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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상고사의 정체를 알기위한-임혜상의 문화인류학적 개관과 대륙사관 논지
대륙을 안방 삼아 활동했던 한민족의 상고사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지나 혈통의 석학으로 동이 제족의 진면목을
가장 솔직하게 전하고 있는 임 혜상과 서 량지의 논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서량지의 대국적인 논지는 앞에서
살펴보았으므로 우선 임 혜상의 핵심 논지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임 혜상은 화하계의 기원 문제를 알아보기 위함이라 말하고 있지만 반대로 그 뿌리인 동이족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는 동이족 기원에 대한 문제는 별도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는 별도로 소개할 참이다. 필자는
임이 밝히고 있는 사실이 많은 면에서 지나인의 사관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모두 맞는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대국적인 사관은 「환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를 비롯해 단재 신채호, 문정창 등의 민족
사학자들의 대륙사관을 거의 70-80% 이상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현재 해방이후 거의 공백기에
가까울 정도로 방치된 우리 상고사의 토양이 지극히 척박하기때문에 그 중간의 과도기로 새로운 역사의 안목을
열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끼리 뒷다리를 만진다고 해서 코끼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코끼리의 일부일 뿐이다. 서량지와
환단고기가 전하고 있는 동이 제 족의 엄청난 역사를 알면 다음의 각 고고학적 학설이 얼마나 코끼리 뒷 다리
만지기식의 학설인지 알 수 있다.
좀 복잡하고 니전투구적인 학술경연장 같은 모습을 인내심을 가지고 잠시 지켜보자. 결론은 현명한 독자들이
충분히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서량지와 임혜상의 저서는 국내에서 첫 발췌 번역 소개이므로 필자가 다소 번역이
서툴더라도 넓은 이해심으로 읽어주길 바란다. 특히 용이로운 이해를 위해 가급적 중요 단어는 한문을 부가했다.
떼리앙 드 라꾸뻬리(Terrien de lacouperie,拉克伯里)의 중국 고 문명 서방 기원론은 중국의 황제(헌원)가
바빌론의 파극(巴克:Bak,밝)족의 추장으로 동쪽으로 이동해 중국에 도달했다는 학설인데, 이 학설은
「환단고기」와 서량지의 「중국사전사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단 패가리(바이칼)호에서 출발하여 탑리목(타림)
분지로 이동한 환(桓)의 후예들이 파비륜(巴比侖:바빌론) 문명을 만들고 이것이 다시 대륙으로 역수입된 증거들이
많다는 점에서 전혀 부정할 수 없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한국의 박 용숙 교수가 일부 계승하고 있는 듯 하며 일본판 「환단고기」의 간행사를 쓴 오향청언(吾鄕
淸彦)이나 일본판 「환단고기」를 번역, 소개한 가시마 노보루 같은 학자가 일부 수용하고 있다.)
다음은 이를 번역 소개한 장 지유(蔣智有)의 「중국인종 考」이다. 문장중의 각주는 장씨가 부가한 것이다.
(見 임혜상의 「중국민족사」2)
-근세의 "Nai Hwang ti" 인 내형태(奈亨台:Nakhunte)가 애뢰미특(愛雷米特:엘람족)을 데리고 역사에서 칭한 바
"Kundur Nakhunte"로 비정되는 저격리사(底格里士) 하구 가에서 전공(戰功)을 세우니 이는 기원 전 2282년이다.
(주: 혹 기원전 24세기 전에서 27세기에 해당) 파극(巴克:Bak,밝) 민족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이동했는데, 토이기
사탄(土耳其斯坦:Turkestan)을 따라 카쉬가르(Kashgar:註 소륵(疏勒))를 거쳐 탑리목(타림) 해안변을 거쳐
곤륜산맥의 동방에 도달했다.
이들 무리의 추장이 중국고사에서 고증된 황제(黃帝)다. 사르곤(Sargon)은 민중이 문자를 알지 못하던 당시에 그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화염형태의 부호를 사용했다.(주: 이에 중국사는 신농이 화명관(火命官)으로써 화덕왕이라
했으므로 염제(炎帝)라 했다) 이는 곧 중국이 일컫는 신농이다. 단극(但克:Dunkit)은 근세 "Tsanghieh" 가륵저
(迦勒底) 말로 "당기(Dungi)"가 되며, 일찍이 아이다(亞爾多:칼데아)인은 코끼리, 새, 짐승의 발톱 형태의 기제
(其製)문자를 전했는데, 이가 곧 중국에서 소위 말하는 창힐이다.
파극(巴克:Bak,밝)은 본래 당시 도읍지 이름으로 붙인 것이었으나, 뒤에 서방 아세아의 한 민족이 스스로 부르는
칭호로 사용했다.(이 말은 오히려 서래설이 아니라 동이족의 동래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필자) 이 민족은 그 후
동방으로 이동해 갔는데 이들이 소위 중국에서 말하는 백성(百姓)이다. 쿤륜(곤륜)은 곧 화국(花國:꽃의 땅)으로
그 땅의 풍요로움은 후세의 자손들에게 이를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해주었다.
이들이 동방으로 가서 이를 스스로의 이름으로 삼으니 곧 소위 중화(中華)라 일컫는 중국이다. 이들이 서로 같은
점이 다음과 같다. 1년 12분법, 1년 24 소별(넵�)법, 1년 4계 법, 윤 월법, 5일 누적법(주:목화토금수), 12년 간지
순환법, 음양 2근원 분류, 80서죽(점치는 대), 12율 음악, 10간 12지 순환, 60년 일기(一紀), 구거(溝渠) 운하제방,
금속사용 제조,
말에 얹은 전쟁용 2두 거가(車駕),군주의 관상(冠裳)용 특별 문장(紋章), 농사지어 소맥을 거두는 것(주:파사만
(波斯灣:페르시아) 북쪽 및 동북에 자생하는 것이 중국에 이식됨), 우측 자리를 존경하는 것, 4해의 호칭명,
천문관을 4악(岳:주;가륵저(迦勒底) 4개주(州) 나라의 왕), 12목(牧), 6종(宗:주;소서안나(蘇西安那)의 6少神)으로
배치한 것, 군주에게 절반의 신의 관념이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문자의 언어도 서로 같으니 12월의 명칭부호
(주:이아, 사기에 칭한 것)등이 바로 이것이다. 파비륜(바빌론)의 설형문자는 한 번 변해 그림과 괘가 되었다.-
이 학설이 나온 후 한 때 세상을 풍미했다. 일본인 백하차랑(白河次郞), 국부종덕(國府種德)이 함께 공저한 1899
년의 「지나문명사」는 이 학설의 적장자로 이 책은 중국과 파비륜(바빌론)의 사이에 서로 같은 학술, 문자, 정치,
신앙, 전설 70가지를 열거하여 이를 증명해 보였다.
중국 측에는 상기(上記)의 장 지유씨가 있어 또한 본래의 학설을 서술했는데, 「중국인종고」의 결론 가운데 분명
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가령 중국종족은 파비륜(바빌론)으로부터 반드시 온 것이며, 마땅히 가륵저(迦勒底)의 아가적(阿加 ) 인종에
속할 뿐이지 색미적(塞米的) 종족이 아니다. 상고의 나라 안팎이 모두 외부와 막힘으로써 농업을 중시해 크게 안정
하면서 상고의 한(漢)족은 먼저 황하의 남쪽에 거주한 뒤에 황하의 북쪽에 거주하였다. 판천 전쟁으로 탁록은 모두
황제 및 치우의 정사가 되었다.-
옛날에 쓴 유사배(有師培)의 「사조국(조국을 생각함)편, 화하편, 국토원시론」 정렴(丁廉)의 「중국인종 종래고
(從來考), 목천자전 지리고증」 장태염(章太炎)의 「검론서종성(檢論序種姓)」, 황절(黃節)의 「종원(종의 기원)편」
등 모두가 이 설을 추종했다.
황절은 파극(巴克:Bak;밝)을 반고(盤古)의 전음(轉音)이라 말한다. 정렴 또한 반고가 최초로 이동해 온 지나족의
조상이라 말한다. 장태염은 「서종성」에서 가이특아(加爾特亞)는 대개 옛날에 갈천(葛天)이라 이르는 곳이라
말한다.
이 학설의 반대자인 불란서의 샤반느(E. Chavanne)는 언어학적 측면에서 웅(熊)황제설의 오류를 증명했다.
영국인 파이(波爾:C.j.Ball)는 중국과 파비륜(바빌론) 문자가 각자 독립적이라 말했다. 독일인 하덕(夏德:Hirth)의
「중국태고사」는 이 학설을 반대한다. 저자미상인 중국의「중국민족서래변(辯)」이라는 책은 이 학설의 불합리한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역공하고 있다.
"기원전 2천년 즈음, 마서(摩西:모세)가 이색열(以色列:이스라엘)족을 거느리고 애굽을 출발해 가남(加南:아랍)에
이르렀는데, 중간에 거의 40년 동안 많은 간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간신히 막 도착했다. 그들은 애굽에서 가남
(加南:아랍)에 도착한 이래 험한 땅이 없는 평지인 홍해의 물가 한 모퉁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으니 그 어려움이
이와 같다.
마서가 나 곤덕(那昆德)과 함께 한 시공이 서로 떨어져 있음이 지근에 속해 사정과 형편이 마땅히 큰 차이가
없으니, 나 곤덕이 능히 그 종족을 거느려 12만리의 땅을 날고 건너, 도중에 무수한 준령과 모래사막 및 특수한
풍속을 가진 이방종족을 겪었으니, 그같이 하여 어찌 그 몸이 중국에 이르렀겠는가?
아국(我國)의 백(百)자를 보아도 또한 별 다른 의미는 찾을 수 없으니, 생각건대 이를 바로잡아 말하려는 무리와
이를 바로잡아 말하려 하지 않는 자가 있다. 이를 바로잡아 말하려는 자는 마치 십, 백, 천이요, 이를 바로잡지
않으려는 무리는 기백, 기천의 종류니 그 실례는 더욱 많다.
지금 또한 멀리서 인용하는 것이 불필요하고 동서 가운데에서 인용하면 "윤리백공(允釐百工:무릇 모든 벼슬아치
를 다스림)이라 말하고, "백규시서(百揆時敍:백규는 백관의 장, 또는 백관, 줄이면 揆敍로 서훈의 차례를 정하는
것)"라 말하고, "백료사사, 백공유시(百僚師師,百工惟時:백료, 백공은 온갖 많은 관리, 사사는 많다는 뜻, 많은
벼슬아치가 오직 때를 기다림)"라 말하고, "백지유희(百志惟熙:모든 뜻이 기쁨을 생각함)"라 말하고, "백수솔무
(百獸率舞:백수가 복종해 춤추다)"라 말한 것 등, 그 큰 수를 모두 낱낱이 들은 것은, 마치 일체의 뜻을 말한 것과
같아 곧 이를 바로잡지 않으려는 무리에 속하니, 이 어찌 실 터럭만큼의 종족의 뜻이 그 가운데 있겠는가."
(중국민족 西來辯, 중국인종고 부록)
목봉림(繆鳳林)은 <薩뭐适렝?》�>을 포함해 상기 작품(중국인이 파비륜에서 비롯되었다는 장지유의 중국
인종고)과 동일한 작품 명으로 다시 저술하여 그 오류를 지적 배척했다. 목 씨는 이 학설에 5가지 오류가 있음을
말한다.
1) 지리의 험함과 장애,
2) 인종이 서로 같지 않아 파비륜(바빌론)인은 백인종이고 중국인은 황인종에 속한다.
3) 연대에 큰 차이가 있어, 중국인은 그 유래가 아주 오래되어 수 만년 이상이지만 파비륜은 외부에서 유입된
원시주민이 지금으로부터 거의 7,8 천 년이다.
4) 문물이 각기 다르니, 은허의 갑골, 8괘, 거문고와 비파(금슬) 등 모든 것이 파비륜(바빌론)에서 비롯한 것이
라는 증거가 없고 파비륜(바빌론)의 설형문자, 점토판 책, 사시(史詩), 건축, 미술, 일주일 제도 등 또한 중국
에는 없는 것이다.
5) 논증이 불확실하니 가령 설형문자를 팔괘라 하고, 파극(巴克:Bak,밝)을 백성 곧 불륜(不倫)에 비교하고, 살이공
(薩爾功)을 신농이라 하고, 오포(烏包)를 복희라 하고, 곽특내형태(廓特柰亨台)라 하니 그 오류의 황탄함이
실로 절륜하다.
지나민족의 기원에 대한 두 번째 학설은 애굽 설이다.
-이 학설이 제기 된 것이 가장 오래 되었기 때문에 지파 역시 다양하다. 이 학설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독일인
계차(契且:A. Kircher)인데 그는 1654년 자신의 저서를 통해 중국인이 애굽인의 분파라 주장했으며, 그 증거로
문자가 서로 같은 종류임을 내세웠다. 그를 계승한 학자는 프랑스인 여액(余厄:Huet)으로 중국을 애굽의 식민지라
하였다. 득기니(得幾尼:De Guignes) 역시 중국문화가 애굽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한다.
이 학설에 반대하는 자는 프랑스인 득파(得波:Corretius de pauw)로 애굽인은 자모를 가진 한 종류의 문자를
가지고 있어 중국문자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또 프랑스의 철학가 복이태(伏爾泰:Voltaire) 역시 중국인의 면모,
언어, 풍속, 습관이 애굽인과 한결같지 않음을 말한다. 오히려 영국의 위이금생(威爾金生:G. Wilkinson)은 애굽의
고분에서 중국의 도자기 병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중국인이 애굽에서 비롯된 것을 가히 증명했다고 운운한다.
그러나 일찍이 타인이 그 병의 계열이 근대의 산물임을 증명한 고로 그 설 또한 성립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인도 설과 인도 지나 설은 생략하고
세 번째 학설로 중앙 아시아 설이다.
-영국의 파이(波爾:Ball), 미국의 반백리(攀柏里:R. Pumpelly), 위렴사(威廉士:E.F. Williams)는 안락(安諾:Anau)
및 묵부(墨夫:Merv) 양쪽 땅의 상고시절 터가 드러난 것을 근거로 인류가 마땅히 중앙 아시아에서 발생했다고
추론하고, 그 뒤에 그 곳이 건조한 지대로 변한 이유로 그들이 동, 서 두 갈래로 나뉘어 옮겨 이동했는데, 그 한
갈래가 파비륜(바빌론)이며 다른 한 갈래가 중국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또 미국인 마수(馬壽:W.D. Mathew)
역시 중앙아시아 고원이 마땅히 인류 발상지가 된다고 말한다.
네 번째 학설은 신강(新疆:타클라마칸 사막 주위로 타림분지가 이 영역 안에 있다) 설이다.
- 독일인 이희곽분(李希 芬:Richthofen)은 중국인이 중국 토이기사탄(土耳其斯坦:Chinese Turkestan) 즉,
신강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이 학설과 관계된 문헌학적 근거는 「북사(北史)」에 기록된 우전(于,門안에
참 眞:신강성 화전(和,門안에 참 眞)현 경계)인의 기록 <모양이 호(胡)와 유사하지 않고, 화하와 매우 닮았다>
인데, 그 서쪽 사람은 혹 '눈이 깊고 코가 높으며' 혹 '눈이 푸르고 모발이 붉으니' 즉, 모두 백인종이다. 이로 인해
중국인은 곧 우전(于,門안에 참 眞)으로부터 동쪽으로 와서 이루어진 것이라 말한다.
다섯 번 째, 일인 조거용장(鳥居龍藏)이 주장한 감숙(甘肅) 기원 설로,
그는 상고시절 감숙(甘肅)에 상제를 존숭하고 조상과 종묘를 공경한 한 종족이 있어, 이들이 한(漢)족의 조상이
되어 후에 동쪽으로 옮겨가 원주민족과 동화되었다고 말한다.(이 감숙에 존재한 상제 존숭의 종족이 바로 광명족
환족을 말한 것이니 독자 여러분은 이들의 존재를 꼭 기억해 두는 것이 상고사의 핵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섯 번째는 토이기(土耳其) 설이다.
- 서전(瑞典)의 가라굴륜(珂羅屈倫:Karlgren)이 안특생(安特生:앙소촌 지질조사단을 이끈 Anderson)이 하남,
감숙 등지의 신석기 유적지를 발굴한 것을 근거로 일러 말하기를 『신석기 후기에 이르러 하남(河南)문화가 미친
곳이니, 이에 서방문화의 영향을 매우 세차게 받았다. 의존한 것이 오직 교통이니 마땅히 자연 편리한 큰길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거칠게 제작한 단색 도자기 토산품 외에 정미한 채도기술을 번갈아 수입, 제작했다.
앙소촌 채색도기가 감숙 보다 뒤늦은 이유는 실로 이에서 연유했기 때문이다.
이를 생각건대, 감숙에 거해 하남민족에게 정교한 도예기술을 준 자는 아마 중국민족의 강민(羌民)이 아니라 혹
토이기(土耳其)족의 한 종족이 된다. 대개 본인이 그들 등을 진정 중국민족이 되는 것을 인정하고자 바라나 진실
로 종족의 특징이 오히려 아주 미미할 정도로 적다.』(見 감숙考 古記) 그러나 유골을 증명한 보달생(步達生:D.
Black) 씨를 좇아 감숙성의 상고 인민 또한 원형(原形) 중국 파가 되므로 이 학설은 성립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곱 번째 신 서래설
- 최근 선사시대 유적지가 발굴된 것을 근거로 중국인종 문화의 서래설을 거듭 새롭게 증명했는데 단지 그 방법이
이전의 서래설과 다르니 별도로 성립한 한 파를 설명한다.
1)앙소촌-대만 민국 10년 지질조사소 안특생(安特生:C.G. Anderson), 사단사기(師丹斯基: O.Zdansky) 등이
하남 승지현 앙소촌 진왕채(秦王寨), 불소채(不召寨)를 발굴해 수많은 유물과 함께 고인류 주거촌락인 신석기 시대
유적지를 발굴하여 중화의 상고문화, 하남 석기시대의 채색도기 문화를 발표했다.
2)사과둔(沙鍋屯)-민국 10년 안특생 등이 요령 금서현 사과둔에서 신석기시대 동혈 유적지를 발굴해 수많은
유물과 함께 봉천 금서현 사과둔 동혈층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3)감숙-안특생이 다시 민국 12년에서 13년까지 감숙 귀덕현, 도하현, 영정현, 진번현, 청해 연안을 발굴했는데
6개 시기의 것이 발굴되었으며 전 3기는 신석기시대로부터 석동(石銅)기의 과도기 것이며 후 3기는 동(銅)기
시대의 것으로 나타났다.
안특생(安特生:C.G. Anderson)이 이를 근거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앙소 도기 중에 일부분은 서방문화와
관계가 있는 것이 있으며, 토이기사탄(土耳其斯坦:Chinese Turkestan)에 속하는 아라사(러시아)와 함께 서로
통했으며 혹은 멀리 유럽과도 서로 관련이 있다.
앙소층 중 발견된 것 중 제일 많은 것이 채색, 마광(摩光) 도기로 이는 바로 이들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비록 잔파되어 온전하지 않지만 대개 형태를 추측해 보기 어렵지 않다. 이 도기들은 체적이 크지 않고 형식도
간단해 주발형태의 작품이 많다.
도기에 사용된 흙의 질을 타 종류의 도기와 비교하면 가는 흙을 썼으며, 그릇의 바탕은 매우 얇고, 제작공정은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다면(多面), 마광(磨光)으로, 붉은 땅에 흑백 꽃무늬로 새겨 넣었다. 이와 유사한 도기는
구주(歐洲) 신석기 시대 혹 그 말기에 이 같은 것이 있었다.
가령, 의대리(意大利:이태리)의 서서리(西西利:시칠리) 섬, 북 희랍의 계룡니아(啓龍尼亞:Choeronia), 동구의
격뇌서아(格雷西亞:Glacia), 아라사(러시아) 서남부 구성(鳩城:Kiew) 부근 탈리파류(脫里波留:Tripolije)인데,
더욱 그 의미가 있는 것은 토이기사탄(土耳其斯坦:Chinese Turkestan)에 속하는 아라사에 있는 본백리(本伯利:Pumpelly), 아사가파(阿思嘉巴:Askabad) 부근 안락(安諾:Anau) 지방에서 발견된 도기로, 이들 각처의
도기는 한결같이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앙소 도기와 서로 비교하면 모두 서로 유사한 점이 있으니 그 중 안락(安諾:Anau) 도기는 가장 많이
닮았다. 무릇 꽃무늬 장식은 본래 반드시 독립창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피차 서로 예속된 연관성은 없다.
그러나 하남과 안락의 도기를 서로 비교하면, 그 도형이 서로 유사한 점이 이미 많고도 많아 마침내 본인으로
하여금 능히 한가지 근원에서 나왔다는 감상을 갖게 하니, 양 지방의 예술이 피차 서로 교류·전파되었으매,
처음의 뿌리는 가히 알 수 없다."(中華遠 古之文化)
본인이 이에 이를 고고학 상으로 증명하여 또한 이들 문채(무늬)를 입힌 도기를 이를진대 이들은 마땅히 서방에서
비롯한 것이지 동으로부터 간 것은 아니다. 대개 학 백삼( 伯森) 씨가 말한 것을 근거로 호로(浩魯) 씨가 이미
파비륜(巴比侖:바빌론)이 서기전 3500년에 존재하여 채색도기가 많이 있었음을 증명했거니와, 앙소 도기가 3대에
더불어 존재해 동(銅)제 정(鼎:귀있는 솥), 력( :귀없는 솥)이 서로 거의 유사하니 이는 이미 당시 도공이 바퀴로
된 연마기를 사용한 것이며, 이 모든 것은 족히 그 시대가 마땅히 중국과 더불어 역사를 지닌 시점이 서로 떨어져
있음이 멀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마땅히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4,5천년 전의 기간은 곧 멀리 파비륜(바빌론)이 있은 후이니 결과적으로
이에서 옮겨 전해 준 것에서 나온 것인즉 반드시 서로부터 동으로 전해준 것이다. 타일에, 도기 기술이 서방으로
부터 왔음을 가히 증명하니 기타문화, 종족의 ?� 또한 가히 이로부터 수입한 것이다.
홍도 도자기는 근동 석기시대 제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과 같이 흑색 무늬를 선명하게 띠고 있는데 이들은 한
종류로 동일한 것에 속한다. 파비륜에서 창시된 이 종류의 도기(陶器)업은 가위 유사하게 베껴져 후일 사방으로
옮겨 전파되었는데 중국의 극동지방에 도달한 시일은 거의 뒤에 해당된다.(중화원고지문화(中華遠古之文化))
안특생(安特生:C.G. Anderson)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민족 또는 중국민족 계열이 신강 혹은 그 부근에
거할 때 서방의 영향을 받아 개화했으며, 후일 동쪽으로 이동해 중원으로 들어왔음을 추론한다. 가이격림(加爾格林:Karlgren)은 안특생의 학설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씨가 한 말은 "지리환경상의 분석으로부터, 신강은 본인이 앙소 문제의 땅으로 최후로 결정한 곳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제시한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로부터 가히 한 종족인 몽고리아(蒙古利亞) 민족을 식별하게 되었는데,
이는 신석기 시대에 해당해 서방문화의 영향을 거듭해 받았고, 또한 서방 인종의 영향을 받았다. 사는 일(生息)이
번성해 넘치자, 점차 농업에 힘쓰게 되었으며, 문명이 이로 인해 크게 진보되어 중국역사상 문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종족 문화의 확실한 발원지는 신강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며, 더욱 상세한 연구를 첨가해 판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단, 하남으로 나아가 채집해 얻은 소득이 이 종족문화가 움직여 나아간 과정을 모두 밝힌 것인데,
실로 가히 중앙아시아로부터 남북 양 산 사이의 큰길을 경유하여, 동남으로 황하, 하곡(河谷)에 도달하고, 그럼
으로써 현대의 감숙 지방의 난주(蘭州)에 도착했다."
-여기서 잠깐, 안특생(앤더슨)은 상고시절 환국의 존재를 모르고 있으며 몽골의 정체는 물론 몽골의 뿌리 되는
환국의 정체와 동이 제 족에서 가지치고 나아간 지나족의 형성과정을 단지 도자기 문화와 관련한 고고학적 추론
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간의 교류는 도중에 수없이 주고받았을 것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결코 틀린 말은 아니며
반대로 결코 영양가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근자에 서양학자에 의한 아프리카 루시 인류기원설이 주장되고 있고 이러한 학설을 불변의 사실인 양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우리 역사를 재단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에 편승해 한국인의 DNA를 검사해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는 음양오행에 기반을 둔 동양의 우주천리와 우리민족의 대국적인 상고사의 핵을 모르는 철부지 지식인
들의 객담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은 논외로 하고 임 혜상의 관점으로 여과된 고고학의 동정과
서량지의 사관을 통해 한민족 상고사의 실체를 일반 대중이 파악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계속 진행한다.-
안씨의 주장에 의하면, 중국문명의 기초는 이 민족(몽골)이 신강에 거처를 정해 이미 건설이 완료된 시절에 해당
한다. 그리하여 이 문화의 주요 특성인 '옮겨 이동하는 것'으로 인해 중국으로 들어갔으니, 안 박사는 그 잠정적인
결론을 아래와 같이 종합 서술하고 있다. "(見 1924년 「Ymer」제 34항)
가지가지 사실이 그 유적지(감숙의 신석기 문화)와 같다. 정착농업이 보여주는 바, 문화층의 돼지 뼈나 조각 방법이
모두 앙소촌과 더불어 중국 의 역사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무릇 이들 모두는 이 문화(감숙 신석기 문화)의
주인옹(翁)이 중국 역사 이전의 민족이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종족의 문화는 대륙의 서북 지방에 특히 발달했으며, 또 서방문화의 표징이 섞여있으니, 지금까지 나 본인이
생각을 해 온 것을 근거로 다시 논점을 이어가면 즉 저들 중국인종은 마땅히 아시아 내부에서 제일 먼저 진화
되었는 바, 대략 중국의 한복판인 신강 혹, 그 부근 일대와 같다."(「甘肅考古記」)
이상의 유적지에서 얻은 인골을 해부학 전문가 보달생(步達生) 씨가 현대 화북 인골과 함께 비교 연구한 결과
그들이 동일한 한가지 일파임을 단정지었다. "그러므로 본인이 비교 연구한 결과, '사과둔, 앙소 거주민의 체질과
현대 화북 거주민의 체질이 한가지 파'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과둔 및 앙소 유해의 보고 중에는 대표적 인민의
체질인 저 두 짝의 골해(骨骸)가 현대 해당 거주민의 체질과 동일한 한 파에 속함을 증명했고, 앙소, 사과둔
거주민의 체질과 선사 감숙 거주민의 체질 또한 유사함을 결과적으로 증명했다. 이들 세 종의 체질이 현대
화북인과 똑같이 유사하니, 소위 아시아의 정실계파 인종이다" (봉천 사과둔 및 하남 앙소촌의 고대인골과 근대
화북인골의 비교)
마지막
여덟 번째가 지나족의 토착설이다.
-이 학설은 프랑스인 나소미(羅蘇彌:Reon Rossomy)가 1862년에 제일 먼저 주장했다. 영국인 낙사(洛斯:G.Ross)
는 저서 「중국민족의 기원」을 통해 이 학설을 찬성했다. 위렴(威廉) 씨 또한 "중화민족이 중국본부에서 발생
했다는 학설은 다수 저명 학자가 주장한 바"라 말하고, 영국인 나소(羅素)는 "중국문화 및 구주 이외는 완전 독립
발전자"라고 말한다. 위이사(韋爾斯)는 「세계사강」에서 또한 "중국문화는 자연발생적이어서 타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비록 오로지 문화만을 논한 것이지만 문화와 종족은 연대관계가 있는 것이므로
또한 근대 민족 토착 설이다.
안 특생(安特生) 씨는 요령, 하남이 감숙과 함께 문화가 서로 유사하다고 하여 그 유래를 서와 동으로 추론한다.
논자는 할 말이 있어 그 또한 동으로부터 서로 추론함도 가하다고 말한다. 또 보달생(步達生)은 위의 여러 곳의 고
인류와 지금의 주민들이 한가지 일파에 속한다고 확고히 단정한다. 그러므로 또한 토착설의 증명이 가하다.
김 조재(金兆梓)의 「중국인종 및 문화의 유래」를 곧 상세히 논하면 바로 토착설과 같다.
이에 위에 서술한 안 특생 등의 발견은 균일하게 신석기 후기 및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데, 이로 인해 더불어 역사
시대가 서로 근접한 고로 중국민족의 기원관계 비교가 밀접히 잘 맞게 된다. 이것 외에 오히려 하투(河套), 영하
(寧夏), 유림(楡林), 하북의 선화(宣化) 등지에서 발견된 구석기가 있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 감숙 이동으로부터
하북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구석기 시대 문화가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문화는 약 4-5만 년 전에 있었던 유럽의 구석기 중기 문화와 동일하다. 그 때의 인류 유골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세계 인류의 큰 구별은 그 연대가 약 2만 5천 년 전에 바야흐로 맹아단계로 시작하던 구석기 후기에
있었던 고가색(高加索:Caucasian Race) 종 및 니격라(尼格羅:Negroid Race) 종과 같다. 몽고리아 족 또한
대략 이 때에 존재했으며, 큰 종족 중의 갈래 지파는 자연히 이후에 새로 대를 이었다.중국인민의 주요 줄기인
화하(華夏)계는 몽고리아(蒙古利亞) 종 가운데의 한 갈래 지파에 불과하니, 그 기원은 멀리 구석기 시대까지
소급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구석기 시대, 중국 북부에 이미 인류가 존재한 바와 같이, 중국민족이 그냥 그렇게 자연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즉, 단연히 거처를 정한 이후의 화하계 인은 반드시 밖으로부터 유입해 들어간 것이지, 토착
구석기 인류가 퍼져 나아가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참고로 감북방(坎北方) 바이칼호의 인류화생의 우주원리로
부터 진장남(震長男)의 환국(桓國)시대를 거쳐 간소남(艮少男)의 반도유입과정 등의 우주원리 실현과정에서
천산에서의 환국 문명이 대륙을 휩쓸면서 세석기문화를 만들며 배달국 환웅시대로 진입하는 과정이 임혜상에게는
신서래설의 의혹을 더해주고 있음을 본다)
다음의 역사를 알기 전 잠시 문제제기 하나를 하고 넘어간다. 대륙상고사의 주역은 지나족이 아니고 바로 우리
동이겨레였다. 세석기문화의 주인공으로 흑도, 회도문화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한겨레 조상이었다.
지나족은 그 당시에 존재자체도 없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나족은 동이족에서 서이족으로 변해 다시 서하(西夏)족에서 화하(華夏)족을 거쳐 비로소
한(漢)나라 유방에 의해 한(漢)족으로 자리 매김된 혼혈족이다. 서하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채도문화이고
우리의 고려청자는 바로 송나라 경덕진의 채도문화권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를 보면 채도문화의 뿌리가 우리의 세석기 문화시대의 흑도, 회도문화에 줄을 대고 있고 송의
경덕진은 이름자체가 보여주고 있듯이 우리 동이 제 족인 묘요(苗 )계의 이름인 월(越) 나라 이름을 붙여 월도요
(越陶窯)이다. 마치 묘요계와 서이, 래이족이 비단을 만든 것은 모르고 문익점에 의해 지나의 목화를 수입해 온
것으로 잘못알고 있는 것처럼 역사를 잃어버리면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형편없이 구겨지게 되는 지 알고 읽어야
한다.
장개석이 이시영 임정 부통령에게 역사나 알고 독립운동하시게 하고 말 할 때 필자는 장개석의 눈이 중국역사의
뿌리인 상고사가 우리 동이족이었음을 확연히 알고 말하는 눈빛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륙을 일동일서한 동이
제 족의 눈부신 다음 활약을 한번 보라.
최근에 이르러 <북경 종의 중국원인(Sinanthropus Pekinensis)> 또는 간단히 칭해 <북경인(Peking-Man)>의
유골이 북경에서 다시 발굴되었는데, 그 형체가 지극히 원시적이고 연대가 지극히 멀고 먼 이유로 인해 후일
유입된 몽고리아(蒙古利亞) 종과의 관계를 판정함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화하(華夏)계의 기원을 도움 받아 추측하고자 하는 것이 다시금 불가능하므로 또한 생각하건대,
상술(上述)한 구석기 시대 인류와 함께 중국 거주민 또한 동시에 토착발생 가능성 역시 있음이 추론 가능하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이상의 제 학설 중 파비륜(바빌론) 설은 이미 학자들이 포기한 바 되었으며, 애굽 설은
황당함에 빠졌고, 인도 설은 종족의 편견에서 나온 것이며, 인도 지나 설은 스스로 포기한 학설이고, 중앙아시아
설은 범위가 광범해 두루 넓어 중국 민족만을 전적으로 논증해 주질 못하고, 신강 설은 확증이 없으며, 감숙 설
또한 이와 동일하고, 토이기(土耳其) 설은 실제 골격의 연구와 상반되며, 몽고 설 또한 확증을 얻지 못했다.
신(新) 서래 설은 중국 역사 이전의 문화특질을 명확히 지적한 바 마치 도자기 등과 같이 서방의 유사한 모양의
도자기와 함께 또한 그 근거가 없지 않다.
생각건대 가령 그와 같이 문화 및 인종이 반드시 서로부터 동으로 왔다고 말하면, (학술적으로) 매우 깊이 들어가
견강부회하는 괴이한 반대자의 공격이 없다. 그러나 제 학설 중에 신서래 설 주장 자는 이에 적절히 지하 재료를
마땅히 발굴함으로써 연구하면 이전의 이 학설과 비교해 방법상 진보가 심히 많을 것이며, 또 미미한 결론 또한
일부분 가용할 것 이 있을 것이다.
토착 설도 처음엔 또한 가히 근거가 되는 확증이 없었으며 최근에 북경인의 발굴 출현의 증가로 역량이 뒤떨어
지지 않는다. 장래 이 문제의 답안에 관해 대저 이 2가지 학설을 비교하여 역량이 있거나 혹은 2 가지 설을 절충해
새롭게 계승하면 희망이 있을 것이다.
북경인 두개골과 북경인이 살았던 북경 주구점 용골산 전경
이에 유럽의 역사 이전의 인류사로부터 조사해 마땅히 아국(중국)의 역사이전의 인류를 추론하니, 유럽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 중기인 약 5만 년 전에 안특타이인(安特他耳:(Neanderthal Man)인이 있었으며, 그 사람의 형상이
오히려 원시적인 모습이었으며 현대종족과는 무관하다.
구석기 후기 약 2만 5천 년 전에 이르면, 2종의 고 인류가 있어 한결같이 진인류(眞人類:Homo Sapiens)에 속하니,
하나의 이름은 극나맥낭(克羅麥囊:Cro-Magnon Race) 족이며, 또 하나의 이름은 격림마저(格林馬底:Grimaldi
Race) 종이다.
전문가의 연구에 의거하면, 전자의 한 종은 역사시대의 고가색(高加索:Caucasian Race) 종, 즉 백인종의 특징이
있어 닮았으니 곧 그 선조가 된다. 후자의 한 종은 니격라(尼格羅:Negroid Race) 종, 즉 흑인종의 특징이 있어,
또한 곧 그 선조가 된다. 다만 몽고리아(蒙古利亞) 종이 있어 곧 황인종(Mongolian Race)의 선조이니 발굴 출현이
채 안되어 확실치 않다.
약 1만 년 전의 신석기 시대에 이르면, 고인(古人)� 골격 즉 그 형상이 역사시대와 더불어 서로 동일하여 가히
종족의 갈래(分岐)가 이미 정해져 있음을 볼 수 있다.(「환단고기」의 상고사 내용과 딱 떨어지는 내용이다: 필자)
이로 말미암아 몽고리아(蒙古利亞) 종을 보면 사람의 선조가 흑백과 더불어 동시에 발생한 것과 같은 즉, 그 연대가
약 2만 5천 년 전에 있었다. 그 발생지방에 이르러 유럽(歐洲)에서는 볼 수 없고 아시아(亞洲)에서는 북경인의 발굴
출현이 있었다.
또 역사시대 몽고리아(蒙古利亞) 종은 아시아에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 선조의 발생이 마땅히 아시아에 있었던
듯 하다. 아시아(亞洲)에 어느 누가 살고 있었는가 하는데 이르면, 유사이래 아시아(亞洲) 서부는 곧 백인종 사람
들이 거주하는 장소가 되었다. 지중해 동안(東岸)으로부터 신강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들이 살고 있었는데, 유(愈)가
서부에서 살다가 온전하게 백인종이 되었다.
「북사(北史) 우전전(于 傳)」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고창(高昌) 이서(以西)로부터 여러 나라 사람들은 눈이
깊고 코가 높다(深目高鼻)"라 하였고, 안 사고(顔師古)는 한서(漢書) 주(注)에서 말하기를 "오손(烏孫)인은 눈이
푸르고 수염이 붉다"고 했으니 이 종족의 체질은 모두 백인종의 특징이 된다.
유사이래 이와 같이 유사이전 만약 지극히 큰 민족이 옮기는 것(遷徙)이 있지 않았다면 즉 몽고리아(蒙古利亞)
종의 근원은 반드시 신강 이동(印)에 있던 게 된다.
그런즉 몽고리아(蒙古利亞) 종 사람의 선조는 거의 신강 이동의 땅에서 발생한 것에 가깝다. 이제 몽고리아(蒙古
利亞) 종 사람이 2만 5천 년 전, 신강(新疆) 이동의 땅에서 발생하여 그 후 만 여 년을 경과하여 신석기 시대를
개시했다고(대략 세계 다른 곳의 사정과 형편을 비추어 말해) 재차 추측해 본다. 이 기간 동안 몽고리아(蒙古利亞)
종 사람은 이빨이 나고 날로 번성해 각지에 흩어져 퍼뜨려졌다.
이에서부터 환경 혹은 기타 조건이 한결같지 않아 점점 차이가 생겨나 최종적으로는 갈래로 나뉘어져 흉노(匈奴),
동호(東胡), 저강( 羌), 화하(華夏) 등 족과 같이 (각주)제 족이 되었다. 이 몽고리아(蒙古利亞) 종 선조의 발생지
가 신강 이동(印) 일대 땅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 연구하면 오히려 능히 명료하게 드러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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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대개 예로부터 각 지방에 나뉘어 살고 있는 모든 족속들의 분란쟁투는 각 지방신과 지운이 서로 통일되지
못한 까닭이니라. 그러므로 이제 각 지방신과 지운을 통일케 함이 인류화평의 원동력이 되느니라. 또 모든 족속
들은 각각 색다른 생활경험으로 인하여 유전된 특수한 사상으로 각기 문화를 지어내어 그 마주치는 기회에 이르
러서는 마침내 큰 시비를 이루나니 그러므로 각 족속의 문화의 모든 문화의 진액을 뽑아모아 후천문명의 기초를
정할지라.(<道典4:17>) 임혜상의 고고학적 견해가 이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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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제 갈래족의 기원지 및 옮겨 이동한 노선 또한 능히 명료히 드러나지 아니한다.이제 다시금 인류학
학파의 문화구역(Cultural Area) 법을 차용해 몽고리아(蒙古利亞) 종 선조의 발상지를 추론하면, 또한 곧 제 갈래
족이 줄줄이 찢겨 나온 중심지이다. 문화구역 법은, 문화의 전파가 만일 험조한 장애를 받지 않는다면, 그 주위
각 방향을 향한 발전은 반드시 평균으로 달린다고 말한다.
그래서 발생 기원지는 항상 중심점에 있다.(見 Wissler 「Man and culture」, 손본문(孫本文)「사회의 문화기초
(社會之文化基礎)」) 이는 비록 문화를 가리켜 말하고 있지만 문화는 인종과 더불어 연대관계가 있으며, 이 같은
점에서 또한 토론인종으로 차용 대입해도 같이 적용된다.
이제 먼저 신강으로 나아가 이를 논하면, 신강은 고창 이서로부터 모두 고가색종(高加索種:코카서스인)인이 되니,
우전(于 ), 구자(龜 :쿠챠)가 모두 이것이며 푸른 눈, 붉은 수염의 오손(烏孫)이 하나 하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강의 서방 변경에는 이미 몽고리아(蒙古利亞)종이 살고 있었으니 그 중심점이 아니다. 그 동방 변경에 이르게
되면 그 곳은 오히려 아시아(亞洲)의 극동이 아니라 아메리카(美洲) 토인으로 연결되니 이 또한 몽고리아(蒙古
利亞) 종의 갈래 지엽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에 그 동방 변경은 아메리카에 있다. 신강의 서부는 오히려 발전 여지가 있어서, 만일 몽고리아(蒙古
利亞) 종이 이에서 발상 되었다면, 어찌 동서로 함께 나아가지 않았겠는가. 이로 보면 한쪽 방향으로 동진 한
것이지, 서쪽을 향해 나아간 것은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볼진대, 몽고리아(蒙古利亞) 종의 발상지가 만일 특수한
사정과 형편이 없다면, 마땅히 신강에 살면서 아메리카(美洲)의 중간에 도착한 듯 하니 이는 곧 아시아(亞洲)의
동부다.
또 북경인 또한 곧 이 범위 내에서 발굴, 출현되니 고로 서로 유사성이 있어 가능하다. 이상에서 발굴범위가 두루
미치지 못하여 문화구역 법이 추측하는 말을 따라 전적으로 신뢰 확증할 만한 지하의 선사 재료를 구하려 해도,
지금은 선사 고고학 사업이 바야흐로 맹아단계에 있으므로 이 종족의 재료가 발견되는 것이 오히려 적다.
이 문제 해결은 오히려 반드시 시일을 바라는 것이므로, 추론 자는 능히 과거 일을 머릿속으로 명상해서는 안 된다.
생각건대 이 종족의 분기(分 :나누어진 갈래)는 환경으로 말미암아 영향받은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 초기에 어머니 땅(母地)으로 말미암아 가지를 쳐 나올 때를 생각하면 또한 차이가 심함이 없으니, 당초에 한
곳에 거주한지 이미 오래되어 바야흐로 점차 타 지, 타 족과 더불어 다른 가지로 발생해 갈래 족(支族)으로 성립
되었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이거(移居)함이 마땅히 갈래 족(支族)이 성립하는 것 보다 앞선다. 갈래 족의 성립은 마땅히
이동해 거주함이 있은 뒤에 있었다. 그러므로 몽고리아(蒙古利亞) 종의 발원지는 곧 능히 확정되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는 모(某) 갈래 족이 먼저 해당 땅에 살고 있음이 성립하는 것이니 그런 연후에 모(某)
처로 이거(移居)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