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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편 列國의 爭雄시대
제 1장 열국의 총론
列國의 연대의 正誤
삼조선이 무너지고 신수두님ㆍ말한ㆍ불구래 등의 참람(僭濫)한 칭호를 일컫는 자가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열국 분립의
판국을 만들었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열국사(列國史)를 말하려면 전사(前史)에서 열국의 연대를 줄여버렸으므로
이제 그 연대부터 말해야겠다.
어찌하여 열국의 연대가 줄어졌다 하는가? 먼저 고구려 연대가 줄어진 것부터 말하리라. 고구려가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신라 문무왕(文武王) 8년(기원 668년)에 망하니 나라를 누리기를 도합 705년이라고 일반
역사가들이 적어왔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할 때에, “9백 년에 마치지 못한다(不及九百年).”라고 한 비기(秘記)가 유행했는데, 비기가 비록 요망한
글이라 하더라도 그 시대에 그 비기가 인심 동요의 도화선이 되었으니, 이때(문무왕 8년)에 고구려의 연조가 8백 몇십 년
되었음이 명백하므로, 본기(本紀)의 705년이 의문됨이 그 하나요, 고구려 본기로 보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鄒牟王)의
13세손밖에 안 되는데 광개토왕의 비문에, “17세손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에 전하였다(傳之十七世孫 廣開土平安好太王).”고
한 문구에 의거하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의 13세손이 아니라, 17세손이다. 이같이 세대가 빠진 본기라, 그 705년이라고
한 연조는 믿을 수 없음이 그 둘이요, 본기로써 상고하면 고구려 건국이 위우거(衛右渠)가 멸망한 지 72년만이지마는,
북사(北史) 고려전(高麗傳)에는 막래(莫來)가 서서 부여를 쳐 크게 깨뜨리고 이를 복속시켰는데,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을 토멸하고 사군(四郡)을 둘 때에 고구려를 현(縣)이라고 하였다. 막래는 해동역사(海東繹史)에, “모본(慕本)의
잘못인가?”하였으나, 막래는 ‘무뢰’로 읽을 것이니, 우박[雹]이라는 뜻이고, 신(神)이라는 뜻이다. 대주류왕(大朱留王)의
이름 ‘무휼(憮恤)’과 음이 같을 뿐더러, 본기에도 동부여를 정복한 이가 곧 대주류왕이니, 막래는 모본왕(慕本王)이 아니라
대주류왕일 것이요, 막래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뒤에 한나라 무제가 사군을 설치하였으니, 고구려 건국이 사군
설치보다 약 백 몇십년 전이 될 것이 의심없음이 그 셋이다. 고구려 당시의 비기(秘記)와 그 자손 제왕의 건립으로 된
비문이 먼저 분명히 증명하고, 비록 외국인이 전해 들은 기록이지마는 북사(北史)가 또한 증명하니, 고구려 연대의 백
몇십 년 줄어들었음이 더욱 확실하다.안순암(安順庵 : 安鼎福) 선생이 고구려 족자(族子)인 안승(安勝)을 봉한 신라
문무왕의 말에서, “햇수 거의 8백년(年將八百年)”이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연조가 줄어들었음을 인정하였으나,
실은 8백을 9백으로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대개 고구려의 연대를 줄인 뒤에 9백을 8백으로 고쳐 고구려이 향국(享國)이
705년이라는 위증을 만든 것이다. 어찌하여 고구려의 연대가 줄어들었는가? 이는 고대 건국의 선후(先後)로 국가의 지위를
다투는 풍기(風氣 : 鄒牟와 松讓이 서울 세운 앞뒤를 다툰 따위)가 있으므로, 신라가 그 건국이 고구려와 백제보다 뒤짐을
부끄러이 여겨, 두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기록상의 세대와 연조를 줄여 모두 신라 건국 이후의 나라로 만든 것이고, 동부여ㆍ
북부여 등의 나라는 신라와 은혜나 원수가 없는 앞선 나라이지만 이미 고구려의 연조를 백 몇십 년이나 줄였으니, 사실의
관계상 고구려ㆍ백제의 부조(父祖)뻘인 동부여의 연대와 고구려ㆍ백제의 형제뻘인 가라(加羅)ㆍ옥저(沃沮)등의 나라의
연대까지 줄여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전사(前史)에 보인 고구려 건국 원년에서 백 몇십 년을 넘어, 기원전 190년경의
전후 수십 년 동안을 동부여ㆍ북부여와 고구려의 분립한 시기로 잡고, 그 이하 모든 나라도 같은 시기로 잡아 열국사
(列國史)를 서술하고자 한다.
列國의 疆域
여러 나라의 연대만 줄였을 뿐 아니라, 그 강역도 거의 다 줄여서, 북쪽의 나라가 수천 리를 옮겨 남쪽으로 온 것이 한 둘이
아니다. 강역은 또 어찌하여 줄여졌는가?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북쪽의 땅을 잃고, 그 북쪽의 옛 지명과 고적을 남쪽으로
옮김이 첫째 원인이 되고, 고구려가 쇠약해져서 압록강 이북을 옛 땅으로 인정하지 못하여 전대(前代)의 지리를 기록할 때에
북쪽의 나라를 또한 남쪽으로 옮긴 것이 많음이 둘째 원인이 되어, 조선의 지리 전고(典故)가 말할 수 없이 뒤바뀌어, 비록
근세이 한구암(韓久庵 : 韓百謙)ㆍ안순암 등 여러 선유의 수정을 거쳐서 얼마쯤 회복이 되었으나, 열국 시대의 지리는 그
퇴축(退縮)됨이 전과 마찬가지다. 이제 그 대략을 말할 것이다.
첫째는 부여다. 신조선이 최초에 세 개의 부여로 나뉘었으니, 하나는 북부여이다. 북부여는 아사달에 도읍하였다. 삼국지에
“현도의 북쪽 천 리(玄菟之北千里)”라 하였으니, 지금의 합이빈인데 선유들은 지금의 개원(開原)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는
동부여인데, 동부여는 갈사나(曷思那)에 도읍하였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동부여를 칠때. ‘북벌(北伐)한다.’고 하였으니
고구려의 동북 - 지금의 훈춘(?春) 등지가 동부여인데, 선유들은 지금의 강릉(江陵)이라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남부여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격파한 뒤에 동부여가 둘로 나누어져 하나는 옛 갈사나에 머물렀으니, 곧 남부여다. 동부여는 오래지
않아 고구려에 투항하매, 국호가 없어지고 남부여는 문자왕(文咨王) 3년(기원 494년)에 비로소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동부여ㆍ
남부여는 곧 함흥인데, 선유들은 그 강역을 모를 뿐 아니라, 그 명칭조차 몰랐다.
둘째는 사군(四郡)이다. 위만(衛滿)이 동으로 건너온 패수가 위략의 만반한(滿潘汗), 한서지리지의 요동군(遼東郡) 문번한
(汶幡汗), 곧 지금의 해성ㆍ개평 등지이니 헌우란이 옳다. 한나라 무제(武帝)가 점령한 조선이 패수 부근, 위만의 옛 땅이니,
그가 설치한 사군만 삼조선의 국명과 지명을 가져다가 요동군 안에 가설한 것인데, 선유들은 매양 사군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ㆍ
강원ㆍ함경 등 여러도와 고구려의 서울인 지금의 만주 환인(桓因) 등지에서 찾았다.
셋째는 낙랑국(樂浪國)이다. 낙랑국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과 각각 다른, 지금의 평양에 나라를 세운 것인데 선유들은
이를 혼동하였고, 그 밖에 고구려ㆍ백제의 초대의 서울과 신라ㆍ가라의 위치는 선유들의 수정한 것이 대략 틀림이 없으나,
주군(州郡) 혹은 전쟁을 한 지점의 위치는 거의 신라 경덕왕 이후에 옮겨다 설치한 지명을 그대로 써서 착오가 생겼으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교정하여 열국사를 서술해 나가고자 한다.
제 2장 列國의 分立
東扶餘의 分立
1. 解夫婁의 東遷과 解募漱의 일어남
북부여와 두 동부여와 고구려의 네 나라는 신조선의 판도 안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신조선이 멸망하여 부여 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시 나누어져서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부여는 곧 신조선의 별명이고 따라 부여라는 왕조가 없이 신조선으로부터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이는 상고할 길이 없거니와, 신조선이 흉노 모돈(冒頓)에게 패한 때가 기원전 200년경이요, 동ㆍ
북부여의 분립도 또한 기원전 200년경이니, 나중의 설이 혹 근사하지 않을까 한다.
전사(前史)에 동ㆍ북부여가 분립한 사실을 기록하여, “부여와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다니며 기도하여 아들
낳기를 구하다가 곤연(鯤淵 : 鏡泊湖)에 이르러서는 왕이 탄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돌을
뒤집으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는지라 왕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주신 내 아들이다.’하고 데려다 길러서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그 뒤 얼마만에 상(相) 아란불(阿蘭弗)이 왕에게, ‘요사이 하늘이 저에게 내려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는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하려고 하니, 너희들은 동해변의 가섭원(迦葉原)으로 가거라,
그 땅이 기름져 오곡이 잘 되느니라 하더이다.’하고 서울을 옮기기를 청하므로, 왕이 그의 말을 좇아 가섭원으로 천도하여,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고 고도(故都)에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募漱)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종자 백여 명은 흰
고니[白鳥]를 타고 웅심산(熊心山, 일명 阿斯山, 또 일명은 鹿山이니 지금 哈爾濱의 宗達山)에 내려와서, 채운(彩雲)이 머리
위에 뜨고 음악이 구름 속에서 울리기를 10여일 만에, 해모수가 산 아래로 내려와, 새깃의 관을 쓰고 용광(龍光)의 칼을 차고,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므로 세상 사람들이 천재의 아들이라 일컬었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기록이 너무 신화적이라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마는, 어느 나라이고 고대의 신화시대가 있어 후세 역사가들이 그
신화 속에서 사실을 캐내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하늘이 아란불에게 내려왔다.’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 말들은 다 신화이지만, 해부루가 남의 집 사생아인 금와를 주워다가 태자를
삼았음도 사실이요, 해부루가 아란불의 신화에 의하여 천도를 단행한 것도 사실이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일컫고
고도(故都)에 웅거하였음도 사실이니, 통틀어 말하면 우리 북부여의 분립은 역사상 빼지 못할 큰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북부여인이나 동부여인이 부여의 계통을 서술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한갓 고구려인이 그 시조 추모왕(鄒牟王)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므로 겨우 해부루ㆍ해모수 두
대왕이 동ㆍ북부여로 분립한 약사를 말했을 뿐이고, 그 이전의 부여 해부루의 내력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였음이 그
하나요, 또한 그나마 고구려인 기록한 원문이 아니라 신라 말엽의 한학자인 불교승이 개찬(改撰)한 것이므로, 신가를
고구려의 이두문대로 ‘상가(상가)’라 쓰지 않고 한문의 뜻대로 상(相)이라 썼으며, ‘가시라’를 고구려 이두문대로 ‘갈사나
(曷思那)’라 쓰지 않고 불경(佛經)의 명사에 맞추어 가섭원(迦葉原)이라 써서 본래의 문자가 아님이 그 둘이다.
당시의 제왕(帝王)은 제왕인 동시에 제사장(祭司長)이며, 당시의 장상(將相)은 장상인 동시에 무사(巫師)요, 복사(卜師)
였으니, 해부루는 제사장 - 대단군의 직책을 세습한 사람이고 아란불은 강신술(降神術)을 가진 무사와 미래를 예언하는
복사의 직책을 겸한 상가(相加)였다. 대단군과 상가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지만, 신조선의 습관엔 내우외환 같은 건 물론이요,
천재지변 같은 것도 그 허물이 대단군에게로 돌아간다(삼국지에 홍수와 가뭄이 고르지 못하고 오곡이 잘 익지 아니하면 곧
그 허물이 왕에게로 돌아가서 왕을 바꿔야 한다고, 혹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 - 水旱不調 五殺不登 輒歸輒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고 하였다.
천시(天時)나 인사(人事)에 불행이 있으면 대단군을 대단군으로 인정치 않고 내쫓았는데, 이때가 흉노 모돈과 전쟁을 치른 지
오래지 않았으니, 아마 패전의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인민의 신망이 엷어져서 대단군의 지위를 보전할 수 없으므로
아란불과 모의해 갈사나 - 지금의 훈춘 등지로 달아나서 새 나라를 세운 것이고, 해모수는 해부루와 동족이며 고주몽(高朱蒙)
의 아버지다. 삼국유사 왕력편(王曆篇)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대개 해모수가 해부루의 동천(東遷)을 기회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대단군이라 스스로 일컫고 왕위를 도모한 것이고, 부여는 불 곧 도성(都城) 혹은 도회를 일컬음이므로,
해부루가 동부여를 일컬으매, 해모수는 북부여라 일컬었을 것이니, 북부여라는 명칭이 역사에 빠졌으므로 최근 선유들이 두
가지를 구별하기 위하여 비로소 왕 노릇한 부여를 북부여라 일컬었다.
2. 南北曷思ㆍ南北 沃沮의 두 東扶餘의 분립
해부루가 갈사나 - 지금의 훈춘에 천도하여 동부여가 되었음을 앞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갈사나란 무엇인가? 우리 옛말에
숲을 ‘갓’ 혹은 ‘가시’라 하였는데, 고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만주 길림의 동북부와 소련 연해주의 남쪽 끝에 나무가 울창하여
수천 리 끝이 없는 대삼림의 바다를 이루고 있어 이 지역을 ‘가시라’라 일컬었으니, ‘가시라’란 삼림국(森林國)이라는 뜻이다.
‘가시라’를 이두문으로 갈사국(曷思國)ㆍ가슬라(迦瑟羅)ㆍ가서라(迦西羅)ㆍ아서량(阿西良) 등으로 적는데,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지리지에 보인 것이고, 또 혹 ‘가섭원기(迦葉原記)’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삼국사
(三國史)에 보인 것이다.지나사에서는 ‘가시라’를 ‘옥저(沃沮)’라고 적었는데,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에 의하면 옥저는
‘와지’의 번역이고, ‘와지’는 만주어의 숲이니, 예(濊) 곧 읍루(挹婁)는 만주족의 선조요, 읍루가 당시 조선 열국 중 말[言]이
홀로 달라서 삼국지나 북사에 특기하였으니, 우리의 ‘가시라’를 예족(濊族)은 ‘와지’라 불렀으므로 지나인들은 예어를 번역
하여 옥저라고 한 것이다. 두만강 이북을 북갈사(北曷思)라 일컫고, 이남을 남갈사(南曷思)라 일컬었는데, 북갈사는 곧
북옥저(北沃沮)요, 남가사는 곧 남옥저(南沃沮)이니 지금의 함경도는 남옥저에 해당된다.
고사에 남ㆍ북옥저를 다 땅이 기름지고 아름답다고 하였으나, 지금의 함경도는 메마른 땅이니, 혹 옛날과 지금의 토질이
달랐던 것이 아닌가 한다. 두 ‘가시라’의 인민들이 순박하고 부지런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여자가 다 아름다우므로,
부여나 고구려의 호민(豪民)들이 이를 착취하여 어물과 농산물을 천 리 먼 길에 갖다 바치게 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다가
비첩(婢妾)을 삼았다고 한다.해부루가 북 ‘가시라’ - 지금의 훈춘으로 옮겨가 동부여가 되어, 아들 금와를 거쳐 손자 대소
(帶素)에 이르러 대소가 고구려 대주류왕(大朱留王 - 대무신왕)에게 패하여 죽고, 아우 모갑(某甲)과 종제(從弟) 모을(某乙)
이 나라를 다투어 모을은 구도(舊都)에 웅거하여 북갈사(北曷思) 혹은 남동부여(南東夫餘)라 하였는데, 그 자세한 것은 다음
장에서 말하려니와 지금까지의 학자들이,
① 동부여가 나뉘어 북동ㆍ남동의 두 부여로 되었음을 모르고 한 개의 동부여만 기록하고, ② 옥저가 곧 갈사(曷思)임을
모르고 옥저 이외에서 갈사를 찾으려 하고, ③북동ㆍ남도의 두 갈사가 곧 남ㆍ북의 두 갈사(兩加瑟羅)요, 남북의 두 갈사가
곧 남북의 두 옥저임을 모르고 부여ㆍ갈사ㆍ옥저를 각각 다른 세 지방으로 나누고, ④강릉(江陵)을 ‘가시라’ - 가슬나
(加瑟那)라 함을 신라 경덕왕이 북쪽 땅을 잃은 뒤에 옮겨 설치한 고적인 줄을 모르고 드디어 가슬나가 동부여의 옛 서울
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리가 문란하고 사실이 혼란해 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거니와, 이제 갈사(曷思)ㆍ가슬(加瑟)ㆍ
가섭(迦葉)이 이두문으로 다 같이 ‘가시라’임을 알고, 대소의 아우 모갑과 그 종제 모을이 나뉘어 있는 두 ‘가시라’의 위치를
찾아서 두 ‘가시라’가 곧 남ㆍ북옥저임을 알고,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올 때에 ‘남으로 달아났다(南?)’는 말과,
주류왕(朱留王)이 고구려에서 동부여를 칠 때에, ‘북쪽을 쳤다(北伐).’는 말로써 북 ‘가시라’의 위치를 알아서 위와 같이
정리하였다.
3. 北扶餘의 문화
북부여의 역사는 오직 해모수가 도읍을 세운 사실 이외에는 겨우 북부여의 별명인 황룡국(黃龍國)이 고구려 유류왕(儒留王)
본기에 한번 보이고는 다시 북부여에 대한 말이 우리 조선인의 붓끝으로 전해진 것이 없고, 만ㅇ리 전해진 것이 있다 하면 다
지나사에서 초록한 것이다. 북부여의 서울은 ‘아스라’ - 부사량(扶斯樑)이니, 곧 대단군 왕검의 삼경(三京) - 세 왕검성의
하나요, 지김의 소련령(領) 우수리[烏蘇里]는 곧‘ 아스라’의 이름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그 본래의 땅은 지금의 합이빈이니,
망망한 수천 리의 평원으로 땅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되고, 종횡으로 굴곡(屈曲)한 송(松 : 古名 아리라)이 있어 교통의
편의를 주고, 인민이 부지런하고 굳세며, 대주(大珠)ㆍ적옥(赤玉)의 채굴과 그림 비단과 수놓은 비단의 직포와 여우ㆍ삵ㆍ
원숭이ㆍ담비 등의 가죽을 외국에 수출하며, 성곽ㆍ궁실의 건축과, 창고 저축의 많음이 다 옛 서울의 문명을 자랑했다.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홍수 다스리는 법을 가르쳤다.
운운하는 금간옥첩의 문자도 왕궁에 보관되어 있고, 신지(神誌)라 일컫는 이두문의 역사류며, 풍월(風月)이라 일컫는
이두문의 시가집(詩歌集)도 대개 이 나라에 수집해 있었다.
해모수 이후에 북부여는 예와 선비를 정복하여 한때 강국으로 일컬어지다가 뒤에 예와 선비가 반(叛)하여 고구려로 돌아가자,
국세가 침내 쇠약해져서 조선 열국의 패권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일어남
1. 鄒牟王의 고구려 건국
고구려 시조 추모(鄒牟 : 혹 朱蒙)는 천생으로 용맹과 힘과 활 쏘는 재주를 타고나서, 과부 소서노(召西奴)의 재산으로 영웅
호걸을 불러모아, 교묘하게 왕검 이래의 신화를 이용하여, 하늘의 알에서 강생(降生)하였다 자칭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안으로 열국의 신임을 받아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하고 밖으로 그의 기이한 행적의 이야기를 지나 각지에 퍼뜨려서 그
제왕과 인민들이 교주로 숭배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남해에 공을 세우고, 북산에 덕을 쌓았다
(立功南海 積德北山).’하는 찬사를 올렸고, 지나 2천 년 이래의 유일한 공자 반대자인 동한(東漢)의 학자 왕충(王充)이 그
사적을 기록함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면 기원전 58년이 출생한 해요, 기원전 37년이 그 즉위한 해이지만,
이는 줄어든 연대라 의거할 것이 못 되고, 추모(鄒牟)가 곧 해모수의 아들이니 기원전 200년경 동ㆍ북부여가 분립하던 때가
출생한 때일 것이고, 위만과 같은 때일 것이다.처음에 아리라[松花江]의 부근에 있는 장자(長者)가, 유화(柳花)ㆍ훤화(萱花)ㆍ
위화(葦花)의 세 딸을 두었는데, 다 절세의 미인이요, 유화가 더욱 아름다웠다. 북부여왕 해모수가 나와 다니다가 유화를
보고 놀라 사랑하여 야합해서 아이를 배었다. 그러나 이때 왕실은 호족과만 결혼하고 서민과는 결혼을 하지 아니했으므로
해모수가 그 뒤에 유화를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서민은 서민과만 결혼하는데,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가서 폐백을
드리고 사위되기를 두 번, 세 번 간곡히 빌어서 그 부모의 허락을 얻어서 결혼하고 결혼한 뒤에는 남자가 여자의 부모를 위해,
그 집의 머슴이 되어 3년의 고역을 치르고야 딴 사림을 차려 자유로운 가정이 되었으므로 유화의 실행을 발각되매 그 부모가
크게 노하여 유화를 잡아 우발수(優渤水)에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어부가 그녀를 건져 동부여왕 해금와(解金蛙)
에게 바쳤다.금와왕이 유화의 아름다운 자색을 사랑하여 후궁에 두어 첩을 삼았는데, 오래잖아 아이를 낳으니 곧 해모수와
야합한 결과였다.금와왕이 유화를 힐문하니 유화가 이를, “해 그림자에 감응하여 낳은 천신(天神)의 아들이고, 자기가 아무
잘못을 범한 일이 없다.”고 했다. 금와왕이 그 말을 믿지 않고, 그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려고 우리에 넣오도 보고 말에 밟혀
죽으라고 길에 내던져도 보고, 산짐승의 밥이 되라 하여 깊은 산속에 버려도 보았으니, 다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이에 유화
에게 거두어 기르기를 허락하였다. 그 아이가 자라니 그 또래에서 기운이 뛰어나고 활 잘 쏘기가 짝이 없으므로 이름을 추모
(鄒牟)라 하였다.
위서(魏書)에는 추모를 주몽(朱蒙)이라 쓰고, 주몽은 부여 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컬은 것이라 풀이하였으며 만주원류고
(滿洲源流告)에는, “지금 만주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릴무얼[卓琳莽阿]’이라 하니, 주몽은 곧 ‘주릴무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주몽을 추모라 하였으며, 문무왕(文武王)의 조서(詔書)에는 ‘중모(中牟)’라 하고 ‘주몽’이라고
하지 않았다. 주몽이라 하였음은 지나사에 전해오는 것을 신라의 문사들이 그대로 써서 고구려 본기에 올리게 된 것인데
추모ㆍ중모는 ‘줌’ 혹은 ‘주모’로 읽을 것이니, 이는 조선어요 주몽은 ‘주물’로 읽을 것이니, 이는 조선어요 주몽은 ‘주물’로
읽을 것이다. 이는 예어(濊語) - 만주족 시대의 말로, 지나사의 주몽은 예어를 말한 것이니, 원류고에 말한 바가 이치에 가깝
다고 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비문에 따라 추모(鄒牟)라고 한다.
금와왕이 아들 7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대소이다. 대소가 추모의 재주를 시기하여 왕에게 권하여 죽이려고 하였는데,
늘 유화의 주선으로 화를 면했다. 추모가 19살이 되자 대궐에서 기르는 말 먹이는 일을 맡아보았는데, 말을 다 살찌고 튼튼
하게 잘 먹였으나 오직 준마 하나를 골라 혀에 바늘을 꽂아놓아 말이 먹지 못해서 날로 여위어 졌다. 왕이 말들을 돌아보고는
추모의 말 잘 먹인 공을 칭찬하고, 그 여윈 말을 상으로 주었다. 추모는 바늘을 뽑고 잘 길러서 신수두의 10월 대제(大祭)에
타고나가 사냥에 참여하였는데, 왕은 추모에게 겨우 화살 하나를 주었지마는, 추모는 말을 잘 달리고 활을 잘 쏘아 그가 쏘아
잡은 짐승이 대소 7형제가 잡은 것보다 몇 갑절이 더 많았다. 이에 대소는 더욱 그를 시기하여 기오코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 추모가 이를 알고 예씨(禮氏)에게 장가들어 표면으로 가정생활에 안심하고 있음을 보이고 속으로 은밀히 오이(烏伊)ㆍ
마리(摩離)ㆍ협부(陜父) 세 사람과 공모하여 비밀히 어머니 유화에게 작별을 고하고 아내를 버리고는 도망하여 졸본부여
(卒本夫餘)로 갔는데, 이때 추모의 나이 22살이었다.졸본부여에 이르니 이곳의 소서노(召西奴)라는 미인이 아버지 연타발
(延陀渤)의 많은 재산을 물려 받아서, 해부루왕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의 아내가 되어 비류(沸流)ㆍ온조(溫祚) 두 아들을
낳고 우태가 죽어 과부로 있었는데, 나이 37살이었다. 추모를 보자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였는데 추모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노(扶芬奴) 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를 경영하여, 흘승골(紇升骨)의 산 위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가우리’라 하였다. ‘가우리’는 이두자(吏讀字)로 고구려(高句麗)라 쓰니, 중경(中京) 또는 중국(中國)이라는
뜻이었다.
졸본부여의 왕 송양(松讓)과 활쏘기를 겨루어 이를 꺾고 이어 부분노를 보내 그 무기고를 습격해서 빠앗아 마침내 그 나라를
항복받고, 부근의 예족(濊族)을 내쫓아 백성들의 폐해를 없앴으며, 오이(烏伊)ㆍ부분노(扶芬奴) 등을 보내어 태백산(太白山)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 : 지점 미상)을 토멸하여 성읍(城邑)을 삼고, 부위염(扶慰猒)을 보내어 동부여를 쳐서 ‘북사시라’의
일부분을 빼앗으니(광개토왕비문에, “동부여의 옛 것이 추모왕의 속민이 되었다(東扶餘 舊是 鄒牟王 屬民)”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킴인 듯), 이에 고구려가 섰다.
전사(前史)에 왕왕 송양(松讓)을 나라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이상국집(李相國集)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인용한 구삼국사
(舊三國史)를 상고해보면 비류왕 송양(沸流王松讓)이라고 하였으니, 비류는 곧 부여로 졸본부여를 일컬은 것이므로, 송양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졸본 부여왕의 이름이다. 또 추모가 졸본부여의 왕녀에게 장가들었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죽은 뒤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고 하였으나 졸본부여의 왕녀 곧 송양의 딸에게 장가든 사람은 추모의 아들 유류(儒留)요,
추모가 장가든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녀가 아니다. 추모왕을 본기(本紀)에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으나, 동명(東明)은
‘한몽’으로 읽을 것이니, ‘한몽’이란 신수두 대제(大祭)의 이름이다. 추모왕을 신수두 대제에 존사(尊師)하므로 한몽 - 동명
이라는 칭호를 올린 것이고, 성왕의 성(聖)은 ‘주무’의 의역(義譯)이다.
2. 東扶餘와 고구려의 알력
추모왕 다음으로 아들 유류왕(儒留王)이 왕위를 잇고, 유류왕 다음에 그 아들 대주류왕(大朱留王)이 왕위를 이었다. 유류는
본기의 유리명왕(琉璃明王) 유리(類利)이니, 유류(儒留)ㆍ유리(琉璃)ㆍ유리(類利)는 다 ‘누리’로 읽을 것으로 세(世)라는
뜻이고 명(明)이라는 뜻이요, 대주류왕은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大武神王無恤)이니, 무(武)ㆍ주류(朱留)ㆍ무휼(無恤)은 다
‘무뢰’로 읽을 것으로 우박[雹]의 뜻이고 신(神)의 뜻인데, 이제 유리(琉璃)와 명(明)은 시호로 쓰고, 무휼(無恤)은 이름으로
쓴 건 본기의 망령된 판단이다. 이제 여기서는 비문을 쫓아 유리(琉璃)를 유류(儒留)로, 대무신(大武神)을 대주류(大朱留)로
쓴다. 은류왕 때에 동부여가 강성하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왕(帶素王)은 왕위를 이어받자 고구려에게 신하 노릇하기를 요구
하고 볼모[質子]를 보내라고 하여, 왕이 그대로 하려고 하다가 두 태자를 희생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태자는 도절(都切)인데,
유류왕이 동부여에 볼모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듣지 아니하자 왕이 크게 노했으므로 도절이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둘째 태자는 해명(解明)인데 그는 용맹이 뛰어났었다. 유류왕이 동부여의 침략을 두려워해 국내성(國內城) - 지금의
집안현(輯安縣)으로 서울을 옮기니, 해명이 이를 겁약(怯弱)한 일이라 하여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북부여왕(北扶餘王 :
본보기의 黃龍國王)이 해명에게 강한 활을 보내어 그 힘을 시험해보려고 하자 해명이 그 자리에서 그 활을 당겨서 꺾어
북부여 사람의 힘없음을 조롱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해명은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 하여 처음에는 북부여에
보내서 북부여왕의 손을 빌려 죽이려고 하였으나, 북부여왕이 해명을 공경하고 사랑하여 후히 대접해서 돌려보냈다.
유류왕은 더욱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 해명에게 칼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두 태자의 죽음흔 혹 대궐 안 처첩들의 질투가 원인이 되기도 하였겠지마는 그것은 대개 동부여와의 외교상 관계에서 온
것이었으니, 유류왕이 동부여를 얼마나 두려워했던가를 가히 미루어 알 것이다.
동부여왕 대소가 여러 번 수만 명 대병을 일으켜서 고구려를 치다가 다 성공치 못하였으나, 고구려는 몹시 피폐해져서
동부여왕 대소가 또 사자를 보내 조공을 하지 아니함을 꾸짖자, 유류왕은 두려워서 애결하는 말로 사자에게 회답해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니까 왕자 주류(朱留 : 본기의 無恤)는 이때 아직 어렸으나, 죽은 해명의 기개가 있어 부왕이 비굴하게 구는
것을 부당하다 하고 스스로 거짓 부왕의 명이라 하여 동부여의 사자에게 금와가 말 먹이는 비천한 직책으로 추모왕을 천대
하고, 대소가 추모왕을 죽이려 한 일들을 낱낱이 들어서 죄를 나무라고 동부여의 임금과 신하의 교만함을 꾸짖어서 사자를
쫓아보냈다. 동부여 대소왕이 사자의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또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침노해왔다. 유류왕은 왕자 주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매우 노하였으나, 이제 노경(老境)에 있어 주류를 도절이나 해명처럼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나라의 병마(兵馬)를 모두 주류에게 내어 주어서 나가 싸우게 하였다. 주류는 생각하기를 동부여는 군사의 수효가 많고
고구려는 적으며 동부여는 마병(馬兵)이고 고구려는 보병(步兵)이니, 적은 보병으로 많은 마병과 들판에서 싸우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 하고, 동부여의 군사가 지나갈 학반령(鶴盤嶺)의 골짜기에 복병 시켰다가 동부여의 군사를 돌격하니, 길이
험하고 좁아서 마병이 불편한지라 동부여의 군사가 모두 말을 버리고 산 위로 기어올라갔다. 주류가 군사를 몰아서 그
전군을 섬멸하고 많은 말을 빼앗으니, 동부여의 정예가 이 싸움에서 전멸하여 다시는 고구려와 겨루지 못하였다. 싸움이
지나니 주류를 봉하여 태자로 삼고, 겸하여 병마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맡겼다.
3. 大朱留王의 東扶餘 정복
대주류왕이 학반령의 싸움에서 동부여를 크게 무찌르고 유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지 4년에 5만의 군사로 북벌(北伐)의
싸움을 일으켜서 동부여를 쳐들어갔는데, 도중에 창을 잘 쓰는 마로(麻盧)와 칼을 잘 쓰는 괴유(怪由)를 얻어 앞잡이를
삼아서 ‘가시라’의 남쪽에 이르러 진구렁을 앞에 두고 진을 쳤다. 대소왕이 몸소 말을 타고 고구려의 진을 바로 침범하다가,
말굽이 진구렁에 빠지자 괴유가 칼을 들어 왕을 베었다.
대소왕이 죽었으나 동부여 사람들은 더욱 분발하여 대소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대주류왕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마로는 전사
하고 괴유는 부상하여 고구려의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대주류왕은 여러 번 포위를 뚫고나오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이레를 굶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마침 큰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는지라 대주류왕이 풀로
사람을 만들어진 가운데 세워두고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도망하였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서는 전군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으나, 들짐승을 잡아먹고 간신히 귀국하였다.
이 싸움은 동부여가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대소왕이 죽고 태자가 없어서 대소왕의 여러 종형제가 왕위를 다투어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계제(季弟) 모갑(某甲)은 종자 백여 명과 함께 남가시라(南沃沮)로 나와 사냥하고 있는 해두왕(海頭王)을
습격해서 죽이고, 군사를 모아 남가시라를 완전히 평정하니, 이는 남동부여(南東夫餘)이고, 종제 모을(某乙)은 고도(故都)
에서 스스로 서니 이는 북동부여(北東夫餘)이다.
그러나 그 밖의 여러 아우들이 제각기 군사를 모아 모을을 쳤으므로 모을은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여
대주류왕은 마침내 북동부여를 전부 토평하였고 국호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역사에 보인 갈사국은 곧 남동부여이고,
동부여는 곧 북동부여이며, 후한서, 삼국지 등의 옥저전(沃沮傳)에 보인 불내예(不耐濊)도 북동부여이고, 예전(濊傳)에 보인
불내예(不耐濊)는 남동부여이다.
4. 大朱留王의 낙랑
최씨(崔氏)가 남낙랑을 차지하여, 낙랑왕(樂浪王)이라 일컬었음은 제3편 제4장에 말하였거니와, 그 끝의 임금 최이(崔理)의
대에 이르니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때였다. 최이는 고구려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미인 딸 하나를 미끼로 삼아
고구려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이때 갈사국(曷思國 : 남동부여)의 왕이 그 소녀를 대주류왕의 후궁으로 바쳐서 아들을
낳았는데, 얼굴이 기묘하고 풍신이 썩 좋아 이름을 호동(好童)이라고 하였다. 호동이 외가인 남동부여에 가는 길에 낙랑국을
지나게 되었는데, 최이가 출행(出行)하다 그를 만나보고 놀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 호동이
분명하구나.”하고, 드디어 호동을 데려다가 그 딸과 결혼시켰다.
낙랑국의 무기고에 북과 나팔이 있는데, 소리가 멀리까지 잘 들리므로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매양 이것을 울려 여러 속국의
군사를 불러서 적을 막았다. 호동이 그 아내 최녀(崔女)를 꾀어, “고구려가 낙랑을 침입하거든 그대가 그 북과 나팔을
없애버리시오.”하고 귀국하여 대주류왕에게 권해서 낙랑을 쳤다. 최이가 북과 나팔을 울리려고 무기고에 들어가보니 북과
나팔이 산산이 부서져있었다. 북과 나팔 소리가 나지 아니하니 속국이 구원을 오지 않았다. 최이는 그 딸의 소행임을 알고
딸을 죽인 뒤에 나가서 항복하였다.
호동은 이런 큰 공을 세웠으나, 왕후가 적자(嫡子)의 지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대주류왕에게 호동이 자기를 강간하려
하였다고 참소하여, 호동은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아름다운 남녀 한 쌍의 말로가 다 같이 비극으로 되고 말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대주류왕 즉위 4년 여름 4월에 대소의 아우가 갈사왕(曷思王 : 남동부여왕)이 되었음을
기록하였고, 즉위 15년 여름 4월에 호동이 최이의 사위가 되었음을 기록하였으며, 그해 11월에 호동이 왕후의 참소로 자살
하였음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갈사왕이 있은 뒤에야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소녀에게 장가 들 수 있고, 또 그런 뒤에야 갈사왕
손녀의 소생인 호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니, 설혹 대주류왕 4년, 남갈사 건국 원년 4월에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소녀에게
장가 들어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이듬해 정월에 호동을 낳았다 할지라도, 15년에는 겨우 11살의 어린아니니, 11살 어린
아이가 어찌 남의 남편이 되어 그 아내와 멸국(滅國)의 계획을 행할 수 있었으랴? 11살 난 어린아이가 어찌 적모(嫡母)를
강간의 참소로 부왕의 혐의를 받아 자살하기에 이르렀으랴?
동부여가 원래 북갈사에 도읍하였으니, 소위 갈사왕은 분립하기 전의 동부여를 가리킴이 아닌가 하는 이도 있겠지마는
그러면 이는 대소왕(帶素王) 때가 되니, 대소왕이 그 딸을 대주류왕에게 준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대개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줄이고 사실을 이리저리 옮겨 고쳤으므로 이같은 모순되는 기록이 생겼거니와,
대주류왕 20년이 또,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伐樂浪滅之).’고 하였으니, 한 낙랑을 두 번 멸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호동이 장가 들고 자살함이 다 20년의 일이 아닌가 한다.
이상에 말한 북부여ㆍ북동부여ㆍ고구려 세 나라는 다 신조선 옛 강토에서 일어난 것이다.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
1. 召西奴 女大王의 백제 건국
백제 본기(百濟本紀)는 고구려 본기보다 더 심하게 문란하다. 백 몇십 년의 감축은 물론이고, 그 시조와 시조의 출처까지
틀리다. 그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召西奴女大王)이니 하북(河北) 위례성(慰禮城) - 지금의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그가 죽은
뒤에 비류(沸流)ㆍ온조(溫祚) 두 아들이 분립하여 한 사람은 미추홀(彌鄒忽 : 지금의 仁川)에, 또 한 사람은 하남(河南)
위례홀(慰禮忽)에 도읍하여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는데, 본기에는 소서노를 쑥 빼고 그 편(篇) 첫머리에 비류ㆍ
온조의 미추홀과 하남 위례홀의 분립을 기록하고, 온조왕 13년에 하남 위례홀에서 하남 위례홀로 천도한 것이 되니 어찌
우스갯소리가 아니랴?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비류ㆍ온조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전 남편인 부여사람 우태(優台)이므로, 비류ㆍ
온조의 성도 부여요, 근개루왕(近蓋婁王)도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스스로 인정하였는데, 본기에는 비류ㆍ온조를 추모
(鄒牟)의 아들이라 하였음이 둘째 잘못이다. 이제 이를 개정하여 백제 건국사를 서술한다.
소서노가 우태의 아내로 비류ㆍ온조 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추모왕에게 개가하여 재산을 기우령서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세우게 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추모왕이 그 때문에 소서노를 정궁(正宮)으로 대우하고, 비류ㆍ
온조 두 아들을 자식같이 사랑하였는데, 유류(儒留)가 그 어머니 예씨(禮氏)와 함께 동부여에서 찾아오니, 예씨가 원후
(元后)가 되고 소서노가 소후(小后)가 되었으며, 유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ㆍ온조 두 사람의 신분이 덤받이자식 됨이 드러
났다. 그래서 비류와 온조가 의논하여,“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하여 그 뜻을 소서노에게 고하고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많은 금ㆍ은ㆍ주보(珠寶)를 나누어
가지고 비류ㆍ온조 두 아들과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18사람을 데리고 낙랑국을 지나서 마한으로 들어갔다.
마한으로 들어가니 이때의 마한 왕은 기준(箕準)의 자손이었다.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쪽 백 리의 땅
미추홀 - 지금의 인천과 하북 위례홀 - 지금의 한양 등지를 얻어 소서노가 왕을 일컫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그런데
서북의 낙랑국 최씨가 압록강의 예족(濊族)과 손잡아 압박이 심하므로 소서노가 처음엔 낙랑국과 친하고 예족만 구축
하다가, 나중에 예족의 핍박이 낙랑국이 시켜서 하는 것임을 깨닫고, 성책을 쌓아 방어에 전력을 다했다.
백제 본기에 낙랑왕(樂浪王)이라 낙랑태수(樂浪太守)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백 몇십 년의 연대를 줄인 뒤에 그 줄인
연대를 가지고 지나의 연대와 대조한 결과로 낙랑을 한군(漢郡)이라 하여 낙랑태수라 쓴 것이며, 예(濊)라 쓰지 않고
말갈(靺鞨)이라 썼는데, 이것은 신라 말엽에 예를 말갈이라고 한 당(唐)나라 사람의 글을 많이 보고 마침내 고기(古記)의
예를 모두 말갈로 고친 것이다.
2. 召西奴가 죽은 뒤 두 아들의 分國과 그 흥망
소서노가 재위 13년에 죽으니,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일 뿐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었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ㆍ온조 두 사람이 의논하여,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聖德)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ㆍ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負兒岳) - 지금 한양의 북악(北岳)에 올라가 서울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온조는 하남 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오간ㆍ마려 등이 비류에게 간하기를, “하남 위례홀은 북은 한강을 지고, 남은 기름진 평야를 안고, 동은 높은 산을 끼고,
서는 큰 바다를 둘러 천연의 지리가 이만한 곳이 없겠는데, 어찌하여 다른 데로 가려고 하십니까?”라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므로 하는 수 없이 형제가 땅과 인민을 둘로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로 가고, 온조는 하남 위례홀로 가니, 이에 백제가
나뉘어 동ㆍ서 두 백제가 되었다.
본기에 기록된 온조의 13년은 곧 소서노의 연조요, 그 이듬해 14년이 곧 온조의 원년이니, 13년으로 기록된 온조 천도의
조서는 비류와 충돌된 뒤에 온조 쪽의 인민에게 내린 조서이고, 14년 곧 온조 원년의,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分漢城民).”
고 한 것은 비류ㆍ온조 형제가 백성을 나누어 가지고 각기 자기 서울로 간 사실일 것이다. 미추홀은 ‘메주골’이요, 위례홀은
‘오리골’(본래는 리골)이다. 지금의 습속에 어느 동네이든지 흔히 동쪽에 오리골이 있고 서쪽에 메주골이 있는데 그 뜻은
알 수 없으나, 그 유례 또한 오래다. 그런데 비류의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 많이 흩어져
달아났지마는 온조의 하남 위례홀은 수토가 알맞고 오곡이 자 되어 인민이 편안히 살아가므로 비류는 부끄러워서 병들어
죽고 그 신하와 인민은 다 온조에게로 오니, 이에 동ㆍ서 두 백제가 도로 하나로 합쳐졌다.
3. 溫祚의 馬韓 襲滅
백제가 마한의 봉토(封土)를 얻어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서노 이래로 공손히 산하의 예로써 마한을 대하여,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나 노루를 마한에 대하여,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나 노루를 마한에 보내고 전쟁을 하여 얻은 포로를 마한에
보냈는데, 소서노가 죽은 뒤에 온조가 서북쪽의 예와 낙랑의 방어를 핑계하여, 북의 패하(浿河) - 지금의 대동강으로부터
남으로 웅천(熊川) - 지금의 공주(公州)까지 백제의 국토로 정하여달라고 해서 마침내 그 허락을 얻고 그 뒤에 웅천에 가서
마한과 백제의 국경에 성책을 쌓았다.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왕의 모자가 처음 남으로 왔을 때에 발디딜 땅이 없어 내가 서북 백 리 땅을 떼어주어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인데, 이제 국력이 좀 튼튼해졌다고 우리의 강토를 눌러 성책을 쌓으니, 어찌 의리있는 짓이냐?”하고 꾸짖었다.
온조는 짐짓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이고 성책을 헐었으나, 좌우에게, “마한왕의 정치가 옳은 길을 잃어 나라의 형세가 자꾸
쇠약해지니, 이제 취하지 아니하면 남에게 돌아갈 것이다.”하고 오래지 않아 사냥한다 핑계하고 마한을 습격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그 50여국을 다 토멸하고, 그 유민으로서 의병을 일으킨 주륵(周勒)의 온 집안을 다 목베어 죽이니, 온조의
잔학함이 또한 심하였다.
기준(箕準)이 남으로 달아나서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성을 한씨(韓氏)라 하여 자손에게 전해내려오다가 이에 이르러
망하니, 삼국지에, “기준의 후예가 끊어져 없어지고 마한인이 다시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箕準滅絶 馬韓人復自立爲王).”
라고 한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인데, 온조를 마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지나인이 매양 백제를 마한이라 일컬었기 때문이다.
온조는 고구려의 유류(儒留)ㆍ대주류(大朱留) 두 대왕과 같은 시대이니, 온조 대왕 이후에 낙랑의 침략을 기록한 것이
없음은 대주류왕이 이미 낙랑을 토멸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
제 3장 漢武帝의 침략
漢나라 군이 고구려에 패한 사실
조선의 남북 여러 나라가 분립하는 판에 지나 한나라 무제(武帝)의 침략이 있었다. 이것은 다만 한때 정치상의 큰 사건일 뿐
아니라, 곧 조선 민족 문화의 소장(消長)에도 비상한 관계를 가진 큰 사건이었다.
고대 동아시아에 불완전한 글자이나마 이두문을 써서 역사의 기록과 정치의 제도를 가져 문화를 가졌다고 할 민족은 지나
이외에 오직 조선뿐이었는데, 당시에 조선이 강성하여 매양 지나를 침략하고 혹은 항거하였으며, 지나도 제(齊)ㆍ연(燕)ㆍ
진(秦) 이래로 조선에 대하여 방어하고 혹은 침략해왔음은 제 2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우 잦았거니와, 진(秦)이 망하고
한(漢)이 일어나서는 북쪽 흉노의 침략에 시달림을 받아서 한나라 고조(高潮)가 흉노 모돈(冒頓)을 공격하다가 백등(白登 :
산서성 大同府부근)에서 크게 패하여 세폐(歲幣)를 바치고 황녀(皇女)를 모돈의 첩으로 바치는 등 굴욕적 조약을 맺고,
그 뒤에 그대로 시행하여 고조의 증손 무제(武帝)에 이르렀다. 무제는 야심이 만만한 제왕이라, 백 년 태평한 끝에 나라가
부강해지자 흉노를 쳐서 선대의 수치를 씻는 동시에 조선에 대하여도 또한 이름없는 군사를 일으켜서 민족적 혈전을
벌였다.그런데 무제가 침입한 조선이 둘이니,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 : 史記 平準書도 같음)에, “무제가 즉위하고 수
년만에 팽오(彭吳)가 예맥조선(濊貊朝鮮)을 쳐서 창해(滄海)라는 군(郡)을 설치하였으니, 곧 연(燕)과 제(齊) 지방이 크게
소란해졌다(武帝卽位數年 彭吳 穿濊貊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 騷然騷動).”고 한 예맥조선이 그 하나요, 사기 조선열전
(朝鮮列傳)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마침내 조선을 평정하여 사군(四郡)을
만들었다(樓船將軍楊僕……左將軍荀彘……遂定朝鮮爲四郡).”라고 한 조선이 또 하나이다. 뒤의 조선은 곧 조선열전으로
인하여 위씨(衛氏)의 조선인 것은 사람들이 다 알거니와, 앞의 조선은 식화지나 평준서에 이렇게 간단히 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 전기(傳記)에서는 다시 발견되지 아니하므로 종래의 사학가들이 이를 어떤 조선인지를 말한 이가 없다.
그러나 나는 전자의 조선은 곧 동부여를 가리킨 것이니, 한무제가 위우거(衛右渠)를 토멸하기 전에 동부여를 저희 군현
(郡縣)이라 하여 고구려와 9년 동안 혈전하다가 패하여 물러난 일이 있은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으로 증거하는가? 후한서(後漢書), 예전(濊傳)에, “한나라 무제 원삭(元朔) 원년에 예의 남려왕(南閭王) 등이 모반하여,
우거가 28만 호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와서 항복하여, 한나라에서는 그 땅을 창해군(滄海君)으로 만들었다(漢武帝元朔元年
濊君南閭等叛 右渠率二十八萬口 詣遼東降漢 以其地爲滄海君).”고 하였고, 한서 본기(本紀)에, “원삭 3년 봄에 챙해군을 폐지
하였다(元朔三年春罷滄海君).”고 하였으며, 사기 공손홍전(公孫弘傳)에는, “공손홍이 여러 번 간하여……창해군을 폐지하고
오로지 삭방(朔方)만 받들게 하기를 청하여……왕이 이를 허락하였다(弘數諫……願罷……滄海 而專奉朔方……上乃許之).”
고 하였으니, 종래의 학자들이 위 세 가지 책과 앞에 말한 “식화지(食貨志)의 본문을 합쳐, 예맥조선은 예임금 남려의 나라로
지금의 강릉이니, 강릉이 당시 우거의 속국으로서 모반하고 한에 항복했으므로 한이 팽오를 보내어 항복을 받고 그 땅으로써
창해군을 삼았다가, 그 뒤에 땅이 너무나 멀고 비용이 많이 듦으로 그 전쟁을 그만둔 것이다.”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이
단정이 잘못임이 다음과 같다.
1) 지나사에 매양 동부여를 예(濊)로 그릇 기록하였음과, 남ㆍ북 두 동부여가 하나는 지금의 혼춘이요, 또 하나는 함흥임은
이미 본편제2장에서 서술하였거니와, 동부여를 지금의 강릉이라 함은 신라가 그 동북계 1천여 리를 잃고 그 잃은 지방의
고적을 내지(內地)로 옮길 때에 동부여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겼음으로 하여 생긴 위설(僞說)이니, 예의 남려는 함흥의
동부여왕이요, 강릉의 임금이 아니며,
2) 식화지(食貨志)의 본문에 명백히, “무제가 즉위한 지 수년에 팽오(彭吳)가 예맥조선을 쳤다.”고 하였으니, 후한서에 기록된
창해군을 처음 설치한 해는 무제 즉위 13년인데, 13년을 수년이라 할 수 없을 뿐더러, 한서 주부언열전(主父偃列傳)의
원광(元光) 원년 엄안(嚴安)의 상소에, “지금 예주(濊州)를 공략하여 성읍(城邑)을 설치하고자 한다(今欲……略濊州
建治城邑).”고 하였는데, 예주를 공략한다는 것은 곧 예맥조선 침략을 가리킨 것이요, 성읍을 설치하는 것은 창해의 설치
경영을 가리킨 것이며, 원광 원년, 곧 원삭 원년의 6년 전에 엄안이 예에 대한 침략과 창해군 설치를 간하였으니, 남려의
항복과 팽오의 교통이 벌써 원광 원년의 일이요, 그 6년 후인
원삭 원년의 일이 아니고,
3) 원광 원년 창해군 설치의 해는 기원전 134년이요, 원삭 3년 창해군 폐지의 해는 기원전 126년이니, 그러면 한이 동부여를
침략하여 창해군을 만들려는 전쟁이 전후 9년 동안이나 걸쳤으니, 동부여가 만일 우거의 속국이라면 우거가 가서 구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일 돌아와 구원하였다고 하면 사기 조선왕 만전(滿傳)에 우거의 한에 대한 관계, 진번진국(眞番辰國)의
옹알(壅閼), 요동 동부도위(東部都尉)의 공격이며 살해 따위를 다 기록하고서 어찌 이보다 더 중대한 9년 전쟁의 사실을
빼었으랴? 앞에서 말한 개정한 연대에 의하면 이때는 동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이니, 남려는 위씨(衛氏)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속국이다.남려가 고구려의 속국이라면 왜 고구려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는가? 남려는 대개
남동부여, 후한서와 삼국지의 예전(濊傳)에 기록된 불내예왕(不耐濊王)에게 시집 보낸 갈사왕이니, 그러면 남려는
대주류왕의 처조(妻祖)요, 대주류왕은 남려왕의 손자 사위요, 호동은 남려왕의 진외증손(眞外曾孫)이니, 말하자면 붙이가
가까운 터이다.그러나 호동의 장인인 낙랑의 최이(崔理)도 토멸하는 판에 어찌 처조와 진외증조를 알아보랴. 고구려의
동부여에 대한 압박이 심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남려가 지난날 아버지와 형의 원수로든지, 당장의 압박의 고통
으로든지, 어찌 고구려에 대하여 보복할 생각이 없었으랴. 이에 같은 고구려에 대해 원한을 가진 낙랑의 여러 소국들과
연합해서 몰래 우거에게 내통하여 고구려를 배척하려 하였으나, 우거가 고구려보다 미약하여 고구려에 항거하지 못하므로,
남려는 우거를 버리고 한(漢)에 통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에 통하려면 부득이 위씨(衛氏)의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데, 우거는 동부여가 혹 위씨 나라의 비밀을 한에 누설
하지나 않을까 하여 국경의 통과를 허락하지 아니했으므로, 사기 조선왕만전(朝鮮王滿傳)에는, “진번 옆의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들어가 뵈려고 하였으나 우거가 또 막아 통하지 못하였다(眞番旁衆國 欲上書入見天子 右渠又壅閼不通).”
고 하였다.진번 옆의 여러 나라란 곧 동남부여와 남낙랑 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남려는 마침내 바닷길로 한에 통하여
사정을 고하니, 야욕으로 가득 찬 한무제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치랴. 드디어 동부여를 장래의 창해군으로 예정하고, 팽오를
대장으로 삼아 연제(燕齊) - 지금의 직예(直匠)ㆍ산동(山東)의 군사와 양식을 총동원하여, 한이 여러 번 패하여 창해군을
폐지한다는 말을 핑계로 삼아 군사를 거두어 전쟁을 결말 지은 것이다.
이같은 9년 동안 두 나라 사이에 혈전이 있었으면 사마천이 어찌하여 사기 조선열전에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아니하였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중국을 위해 치욕을 숨기다(爲中國諱恥).’하는 것이, 공구(孔丘)의 춘추(春秋) 이래, 지나 역사가의
유일한 종지(宗旨)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삼국지 왕숙전(王肅傳)에 의하면, “사마천이 사기에 경제(景帝)와 무제(武帝)의
잘잘못을 바로 썼더니, 무제가 이것을 보고 크게 노했으므로 효경본기(孝景本紀)와 무제본기(武帝本紀)를 삭제하였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 뒤에 사마천은 부형(腐刑 : 남자를 去勢하는 형벌. 宮刑)에 처해졌다.”고 하였으니, 만일 한의
패전을 바로 썼더라면 부형은 고사하고 목이 달아나는 참형까지 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사실이 빠졌음이 고의일 것이며,
평준서에 겨우 그 사실을 비추었으니, ‘팽오가 예맥조선을 멸망시켰다.’고 하여 마치 조선을 토멸한 듯이 쓴 것도 또한
꺼려함을 피한 것일 것이요,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는 그 사실이 너무 바르지 못함을 싫어하여, 멸(滅)
자를 천(穿)자로 고쳤으나, 그 전부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였음은 사마천과 마찬가지였다.그러면 한무제와 싸운 이는
대주류왕, 곧 고구려 본기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일 것이다. 그러나 본기에는 연대를 줄였기 때문에 한무제와 같은 시대인
대주류왕이 한의 광무(光武)와 같은 시대가 되고, 지나사의 낙랑 기사와 맞추기 위해 대주류왕이 한에게 낙랑국을
빼앗겼다는 거짓 기록을 쓴 것이었다.
漢武帝의 衛氏 侵滅
한무제가 9년이라는 오랫동안의 혈전에 패해 물러가서 그 이후 17년 동안 조선의 여러 나라를 엿보지 못하였으나 그 마음
에야 어찌 동방 침략을 잊고 있었으랴. 이에 위씨(衛氏)는 비록 조선 여러 나라 중 하나이나 그 왕조(王朝)가 원래 지나족
종자요, 그 장수와 재상들도 대개 한의 망명자의 자손들이었으므로 이들을 꾀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잠식하는 앞잡이를
만들려고 하는 중에, 더욱 위씨에게 길을 빌어 동부여를 구원하고 고구려를 치는 편의를 얻으려고 하여, 기원전 109년에
한무제는 사신 섭하(涉河)를 보내서 먼저 한과 동부여를 왕래하는 사절이 위씨국의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허가하여달라고
우거를 한의 국위(國威)로 위협하고, 금백(金帛)의 이익으로 꾀었으나 우거가 완강하게 좇지 않았다.
섭하가 한무제의 비밀 명령에 의하여 귀국하는 길에 두 나라의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서 우거가 보낸 전송하는 사자 우거의
부왕(副王)을 찔러 죽이고 달아나, 한으로 돌아가서 한무제에게 조선국 대장을 죽였다고 큰소리를 하니, 한무제는 실상 딴
흉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도 않고 그 공으로 섭하를 요동동부도위(東部都尉)에
임명하였다.
섭하가 임지(任地)에 이른지 오래지 아니하여, 우거가 전의 일(副王의 피살)을 분하게 여겨 군사를 일으켜서 섭하를 공격해
죽였다. 무제는 이것으로 구실을 삼아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보명 5만으로 요수(遼水)를 건너 패수로 향하고,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은 병선 군사 7천으로 발해를 건너 열수(列水)로 들어가서 우거의 서울 왕검성(王儉城 :
조선 고대 세 왕검성의 하나)을 좌우에서 협격(挾擊)하게 하였는데, 양복은 열구(列口)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크게 패하여
산중으로 도망하여 남은 군사를 거두어 자신을 보호하고, 순체는 패수를 건너려고 하였으나 위씨의 군사가 항거해 지켜서
여의치 못하였다. 한무제는 두 장수가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신 위산(衛山)을 보내, 금백(金帛)을 뿌려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이간시켰다.
위씨의 나라는 원래가 조선과 지나의 도둑들의 집단이었으므로 그 신하들은 위씨에 대한 충성보다 황금에 대한 욕심이
매우 치열하였고, 그들은 전쟁을 주장하고 화평을 주장하는 두 파로 갈려 서로 다투었는데, 한의 금백이 비밀히 뿌려지자
화평을 주장하는 파가 갑자기 강해져서 우거로 하여금 그 태자를 한의 군중(軍中)에 보내서 한의 장수에게 사죄하고
군량과 말을 바치기로 하는 조약을 맺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우거는, “태자는 호위병만을 데리고 패수를 건너가 한의
장수를 만나보게 하여라.”고 하였고, 한의 장수는, “태자가 1만의 군사로 패수를 건너오려면 무장을 갖추지 말고 오라.”고
하여 양편이 서로 버티어 교섭이 깨어졌다.그러나 그 돈과 비단이 효력을 나타내서 우거의 재상 노인(路人)ㆍ한음(韓陰)ㆍ
삼(參)과 대장 왕겹(王唊)이 몰래 한에 내정을 알리고 전쟁에는 힘쓰지 아니하였으므로, 한의 장수 순체는 패수를 건너
왕검성의 서북쪽을 치고, 양복은 산에서 나와 왕검성의 동남쪽을 쳤다. 한무제는 교섭이 결렬되자 위산(衛山)을 죄주어
참형에 처하고,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로 사신을 삼아서 전권(全權)을 주어 두 장수를 감독하는 동시에,
더욱 많은 돈과 비단을 가지고 가서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매수하게 하였다.
이때에 순체와 양복이 항복하기를 다투어 서로 불화해지니, 공손수가 순체의 편을 들어 양복을 불러 순체의 군중에 가두고,
순체로 하여금 양복의 군사를 합쳐 싸우게 하고, 한무제에게 돌아가 보고하였다. 무제는, “돈과 비단만 낭비하고 위씨
군신(君臣)의 항복을 받지 못했다.”하고 크게 노하여 공손수를 처형하였다. 오래지 않아 한음ㆍ왕겹ㆍ노인 등의 뇌물받은
일이 탄로되어 노인은 참형을 당하고, 한은ㆍ왕겹 두 사람은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다. 이듬해 여름 삼(參)이 우거를
암살하고,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우거의 대신 성기(成己)가 삼을 치니, 우거의 왕자 장(長)이 삼에게 붙어 노인의 아들
최(最)와 힘을 합하여 성기를 죽이고 성문을 열어 항복해서 위씨가 이에 멸망하고 한무제는 그 땅을 나누어 진번ㆍ임둔ㆍ
현도ㆍ낙랑의 네 군을 만들었다.이때의 사살은 오직 사기 조선열전에 의거할 뿐인데, 거기에는 한이 돈과 비단을 위씨의
여러 신하들에게 뇌물한 기록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사마천이 무제 본기(無帝本紀)의 화(禍 : 앞절에 보임)로
부형(腐刑)을 당하고 동부여에 대한 한의 패전을 기록하지 못한 일이 있어, 바로 쓰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이 전쟁에 패하고 뇌물로 성공한 사실이 글 가운데 뚜렷이 보이니, 이를테면, “위만은 병위(兵威)와 재물로 그 이웃 작은
고을을 침노하여 항복받아서 나라를 얻었다(滿 得以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고 하여 위만이 병위와 재물 두 가지로 건국을
성취하였음을 기록한 것은 은근히 한무제가 위씨를 당당히 병력으로 멸하지 못하고 재물로 적을 매수하는 비열한 수단으로
성취하였음을 비웃고 꼬집은 것이다.
‘위산을 보내 병위로써 우거를 타일렀다(遺衛山 因兵威 往論右渠).’고 하여 ‘병위’ 두 자만 쓰고 ‘재물’ 두 자는 빼었으나,
이때 순체와 양복은 이미 패전하고 후원병도 가지 아니하여서 병위가 도리어 우거의 군사보다 약한 때인데 무슨 병위가
있었으랴? 이는 곧 윗글의 ‘병위ㆍ재물’ 넉 자를 이어받아, 위산이 가져간 것이 병위가 아니라 재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고, 위산과 공손수가 다 까닭없이 처형되었음을 기록한 것은 한무제가 재물만 쓰고 성공치 못함에 노했음을
표시한 것이고, 위씨가 멸망한 뒤에 순체와 양복이 하나는 침형당하고 하나는 파면되었는데, 봉후(封侯)의 상을 받은 자는
도리어 위씨의 반역신인 노인(路人)의 아들 최와 왕겹 등 네 사람뿐이었으니, 이는 곧 위씨의 멸망이 한의 병력에 있지
않고 한의 재물을 받고 나라를 판 간신에게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漢四郡의 위치와 고구려의 對漢 관계
위씨가 망하매 한이 그 땅을 나누어 진번ㆍ임둔ㆍ현도ㆍ낙랑 네 군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사군의 위치 문제는 삼한(三韓)
연혁의 쟁론에 못잖은 조선사상 큰 쟁론이 되어왔다.
만반한ㆍ패수ㆍ왕검성 등 위씨의 근거지가 지금의 만주 해성 개평 등지(이는 제2편 제2장에 자세히 설명했음)일 뿐 아니라,
당시에 지금의 개원(開原) 이북은 북부여국(北扶餘國)이고, 지금의 흥경(興京) 이동은 고구려이고, 지금의 압록강 이남은
낙랑국이고, 지금의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국이었으니, 이상 네 나라 이외에서 한의 사군을 찾아야 할 것이므로,
사군의 위치는 지금의 요동반도 안쪽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군의 위치에 대하여 이설(異說)이 백출(百出)함은
대개 다음에 열거한 몇 가지 원인에 의한것이다.
첫째는 지명의 같고 다른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패수ㆍ낙랑 등은 다 ‘펴라’로 읽을 것으로서, 지금의
대동강은 당시의 ‘펴라’라는 강이고, 지금의 평양은 당시의 ‘펴라’라는 서울이니, 강과 서울을 다 같이 ‘펴라’라고 한 것은 마치
지금의 청주(淸州) ‘까치내’라는 물 옆에 ‘까치내’라는 마을이 있는 것처럼 ‘펴라’라는 강 위에 있는 서울이므로 또한 ‘펴라’
라고 한 것이요, 패수(浿水)의패(浿)는 ‘펴라’의 ‘펴’의 음을 취하고, 수(水)는 ‘펴라’의 ‘라’의 임을 취하여 ‘펴라’로 읽은
것이다. 그 밖에 낙랑ㆍ평양ㆍ평나(平那)ㆍ백아강(百牙岡) 등도 다 ‘펴라’로 읽을 것이다. 그 해석은 여기서 생략하거니와,
한무제가 이미 위씨조선 곧 불조선을 토멸하여 요동군을 만들고는 가끔 신ㆍ말 두 조선의 지명을 가져다가 위씨조선의 옛
지명을 대신하였으니, 지금의 해성(海城) 헌우란의 본래 이름이 ‘알티’(혹은 安地 혹 安市라 한 것)인데, 이것을 고쳐 패수라
하였고, 사기의 작자 사마천은 그 고친 지명에 의하여 사군(四郡) 이전의 옛 일을 설하였으므로, “한이 일어나……물러나서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漢興……退以浿水爲界).”느니, “위만이……동으로 달아나 새외(塞外)로 나가서 패수를 건넜다
(滿……東走出寒 漢浿水).”느니 하였으며, 진번(眞番)이 비록 신ㆍ불 두 조선을 합쳐 일컫는 것이지마는, 한은 이를 차지
하여 고구려를 진번군으로 가정(假定 : 아래에 자세히 말함)하였다. 사기의, “처음에 전연(全燕) 때 일찍이 진번조선을
약취(略取)하여 예속시켰다(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고 하고, “위만은 잠시 진번조선을 복속시켰다(滿……稍役屬眞
番朝鮮).”고 한 진번조선은 신ㆍ불 두 조선을 가리킨 것이지마는, “진번ㆍ임둔이 다 와서 복속하였다(眞番臨屯 皆來服屬).”
고 하고, “진번의 이웃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하였다(眞番旁衆國 欲上書見天子).”고 한 진번은 다 사군의
하나인 진번을 가리킨 것으로써, 또한 나중에 고친 지명에 의하여 고사(故事)를 설한 것이다. 마치 을지문덕 이후에 살수
(薩水)의 명칭이 청천강(淸川江)이 되었으니, 을지문덕 당시에는 청천강이라는 이름이 없었지마는 우리가, “을지문덕이
청천강에서 수(隋)나라 군사를 깨뜨렸다.”고 하는 따위와 같은 것인데, 종래의 학자들이 이를 모르고 사기의 패수와 진번
등을 사군 이전의 이름으로 아는 동시에, 헌우란 패수, 대동강 패수의 두 패수와 두 나라의 이름은 진번과 한 군(郡)의
이름인 진번의 두 진번을 혼동하여 설하였다.
둘째는 기록의 진위를 잘 분별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서 본기(本紀) 무제(武帝) 원봉(元封)3년 진번ㆍ임둔의
주(註)에 ‘무릉서(茂陵書)에 진번의 군치(郡治) 삽현(霅縣)은 장안(長安)에서 7,640리…임둔의 군치 동이현(東Ɦ縣)은 장안
에서 6,138리(茂陵書 眞番郡治 霅縣 去長安 七千六百四十里……臨屯郡治 東Ɦ縣 去長安 六千一百三千八里).’라 했는데,
무릉서는 무릉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저작이라 하나, 사기 사마상여전에, “상여가 죽고 5년에야 천자가 비로소
후토(后土)를 제사지냈다(相如旣卒五歲 天子始祭后土).”하고,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원정(元鼎) 4년 비로소 후토를
세웠다(元鼎四年……始立后土).”고 하였는데, 원정 4년은 기원전 113년이요, 사마상여가 죽은 것은그 5년 전인 원수(元狩)
6년(기원전 117년)이니, 상여는 원봉(元封) 3년(기원전 08년) 진번ㆍ임둔군을 설치한 해보다 10년 전에 이미 죽었으니,
10년 전에 이미 죽은 상여가 어찌 10년 후의 두 군의 위치를 말할 수 있었으랴. 그러니 무릉서가 위서(僞書)인 동시에 그 글
가운데 진번ㆍ임둔 운운한 것은 위증(僞證)임이 의심없으며, 또한 한서지리지에 요동군 군현지(郡縣志) 이외에 따로
현도와 낙랑 두 군지(郡志)가 있으므로, 이를 일근 사람으로 하여금 요동반도 이외에서 현도ㆍ낙랑 두 군의 존재를 생각
하게 하지마는, 위략의 만반한이 곧 한서지리지 요동군의 문ㆍ번한임과 사기의 패수가 곧 요동군 번한현(番汗縣)의 패수
(沛水)임이 이미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지리지의 현도ㆍ낙랑 운운한 것은 후세 사람의 위증임이 의심없는데 종래의
학자들이 이것을 모르고 매양 한서 본기의 진번, 임둔의 주나 지리지의 낙랑ㆍ현도 두 군지를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글로
그릇 믿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사군의 위치에 대한 고거(考據)가 비록 많으나, 하나도 그 정곡(正鵠)을
얻은 이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군은 원래 땅 위에 구획을 그은 것이 아니고 종이 위에 그린 일종의 가정(假定)이니, 말하자면 고구려를 토멸하면 진번군을
만들리라, 북동부여 - 북옥저를 토멸하면 현도군을 만들리라, 남동부여 - 남옥저를 토멸하면 임둔군을 만들리라, 낙랑국을
토멸하면 낙랑군을 만들리라 하는 가정인 것이고, 실현된 것이 아니다. 한무제가 그 가정을 실현하기 위해 위의 여러 곳에
대하여 침략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낙랑과 두 동부여는 앞에 말한 것과 같이 고구려에 대한 오래된 원한이 있으므로 한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배척하려고 했을 것이고, 고구려는 또 전번에 대주류왕이 승전한 기세로 한과 결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전쟁이 대개 지원전108년쯤, 곧 위씨가 멸망한 해에 비롯하여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한이 패하여 사군
실현의 희망이 아주 끊어졌으므로 진번ㆍ임둔 두 군은 그 명칭을 폐지하고, 현도ㆍ낙랑 두 군은 요동군 안에다 붙여서
설치함에 이르렀다. 한서 본기에는 진번군을 폐지했다고 하였을 뿐이고, 임둔군을 폐지했다는 말은 없으나, 후한서 예전
(濊傳)에, “소제(昭帝)가 진번ㆍ임둔을 폐지하여 낙랑ㆍ현도에 합쳤다(昭帝罷眞番臨屯 以井樂浪玄菟).”고 하였음을 보면,
임둔군도 진번군과 한때에 폐지하였던 것이다.
후한서 예전에는 현도를 구려(句麗 : 한의 고구려현을 가리킨 것)로 옮겼다고 하였고, 삼국지 옥저전(沃沮傳)에는 처음에
옥저로현도성을 삼았다가 뒤에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나 옥저전의 불내예왕(不耐濊王)은 북동부여와
남동부여의 왕을 가리킨 것이요, 예전의 불내예왕은 낙라왕을 가리킨 것이니, 두 동부여와 낙랑국은 다 당시에 독립된
왕국이다. 그렇다면 현도성이 옥저, 곧 북동부여에서 요동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다만 북동부여로 현도를 만들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비로소 요동 - 지금의 봉천성성(奉天省城)에 현도군을 붙이기로 설치한 것이고, 낙랑군도
또한 동시에 붙이기로 설치하였을 것인데 그 위치는 확언할 수 없으나, 대개 지금의 해성(海城) 등지일 것이다.
어찌하여 진번ㆍ임둔을 폐지하는 동시에 현도ㆍ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였는가? 이는 다름 아니라, 곧 앞서 말한
낙랑국과 남동부여국이 고구려를 몹시 원망하여 한이 패해 물러간 뒤에도 두 나라가, 오히려 한에 사자를 보내 몰래 통하고
상민(商民)이 왕래하여 물자를 서로 사고 팔았으므로 한이 요동에 현도ㆍ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여 두 나라에 대한
교섭을 맡게 하고, 혹은 고구려와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에는 두 나라를 이용하였으니, 이것은 한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고,
고구려는 매양 두 나라의 한과 통하는 증적(證跡)을 알아내면 반드시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는 고구려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니, 수백 년 동안 두나라로 인하여, 고구려의 한에 대한 진취(進取)를 방해하였다. 이 책에서는 두 낙랑을
구별하기 위하여 낙랑국은 남낙랑(南樂浪)이라 하고 한의 요동 낙랑군을 북낙랑(北樂浪)이라 하거니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보인 낙랑국은 다 남낙랑을 가리킨 것인데, 종래의 학자들이 매양 요동에 있는 북낙랑은 모르고 남낙랑을 낙랑군이라
주장하는 동시에 삼국사기의 낙랑국 낙랑왕은 곧 한군태수의 세력이 동방을 웅시(雄視)하여 그 형세가 한 나라 왕과 같으
므로 나라 또는 왕이라 일컬었다고 단안(斷癌)하였으나, 고구려와 경제가 닿은 요동태수를 요동국왕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현도태수를 현도국왕이라 일컫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홀로 낙랑태수만 낙랑국 왕이라 일컬었으랴? 그것이 억설임이
의심없다.
이즘 일본인이 낙랑 고분에서 혹 한대(漢代) 연호를 새긴 그릇을 발견하고 지금의 대동강 남쪽 기슭을 위씨의 옛 서울 곧
뒤의낙랑의 군치(郡治)라고 주장하지마는 이러한 그릇은 혹 남낙랑이 한과 교통할 때에 수입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가 한과의 싸움에 이겼을 때 노획한 것일 것이요, 이로써 지금의 대동강 연안이 낙랑 군치임을 단언하는 것을 옳지
못한 일이다.
제 4장 鷄立嶺 이남의 두 새 나라
계립령 이남의 별천지
계립령은 지금의 조령(鳥嶺 : 새재)이다. 지금 문경읍(聞慶邑)의 북산(北山)을 계립령이라고 하지마는, 고대에는 조령의
이름이 ‘저릅재’이니, ‘저릅’은 삼(麻)의 옛 말이다. ‘저릅’을 이두자의 임으로는 ‘계립(鷄立)’이라 쓰고, 뜻으로는 ‘마목(痲木)’
이라 쓰는 것이니 그러므로 조령이 곧 계립령이다.
계립령 이남은 지금 경상남북도의 총칭인데, 계립령의 일대로 지금의 충청북도를 막으며, 태백산(太白山 : 奉化의 태백산)
으로 지금의 강원도를 막고, 지리산으로 지금의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막으며, 동과 남으로 바다를 둘러 따로 한 판국이
되었으므로 조선 열국(列國)의 당시에 네 부여(고구려도 혹 卒本扶餘라 함)가 분립하낟, 고구려가 동부여를 정복한다, 또
낙랑을 정복한다,
위씨가 한에게 망하여 그 땅이 사군(四郡)이 된다, 백제가 마한을 토멸한다……하는 소란이 있었지만 영(嶺) 이남은 그런
풍진(風塵)의 소식이 들리지 않아, 진한ㆍ변한의 자치령 수립 나라가 그 비옥하고 아름다운 토지에 의거하여 벼ㆍ보리ㆍ
기장ㆍ조 등의 농업과 누에치기ㆍ길쌈 등을 힘써서 곡식과 옷감들을 생산하고 철을 채취하여 북쪽 여러 나라에 공급하고,
변진(弁辰)은 음악을 좋아하여 변한슬(弁韓瑟 : 불한고)이란 것을 창작하여 문화가 매양 발달하였으나, 일찍이 북방의 유민
으로 마한의 봉지(奉地)를 받았으므로 마한의 절제(節制)를 받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백제의 절제를 받았다. 그러나 그
절제는 소극적으로 ① ‘신수두’의 건설과 ② ‘신한’ 칭호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① 해마다의 조알(朝謁)과
② 토산물의 진공(進貢)을 행할 뿐이었는데, 나중에 진한 자치부는 신라국(新羅國)이 되고, 변진 자치부는 여섯 가락(加羅)
연맹국이 되어, 차차 백제에 반항하기에 이르렀다.
加羅 여섯 나라의 건설
지금의 경상남도 등지에 변진의 12자치부가 설립되었음은 제3편에 제4장에 말하였거니와, 위의 각 자치부를 대개 ‘가라’라
일컬었다. ‘가라’란 큰 소[大沼]의 뜻이니, 각 부가 각각 제방을 쌓아서 냇물을 막아 큰 소를 만들고, 그 부근에 자치부를
설치하여 그 부의 이름을 ‘가라’라 일컬은 것이었다. ‘가라’를 이두문으로 ‘가라(加羅)’, ‘가락(駕洛)’, ‘가야(加耶)’, ‘구야(狗邪)’,
‘가야(伽倻)’ 등으로 썼으니, 야(耶)ㆍ야(邪)ㆍ야(倻) 등은 옛 음을 다 ‘라’로 읽은 것이고, ‘가라’를 혹 ‘관국(官國)’이라 썼으니,
‘관(官)’은 그 음의 초성ㆍ중성을 떼어 ‘가’로 읽고, ‘국(國)’은 그 뜻의 초성ㆍ중성을 떼어 ‘라’로 읽은 것이다. 기원 42년경에
각 가라의 자치부원(自治部員)ㆍ아도간(我刀干)ㆍ여도간(汝刀干)ㆍ피도간(彼刀干)ㆍ오도간(五刀干)ㆍ유수간(留水干)ㆍ
유천간(留天干)ㆍ신천간(神天干)ㆍ신귀간(神鬼干)ㆍ오천간(五天干) 등이 지금의 김해읍(金海邑) 귀지봉(龜旨峰) 위에 모여
대계(大稧 : 稧는 당시 自治會의 이름)를 베풀고, 김수로(金水露) 6형제를 추대하여 여섯 ‘가라’의 임금을 삼았다.
김수로는 제1가라, 곧 김해를 맡아 ‘신가라’라 일컬었으니, ‘신’은 크다는 뜻이요, 첫째는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신가라’는
전사(前史)에 금관국(金官國)이라 쓴 것이 옳은데, 가락(駕洛) 혹은 구야(狗耶)라고 썼으니, 이 둘은 다 ‘가라’의 이두자이므로,
이로써 여섯 가라를 총칭하는 것은 옳으나, 다만 ‘신가라’를 가리켜 일컬음은 옳지 않다.
둘째는 ‘밈라가라’니, 지금 고령(高靈)의 앞내를 막아 가라[大沼]를 만들고, 이두자로 ‘미마나(彌摩那)’ 혹은 ‘임나(任那)’라
쓴 것으로서, 여섯 가라 중 그 후손이 강대하였으므로 전사에 대가라(大加羅) 혹은 대가야(大加耶)라 기록하였다.
셋째는 ‘안라가라’이니, 지금 함안(咸安)의 앞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로 ‘안라(安羅)’, ‘아니라(阿尼羅)’ 혹은
‘아니량(阿尼良)’이라 기록한 것인데, 아니량이 나중에 와전하여 ‘아시라(阿尸羅)’가 되고아시라가 다시 와전하여
‘아라(阿羅)’가 되었다.
넷째는 ‘고링가라’이니, 지금의 함창(咸昌 : 尙州郡)으로 또한 앞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로 고령(古寧)이라 기록한
것인데, ‘고링가라’가 와전하여 ‘공갈’이 되었으니 지금의 ‘공갈못[恭儉池]’이 그 자리이다. 여섯 가라 고적 중 오직 이것
하나가 전해져 그 물에는 연꽃ㆍ연잎이 오히려 수천 년 전의 풍경을 말하는 듯하더니, 이조 광무(光武) 시절에 총신(寵臣)
이채연(李采淵)이 논을 만들려고, 그 둑을 헐어 아주 폐허가 되게 하였다.
다섯째는 ‘별뫼가라’이니, ‘별뫼가라’는 ‘별뫼’라는 산중에 만든 가라로서 지금의 성주(星州)다. 이두자로 ‘성산가라(星山加羅)’
혹은 ‘벽진가라(碧珍加羅)’로 기록한 것이다.
여섯째는 ‘구지가라’니, 지금 고성(固城)의 중도(中島)이다. 역시 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라 ‘고자가라(古資加羅)’라
기록할 것인데, 여섯 나라 중 가장 작은 나라이므로 또한 ‘소가야(小加耶)’라 일컬었다.
여섯 가라국이 처음에는 형제의 연맹국이었으나 나중에 연대가 내려갈수록 촌수가 멀어져, 각각 독립국이 되어 각자의
행동을 취하였는데, 삼국사기에 이미 육가라(六加羅) 본기(本紀)를 빼고 오직 신라본기와 열전(列傳)에서 신라와 관계된
가라의 일만 기록한 가운데, ‘신가라’를 금관국이라 쓴 이외에는 그 밖의 다섯 가라를 거의 구별이 없이 모두 가야(加耶)라
써서 그 가야가 어느 가라를 가리킨 것인지 모르게 된 것이 많다. 이제 이 책에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구별하여 쓰고,
여섯 가라의 연대도 삭감당한 듯하므로 신라의 앞에 기술하였다.
新羅의 건국
종래의 학자들이 다, ‘신라사가 고구려ㆍ백데 두 국사보다 비교적 완전하다.’고 하였으나, 이는 아주 모르는 말이다.
고구려사와 백제사는 삭감이 많거니와, 신라사는 위찬(僞撰)이 많아서 사료로 근거 삼을 것이 매우 적으니, 이제 신라
건국사를 말함에 있어 이를 대강 논술하려 한다.
신라의 제도는 6부(部) 3성(姓)으로 조직되었는데, 신라 본기에 의거하면 6부는 처음에 알천양산(閼川楊山)ㆍ돌산고허
(突山高墟)ㆍ무산대수(茂山大樹)ㆍ자산진지(觜山珍支)ㆍ금산가리(金山加利)ㆍ명활산고야(明活山高耶)의 여섯 마을이었는데,
신라 건국 후 제3세 유리왕 9년(기원 32년)에 여섯 마을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주었다. 곧 알천양산은 양부(梁部)라 하고 성을
이(李)로 하였으며, 돌산고허는 사량부(沙粱部)라 하고 성을 최(崔)로 하였으며, 무산대수는 점량부(漸粱部 : 一名 弁粱部)라
하고 성을 손(孫)으로 하였으며, 자산진지는 본피부(本彼部)라 하고 성을 정(鄭)으로 하였으며, 금산가라는 한기부(漢祗部)라
하고 성을 배(裵)로 하였으며, 금산가라는 한기부(習比部)라 하고 성을 설(薛)로 하였다고 한다.
3성은 박(朴)ㆍ석(石)ㆍ김(金) 세 집이니, 처음에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아래 나정(羅井) 곁에
말이 끓어앉아 우는 것을 바라보고 쫓아가보니, 말은 간 곳이 없고 큰 알 하나가 있으므로, 이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데려다가 기르고 성을 박이라고 하였는데, 그가 나온 큰 알이 박만하므로, ‘박’의 음을 딴 것이라 한다. 이름은 혁거세(赫居世)
라고 하였는데, 혁거세는 그 읽는 법과 뜻이 다 전하지 않는다. 나이 13살에 영특하고 숙성하므로 백성이 그를 높여 거서간
(居西干)을 삼았다.
거서간은 그때의 말로 귀인(貴人)의 칭호라고 한다. 이것이 신라 건국 원년(기원전 57년)이고, 이이가 박씨의 시조이다.
신라의 동쪽에 왜국(倭國)이 있고, 왜국의 동북쪽 1천 리에 다파나국(多婆那國)이 있는데, 그 국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에게 장가 들어 아이를 밴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으므로, 왕이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내다 버리라고 하니, 여자가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비단으로 싸고 금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그 금궤가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니, 금관국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 가지지 아니하였는데,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포구에 이르니 바닷가의 한 노파가 이를 건져냈다. 열고 보니까,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어 이 노파는 데려다가 길렀다. 이때가 박혁거세 39년(기원전 19년)이었는데, 금궤에서 빠져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고 금궤가 와 닿을 때에 까치[鵲]가 따라오면서 울었으므로 작(鵲)자의 변을 따서 성을 석(昔)이라 하니,
석씨의 시조다.석탈해(昔脫解) 9년(기원 65년)에 금성(金城 : 신라의 서울, 곧 慶州)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므로 대보 호공(瓠公)을보내어 가보게 하였더니, 금빛 조그만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므로, 그
금궤를 가져다가 열어보니, 또 한 조그만 어린아이가 있으므로 데려다가 기르면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
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니 이는 김씨의 시조라 하였다.
궤에서 나왔다, 알에서 깨어났다 하는 신화는 그때 사람이 그 시조의 출생을 신이(神異)하게 장식한 것이거니와, 다만 6부ㆍ
3성의 사적이 고대사의 원본이 아니고 후세 사람의 보태고 줄임이 만음은 가석한 일이다. 이를테면 조선 고사의 모든 인명ㆍ
지명이 처음엔 우리말로 짓고 이두자로 기록하였는데, 그 뒤 한문화(漢文化)가 성행하면서 한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원래는
‘메주골’이라 하고, ‘미추홀(彌鄒忽)’ 혹은 ‘매초홀(買肖忽)’이라 쓰던 것을 나중엔 인천(仁川)이라 고친 따위인데, 이제
알천양산(閼川楊山)ㆍ돌산고허(突山高墟) 등 한자로 지은 여섯 마을의 이름이 6부의 본 이름이고, 양부(梁部)ㆍ사량부
(沙粱部)……등 이두자로 지은6부의 이름이 여섯 마을의 나중 이름이라 함이 어찌 앞뒤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음이 그 하나다.
신라가 불경을 수입하기 전에는 모든 명사를 다만 이두자의 음이나 뜻을 맞추어 쓸 뿐이었는데, 불교가 성행한 뒤에 몇몇
괴벽한 중들이 비슷만 하면, 불경의 숙어에 맞추어 다른 이두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예를 들면 소지왕(炤智王)을 혹 비처왕
(毘處王)이라 일컫는데, 소지나 비처가 다 ‘비치’로 읽은 것이지마는, 비처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소지는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요, 유리왕(儒理王)을 혹 세리지왕(世利智王)이라 일컫는데, 유리나 세리나 다 ‘누리’로 읽은 것이지마는, 유리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세리는 또한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이다. 탈해왕(脫解王)도 그 주에 일명 ‘토해(吐解)’라
하였는데, 탈해나 토해는 다 ‘타해’ 혹 ‘토해’로 읽을 것이고, 그 뜻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시의 속어로 된 명사임은
분명하니, 토해(吐解)는 본래 쓴 이두자이고, 탈해는 고쳐 만든 이두자로서, 불경에 해탈(解脫)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토해의
뜻을 탈(脫)로 고쳐 만든 것이다. 원래는 당시 속어의 음을 취한 것이고, 탈출(脫出) 혹은 해출(解出)의 뜻이 없인, 금궤에서
탈출하였으므로 탈해라 하였다고 함이 괴벽한 중들의 부회(附會)임을 단언할 수 있음이 그 둘이다.
3성의 시조가 다 큰 알에서 나왔으니, 그 큰 알은 다 ‘박’만 할 것인데, 어찌하여 3성의 시조가 다 같은 박씨가 되지 않고,
박씨 시조 이외에 두 시조는 석씨와 김씨가 되었는가? 석ㆍ김 두 성이 다 금궤에서 나왔는데 어찌하여 같은 김씨가 되지
아니하고, 하나는 석씨, 하나는 김씨가 되었는가? 석탈해(昔脫解)의 금궤에 까치가 따라와 울었으므로, 작(鵲)자의 변을 따서
석씨(昔氏)가 되었으며, 김알지(金閼智)가 올 때에 닭이 따라와 울었으니, 계(鷄)자변을 따서 해씨(采氏)가 되어야 옳겠는데
어찌하여 두 사람에게 다른 예를 써서 앞에서는 김씨가 되지 않고 석씨가 되었으며, 뒤에서는 해씨가 되지 않고 김씨가
되었는가? 신화라도 이같이 뒤섞여 조리가 없을뿐더러 게다가 한자 파자장(破字匠)의 수작이 섞여서 이두문 시대의 실례와
많이 틀림이 그 셋이다.
초년(初年)에 초창(草創)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변한이 나라로 들어
와서 항복하였다.’느니, ‘동옥저가 좋은 말 200마리를 바쳤다.’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북명인
(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듯하다. 왜냐하면 북명(北溟)은
‘북가시라’ - 북동부여의 별명으로 지금의 만주 훈춘 등지이고, 고구려 대주류왕의 시위장사(侍衛壯士) 괴유(怪由)를 장사
지낸 곳인데, 이제 훈춘의 농부가 밭 가운데서 예왕의 도장을 얻어 수천 리를 걸어 경주 한 구석의 조그만 나라인 신라왕에게
바쳤다함이 어찌 사실다운 말이랴? 이는 경덕왕(景德王)이 동부여 곧 북명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긴 뒤에 조작한
황당한 말이니, 다른 것도 거의 믿을 가치가 적음이 그 넷이다.
신라가 여러 나라 중에서 문화가 가장 늦게 발달하여 역사의 편찬이 겨우 그 건국 6백 년 후에야 비로소 억지로 북쪽 여러
나라의신화를 모방하여 선대사(先代史)를 꾸몄는데, 그나마도 궁예(弓裔)ㆍ견훤(甄萱) 등의 병화(兵火)에 다 타버리고,
고려의 문사들이 남산ㆍ북산의 검불을 주워다가 만든 것이므로, 신라 본기의 기록의 진위를 가려냄이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
역사나 마찬가지인데, 역사가들이 흔히 신라사가 비교적 완벽된 것인 줄로 알아 그대로 믿었다.
나의 연구에 의하면, 신라는 진한 6부의 총칭이 아니고, 6부 중의 하나인 사량부이다. 신라나 사량은 다 ‘새라’로 읽을 것이요,
‘새라’는 냇물 이름이니, ‘새라’의 위에 있으므로 ‘새라’라 일컬은 것이고, 사량은 사훼(沙喙 : 진흥왕 비문에 보임)라고도 기록
하였으며, 사훼는 ‘새불’이니 또한 ‘새라’위에 있는 ‘불’ - 들판이기 때문에 일컬은 이름이다. 본기에 신라의 처음 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으나, 서라벌은 ‘새라불’로 읽을 것이니, 또한 ‘새라’의 ‘불’이라는 뜻이다. 시조 혁거세는 곧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의 양자이고, 고허촌은 곧 사량부이니, 소벌공의 ‘소벌(蘇伐)’은 또한 사훼와 같이 ‘새불’로도 읽을
것이므로 지명이고, 공(公)은 존칭이니, 새불 자치회(自治會)의 회장이므로 ‘새불공’이라 한 것이다. 말하자면 소벌공은 곧
고허촌장이라는 뜻인데, 마치 사람의 이름같이 씀은 역사가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새라 부장(部長)의 양자인 박혁거세가
6부의 총왕(總王)이 되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새라’라 하고 이두자로 신라(新羅)ㆍ사로(斯盧)ㆍ사라(斯羅)ㆍ서라(徐羅)
등으로 쓴 것이다.
3성의 박씨뿐 아니라, 석씨ㆍ김씨도 다 사량부의 귀인의 성이니, 3성을 특별히 존숭하는 것은 또한 삼신설(三神說)에 의방
(依倣)한 것이다. 본기 석탈해왕 9년(기원 65년)에 비로소 김씨 시조인 영아(嬰兒) 김알지를 주웠다고 하였으나,
파사왕(破娑王) 원년(기원 80년)에는 왕후 사성부인(史省夫人) 김씨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 : 추존한 왕을 갈문왕이라 함)
의 딸이라 하였으니, 그 나이를 따지면 허루(許婁)도 거의 알지의 아버지뻘되는 김씨인 것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박ㆍ석ㆍ김
3성이 처음부터 사량부 안에 서로 연혼(聯婚)하는 거족(巨族)이었는데, 같이 의논한 끝에 6부 전체를 가져 3성이 서로 임금
노릇하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이에 진한 자치제의 판국이 변하여 세습 제왕의 나라가 됨에 이르렀다.
제 5편 高句麗 전성시대
제 1장 기원 1세기초 고구려의 국력발전과 그 원인
大朱留王 이후의 고구려
기원 1세기 이후로 기원 3,4세기까지의 한강 이남 곧 남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아직 초창하여 새로 일어선 때요, 압록강
이남 곧 중부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다 쇠미해지고, 압록강 이북 곧 북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도 거의 기울어져서, 가라나
신라나 백제나 남낙랑이나 동부여 두 나라들이 다 기록할 만한 일일 별로 없고, 오직 고구려와 북부여가 가장 강대한 나라로
여러 나라 중에 크게 떨쳤다. 그러나 대주류왕 이후 연대가 삭감된에 따라 사실도 모두 빠져서 그 사적(史蹟)을 논할 수가
없게 되었고, 이제 지나사에 의거하여 고구려가 지나와 선비에 대해 정치적으로 관련된 한두 사항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고구려 대 支那의 관계
고구려가 동부여와 남낙랑과의 관계로 인하여 늘 한(漢)과 다투더니, 기원 1세기경에 한의 외족(外族)에 왕망(王莽)이라는
괴걸(怪傑)이 나와서, ① 고대 사회주의적인 정전법(井田法)을 실행하고, ② 한문화(漢文化)로 세계를 통일하여 일조의
공산주의적 국가의 건설을 시도하여, 지나 본국뿐 아니라 조선의 여러 나라까지도 얼마간의 관계가 발생하였다. 말하자면
지금의 중화민국(中華民國) 이전에 지나는 수천 년 동안 왕조의 변역과 군웅의 쟁탈이 무상하였지마는, 기실을의 세력이
갑의 세력을 대신할 때에, 민중에게는 한때, ‘요역(徭役)을 면제하고 부세(賦稅)를 감해준다(省徭役 薄賦稅)’하는 6장의
혜정(惠政)으로 고식적(姑息的)인 편안을 주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옛 규정을 회복하여 폭(暴)으로써 폭을 대신하는 극이
되풀이될 뿐이었으니, 이를 무의식한 내란이라고는 일컬을지언정, 혁명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는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왕망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토지를 평균하게 나누어 빈부의 계급을 없애자는 생각을 대답하게 실행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제 정전설(井田說) 발생의 경과의 왕망의 약사(略史)를 말하기로 한다.
정전설은 지나의 춘추시대(春秋時代) 말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원전 5세기경)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생한
것인데, 당시 여러 나라들이 서로 맞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나라마다 귀족이 전권(專權)을 하여, 사치가 극에 이르고,
전쟁이 끊일 날 없어서, 부세가 날로 높아가고,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땅을 아울러 가져서 인민의 생활이 말할
수없이 곤란하였으므로, 유약(有若)ㆍ맹가(孟軻 : 孟子) 등 일부 학자들이 이를 구제하려고 토지평균설(土地平均說) -
정전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지나의 하(夏)ㆍ상(商)ㆍ주(周) 3대가 다 정전제(井田制)를 행하였는데,
정(井)자 모양의 9백 묘(畝)의 땅을 여덟 집에 나누어주어 한 집이 1백 묘씩을 경작하고, 그 나머지 1백 묘는 공전(公田)이라
하여 여덟 집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공용(公用)에 바치게 하고 또 각자 경작한 1백 묘에서 소출의 10분에 1을 공세(公稅)로
바치게 하여 이를 십일세(什一稅)라 일컬었다.”고 하고, “선대의 성왕(聖王)은 다시 나지 않고 중국이 분열하여 전국시대가
되매, 제후와 왕들이 그 백성에게서 세를 많이 받기 위하여 정전을 파괴하는 동시에, 정전에 관한 문적(文籍)까지 없애버렸다.
”고 하였다.
어느 민족이고 그 원시 공산제가 있었음을 오늘날의 사회학자들이 다 같이 공인하는 바이니, 지나도 그 태고에 균전제도
(均田制度)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거나와, 그들(有若ㆍ孟軻 등)이 주장한 정전제는 당시 조선의 균전제를 눈으로 보고 혹은
전해듣고서 이를 모방하려 한 것이고, 그들이 자인한 바와 같이 자기네의 옛 문적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의 균전은
팔가동전(八家同田)이 아니고 사가동전(四家同田)이니, 지금 평양이나 경주에 끼쳐 있는 기자형(器字形)의 고전(故田)이
이를 충분히 증명하는데, 그 세제는 10분의 1을 취하는 ‘십일세(什一稅)가 아니고, 20분의 1을 취하는 입일세(廿一稅)였다.’
맹자가, ‘맥(貊 : 貊 곧 濊貊)은 20에서1을 취한다(貊 二十取一).’고 한 말이 이를 명백히 지적한 것이다.
저들이 사가동전제를 파가동전제로 고치고 20분의 1의 세재를 10분의 1의 세제로 고쳐서 조선과 달리하고는, 자존적 근성이
깊이 박힌 그들이 이를 조선에서 가져왔다 함을 꺼려 숨기고 중국 선대 제왕의 유제(遺制)라고 속이는 동시에 조선을 이맥
(夷貊)이라 일컫고, 조선의 정전은 이맥의 제도라고 배척하여 춘추의 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이나 맹자와 마찬
가지로, “십일(什一)보다 적게 받는 자는 대맥(大貊)ㆍ소맥(小貊)이다(少乎什一者 大貊小貊也).”라고 하고, “맥(貊)은
오곡이 잘 되지 않고 오직 기장만 나는데……백관(百官)ㆍ유사(有司)를 먹여 살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20에 1만 받아도
족하다(貊五穀不生 唯黍生之……無百官有司之養 故二十取一而足).”고 하였다. 후한서 부여ㆍ옥저 등의 전(傳)에,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기름지고 아름다워……오곡이 잘 된다(土地平敞……肥美……宜五穀).”고 하였고, 위략의 부여ㆍ
고구려 등의 전에는, “그 벼슬에는 상가(相加)ㆍ대로(對盧)ㆍ패자(沛者) 등이 있다(其官 有相加對盧沛者).”라고 하였으니,
맹씨(孟氏)ㆍ공양(公羊)ㆍ곡량(穀梁) 등의 말이 근거도 없고 이론에도 맞지 않는 조선 배척론임을 볼 것이다.
조엽(趙曄)의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하우(夏禹)의 정전(井田)이 조선(본문의 州愼)의 것을 모방해서 행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정한 자백이다.저들이 정전설을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쳤더라도 본래 민중을 휘동하여 부귀의 계급을 타파
하려 한 운동이 아니고 오직 임금이나 부귀의 계급을 설복하여 그 이미 얻은 부귀를 버리고 그 가지고 있는 것을 민중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자는 것이므로 민간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임금이나 귀족들은 바야흐로 권리의 쟁탈에 급급하여
정전설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진시황이 여러 나라를 토멸하여 지나를 통일하고 지나의 모든 재부(財富)를 독점하여,
아방궁(阿房宮)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다가 2세에 망하고, 8년의 큰 난리를 지나 한(漢)나라가 일어나매, 옛날부터 여러
나라에 있어 온 귀족과 토호(土豪)들이 많이 멸망하여 부귀 계급이 훨씬 줄고, 인구도 난리통에 많이 줄어들어 농토 부족이
근심이 없었으므로, 문제되어오던 사회 문제가 얼마 동안 잠잠하였으나, 2백 년의 태평세월을 지나면서 인구는 크게 번식
하고 거농(巨農)과 대상(大商)이 발생하여, 부자는 여러 고을의 땅을 가진이가 있는 반면에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사회 문제가 학자나 정치가의 사이에 다시 치열하게 논란되게 되었다.
그래서 혹은 한전의(限田議 : 토지 소유를 제한하자는 의논)를 내어 인민의 땅을 얼마 이내로 제한하자고 하고, 혹은 주례
(周禮)란 글을 지어, 이것을 지나 고대에 정전제를 실행한 주공(周公)이란 성인이 지은 글이라고 거짓 핑계하여 당시의
제도를 반대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한의 제실(帝室)은 쇠약해지고, 외척(外戚) 왕씨(王氏)가 대대로 대사마(大司馬)ㆍ대장군(大將軍)의 직책을
가져 정권과 병권을 마음대로 하다가, 왕망이 대사마ㆍ대장군이 되어서는 한의 평제(平帝)와 유자영(孺子嬰) 두 황제를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는데, 왕망은 실로 앞에서 말한 ① 정전제의 실행 ② 한문화(漢文化)의
세계 통일이라는 두 가지 큰 사상을 가진자였다. 그래서 주례(周禮)를 모방하여 온 지나의 정전 구획(區劃)에 착수하고 또
사신을 이웃 나라에 보내서 많은 재물을 임금에게 뇌물하여, 인명과 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치고 한문을 배우라고
꾀었다.이보다 앞서 흉노가 남ㆍ북 둘로 나뉘어져서 북흉노는 지금의 몽고 북부에 웅거하여 한과 대항하였으나 남흉노는
몽고 남부에 웅거하여 한에 신복(臣僕)하였는데, 이때에 왕망의 사신이 남흉노의 선우(單于) 낭아지사(囊牙知斯)를 달래어
‘두 글자 이상의 이름은 중국 문법에 어긋나니, 낭아지사란 이름을 고쳐 ‘지(知)’라 하고, 흉노란 ‘흉(匈)’자가 순하지 못하니
‘항노(降奴)’라 고치고, 선우란 ‘선(單)’자가 뜻이 없으니 복우중국(服于中國)이란 뜻으로 ‘복우(服于)’라 고치라.’고 하였다.
낭아지사가 처음엔 듣지 않다가 왕망의 재물을 탐내어 한이 준 흉노선우(匈奴單于) 낭아지사의 인문(印文)을 버리고 왕망이
새로 주는 항노복우지‘(降奴服于知)’란 인문을 받았다. 그러나 왕망이 다시 생각하기를 남흉노가 관할하는 부중(部衆)이
너무 많으니 혹 후일에 근심이되지 않을까 하여, 그 부중을 12부로 나누어 열두 복우(服于)를 세우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낭아지사가 크게 노하여 드디어 왕망에게 대항하여 싸우기에 이르렀다.
왕망이 여러 장수를 보내어 흉노를 치는데, 요동에 조서를 보내고, 고구려현(高句麗縣)이 군사를 징발하였다. 고구려현이란
무엇인가?
한나라 무제가 고구려국을 현으로 만들려다가 패하여 소수(小水), 지금의 태자하(太子河) 부근에 한 현을 두고 조선 여러
나라의 망명자ㆍ포로 등을 끌어모아 고구려 현이라 일컬어서, 현도군에 소속시키고, 통솔하는 장관 한 사람을 두어
고구려후(高句麗侯)라 일컬은 것이었다. 그 고을[縣] 사람들이 먼 길에 출정함을 꺼리므로 강제로 징발을 행하니, 고을
사람들이 새외로 나와서 싸움터로 가지 않고 모두 도둑이 되어 약탈을 하였다. 왕망의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패하여 죽으니, 왕망이 대장군 엄우(嚴尤)를 보내 그 고을의 후(侯) 추(騶)를 꾀어다가 목배어 장안(長安)으로
보내고 싸움에 크게 이겼음을 보고하니, 고구려현을하구려현(下句麗縣)이라 고치고 조서를 내려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이긴 기세를 타 조선의 여러 나라와 흉노의 여러 부족을 쳐서 한화적(漢化的) 시설을 재촉하였다. 이에 조선 여러 나라,
북부여ㆍ고구려 등의 나라가 왕망에 대항하여 공수(攻守) 동맹을 맺고, 왕망의 변경을 자주 침노하여 왕망이 이에 대 조선ㆍ
대 흉노의 전쟁을 위해 세금을 늘리고 사람을 징발하여 전 지나가 소란해졌다.
그래서 부유한 백성들만 왕망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도 떼를 지어 일어나 왕망을 토벌하므로, 왕망이 마침내
패망하고 한나라 광무제(光武帝)가 한나라를 중흥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왕망의 침입을 유류왕(儒留王) 31년의 일로 기록하고, 후ㆍ추를 고구려의 장수 연비(延丕)로 하였으나, 이는
삼국사기의 작자가 ① 고구려 고기(古記)에 연대가 줄어든 공안(公案)이 있음을 보고 고기의 연대를 한서의 연대와 맞추고,
② 한서의 고구려가 고구려국과 관계없는 한나라 현도군의 고구려현인 줄을 모르고, 이를 고구려국으로 잘못 알아서 한서의
본문에 그대로 초록하는 동시에, 다만 유류왕이 왕망의 장수의 손에 죽어 그 머리가 한 나라 서울 장안에까지 갔다고 함은,
저들 사대노(事大奴)의 눈에도 너무 엄청난 거짓말인 듯하므로, ‘고구려후추(高句麗侯騶)’ 5자를 ‘아장연비(我將延丕)’의
4자로 고친 것이다(김부식이 흐리터분한 잘못은 많으나 턱없는 거짓은 못하는 사람이니, 연비는 혹 고기의 작자가 위조한
인물일듯도 하다. 그러나 유류왕은 분명히 왕망보다 백여 년 전 인물이고, 한서에 말한 고구려는 분명히 고구려국이 아니니,
설혹 참말로 연비라는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유류왕 시대 고구려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왕망은 지나의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의식있는 혁명을 행하려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를 너무 무시하여 남의
언어ㆍ문자ㆍ종교ㆍ정치ㆍ풍속ㆍ생활 등 모든 역사적 배경을 묻지 않고, 한문화(漢文化)로 지배하려 하다가 그 반감을
불러일으켜서 얼마간의 민족적 전쟁을 일으키게 해서, 결과가 내부 개혁의 진행까지 저지하여, 그 패망의 첫째 원인을
만들었다. ‘신수두’교가 비록 태고의 미신이지마는, 전해내려온 연대가 오래고 유행한 지역이 넓어서, 한나라의 유고는 이를
대적할 무기가 못 되고, 이두문이 비록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만든 것이지마는, 조선의 인명ㆍ지명 등 명사(고대에는
모두 우리 말로 지은 명사)뿐 아니라, 노래나 시나 기록이나 무엇이거나 다 이때 조선인에게는 한자보다 편리하였으므로,
한자로 이두자를 대신 할 가망이 없으니, 왕망의 한 문화적 동방 침략이 어찌 망상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흉노의 본 이름은
‘훈’인데, 구태여 ‘훈’을 ‘흉노’로 쓰는 이는 한인(漢人)이고, 고구려의 본 이름은‘가우리’요, 고구려(高句麗)는 그 이두자인데,
구태여 고구려를 구려(句麗) 혹은 고구려(高句麗)로 쓰는 이도 한인이었다. 한인의 짓도 괘씸하거늘 하물며 게다가 본명과
얼토당토않은 글자를 가져다가 ‘항노(降奴)’라 ‘하고려(下高麗)’라 함이랴? 왕망의 패망함이 또한 당연한 것이었다.
鮮卑 대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와 한이 충돌하는 사이에 서서,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한을 도우면 한이 이겨, 두 나라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가 있으니, 곧 선비라 일컫는 종족이 그것이었다. 선비가 조선의 서북쪽, 지금의 몽고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가, 흉노 모돈
에게 패하여 그 본거지를 잃고 내외 흥안령(內外興安嶺) 부근으로 옮겨갔음은 이미 제2편 제3장에서 말하였거니와, 그 뒤에
선비가 둘로 나뉘어 하나는 그대로 선비라 일컫고, 하나는 ‘오환(烏桓)’의 고기를 먹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목축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종족으로서 각기 읍락(邑落)을 나누어 사는데, 부족 전체를 통솔하는 대인(大人)이 있고, 읍락마다
부대인(富大人)이 있어 그 부족들은 다 그 대인이나 부대인의 명자(名子)로 성을 삼으며,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젊은 사람을
존중하고, 늙은 사람을 천대하며, 문자가 없으므로 일이 있으면 나무에다 새긴 것으로 신표(信標)를 삼아서 무리를 모으고,
모든 분쟁은 대인에게 판결을 받아서 지는 자는 소나 양으로 배상을 하였다.
조선이 모돈에게 패한 뒤에 선비와 오환이 다 조선에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므로 고구려 초에
유류왕이 이를 걱정하여 부분노(扶芬奴)의 계략을 쫓아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왕이 친히 거느리고 선비국의 전면을
치고, 다른 한 부대는 부분노가 거느리고 가만히 사잇길로 하여 선비국의 후면으로 들어가서, 왕이 먼저 교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선비가 그 소혈(巢穴)을 비워두고 다투어 추격하므로, 부분노가 이에 소혈을 습격 점령하고, 왕의 군사와
함께 앞뒤에서 쳐서, 드디어 선비를 항복받아 속국을 삼았다. 오환은 한의 무제(武帝)가 위우거(衛右渠)를 토며한 뒤에
이를 불러 우북평(右北平)ㆍ어양(漁陽)ㆍ상곡(上谷)ㆍ안문(雁門)ㆍ대군(代郡) - 지나의 서북부 지금의 직예성(直匠省)ㆍ
산서성(山西省) 일대에 옮겨 살게 하여 흉노의 정찰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 뒤 소제(昭帝) 때에 오환이 날로 불어나므로,
당시 한의 집권자 곽광(霍光)이 훗날의 걱정거리가 될까 하여, 오환의 선조 가운데 모돈에게 패하여 죽은 참혹한 역사로써,
오환을 선동하여 모돈의 무덤을 파헤쳐 조상의 원수를 갚게 하니, 흉노의 호연제선우(壺衍鞮單于)가 크게 노하여 날랜 기병
2만 명으로 오환을 치매 오환은 한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한이 3만 군사를 내어 구원한다 일컫고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흉노가 물러나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오환을 습격해서 수없이 학살하여 오환이 아주 쇠약해져서 다시 한에 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왕망의 때에 이르러서는 오환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라 하고 그 처자들을 여러 고을에 볼모로 삼고 오환을 휘몰아서
흉노를 전멸시키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니, 오환이 분하게 여겨 배반하고 달아나는 자가 많았다.
왕망이 이에 그 볼모로 한 처자를 죄다 죽이니, 그 참혹함이 또한 심하였다.왕망이 망하고 지나가 크게어지러워지니,
고구려의 모본왕(慕本王)이 이를 기회로 하여, 요동을 회복하여 양평성(襄平城)의 이름을 고쳐 고구려의 옛 이름대로
오열홀(烏列忽)이라 일컫고 선비와 오환과 협력하여 자주 지나를 치니, 한의 광무제가 한을 중흥한 뒤에 요동군(遼東郡)을
지금의 난주(灤州)에 옮겨 설치하고, 고구려를 막기 위하여 장군 채동(蔡彤)으로 요동 태수를 삼았다. 그러나 채동이 자주
전쟁에 지고, 금백(金帛)으로 선비의 추장(酋長) 편하(偏何)를 달래어서 오환의 추장 흠지분(歆志濆)을 살해하게 하니,
모본왕이 다시 선비와 오환을 타일러서 공동작전을 취하였다. 한은 계책이 궁하여 해마다 2억 7천만 전(錢)을 고구려ㆍ선비ㆍ
오환 세 나라에 바치기로 약조하여 휴전이 되었다.
모본왕이 한을 이기니 몹시 거만해져서, 몸이 아플 때에는 사람으로 누울 자리를 삼고, 누울 때는 사람으로 베개를 삼아서
꼼짝만 하면 그 사람을 목베어 죽여, 그렇게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시신(侍臣) 두로(杜魯)가 왕의 베개가 되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일찍이 친구에게 울면서 그 사정을 하소연하니, 그 친구가 말하기를, “우리를 살게 하므로 우리가
임금을 위하는 것인데, 우리를 죽이는 임금이야 도리어 우리의 원수가 아닌가? 원수는 죽이는 것이 옳소.”하였다.
이에 두로가 칼을 품었다가 왕을 죽였다. 모본왕이 죽은 뒤에 신하들이 모본왕의 태자는 못났다고 하여 페하고 종실에서
맞아다가 세우니 이가 태조왕(太祖王)이다.
고구려 본기가 대주류왕 이후는 확실히 연대가 줄어들었으므로 모본왕 본기부터서야 비로소 근거할 만한 재료가 될 것이
지마는, 모보노앙을 대주류왕의 아들이라고 함은 그 연대가 줄어든 자취를 숨기려는 거짓 기록이다. 모본왕은 대개
대주류왕의 3세나 혹은 4세가 됨이 옳고, 모본왕 때에 요동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태조왕 3년(기원 55년)에 요서와
10성을 쌓았으니, 요동은 그 전에 한 번 회복되었던 것이 명백하며, 후한서 동이열전(東夷列傳)에,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右北平)ㆍ어양(漁陽)ㆍ상곡(上谷)ㆍ태원(太原) 등지를 침략하다가 채동(蔡彤)에 은혜와 믿음으로 불러 다 다시
항복하였다.”고 하였으나, 세출전(歲出錢) 2억 7천만 전이 채동전(蔡彤傳)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세공(歲貢)이요,
은신(恩信)이 아니다.
제 2장 太祖ㆍ次大 두 대왕의 文治
太祖ㆍ次大 두 대왕의 世系의 잘못
왕조의 세계(世系)에 틀리고 안 틀린 것은 사학가가 아는 체할 것이 아니지만, 고대사는 세대의 사실이 매양 왕조의 보첩
(譜牒)에 딸려 전하므로, 그 틀리고 안 틀림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먼저 태조왕의 세계를 말하기로 한다.
전사(前史)에 태조왕을 유류왕(儒留王)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 대주류왕의 조카라 했으니, 유류왕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연대가 줄어진 동안에 든 제와이고, 광개토경호태왕(光開土境好太王)의 16대조이니, 모본왕(慕本王)
에게는 3대조가 될 것이요, 태조왕에게는 4대조가 될 것이다. 그러니 유류왕을 태조왕의아버지인 재사의 아버지로 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 아니면 속인 기록이다. 재사는 그 벼슬 이름이 고추가(古鄒加)요, 고추가는 곧 ‘고추가’를 이두자로 기록한
것이다. ‘고주’는 묵은 뿌리[古根]란 뜻이요(지금 속에어도 묵은 뿌리를 ‘고주박’이라 함) ‘가’는 신(神)의 씨란 뜻이로, 당시
5부(部) 대신의 칭호가 된 것이니, ‘고주가’는 당시 종친 대신의 벼슬 이름이다(지금의 속어에도 먼 동족을 ‘고죽지 먼
등그러기’라 함). 재사가 ‘고주가’의 벼슬을 가졌으므로 종친 대신임이 분명하고, 후한서나 삼국지에, “처음에는
연나(涓那)는 왕 될 권리를 잃었으나 그 적통(嫡統) 대인(大人)이 오히려 고추가라 일컬어 종묘(宗廟)를 세움을 얻었다.”
고 하였으나 연나는 서부(西部)의 이름이고, 계나(桂那)는 중부(中部)의 이름이니, 고구려의 정치체제에 중부가 주가 되고
4부가 이에 복속하였으므로, 어느 임금 때에도 중부를 두어두고 서부인 연나에서 왕이 나왔을 리가 없으니, 이는 태조왕이
연나의 우두머리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로서, 왕이 되고 모본왕의 태자가 계나를 차지하였던 ‘신한’의 아들로서 물러나
연나의 고추가가 되었음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본기에는 태조왕 이후에 다시 대주류왕의 후예로서 들어가 왕위를 이은
이가 없고, 광개토경호태왕의 비에 대주류왕이 그 직조(直祖)로 씌어 있으니,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가 대주류왕의 조카가
아니라 3세손이 될 것이다.
이제 또 차대왕(次大王)의 세계(世系)를 말하고자 한다. 전사(前史)에 차대왕은 재사의 아들이요, 태조왕과 한 어머니 아우라
하였으나 태조왕 당시에 차대왕은 왕자라 일컬었으니, 차대왕이 태조왕의 아우라면 어찌 왕제(王弟)라 아니하였는가? 현재의
왕의 아들은 아니지마는 전왕의 아들이므로 또한 왕자라 일컬었다면 재사가 왕의 아버지요 왕이 아니니, 왕부(王父)의 아들도
왕자라 일컬은 예가 있는가? 태조왕이 즉위할 때에 나이 겨우 7살이요, 생모되는 태후가 섭정하였으니, 이때에 재사가 생존해
있었을지라도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것이 여자나 어린아이만도 못할 만큼 노쇠하여 7살된 아들에게 왕위를 내주고, 아내가
섭정함에 이른 것인데, 그 뒤에 어찌 다시 굳세어져서 차대왕과 신대왕(新大王)과 인고(仁固)의 3형제를 낳음에 이르렀으랴?
재사가 정치상에는 싫증이 났으나, 아들을 낳을 만한 생식력은 강하였다 하더라도 차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가 76살이
었으니, 태조왕은 19년이 그가 난 해요, 신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가 77살이었으니, 태조왕 37년이 그가 난 해다. 태조왕
원년에 많이 늙은 재사가 19년만에 또 차대왕을 낳고 그 뒤 또 20년만에 신대왕을 낳았다 함이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랴?
대개 차대왕ㆍ신대왕과 인고 세 사람은 태조왕의 서자이고, 차대왕에게 죽은막근(莫勤)ㆍ막덕(莫德) 두 사람은 태조왕의
적자이므로, 신대왕과 인고가 비록 차대왕(왕자 시대의)의 전천(專擅)을 미워하였으나,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라,
그 반역의 음모를 고발하지 않은 것이고, 차대왕도 그 즉위한 뒤에 막근 형제는 살해하였으나, 신대왕과 인고는 그대로 둔
것이니, 후한서에 차대왕을 태조왕의 아들로 기록한 것이 실록(實錄)이요, 본기에 차대왕을 태조왕의 아우라고 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거나 혹은 거짓 기록이다.
본기(本紀)에 태조왕의 소자(小子)를 어수(於漱)라 하고 이름을 궁(宮)이라는 하였으나, 어수는 이두문으로 ‘마스’라 읽을
것이고, 궁(宮)이라는 뜻이다. 전자나 후자가 둘 다 태조왕의 이름이니, 어수는 소자이고, 궁은 이름이라고 나눌 것이 아니다.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遂成)이니 수성으로 읽을 것인데, 더러운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짚몽둥이’를 가리키는 말이요,
태조왕을 전사(前史)에는 시호라고 하였으나 고구려는 처음부터 시호법을 쓰지 아니하고 생사에 그 공적을 찬양하여,
‘태조(太祖)’ 혹은 ‘국조(國祖)’라고 하는 존호(尊號)를 올렸으며, 차대왕은 그 공적이 태조왕 다음 간다는 뜻으로 올린
존호이다.
太祖王ㆍ次大王 시대의 ‘선배’제도
고구려의 강성은 선배 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그 창설한 연대는 전사에 전해지지 아니하였으나, 조의(皀衣 : 다음에
자세히 설함)의 이름이 태조왕 본기에 처음으로 보였으니, 그 창설이 태조ㆍ차대 두 대왕 때가 됨이 옳다. ‘선배’는 이두자로
‘선인(先人)’, ‘선인(仙人)’이라 쓴 것으로써, ‘선(先)’과 ‘선(仙)’은 ‘선배’의 ‘서’의 음을 취한 것이고, 인(人)은 ‘선배’의 ‘배’의
뜻을 취한 것이니,‘선배’는 원래 ‘신수두’ 교도의 보통 명칭이었는데, 태조왕 때에 와서 해마다 3월과 10월 신수두 대제(大祭)에
모든 사람을 모아 혹은 칼로 춤을 추고, 혹은활도 쏘며, 혹은 깨끔질도 하고, 혹은 태껸도 하며, 혹은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혹은 노래하고 춤을 추어 그 잘하고 못함을 보며, 혹은 크게 사냥을 하여 그 잡은 짐승의 많고
적음도 보아서, 여러 가지 내기에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일컫고, ‘선배’가 된 이상에는 나라에서 봉급을 주어서 그 처자를
먹여 지방에 누가 없게 하고, ‘선배’가 된 사람은 각기편대를 나누어 한 집에서 자고 먹으며, 앉으면 고사(故事)를 강론하거나
학예를 익히고, 나아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길을 닦거나, 군중을 위해 강습을 하거나 하여, 일신을 사회와
국가에 바쳐 모든 곤란과 괴로움을 사양치 아니한다. 그 가운데서 선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긴다. 일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백(皀帛)을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스승 중의 제일
우두머리는 ‘신크마리’ - ‘두대형(頭大兄)’ 혹은 ‘태대형(太大兄)’이라 일컫고, 그 다음은 ‘마리’ - ‘대형(大兄)’이라 일컫고, 맨
아래는 소형(小兄 : 본래의 말은 상고할 수 없음)이라 일컬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를 모아 스스로 한
단체를 조직하여 싸움터에 나아가서,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싸우다가 죽기를 작정하여, 죽어서 돌아오는 사람은 인민들이
이를 개선하는 과 같이 영광스러운 일로 보고, 패하여 물러나오면 이를 업신여기므로, ‘선배’드이 전장에서 가장 용감
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여러 가지 지위는 거의 골품(骨品 : 명문)으로 얻어 미천한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였지마는,
오직 ‘선배’의 단체는 귀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자기의 지위를 획득하므로, 이 가운데서 인물이 가장 많이 나왔다.
지금 함경북도의 재가화상(在家和尙)이란 것이 곧 고구려 ‘선배’의 유종(遺種)이니,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재가화상
(在家和尙)은 화상(和尙 : 중)이 아니라 형(刑)을 받고 난 사람으로, 중과 같이 머리를 깎았으므로, 화상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제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 것은 서긍(徐兢 : 고려도경의 저작자, 지나 宋人)이
다만 지나 한대(漢代)의 죄인을 머리를 깎고, 노(奴)라 일컬은 글로 인하여 드디어 재가화상을 형벌받은 사람이라 억지의
판단을 한 것이다. 대개 고구려가 망한 뒤에 ‘선배’의 남은 무리들이 오히려 구 유풍(遺風)을 유지하여, 마을에 숨어서 그
의무를 수행하여왔는데, ‘선배’란 명칭은 유교도에게 빼앗기고, 그 머리를 깎은 까닭으로 하여 재가화상이란 가짜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이고, 후손이 가난해서 학문을 배우지 못하여 조상의 옛 일을 갈수록 잊어 자기네의 내력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송도(松都 : 開城)의 수박(手拍)이 곧 ‘선배’의 경기의 하나이니, ‘수박’이 지나에 들어가서 권법(拳法)이 되고, 일본에
건너가서 유도(柔道)가 되고, 조선에서는 이조에서 무풍(武風)을 천히 여긴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하였다.
太祖王ㆍ次大王 때의 제도
고구려가 추모왕 때에는 모든 작은 나라들이 늘어서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규모가 초창이라 나라의 체제를 채 갖추지
못하였는데, 태조왕 때에 와서 차대왕이 왕자로서 집정하여 각종 제도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 제도가 대개 왕검조선
(王儉朝鮮)이나 삼부여(三扶餘)의 것을 참작하여 대동소이하게 만든 것이고, 그 뒤 대(代)마다 다소 변경이 있었으나, 대개
차대왕이 마련한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신ㆍ말ㆍ불’ 삼한(三韓)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부에 재상 세 사람을
두었으니, 가로되 ‘신가’ㆍ‘팔치’ㆍ‘발치’다.‘신가’는 태대신(太大臣)이란 뜻이니, 이두자로 ‘상가(相加)’라 쓰고, ‘신가’의
별명이 ‘마리’로 머리[頭]란 뜻이니, 이두자로 대로(對盧) (대는 옛 뜻으로 마주)라 쓰고, ‘신가’나 ‘마리’를 한문으로는
국상(國相) 혹은 대보(大輔)라 썼다. 팔치는 ‘팔꿈치(肱)’란 뜻이니, 이두자로 ‘평자(評者)’라 쓰는데, 한문으로는 ‘좌보(左輔)ㆍ
우보(右輔)’라 썼다. 위의 세 가지를 만일 한문으로 직역하자면 ‘두신(頭臣)’ㆍ‘굉신(肱臣)’ㆍ‘고신(股臣)’이라 할 것이지마는,
글자가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대보ㆍ좌보ㆍ우보’라 했다.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구려고기(高句麗古記) 등의 책에 혹 앞의 것을 좇아 ‘대로(對盧)ㆍ패자(沛者)ㆍ
평자(評者)’로 기록하고, 혹은 뒤의 것을 좇아 ‘대보ㆍ좌보ㆍ우보’라 하였는데,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이두와 한역(漢譯)의 이동(異同)을 구별하지 못하고 철없는 붓으로 마구 빼고 마구 넣고 마구 섞고 마구 갈라놓았으므로,
“좌우보(左右輔)를 고쳐 국상(國相)을 만들었다.” “패자(沛者) 아무로 좌보를 삼았다.”하는 따위의 웃음거리가 그 사기
가운데 가끔 있다.전국을 동ㆍ서ㆍ남ㆍ북ㆍ중 5부(部)로 나누어 동부는 ‘순라’, 남부는 ‘불라’, 서부는 ‘열라’, 북부는 ‘줄라’,
중부는 ‘가우라’라 하니, 순나(順那)ㆍ관나(灌那)ㆍ연나(椽那)ㆍ절나(絶那)ㆍ계안나(桂安那)는 곧 ‘순라ㆍ불라ㆍ열라ㆍ줄라ㆍ
가우라’의 이두자인데, 관나의 ‘관(灌)’은 뜻을 취하여 ‘불(灌은 본래 부을관)’로 읽을 것이고, 그 별명인 ‘비류나(沸流那)’의
비류(沸流)는 음을 취하여 ‘불’로 읽을 것이니, 지나사의 ‘관나(灌那)’는 곧 고구려의 이두자를 직접 수입한 것인데
삼구가기에는 관(灌)을 관(貫)으로 고쳐 그 뜻을 잃었다. 그 밖의 순(順)ㆍ연(涓)ㆍ절(絶)ㆍ계(桂)의 네 나(那)는 다 음으로
쓴 것이니, 중부(中部)는 곧 ‘신가’의 관할이요, 동ㆍ남ㆍ서ㆍ북 네 부는 중부에 딸려 각각 ‘라살’이란 이름의 높은 관리를
두었는데, 이것을 이두자로 ‘누살’이라 쓰고, 한문으로 ‘도사(道使)’라 썼다.
도사는 ‘라살’ 곧 누살(耨薩)이니 도사의 도(道)는 ‘라’의 의역이요, 사(使)는 음역인데, 신당서에, “큰 성에는 누살을 두니
당(唐)의 도독(都督)과 같고, 그 밖의 성에는 도사를 두니 당의 자사(刺史)와 같다.”고 하였음은 억지의 판단이다. ‘신가’는
정권뿐 아니라 내외 병마(兵馬)를 광장하여, 권위가 대단해서 대왕과 견줄 만하나, 대왕은 세습으로 흔들리지 않는 높은
자리에 있고, ‘신가’는 3년마다 대왕과 4부의 ‘라살’과 그 밖의 중요한 관원들이 대회의를 열고 적당한 이를 골라 맡겼고,
공적이 있는 사람은 중임을 허락하였다. ‘라살’은 대개 세습이지만, 왕왕 왕과 ‘신가’의 명령으로 파면되었다. 5부는 다시
각각 5부로 나누고 부마다 또 3상(相)ㆍ5경(卿)을 내고, 벼슬 이름[官名] 위에 부의 이름을 더하여 구별하니, 이를테면
동부에 속한 ‘순라’는 ‘순라의 순라’이고, ‘불라’는 ‘순라의 불라’이며, 그 밖의 것도 이와 같으며, 동부의 ‘신가’는 ‘순라의
신가’라 일컫고, 남부의 ‘신가’는 ‘불라의 신가’라 일컫고, 그 밖의 것도 이와 같았다.
이 밖에 ‘일치’라는 것은 도부(圖簿)와 사령(辭令)을 맡아보는데, 이두자로 ‘을지(乙支)’ 혹은 ‘우태(優台)’라 쓰고, 한문으로
주부(主簿)라 쓰며, ‘살치’라나 것은 대왕의 시종이니 이두자로 사자(使者)라 쓰고, 그 밖의 중외대부(中畏大夫)ㆍ과절(過節)ㆍ
불과절(不過節) 등은 그 음과 뜻과 맡은 직무를 알 수 없다. 삼국지, 후위서(逅魏書), 양서(梁書), 후주서(後周書), 당서
(唐書) 등에 12급(級)의 벼슬 이름을 실었으나, 조선어를 모르는 지나의 역사가들이 그 전해들은 것을 번역한 것이므로,
삼국지에 주부 이외에 또 우태를 실은 것은 주부가 곧 우태의 의역임을 모른 때문이고, 신당서에 누사(樓榭) 이외에 또
누살(耨薩)을 실은 것은 누사가 곧 누살의 와전임을 모른 때문이다. 통전(通典)에 고추가(古鄒加)를 빈객(賓客) 맡은
자라고 한 것은 다시 고구려의 종친 대관(宗親大官)인 고추가가 외교관 된 것을 보고 마침내 고추가를 외교관 벼슬로 잘못
안 것이요, 구당서(舊唐書)에,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이 3년만큼씩 바뀐다.”라고 하였음은 ‘선배’의 수석을 대신의
수석으로 잘못 안 것이다.
제 3장 太祖ㆍ次大 두 대왕의 漢族 驅逐과 옛 땅 회복
漢의 국력과 東侵
모본왕(慕本王)이 한때 요동을 회복화였음을 이미 제1장에서 말하였거니와, 모본왕이 살해된 뒤에 태조왕이 7살에 즉위하여
국내의 인심이 의아해 하므로 요서에 10성을 쌓았으나, 이때에 한(漢)의 부강이 절정에 이르러 지나 유사 이래의 일이라 할
수 있게 되었다.
명장 반초(班超)가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어, 지금 서아시아의 거사(車師)ㆍ비선(鄙善) 등의 나라를 토멸하고,
지중해(地中海)에 다다라 대진(大秦), 지금의 이태리(伊太利 : 이탈리아)와 소식을 통해서 피부가 희고 몸이 큰 인종과
양피지에 쓰는 해행문자(蟹行文字 : 게가 기어가듯 옆으로 써나가는 서양글자)의 이야기가 후한서에 올랐고, 두헌(竇憲)이
5천여 리 원정의 군사를 일으켜, 지금 외몽고 등지에 나아가 북흉노를 크게 격파하여 북흉노가 흑해(黑海) 부근으로
들어가서 동(東) 고트 족(族)을 압박하여, 서양사상(西洋史上)에 민족 대이동의 시기를 이루고 이로부터 2백여 년의
흉노대왕 ‘아틸라’가 유럽 전체를 뒤흔드는 원인을 이루었다.
한이 이만한 국력을 가진 때였으니, 어찌 요동을 고구려의 예사 땅이라 하여 영구히 내어놓으랴? 어찌 고구려나 선비에게
영구히 2억 7천만의 굴욕적 세폐(歲幣)를 바치고 말랴? 이에 세폐를 정지하고 경기(耿蘷)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6현을 다시 빼앗고, 경기로 요동태수를 삼아 동쪽 침략할 기회를 기다렸다.
王子 遂成(次大王)의 遼東 恢復
후한서에는 당시 한을 침략한 중심 인물을 잘못 알았으나, 실은 태조왕은 당시 고구려에 군림한 제왕일 뿐이고, 전쟁에
대하여는 거의 차대왕인 왕자 수성(遂成)이 도맡았었다. 전쟁이 처음에는 한이 주동자가 되어, 요동을 침략하여 빼앗는
동시에 고구려를 침노하매, 고구려는 이에 반항하는 피동적(被動的) 지위에 있었고, 그 다음에는 고구려가 주동자가 되어,
요동을 회복하는 동시에 나아가 한의 변경을 잠식하매, 한이 이에 반항하는 피동적 지위에 있었는데, 요동 회복의 전쟁은
기원 105년에 비롯하여 121년에 마치니, 전후 17년이었다. 이 전쟁의 초년, 기원 105년은 왕자 수성의 나이가 34살이었는데,
“고구려가 비록 땅의 넓이와 인구의 수는 한에 미치지 못하나, 다만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의 나라이므로, 웅거하여
지키기에 편리하여 적은 군사로도 한의 많은 군사를 방어하기에 넉넉하며, 한은 평원광야(平原廣野)의 나라이므로 침략
하기가 용이하여, 고구려가 비록 한꺼번에 한을 격파하기는 어려우나 자주 틈을 타서 그 변경을 시끄럽게 하여, 피폐하게
한 뒤에 이를 격멸해야 할 것이다.”하고 드디어 장기의 소란작전을 한에 대한 전쟁의 방략으로 정하고, 정예한 군사로
요동에 들어가 신창(新昌)ㆍ후성(候城) 등 여섯 현(縣)을 쳐서 수비병을 격파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그 뒤에 예와 선비를
꾀어서 해마다 한의 우북평ㆍ어양ㆍ상곡 등지를 잇달아 침략하여, 한은 17년 동안 인축(人畜)과 재물의 소모가 대단하였다.
기원 121년 정월에 한의 안제(安帝)는 고구려의 침입을 걱정하여,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군수(玄菟郡守)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에게 명하여 유주(幽州) 소속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라 하였다. 이에 수성이 태조왕의
명령을 받아, ‘신치’총사령이 되어, 2천 명으로 험한 곳에 웅거하여, 풍환 등을 막게 하고 3천 명으로 사잇길을 좇아 요동ㆍ
현도의 각 고을을 불 질러서 풍환 등의 후방 응원을 끊게 하여 드디어 그들을 크게 격파하고, 같은 해 4월에 수성이 다시
선비의 군사 8천명으로 요동의 요대현(遼隊縣)을 치는데, 고구려의 날랜 군사를 신창(新昌)에 잠복시켰다가 요동태수
채풍의 구원병을 습격하여, 채풍 이하 장수 1백여 명을 베어 죽이고 수없이 많은 군사를 살상하거나 또는 사로잡아 드디어
요동군을 점령하고, 그 해 12월에 또 백제와 예의 기병 1만을 내어 현도ㆍ낙랑 두 군을 점령하여, 이에 위우거가 한에게
잃었던 옛 땅 - 조선의 옛 오열홀(烏列忽)의 전부를 완전히 회복하니, 한이 여러 해의 전쟁에 국력이 피폐한데다가 또
이처럼 크게 패하니, 다시 싸울 힘이 없어서 드디어 요동을 내어주고 다시 세폐(歲幣)를 회복하는 조건으로 고구려에
화의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포로는 한사람에 대해 겸(鎌 : 합사로 짠 명주) 40필, 어리아니는 20필로 속환(贖還)하였다.
요동ㆍ낙랑 등의 회복이 태조왕 본기나 후한서에 보이지 아니하여으나, 당(唐) 가탐전(賈眈傳)에 가탐의, “요동과 낙랑이
한의 건안(建安) 때에 함락되었다(遼東樂浪 陷於漢 建安之際).”고 한 말을 실었는데, 가탐은 당나라 때의 유일한 사이
(四夷)의 고사(故事) 연구가이니, 그 말이 반드시 출처가 있을 것이나, 다만 건안은 기원 196년 한나라 헌제(獻帝)의 원년
이니까, 고구려가 중간에 쇠미한 때이므로, 건안은 곧 건광(建光)의 잘못이요, 건광은 곧 기원 121년 한나라 안제(安帝)의
연호이다. 왕자 수성이 채풍을 죽이고 한의 군사를 격파한 때이니, 이때에 고구려가 요동군 안에 가설하 현도ㆍ낙랑 등의
군을 회복하였음이 의심없다.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자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70리에 환도성(丸都城)을 쌓아 서방
경영의 본거지로 삼고, 국내성과 졸본성과 아울러 삼경(三京)이라 일컬었다.
환도성의 위치에 대하여는 후세 사람의 논쟁이 분분하여 혹은 환인현(桓因縣) 부근 - 지금의 혼강(渾江) 상류인 안고성
(安古城)이라고도 하고, 혹은 집안현(輯安縣) 홍석 정자산(紅石頂子山) 위라고도 하지마는, 앞의 것은 산상왕(山上王)이
옮겨가 설치한 제2의 환도성이요, 나중 것은 동천왕(東川王)이 옮겨가 설치한 제3의 환도성이다. 이것이 제6편에서 다시
서술하려니와, 태조왕의 환도성은 곧 첫 번째 옮겨 쌓은 제1의 환도성이니,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에, “안시성은 혹
환도성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환(丸)은 우리말로 ‘알’이라고 하니, 환도(丸都)나 안시(安市)나 안촌(安寸)은 다 ‘아리’로
읽을 것이므로, 다같이 한 곳 -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70리의 옛 자리임이 분명한데, 후세 사람들이 앞 뒤 세 환도성을 옳게
구별하지 못하고 매양 환도성을 한 곳에서만 찾으므로, 아무리 환도성의 고증에 노력하여도 환도성의 위치는 여전히
애매하였던 것이다.
제 4장 次大王의 왕위 빼앗음
太祖王의 가정불화
왕자 수성이 이미 요동을 회복하고 한나라의 세폐(歲幣)를 받으니 태조왕은 그 공을 상주어 ‘신가’에 임명하고 군국(軍國)
대사를 죄다 맡겼다. 이에 위엄과 권세가 한몸에 모이고 명성과 인망이 천하에 떨치니, 수성이 만일 이 명성과 인망을
이용하여 나아가 요서를 쳤으면 삼조선의 서북 옛 땅을 전부 회복하가 쉬웠겠지마는, 수성은 가정에 대한 불평이 공명
(功名)에 대한 열심을 감쇄하여, 요동을 회복한 이튿날 한의 화의 요청을 허락(앞 장에 보임)하고 귀국하였다. 수성의
가정에 대한 불화란 무엇인가? 수성은 태조왕의 서자요, 막근ㆍ막덕 형제가 태조왕의 적자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막근은 고구려 왕실의 가법(家法)에 의하여 왕위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고, 수성은 그 빛나는 무공에 의하여 또한 태자가
되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성은 요동의 싸움을 마치자 급히 돌아와 원정할 생각을 끊고 밖으로는 정치에 힘쓰며,
어진 신하 목도루(穆度婁)ㆍ고복장(高福章)을 기용하여‘팔치’와 ‘발치’를 삼아서 인심을 거두고, 안으로는 사사로운 무리를
길러 태자의 자리 얻기르 도모하였는데, ‘불라[沸流那]’의 ‘일치’ 미유(彌儒)와, ‘환라[桓那]’의 ‘일치’ 어지류(菸支留)와
‘불라’의 조의(皀衣 : 당시의 선배 수령)가 수성의 뜻을 알고 이에 아부하여 태자의 자리 빼앗기를 모래 모의하였다.
그런데 태조왕은 수성으로 태자를 삼자니 가법(家法)에 걸리고, 막근으로 태자를 삼자니 수성에게 걸려서 오랫동안
태자를 세우지 못하였다. 수성이 정치를 오로지 한지 10여 년에 태자의 자리를 얻지 못하자 원망하는 기색이 이따금
얼굴에 보이고, 모의하는 흔적이 때때로 겉에 드러나니 막근은 태자의 지위를 빼앗길 뿐 아니라 수성에게 죽을까 두려
웠으나, 병권도 없고 또 위엄과 명망이 수성에게 미치지 못하므로 그 대항할 방책은 오직 태조왕의 마음을 돌리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이때에 고구려의 ‘신수두’에 신단(神壇)의 무사(巫師)는 비록 부여처럼 정권을 가지지는 못하였으나,
복술(卜術)로써 남의 길흉 화복을예언한다 일컬어서 일반의 신앙을 받아 귀천의 계급을 불문하고 모든 의심나고 어려운
일을 이 무사에게 결정을 청하는 때였으므로, 막근은 무사에게 뇌물을 주고 도움을 빌었다. 기원 142년에 환도성에
지진이 일어나고, 또 태조왕은 꿈에 표범이 범의 꼬리를 물어 끊는 것을 보고, 마음이 좋지 못하여, 무사를 불러 해몽해
보라고 하니, 무사는 수성을 참소할 좋은 기회로 여기고, “범은 온갖 짐승의 어른이요, 표범은 범의 씨요, 범의 꼬리는 범의
뒤니 아마 대왕의 작은 씨가 대왕의 뒤(후예란 말)를 끊으려는 자가 있어 꿈이 그러한가 합니다.”고 하여, 넌지시 서자
수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 갑자기 무사의 말에 기울여지랴. 다시 ‘불치’ 고복장을 불러 물으니, 고복장은 수성의 무리는
아니지마는아직 수성의 음모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선을 행하면 복이 내리고 불선을 행하면 화가 이릅니다. 대왕께서
나라를 집안같이 걱정하시고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지만 비록 재난과 변괴와 악몽이 있을지라도 무슨 화가 되겠습니까?”
하고 무사의 말을 반대하여 태조왕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遂成의 음모와 太祖王의 禪位
수성이 40년 동안이나 정권을 잡아 위엄과 복을 오로지 하여, 매양 막근을 죽여서 왕위 상속의 권한을 빼앗으려고 했지마는 ,
다만 태조왕이 이미 늙었으므로 그 돌아감을 기다려서 일을 행하려고 하였는데, 태조왕은 두 사람의 감정을 조화시켜서
자기가 죽은 뒤에도 아무런 변란이 없도록 만든 뒤에 태자를 봉하려 하여 긴 세월을 그냥 지내왔다.
기원 146년은 태조왕이 왕위에 있은 지 94년이요, 나이 100살 되는 경사스러운 해인데, 수성도 이때에 나이 76살이라, 백 살
노인인태조왕의 건강함을 보고 혹 자기가 태조왕보다 먼저 죽어 막근에게 왕위가 돌아가지나 않을까 하여, 그 해 7월에
왜산(倭山 : 연혁 미상)에서 사냥하다가 지는 해를 돌아보며 탄식하니, 좌우가 그 뜻을 알고 모두 힘을 다하여 왕자의 뒤를
따라 행동할 것을 맹세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홀로, “대왕께서 성명(聖明)하시어 백성이 공경하여 받드는데, 왕자가 좌우의
소인들을 데리고 성명하신 대왕을 폐위하려고 하는 건 한 가닥 실로 만 근의 무게를 끌려 함과 같을 뿐입니다. 만일
왕자께서 생각을 고치셔서 효도로써 대왕을 섬기시면, 대왕께서 반드시 왕자의 선함을 아시어 양위하실 마음이 있으
시겠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큰 화가 있을 것입니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수성이 그의 말을 못마땅해하니, 좌우가 수성을
위해 그를 살해하고, 음모가 더욱 급히 진행되었다. 고복장이 눈치채고서 태조왕에게 들어가 고하고 수성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태조왕은 신하로서의 부기로는 수성의 마음을 달래지 못할 줄을 깨달았으나, 차마 죽이지 못하여 고복장의
청을 거절하고,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 별궁(別宮)으로 물러가고, 수성은 자리에 올라 차대왕(次大王)이라 하였다.
고구려 본기에, “태조왕 80년에 좌보패자(左輔沛者) 목도루(穆度婁)가, 수성이 딴 뜻이 있음을 알고, 병을 일컫고 벼슬하지
않았다(左輔悖子 知遂成有異志 稱病不仕).”고 기록되었고, 차대왕 2년에 “좌보 목도루가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라났다
(左輔穆度婁稱病退老).”고 기록되었으니, 이에 이미 15년 전에 벼을 일컫고 벼슬하지 아니한 목도루가 어찌 15년 후에 차대왕
2년에 또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러났다고 할 수 있으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여러 가지 고기(古記)에 대하여
아무런 선택 없이 마구 수록하였음이 이같이 심하였다. 하물며 좌보(左輔) 패자(沛者)가 다 ‘팔치’의 번역인데, 좌보패자라는
겹말의 명사를 글에 올렸으니,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랴? 또 태조왕 본기에, “94년 8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
(西安平)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빼앗았다(九十四年八月 王遣將 襲遼東西安平 殺大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라 하였는데, 이는 후한서에, “고구려왕 백고(伯固)가……질환(質桓)의 어간에 다시 요동의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빼앗았다……(高句麗王伯固 質桓之間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 掠得樂
浪太守妻子).”고 한 글을 그대로 초록한 것이다. 질환의 어간이란 질제(質帝)와 환제(桓帝)의 사이를 가리킨 것이니, 그것은
태조왕 94년이므로, 김부식이 이 해에다 기록해 넣은 것이고, 백고(伯固)는 신대왕(新大王)의 이름이니, 이때는 신대왕 원년
전 20년전이므로, 김부식이 ‘고구려왕 백고(高句麗王伯固)’의 여섯 글자를 ‘견장(遣將)’의 두 글자로 고친 것이다. 그러나
이때 태조왕의 가정에 차대왕과 막근의 다툼이 있어 외부의 일을 물을 사이가 없는 때였으므로, 후한서의 질환의 어간은
환령(桓靈)의 어간 -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사이, 신대왕 때로 개정함이 옳은데, 김부식이 이를 태조왕 94년의 일로
적어넣음이 이미 망령된 조작임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친절하게도 달까지 박아 ‘8월’이라고 하였음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국내외의 기록을 뽑아 넣을 때에 모호한 것은 아무 근거 없이 연월(年月)을 스스로 정하고 자구를
가감한 것이 많았던 것이다.
제 5장 次大王의 피살과 明臨答夫의 專權
次大王의 20년 專制
차대왕이 양위를 받아 20년 동안 고구려에 군림하여 전제를 하다가 연나(椽那)의 조의(皀衣)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
당하였다. 그러나 차대왕의 본기(本紀)가 간략하고 허술하여, 그 전제(專制)의 정도와 살해당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다. 이에 본기의 전문을 여기에 번역해 싣고 나서 논평하고자 한다.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遂成)이니, 태조왕의 동모제(同母弟 : 동모제 3字는 서자로 고칠 것임)로 용감하고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仁慈)가 적었다. 태조왕의 양위(讓位)로 왕위에 오르니, 나이 76세였다.
2년 봄 정월에 관나(貫那 : 灌那)의 패자(沛者) 미유(彌儒)로 우보(右輔)로 삼았다. 3월에는 우보 고복장(高福章)을 죽였는데,
그가 죽을 때에, “원통하고 원통하다. 내가 당시에 선조(先朝)의 근신이 되어 어찌 난을 일으킬 사람을 보고 말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선군께서 나의 말을 듣지 않으시어 이에 이르렀거니와, 지금 임금이 왕위에 올라 마땅히 정(政)과 교(敎)를 새로이 하여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인데, 이제 불의로 충신을 죽이니 내가 무도한 세상에서 사느니보다 죽는 것이 낫다.”하고 형을
받으니, 모두들 이 소식을 듣고 분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가을 7월에 좌보 목도루가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러가니,
환나(桓那 : 椽那로 고칠 것임)의 우태 어지류로 좌보를 삼아서 작위를 더하여 대주부(大主簿)를 삼았다. 겨울 10월에
비류나(沸流那)의 조의(皀衣) 양신(陽神)으로 중외대부(中畏大夫)를 삼아서 작위를 더하여 우태를 삼았다. 이상은 다 왕의
옛날 친구였다. 11월에 지진이 있었다. 3년 여름 4월에 왕이 사람을 시켜 태조왕의 원자(元子) 막근을 죽으니, 그 아우 막덕이
장차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가을 7월에 왕이 평유원(平儒原)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흰 여우가
따라오며, 울므로 왕이 이를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왕이 무사(巫師)에게 물으니, “여우는 요망한 짐승이니, 길한 상서가
아닌데 게다가 흰 여우니 더욱 괴이한 변입니다. 천제(天帝)께서 인간의 임금에게 맞대해서 순수히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요괴를 보여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반성하게 함이니 대왕께서 만일 덕을 닦으시면 화를 돌려 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흉한 것이면 흉할 것이고 길한 것이면 길할 것인데, 이제 이미 흉하다고 하고 또 길하다고 하니
어찌 속이는 말이 아니냐?”하고 드디어 무사를 죽였다.
4년 여름 4월 정묘(丁卯) 그믐날 일식(日食)이 있었다. 5월에 다섯 별이 동쪽에 모였는데, 일관(日官)은 왕의 노함을
두려워하여 거짓말로, “이는 임금의 덕이요 나라의 복이빈다.”고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겨울 12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8년 여름 6월에 서리가 내려 쌓였다. 겨울 12월 천둥하고 지진이 있었다. 그믐날 객성(客星 : 彗星)이 달을
범하였다.13년 봄 2월에 꼬리별[孛星]이 북두(北斗)를 범하였고 5월 갑술(甲戌) 그맘날에는 일식이 있었다.
20년 봄 정월에 일식이 있었다. 3우러에 태조왕이 별궁에서 돌아가니, 나이 119살이었다. 겨울 10월에 연나의 조의
명림답부가 왕이 백성들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ㅇ르 하므로 왕을 죽이고, 그 호(號)를 차대왕이라 하였다.”
이상이 차대왕 본기의 전부다. 맨 끝에, “명림답부가 백성들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므로 왕을 죽였다.”고 했으나,
그 이전의 기록을 상고해보면, 차대왕이 백성에게 차마 하지 못할 정사를 한 일이 하나도 없다. 고복장(高福章)은 차대왕의
음모를 고발한 사람이므로 죽인 것이고, 목도루는 차대왕과 막근의 중간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한 사람이므로 내쫓은 것이고,
무사는 태조왕의 꿈을 야릇하게 풀어 차대왕을 해치려 한 사람이므로 죽인 것이고, 막근 형제는 차대왕과 맞선 적이므로
죽인 것이니, 이것을 아무리 참혹하고 불인(不仁)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사로운 원한의 보복이고, 인민에게는 이해 관계가
없는 일일 뿐더러, 또 이것이 모두 차대왕 2년 내지 3년까지의 일이니, 18년 후인 차대왕 20년에 반란을 일으킨,
명림답부의 유일한구실이 될 수 없으며, 그 이외의 기사는 일식ㆍ지진ㆍ성변(星變) 등뿐이니, 이 같은 천문 지리의 변화는
차대왕의 정치의 잘잘못에 관계가 없는 일이라 이로써 인민에게 차마 못할 일을 한 증거로 삼을 수 없다.
그러면 차대왕이 패망하고 명림답부가 성공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 차대왕이 패한 뒤에 좌보 어지류가 여러 중신과
더불어 차대왕의 아우 백고 신대왕에게 왕위 계승을 권진(勸進)하였는데, 어지류는 처음부터 차대왕을 도와 왕위 찬탈을
계획한 괴수요, 그 여러 중신이란 대개 미유ㆍ양신 등일 것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차대왕의 패망은 곧 자기 당의
이반(離反)에 의한 것일 것이다.
차대왕의 즉위 이전 10여 년 동안에 차대왕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왕위 찬탈을 계획한그 무리들이 차대왕과 20년 동안
부귀를 누리다가 도리어 왕을 배반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원인은 찾기 쉬운 것이다. 고구려는 원래 일인전제
(一人專制)의 나라가 아니라 벌족공치(閥族共治)의 나라이니, 국가의 기밀 대사는 왕이 전결(專決)하지 못하고, 왕과 5부의
대관들이 대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형벌로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도 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형벌로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도 회의의 결정으로 행하였다. 그런데 차대왕은 부왕을 가두고 당시 신앙의 중심인 무사를 죽인 사람으로서, 비록
어지류 등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에 오른 뒤에는 이 무리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군권(君權)이 오직 제일임을
주장하여 모든 일을 자기 독단으로 행하므로, 연나의 ‘선배’ 우두머리 명림답부가 그 본부(本部)의 ‘선배’로서 밖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어지류 등이 내응(內應)하여, 태조왕이 돌아간 뒤를 기회하여 차대왕을 죽이고 벌족 공치의 나라를
회복한것이다.
어떤 이는 명림답부를 조선 사상 처음으로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라고 하지마는, 혁명은 반드시 역사상 진화의 의의를 가진
변동을 일컫는 것이니, 벌족 공치를 회복한 반란이 어찌 혁명이 되랴? 명림답부는 한때 정권 쟁탈의 효웅(梟雄)이라 함은
옳지마는 혁명가라 함은 옳지 않다.
明臨答夫의 專權과 외교 정책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죽이고 차대왕 당년에 해를 피하여 산중에 숨어 있던 백고(伯固)를 세워 신대왕이라 하고, 국내에
사면령(赦免令)을 내려,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까지도 용서하여 양국군(讓國君)으로 봉하고, 차대왕의 준엄한 형법을
폐지하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명림답부가 ‘신가’가 되어,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맡아 처리하고,
‘팔치’와 ‘발치’를 겸하고, 예량(濊梁) 여러 맥(貊)의 부장(部長)을 다 차지하니, 그 위엄과 권세가 태조왕 때의 왕자
수성보다 더하였다. 본기에는, “명림답부가 국상(國相)으로 패자(沛者)를 겸하였다.”고 하였고, 또 “좌우보(左右輔)를
고쳐 국상으로 한 것도 이때에 비롯된 것이다.”하였는데, 이는 국상이 곧 ‘신가’인지를 모르고, 패자가 ‘팔치’ 곧 좌보인지를
모르고서 함부로 내린 주해이다.
태조왕 때에 한이 요동을 지금의 난주(難舟)에 옮겨다 설치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기원 169년에 한이 요동을
회복하려고 경림(耿臨)으로 현도태수를 삼아서 대거하여 침입하였다. 명림답부가 여러 신한들과 함께 신대왕 앞에서
회의를 열고 싸우고 수비할 계책을 논의하였는데 모두들 나가 싸우기를 주장했으나, ,명림답부는, “우리는 군사는 적으나
험한 땅을 가졌고 한은 군사는 많으나 군량을 대기가 힘드니, 우리가 우선 수비를 하여 한의 병력을 지치게 한 뒤에 나가
싸우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것이빈다.”고 하여 먼저 지키고 나중에 싸우기로 계책을 정하고 각 고을에 명하여 인민과
양식과 가축들을 거두어 성이나 산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게 하였다. 한의 군사가 침입한 지 여러 달을 노략질했으나,
얻는 것이 없고 싸우려고 해도 응하지 아니하므로, 양식이 떨어져서 배고프고 피로하여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명림답부가
좌원(座原)까지 추격하여 한의 군사는 한 사람도 돌아가지못하였다. 명림답부는 한의 침입군을 격파하자 국토를 개척
하려고 먼저 선비의 이름난 왕인 단석괴(壇石塊)를 꾀어서 한의 유주(幽州)ㆍ병주(幷州) 두 주 - 지금의 직예ㆍ산서 두
성을 침략하게 하고, 그 뒤를 이어서 고구려의 군사로 한을 치려고 하다가 그만 병이 들어 죽으니 나이 113살이었다.
신대왕이 친히 가서 통곡을 하고 왕의 예로써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엔 신대왕 4년(기원 168년)에, “한의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와 침범하여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으므로, 왕이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하였다.”고 하고, 신대왕 5년(기원 169년)에, “왕이 대가(大加) 우거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서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富山)의 적을 치게 하였다.”고 하고, 8년(기원 172년)에,
“한이 대병(大兵)으로 우리를 공격해왔으므로……명림답부가 좌원(坐原)까지 추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려 한의 군사가
하난도 돌아가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앞의 두 기록은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뒤의 한 기록은 고기(古記)에서 뽑아 쓴
것이다. 그러나 조선사략(朝鮮史略)에는, “신대왕 5년에 한의 현도태수 경림이 대병으로 침략해오므로, ……명림답부가
좌원(坐原)에서 크게 격파하여…….”라고 하여그 인조가 후한서의,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기원 169년)에 현도태수
경림……백고(伯固)가 항복하였다(靈帝 建寧二年玄ꟙ太守耿臨……伯固降).”고 한 것과 부합하므로 경림의 침략군이
명림답부에게 패하였음이 분명한데, 김부식이 이것을 그릇 두 번의 사실로 나누어, 하나는 신대왕 4년의 또 하나는
신대왕 8년의 조항에 기록한 것이고, 공손도는 삼국지에 의하면, 한의 헌제(獻帝) 영평(永平) 원년에 비로소 요동태수가
되었는데, 영평 원년은 기원 190년이요, 신대왕 5년에서 20년 후이니, 신대왕이 20년 후에 요동태수 공손도를 도울 수
없었음이 또한 분명한데,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한 김부식이 그대로 신대왕 본기 가운데 잘못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패해 달아나 경림을 크게 이겼다고 하고, 연대도 닿지 않는 공손도를 신대왕의 종주국으로 기록하였으니, 이런 곳에서
지나사의 거짓이 많음을 보겠거니와,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현도태수 경림이 침략해왔다가 명림답부에게 패한 것을
신대왕 8년의 일로 기록하여 또 조선사략과 다르다. 대개 이조 초기에는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등 몇
가지가 있어 삼국사기 이외에도 참고할 만한 책이 더러 있었는데, 그 고기(古記)들이 각각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 6장 乙巴素의 업적
王后의 정치 간여와 左可慮의 난
기원 179년에 신대왕(新大王)이 죽고 고국천왕(故國川王)의 즉하여서는, 왕후 우씨(于氏 : 椽那 于素의 딸)의 뛰어난 자색
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왕후의 친척 어비류(於卑留)는 ‘팔치’가 되고, 좌가려(左可慮)는 ‘발치’가 되어 정권을 마음대로
하니 그 자제들이 교만하고 난폭하여 남의 아내와 딸을 빼앗아다가 첩으로 삼고, 아들과 조카들을 잡아다가 종을 만들며
남의 좋은 밭과 훌륭한 집을 빼앗아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서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 왕이 이것을
알고 죄 주려고 하니까, 좌가려 등이 마침내 연나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와이 기내(畿內)의 군사와 말을 징집하여 이를
쳐 평정하고, 왕후 친족의 정치 간여를 징계하고, 4부(部) 대신에게 조서를 내려, “근자에 벼슬을 총애로써 임명하고
지위가 덕으로써 승진하지 못하여, 덕이 백성에 행해져서 왕실을 움직였으니 이는 다 내가 밝지 못한 때문이다. 너희
4부는 각기 그 관하의 어진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였는데, 4부가 의논하고 동부의 안류(晏留)를 천거하였다.
을파소의 등용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안류를 써서 국정을 맡기려고 하니 안류가 자기의 재능은 큰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하고, 서압록곡
(西鴨錄谷)의 처사(處士) 을파소(乙巴素)를 처거하였다.
을파소는 유류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후손인데, 고금의 치란(治亂)에 밝고, 민간의 이로움과 폐단을 잘 알고 학식이
넉넉하였으나, 세상에서 알아주는 자가 없으므로 초야에서 밭갈아 살아가고 벼슬할 뜻이 없었는데, 고국천왕이 말을 낮추고
후한 예로 맞아 스승의 예로써 대접하고, 중외대부(中畏大夫)를 삼아 ‘일치’의 작위를 더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을파소는 자기가 받은 벼슬과 작위가 오히려 자기의 포부를 펼 수 없으므로 굳이 사양하고, 다시 다른 어질고 유능한 이를
구하여 높은 지위를 주어 큰 사업을 성취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그의 뜻을 알고 을파소로 ‘신가’를 삼아서 모든 관리의 위에
있어 국정을 처리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을파소가 초양의 한미(寒微)한 처사로서 하루 아침에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시기하여 비난이 자자하니, 왕이 조서를 내려 “만일 ‘신가’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일족을 멸할 것입니다.”하고
더욱 을파소를 신임하였다.
을파소는 자기를 알아주고 크게 대우해주는 데 감격하여 지성으로 국정을 처리하였다. 상과 벌을 신중히 하고,
정령(政令)을 밝혀 나라 안이 크게 다스려져서, 고구려 9백 년 동안 첫째가는 어진 세상으로 일컬어졌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고국천왕(혹은 國襄이라 함)의 이름은 남무(男武 : 혹은 伊夷謨)로, 신대왕 배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맏아들 발기(拔奇)는 불초하다고, 함께 이이모를 세워서 왕을 삼았는데, 한의 헌제
건안 초에 발기는 자기가 형으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각 딸린 민호(民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에게로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沸流水) 상류에서 살았다(故國川王(或云國襄 諱 男武(或云
伊夷謨) 新大王伯固之第二子 伯固薨 國人以長子拔奇不肖 共立伊夷謨爲王 漢獻帝建安初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消奴加各
將下戶 三萬餘口 詣公孫康降 還住沸流水上).”하였으나 이는, 김부식이 삼국지 고구려전의 본문을 그대로 떠다가 옮겨 쓴
것으로, 발기(拔奇)는 곧 산상왕(山上王) 본기(本紀) 가운데의 발기(發岐)요, 이이모(伊夷謨)는 곧 산상왕 연우(延優)이니,
삼국지의 작자가 발기(發岐)ㆍ연우(延優) 두 사람을 신대왕의 아들로 잘못 전한 것인데, 김부식이 경솔하게 믿고
고국천왕 남무(男武)를 곧 이이모라 하였고, 남무를 곧 발기(拔奇)의 아우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첫재 잘못이요, 삼국지
공손도전(公孫度傳)에 의하면, 공손강의 아버지 공손도가 한의 헌제 초평 원년(기원 190년)에 요동태수가 되어서 건안
9년(기원 204년)에 죽고, 공손강이 뒤를 이었는데, 한의 헌제 초평 원년은 고국천왕 12년이니, 고국천왕 즉위 초에는
공손강은 고사하고 그 아버지 공손도도 아직 요동태수를 꿈꾸지 못한 때인데, 김부식이 이를 고국천왕 즉위 원년의 일로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앞에서 말한 신대왕 5년에, “공손도를 도와 부산(富山)의 적을 쳤다(助……公孫
度 討富山賊).”고 한 것과 아울러 보면, 김부식이 곧 공손도를 어느 때의 사람인 줄을 모른 듯하니 또한 기괴한 일이다.
(淸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