句讀, 雖至十年, 不見遷陞。 以是敎化陵夷, 人才衰耗, 莫能相尙, 業儒者以精熟經書爲自累, 恐爲典籍敎授也。 爲今之計, 莫若令賢公卿, 各擧經明行修堪爲師表者, 殿下皆引見之, 講經書, 隨其人高下, 爲成均館及四學之員, 其次分敎各道鄕校, 國學則以次陞遷至大司成右遷, 而曾經者, 亦帶知事職, 輪次仕館以敎學徒, 外則令監司檢覈訓導, 而能於其職者薦之補敎授, 敎授而能於其職者, 每年各道各一人超擢敍用, 於考雖一中亦罷黜, 以振風敎。 殿下自卽位以來, 功同而賞有高下, 罪一而罰有輕重者多矣, 豈非賞罰之失中也, 由是觀之, 則賦斂所以重, 工役所以煩, 婚嫁之失時, 下情之不通在守令, 守令之本在監司, 監司之得其人, 刑賞之得其中, 在用舍如何耳。 今之救弊者, 皆欲峻法, 殊不知法密而弊多。 昔秦之末, 旣不得人而徒任法, 法外之奸滋甚, 則以爲法不密, 乃更爲刻峻, 其流至於吏民無所措手足, 土崩之勢成而莫之救也。 然則何爲而可, 典人! 人皆知得人之爲急, 而不知其具在學校, 人皆知學校爲本, 而不知其源之有在也。 薰仲舒曰: “爲人君者正心以正朝廷, 正朝廷以正百官, 正百官以正萬民, 遠近莫敢不一於正, 而無有邪氣間其間, 陰陽調而風雨時”, 誠千載不易之定論也。惟聖明留意焉,則安知今日則安知今日之沴不如商湯之旱,大戍之桑更爲宗廟生民之福乎,
성종 129권, 12년(1481 신축/명성화(成化)17년) 5월 27일(신축) 2번째기사
성균관진사 이적이 자연재해를 없애는 계책에 대해 상소하다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이적(李績)이 상소(上疏)하기를,
“엎드려 보건대,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아가시고, 소의간식(宵衣旰食)11257)하여 날로 더욱 조심하시니, 마땅히 아름다운 징조가 감응하고 백곡(百穀)이 잘되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몹시 가물고 비가 내리지않으며, 거기다가 우박(雨雹)까지 더하여 성상(聖上)께 걱정을 끼치는 것입니까?
신이 생각하건대, 천심(天心)이 인군(人君)을 인애(仁愛)하므로, 혹 그럴 수도 있는 천변(天變)을 가지고 요(堯)임금, 탕(湯)임금의 성자(聖資)에다 더욱 공구수성(恐懼修省)하기를 더하고, 더욱 더 거룩하고 슬기롭게 하여 우리나라의 끝없는 복(福)을 넓히려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혹은 그럴 수도 있는 천변(天變)으로 여기시지아니하고, 감선(減膳)하시고, 철악(輟樂)11258)하시고, 정전(正殿)에 나아가지아니하시면서 스스로 자기 덕(德)을 잃은 것이 하늘에 감응(感應)하여 재앙을 부른 것이라고 이르시고, 곧 구언(求言)11259)하는 교서(敎書)를 내리시어 재앙을 없애는 계책을 듣고자하시니, 신은 삼가 시의(時宜) 11조목(條目)을 가지고 다음에 기록하여 바칩니다.
그 첫째는 하늘의 경계(警戒)를 삼가자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하늘과 사람은 한 가지 이치이고, 조그만치라도 구분이 없다고 하니,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감응하면 천변(天變)이 위에서 감응하여서,
재앙을 내리고 상서(祥瑞)를 내리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이 부를 뿐입니다. 그러나 속이지않는 것이 천명(天命)인데도 혹은 믿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니, 요(堯)임금, 탕(湯)임금때에도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있었고, 환제(桓帝)11260), 선제(宣帝)11261)때에도 풍년이 드는 경사(慶事)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도(道)가 있음이 지극하더라도 반드시 재앙을 없앨 수가 없고, 도(道)가 없음이 지극하더라도 또한 상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써는, 재앙을 만나서 공구(恐懼)할 줄 알면, 건양(愆陽)11262)과 복음(伏陰)11263)이 변하여 때로 비가 되고, 때로 볕이 되며, 상서를 만나서도 교일(驕逸)하면 감로(甘露)와 예천(醴泉)이 마침내 마음을 방탕하게 만들고, 덕(德)을 잃는 도구가 되기에 족한 것입니다.
9년의 홍수(洪水)와 7년의 가뭄이 능히 요임금과 탕임금의 정치를 해치지못하였던 것은 이러한 재앙을 만나서 공구(恐懼)할 줄 알았던 효과이요, 풍년,대풍년의 상서가 마침내 다른 해의 흉년을 구제하지못하였던 것은 이러한 상서를 만나서 교일(驕逸)한 징험이었습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더욱 경계하고 공구(恐懼)하는 마음을 부지런히 하여 양민(養民)하는 정치를 깊이 생각하소서.
만약 천변(天變)을 만나거든, 정치가 잘못되어서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이 뒤바뀌어, 어질고 유능한 자를 다 등용하지 못하였으며, 간사(奸邪)한 자를 다 폐출(廢黜)하지 못하였으며, 사송(詞訟)이 아직 다스려지지 못한 바가 있으며, 형옥(刑獄)에 억울하고 엄체(淹滯)된 바가 있느냐고 생각하소서.
이러한 몇 가지는 두렵고 황공하고 무섭고 걱정하기를 요(堯)임금 , 순(舜)임금이 조심하고 두려워하던 것과 같이하고, 탕임금, 선왕(宣王)이 경계하고 공구하던 것과 같이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쉬지않는다면, 한 마음으로 공경하는 것이 하늘의 마음을 몰래 감응시키고, 천운(天運)을 말없이 합(合)하게 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음양(陰陽)이 조화될 것입니다.
그 둘째는 구황(救荒)을 급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천재(天災)가 유행(流行)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공통된 걱정입니다.
이리하여 황정(荒政) 12가지로써 주(周)나라에서는 흉년드는 해가 없었고, 백성들을 옮기고 곡식을 옮겨서 양(梁)나라에서는 굶주리는 백성들이 없었으니, 미리 방책을 갖추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열성(列聖)이 서로 잇달아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중하게 여기고,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흉년에 대비하였으니, 인정(仁政)이 지극히 깊은 것입니다.
어찌하여 한 번 가뭄의 재앙을 만나면 백성들에게 채색(菜色)11264)이 있고, 들판에는 굶주려죽는 자가 있습니까?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3도(道)가 더욱 심한데, 이것은 진실로 무엇 때문입니까?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수령(守令)이 성상께서 걱정하고 부지런히 하시는 것을 본받지아니하고, 백성들의 굶주리는 것을 염려하지아니하여,
구황(救荒)의 조문이 비록 상세하지만 한갓 문구(文具)로 봅니다.
이로 말미암아 원망이 그치지 아니하고 화기(和氣)가 이르지 아니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경차관(敬差官)을 나누어 보내어 황정(荒政)을 검찰하게 하되, 부필(富弼)11265)이 청주(靑州)에 있을 때처럼 굶주리는 백성들을 살린 것이 매우 많은 자가 있으면 차례를 뛰어넘어 상을 줄 것이요,
그렇지 아니한 자는 죄를 준다면, 우리 백성들이 거의 다시 힘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요, 천재(天災)도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
그 세째는 상평(常平)의 법을 부활하자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이회(李悝)11266)때 이미 평적(平糴)11267)의 세금이 있었고, 경수창(耿壽昌)11268)때 이르러 비로소 상평(常平)의 방책이 결정되어 곡식이 천(賤)해지면 값을 올려서 곡식을 사들여서 농민에게 이롭게 하였고, 곡식이 귀(貴)해지면 값을 내려서 곡식을 팔아 백성들에게 이롭게 하였는데, 이것은 구황(救荒)의 임시방편으로써는 상책(上策)입니다.
지금 한재(旱災)가 이미 심하여 백성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입을 열어 먹기를 바라는데, 물가(物價)는 뛰어올라 귀해져서 면포(綿布) 1필(匹)의 값이 미속(米粟) 3말[斗]입니다.
기근(飢饉)의 징조가 비록 병진년11269), 경인년11270)이라 하더라도 이때보다 심한 것은 있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부지런히 백성들의 괴로움을 불쌍히 여겨서 옛날 상평(常平)의 법을 생각하시고, 백성들에게 곡식을 바꾸도록 허락하시니, 공사(公私) 양쪽으로 편하고 중외(中外)에서도 마음으로 즐거워하는데, 불행하게도 조정(朝廷)의 의논이 일치하지 못하여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이를 듣고 머리를 숙이고 기운을 잃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빈민(貧民)들로 하여금 포목을 바치고 곡식을 바꾸도록 허락하여 한 나라의 굶주리는 자에게 내려주소서.
그 네째는 단송(斷訟)을 다시 핵문(覈問)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 사송(詞訟)이 엄체(淹滯)되는 것을 특별히 염려하여 따로 3도감(三都監)을 세워서 모든 장례원(掌隷院)의 미결(未決)된 사송(詞訟)을 기필코 몇 개월안에 판결을 끝내고 다시 소송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봉행(奉行)하는 관리들이 한갓 속결(速決)하기에만 힘써서 갑(甲)은 가(可)하고 을(乙)은 부(否)하다고 능히 상세한 변별(辨別)을 하지아니하여, 혹은 흑백(黑白)을 거꾸로 뒤바꾸고 사정(邪正)을 서로 뒤범벅이 되게 하였으므로, 세월이 오래도록 조상(祖上)에서 자손에게 전해오는 노비[臧獲]를 후세자손들이 말 한마디 잘못으로 하루아침에 속공(屬公)되는 경우도 또한 혹은 있었습니다. 그 원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이것도 또한 화기(和氣)를 상(傷)하여 재앙을 부르는 일단(一端)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땅히 일이 없을 때에 다시 도감(都監)을 세워서 독촉하지 말고 자세하게 시비(是非)를 변별(辨別)하고, 그 주고 빼앗는 것을 마땅히 이치대로 한다면, 백성들에게 저절로 원망이 없어질 것인데,
무슨 원통하고 억울함이 있어서 화기(和氣)를 감상(感傷)하겠습니까?
그 다섯째는 전조(田租)를 감(減)하자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유약(有若)11271)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풍족하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풍족하지 않겠습니까?’하였습니다.
진실로 왕자(王者)의 부(富)는 백성들에게 간직되어 있다고 합니다.
지난 해 이래 중국조정의 사신(使臣)이 잇달아 이르므로, 사방(四方)의 백성들이 분주하게 맞이하고 보내는데, 공억(供億)하는 물건이 일체 민간(民間)에서 나오므로, 바로 농사철을 당하여 농사를 폐(廢)하거나 생업(生業)을 잃게 됩니다.
지난해에 이와 같았는데, 금년에도 또 이와 같으니, 조세(租稅)의 납입(納入)을 그들이 어찌 능히 판비(辦備)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세종조(世宗朝)에는 경중(京中)의 군자감(軍資監)의 곡식이 30만 휘[斛]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1백여만석(碩)입니다.
이로써 미루어보건대, 경외(京外)의 축척(畜積)의 많음이 금시(今時)보다 많았을 적이 있지아니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세종때에는 흉년을 만나면 반드시 전조(田租)의 반(半)을 감(減)해 주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3배의 곡식을 가지고도 심한 흉년을 만나서 조세를 감하라는 명령을 들은 적이 없었음을 신은 그윽이 한스러워합니다.
옛날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조세를 감하는 명령을 내렸으나, 창름(倉廩)에는 붉게 썩어가는 묵은 곡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 세종(世宗)과 문제(文帝)의 정치를 본받아서 금년의 전조(田租)의 반(半)을 특별히 감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여 화기(和氣)를 감응(感應)하고 부른다면, 재앙이 변해서 상서(祥瑞)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여섯째는 삼포(三浦)의 왜인(倭人)들을 쇄환(刷還)하자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고려(高麗)의 말엽부터 도이(島夷)가 침구(侵寇)하여 때를 틈타 도둑질해서 평민(平民)을 겁략(劫掠)하고 전곡(錢穀)을 약탈하는 폐단이 여러 해 동안 쌓여 왔으므로, 우리 조종조(祖宗朝)에서 편장(偏將) 1인에게 명하여 대마주(對馬州)의 소추(小醜)를 무찌른 다음 문교(文敎)를 펴고 무력(武力)을 그치게 하여 회수(懷綏)하는 방도를 보였습니다.
세종(世宗)께서는 더욱 무휼(撫恤)하는 정책을 펴시어, 도이(島夷)가 의(義)를 사모하고 하나의 가게[廛]를 받아 편맹(編氓)이 되기를 원하므로, 그 내부(來附)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처음에는 60호(戶)로써 약정(約定)하여서 3포(三浦)에 나누어 살게 하였는데, 이것은 한때의 오랑캐를 막는 임시 방책이지 만세토록 시행할 상경(常經)의 방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후 5, 60년사이에 혹은 인구가 날로 번창하기도 하고, 혹은 함부로 숨기고서 내투(來投)하기도 하여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항거(恒居)11272) 왜인(倭人)은 제포(薺浦) 가 3백 8호(戶)에 남녀 아울러 1천 7백 22구(口)이며, 부산포(釜山浦)가 67호(戶)에 남녀 아울러 3백23구(口)이며, 염포(鹽浦)가 36호(戶)에 남녀 아울러 1백31구(口)인데, 합하여 계산하면, 4백11호(戶)에 2천1백76구(口)입니다.
거기다가 몇년 동안 인구가 모여 든다면, 신은 그들이 억만(億萬)으로 계산되어 남쪽 지방에서 반수를 차지할는지 알 수 없을까봐 두렵습니다.
만약 그들을 어루만지고 어거하는 데 그 방도를 잃는다면 진실(晉室)의 화(禍)11273)가 금일에도 생기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옛날에 왜인(倭人) 평도전(平道全)의 일은 가위 밝은 증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옛말에, ‘덩굴이 우거지면 도모하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싹트기 전에 이를 도모하여 본토(本土)로 쇄환(刷還)하지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변방의 군사들의 많고 적음을 알고 창름(倉廩)의 허실(虛實)을 엿보고 도로(道路)의 험하고 평탄함을 알고 있는지도 또한 오래 되는데, 지금 까닭없이 하루 아침에 갑자기 그들을 돌려 보낸다면, 반드시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서 흔단(釁端)을 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그 호구(戶口)의 많고 적음을 검사한다고 핑계하고, 우리 백성들과 섞여 살지못하게 하고, 그들이 병기(兵器)를 사사로이 간직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 출입(出入)하는 절차를 제한하고, 그들이 함부로 숨기고 내투(來投)하는 것을 막아서 그들로 하여금 점점 늘어나지 못하게하는 것만 같지못합니다. 거기다가 도주(島主)에게 선유(宣諭)하기를 더하여 약속(約束)을 거듭 밝혀서 단지 60호(戶)만 머물게 하고, 돌아가고자하는 자는 그 여비의 물건을 풍부하게 주어서보내고, 머물고자하는 자는 그 늠속(廩粟)11274)을 박(薄)하게 하여 그들을 대접하면,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이를 것이요, 위무(慰撫)하고 방어(防禦)하는데 적당함을 얻으면, 그들은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질 것이요,
우리가 이하(夷夏)11275)의 구별이 있으면 비단 당금(當今)의 궤석(几席)의 걱정을 없애 줄뿐만아니라, 또한 후세자손의 걱정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일곱째는 서토(西土)를 실(實)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신이 보건대, 평안도(平安道) 한 도는 서쪽으로 중국으로 통하고, 북쪽으로 산융(山戎)11276)과 맞닿아 있어서 실로 우리나라의 문호(門戶)이기 때문에 조종(祖宗)께서는 그 곳을 공허(空虛)하다고 생각하여 남방의 백성들을 옮겨서 채우고, 이에 10년동안 복호(復戶)를 해주었으므로, 그 인구가 날로 번창하고 사마(士馬)가 정강(精强)해야 마땅한데도, 무엇 때문에 근년 이래로 유망(流亡)이 서로 잇달으고 군액(軍額)이 날로 줄어들고 사마(士馬)가 지치고 허약하여서 성상의 소의간식(宵衣旰食)에 근심을 끼치는 것입니까?
대저 평안도 한 도는 일년안에 성절사(聖節使), 천추사(千秋使), 정조사(正朝使)가 있고, 혹은 따로 주청사(奏請使), 사은사(謝恩使), 진하사(進賀使)가 있으며, 거기다가 가을철 방어(防禦)할 즈음에는 허다한 조전장(助戰將)이 있고, 군관(軍官) 수백명이 있으며, 간혹 서정(西征)의 일이 있으며, 또한 중국 조정의 사신이 있으므로, 역마(驛馬)가 이들을 맞이하고 보내는데 지치며, 군현(郡縣)에서 이들을 공억(供億)하는데 고생합니다.
그래서 칠참(七站)사이에는 말이 쓰러져죽고 사람이 넘어져 죽어있으며, 혹은 그 고생을 참지 못하여 동녕위(東寧衛)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자도 많으므로, 드디어 백성들의 사는 땅이 쓸쓸하게 되어 잡목에 무성한 숲만이 안계(眼界)에 닿으니, 1천리의 기름진들판이 변하여 이리가 울부짖고 귀신이 통곡하는 장소로 되었습니다.
만약 한 번 두 눈으로 이곳을 거치게 된다면, 어찌 통심(痛心)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인민(人民)은 정백(情魄)11277)이요, 토지(土地)는 구간(軀幹)11278)이라’고 하였는데, 정백(情魄)이 가버리고 구간이 비록 남아있더라도 장차 무엇에 쓰겠습니까?
국가에서 남쪽의 백성들을 옮겨서 서토(西土)를 채운다면, 서토는 비록 실(實)해지더라도 남쪽 지방은 또한 텅비게될 것이니, 이것은 동쪽을 떠받치면 서쪽이 무너지고 옷깃을 여미다가 팔꿈치를 보이는 셈이므로, 신은 그것이 좋은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승니(僧尼)가 된 자가 거반(居半)입니다.
무인년11279)부터 회암사(檜巖寺), 유점사(楡岾寺) 두 절의 역사(役事)로 도첩(度牒)11280)을 받은 자는 6만3천여인(人)인데, 그 밖에 강경도감(講經都監)과 의묘(懿廟)11281)의 부역(赴役)으로 도첩을 받은 자는 그 숫자가 또한 갑절이나 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무인년(戊寅年)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20여년사이에 머리를 깎은 자가 몇만명인지 알지못하는데, 이것은 양민(良民)을 쓸데없는 곳에다 버리는 셈입니다.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 왕도(王道)를 밝히시고 이단(異端)을 물리치시어, 승니(僧尼)가운데 나이 60세 이하인 자를 추쇄(推刷)하여 모두 속세(俗世)로 돌아오게 하여 각각 가정의 즐거움을 가지도록 하소서.
다만 그들을 공한지(空閑地)에 들어가게 하고, 복호(復戶)를 수십년동안 해 준다면 거의 길이 자립(自立)할 것이니, 곧 국가의 이익입니다.
그래서 농사에 힘쓰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수령(守令)으로서 황패(黃覇) 11282), 왕성(王成)11283)과 같은 무리를 골라서 자목(字牧)11284)의 임무를 맡겨 백성들에게 농경(農耕)과 양잠(養蠶)을 권장하여 능히 노력하고 게으르지않게 한다면, 장차 유민(流民)들이 모두 힘을 회복하는 것을 보게 되어 자연히 언덕의 폐허(廢墟)가 동량(棟樑)으로 될 것이요, 황폐한 곳이 농상(農桑)의 땅으로 될 것이므로, 닭울음 소리와 개짓는 소리가 사경(四境)에 달(達)할 것입니다.
그 여덟째는 유일(遺逸)11285)을 천거(薦擧)하자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옛날에 거룩한 황제나 총명한 왕(王)은 거리의 미천(微賤)한 사람도 찾아서 등용하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도 널리 초치(招一)해서 백관의 자리에 서게 하여 도유우불(都兪吁咈)11286)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므로, 태평(太平)의 나라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성탕(成湯)이 이윤(伊尹)을 초빙(招聘)하였고, 고종(高宗)의 부열(傅說)을 천거하였고,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여망(呂望)11287)을 등용하였고, 소열제(昭烈帝)가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돌아보았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향거 이선(里選)의 법이 한 번 폐지되면서부터 아직 삼빙(三聘)11288), 삼고(三顧)11289)의 예(禮)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어진이를 구하는 방법을 오로지 과목(科目)11290)에만 의지하게 되니, 이 길로 출세(出世)하지아니하면 비재(非才)라고 일컬어 지목하고 으레 속리(俗吏)로서 대우합니다.
비록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고, 충효(忠孝)의 자질(資質)이 있고, 나라를 이롭게 할 계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에 베풀 수가 없으니, 고재(高材)가 많이 근심하고 슬퍼하는 처지입니다.
천거(薦擧)하는 법(法)이 비록 아름다운 법전이라고 하나, 그렇지만 천거(薦擧)하는 자는 대개 모두 재상(宰相)이나 사대부(士大夫)의 족속(族屬)이며, 그들의 족속이 아니면 반드시 모두 사사로이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못한 것을 살펴보지도 아니하고 서로 추천(推薦)하고 천거(薦擧)하므로, 아직 산림(山林)의 훌륭한 선비 한사람이라도 아무개의 추천(推薦)이나 아무개의 천거(薦擧)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지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얻어서 관직에 두고 초야(草野)에는 유현(遺賢)11291)을 없게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허소(虛疏)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생각이 지극한 정치를 하는데 미쳐서,
옛날의 예문(禮文)을 상고하시고, 먼저 선성(先聖)에 전(奠)드리고, 다음에 선농(先農)에 제사지내고, 예로써 대사(大射)11292)를 거행하시는 등 제왕(帝王)의 성사(盛事)에 관한 것을 거행하지아니함이 없으나, 오로지 궁정(弓旌)1129 3)으로 어진이를 초청하고 윤백(輪帛)11294)으로 선비를 맞이하는 일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으니, 어찌 성대한 시대에 하나의 흠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10실(室)11295)의 고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럽고 이로운 자가 있다’고 하였으니, 재주를 다른 시대에 구하지않더라도 쓰는데에 어찌 사람이 없다고 걱정하겠습니까? 다만 윗사람들이 구(求)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 아홉째는 자격(資格)에 따르자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옛날에는 관리를 임명할 때에는 오로지 어진이만 쓰고, 일을 시킬 때에는 오로지 능력에만 따라서, 오로지 재덕(才德)만으로 사람을 구(求)하였다고 하니, 어찌 자격(資格)의 높고 낮은 데에 일찍이 구애되었겠습니까?
지금 사람을 쓰는 것은 반드시 자격에 따라서 구차스레 세월을 가지고 승진시키고 좌천시키기 때문에 선비가운데 벼슬하지못한 자는 권문(權門)에 분주하게 다니면서 요행으로 빨리 벼슬하기를 구해서 됫박이나 말박의 녹(祿)을 바라지, 평안하고 조용하게 물러앉아서 재행(才行)을 스스로 닦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아직 듣지못하였습니다.
선비가운데 이미 벼슬한 자는 우유(優游)하게 날짜를 헤아리면서 하나의 직질(職秩)이 올라가기를 바라지, 분기(奮起)하여 일에 공(功)을 세우고 정성을 다하기를 마음먹는 자가 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선비의 기풍이 날로 허물어지고, 염치(廉恥)의 도리가 없어지니, 이것은 작은 연고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데도 어질고 능력있는 이를 얻어서 관리자리에 두고자한다면, 그것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옛날 금(金)나라 인주(人主)가 재상(宰相)에게 훈시(訓示)하여 이에 말하기를, ‘사람을 쓰는 도리는 스스로 그 장년(壯年)에 마음과 힘이 정강(精强)하여질 때를 당하여 써야 한다. 만약 자격(資格)에 따르는데에 구애된다면 왕왕 혹은 노인에 이르게 될 것이니, 이것은 생각하지않음이 심한 것이다. 또 세월을 가지고 자격(資格)을 고찰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보통 사람을 대우하려는 것인데, 만약 재주와 행동이 보통 사람보다 지나치다면, 어찌 보통 사람의 제도에 얽매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만세(萬世) 인주(人主)의 사람을 쓰는 귀감(龜鑑)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 전조(銓曹)로 하여금 그 단점을 비교하고 그 장점을 헤아리게 해서, 오로지 그 그릇에 따라 알맞게 쓰시도록 하소서.
그 인물(人物)의 어질고 어질지못한 것을 살피고, 그 직사(職事)를 이루고 이루지못한 것을 고찰해서, 과연 어질고 능력있다면 차례를 뛰어넘어 이를 쓸 것이요, 과연 용렬(庸劣)하고 노둔(駑鈍)하다면 비록 아침에 제수(除授)하였더라도 저녁에 폄출(貶黜)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세월이 오래 되고 가까운 것이나, 전최(殿最)11296)의 많고 적은 것에 구애되겠습니까?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자격(資格)을 가지고 사람을 쓰면 소인(小人)에게는 다행할 것이나, 군자(君子)에게는 불행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열째는 언로(言路)를 열라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우서(虞書)를 보건대, 순(舜)임금이 즉위하자, 사악(四岳)11297)과 의논하여 사방의 문(門)을 여시고, 사방으로 눈을 밝히시어 사방으로부터 잘 들리도록 하였다고 하였는데, 순임금은 큰 성인(聖人)인데도 오히려 또한 언로(言路)를 열고 넓히기를 이와 같이 하기에 급급(汲汲)하였으니, 하물며 그 아래에 있는 사람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인군(人君)으로서 직언(直言)을 듣기를 싫어하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다면 구중(九重)의 깊은 궁궐에서 들으려 하여도 널리 듣지못할 것이요, 보려고 하여도 두루 보지못할 것이니, 민간 사정의 안락과 근심을 어찌 알겠으며,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어찌 듣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나라의 일이 장차 날로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시던 초기에 먼저 대신(大臣)을 찾아서 치도(治道)를 강구(講究)하시고, 다음으로 어진 사람을 골라서 대간(臺諫)에 임용하여 허심 탄회(虛心坦懷)하게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시고 언로(言路)를 넓게 열었으니, 이것은 순임금의 훌륭한 마음씨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금일의 마음을 잊지 않으시면 우리나라의 끝없는 아름다움이 뻗칠 것입니다.
그 열한째는 그 끝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상서(商書)를 보건대,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에게 훈계(訓戒)하기를, ‘그 끝을 삼가려거든 그 처음을 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인주(人主)의 한 마음을 공격하는 것은 여러 가지이니, 한 생각의 차이로 만 가지의 선(善)이 무너져버리고, 유전(遊田)11298)에 빠져 버리거나 폐첩(嬖妾), 총희(寵姬)에게 유혹되어 정사(政事)를 게을리하고 마음대로 일락(逸樂)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정관(貞觀)11299)의 초기에는 아름답다면 아름다왔지만 십점소(十漸疏)11300)를 보면 침체하여 처음과 같지못하였으며, 개원(開元)11301)의 초기에는 밝다면 밝았지만 천보(天寶)11302)의 말기를 보면 기의 끝을 잘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천지(天地)가 일정한 운행(運行)이 있은 다음에야 농사가 이루어지며, 제왕(帝王)이 일정한 덕(德)이 있은 다음에야 정치의 공적이 나타나는데,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경연(經筵)을 여시고 완호(玩好)하는 물건을 끊으시고 제왕(帝王)의 정치를 베풀기에 매우 부지런하시고 매우 간절하시어, 삼대(三代)11303)의 훌륭한 예(禮)를 거행하지아니함이 없으시니,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머리를 숙이고 칭하(稱賀)하면서 모두 말하기를,
‘요(堯)임금, 순(舜)임금의 거룩함이 오늘날에 다시 생겨났다’고 합니다.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 창업(創業)의 몹시 어려움을 아시고, 수성(守成)의 쉽지 않음을 생각하시어 이미 평안하다고 이르지 마시고, 그 위험스러울 때를 생각하시며, 이미 잘 다스려진다고 이르지 마시고, 그 어지러울 때를 생각하시어 항상 조심하고 삼가서 더욱 경계하고, 공구(恐懼)하기에 부지런하여 우리 동방(東方)의 억만년토록 끝없는 아름다움을 여신다면, 재앙의 징조는 변하여 아름다운 징조로 될 것이며, 천재(天災)는 변하여 상서(祥瑞)로 될 것입니다.”하였다.
글이 올라가니,
임금이 읽어보기를 끝마치고, 승정원(承政院)에 내리면서 말하기를,
“이는 글을 잘하는 자이다. 그 아비의 이름을 써서 아뢰라”하였다.
음식을 후하게 대접할 때 이적(李績)이 바야흐로 관직을 구하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 상소를 매진(媒進)하는 계제(階梯)로 삼았다.”하였는데,
얼마 있지아니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註11257]소의간식(宵衣旰食):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정복을 입고, 해가 진 후 저녁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임금이 정사(政事)에 부지런함을 비유한 것임註11258]철악(輟樂):음악을 거두는 것 註11259]구언(求言):나라에 재변(災變)이 있을 때 임금이 근신하는 의미에서 시정(時政)의 잘못과 민폐에 대한 바른 말을 구하던 제도 註11260]환제(桓帝):한(漢)나라 임금 註11261]선제(宣帝):한나라 임금 註11262]건양(愆陽):여름철에 볕에 나지않음 註11263]복음(伏陰):여름철에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것 註11264]채색(菜色):굶주리는 기색 註11265]부필(富弼):송(宋)나라 초엽의 문신(文臣). 그가 청주(靑州)에 부임하여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는데,《송사(宋史)》를 보면 15세이상에게는 하루에 1되, 15세이하는 5홉, 5세이하는 제외하여 기민(饑民)을 구제하여 살려냈음 註11266]이회(李悝):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나라 사람 註 11267]평적(平糴):풍년에 곡식을 거둬서 사들였다가 흉년이 들면 그것을 싸게 내어 팔아 쌀값을 조절하고 기근(饑饉)을 구제하는 법 註11268]경수창(耿壽昌):한(漢)나라 선제(宣帝)때 사람 註11269]병진년:1436 세종18년 註 11270]경인년:1470 성종원년 註11271]유약(有若):공자 제자 註11272]항거(恒居):항상 거주하는 것 註11273]진실(晉室)의 화(禍):중국 진(晉)나라때 북방의 기마민족(騎馬民族)이 서서히 남진(南進)하여 한(漢)민족을 압도하고 진나라를 멸망시킨 화를 말함 註11274]늠속(廩粟):관(官)에서 주는 곡식 註 11275]이하(夷夏):중국과 오랑케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우리나라와 왜인을 말함 註11276]산융(山戎):북융(北戎) 註11277]정백(情魄):정신 註11278]구간(軀幹):몸체 註11279]무인년:1458 세조4년 註11280]도첩(度牒):조선조 초기의 억불정책(抑佛政策)으로, 나라에서 중에게 발급하던 일종의 신분증명서. 양반은 정포(丁布) 1백필, 평민은 1백50필, 천인은 2백필을 받고 발급하였는데, 입적(入寂) 또는 환속(還俗)을 하면 도로 반납함 註11281]의묘(懿廟):덕종(德宗)의 신주를 모신 사당 註11282]황패(黃覇):한(漢)나라 선제(宣帝)때 영천태수(穎川太守)로서 백성을 잘 다스렸음 註11283]왕성(王成):한(漢)나라 선제(宣帝)때 교동(膠東)의 수령으로 백성을 잘 다스렸음 註11284]자목(字牧):백성을 사랑하고 이끌어주는 수령의 임무 註11285]유일(遺逸):숨어서 벼슬하지않는 선비 註11286]도유우불(都兪吁咈):임금과 신하가 자유롭게 정사를 논의하던 것을 말함. 도유(都兪)는 임금의 말에 신하들이 찬성하는 것이고, 우불(吁咈)은 반대하는 것임 註11287]여망(呂望):강태공(姜太公)註 11288]삼빙(三聘):은(殷)나라 성탕(成湯)이 세 번 사람을 시켜 이윤(伊尹)을 초빙한 고사(故事)임 註11289]삼고(三顧):촉한(蜀漢)의 유비(劉備)가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초려(草廬)를 세 번이나 찾은 고사임 註11290]과목(科目): 과거(科擧) 註11291]유현(遺賢):유일(遺逸) 註11292]대사(大射):임금이 성균관(成均館)에 나아가 석전(釋奠)을 지낸 뒤에 신하들과 활쏘기를 하던 예(禮). 대사례(大射禮) 註11293]궁정(弓旌):활과 깃발 註11294]윤백(輪帛):수레와 폐백 註11295]실(室):집 註11296]전최(殿最):전조(銓曹)에서 도목정사(都目政事)를 할 때 각 관사의 장(長)이 관리의 근무 성적을 상(上), 하(下)로 평정하던 법. 상이면 최(最), 하이면 전(殿)이라한 데에서 나온 말로, 매년 6월15일과 12월15일 두 차례에 걸쳐 시행하였음 註11297]사악(四岳):사방의 제후를 통솔하는 사람 註11298]유전(遊田):사냥 註11299]정관(貞觀):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연호(年號) 註11300]십점소(十漸疏):당(唐)나라 태종(太宗)때 위징(魏徵)이 올린 상소중의 10가지의 경계. 군주(君主)가 소홀히 하면 작은 일이 점점 커져 큰 화(禍)가 된다는 일로서, 검소(儉素)하고 덕음(德音)을 듣는 것등 10가지 일임 註11301]개원(開元):당(唐)나라 현종(玄宗)의 연호(年號) 註11302]천보(天寶):당(唐)나라 현종의 후기 연호 註11303]삼대(三代):하(夏),은(殷),주(周).
○成均進士李績上疏曰:
伏覩殿下臨御以來, 日御經筵, 宵衣旰食, 日愼一日, 是宜(沐)〔休〕徵是應, 百穀用成, (柰)〔奈〕何今當農月, 亢陽不雨, 加之雨雹, 以貽聖上之憂乎, 臣謂天心仁愛, 人君以或然之變, 加堯、湯之聖, 使益以恐懼修省, 增益聖智, 以延我國家無疆之福歟。 然殿下不以爲或然之變, 減膳輟樂, 不御正殿, 自謂己德之失, 有以感召, 乃下求言之敎, 欲聞弭災之策, 臣謹以時宜十一條, 錄進于後。 其一曰, 謹天戒。 臣聞天人一理, 顯微無間, 人事感於下, 則天變應於上, 降災降祥, 惟其所召。 然不僭者, 天命也, 而或至于難諶, 堯、湯有水旱之災, 桓、宣致有年之慶。 此所謂有道之至, 而未必無災, 無道之極, 而亦有祥瑞者也。 臣愚以謂: ‘遇災而知懼, 則愆陽伏陰, 變爲時雨時暘, 遇瑞而驕逸, 則甘露醴泉, 適足爲蕩心喪德之具。 九年七年之水旱, 不能害堯、湯之治者, 此遇災知懼之效也, 有年大有年之祥, 竟無救於他年之歉者, 此遇瑞驕逸之驗也。 誠願殿下, 益勤戒懼之心, 深思養民之政。 如遇天變, 則以謂政有所闕失, 用舍顚倒, 賢能未盡登庸歟, 奸邪未盡廢黜歟, 詞訟有所未理歟, 刑獄有所冤滯歟, 此數者, 兢惶惕慮, 如堯、舜之兢業, 湯、宣之戒懼, 至誠無息, 則一心之敬, 潛感於天心, 默契於天運。 由是而天地以位, 陰陽以和矣。 其二曰, 急救荒。 天災流行, 古今通患。 是以荒政十二, 周無荒年, 移民移粟, 梁無飢民, 備先具也。 我國家列聖相承, 務農重穀, 設義倉以備凶荒, 仁至深也。 奈何一遇旱乾之災, 民有菜色, 野有餓莩, 全羅、慶尙、忠淸三道尤甚, 是誠何故哉, 臣竊謂守令, 不體聖上之憂勤, 不以民飢爲慮, 救荒之條雖詳, 而視爲文具。 由是怨讟不息, 和氣不臻。 伏望殿下, 分遣敬差官, 檢察荒政, 有如富弼之在(淸州)〔靑州〕, 活飢民甚衆者, 不次而賞之, 否者罪之, 則吾民庶可復蘇, 天災庶可弭矣。 其三曰, 復常平之法。 臣聞李悝, 已有平糴之稅, 至耿壽昌, 始定常平之策, 穀賤則增價而糴, 以利農。 穀貴則減價而糶, 以利民, 此救荒權宜之上策也。 今者旱災已甚, 黎蒸嗷嗷, 開口望哺, 而物價踴貴, 一綿布之直, 米粟三斗。 飢饉之兆, 雖丙辰、庚寅之歲, 未有甚於此時者也。 聖上勤恤民隱, 思古者常平之法, 許民貿穀, 公私兩便, 中外懽心, 不幸朝議不一, 事竟不行, 百姓聞之, 垂首喪氣。 伏望殿下, 許令貧民, 納布貿穀, 以賜一國之飢者。 其四曰, 復覈斷訟。 今我聖上, 特念詞訟淹滯, 別立三都監, 凡掌隷院未決之訟, 期以數月之內畢決, 使不得更訴, 奉行官吏, 徒務速決, 甲可乙否未能詳辨, 或使黑白倒置, 邪正雜糅, 年久祖上傳係臧獲, 後世子孫, 以一言詞之錯, 一朝而屬公者, 亦或有之。 其冤寧有旣耶, 此亦傷和召災之一端也。 伏望殿下, 當於無事之時, 更立都監, 勿令督責, 精辨是非, 與奪當理, 民自無怨, 何有冤抑, 而感傷和氣乎, 其五曰, 減田租。 臣聞有若曰: “百姓足, 君誰與不足,” 誠以王者之富, 藏於民也。 頃年以來, 中朝之使繼至,四方之民奔走迎送,供億之物,一出民間,正當夏月,廢農失業。 去年如是,今年又如是,租稅之入,其何能辦, 臣聞世宗朝, 京中軍資之粟三十萬斛, 今則百餘萬碩。 以此推之, 京外蓄積之多, 未有盛於今時者也。 然而世宗, 遇凶年, 則必減田租之半。 況今以三倍之穀, 遇凶年之甚, 而未聞減租之令, 臣竊恨焉。 昔漢文帝, 下減租之令, 倉廩有紅腐之陳。 臣願殿下, 法世宗、漢文之政, 特減今年田租之半, 慰悅民心, 感召和氣, 則災可變爲祥矣。 其六曰, 刷還三浦倭人。 臣聞高麗之季, 島夷爲寇, 乘時竊發, 刼掠平民, 奪攘錢穀, 積有年紀, 我祖宗朝, 命一偏將, 殄殲對馬州小醜, 敷文戢武, 以示懷綏之道。 世宗益申撫恤, 島夷慕義, 願受一廛爲氓, 嘉其來附, 初以六十戶爲約, 分處三浦。 此一時禦夷之權宜, 非萬世經常之道也。 厥後五六十年間, 或生齒日繁, 或冒隱來投, 以至于今。 恒居之倭, 薺浦, 則戶三百有八口, 竝男女一千七百二十有二, 釜山浦, 則戶六十有七口, 幷男女三百二十有三, 鹽浦, 則戶三十有六口, 竝男女一百三十有一, 合而計之, 則戶四百十一口, 二千一百七十有六也。 加之數年生聚, 則臣恐不知億萬計, 而半於南方矣。 若撫馭失其道, 則安知晋室之禍, 不生於今日乎, 昔者倭人平道全之事, 可謂明驗。 古語有之: “蔓難圖也。” 然則可不圖之於未萌, 而刷還本土乎, 然諳邊軍之多寡, 窺倉廩之實虛, 識道路之險夷, 亦久矣, 今無故一朝, 而遽還之, 則必有怨懟之心, 其構釁也明矣。 今莫若籍其戶口, 察其多寡, 不與吾民而竝處, 禁其兵器之私藏, 制其出入之節, 防其冒隱之來, 無使滋蔓。 加以宣諭島主, 申明約束, 只留六十戶, 欲歸者, 豐其贐物以送之, 欲留者, 薄其廩粟以待之, 恩威竝至, 撫禦得宜, 則彼無怨懟之心, 我有夷夏之別, 非特除當今几席之患, 抑亦無後世子孫之憂矣。 其七曰, 實西土。 臣觀平安一道, 西通上國, 北連山戎, 實我國門戶。 故祖宗念空虛, 徙南民以實之, 乃給復十年, 宜其生齒日繁, 士馬精强, 乃何近年以來, 流亡相繼, 軍額日縮, 士馬疲弱, 以貽聖上宵旰之憂耶, 夫平安一道, 一年之內, 有聖節、千秋、正朝之使, 而或別有奏請、謝恩、進賀之使焉。 加以防秋之際, 有許多助戰將焉, 有軍官數百焉, 間有西征之擧焉, 亦有中朝之使焉。 郵馹疲於迓送, 郡縣勞於供億, 七站之間, 馬斃人仆, 或不耐苦, 亡入東寧衛者多矣。 遂使民居蕭條, (雚)〔灌〕莽極目, 沃野千里, 變爲狼呼鬼哭之場。 若使一經重瞳, 寧不爲痛心哉, 古人云: “人民情魄也, 土地軀幹也。” 情魄去矣, 軀幹雖存, 將何用哉, 國家徙南民實西土, 則西土雖實, 南方亦虛, 是猶撑東而西傾, 捉衿而肘見, 臣不知其可也。 今之爲僧尼者, 居半焉。 自戊寅之歲, 檜巖、(楡站)〔楡岾〕兩寺之役, 受度牒者六萬三千餘人, 其他講經都監、懿廟赴役, 受度牒者, 其數亦倍。 以此而推之, 則自戊寅至于今二十餘年之間, 削髮者不知幾萬人, 是棄良民於無用之地也。 臣願殿下, 明王道, 闢異端, 刷僧尼年六十以下者, 皆令歸俗, 各有室家之樂。 徙入閑曠之地, 給復數十年, 庶幾爲永建乃家之利。 務農訓兵, 擇守令如黃覇、王成之徒, 以任字牧之任, 勸民耕桑, 而能勞來不怠, 則將見流民皆復, 而自然丘墟爲棟樑, 荒廢爲農桑, 雞鳴犬吠, 達于四境矣。 其八曰, 擧遺逸。 臣聞古昔聖帝明王, 莫不搜揚側陋, 旁招俊乂, 列于庶位, 都兪吁咈, 以興太平之地。 成湯之聘伊尹, 高宗之擧傅說, 周文之(載)〔戴〕呂望, 昭烈之顧孔明, 是也。 自鄕擧里選之法一廢, 而未聞三聘、三顧之禮。 求賢之方, 專倚科目, 非此道出, 則指以謂非才, 例以俗吏待之。 雖有文武之材、忠孝之資、利國之策, 不得施設於當時, 而高材多戚戚之窮。 薦擧之法, 雖曰令典, 而然所薦擧者, 類皆宰相、士大夫之族屬, 非族屬, 則必皆私好之人。 不察其人之賢否, 互相推擧, 未聞山林一奇偉之士,出於某之薦、某之擧也。 如此而欲得俊乂在官, 野無遺賢不其疏乎, 殿下臨御以來, 思臻至治, 稽古禮文, 首奠先聖, 次祀先農, 禮擧大射, 其於帝王盛事, 靡不擧行, 獨弓旌招賢, 輪帛迎士, 則寂然無聞, 豈非盛時之一欠事乎, 嗟乎! 十室之邑, 必有忠信, 才不借於異代, 用何患乎無人, 但上之人, 未之求耳。 其九曰, 循資格。 臣聞古者, 任官唯賢, 位事唯能, 惟才德是求, 曷嘗拘於資格之崇卑乎, 今之用人, 必循資格, 苟以歲月, 而陞遷, 故士之未仕者, 奔走於權門, 僥倖於速仕, 以希斗升之祿, 未聞恬靜退處, 以才行自修者也。 士之已仕者, 優游度日, 以冀一秩之陞, 未聞奮起事功, 以盡瘁爲心者也。 由是, 士風日毁, 廉恥道喪, 此非細故也。 如此而欲得賢能在位, 不其難乎, 昔金主之訓宰相, 乃曰: “用人之道, 當自其壯年, 心力精强時用之。 若拘以循格, 則往往或至老耄, 此不思之甚也。 且以日月考資, 所以待庸常之人, 若才行過人, 則豈拘以常制,” 此實萬世人主用人之龜鑑也。 伏願殿下, 許令銓曹, 較短量長, 惟器是適。 察其人物之賢否, 考其職事之成敗, 果賢能也, 則不次而用之, 果庸駑也, 則雖朝授夕貶, 可也。 何必拘於日月之久近、殿最之多寡哉, 先儒云: “以資格用人, 小人之幸, 君子之不幸。” 斯言得之。 其十曰, 開言路。 臣謹按《虞書》, 帝舜卽位, 詢于四岳, 闢四門, 明四目, 達四聰。 舜, 大聖人也, 猶且汲汲於開廣言路如此, 況其下者乎, 人君而惡聞直言, 自以爲是, 則九重之邃, 聽有所不及, 視有所不遍, 民情之休戚, 何以知之; 時政之得失, 何以聞之, 國事將日非矣。 恭惟主上殿下臨御之初, 首訪大臣, 講究治道, 次擇賢材, 以任臺諫, 虛懷納諫, 廣開言路, 此卽帝舜之盛心也。 伏願殿下, 毋忘今日之心, 以延我國家無疆之休。 其十一曰, 愼厥終。 臣謹按《商書》, 伊尹訓太甲曰: “愼厥終, 惟其始。” 蓋人主一心, 攻之者衆, 一念之差, 萬善瓦解, 耽遊田、惑嬖寵、怠政事、縱逸樂者多矣。 貞觀之初, 美則美矣, 觀十漸之疏, 則寢不如初矣, 開元之始, 明則明矣, 觀天寶之末, 則幾乎罔終矣。 臣惟天地有常運而後, 歲功成, 帝王有常德而後, 治功著。 殿下臨御以來, 開經筵、絶玩好, 勤懃懇懇於帝王之治, 三代盛禮, 靡不擧行, 一國臣民, 稽首稱賀, 咸謂: “堯、舜之聖, 復生於今日。” 臣願殿下, 知創業之艱難, 念守成之不易, 毋謂已安, 而思其危, 毋謂已治, 而思其亂, 兢兢業業, 益勤戒懼, 以開我東方億萬年無疆之休。 則咎徵可變爲休徵, 天災可變爲祥瑞矣。
書上, 上覽訖, 下承政院曰: “此能文者也。 其書父名以啓。” 厚饋之時, 績方求官, 人謂: “此疏爲媒進之階。” 未幾, 拜宣傳官。
성종 147권, 13년(1482 임인/명성화(成化)18년) 10월21일(병술) 5번째기사
우승지 김세적에게 책을 하사하다
우승지(右承旨) 김세적(金世勣)에게 전교(傳敎)하기를,
“그대가 읽은 글이 얼마나 되는가?”하니,
김세적이 대답하기를,
“처음에 《맹자(孟子)》를 읽었으며, 그 다음에 《중용(中庸)》을 읽고는 중도(中途)에 공부를 폐지했습니다”하자,
또 묻기를,
“병서(兵書)는 얼마나 읽었는가?”하니,
김세적(金世勣)이 아뢰기를,
“대강 일찍이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나 읽지못한 것은 강태공(姜太公)의 육도(六韜)12889)뿐입니다”하였는데,
임금이《장감박의(將鑑博議)》를 하사(下賜)하면서 이를 읽도록 명하였다.
또 전교(傳敎)하기를,
“그대의 집에 없는 책을 써서 아뢰는 것이 좋겠다”하니,
김세적(金世勣)이《통감(通鑑)》,《송감(宋鑑)》,《역대병요(歷代兵要)》를 써서 아뢰었다. 전교(傳敎)하기를,
“만약 의리(義理)의 학문이 없으면 비록 이런 글을 읽더라도 이익이 없을 것이니, 의리(義理)의 학문에 대한〈책을〉그대가 써서 아뢰도록 하라”하니,
김세적이 머리를 숙이고 자리를 긁적거리면서 아뢸 바를 알지못했는데, 좌우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서《상서(尙書)》12890)를 써서 아뢰니,
명하여 이 책들을 모두 하사(下賜)하도록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승지(承旨)는 조종조(祖宗朝)에 있어서는 조정의 높은 선임(選任)이 되었는데, 임금이 처음으로 무신(武臣) 변수(邊脩)를 임용하자 이로부터 이후에는 무신(武臣)이 서로 잇달아 이에 임명되었으나, 문자(文字)를 알지못하여 임금에게 일을 아뢰는 즈음에 틀리고 그릇된 것이 많이 있게 되었다.
이때에 김세적(金世勣)이 가장 배우지못한 사람이므로, 임금이《상서(尙書)》1질(帙)을 하사(下賜)하여 그로 하여금 읽도록 했으나, 두서너 해가 걸려서 겨우 두서너 장(張)만 읽고 그쳤을 뿐이다. 승정원(承政院)은 곧 중요한 정무(政務)를 출납(出納)하는 곳인데, 어찌 이런 무리들이 이에 있도록 용납하겠는가? 우림(羽林)12891)의 추사(麤士)들이 모두이 자리를 엿볼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승정원(承政院)이 날로 더욱 비하(卑下)되었던 것이다.
당초에 한 사람도 옳지못함을 힘써 진술하는 이가 없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하였다.
註12889]육도(六韜):중국 주(周)나라의 태공망(太公望)이 지었다고 하는 병서(兵書). 문도(文韜),무도(武韜),용도(龍韜),호도(虎韜),표도(豹韜),견도(犬韜)의 6권으로 되어있음 註12890]《상서(尙書)》:《서경(書經)》註12891]우림(羽林):중국에서 천자(天子)의 숙위(宿衛)를 맡아보던 금위(禁衛)의 이름.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우림(羽林)을 처음으로 두었는데, 당대(唐代)에는 좌우 우림위(羽林衛)를, 송대(宋代)에는 우림장군(羽林將軍)을, 명대(明代)에는 우림위(羽林衛)를 각각 두었으며, 조선조 성종때 처음으로 우림위를 두었는데 궁중(宮中)의 숙위(宿衛), 배종(陪從), 호위(護衛)를 맡아보았음.
○傳于右承旨金世勣曰: “爾之所讀書, 幾何,” 世勣對曰: “初讀《孟子》, 次讀《中庸》, 而中途廢之。” 又問: “讀兵書, 幾何,” 世勣曰: “粗嘗涉獵, 所未讀者, 《太公》、《六韜耳》。” 上賜《將鑑博議》, 瑁之。 又傳曰: “爾家所無之書, 書啓可也。” 世勣書《通鑑》、《宋鑑》、《歷代兵要》以啓。 傳曰: “若無義理之學, 雖讀此書, 無益矣。 義理之學, 爾其書啓。” 世勣俛首括席, 不知所啓, 問於左右, 書《尙書》以啓。 命皆賜之。
【史臣曰: “承旨在祖宗朝, 爲朝廷高選。 上始用武臣邊脩, 自後武臣相繼爲之, 不解文字, 敷奏之際, 多有錯謬者。 是時, 世勣最不學, 上賜《尙書》一帙, 令讀之, 閱數歲, 纔讀數張而止。 政院乃出納樞機之地, 豈容此輩居之, 羽林麤士, 皆生覬覦, 政院日益卑矣。 當初無一人力陳不可, 惜哉!”】
성종 156권, 14년(1483 계묘/명성화(成化)19년) 7월 22일(임자) 3번째기사
손순효등이 상소하여 송영의 일로 공의를 따르기를 청하다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손순효(孫舜孝)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하건대, 일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있고 말에는 중한 것과 경한 것이 있는데, 그 중에서 규구(規矩)에 들지않는 작고 경한 것이라면 유사(有司)가 말해야 하겠지만, 신단(宸斷)13799)에서 나오고 의리에 해롭지 않다면 그만두겠습니다.
그러나 중대한 일인데 법에 어그러지고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그것이 성지(聖旨)일지라도 진실로 고집하여 간쟁(諫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유사(有司)의 법은 전수(傳授)하는 것이 있으므로, 개인이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임금도 요동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전교하기를, ‘송영은 연좌(緣坐)의 예(例)가 아니고 이미 대성(臺省)의 직임을 지냈는데, 어찌하여 안될 것이 있겠느냐?’고 하신다면, 신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노산군(魯山君)이 어리고 뭇 간사한 자가 보좌하여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롭게 되었는데, 송현수(宋玹壽)가 외척의 가까운 친족으로서 마음대로 드나들며 의논하다가 마침내 천주(天誅)를 받았으니, 난신(亂臣)이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춘추(春秋)》의 법은 난적(亂賊)을 주토(誅討)하는 것을 근원을 캐어 없애는 것보다 더욱 엄하게 하여 목욕하고 토죄(討罪)하기를 청하였으니, 공자(公子)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천하를 통일하고 법을 세워 교훈을 끼쳤는데, 난신(亂臣)에게만은 모두 연좌(緣坐)를 논하였으니, 어찌 악(惡)을 제거하여 근본을 힘쓰는 큰 뜻이 아니겠습니까?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세조대왕께서 기회를 잡아 정난(靖難)하여 나라를 진정시키고 연좌된 자를 처분하되 한결같이 율문(律文)을 따르셨고, 간혹 방면(放免)이 있었으나 사로(仕路)에 통하도록 허가하신 것은 적었으며, 동반(東班)에 서용하기까지 한 것은 듣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대간이겠습니까? 이제 송영은 천은(天恩)을 입어 사로에 통할 수 있었을지라도 율문(律文)에 있어서는 연좌되어야 마땅하니, 그 방치(放置)에서 면한 것만도 다행이고 사로에 통하도록 허가된 것도 다행이며, 서반(西班)에 서용된 것은 지나치고 동반에 서용된 것은 지나치고 또 지나친데, 어찌하여 반드시 대성의 직임을 얻어 공기(公器)를 욕되게 하고 조정을 욕되게 해야 합니까?
난신에 연좌된 자를 시켜 조정의 기강을 잡게 하였으니, 무리를 같이하는 것도 낯두꺼운 일인데, 모든 관료(官僚)가 어찌 눈을 흘기지 않겠습니까?
지난번 두 번이나 대성의 직임에 제수(除授)되었어도 논집(論執)하여 아뢰는 자가 어지러웠던 것은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이며, 전하께서도 따라서 개정하신 것은 공의에 따라 돌이켜 바로잡으신 것입니다.
홍범(洪範)13800)에 이르기를, ‘모의를 경(卿),사(士)에게 미치고 모의를 서인(庶人)에게 미치라’고 하였는데, 대개 모의가 뭇사람을 따르면 천심(天心)에 맞으므로, 묻기를 좋아하면 넉넉하여지고 자기 뜻만을 고집하여 쓰면 작아질 것입니다.
전하께서 평소에 일을 논하면 처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도 모두 뭇 신하에게 의논하여 공론(公論)이 속해 있는 바를 듣고자하셨는데, 이제 송영이 이 벼슬에 제수되어《대명률(大明律)》이 무너지고《대전(大典)》이 무너지고 전지(傳旨)가 무너지고 서경(署經)하는 법이 무너지니, 그러면 무너지는 법이 한둘이 아닙니다. 연좌된 자를 동료로 삼으면 대간이 천하여질 것이고, 연좌된 자를 승묵(繩墨)으로 삼으면 조정이 욕될 것입니다.
난신의 친족이 오대(烏臺)13801)에 들어오고 나면 연좌의 무리가 점차로 떼지어 나올 것이고, 장리(贓吏)의 자손과 행실이 방자한 여자의 자손이 잇달이 나오는 것이 마치 물고기를 꿴 듯이 이어져서, 뒷날의 사람들이 지금의 일을 보고 본뜨는 것이 지금 사람들이 옛일을 보고 본뜨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떻게 난적의 무리를 징계하겠으며, 어떻게 편드는 무리를 억누르겠습니까? 그 문이 한 번 열리면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니, 그러면 폐단이 따라서 일어나는 것도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조짐을 길러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 지금 결단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들의 말을 오활(迂闊)하다고 생각하여 거절하지 말고 조정에 청문(淸問)을 내려 그 공의(公議)를 따르소서. 그러면 어찌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정치에 마음을 두어서 의논하여 하지않는 일이 전혀 없으셨는데, 이 한 가지 일만은 공의를 따르지 않으시니, 아마도 광명(光明)하고 진선(盡善)한 체통에 흠이 될 듯합니다. 이것이 신들이 부월(鈇鉞)을 피하지 않고 천총(天聰)을 돌이키려는 까닭입니다.
예전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85세에 즉위하고 3일만에 상보(尙父)13802)에게서 단서(丹書)13803)가운데 경신(敬愼)이 태만보다 더한 자는 길(吉)하고, 태만이 경신보다 더한 자는 멸망하며, 의리가 욕심보다 더한 자는 순통(順通)하고, 욕심이 의리보다 더한 자는 흉(凶)하다’라고 한 훈계를 받았는데, 물러가서 그 궤석(几席), 상두(觴豆)13804), 도검(刀劍), 호유(戶牖)13805)등 어느 것에나 다 새겼습니다.
위(衛)나라 무공(武公)은 95세가 되어서도 오히려 국중(國中)에 경계하여 말하기를, ‘경(卿)이하로 사장(師長),사(士)까지 조정에 있는 자라면, 나를 늙었다고 생각하여 나를 버리지 말고 반드시 조석으로 삼가서 번갈아가며 나를 경계하라’하였고, 그래서 억계(抑戒)를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습니다.
대저 이 두 성인(聖人)은 80세, 90세가 되어서도 스스로 경계하는 방도가 이러하였는데, 더구나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춘추가 넉넉하시니, 마치 요(堯), 순(舜)이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탕(湯), 문(文)13806)이 두려워하고 삼간 듯이 하여, 법을 세울 때에는 선갑후갑(先甲後甲)13807)하고 사람을 등용할 때에는 뭇 신하에게 물으며, 물이 흐르듯이 간언(諫言)을 따르고 처음처럼 끝까지 삼가셔야 합니다. 그러면 아마도 전의 공렬(功烈)에 빛을 더하여 후세에 유족(裕足)한 도리를 끼칠 것입니다.
신들이 말을 많이 하면서 그치지 않는 까닭은 대간이 만세의 공기(公器)이므로 신들로부터 더럽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신들만이 아끼는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조정이 함께 아끼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청문(淸問)을 내려 널리 공의(公議)를 채택하소서.
그러면 국가에 다행할 것입니다”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註13799]신단(宸斷):임금의 결단 註13800]홍범(洪範):《서경(書經)》의 편명(篇名) 註13801]오대(烏臺):사헌부의 별칭 註13802]상보(尙父):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의 존호(尊號) 註13803]단서(丹書):상고(上古)의 도(道)를 썼다는 책 註13804]상두(觴豆):술잔과 제기(祭器) 註13805]호유(戶牖):창문 註 13806]탕(湯), 문(文):상(商) 탕왕(湯王)과 주(周) 문왕(文王) 註13807]선갑후갑(先甲後甲):법령(法令)을 처음 제정(制定), 발포(發布)하는 전후에 있어서, 백성에게 공손히 고하는 일. 무슨 일이든지 주의를 깊이 해서 과오(過吳)를 범하지않도록 하는 뜻으로 쓰이는 말임.
○司憲府大司憲孫舜孝等上疏曰:
臣等伏惟, 事有大小, 言有輕重。 其小者、輕者, 苟不在規矩之中, 則有司當言之。 如出(震)〔宸〕斷, 而無害於義, 則止焉, 至於重且大, 而違於法、悖於理者, 雖是聖旨, 固不可不執之, 而諍之也。 夫有司之法, 有所傳授, 非己所得而私, 人主亦不得而撓之也。 聖敎若曰: “瑛非緣坐之比, 已經臺任, 何不可之有,” 臣等以謂, 魯山幼沖, 群邪誘掖, 幾危宗社, 而玹壽以椒房至親, 出入風議, 竟蒙天誅, 可謂非亂臣乎, 《春秋》之法, 誅亂討賊, 尤嚴於鋤根除源, 沐浴請討, 夫子之意, 可知。 欽惟, 我大明、高皇帝, 統一區宇, 立法垂訓, 獨於亂臣, 竝論緣坐, 豈非除惡務本之大意乎, 恭惟, 我世祖大王, 炳幾靖難, 克定邦家, 處分緣坐, 一依律文, 雖間有放免, 而許通則少, 至於敍東班, 未之聞也, 況臺諫乎, 今瑛雖蒙天恩, 得通仕路, 在律文當爲緣坐。 其得免於放置幸矣, 許通仕路, 幸矣, 敍用於西班, 則過矣, 敍用於東班, 則過而又過矣。 何以必得臺任, 而辱公器, 辱朝廷乎, 以亂臣緣坐, 執朝廷紀綱同隊, 尙且厚顔, 百僚豈不側目, 頃者再授臺任, 而執奏者紛紜, 是出於公議也, 殿下亦從而改之, 是從公議反正也。 《洪範》曰: “謀及卿士, 謀及庶人。” 蓋謀從衆, 則合天心, 故好問則裕, 自用則小。 殿下居常論事,雖非難處, 悉議群臣, 欲聞公論之所在。 今瑛之除是職, 《大明律》壞矣, 《大典》壞矣, 傳旨壞矣, 署經之法壞矣。 然則法之壞者, 非一矣。 以緣坐爲同僚, 則臺諫賤矣, 以緣坐爲繩墨, 則朝廷辱矣。 亂臣之屬, 旣入烏臺, 則緣坐之流, 漸以彙征矣。 贓吏之裔、恣女之孫, 相繼而進, 如魚貫, 然後之視今, 猶今之視古, 何以懲亂賊之徒, 何以抑援引之輩, 其門一開, 弊將難防, 然則弊之從起者, 亦非一矣。 漸之不可長也, 如是, 不可不斷正於此時也。 伏願殿下, 勿以臣等之言爲迂, 而絶之, 降淸問于朝, 從其公議。 豈不爲朝廷之美事乎, 殿下卽位以來, 存心制治, 粹乎無以議爲, 獨此一事, 不徇公議, 恐累光明盡善之體。 此臣等所以不避鈇鉞, 而欲回天聰者也。 昔周武王, 行年八十有五踐祚, 三日受尙父、《丹書》之戒, 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凶。” 退而於其几席、觴豆、刀劍、戶牖、莫不銘焉。 衛武公、年九十五, 猶箴警於國曰: “自卿以下, 至于師長、士, 苟在朝者, 無謂我老耄而舍我, 必恪恭於朝夕, 以交戒我。” 於是, 作《抑戒》, 以自警。 夫二聖人, 年八、九十, 而所以自警者如此, 況我主上殿下, 春秋旣富, 當如堯、舜之兢兢業業, 湯、文之慄慄翼翼, 立法則先甲後甲, 用人則疇咨訪落, 從諫如流, 愼終如始。 庶幾增光前烈, 垂裕後世矣。 臣等所以喋喋不已者, 以臺諫萬世之公器, 不可自臣等, 而汚穢之也。 豈獨臣等之所惜, 實朝廷之所共惜。 伏望特垂淸問, 博採公議, 國家幸甚。不聽。
성종 166권, 15년(1484 갑진/명성화(成化)20년) 5월 29일(을묘) 2번째기사
무예도시에서 강서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다
무예도시(武藝都試)에서 강서(講書)하는 일에 대하여 전일에 의논하지 아니한 제상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한치례(韓致禮)가 의논하기를,
“무사(武士)는《무경칠서(武經七書)》를 강함이 가장 중요한데, 만약 강을 시키지 아니한다면 반드시 읽고 외우지아니할 것입니다.
예전과 같이 시강(試講)하게 하고 다만 푼수(分數)는 유생(儒生)들이 강서(講書)하는 예에 의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고,
권찬(權찬), 어세공(魚世恭), 어세겸(魚世謙)은 의논하기를,
“《무경칠서(武經七書)》는 무사(武士)로서는 읽지않을 수 없는 것이니,《대전(大典)》에 의하여 시행하되 강서(講書)의 많고 적음은 자원(自願)에 의하여 시강(試講)하게 하고, 푼수(分數)는 유생들의 강서하는 예에 따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이숭원(李崇元), 이파(李坡), 성준(成俊), 변수(邊脩)는 의논하기를,
“감교청(勘校廳)에서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하고,
노공필(盧公弼), 이경동(李瓊仝), 홍귀달(洪貴達), 김승경(金升卿), 이공(李拱), 이칙(李則)은 의논하기를,
“무사들의 본업(本業)은 활쏘기와 말달리기인데, 그 중에서 경서(經書)에 익숙한 자는 대체로 적습니다. 그리고《무경칠서》는 비록 많고 적음은 같지 않으나 모두 병가(兵家)에서 매우 긴요한 말이므로, 그것을 익히는 것은 진실로 좋은 일입니다.
지금 만일 강서하지 아니한다면 강태공(姜太公)이나 황석공(黃石公)의 글같은 경우는 으레 모두 읽지아니할 것이니, 아마 옳지못할 듯합니다.
만약 글을 읽되 그 중에 삼서(三書)에 불과하다면 비록 여러 서적을 다 읽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시강(試講)은 할 수 없을 것이니, 또한 옳지 못합니다.
신 등의 의견으로는,《무경칠서》와 경서(經書)를 모두 시강(試講)하게 하고 오직 푼수(分數)만은 적절하게 감하여, 통(通)은 3푼, 약(略)은 2푼, 조(粗)는 1푼으로 하소서. 그렇게 한다면 시험하여 채용하는 길이 좁지아니하고 푼수(分數)도 알맞게 될 것입니다”하고,
유윤겸(柳允謙), 허황(許황), 양면(楊沔), 안진생(安晉生), 최한원(崔漢源)은 의논하기를,
“도시(都試)에《논어(論語)》,《맹자(孟子)》와 오경(五經)을 첨가하고자한 것은 무신으로 하여금 모두 경서를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무경(武經)과 사기(史記)는 경서의 정미(精微)함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그런데 그냥 삼서(三書)라고만 하면《통감(通鑑)》,《장감박의(將鑑博議) 》,《병요(兵要)》,《손자(孫子)》로도 충분히 수를 채울 수가 있는데, 누가 무경과 사기를 버리고 경서를 강하려고 하겠습니까?
신등의 생각으로는《논어》,《맹자》중에서 한 가지, 오경중에서 한 가지, 《통감》,《장감박의》,《병요》,《손자》중에서 한 가지를 시강(試講)시킴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고,
강거효(姜居孝)는 의논하기를,
“나라에서 무예도시를 설치한 목적은 오로지 무예를 시험해 뽑기위함이고, 그 중에 글을 읽은 자는 무재(武才)는 모자라면서도 그 강서한 푼수로 인하여 요행으로 우등을 차지합니다.
이는 법을 설치한 본뜻과는 아주 다르니, 진실로 옳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만 무예에만 힘을 쓰고 병서(兵書)는 알지 못한다면 고금의 용병(用兵)한 법을 알지 못할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글을 강함은 옛날과 같이 하고 푼수(分數)는 유생(儒生)들의 강서한 예(例)에 의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하고, 김질(金질), 곽은(郭垠), 이예견(李禮堅), 정이교(鄭以僑)는 의논하기를,
“무신의 본업은 병서(兵書)가 중한 것이니, 가볍게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도시(都試)에서 글을 강하여 푼수(分數)를 주는 것도 과거(科擧)와 구별할 수가 없으니, 예전과 같이 함이 좋겠습니다. 다만 도시에서는 1등이 정해진 수가 없고 오직 획수(劃數)만은 계산하여 품계를 더해 주니, 외람되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더구나 문신(文臣)을 과시(課試)할 적에는 우두머리 한 사람만 뽑지 않습니까?
신등의 생각으로는 지금부터 도시에서 1등은 세 명을 넘지않게 하며, 만일 획수가 같은 자가 많으면 임시로 계품(啓稟)하여서 다시 재주를 시험하여 등급을 주었으면 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경서를 알지못하면 비록 무경(武經)을 읽었다고 해도 헛되이 입으로 외는 것이고 글의 뜻은 알지못할 것이니,《논어》,《맹자》중에서 하나와 오경(五經)중에서 하나, 그리고《통감》,《장감박의》및 무경중에서 부피가 많은 것으로 시강(試講)을 한다면 무사(武士)도 글의 뜻에 통할 것이다.
1등에는 세 명만을 뽑을 것이며, 푼수(分數)를 주는 것은 예전과 같이 시행함이 어떻겠는가?”하니,
모두 이르기를,
“성상의 하교가 마땅합니다”하자,
다시 전교하기를,
“1등은 세 명을 초과하지 말라.
만약 1등에 획수가 같은 자가 많으면 재주를 시험하여 등수의 차례로 세 명을 가려서 뽑는 일을 감교청(勘校廳)에 상의하도록 하라”하였다.
○武藝都試講書事, 命議于前日未議宰相。 致禮議: “武士講武經七書爲重, 若不講, 則必專不讀誦矣。 依舊試講, 但分數依儒生講書例, 何如, 攢、世恭、世謙議: “武經七書, 武士不可不讀, 依《大典》, 講書多少, 從自願試講, 分數依儒生講書例, 何如,” 崇元、坡、俊、脩議: “依勘校廳所啓, 施行何如,” 公弼、瓊仝、貴達、升卿、拱、則議: “武士本業弓、馬, 其中通習經書者蓋寡。 且武經七書, 雖多寡不同, 皆兵家切要之言, 習之固宜。 今若不講, 則如太公、黃石公之書, 例皆不讀, 恐未穩。 若讀書毋過三書, 則雖通習諸書者, 未得試講, 亦未穩。 臣等意 ‘武經七書及經書, 皆許講, 唯分數量減, 通三分、略二分、粗一分。’ 如此則試取之路不狹, 分數亦且得中。” 允謙、篁、沔、晋生、漢源議: “都試添入《論》、《孟》、五經, 欲使武臣, 皆知經書。 然而武經與史, 非經書精微之比。 泛稱三書, 則《通鑑》、《將鑑博議》、《兵要》、《孫子》, 足以備數, 誰肯捨武經與史, 而講經書哉, 臣等以謂 ‘試《論》ㆍ《孟》中一書、五經中一書、《通鑑》ㆍ《將鑑博議》ㆍ《兵要》ㆍ《孫子》中一書爲便。’” 居孝議: “國家設武藝都試, 專取武藝, 而其中講書者, 例皆劣於武才, 以其講書分數, 僥倖優等, 與設法本意殊異, 誠爲未便。 然徒業武, 而不知兵書, 則未知古今用兵之道。 臣意講書仍舊, 分數依儒生講書例, 何如,” 耋、垠、禮堅、以僑議: “武臣所業, 兵書爲重, 不可輕改。 且都試講書給分, 不可與科擧區別, 仍舊爲便。 但都試一等, 無定額, 只計畫數加階, 不無猥濫之弊。 況文臣課試, 只取居首一人, 臣等意以謂, 今後都試一等, 毋過三人, 若畫數同者多, 則臨時啓稟, 更試才等第。” 傳曰: “不知經書, 則雖讀武經, 徒爲口誦, 不知文義。 若《論》、《孟》中一書, 五經中一書, 《通鑑》、《將鑑博議》及武經中簡帙多者試講, 則武士亦可以通文義矣。 一等只取三人, 給分仍舊施行, 何如,” 僉曰: “上敎允當。” 又傳曰: “一等毋過三人。 若一等同畫者多, 則試才等, 第擇取三人事,
令勘校廳, 商議。”
성종 181권, 16년(1485 을사/명성화(成化)21년) 7월 6일(갑인) 4번째기사
영의정 윤필상이 홍문관 탄핵으로 사직상소를 하나, 윤허하지 않다
영의정(領議政) 윤필상(尹弼商)이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묘당(廟堂)에 있는 자는 비록 능히 도(道)를 논하고 음양(陰陽)을 조화시키는 직책을 다하지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나라만을 생각하여 집을 잊고 정성껏 봉직(奉職)할 따름입니다.
신은 이것은 능히 하지못하고 한갓 재산 경영만을 일삼아 물의(物議)가 분연(紛然)한데도 오히려 그 허물을 알지못하고 뻔뻔스럽게 재상의 자리에 있은 지 이제 7년이 되었으니, 두렵고 한심(寒心)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신의 가계(家計)보다도 넉넉한 자가 그 얼마인지 알지못하는데도 홀로 신을 가리켜 부유함이 한 세상에 으뜸간다고 하니, 신은 실로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서울밖에 있는 집에 사람을 보내어 적발(摘發)해보면 그 실상을 모두 알아낼 수 있을 것이고 유암(幽暗)하여 밝히기 어려운 일이 아니데, 신이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기망(欺罔)하여 가릴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또 생각하건대, 양화(陽貨)16528)가 말하기를, ‘부자가 된다면 어질지 못하고 어질게 된다면 부자가 되지 못한다’하였으니, 신이 이와 같은 독화(黷貨)16529)의 이름을 얻고 또 이와 같은 불인(不仁)의 허물을 범하였는데 오히려 작위(爵位)를 탐하여 태연하게 부끄러움을 알지못한다면, 현재의 인사(人士)와 후세의 사람들이 장차 신을 어떤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그리고 신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인주(人主)가 알지못하였다면 모르거니와 알고도 진퇴(進退)시키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권면(勸勉)하고 징계(懲戒)되는 바가 있겠습니까?
홍문관(弘文館)의 소(疏)는 지극한 공론(公論)이 됩니다.
전하(殿下)께서 공론을 버리고서 신을 파직하지 않으신다면 사람들이 장차 전하를 어떻다고 여기겠습니까?
빌건대 속히 신을 파직하여 물망(物望)에 쾌(快)하게 하소서”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지아니하고 비답(批答)하기를,
“생각건대 나 한 사람은 지극히 적고 만기(萬機)는 번다(繁多)한데, 진실로 중하게 대신(大臣)에게 의뢰하지 않는다면 누구와 더불어 함께 천위(天位)를 보전하겠는가? 그러므로 은(殷)나라의 고종(高宗)은 부열(傅說)을 써서 재상으로 삼았고,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은 여망(呂望)을 얻어 스승으로 삼았다. 만약 두 임금이 투저(投杼)16530)하여 의심을 품었고 두 신하는 옷을 털고 떠나가기를 구하였다면, 어찌 능히 착한 정치를 이루어 훌륭한 업적(業績)을 세웠겠는가?
경(卿)은 산천(山川)의 기운을 타고난 인물로 사직(社稷)의 원신(元臣)이며 선왕조(先王朝)로부터 과인(寡人)에 이르기까지 마음과 힘을 다하여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였다.
원수(元首)16531)와 고굉(股肱)16532)으로 이미 한 몸과 같으니, 태산(泰山)이 닳아서 숫돌처럼 되고 황하(黃河)가 줄어서 띠[帶]처럼 된다 하더라도 감히 처음의 마음을 잊겠는가?
경과 같이 무쌍함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경에게 맡기고 의심하지 않았는데, 어찌 남의 말을 혐의(嫌疑)하여 갑자기 형적(形迹)만을 남기고, 나라를 위한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사피(辭避)하려 하는가?
몸을 보전함이 비록 지혜롭기는 하지만 나라를 잊는 것은 충성이 아니다.
국가가 안위(安危)의 기로(岐路)에 처했을 때 나의 뜻을 쏟았는데,
진퇴함에 즈음하여 경은 어찌 제 몸만을 편하게 하려는가?
나의 관곡한 마음을 본받아 충성심을 다 바쳐주기 바란다”하였다.
註16528]양화(陽貨):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권신 註16529]독화(黷貨): 재물을 탐하는 것 註16530]투저(投杼):남의 말을 듣고 의심을 품는다는 말로, 옛날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증삼(曾參)과 같은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베를 짜고 있는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하니, 증삼의 어머니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으려하지않다가 세 번 반복하여 사람을 죽였다고 하자, 베짜던 북을 던지고 일어나서 달려갔다는 고사(故事) 註16531]원수(元首):임금 註16532]고굉(股肱):신하.
○領議政尹弼商上狀辭職曰:
臣竊惟居廟堂者, 雖未能盡論道爕理之責, 亦當國耳忘家, 恪謹奉職而已。 臣則旣不能此, 徒以營産爲事, 物議紛然, 猶不知過, 靦然居相位, 七年于玆矣, 可謂戰栗寒心矣。 但在朝之臣優於臣之居計者, 不知其幾也, 而獨指臣富甲于一時, 臣實未知其何爲也。 於臣京外第舍, 遣人摘發, 則盡得其實, 非幽暗難明之事, 臣安敢有一毫欺蔽之理哉, 臣又念陽貨曰: “爲富不仁, 爲仁不富。” 臣受此黷貨之名, 犯玆不仁之累, 猶且貪戀爵位, 恬不知愧, 則當時之士、後世之人, 將謂臣爲何如也, 且臣之賢否, 人主不知則已矣; 知而不進退之, 則人安敢有所勸懲哉, 弘文之疏, 至爲公論也。 殿下棄公論而不罷臣職, 人將謂殿下何如也, 乞亟罷臣職, 以快物望。
上不允批答曰:
予惟一人至寡, 萬機寔繁, 苟不重賴于大臣, 誰與共保乎天位! 是故殷宗用傅說作相, 周王得呂望爲師。 若使兩君投杼而懷疑, 二臣拂衣而求去, 則安能致善治而樹美績乎, 惟卿山川間氣, 社稷元臣, 爰自先朝, 以至寡德, 勉出乃心力, 輯寧我邦家。 元首股肱, 旣同一體, 山河帶礪, 敢忘初心, 喜得卿之無雙, 斯任卿而勿貳。 何人言之是嫌, 遽存形迹而國計之不念, 欲自辭避保身雖智, 忘國非忠。 安危之間, 余所注意, 進退之際, 卿可便身, 當體惓惓之懷, 畢輸斷繼之志。
성종 203권, 18년(1487 정미/명성화(成化)23년) 5월10일(기유) 3번째기사
유학 유승탄이 수령의 탐포, 공부, 공물등에 관해 상소하다
유학(幼學) 유승탄(兪升坦)이 상소(上疏)하기를,
“지금의 짐독(鴆毒)18206)을 보건대, 연한(燕閒)18207)입니다.
그런데도 공경대부(公卿大夫)만은 먼 생각과 돌이켜보는데 마음이 없어서 만백성이 감히 노여워하여도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합니다.
대저 헛명예를 과장하고 백성의 억울함을 숨겨서 상하의 정(情)이 막히는 것은 심히 위를 편히 하고 아래를 온전히 하는 바가 아니므로 신(臣)이 간절히 슬퍼합니다.
전하께서 여러 번 조지(詔旨)를 내려서 구언(求言)18208)하고 어진 선비를 찾으시니 어진 이름이 사방에 퍼져서 백성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목마른 이가 물마시기를 바라고 굶주린 자가 밥먹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라는 것이 하루아침이 아니며 기다리는 것이 하루 저녁이 아니었는데 다스리고 교화시키는 공(功)이 백성에게 더해지지 아니하니, 신은 그윽이 민망스러워합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하늘이 이 백성을 태어나게 하여 저절로 다스려지게 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임금에게 맡기며, 임금은 이 백성을 어루만지되 홀로 다스릴 수 없어서 반드시 신하에게 맡기는 것이므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경계하여 다스리는 공을 이루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도(道)입니다.
그러나 임금과 신하가 서로 어진 사람을 얻는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천하와 국가는 다스려진 시기가 항상 적고 어지러워진 시기가 항상 많았으며 혹은 어진임금은 있는데 어진신하가 없기도 하고, 혹은 어진신하는 있어도 어진임금이 없기도 하였습니다.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文), 무(武)의 임금같은 이는 직(稷), 설(契), 고요(皐陶), 이윤(伊尹), 여망(呂望)18209)의 신하를 얻은 뒤에야 옹희(雍熙)18210)의 정치를 이루어서 태화(泰和)18211)의 융성함에 이르렀으니,
이는 천재일시(千載一時)18212)이며 절대로 없는 가운데에서 겨우 있는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지금의 국가는 임금은 있어도 신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정일 집중(精一執中)18213)의 학문으로 이제 삼왕(二帝三王)18214)의 마음을 체득하시어 백성이 감화하여 악한 마음을 고쳐서 화평한 시대가 되기를 기약하시니, 이는 신하가 뜻을 얻어 도(道)를 행하며 힘을 다할 때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지금의 형세는 가장 어렵습니다. 다스리는 자들이 이름은 정치가 태평무사하다고 하지마는 그 실상은 용납해 참고 숨기는 큰 폐단이 많아서 장차 함께 나쁜 데로 합하여집니다.
그래서 구차스럽게 비방을 면하려고 하면 성명(聖明)을 속이는 죄를 고르게 입을 것이며, 특별히 뜻을 세우고 홀로 행하면, ‘사람마다 크게 어지러운 자취가 없다’는 말을 빙자하여 나를 믿지않을 것이고 불신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시기하고 미워할 것이며, 미워할뿐만아니라 작게는 반드시 이간할 것이며 크게는 반드시 죽이고 욕보일 것이니, 신이 비록 희디흰 결백함이 있더라도 어떻게 구중(九重)18215)에 모두 드러내어 밝히겠습니까?
현명한 이는 기미(幾微)를 보고 깊이 간직하여 드러내지아니하고, 지사(志士)는 집안을 닦되 조정에서 헐뜯으니, 여러 신하들이 크게 서로 허물하지않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이 이른바, 용납해 참고 숨기는 폐단이 판연(判然)히 밝게 드러났으니,
하우(下愚)18216)외에 일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이를 갈면서 개탄(慨嘆)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입을 다물고 말하지아니하는 것은, 권세잡은 이들을 과격하게 말하였다가 몸을 보호하는 지혜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신은 이 나라에 있으면서 그 대부(大夫)를 비난하지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만, 백성이 흩어져 도망하는 것은 책임이 수령(守令)에게 있고, 수령의 탐하고 악함은 책임이 대신에게 있으니, 대부의 허물을 숨기고서 지극한 말을 진술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대신을 높이는 것은 임금이 소중히 여기는 바를 높이는 것인데,
대신을 중하게 여겨서 임금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굴평(屈平)18217)의《이소경(離騷經)》을 읽었는데, 이르기를, ‘어찌 내몸의 재앙을 꺼릴 것인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하였고, 가의(賈誼)18218)의 책문(策文)을 읽어보니, 이르기를, ‘통곡할 만한 것이 하나이고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 둘이며 길이 탄식할 만한 것이 여섯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굴자(屈子)18219)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고 가생(賈生)18220)의 근심을 근심으로 삼은 것은 황천후토(皇天后土)18221)가 진실로 함께 살펴보는 바입니다.
신이 이미 몸을 던져 국가를 위해 큰 어려움을 무릅쓰고서 크게 막힘을 통하기를 구하려고 하는데, 무슨 말을 머뭇거리겠으며 무엇을 숨기고 아뢰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나라의 어지러움을 다스리는 충성은 마땅히 일에 시행된 뒤에야 마음에 쾌한 것인데, 어찌 번거롭게 형식으로 하겠습니까?
우선 정치에 방해로운 것의 심한 것을 들어서 진술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살피시어 마음에 두소서.
신은 듣건대,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며 근본이 튼튼하여야 나라가 편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상황으로 보건대, 경성(京城) 밖의 소민(小民)의 목숨은 모두 수령(守令)에게 달렸는데 수령이 부끄러움이 없이 탐하고 어리석은 백성에게 함부로 포학하게 하는 것이 이때보다 더 심함이 없습니다.
이는 자기 일신이 탐하는 것만 아니라 국법을 두려워하지아니하는 것으로 그 믿는 바가 깊고도 크다고 하기에 충분합니다.
신이 야로(野老)18222)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니,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집은 호치(豪侈)18223)가 날마다 성(盛)한데 백성의 초췌(樵悴)하고 가난함은 날마다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백성의 고혈(膏血)을 긁어다가 경상(卿相)의 부(富)를 보태는 것은 수령들이고 안에서 일을 꾸며서 수령의 악함을 덮어 주는 것은 경상입니다.
안팎이 서로 구제하면서 임금의 들음을 막으니, 주상의 은혜가 어떻게 아래에 베풀어지겠으며 백성의 폐막(弊瘼)이 어떻게 위에 사무치겠습니까?
백성의 원망이 화기(和氣)를 손상시킨것이 괴이하지 아니하며, 근년에 하늘의 견고(譴告)18224)가 많은 것은 바로 천심(天心)이 임금을 사랑함이 지극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정의 신하가 이미 이 폐단을 진술하였는데도 전하께서 아직 이를 버려둔 것입니까? 그렇지아니하면 신은 아마도 조정에 충신이 적다고 여깁니다.
옛사람의 말에 있기를, ‘바다의 큰 고래는 보통 낚싯대로 낚을 수 없고 단산(丹山)의 채봉(彩鳳)18225)은 보통 그물로 잡을 수 없으며, 천하의 국가는 보통 사람으로 다스릴 수 없고 영웅호걸(英雄豪傑)은 보통 예(禮)로써 대우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 이미 나라를 바로잡아 돌이키고 풍속을 돌려 옮기는 것으로써 뜻을 삼으셨으면 지금 조정신하로 재덕(才德)의 고하(高下)를 일찍이 그 허파와 간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하셨을 터인데, 경제(經濟)182 26)를 보좌하는 신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진실로 그런 사람이 있어서 성상을 만났다면 그 정치를 이룩한 효과가 이같은데에 그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우리 조정의 인재가 낮아지는 까닭은 그 심술(心術)이 바르지 못하고 뜻을 세우는 것이 높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이 열다섯살부터 성균관(成均館)에서 글을 읽은 지 4,5년인데, 유생(儒生)의 풍습을 익숙하게 보았습니다.
바야흐로 어려서 배울 때에는 그 뜻이 몸을 영화롭게 하고 집을 윤택하게 하는데 지나지아니하고 그 배우는 것은 입과 귀로 기억하고 외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며, 요행으로라도 빨리 과거에 합격하려고 하기때문에 장성하여 행하는 날에 미쳐서는 마음속에 주관이 없어서 물욕이 주장하니, 이로 말미암아 지금 조정신하는 방책(方策)으로 구하면 누구나 넉넉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정치를 시행하는데에는 분명하게 부족하니, 이는 바로 덕(德)을 천하게 여기고 재주를 숭상한 소치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세상을 돕고 백성을 기르는 데에는 덕(德)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재주를 끼고 악한 짓을 하는 자는 악한 것이 이르지아니하는데가 없다’고 하였으니, 재주와 덕의 먼저 하고 뒤에 할 것과 후하게 하고 박하게 할 것을 살피지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은 지금의 과거(科擧)는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문(門)이 아니며, 다만 백성을 야위게 하고 자신을 살찌게 하는 사닥다리일 뿐인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앞선 자는 이로써 인도하고 뒤에 있는 자는 이로써 따르니, 온 나라의 선비가 다투어 사모하고 본받아 휩쓸려 풍속을 이루어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탐하는 풍속이 날마다 성하여 그것을 예사로이 여기고 괴이히 여기지 아니하니, 이 때문에 기강(紀綱)이 서지아니하고 교화가 행해지지아니하여, 민심은 흩어지고 백성의 재물은 없어져 풍속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아아! 오늘의 선비는 내일의 대부(大夫)이며 오늘의 대부는 내일의 경상(卿相)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여 국세(國勢)를 태산같이 편한 자리에 놓아야 하는데, 누가 그것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신에게는 글을 입으로 읽는 스승은 있었으나 뜻을 정성스럽게 가지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스승은 없었습니다.
나이가 약관(弱冠)18227)에 이르러 한 사람의 강직한 벗을 얻어서 개연(慨然)히 사숙(私淑)할 뜻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사습(士習)의 탐하는 마음을 진실로 미워하였던 바, 외람되게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고 이름하여 지나간 신축년18228에 면천(沔川)의 동문(東門) 들보위에 크게 쓰기를, ‘청풍명월이 장차 수신제가(修身齊家)하여 나라를 도와 이룩하려고 한다’고 하고, 인해서 새겨 둔 것은 신의 마음이 장차 뜻이 같은 벗을 널리 구하려고 한 것인데, 오늘날 사람이 학도(學徒)로부터 사류(士類)까지 도리어 우원(迂遠)18229)하고 광망(狂妄)한 계책이라고 하면서 이제까지 말을 전하며 크게 비웃습니다.
아아! 바른 학문이 세상에 시행되지아니한 지가 오래입니다.
그런 뒤에 신이 다시 더불어 할 만한 사람이 없음을 알고서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시골에 엎드려 산 지가 이제 8년이 되었으므로 백성의 폐막(弊瘼)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신이 이제 구하는 바는 전하께 백성의 폐막을 알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아시고 물리치지 않은 뒤에는 물러가 궁벽한 촌락에 살면서 밭을 갈고 세(稅)를 바치면 충성이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옛 성현(聖賢)처럼 노(魯)나라를 버리고 위(衛)나라에 가거나, 제(齊)나라를 섬기다가 양(梁)나라에 유세(遊說)하며 바쁘게 국경을 나가면서 예물을 싣고 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다른 재주와 능력이 없고 나이가 겨우 스물여덟으로 자신을 수양하기에 반(半)이 못되었는데, 망령되게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엿보는 것은 예사로 참고 볼 수 없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엎드려 보건대, 전하께서 백성의 고통을 아시고 장차 크게 하시는 바가 있을 것인데, 대신들이 자리만 차지하고 녹(祿)만 먹으면서 전하의 앞에서 응대(應對)할 때를 당하면 말은 공(孔), 맹(孟)18230)을 일컬으면서 백성을 다스리고, 정사를 행할 때에 미쳐서는 탐독(貪毒)이 매우 심하여, 더구나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조목을 마음속에 나열(羅列)하여 위가 편안하고 아래가 순하며 풍속이 맑아지고 폐단이 끊어지도록 하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기를 바라겠습니까?
저들이 평소에도 이욕(利慾)에 빠져서 곧은 마음으로 위를 섬길 수 없는데, 화환(禍患)을 당한 시기에 있어서는 그 마음을 알 만합니다.
위의 사람이 장차 무엇을 믿고 안강(安康)한 형세를 이룩하겠습니까?
이것은 신이 전하를 위해 차마 편히 앉아 있을 수 없는 바입니다.
대저 을사년(乙巳年)18231) 겨울부터 병오년(丙午年)18232) 첫여름까지 백성은 노년과 장년이 없이 구학(溝壑)18233)에 굴러 죽은 자가 한 고을안에 몇 사람인지를 알지못하는데, 당시의 수령은 굶어죽은 것을 감추기에만 힘을 쓰고 진휼(賑恤)하는 것은 힘쓰지아니하니, 이는 저장한 곡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바로 유사(有司)가 위로는 법을 두려워하지아니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근심하지않기 때문입니다.
대개 이런 때에 백성들은 진휼사(賑恤使)가 온다는 것을 듣게 되는데, 그 도착함에 미쳐서는 공연히 고을을 달리면서 백성의 고통은 깨닫지못합니다.
지금 돌곶이[石乙串] 도랑 비탈의 곡식을 쌓았던 터에는 굶어죽은 백성의 뼈가 낭자히 버려져있습니다만, 애석하게도 위를 받들고 백성을 구제하는 이는 천백에 하나도 없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대신들은 거짓으로 귀먹은 체하여 그런 사실을 들어도 듣지 못한 체하고, 소신(小臣)들은 벙어리를 배워서 보고도 말하지 아니하니, 슬픈 우리 백성은 어디에 고하겠습니까?
간혹 원통하고 억울함이 뼈에 사무쳐서 죽음을 무릅쓰고 고소하는 자가 있으면, 옥사(獄事)를 판결하는 같은 무리의 악한 자가 법을 농락하여 죄에 빠뜨리고 따라서 형벌을 가하여 뒤의 사람을 징계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게 한 뒤에 사치와 욕심을 지극히 하여 이르지 아니한 바가 없으니, 군현(郡縣)의 정사가 대개 이와 같을 뿐인데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아니하겠습니까?
이는 신이 민생을 위하여 차마 앉아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은 생민이 굶주려서 구렁에 넘어지는 때를 당하여 진실로 한 번 폐막(弊瘼)을 주달하고자 하였으나, 본래 가난한 가문(家門)으로 일찍 부모를 잃고 가난함이 비할 수 없었으며, 흉년에 있어서는 진대(賑貸)만 오로지 바라는데, 진대해 주는 것이 공정하고 염결하지않아 한 차례를 넘기고 양을 줄여서 주니, 이 때문에 신의 종들이 혹은 부황(浮黃)18234)이 나고 혹은 흩어져 도망하였으며, 신 자신은 겨우 면하였으나 역시 살가죽과 뼈가 서로 붙어서 멀리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보리밥을 고대하여 조금 기운이 회복되어 갈 때에는 백성들도 보리밥을 먹을 수 있어서 사망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이로 인해 아뢰려던 것을 정지하였습니다.
가령 신 자신이 그 때에 굶주려죽었다면, 충분(忠憤)한 마음이 있고 없음을 전하께서 마침내 알지못하셨을 것이며, 상하(上下)의 정(情)이 막힌 폐단을 마침내 아뢰지못하였을 것입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자 울먹일 만합니다.
신이 다행히 목숨이 붙어서 오늘에 이르러 가무는 조짐이 나타났으니,
전의 잘못을 인하여 후일을 구제하는 데에 서두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제 상하가 막힌 폐단을 전하께서는 그 유래가 이미 멀고 습관과 풍속이 오래 길들어져서 갑자기 변경할 수 없다고 하시겠습니까?
이(利)를 좋아하는 무리의 수가 많고 단단하여 폐단을 구제하기가 어렵다고 하시겠습니까? 이는 크게 그렇지 아니합니다.
물을 다스리는 것을 비유하건대, 막아서 거슬러 흐르게 하는 것은 어려우나 터서 순하게 흐르게 하는 것은 쉽습니다.
이제 천리(天理)에 순응하고 인심(人心)을 바로잡는 것이 막힌 것을 터서 순하게 흐르도록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 조정의 다스림이 소성(小成)18235)하는데 편안하게 여긴다면 그만이겠으나, 전하께서 장구히 다스려지고 오래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세우셨으면, 전하께서는 마땅히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밝으심으로써 일국의 사사로운 은혜를 크게 막고 일국의 사사로운 계교를 크게 깨뜨려서, 일국의 권강(權綱)18236)을 거두어서 스스로 잡고, 일국의 이록(利祿)을 거두어서 친히 사용하여 간사한 무리로 하여금 실정(實情)을 숨기지못하게 하고, 간웅(奸雄)으로 하여금 꾀를 베풀지못하게 한 뒤에는 마음이 같고 덕이 같은 신하로써 안팎의 정권을 잡게 하며, 그런 뒤에는 또 그들로 하여금 중외(中外)에 드나들면서 기강(紀綱)을 세우고 교화를 밝히며 내치고 올리는 것을 크게 밝혀서 수악(首惡)을 베어 나머지 사람을 경계하도록 하면,《대학》에 이른바, ‘오직 어진자라야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미워할 줄 안다’고 한 것과 같을 것이므로, 어진 이는 벼슬하기를 즐거워하여 절의(節義)를 다할 것이고 간사한 사람은 크게 두려워하여 악함을 덮을 것이니, 무엇을 금지시키더라도 그치지않는 것이 있겠으며 무엇을 명령하더라도 행하여지지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장차 사방의 눈이 밝고 사방의 귀가 밝아서 상하의 정이 통할 것이며,
허위가 물러가고 참된 은혜를 입어서 소민(小民)이 살아나며, 탐하는 것이 스스로 없어지고 도둑이 저절로 그쳐서 나라와 백성이 넉넉해지고 자연히 인심이 화평하여 비오는 것과 볕나는 것이 때에 순응할 것입니다.
아아! 벼슬을 높이고 녹(祿)을 후하게 하는 것은 본래 임금이 어진이를 대우하는 공례(公禮)이며, 공경(公卿)이 대대로 지키는 사사로운 물건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을 등용한 것과 탕(湯)임금이 이윤(伊尹)18237)을 초빙한 것과 무왕(武王)이 여망(呂望)18238)을 얻은 것과 같은 것은, 낮은 이로 하여금 높은 이를 넘게 하고 소원(疏遠)한 이로 하여금 친한 이를 넘게 하여 대신(大臣)으로 신임한 것입니다.
그러면 경국제세(經國濟世)하는 재덕(才德)이 어찌 모두 세록(世祿)18239)의 집에서만 나오고 곤궁한 집에서는 나오지 않겠습니까?
국가에서 사람을 뽑는데에는 문과(文科), 무과(武科)로부터 잡기(雜技)에까지 모두 과목이 있고 재주를 고르는 방법이 지극히 정밀하나, 홀로 덕(德)이 넉넉하여 재(才)를 힘쓰지아니한 자는 혹시 한 가지 재주의 팔림을 부끄러워하여 현달(顯達)할 길이 없어서 불우(不遇)하게 몸을 마치니, 육덕(六德)18240)과 육행(六行)18241)을 먼저 하고 육예(六藝)18242)를 뒤에 하는 법에 결함이 없겠습니까?
이는 현량(賢良)18243), 방정(方正)18244), 효렴(孝廉)18245)의 과(科)의 이름이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제 조정 신하가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묻지 아니하고서 자제(子弟)를 끌어올려서 벼슬을 주고 외로운 초야(草野)의 어진 이는 발을 용납할 곳이 없으니, 진실로 속이 탈 만합니다.
신이 또 생각하건대, 넓은 하늘 밑에 온 땅의 많은 사람도 오히려 한 정승이 다스리는데, 더구나 우리나라는 토지와 인민이 한도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천하(天下)를 평정할 만한 재주와 덕이 있는 이를 얻으면 3년이 지나지 아니하여 나라가 크게 다스려질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이라 하더라도 생각하지 아니하면 미치광이가 된다’고 하였으니, 사람의 한 마음은 잡고 놓는 것이 일정함이 없어서 오래되면 게을러지기 쉬우므로 요(要)는 모두 떳떳함이 있는 것이 귀중합니다.
하늘이 떳떳함이 있기때문에 운행이 쉬지아니하고 땅이 떳떳함이 있기때문에 그 실음[載]이 두터우며 해와 달이 떳떳함이 있기 때문에 오래도록 비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고 일월과 더불어 그 밝음을 합하였으니, 반드시 그 떳떳하게 운행이 있음을 체득하여 그것으로 공명(公明)하게 하시고 이로써 사사로움을 버리시며, 이로써 신임하시고 이로써 백성을 사랑하시며, 넓은 집에서도 이와 같이 하시고 깊은 궁(宮)에서도 이와 같이 하시며, 큰 정사에서도 이와 같이 하시고 작은 말과 작은 행실에서도 이와 같이 하시면, 이윤(伊尹)의 이른바, ‘그 덕을 떳떳하게 가지면 그 자리를 보전한다’는 것이 될 것이니, 국가에 매우 다행이며 생민에게도 매우 다행입니다. 신은 위로는 하늘을 이고 아래로는 땅을 밟고 있으면서 어찌 차마 허망(虛妄)한 말로써 우리 주상을 속이겠습니까?
더구나 친구의 성공한 자가 신에게 거듭거듭 경계하기를, ‘온 세상이 다투어 재리(財利)를 탐하는데 네가 홀로 충성한다고 하나 누가 듣겠는가? 네가 어찌하여 북을 치며 망하기를 구하느냐?’고 하니, 신이 이 말을 듣자 마음으로 스스로 반성하기를,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그 숨기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사방의 소식이 위에 도달하지 아니하고 간사한 무리가 백성을 다스려서 나라의 근본이 날마다 흔들리는데 한 사람의 신하가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면 또한 마땅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고는 이에 아홉번 죽을 것을 꺼리지않고서 무릇 눈으로 본 바를 바로 진술하여 이뢰고 추가로 생각한 몇가지 계책을 뒤에 조목으로 나열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재량하소서.
1. 조정 신하들을 크게 모아서 물으시기를, ‘신(臣) 유승탄(兪升坦)이 이르기를,「탐풍(貪風)18246)이 가로막아 상하(上下)의 실정(實情)이 막혔으며, 수령이 탐포(貪暴)하여 소민(小民)이 야윈다」고 하는데, 진실로 그러하다면 이제부터 스스로 새롭게 하는 단서를 열고 예의염치(禮義廉恥)의 교화를 크게 벌여야 할 것이다.
장차 옛 폐단을 크게 없애고 옛 풍습을 크게 고치며 생민을 크게 편안하게 하여 태평한 시대를 이루고자 하니, 문무(文武) 대소신하로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하려고 하는 이는 아무 편으로 나와서 서라.
그리고 이제 국가가 진실로 이미 잘 다스려졌고 탐하는 풍속이 진실로 이미 다 없어졌으며, 민생이 진실로 이미 다 편안하고 수령이 진실로 이제 탐하고 사나움이 다 없어졌는데, 유승탄의 말한 바는 모두 허망(虛妄)된 것이라고 하는 이는 아무 편으로 나와서 서라’고 하시어, 이로써 편을 나누어 이름을 쓰게 한 뒤에는 신을 허망하다고 이르는 자 한 사람과 종친(宗親),내시(內侍) 중에서 친신(親信)하는 한 사람을 감(監)으로 삼아서 데리고 팔도(八道)에 몰래 다니면서 여염(閭閻)의 부로(父老)에게 나아가서 수령의 정적(政迹)과 요역(徭役)과 납곡(納穀)의 절차를 묻고, 혹은 고을에 들어가서 외람되고 잡된 것을 찾아 잡아서 허실(虛實)을 드러내게 하소서.
1. 전적(田籍)을 상고하여 공부(貢賦)18247)를 정하는 것은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므로 국가에서 매양 군현(郡縣)으로 하여금 마감(磨勘)하게 하였으니 법이 상세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수령의 사리에 어둡고 게으른 것과 집리(執吏)의 모람(冒濫)으로 인하여 궁노집가(宮奴執家)와 호리(豪吏)의 호(戶)에 백성이 다투어 붙어서 조군(漕軍), 역자(驛子), 집노(執奴)의 이름도 합해서 기록하니, 이에 20복(卜) 1결(結)인데 호수(戶首)가 된 자도 있고 수백여 결로써 호수가 된 자도 있으니, 이 때문에 혹은 큰소리를 내어 부르짖음을 알지못하는 자는 높은 곳집을 가졌고 혹은 일을 하지않는 것이 없는 자는 전답과 집을 팔게되니, 마음이 놀라고 눈이 놀라는 것은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금하는 법을 엄하게 세워서 지친(至親)외에는 합하여 기록하지 못하도록 하되, 만일 법을 따르지 않거던 진고(陳告)하도록 허락하여 그 전답을 주게 하고, 집리(執吏)의 모람(冒濫)한 자는 일체 변경에 옮기며, 수령으로 사리에 어둡고 게으른 자는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아니하면 고르지못한 폐단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1. 토산물로 공물(貢物)을 하는 것은 이미 하서(夏書)18248)에 나타나서 큰 것은 금석(金錫), 피혁(皮革)이고 작은 것은 청모(菁矛), 죽전(竹箭)으로 토산물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그 폐단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공안(貢案)은 혹시 한때 수령이 명성(名聲)을 얻기를 바라서 지경 밖에 넘어가서 구하여 바꾸어 녹안(錄案)에 채웠는데, 토산물이 혹시 없음으로 인하여 동고(童羖)18249)를 요구하는 근심이 없는 곳이 없으며, 먼 지방에 가서 구하여 갖추니, 후일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유사에게 명하여 대우(大禹)18250)의 공물(貢物)을 정한 뜻을 체득하여 공안(貢案)을 다시 정하면 멀리 다니면서 장만하는 어려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1. 국가에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방법은 생각이 두루 하지않은 것이 아니며 법이 세밀하지않은 것이 아닌데, 전하의 마음으로는 소민(小民)이 이미 편히 살고 직업에 안락하여 근심과 탄식이 없을 것이라고 여길 것이나 신하가 받들어 행하는 데에는 한갓 문구(文具)18251)로 삼아, 마침내 그 실상이 없어서 백성이 상산(常産)18252)을 가진 자가 한두 해가 아니되어 생업을 잃어버리고 가산을 탕진하는 것은 그 까닭이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수령이 된 자가 한없는 욕심을 채우고자하여, 정령(政令)이 번거롭고 잡역(雜役)의 많음이 군역(軍役)에 십배나 더한데 위엄을 끼고 침책(侵責)하기 때문에 농사일을 계획하지 못하고서 복역(服役)에 분주하지만 혹시 잠시의 지체(遲滯)와 작은 일의 과오가 있는 자에게는 스스로 태장(笞杖)을 과(科)하여 전택(田宅)을 팔아서 그 죄를 속(贖)바치도록 독촉하며, 또 모든 명령이 나와서 겨우 백성의 귀에 미치자마자 거기에 따른 처벌이 정하여지는데 누가 그 준비해 바치기 어렵고 쉬움을 용서하겠습니까?
또한 태장(笞杖)을 과(科)하여 죄를 속바치게 하여 이로써 면포(綿布)가 사창(私倉)에 쌓여있다가 몰래 집으로 운반되니, 이로 말미암아 백성의 기름진 땅이 모두 권세있는 집의 종에게 팔리고 오직 메마른 토지만 남았으며, 또 봄에 경작할 때를 당하여 종자와 식량이 모두 없어서 오로지 관름(官廩)의 곡식만 바라는 실정이며, 환과고독(鰥寡孤獨)이 굶주리고 곤궁하여 기어서 겨우 공문(公門)에 이르지만, 여기에 대하여 수령은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아니하고서 사사로운 일로 바쁘다고 하고 혹은 손님 대접으로 술이 취하면 날이 다하도록 기다리고 섰다가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빈손으로 돌아오니, 그 굶주리고 여위어 고생하는 모양은 마음이 상하고 눈에 비참할 뿐만아니라, 집에 있는 늙은이와 아이들의 바라는 마음도 끊어집니다.
이 때문에 갈고 심는 것이 때를 잃으면, 또 조곡(糶穀)18253)의 날에는 미멸(米멸)의 정하고 좋은 것은 사창(私倉)에 실어들이고 그렇지아니하면 호우(豪右)18254)가 청탁하여 받으며 어리석은 백성이 받는 것은 먼지와 흙과 썩고 냄새나는 물건이 반(半)이나 섞인 것일 뿐만아니라, 혹은 열 말이나 열 두세 말을 넣은 석(碩)인데 모두 평석(平碩)18255)으로 계산해주고는 도로 받아들일 때에는 이미 없는 허수(虛數)를 징수하고, 또 한 섬마다 서 말씩 지나치게 더 받아서 사창(私倉)에 채웠다가 몰래 없어지는데, 이것이 비록 민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라의 곡식을 손실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또 여러 사람을 동원시켜 사산(私山)에 가는 것이 한 달에 서너차례에 밑돌지아니하니 이미 농사의 시기를 잃었고, 또 그 힘이 궁곤하여 집에는 경쇠를 건 것처럼 가난해서 텅비었고, 백성들은 굶주린 빛이 나타나고 인해 흩어져 떠나서 강한 자는 도둑이 되고 약한 자는 호구(糊口)할 길이 끊어져서 일생의 억울함이 하늘에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조정신하가 익숙하게 보면서 전하(殿下)에게는 숨기는 것입니다.
1. 백성과 가까이하는 직무는 수령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수령은 백성의 부모(傅姆)18256)와 같은데, 부모가 부덕(不德)하여 백성을 굶주리고 춥게 하여 굶주림이 지극하면 백성이 도둑이 되지아니하는 자가 적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수령이 부덕하면 어떻게 융성하고 태평한 다스림을 이루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수령의 선택을 신중히 하여 그 전주(銓注)1825 7)할 때에 그 경력을 상고하여 크게 청렴하고 능력이 있는가를 시험하고 이름이 조정에 나타나고 대부(大夫)들이 모두 좋다고 한 뒤에 임명할 것이며, 기한을 세우지 말고 매양 그 최(最)18258)에 해당하는 사람을 상고하여 혹시 10년에 이르더라도 발탁[調]하지아니하고 최우수 성적이 많은 자에게는 마땅히 그를 선초(宣招)18259)하여 모름지기 육조(六曹)에 차례를 밟지 아니하고서 뽑아쓰도록 하며, 만일 탐묵(貪墨)18260)의 과실이 있어 뒤에 탄로된 것은 벌을 절도[穿踰]에 비하여 일체 변경으로 옮기면, 사람들이 상벌(賞罰)의 중함을 알고 공(龔), 황(黃)18261)같은 사람이 없음을 근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1. 전하께서 진실로 오리(汚吏)18262)들이 두려워하게 하려고 하면, 먼저 중외(中外)에 영(令)을 내기를, ‘장차 신하 아무개등으로 하여금 백성의 고통을 묻게 할 것인데, 만약 조정에 있는 신하가 미리 모면할 술책으로 수령에게 누설해 통하는 자와 수령이 간사하게 꾸며 미리 민간을 꾀어서 그 죄를 면하려고 꾀하는 자는 중한 죄로 조치하며, 혹은 관리나 양인(良人)이나 천례(賤隷)중에서〈수령의〉명을 받아서 간사하게 꾸미는 것을 민간에 가르치는 자도 참(斬)하며, 전의 허물을 숨기지아니하고 착한 사람으로 변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전의 과실을 논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단서를 열어 주며, 이 뒤에 풍속을 허물어뜨리는 자는 귀근(貴近)한 자를 물론하고 모두 중한 법으로 논하여 다시 용서하지아니하겠다’고 하여, 중외의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성심으로 자세히 알도록 하소서.
1. 과전(科田)18263)은 바로 상고(上古)의 세록(世祿)의 남은 제도인데, 덕(德)을 높이고 공(功)을 갚으며 상(賞)을 대[世]로 파급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대저 임금이 신하를 아끼는 것이 그침이 없고 대우하기를 끝까지 하는 것이 이처럼 지극하니, ‘아아! 선왕(先王)을 세대가 다하도록 잊지 못한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지금은 과전을 없애고 직전(職田)18264)으로 만들었으니, 벼슬하는 이는 이미 상록(常綠)이 있어 그 농사에 대신하는데 또 직전이 있어 그 부(富)를 이으니 그 살아서는 은혜와 행복이 비할 데없어 이처럼 지극하나, 죽고나면 아들과 아내가 춥고 굶주려 사방에 다니면서 호구(糊口)하느라 고생이 더할 수 없으니 견마(犬馬)18265)를 기르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저절로 두루 끝까지 한다는 뜻에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재량하소서.
1. 절에 위전(位田)18266)을 두는 것은 그 사문(沙門)18267)을 상주어 선왕(先王)의 명복(冥福)을 올리고 성수(聖壽)18268)의 만년을 축원하며, 석씨(釋氏)의 과욕(寡欲)18269)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인데, 지금의 치류(緇流)18270)는 세(稅)를 거둘 즈음에 농가에서 자고 먹으며 열흘이나 한 달을 머물기도 하고 혹은 계(戒)를 범하기도 하니 이미 옳지못한데, 또 표쇄(瓢刷), 혜말(鞋韈)과 모든 기명(器皿)의 세(稅)가 있지아니한 것이 없어서 거두고 요구하기를 만족이 없고 백가지로 침해하니 백성들의 고통이 심합니다.
신은 이 세가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눈으로 보고도 오히려 이가 갈리는데 더구나 성상께서 보시는 사랑하는 백성이겠습니까? 만일 없앨 수 없으면 나라에 거두어 들여서 경창(京倉)에 주는 것만 못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재량하소서.
신이 듣건대, 동궁저하(東宮低下)께서 입학(入學)하신다하니, 이는 국가의 무강(無彊)한 복입니다. 그러나 교양하는 방법을 삼가하지아니할 수 없습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몽(蒙)18271)을 바르게 기르는 것은 착한 사람을 만드는 공(功)이다’고 하였으니, 대저 인정(人情)이 정도(正道)는 친하기 어렵고 아첨하는 것은 합하기 쉬우므로, 옛날 임금의 세자(世子)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궁궐의 은밀한 곳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고 하여, 드디어 망령되게 간사한 무리와 결탁하고 부시(婦寺)18272)와 친밀하여 옳지못한 일을 함부로 행하므로, 습관이 성품을 이루어 총명영예(聰明英睿)한 자품으로 하여금 정도(正道)와 중화(中和)의 논의를 듣지못하게 하고, 조금 장성함에 미쳐서는 도(道)를 들음이 지극하지못하고 도를 행함이 익숙하지못하면서 정치에 임하여 다스려지기를 원하지만, 빠뜨리는 것이 많으니 매우 염려할 만합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정직하고 충량(忠良)한 선비를 골라서 보(保),부(傅),사(師), 우(友)를 삼아서 때때로 같이있게 하여, 전후좌우가 바른 사람이 아님이 없고 출입(出入),기거(起居)가 바른 도(道)가 아님이 없도록 해서, 덕성(德性)을 훈도(薰陶)18273)하고 기질(氣質)을 보존하게 하면, 이는 국가가 길이길이 태평을 누릴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하였다.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의논하도록 하니,
한명회(韓明澮)와 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유승탄(兪升坦)의 말한 바의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수령(守令)이 호화스럽고 탐학(貪虐)하다는 것은 반드시 지촉(指囑)한 자가 있을 것이며, 진휼(賑恤)할 때에 백골이 낭자하다는 일을 아울러 질문하여 허실(虛實)을 알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다만 조목을 진술한 일은 국가에서 모두 이미 시행하는 것인데, 거행할 것이 아닙니다”하고,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공경대부의 호화스러움과 수령의 탐학(貪虐)하고 불법(不法)한 것은 풍교(風敎)18274)에 크게 관계되니, 그 허실을 묻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승정원(承政院)에 불러서 묻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유승탄의 말이 비록 적중하지아니한 것이 많기는 하더라도 또한 가상할 만한 뜻이 있으니, 그 조목으로 진술한 일이 적당한가 않은가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유승탄이 조목으로 진술한 두어 가지 일은 만일 다시 행하자면 선왕(先王)의 옛법을 다 고친 뒤에야 가합니다.
또 경상(卿相)과 수령(守令)이 모두 옳은 사람이 없다고 논한 것은 너무 지나친 의논입니다. 수악(首惡)을 베고 탐포(貪暴)를 없애라는데 이르러서는 반드시 지척(指斥)한 것이 있을 것이니, 이는 묻지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유승탄(兪升坦)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여기면서 조정정사를 비방하고 경상(卿相)을 일일이 비방하며 쓰여지기를 바라서 고(皐), 기(虁), 직(稷), 설(契)18275)의 사업을 베풀고자하였으니, 그 뜻은 대단합니다.
그 조목으로 진술한 것은 혹은 성헌(成憲)에 방해되기도 하고 혹은 우원(迂遠)한 데에 실수가 되기도 하며, 사이에는 옳은 듯한 의논도 있으나 모두 국가(國家)에서 이미 시행한 자취일 뿐, 기묘한 꾀와 먼 계략은 없습니다.
다만 수령(守令)이 백성을 병들게 하는 상황과 민생(民生)의 고통스러운 모양은 곡진히 말하여 남김이 없으니, 청컨대 마음에 두소서.
이른바, 돌곶이[石串]에 굶주린 백성의 백골(白骨)이 낭자하다는 말은 묻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註18206]짐독(鴆毒):해독이 심한것의 비유 註18207]연한(燕閒):편하고 한가함 註18208]구언(求言):나라에 재변(災變)이 있을 때 임금이 근신하는 의미에서 시정(時政)의 잘못과 민폐(民弊)에 대한 바른 말을 구하던 제도 註 18209]여망(呂望):태공망(太公望) 註18210]옹희(雍熙):화락한모양 註18211] 태화(泰和):태평한 모양 註18212]천재일시(千載一時): 천재일우(千載一遇). 註18213]정일집중(精一執中):《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편의 “유정유일윤집궐중(惟精惟一 允執厥中)”의 준말로, 오로지 잡된 것이 섞이지않고 순수하게 중용(中庸)의 도(道)를 지킨다는 뜻임 註18214]이제삼왕(二帝三王):요(堯)임금, 순(舜)임금과 하(夏)의 우왕(禹王), 은(殷)의 탕왕(湯王), 주(周)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통틀어 일컫는 말. 문왕과 무왕은 부자(父子)이므로 하나로 침 註18215]구중(九重):구중궁궐 註18216]하우(下愚):아주 어리석고 못난 사람 註18217]굴평(屈平):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 대부(大夫) 굴원(屈原) 註18218]가의(賈誼):전한(前漢)때의 문인(文人) 註18219]굴자(屈子) :굴평 註18220]가생(賈生):가의 註18221]황천후토(皇天后土):하늘의 신과 땅의 신 註18222]야로(野老):시골사는 노인 註18223]호치(豪侈):호화(豪華). 註18224]견고(譴告):꾸짖고 훈계함. 곧 재이(災異) 註18225]채봉(彩鳳):아름다운 봉황새 註18226]경제(經濟):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구함 註18227]약관(弱冠):스무살 註18228]신축년:1481 성종12년 註18229]우원(迂遠):세상 일에 어둡고 멂 註18230]공(孔), 맹(孟):공자(孔子)와 맹자(孟子) 註18231]을사년(乙巳年):1485 성종16년 註18232]병오년(丙午年):1486 성종17년註18233]구학(溝壑):구렁 註18234]부황(浮黃):굶주려서 누렇게 부음 註18235]소성(小成):작게 이룸 註18236]권강(權綱):정권(政權)의 대강령(大綱領) 註18237] 이윤(伊尹):은(殷)의 양상(良相) 註18238]여망(呂望):주(周)의 명신(名臣) 태공망(太公望) 註18239]세록(世祿):대대로 이어서받는 나라의 녹봉(祿俸) 註 18240]육덕(六德):사람이 지켜야할 여섯 가지의 덕(德). 곧 지(知),인(仁),성(聖),의(義),충(忠),화(和), 또는 예(禮),인(仁),신(信),의(義),용(勇),지(智). 註 18241]육행(六行):효(孝),우(友),목(睦),인(婣),임(任),휼(恤)을 말한 것으로, 효는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 우는 형제간의 우애(友愛), 목은 구족(九族)간의 화목, 인은 인척(姻戚)과의 정분, 임은 남을 위해 힘쓰는 것, 휼은 없는 자를 구휼하는 것임 註18242]육예(六藝):선비로서 배워야할 여섯가지의 일, 곧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임 註18243]현량(賢良):한당(漢唐)이후의 관리등용 시험의 한 과목 註18244]방정(方正):한대(漢大)의 과거(科擧)과목 註18245]효렴(孝廉):한대(漢代)의 관리 특별임용의 한가지註18246]탐풍(貪風):탐(貪)하는 풍속 註18247]공부(貢賦):공물(貢物)과 부세(賦稅) 註 18248]하서(夏書):《서경》의 편명 註18249]동고(童羖):뿔없는 양 註18250] 대우(大禹):우(禹)임금 註18251]문구(文具):겉만 번드르하게 꾸밈. 문식(文飾) 註18252]상산(常産):살아갈 수 있는 일정한 재산 註18253]조곡(糶穀):나라에서 봄철의 춘궁기(春窮期)에 창고의 곡식을 내어 백성들에게 꾸어주던 일. 또는 그 곡식 註18254]호우(豪右):시골에서 세력을 떨치는 사람 註18255]평석(平碩):15말 註18256]부모(傅姆):유모(乳母) 註18257]전주(銓注):전형(銓衡)하여 주의(注擬)함 註18258]최(最):근무성적의 상등(上等) 註18259]선초(宣招):임금이 부름 註18260]탐묵(貪墨):탐오(貪汚) 註18261]공(龔), 황(黃): 한(漢)나라의 순리(循吏)인 공수(龔遂)와 황패(黃霸) 註18262]오리(汚吏):탐관오리 註18263]과전(科田):과전법(科田法)에 따라 관리들에게 지급되는 전지. 문무백관을 18등급으로 나누어 재직,퇴직을 불구하고 지위에 따라 지급하되, 제1급은 1백 50결(結), 제18급은 10결을 주었음 註18264]직전(職田): 사전(私田)의 하나. 벼슬아치들에게 벼슬하는 동안 나누어주던 전지. 원칙적으로 세습(世襲)하지 못하였음 註18265]견마(犬馬):개와 말 註18266]위전(位田):관청의 경비(經費)나 제사의 비용(費用)을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된 토지. 위토(位土) 註18267]사문(沙門):중 註18268]성수(聖壽):임금의 수명(壽命) 註18269]과욕(寡欲):욕심이 적음 註18270]치류(緇流):치의(緇衣)를 입은 무리. 곧 중을 지칭함 註18271]몽(蒙):아이 註18272]부시(婦寺):궁중에서 일을 보던 여자와 환관(宦官)을 일컫는 말임 註18273]훈도(薰陶):덕으로 감화시킴 註18274]풍교(風敎):풍속과 교화 註18275]고(皐), 기(虁), 직(稷),설(契) : 순(舜)임금을 섬긴 네 명신(名臣).
○幼學兪升坦上疏曰:
觀今之鴆毒, 燕閑也。 獨公卿大夫自無心於長慮却顧, 而萬姓敢怒, 莫敢矯其非。 夫張虛譽、諱民冤, 上下情隔, 甚非所以安上而全下也。 臣切悼之。 殿下屢降詔旨, 求言搜士, 仁聲四布, 民之望治, 如渴之望飮、飢之待哺也。 望之非一朝, 待之非一夕, 而治化之功, 不加於百姓, 臣切憫之。 臣謂天生斯民, 不能自治, 必任之君; 君撫斯民, 不能獨治, 必任之臣, 君臣交修, 以成治功, 古今之通道也。 然君臣相得, 豈偶然哉, 天下國家之治日常小, 亂日常(日常)多。 或有君而無臣, 或有臣而無君。 若堯、舜、禹、湯、文、武之君, 獲稷、契、皐陶、伊尹、呂望之臣, 然後足以成雍熙之治, 臻泰和之隆, 此千載一時, 絶無而僅有者也。 臣謂今之國家, 有君而無臣。 恭惟殿下以精一執中之學, 得二帝三王之心, 以於變時雍爲期, 此人臣得志行道而効力之秋也。 雖然方今之勢, 最難有爲者。 名爲治平無事, 而其實多容忍隱匿之大弊, 將同流合汚。 苟免衆謗, 則罪均欺明; 起而特立獨行, 則人人藉口於無大亂之迹, 而不吾信。 非徒不信, 必娼疾以惡之; 非徒惡之, 小必離間, 大必戮辱。 臣縱有皓皓之白, 何以盡曝白於九重乎, 賢者見幾, 深藏而不市; 志士修家, 毁之於朝廷。 群臣無大相過者, 亦以此也。 臣所謂 ‘容忍隱匿之弊’, 判然昭著, 下愚之外, 識事之人, 孰不切齒而慨歎乎, 所以括囊不言, 恐其激言權勢而失其保身之智也。 臣非不知居是邦, 不非其大夫。 然民之流亡, 責在守令, 守令之貪頑, 責在大臣, 則諱大夫而陳至言難矣! 而況尊大臣, 所以尊人君之所重, 則其可重大臣而欺君主乎, 臣嘗讀屈平之《離騷》曰: “豈余身之憚殃, 恐皇輿之敗績。” 又讀賈誼之策曰: “痛哭者一, 流涕者二, 長太息者六。” 臣心屈子之心, 憂賈生之憂, 皇天后土實所共鑑。 臣旣欲出身爲國家犯大難, 以求通大隔, 何言囁嚅, 何隱不陳, 然醫國忠誠, 當施諸行事而後快於心, 何煩文爲, 姑擧妨政害治之尤者以陳。 伏惟聖察而留神焉。 臣聞, 民惟邦本, 本固邦寧。 以今觀之, 京城之外, 小民之命脈, 悉懸於守令, 而守令之頑貪無恥, 恣虐愚民, 莫甚於時。 是非特一己之貪, 足以不畏邦憲, 其所恃者, 深且大矣。 臣聞野老之歎曰: “公卿大夫之家豪侈日盛, 而民之憔悴貧窶日甚。” 何以言之, 剝民膏血以益卿相之富者守令, 用事於內以掩守令之惡者卿相。 內外相濟以蔽主聽, 上恩何由而下宣, 民瘼何由以上達, 無怪乎民怨之傷和, 而近年譴告之多, 乃天心仁愛人君之至也。 抑朝臣已陳此弊, 而殿下姑舍是乎, 不然, 臣恐朝少忠臣也。 古人有言曰: “滄海長鯨, 不可以常竿而釣之; 丹山彩鳳, 不可以常網而羅之。 天下國家, 不可以常人而治之; 英雄豪傑, 不可以常禮而待之。” 殿下旣以挽回轉移爲志, 則今朝臣才德之高下, 曾如見其肺肝然, 經濟之佐, 有耶無耶, 苟有其人而遭遇聖上, 則其致治之效, 不止若是。 臣謂我朝之人才, 所以卑下者, 其心術之不正而立志之不高也。 臣自十五讀書成均四五年, 而熟視儒習矣。 方幼學之時, 其志不過榮身潤屋, 其學不過口耳記誦, 僥倖捷科, 故及壯行之日, 中無所主, 物欲爲主矣。 由是今之朝臣, 求之方策, 孰不有餘; 施之政治, 斑斑不足, 此乃賤德尙才之致也。
傳曰: “輔世長民莫如德。” 又曰: “挾才爲惡者, 惡無不至。” 則才德先後厚薄, 不可不審。 臣知今科擧, 非修己治人之門, 特瘠民肥己之梯耳。 前者以是導之, 後者以是蹤之, 一國之士爭慕效之, 翕然成風。 賄賂之公行, 貪風之日熾, 以爲常而不以爲怪。 以此紀綱不立, 敎化不行, 散民心, 渴民財, 而風俗耗矣。 嗚呼! 今日之士, 明日之大夫, 今日之大夫, 明日之卿相, 則其致君澤民, 而措國勢於太山之安, 誰能任之, 臣雖有口讀之師, 未有誠正之師。 年至弱冠, 得一直友, 慨然有私淑之志。 於是士習之貪, 心誠惡之, 而濫號以 ‘淸風明月。’ 去辛丑年間, 大書于沔川東門樑上曰: “淸風明月將欲修身齊家, 弼成邦國。” 因而刻之者, 臣心將欲廣取同氣之友也。 而今之人, 自學徒至士類, 反爲迂遠狂妄之計, 至今傳言大笑。 嗚呼! 正學之不行於世也久矣。 然後臣知無復可與有爲者, 而不求人知, 自此跧伏鄕曲, 于今八年, 細知民瘼。 臣今所求, 欲殿下知民瘼耳。 殿下不知而斥之, 然後退伏窮閭, 耕田納稅, 忠亦在焉。 非如古之賢聖, 去魯適衛, 事齊遊梁, 遑遑栖栖, 出疆載贄之可望也。 伏念臣無他技能, 而年纔二十八, 修己未半, 而妄窺治人, 所以不能安然忍視者在焉。 伏覩殿下知民疾苦, 將大有爲, 而股肱之臣, 尸位素飡。 當應對殿下之前, 言必孔、孟, 及臨民行政之時, 貪毒太甚, 使斯民不蒙至治之澤。 況望其修齊治平之目, 羅列胸中, 而以上安下順風淸弊絶爲己責乎, 彼在平日, 汨於利慾而不能以直事上, 則在於禍患, 其心可知。 上之人將何所憑藉而成安康之勢哉, 此臣之爲殿下不忍安坐者也。 夫自乙巳冬以至丙午孟夏, 民無老壯, 轉死溝壑者, 一邑之內, 不知幾人。 當時守令, 以藏殍爲務, 而不務賑恤, 是非積儲之不裕, 正在有司上不畏法, 下不憂民之故也。 蓋於是時, 民聞賑恤使之來也, 及其至則空馳州郡, 不醒民瘼。 至今石乙串溝陂積穀之墟, 飢民白骨狼藉棄擲。 惜乎! 其奉上救民者之無一人於千百也。 不特此也, 大臣佯聾聽之而不聞, 小臣學啞, 視之而不言。 哀我斯民, 何所告哉, 間有冤抑到骨, 寧死告訴者, 則折獄之同惡者, 弄法陷罪, 從而刑之, 以懲後人, 使民有口無言, 而後窮奢極欲, 無所不至。 郡縣之政, 大槪如此而已, 豈不痛哉, 此臣之爲民生而不忍坐視者也。 臣當生民轉壑之日, 誠欲一達弊瘼, 然臣本寒門, 早喪父母, 貧乏無比。 其在凶年, 專仰賑貸, 賑給不能公廉, 越一巡而減給焉。 故臣之僮僕, 或浮腫或流亡, 臣身僅免, 而亦皮與骨連, 難可遠行。 苦待麥飯, 稍向平復時, 則人民亦得麥飯, 無復死亡者矣, 玆仍寢奏。 假使臣身餓死其時, 則忠憤之有無, 殿下終不得知, 而上下情隔之弊, 終不得達矣。 興言至此, 堪可飮泣, 臣幸連喘, 至于今日。 旱乾兆見, 則因前失而救後來, 不可不急。 今上下壅遏之弊, 殿下以爲其來已久, 狃於習俗之久而未能卒變耶, 嗜利之徒, 其麗不億, 鞏固而難救耶, 是大不然。 比之治水, 壅而逆流則難, 決而順流則易。今也順天理, 正人心, 何異決壅順流乎, 我朝之治, 安於小成則已; 殿下以長治久安立心, 則殿下當以至公至明, 大杜一國之私恩, 大破一國之私計, 收一國之權網而自執, 斂一國之利祿而親用之, 使憸邪不得遁情, 奸雄無以施術。 然後仁心同德之臣, 俾執內外權柄而後, 又使之出入中外, 立綱紀明敎化, 大明黜陟, 誅首惡以警其餘, 則《大學》所謂 “惟仁者, 能好人, 能惡人。” 賢者樂仕而盡節, 壬人大畏而掩惡, 胡禁不止, 曷令不行, 將見明四目, 達四聰, 而上下之情通; 却虛僞, 蒙實惠, 而小民蘇息;貪自戢,盜自弭,而裕國裕民,自然人心和平而雨暘時若矣。
嗚呼! 隆爵厚祿, 本人君待賢之公禮, 非公卿世守之私物。 若堯之揚舜、湯之聘尹、武王之得呂望, 使卑踰尊、踈踰戚, 而信任大臣矣。 然則經濟之才德, 豈盡出於世祿之家, 而不出於窮閻蔀屋之下乎, 國家取人, 自文武至雜技, 皆有科目, 選藝之方, 至爲精密。 獨優德而不務才者, 或羞一藝之售, 無路顯達, 坎軻終身, 於先六德六行而後六藝之典, 無乃缺乎, 此賢良、方正、孝廉之科, 所由名也。 今之朝臣, 不問賢否, 引進子弟, 俾之官爵, 孤根草野之賢, 無容足之地, 良可熱中。 臣又念以普天之下, 率土之衆, 猶能一相致治, 況我國土地人民之有限乎, 苟得平天下之才德者, 則不過三年, 而邦國大治矣。 雖然。 《書》曰: “惟聖罔念作狂。” 人之一心, 操舍無定, 久則易怠, 要皆貴於有常。 天有常故不息, 地有常故厚載, 日月有常故久照。 殿下與天地合其德, 日月合其明, 必體其有常之運, 以之公明, 以之去邪, 以之信任, 以之愛民。 廣堂如是, 深宮如是, 大政事如是, 微言細行如是, 伊尹所謂 ‘常厥德, 保厥位’, 國家幸甚, 生民幸甚。 臣上戴天, 下履地, 何忍以虛妄之說, 欺我主上乎, 而況朋友之有成者, 申申其戒臣曰: “滔滔者竟進貪婪, 汝獨忠誠而誰聽之, 汝何擊鼓而求亡乎,” 臣聞言, 心自反之曰: “士生斯世, 見其隱匿成風而四聰不達, 憸徒牧民而邦本日搖, 則以一臣之一死, 盡忠而救民, 不亦宜乎,” 於是勿憚九死, 凡所目覩, 直述以聞。 追思數策, 條列於後, 伏惟聖裁。 一。 大會朝廷臣僚, 問之曰: “臣昇坦云, 貪風隔而上下情否, 守令貪暴而小民憔悴。 誠然則自今開自新之端, 大張禮義廉恥之敎, 將欲大去舊弊, 大變舊習, 大安生民而致太平。 文武大小臣, 欲同心協力者, 皆出某邊立。 今國家誠已至治, 貪風誠已盡戢, 民生誠已盡安, 守令誠已盡無貪暴, 而昇坦所云皆虛妄者, 皆出某邊立。” 以此分邊着名後, 臣率虛妄云者一人及宗親內寺中, 命親信一員爲監, 潛行八道, 就閭閻父老, 問守令政迹、徭役、納穀節次; 或入郡縣, 搜捕濫雜, 以彰虛實。 一。 田籍考定貢賦, 所係至重。 國家每使郡縣磨勘, 法非不詳。 然因守令之昏惰、執吏之冒濫, 宮奴、執家、豪吏之戶, 民爭附之, 漕軍、驛子、執奴之名, 亦合錄之。 於是以卄卜一結而爲戶首者有之, 以數百餘結而爲戶首者有之。 故或不知叫呼者, 乃擁高廩; 或靡事不爲者, 至賣田宅。 其所以驚心駭目, 莫甚於此。 願自今特命有司, 嚴立禁章, 至親之外, 毋使合錄。 如不聽法, 許令陳告, 仍給其田; 執吏之冒濫, 一徙邊鄙; 守令昏惰, 永不敍用, 庶無不均之弊矣。 一。 任土作貢, 已著《夏書》。 大而金錫皮革, 小而菁茅竹箭, 莫非土産, 未聞其弊。 國家貢案, 或因一時守令邀射聲名, 踰境外求, 換實錄案, 因物産之或無, 童羖之患, 無處無之, 取辦遠境, 後期之弊,不可勝言。 伏願殿下特命有司, 體大禹作貢之意, 更定貢案, 庶無跋涉難辦之弊矣。 一。 國家惠民之方, 慮非不周, 法非不密; 殿下之心, 以爲小民已安居樂業, 愁歎息矣。 然臣下之奉行, 徒爲文具, 終無其實。 民之有常産者, 不一二年, 失業破産, 有自來矣。 何則, 爲守令者, 謀遂無窮之慾, 政令煩劇, 雜役之多十倍軍役, 而挾威侵責, 故不計農務, 奔走服役。 而或暫刻遲滯, 小事過誤者, 自科笞杖, 督賣田宅, 以贖其罪。 又凡百出令, 纔及於民耳, 從之以定罰之法, 孰恕其辦納之難易, 亦科笞杖贖罪, 以此綿布積在私倉, 潛輸于家。
由是民之沃田, 盡賣於權勢之奴; 惟餘薄田, 亦當春耕, 種食具乏, 專仰官廩。 而鱞寡孤獨, 飢困匍匐, 僅到公門, 於是守令慢不致意, 或私事爲忙, 或待客泥醉, 則竟日佇立, 昏夜空還。 其飢羸辛苦之狀, 不啻傷心慘目, 在家老兒之望亦絶矣, 以此耕種失時。 又於糶穀之日, 擇米之精好者, 輸入私倉, 不然豪右請托受之, 愚民所受, 非徒半雜塵土腐臭之物。 或十斗、十二三斗入碩, 般以平碩計給, 迨還糴之日, 旣徵無面虛數, 又每一碩, 濫納三斗, 以充私倉, 潛消暗鑠, 是雖出於民間, 其損國一也。 又動衆私山行, 月不下三四度, 旣失其時, 又困其力, 室如懸磬, 民有菜色。 因而流離, 强者盜, 弱者糊口斷絶, 一生冤格于天。 此皆朝臣之熟視, 而諱殿下者也。 一。 近民之職, 莫如守令。 先儒曰: “守令, 民之傅姆。 傅姆之不德, 飢之寒之, 飢寒之至, 民不爲盜者鮮矣。” 苟守令之不德, 何以致隆平之治哉, 伏願殿下重守令之選, 於其銓注之時,考其歷試, 大有廉能名顯於朝, 諸大夫皆曰可, 然後命之, 勿立期限, 考其每居最, 或至十年不調, 其多最績者, 當其宣招, 須於六曹不次擢用。 如有貪墨之失, 敗露於後, 罰比穿踰, 一徙邊鄙, 人知賞罰之重, 不患龔、黃之無其人矣。 一。 殿下實欲大畏汚吏, 則先出令中外曰: “將使臣某等問民疾苦。 若在朝之臣, 以預圖之術, 漏通守令者, 守令之詐飭預誘民間, 而謀免其罪者, 置之重誅。 或官吏良人賤隷中, 聽命飭詐敎誨民間者, 亦斬。 其不諱前過, 而樂於遷善者, 勿論前失, 以開自新之端。 今後傷風敗化者, 不計貴近, 皆論重典, 無復寬宥。” 使中外臣民, 誠悉知之。 一。 科田乃上古世祿之遺制, 所以崇德報功, 賞延于世之意也。 夫君之於臣, 愛之無已, 待之有終, 如此其至。 嗚呼! 先王之所以沒世不忘者, 以此也。 今也革科田以爲職田, 爲仕者旣有常祿, 以代其耕, 又有職田, 以繼其富。 其生也, 恩幸無比, 如此其極; 其死也, 兒寒妻飢, 糊口四方, 靡有紀極。 其不幾於犬馬之養者幾希, 於自周有終之意, 無乃有缺乎, 伏惟聖裁。 一。 寺有位田, 所以賞其沙門, 薦先王之冥福, 祝願聖壽之萬年, 嘉其釋氏之寡欲。 今之緇流, 收稅之際, 寢食田家, 淹留旬月, 或以犯戒, 已爲不可。 而且瓢刷鞋韈凡百器皿, 莫不有稅, 徵求無厭, 侵虐百端, 民甚病焉。 臣不知此何等稅也。 以臣目覩, 猶且切齒, 況聖鑑之字民乎, 如不可去, 莫若收之於國, 給之京倉。 伏惟聖裁。 臣樸宮邸下入學, 此國家無疆之福也。 然敎養之方, 不可不謹。 《易》曰: “蒙以養正聖功。” 大抵人情, 難親正道, 易合諂諛。 在昔國君儲副, 自以爲宮禁隱密之地, 外人莫得而知者, 遂乃妄結憸邪, 親昵婦寺, 恣行不義。 習與性成, 使聰明英睿之資, 不得聞正道中和之論。 及其小壯, 楣未至, 行道未熟, 臨政願治, 多有闕失, 甚可慮也。 今計莫若擇正直忠良之士, 以爲保傅師友, 使時時與之游處。 左右前後無非正人, 出入起居無非正道, 薰陶德性, 補助氣質, 則此國家永永太平之基也。
命議于領敦寧以上。 韓明澮、尹壕議: “昇坦所言 ‘公卿大夫與守令豪侈貪虐’ 必有指囑者。 賑恤時白骨狼藉事, 幷質問, 知虛實何如, 但條陳事, 則國家皆已施行, 不須擧行。” 沈澮議: “公卿大夫之豪侈與守令之貪虐不法, 大關風敎, 不可不問其虛實。 招致政院問之何如,” 尹弼商議: “昇坦之言, 雖多有不中, 亦有可嘉之意。 其條陳便否, 令該曹議啓何如,” 洪應議: “昇坦條陳數事, 如復行之, 盡變先王舊章而後可也。 且論卿相守令, 擧無其人, 此過甚之論。 至於 ‘誅首惡、去貪暴’, 必有指斥者, 是不可不問也。” 李克培議: “昇坦自以爲賢, 誹謗朝政, 歷詆卿相, 冀以顯用, 欲陳皐、夔、稷、契之事業, 其志盛矣。 其所條陳, 則或妨於成憲, 或失於迂遠, 間有似是之論, 而皆國家已行之陳迹, 無有奇謀遠略。 但其守令病民之狀、民生疾苦之形, 言之曲盡而無餘, 請留意。 所謂石串飢民, 至今白骨狼藉之語, 不可不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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