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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농부 비유
마가복음 12장 1-5절에서『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휘테오)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게오르고스)에게 세로 주고(에크디도미) 타국에 갔더니(아포데메오) 때가 이르매(토 카이로)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카르포스)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아티마조)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악한 농부의 이야기이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한 사람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보냈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죽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을 비방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으니,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축복이 넘어간다는 것이다
12장 12절에서는『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예수님의 비유의 초점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쫒고, 새로운 성전(부활)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냐 라고 질문한다. 예수님은 오히려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그들에게 하늘로 부터냐 사람으로 부터냐 라고 묻는다. 종교지도자들은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 침묵 속에는 세례요한이 주는 세례는 하늘로부터 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포도원 주인)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예수님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이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듣지 않고 선지자들을 죽인 것이다.
표면적인 비유를 통해서 이면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한 사람에 대해서, 마태복음에서는 집주인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포도원은 집이라는 개념이 된다. 집은 성전이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쫒았는데, 성전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구약에서 성전의 개념은 이스라엘로 표현되었지만,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전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즉 성도가 성전이 되는 것이다. 헬라어 휘테오는 심다라는 의미다. 성전(옛사람:돌성전)을 심령 속에 심은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농부들에게 세를 준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심령 속의 성전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다.
에크디도미는 빌려주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성전을 심어놓았는데, 아직 나의 것이 되지 않은 것이다. 심령 속의 성전은 세를 통해서 넘겨받은 포도원이다. 게오르고스는 농부로 표현되었지만, 땅을 경작하는 자이다. 심령 속의 밭을 경작하는 것이다. 굳었던 땅을 갈고 옥토를 가꾸는 것이 농부의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성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농부이나 땅을 갈지 않은 그런 상태라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유대인들이 다 그렇다는 것을 말해준다.
농부가 땅을 경작하는 이유는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주인으로 부터 임차를 받았으니, 농부가 주인에게 열매를 바쳐야 한다. 열매는 심령 속의 성전을 통해서 영생(그리스도)을 얻는 것이며, 그 영생이라는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열매를 드리는 것은 곧 자신을 드리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며, 이것이 영적 예배라는 말이다. 하나님도 농부이고, 세를 물려받은 성도 역시 농부라는 것이다. 농부는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타국에 갔더니(아포데메오)』아포데메오는 집밖으로 나가다, 외국을 나가다 라는 의미다. 집은 성전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심어져 있는데, 하나님이 성전 밖에 있는 것이다. 원래는 하나였는데, 하나가 아니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하나님이 그의 영을 흙에 가두어 분리되므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하나님이 밖에 계시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자들은 죄인이 되는 것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있음에도 장사하는 소굴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성전에 계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를 준 그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이런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을 주여 라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밖에 나가셨던 집주인이 때가 되면 찾아오신다. 포도원의 소출을 받으러 종을 보내시는 것이다. 토 카이로(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인간의 시간이 된다. 하나님이 심령 속으로 들어오면 성도가 카이로스(영생)가 되지만, 하나님이 밖에 있으면,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크로노스가 된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카르포스)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포도나무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예수님은『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이니』에서, 가지에서 열매(그리스도)를 맺어야만 하는 것이다. 영생의 열매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열매를 맺는 자가 안식에 있는 것이다. 십일조를 내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이신 그리스도로 열매를 맺으므로, 이제 십일조가 완성이 된 것이다. 십일조는 전체 중에서 십분의 일을 내고, 그것을 통해서 전체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전체가 다 완성이 된 이후에도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말은 열매(영생)의 의미를 모르는 자가 된다. 세를 받은 농부는 열매를 넘겨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성령)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성령의 열매가 있다면, 그 농부는 열매를 넘겨주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이사야 5장 1-3절에서『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이사야 5장 7절에서는『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이 말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 준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했음에도, 그들은 자기의 의에 도취해서 그리스도를 오히려 십자가에 죽게 했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를 보낼 것이다 라고 말을 했는데, 당시 유대지도자들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도 역시 부정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모든 심령 속에 한 선지자를 보내주는데, 사람들은 거부하는 것이다. 첫번째 종을 때리고 돌려보냈고, 다른 종도 때리고 능욕하고(아티마조) 돌려보냈다. 아티마조는 불명예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기 전에 종들을 보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상징한다. 이 종들(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최초의 이 약속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나타난다.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다. 유대지도자들은 선지자를 그리스도로 보지 못하므로 때리고 능욕하는 것이다.
세번째 종을 보냈더니,『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그런데, 누가복음 20장 12절에서는『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세번째 종에서, 삼(3)이하는 의미는 완전한 것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을 통해서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가 없으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깨닫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의 의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날마다 예수의 살과 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인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33-34절에서『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제사장 그룹,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괴롭혔으며, 결국 죽이기까지 했다. 이 말에서, 오늘날 교회 신도가 볼 때 분노스럽지만, 신도 역시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을 때는 의아스러울 것이다. 하나님은 심령 속에 성전(옛성전)을 세워 세를 주고 갔지만, 성경을 통해서 수없이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해도 그들을 오히려 전하는 자를 핍박하고 능욕하기까지 하며, 심지어 교회라는 건물에 모여서 날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지경에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12장 6절에서『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이 말과 누가복음 20장 13절에서『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티 포이에오)』개역개정에는 “어찌될까” 라고 번역되었지만, 헬라어로 보면 “어떻게 완성하지” 라는 것이다. 포이에오는 완성하다, 창조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내가 포도원을 심었는데, 즉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심었는데, 어떻게 이를 완성하지 라는 말이다. 어떻게 열매를 맺어서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게 해 줄까 라는 고민이 섞여 있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게 하기 위해서는 농부는 아들을 보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이 죽을 줄 알면서 보내는 것이다. “존대한다(엔트레포)”는 말은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드리는 것이 회개이다. 심령 속에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자가 회심하는 자요, 아들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존대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2장 7-9절에서,『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클레로노모스)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이라는 말씀이 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논의하고 분석해보니, 이 자를 죽이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받는 것이다 라고 스스로 결론내리는 것이다. 클레로노모스는 클레로스(제비뽑기)와 노모스(율법)의 합성어이다. 제비뽑기는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율법을 통해서 하늘의 상속자가 되고자 하는 의미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상속자가 될 수 없다.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성전 밖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의미한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에서, 와서(에르코마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승천한 후에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육적인 자아(악한 농부)가 진멸당하고 영적인 자아(다른 사람)가 살아나면 포도원(새성전)을 주는 것이다. 진멸당하는 것은 옛성전의 파괴이며,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옛사람(육적 자아)이 죽는 것이다.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진멸당하는 것이다. 심령 속에 옛성전(옛사람)이 무너지고, 새성전(새사람:부활)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전의 포도원(옛성전:옛사람)이 아니라 다른 포도원(새성전:세사람)을 넘겨주는 것이다.
포도원을 다른 사람(영적 자아)에게 주는 것은 오순절 성령이 임한 사건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육신이 죽고, 영의 몸을 입고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는 새성전(지성소)이 세워진다. 그리고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것이다, 육체 속의 영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이고, 열매맺는 일이 된다.
요한복음 16장 7-8절에서 보혜사는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악한 농부들의 죄를 드러나게 하고, 심판한다는 것이다. 육적 자아가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것이 죄이고, 그러나 하나님이 영적 자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의가 되며, 그래서 육적 자아(악한 농부)가 심판당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성도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죽어야 할 옛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이킬 때(진멸당할 때), 새사람으로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게 새로운 포도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