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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옹패설 후집 2(櫟翁稗說 後集二)
정 사간(鄭司諫) 지상(知常)의 다음과 같은 시(詩)가 있다.
비 갠 긴 둑에 풀빛 푸르른데 / 雨歇長堤草色多남포에서 그대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른다/ 送君南浦動悲歌대동강 푸른 물 언제 마를는지 / 大同江水何時盡해마다 이별의 눈물 푸른 물결에 보태네/ 別淚年年添作波
연남(燕南) 양재(梁載)가 일찍이 이 시를 등사할 적에 ‘해마다 이별의 눈물 푸른 물결을 불게 한다.[別淚年年漲綠波]’고 썼는데, 나는 생각건대 작(作) 자나 창(漲) 자는 모두 합당하지 않다. 이는 ‘푸른 물결에 보탠다.[添綠波]’고 하여야 한다.
[주-D001] 양재(梁載) : 본디 원(元) 나라 연남(燕南)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歸化), 충숙왕의 총신(寵臣)인 왕삼석(王三錫)에게 아부하여 횡포를 부렸으므로 당시에 미움을 받았으며, 뒤에는 조신경(曹莘卿)과 함께 인사권(人事權)을 잡고 정치를 농간하였던 간신이다.
또 정지상(鄭知常)의,
하늘과 땅이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니 / 地應碧落不多遠흰 구름과 사람이 서로 대하여 한가롭네 / 人與白雲相對閑뜬구름 흐르는 물 따라 객이 절에 이르니 / 浮雲流水客到寺붉은 잎 푸른 이끼 속에 중이 문을 닫누나 / 紅葉蒼苔僧閉門푸른 버들 아래 문 닫힌 엳아홉 집 / 綠楊閉戶八九屋달 밝은 누대에 기댄 서너 사람 / 明月倚樓三四人북두성에 닿을 듯한 삼각형 집 / 上磨星斗屋三角허공에 반쯤 솟은 누대 한 칸 / 半出虛空樓一間돌머리 늙은 소나무엔 조각달이 걸렸는데 / 石頭松老一片月먼 하늘 낮은 구름은 하 많은 산 덮었네 / 天末雲低千點山
한 이런 따위의 시구는 시인들이 즐겨 쓰는 운율(韻律)이다.
김 상서(金尙書) 신윤(莘尹) 가 의종(毅宗 고려 제18대 임금) 무인년(1170) 중구일(重九日)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도성에 풍진이 일어 / 輦下風塵起삼대 베듯 사람을 죽이누나 / 殺人如亂麻하지만 좋은 시절 저버릴 수 없어 / 良辰不可負막걸리에 국화꽃 띄워 마시네 / 白酒泛黃花
[주-D002]도성(都城)에 …… 죽이누나 : 고려 의종(毅宗) 24년에 있었던 정 중부(鄭仲夫)의 난을 가리킨 것이다. 의종이 문무(文武)에 차별을 두어 무신을 학대하였으므로 정중부 등이 보현원(普賢院)에서 난을 일으켜 문신을 죽이고 학대하였던 일을 말한다.
이 시를 보면, 당시의 일이 어쩔 수 없었음과 이 노인의 회포 또한 뇌락(磊落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 대축(吳大祝) 세재(世才) 이 의종(毅宗)의 미행을 풍자한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어찌하여 청명한 날에 / 胡乃日淸明검은 구름이 땅에 덮였는가 / 黑雲低地橫도성 사람들아 가까이 오지 말라 / 都人且莫近용이 이 속으로 지나간다오 / 龍向此中行
[주-D003] 검은 구름이 …… 덮였는가 : 임금이 미행한다는 뜻. 한 고조(漢高祖)가 대업(大業)을 이루기 전에 망탕산(芒碭山)에 숨어 있었는데, 그가 있는 곳에는 늘 검은 운기(雲氣)가 서려 있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또 남의 운(韻)에 따라 극암(戟巖)에 대하여 지은 시가 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도성 북쪽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 있는데 / 城北石攙攙나라 사람들은 극암이라 부르네 / 邦人號戟巖멀리 치솟음은 학을 탄 왕자 진(王子晉)을 치는 모습이요 / 逈摏乘鶴晉높이 솟아오름은 하늘에 오르는 무함(巫咸)을 찌르는 형상이네 / 高刺上天咸세워 놓은 창끝처럼 섬광이 번뜩거리고 / 揉柄電爲火닦아놓은 칼날처럼 흰 빛을 내 뿜네 / 洗鋒霜是鹽어떻게 이를 병기로 만들어 / 何當作兵器초를 없애고 범을 보존시킬 수 있겠는가 / 亡楚却存凡
[주-D004] 왕자 진(王子晉) :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太子)인데 피리를 잘 불었으며, 신선이 되어 갔다가 30여 년 만에 학을 타고 와 구씨산(緱氏山)에 내렸다한다.
[주-D005] 무함(巫咸) : 옛날 신무(神巫)인데 은 중종(殷中宗) 때에 하늘에서 내려왔다 한다. 《楚辭 離騷經 注》
[주-D006] 초(楚)를 …… 있겠는가 : 강한 자를 억제하고 약한 자를 돕는다는 뜻으로 씌었는데, 이 말은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상세히 보인다.
또 눈병에 대하여 지은 시가 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늙음과 병이 함께 겹쳤는데 / 老與病相期포의로 지내온 일생이로세 / 窮年一布衣눈은 흐릿하여 덮어 가린 것 같고 / 玄花多掩翳자석영(紫石英)으로 보아도 잘 보이지 않네 / 紫石少光輝등불 앞에서는 글자 읽기 두렵고 / 怯照燈前字눈 온 뒤 햇빛에는 눈이 부시네 / 羞看雪後暉금방을 보고 난 뒤에는 / 後看金牓罷눈감고 세상일 잊는 것 배우리 / 閉目學忘機
이 문순공(李文順公) 규보(奎報) 이,
“선생의 시는 한유(韓愈)ㆍ두보(杜甫) 의 시체(詩體)를 배웠다.”
하였으나 그의 시를 많이 볼 수 없다. 《김거사집(金居士集)》에 한 편이 실려 있는데 그 시는,
백 아름이나 되는 큰 재목이 쓰일 데 쓰이지 못하고 / 大百圍材無用用석 자나 되는 부리로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구나 / 長三尺喙不言言
하였는데, 역시 노련하고 기운차서 숭상할 만하다.
송(宋) 나라 때 상원일(上元日)에 궁내(宮內)에서 어시(御詩)를 발표하니 재상(宰相)ㆍ양제(兩制 한림학사(翰林學士)ㆍ지제고(知制誥))ㆍ삼관(三館)이 모두 응제(應製)하여 성대한 행사가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전아하고 아름다운 것은 왕기공(王岐公) 의 시였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봉황새 한 쌍 구름 사이에서 연 옆으로 내려오고 / 雙鳳雲間扶輦下자라 여섯 마리 바다 위로 신산(神山) 끌고 오네 / 六鰲海上駕山來
우리나라에도 등석문기장자(燈夕文機障子) 시가 있는데, 이 문순공의,
세 번 만세 부르니 신산이 솟아오르고 / 三呼萬歲神山湧천 년에 한 번 익는 천도 복숭아 나왔네 / 一熟千年海果來
한 시는 왕기공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두를 다툴 만하다.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 권일재(權一齋) 한공(漢功) 는,
남산이 은 술동이에 상서로운 술을 빚어내니 / 南山釀瑞生銀瓮북두가 자루를 돌려 옥 술잔에 따르네 / 北斗回杓酌玉杯여기저기 울리는 갈고 소리에 봄 기운 호탕한데 / 羯鼓百枝春浩蕩수많은 나무에 걸린 봉등은 낮게 뜬 달 모습이네 / 鳳燈千樹月作徊
하였고, 백 평리(白評理) 원항(元恒) 는,
밝은 달이 연회하는 곳을 환히 비추니 / 九霄月滿笙簫地봄 밤에 금수 강산이 열렸구나 / 一夜春開錦繡山
하였으나, 스스로 권한공의 시를 따르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였다.
동파(東坡)가 한간(韓幹)의 십사마도(十四馬圖)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주-D007] 한간(韓幹) : 당 현종(唐玄宗) 때 사람으로 인물화(人物畫)와 말의 그림을 잘 그렸다. 처음에는 조패(曹霸)를 사사(師事)하였으나 뒤에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어 독보적 존재가 되었으며, 옥화총(玉花驄)ㆍ조야백(照夜白) 등의 말 그림이 특히 유명하다. 《尙友錄》
한생의 말 그림 진짜 같고 / 韓生畫馬眞是馬소자의 시 솜씨 그림을 보는 것 같네 / 蘇子作詩如見畫세상에 백락이 없고 한생도 없으니 / 世無伯樂亦無韓이 시와 이 그림 뉘에게 보여야 하나 / 此詩此畫誰當看
[주-D008] 백락(伯樂) : 옛날 말의 상(相)을 잘 보던 사람으로 성(姓)은 손씨(孫氏)이고 이름은 양(陽)이다. 《韓昌黍集》 雜說 四에 “세상에 백락이 있은 뒤라야 천리마(千里馬)가 있다.” 하였다.
이 문순공이 노자도(鷺鶿圖)에 대하여 시를 지었는데, 말은 비록 같지 않으나 용의(用意)는 같았다. 시는 다음과 같다.
그림은 사람마다 가지기 어렵지만 / 畫難人人畜시는 곳곳에 전할 수 있다네 / 詩可處處布시를 볼 때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면 / 見詩如見畫그 그림 또한 만고에 전할 수 있으리 / 亦足傳萬古
홍 총랑(洪摠郞) 간(侃) 은 정 승선(鄭承宣) 이름은 습명(襲明), 의종(毅宗) 때 사람이다. 의 다음과 같은 시를 매우 좋아하였다.
온갖 꽃 속에 깨끗하고 고운 맵시 / 百花叢裏淡丰容갑자기 광풍 불어 붉은 빛 가셨네 / 忽被狂風減却紅달수로도 옥 같은 뺨 못 고치니 / 獺髓未能醫玉頰오릉공자의 한 끝이 없구나 / 五陵公子恨無窮
이 시가 아마도 오랫동안 음미할수록 여미(餘味)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주-D009] 달수(獺髓)로도 …… 못 고치니 : 아무리 좋은 약으로도 시든 꽃잎을 되살릴 수 없다는 뜻. 달수는 수달의 뼈 속에 든 기름으로 생채기를 낫게 하는 데 쓰이는 명약(名藥)이라 한다. 《拾遺記》
[주-D010] 오릉공자(五陵公子) : 오릉은 한(漢) 나라 다섯 황제(皇帝)의 무덤으로, 곧 장릉(長陵 고제(高帝))ㆍ안릉(安陵 혜제(惠帝))ㆍ양릉(陽陵 경제(景帝))ㆍ무릉(茂陵 무제(武帝))ㆍ평릉(平陵 소제(昭帝))인데, 이 무덤이 모두 장안(長安)에 있고 유협(遊俠) 소년들이 여기에 모여 놀았으므로 이들을 오릉공자라 불렀다.
근세(近世)에 풍주(豐州)에 명기(名妓)가 있었는데, 서경존문사(西京存問使)가 불러다 부(府) 의 기적(妓籍)에 올려 놓았더니, 기생이 자못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 학사(學士) 의(顗) 가 시(詩)를 지어 기생으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였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옛날 열다섯 꽃다운 시절에 / 憶昔正年三五時금비녀 두 귀밑에 검은 머리 드리웠던 때를 생각하면서 / 金釵兩鬢綠雲垂스스로 슬퍼하네 파리하게 여윈 얼굴로 / 自憐惟悴容華減막부(幕府)의 홍련이 되었음을 / 來作紅蓮幕裏兒
정 승선의 시에 비겨 그다지 못할 것이 없다.
장 장간(張章簡) 일(鎰) 의 다음과 같은 승평연자루(昇平燕子樓) 시가 있다.
연자루에 풍월만 쓸쓸하니 / 風月凄涼燕子樓낭관이 떠난 뒤 꿈결처럼 아득하네 / 郞官一去夢悠悠당시의 좌객들 늙는 것 혐의할 게 뭔가 / 當時座客何嫌老누대에서 춤추던 가인도 흰 머리 된 것을 / 樓上佳人亦白頭
곽 밀직(郭密直) 예(預) 이 수강궁(壽康宮)에서 새매 잃은 것에 대하여 지은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여름 겨울 보살펴 살지게 길렀는데 / 夏涼冬暖飼鮮肥어인 일로 날아가고 돌아오지 않는가 / 何事穿雲去不歸제비에겐 한 알의 곡식도 준 적 없건만 / 海燕不曾資一粒해마다 돌아와서 들보 옆을 난다네 / 年年還傍畫樑飛
이동안(李動安) 승휴(承休) 의 하운(夏雲)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한 조각이 문득 흙탕물 위에서 생겨 / 一片忽從泥上生동서 남북으로 종횡하다가 / 東西南北便從橫장마비 내려 메마른 식물(植物) 소생시키겠다고 / 謂成霖雨蘇群槁부질없이 해와 달의 밝은 빛 가렸네 / 空掩中天日月明
정 밀직(鄭密直) 윤의(允宜) 이 안렴사(按廉使)에게 준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새벽에 말을 달려 외로운 성으로 들어가니 / 凌晨走馬入孤城사람 없는 울타리 가에 살구 열매만 달렸네 / 籬落無人杏子成뻐꾸기는 나랏일 급한 줄 모르고 / 布穀不知王事急온종일 숲가에서 봄갈이 재촉하네 / 傍林終日勸春耕
이상의 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즐겨 애송하게 한다. 그러나 장간(章簡)의 시는 감분(感奮)하여 지은 시일 뿐 딴 뜻이 없으나 나머지 3편은 모두 풍유(諷諭)가 함축되어 있는데, 특히 정(鄭)ㆍ곽(郭)의 시는 미묘하고도 완곡(婉曲)하다.
홍평보(洪平甫) 간(侃) 가 시 한 편을 지어 내놓을 적마다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모두 즐겨 전하고 있는데, 《논어(論語)》에 ‘고장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더라도 옳은 것이 아니고 모두 미워하더라도 옳은 것이 아니니, 선(善)한 사람이 좋아하고 불선한 사람이 싫어하는 것만 못하다.’ 하지 않았던가. 시문(詩文)을 짓는 것도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시는 만고에 떠들썩하게 전할 수는 있으나 공감을 얻게 할 수는 없으며 온 좌중(座中)을 놀라게 할 수는 있으나 사람마다 적의(適誼)하게 할 수는 없다.
하였는데, 참으로 명언(名言)이다.
월암장로(月菴長老) 산립(山立) 는 시를 지을 적에 옛사람의 시어(詩語)를 점화(點化)한 것이 많았다.
[주-D011] 점화(點化) : 종래의 것을 새롭게 고친다는 뜻으로, 전(轉)하여 전인(前人)의 시문(詩文)의 격식을 본따 더 새로운 기축(機軸)을 열어 시문을 짓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남으로 수곡에 오니 곧 어머니가 그립고 / 南來水谷還思母북으로 송경에 이르니 다시 임금이 생각나네 / 北到松京更憶君일곱 역 두 강 길에 노새마저 작으니 / 七驛兩江驢子小문득 구름처럼 가볍지 않은 행장이 혐의스럽네 / 却嫌行李不如雲
이 시는 곧 형공(荊公)의,
어머니는 한구 가에 계시고 / 將母邗溝上자식들 백저 북쪽에 남겨 두었으니 / 留家白苧陰달 밝은 밤 두견새 울음 들으면 / 月明聞杜宇남북 양쪽이 모두 마음에 걸리네 / 南北兩關心
한 시를 본뜬 것이다. 또,
백악산 앞의 버드나무를 / 白岳山前柳안화사 안에 옮겨 심었더니 / 安和寺裏裁봄바람 할 일이 많은지 / 春風多事在한들한들 또 불어오네 / 裊裊又吹來
한 시가 있는데, 이는 곧 양거원(楊巨源) 의,
언덕 머리 버드나무 푸른 실처럼 드리웠는데 / 陌頭楊柳綠煙絲말 세우고 그대 시켜 한 가지 꺾었더니 / 立馬煩君折一枝봄바람 그를 아껴 차마 가지 못하는 듯 / 唯有春風最相惜다시 꺾인 꽃을 향해 은근히 불어오네 / 慇懃更向手中吹
한 시를 본뜬 것이다.
금(金) 나라 말엽의 시인(詩人) 양비경(楊飛卿)이 단풍숲을 두고 지은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바다 놀 숲 위에 서렸고 / 海霞不雨棲林表바람도 없는데 들불이 나무 끝에 올랐네 / 野燒無風到樹頭
이 문진공(李文眞公) 장용(藏用) 도 위와 같은 제목으로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폐원이 보일 듯 말 듯하니 가을 생각 괴롭고 / 廢院瞞盱秋思苦야산이 타는 듯하니 석양이 밝구나 / 淺山搪揬夕陽明
비경(飛卿)도 이 시에는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진공(文眞公)이 삼각산(三角山) 문수사(文殊寺)를 두고 지은 장편시(長篇詩) 가운데,
말이 뜸해지자 이지러진 달이 깊숙한 사립을 비추고 / 語闌缺月入深扉늦도록 앉았노라니 미풍이 높은 잣나무 가지를 울린다 / 坐久微風吟聳柏
하였는데, 산중의 아취(雅趣)를 깊이 터득하였다고 하겠다. 또 한 구는,
염불 소리 종 소리 속에 한 등이 붉구나 / 鐘梵聲中一燈赤
하였는데, 이는 나필(羅泌)이 찬(撰)한 《노사(路史)》에 실려 있는 ‘어떤 사람이 가화(家火 불씨)를 5세(世) 동안이나 꺼뜨리지 않고 전하여 왔는데 그 불빛이 핏빛처럼 붉었다.’는 일을 인용하여 장명등(長明燈)임을 말한 것이다.
박 문의(朴文懿 문의는 시호) 항(恒) 의,
밝은 낮 야산에 소나기 내리니 / 淺山白日能飛雨황사 깔린 옛 성에 무지개 섰네 / 古塞黃沙忽放虹
와 안 문성(安文成 문성은 시호) 향(珦) 의,
아침비에 싱그러운 푸른 들 위로 비둘기 한 마리 날고 / 一鳩曉雨草連野봄바람에 꽃이 만발한 성을 필마로 돌아드네 / 匹馬春風花滿城
와 김 밀직(金密直) 이(怡) 의,
한 조각 검은 구름 어느 산에 비 내리나 / 片雲黑處何山雨방초 푸른 시절에 온종일 바람이네 / 芳草靑時盡日風
는 모두 아름다운 글귀인데, 다만 전편(全篇)을 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산인(山人) 오생(悟生)의 황산강루(黃山江樓) 시의 낙구(落句 율시(律詩)의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구(句))에,
누워서 어부들이 뱃전에서 하는 말 들으니 / 臥聞漁父軸轤語티끌 일으키며 말 달리는 사람들 우리 무리 아니라 하네 / 走馬紅塵非我徒
하였으며, 동파(東坡)의 어부사(漁父詞)에는,
강 머리에 말 타고 선 벼슬아치 / 江頭騎馬是官人내 외로운 배 타고 남쪽 언덕으로 건너겠다네 / 借我孤舟南渡坡
하였는데, 동파의 시는 용민(龍眠 송(宋) 나라 이공린(李公麟)의 호)이, 이광(李廣)이 오랑캐의 활을 빼앗아 시위를 당긴 채 아직 쏘지 않고 있는 상태를 그린 것 같고, 오생의 시는 추격하여 오는 기병(騎兵)을 쏘아 맞힌 상태를 그린 것 같았다.
[주-D012] 이광(李廣) : 한(漢) 나라의 장군으로 문제(文帝) 때 흉노를 쳐서 공을 세웠고 무제(武帝) 때에는 북평 태수(北平太守)로 있었는데, 흉노가 비장군(飛將軍)이라 부르면서 두려워하였다. 뒤에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과 흉노를 치다가 길을 잃어 문책당하자 자살하였다. 《漢書 卷54》
탄지(坦之)는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시명(詩名)이 있더니, 출가(出家)하여서는 호를 취봉(鷲峯)이라 하였다. 그가 지은 낙이화(落梨花) 시에,
옥룡 백만이 구슬을 다툴 때 / 玉龍百萬爭珠日바다 밑 양후가 떨어진 비늘을 줍는 것 같네 / 海底陽侯拾敗鱗은근히 봄바람에 실어서 꽃 시장에 파니 / 暗向春風花市賣동군이 붉은 물감 뿌리기가 용이하구나 / 東君容易散紅塵
하였는데, 이른바 시골 서당의 냄새가 나는 시라 하겠다.
[주-D013] 옥룡(玉龍) …… 같네 : 배꽃이 눈처럼 흩날려 떨어진다는 뜻. 옥룡은 나뭇가지에 눈이 쌓인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용으로 인용하였으며, 양후(陽侯)는 물귀신의 이름이다.
[주-D014] 동군(東君) : 봄을 맡은 신(神)이다.
김 문정(金文貞 문정은 시호) 구(坵) 이 같은 제목으로 지은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춤추듯 나부끼며 날아갔다간 돌아오기도 하고 / 飛舞翩翩去却回바람이 치올려 불면 가지에 도로 올라 피려 하네 / 倒吹還欲上枝開무단히 한 조각 거미줄에 걸리니 / 無端一片黏絲網거미는 나비인 줄 알고 잡으러 나오네 / 時見蜘蛛捕蝶來
작가(作家)의 수법은 으레 각기 다른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강선생 일용(日用)과 좨주(祭酒) 임유정(林惟正)이 다함께 백가의체(百家衣體)에 능하다.”
하였으나, 강 선생의 시는 보지 못하였지만 임 좨주의 시는 문집(文集)이 간행(刊行)되어 있으므로 보았는데, 홍곡(鴻鵠)과 가계(家鷄)처럼 차이가 현격하다는 기롱을 면하기 어려웠다.
[주-D015] 백가의체(百家衣體) : 시체(詩體)의 하나로, 옛사람의 시구(詩句)를 모아서 시를 만드는 것이다.
근세에 최집균(崔集均)이 집구(集句)에 있어 일인자(一人者)인데, 비록 장편(長篇)이나 험운(險韻 글귀를 얽기 어려운 운자)이라 할지라도 붓을 달려 바로 완성하므로, 구경하는 자들이 놀라 나자빠질 정도였다. 그의 시에,
흰 철쭉꽃과 붉은 철쭉꽃이 섞여 있고 / 白躑躅交紅躑躅노란 장미꽃과 붉은 장미꽃이 마주 서 있네 / 黃薔薇對紫薔薇
투계장 안에서 닭싸움 구경하고 / 鬪鷄場裏看鬪鷄귀안정 앞에서 돌아가는 기러기 전송하네 / 歸雁亭前送歸雁
물빛이 푸르고 붉으니 무지개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 水色靑紅虹未斷구름 모양 검고 희니 비가 막 갰네 / 雲容黑白雨初收
약포의 달팽이 침은 잎에 흘러 젖어 있고 / 藥圃蝸涎施葉濕밤나무 숲의 매미 껍질 가지 안은 채 말라 있네 / 栗林蟬脫抱枝乾
한 이런 시는 대우(對偶)가 친절하여 가령 나 자신이 짓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보다 잘 짓지는 못할 것 같다.
임서하 춘(林西河椿)이 꾀꼬리 울음을 듣고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농가에 오디 익고 보리는 마르려 하는데 / 田家椹熟麥將稠푸른 숲에 꾀꼬리 소리 처음 듣겠네 / 綠樹初聞黃栗留낙양에서 꽃 아래 노닐던 사람 제 아는 듯이 / 似識洛陽花下客은근히 울어울어 그치지 않는구나 / 慇懃百囀未能休
최 문청공(崔文淸公 문청은 시호) 자(滋) 이 밤에 숙직(宿直)하다가 채진봉(採眞峯)에서 학(鶴)이 우는 소리를 듣고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구름 갠 높은 하늘에 달이 마냥 밝으니 / 雲掃長空月正明소나무 둥지에 자던 학 청아함 이기지 못하네 / 松巢宿鶴不勝淸온 산의 새와 짐승 마음 알아주는 것 적으니 / 滿山猿鳥知音少홀로 성긴 날개 퍼덕이며 밤중에 우는구나 / 獨刷疏翎半夜鳴
위의 두 시는 모두 불우(不遇)를 슬퍼하여 지은 것이다. 그러나 문청의 시는 기절(氣節)이 강개하여 임춘에게 견줄 바가 아니다.
진 정언(陳正言 정언은 직명) 화(澕) 의 버들을 읊은 시에,
봉성 서쪽 강둑에 휘늘어진 황금 물결 / 鳳城西畔萬條金봄 시름 한데 묶어 그늘을 만들었네 / 勾引春愁作暝陰한없이 맑은 바람 쉬지 않고 불어 / 無限光風吹不斷이는 운애(雲靄) 화한 빗속에 가을이 깊었네 / 惹煙和雨到秋深
하였는데, 정치(情致)가 유창(流暢)하고도 아름답다. 그러나 당(唐) 나라 이상은(李商隱)의 버들[柳] 시에,
일찍이 봄바람과 함께 춤자리를 쓸었고 / 曾共春風拂舞筵맑은 원림에 놀면서 이별하는 사람 보기도 했는데 / 樂遊晴苑斷腸天어쩌다가 즐겨 가을까지 왔는가 / 如何肯到淸秋節석양도 서러운데 매미 소리마저 처량하네 / 已帶斜陽更帶蟬
하였는데, 진 정언이 아마도 이 시를 모방하여 지은 것 같다. 산곡(山谷 송(宋) 나라 황정견(黃庭堅)의 호)의 시에,
남을 따라 계책을 세우면 끝내는 남에게 뒤지는 것 / 隨人作計終後人스스로 일가를 이루어야 핍진한 경지에 이르게 되네 / 自成一家乃逼眞
하였는데 참으로 미더운 말이다.
옛사람이 역사(歷史)에 대하여 읊은 작품이 많이 있는데, 그 작품이 이해하기 쉽고 싫증나기 쉬운 것이라면 그것은 역사적 사실만을 곧바로 서술하였을 뿐 새로운 뜻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다음과 같은 시들을 애송하는데, 두목(杜牧)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적벽시(赤壁詩)
부러져 모래에 박힌 창 아직 반은 삭지 않았는데 / 折戟沈沙半未鎖시험삼아 가져다 갈고 닦으니 전조의 것임을 알겠네 / 試將磨洗認前朝동풍이 주랑의 편리를 도와주지 않으니 / 東風不借周郞便동작대에 봄이 깊었는데도 이교가 꼼짝 않네 / 銅雀春深鎖二喬
[주-D016] 이교(二喬) : 대교(大喬)와 소교(小喬)로, 대교는 손책(孫策)의 아내이고 소교는 주유(周瑜)의 아내이다.
오강정시(烏江亭詩)
승패는 병가의 일 기약할 수 없는 것 / 勝敗兵家事未期수치를 참는 것이 바로 남아라네 / 包羞忍恥是男兒강동 젊은이들 재준이 많았으니 / 江東子弟多才俊세력 회복하여 다시 왔으면 승패 알 수 없었으리 / 捲土重來未可知
운몽택시(雲夢澤詩)
일기와 용패 아득히 나부끼는 듯 / 日旗龍旆想悠揚한 포승으로 초왕 결박하니 공이 높았는데 / 一索功高縛楚王곧바로 표연히 오호로 떠나가니 / 直使飄然五湖去시종일관 충성바친 곽분양만 못하네 / 未如終始郭汾陽
[주-D017] 한 포승으로 …… 떠나가니 : 초왕은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가리킨다. 범려(范蠡)가 힘을 다하여 구천(句踐)과 함께 회계산(會稽山)의 수치를 씻고, 표연히 강호(江湖)로 떠나갔다 한다. 《史記 卷129》
[주-D018] 곽분양(郭汾陽) : 분양은 곽자의(郭子儀)의 봉호(封號). 당 현종(唐玄宗) 때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로 안록산(安祿山)ㆍ사사명(史思明)의 난을 평정하였고, 회흘(回紇)과 손잡고 토번(吐蕃)을 정벌하였다.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고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하여졌다. 《唐書 卷137》
도화부인묘시(桃花夫人廟詩)
세요궁 속 이슬 머금은 도화꽃 / 細腰宮裏露桃新맥맥이 몇 봄을 말없이 보냈던가 / 脈脈無言度幾春마침내 식 나라 멸망함 무슨 일 때문이었나 / 畢竟息亡緣底事금곡원(金谷園) 누대에서 뛰어내린 여인이 가련쿠나 / 可憐金谷墮樓人
[주-D019] 도화부인(桃花夫人) : 식후(息侯)의 부인인 식위(息嬀)를 말한다. 식위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는데, 채 애후(蔡哀侯)의 충동에 의하여 초왕(楚王)이 식 나라를 멸망시키고 식위를 빼앗았다. 식위는 초왕과 살면서 도오(堵敖)와 성왕(成王)을 낳았으나 말을 않고 살므로 초왕이 그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여자로서 두 남편을 섬겼으니, 비록 죽지는 못하였을망정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左傳 莊公 14年》
[주-D020] 금곡원(金谷園) …… 가련쿠나 : 석숭(石崇)의 애첩 녹주(綠珠)가 식위(息嬀)보다 훌륭하다는 뜻. 석숭은 진(晉) 나라 사람으로 형주 자사(荊州刺史)를 지냈고 또한 큰 부자였는데, 애첩 녹주 때문에 잡혀가게 되자 금곡원에서 마지막 연회를 베풀고서 이 사실을 녹주에게 말하니 녹주는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누대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晉書 卷33》
당언겸(唐彦謙)의 중산(仲山)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천고의 외로운 무덤들 쑥대 덩굴에 덮였으니 / 千古孤墳寄薛蘿패군(沛郡)의 향리요 한 나라 산하이네 / 沛中鄕里漢山河장릉도 쓸쓸한 구릉 되었으니 / 長陵亦是閑丘壟이 날에 누가 중씨(仲氏)보다 훌륭한 줄 알겠는가 / 此日誰知與仲多
[주-D021] 중씨(仲氏) :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형을 말한다. 처음 고조가 가업(家業)을 돌보지 않자 고조의 아버지가 형만 못하다고 나무랐었는데, 뒤에 고조가 왕업(王業)을 이루고 미앙궁(未央宮)을 지은 뒤 아버지에게 술잔을 올리면서 “오늘 내가 이룬 업(業)이 형과 비겨 어떻습니까?” 하였는데, 여기서 인용한 말이다. 《史記 高祖本紀》
장안도(張安道)의 가풍대(歌風臺)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불우했던 유랑이 황제되어 돌아와 / 落魄劉郞作帝歸술잔 앞에 강개하게 대풍시를 읊었네 / 樽前慷慨大風詩한신 팽월 젓담고 소하 옥에 가두고도 / 韓彭菹醢蕭何縶다시 많은 맹사를 구하려 하였네 / 更欲多求猛士爲
[주-D022] 대풍시(大風詩) : 이는 한 고조가 천하를 통일하고 고향인 패군(沛郡)에 돌아가 크게 잔치를 베풀면서 읊은 시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큰바람이 일어남이여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나는도다. 위엄이 천하를 뒤흔듦이여 고향에 돌아왔도다. 어떻게 해야 용맹한 사람을 얻어 사방을 지킬 수 있을까" 《史記 高祖本紀》
[주-D023] 한신(韓信) : 이는 회음후(淮陰侯) 한신이 아니라 한 양왕(漢襄王)의 얼손(孼孫)으로 한(漢)에 귀의한 사람인데, 뒤에 흉노에게 항복하여 한 나라를 배반하였으므로 고조가 장군 시무(柴武)를 보내어 쳐죽였다. 《史記 卷93》
유 공부(劉貢父)의 새상(塞上)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예부터 변공은 무엇 때문에 있었던가 / 自古邊功緣底事폐행에게 후(侯) 봉해주기 위해서였네 / 多因嬖倖欲封侯차라리 그들에게 바로 황금인을 주고서 / 不如直與黃金印사막에 흩어진 해골들을 아낄 것을 / 惜取沙場萬觸髏
왕개보(王介甫 개보는 왕안석(王安石)의 자)의 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장량시(張良詩)
한 나라 왕업의 존망이 그의 생각에 달려 있었으나 / 漢業存亡俯仰中유후는 이런 때일수록 늘 침착하였네 / 留侯於此每從容고릉에서는 한신 팽월에게 땅 나눠줄 것 의논했고 / 固陵始議韓彭地복도에서는 옹치 봉해 줄 것을 도모하였네 / 複道方圖雍齒封
한신시(韓信詩)
빈천하면 모욕받고 부귀하면 교만한 법 / 貧賤侵陵富貴驕공명을 다시 못 세우면 천한 백성 될 것이라 / 功名無復在蒭蕘장군이 북면하매 군사들 오랑캐에 항복하였으니 / 將軍北面師降虜이런 일 인간 세상에 오래도록 없었다네 / 此事人間久寂寥
이는 선가(禪家)에서 이른바 활롱어(活弄語)라는 것이다. 이 은대(李銀臺)와 이 문순(李文順)도 영사시(詠史詩) 수십 편(篇)이 있는데, 요약하면 호증(胡曾)과 막상막하이다.
[주-D024] 호증(胡曾) : 당 나라 사람으로 글에 능하였다. 함통(咸通) 연간에는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의 서기(書記)로 있다가 뒤에 고병(高騈)에게 발탁되었는데, 모든 전주(箋奏)가 그의 손에 의하여 지어졌으며 저서로는 영사시(詠史詩)ㆍ《안정집(安定集)》 등이 있다. 《尙友錄 卷3》
후주(後周)가 쌍기(雙冀)를 사신으로 보내와 빙문(聘問)하였는데, 광종(光宗)이 표문(表文)을 올려 그를 머물게 하여 주기를 청하고 두터운 은총을 베풀었다. 최 중령(崔中令) 승로(承老) 이 소(疏)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비록 중화(中華) 의 풍교(風敎)를 사모하였으나 아직 중화의 영전(令典)을 얻지 못하였고, 비록 중화의 선비를 등용하였으나 아직 중화의 고재(高才)는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쌍기 때문에 말한 것 같다.
주저(周佇)와 호종단(胡宗旦)은 모두 민(閔) 땅 사람인데, 현종(顯宗) 때 북조(北朝 북송(北宋))와 왕복한 문서는 주저가 찬진(撰進)한 것이 많았다.
종단(宗旦)이 인종(仁宗)에게 올린 글이 있는데, 박흡(博洽)하기는 저(佇)만 못하지만 문체가 선명하여 절로 기뻐할 만하였고 또 총민(聰敏)한데다가 잡예(雜藝)에도 통달하였으므로, 누가 더 압도적으로 훌륭하다는 것을 지금까지 분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김 시중(金侍中) 인존(仁存) 이 지은 청연각기(淸讌閣記)가 송(宋) 나라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실려 있는데, 그 문사가 애연(藹然)하여 덕(德) 있는 자의 말이었다.
김 문열(金文烈 문열은 김부식(金富軾)의 시호)의 혜음원기(慧陰院記), 귀신사(歸信寺)ㆍ각화사(覺華寺)의 비문(碑文)과 최 문숙(崔文肅 문숙은 최유청(崔惟淸)의 시호)의 옥룡사(玉龍寺)의 비문은 모두 겉치레를 꾸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다.
김 밀직(金密直) 부철(富轍) 의 문수원기(文殊院記)와 김 장원(金壯元) 군유(君儒) 의 송광사비(松廣社碑)도 즐겨 읽을 만하나 문사(文辭)가 번거로운 것이 애석하다. 윤 정당(尹政堂) 언이(彦頤) 은 선학(禪學)에 밝았는데 그가 지은 운문사(雲門寺) 의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를 보면 그 이치에 깊은 조예(造詣)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 사간(鄭司諫) 지상(知常) 은 장자(莊子)와 노자(老子)의 학을 즐겨하였는데, 그가 지은 동산(東山) 진정선생(眞靜先生 진정은 곽여(郭輿)의 시호) 비문(碑文)을 보면 표연(飄然)한 산수(山水)의 경치를 상상하게 한다.
요인(遼人)이 압록강(鴨綠江) 너머로 경계(境界)를 정하려 하자,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이 진정표(陳情表)를 지어 올렸는데, 거기에,
“온 하늘 밑이 모두 왕토(王土)인데, 왕신(王臣 고려 임금)의 얼마 안 되는 땅을 하필 내 땅이니 내가 다스리겠다고 하십니까.” 하고, 또,
“폐읍(弊邑)을 무유(撫綏)시키기 위하여 문양(汶陽)의 옛 땅을 돌려주었고, 창신(昌辰)에 춤 출 적에 춤 잘못추는 장사왕(長沙王)을 위하여 봉토(封土)를 넓혀 주었습니다.”
하였는데, 요(遼) 황제(皇帝)가 이 표(表)를 보고서 그 의논(議論)을 중지시켰다.
[주-D025] 폐읍(弊邑)을 …… 돌려주었고 : 우리나라의 경계를 침범하지 말라는 뜻. 폐읍은 노(魯) 나라를 가리키는데, 제후(齊侯)가 노 나라의 북변(北邊)을 쳐 빼앗았던 문양(汶陽)을 되돌려준 일을 말한다. 《左傳 成公 2年》
[주-D026] 창신(昌辰)에 …… 주었습니다 :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인 장사정왕 발(長沙定王發)이 경제의 탄신일에 조하(朝賀)하러 왔을 적에 술잔을 올리고 춤을 추게 되었는데, 발은 옷소매만 길게 하였을 뿐 손을 움직이지 않으므로 그 이유를 물으니 “신의 봉국(封國)은 너무 협소하여 마음대로 선회(旋廻)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제(帝)가 무릉(武陵)ㆍ영릉(零陵)ㆍ계양(桂陽) 등지를 예속시켜 주었다. 《史記 五宗世家 卷59》
형공(荊公)이 일찍이 글 한 구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조수의 공도 없으니 / 功謝曹隨외시의 은혜에 부끄럽네 / 恩慙隗始
[주-D027] 조수(曹隨)의 공 : 전임자(前任者)의 법규를 그대로 준수하여 성사(成事)시키는 것. 한(漢) 나라 때 소하(蕭何)를 이어 조참(曹參)이 정승이 되었으나 조참은 소하가 세운 법규를 고치지 않고 준행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28] 외시(隗始)의 은혜 : 자신을 알아준 은혜. 전국 시대 연 소왕(燕昭王)이 현사(賢士) 맞아들이는 방법을 물으니, 곽외(郭隗)가 “변변찮은 저부터 등용하시면, 저보다 훌륭한 사람은 부르지 않아도 절로 올 것입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곽외(郭隗)의 고사(故事)에도 은(恩)자가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퇴지(退之 한유(韓愈) 의 자) 의 연구(聯句)에 ‘은혜 갚음이 외시(隗始)에 부끄럽다.[報恩慚隗始]’ 했다.” 하니, 묻던 사람이 감복하였다.
박공(朴公)이 ‘얼마 안 되는 땅을 하필 내 땅이니 내가 다스리겠다고 하십니까.’ 한 말도, 아마 따로 출처가 있을 것이라 했다.
‘유분(劉蕡)이 급제(及第)하지 못하였는데 우리가 급제하였다.[劉蕡不第我輩登科]’는 글에 대하여 ‘옹치(雍齒)도 후(侯)에 봉하여졌으니 우리들은 걱정할 것이 없다.[雍齒且侯吾屬無患]’는 글이 대구(對句)가 될 수 있고 ‘내가 보건대 위징(魏徵)이 매우 아름답다.[我見魏徵殊嫵媚]’는 글에 대하여 ‘사람들이 노기(盧杞)는 간사하다고 말하더라.[人言盧杞是姦邪]’는 글이 대구가 될 수 있다.
글이란 대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대구를 씀에 있어 그 내용이 부실(不實)하다면 어찌 숭상할 수 있겠는가.
임종비(林宗庇)가 학사(學士) 권적(權適)에게 준 글에,
배 타고 상국으로 가니 / 乘船歸上國북방의 학자들 그대 앞설 이 없네 / 北方學者莫之先비단옷 입고 고국에 돌아오니 / 衣錦還故鄕동도의 주인이 감탄하는구나 / 東都主人喟然嘆
하였는데, 최 문청(崔文淸 문청은 최자(崔滋)의 시호)이 ‘송(宋) 나라는 서쪽에 있는데 북방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원 세조(元世祖)가 아리발가(阿里孛哥)를 평정(平定)하자, 김 문정(金文貞 문정은 김구의 시호) 구(坵) 이 하표(賀表)를 짓기를,
“혁연(赫然)히 노하시어 이에 군려(軍旅)를 정돈하여,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 나라를 칠 때처럼 황월(黃鉞)과 백모(白旄)를 드날리셨으며 사랑이 위엄보다 성하시므로 진실로 수고로움을 잊으신 채, 진 소후(晉昭侯)가 소의 주박(素衣朱襮 옷깃을 보불로 수놓은 흰옷으로 제후의 옷)으로 곡옥(曲沃)을 치듯이 평정하였습니다.”
하였는데, 한림학사(翰林學士) 왕백일(王百一)이 그 문장의 공교(工巧)함을 여러 번 칭찬하였다.
세조가 이미 사해(四海)를 통일하고 나서 유아(儒雅)한 선비를 등용하였으므로, 헌장(憲章)과 문물(文物)이 모두 중화(中華)의 옛모습을 회복하였다. 김문정이 표(表)를 지을 적에 한 구(句)를 얻었는데 다음과 같다.
“천하를 어찌 마상(馬上 무력을 뜻한다)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다시 문명(文明)을 천양(闡揚)하소서.”
이 글의 대구(對句)를 세 번이나 고쳐 지었으나 끝내 마음에 맞지 않았었다. 내가 추후에 대를 맞추기를,
“강남(江南)을 주머니에 든 물건과 같이 얻었으니 바야흐로 통일할 시기가 이르렀도다. 천하를 어찌 마상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다시 문명을 천양하소서.”
하였는데, 이는 《통감(通鑑)》에 나오는 이곡(李穀)의 말이다.
당(唐) 나라 양사복(楊嗣僕)이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고향 집에서 그의 아버지 복야공(僕射公 양어릉(楊於陵))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때의 좌객(座客)이었던 양여사(楊汝士)가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천자 곁에서 문장으로 성가 빛낸 지 오래더니 / 文章舊價留鸞掖이정에 도리의 그늘이 새롭구나 / 桃李新陰在鯉庭
[주-D029] 이정(鯉庭)에 …… 새롭구나 : 훌륭한 문생(門生)이 많다는 뜻. 이정은 아버지가 아들을 훈계하는 장소를 가리키는데 공자(孔子)가 그의 아들 공리(孔鯉)를 훈계한 데서 온 말. 《論語 季氏》 여기서는 좌주(座主)를 가리키고, 도리(桃李)는 문생을 말한다.
오대(五代) 때에 마예손(馬裔孫)이 문생을 이끌고 와서 좌주(座主) 배고(裵皥)의 집에 가 뵈니, 배공(裵公)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세 번 시관(試官)을 맡았던 팔십 먹은 늙은이가 / 三主禮闈年八十문생의 문하에서 문생 남을 보는구나 / 門生門下見門生
[주-D030] 좌주(座主) : 급제자가 시관(試官)을 일컫는 말로, 평생 문생(門生)의 예를 다하였다. 은문(恩門).
우리나라에서는 시관(試官)이 된 자를 학사(學士)라 부르는데, 그 문생이 그를 은문(恩門)이라 부른다. 문생과 좌주 사이의 예(禮)가 옛날보다 더욱 중하여져서, 학사의 아버지나 좌주가 살아 있으면 방방(放榜)한 다음에는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가서 뵈는데, 문생이 줄지어 수행(隨行)한다. 당도하여 학사가 문으로 나아가 절을 하면 문생은 그의 뒤에서 절을 하는데, 많은 빈객 가운데 비록 존장(尊長)일지라도 모두 마루에서 내려와 뜰에 서며, 예(禮)가 끝나기를 기다려 읍양(揖讓)하고서 올라가 차례대로 배하(拜賀)한다. 그리고 나서 학사가 자기 집으로 맞이하여 잔을 올리고 오래 살기를 축수하는데, 이는 대개 양사복과 배고의 고사(故事)를 본받은 것이나, 예문(禮文)이 그보다 지나쳤다.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경신년(1320)에 내가 외람되게 고시관(考試官)이 되었을 적에 선군(先君)은 연세가 77이었고 대부인(大夫人)은 연세가 70으로 모두 강녕(康寧)하셨으며, 지금 국재(菊齋 권보(權溥)의 호) 정승 권공(政丞權公)은 내가 등과(登科)할 적에 지공거(知貢擧)였고, 동지공거(同知貢擧)는 열헌(悅軒 조간의 호) 조공(趙公) 이름은 간(簡)이다. 이었으며, 성균시(成均試) 때의 시관(試官)은 상헌(常軒 정선의 호) 정공(鄭公) 이름은 선(僐)이다. 이었는데 세 분 좌주(座主)도 모두 건강하였었다.
이에 두루 찾아 뵙고서 초청(招請)하였는데, 나는 또 국재공의 사위였으므로 변국대부인(卞國大夫人)의 견여(肩輿 교자(轎子))도 왕림하니, 사람들이 과거(科擧)가 있은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하였다. 윤저헌(尹樗軒 저헌은 윤혁의 호) 혁(奕) 이 축하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잔치 벌여 세 좌주와 함께 즐기니 / 一宴共歡三座主나란히 술잔 올려 어버이에게 축수하네 / 四觴齋壽兩家尊앞뒤로 길 물리고 선관 옹위하여 오고 / 讓前讓後蟬冠擁남쪽과 북쪽에서 봉개가 달려오네 / 迎北迎南鳳蓋奔
[주-D031] 선관(蟬冠) : 매미 날개로 꾸민 관(冠)으로 품질(品秩)이 높은 조관(朝官)을 말한다.
[주-D032] 봉개(鳳蓋) : 천개(天蓋)가 달린 수레로 고관(高官)을 가리킨다.
6년 뒤에 국재(菊齋)의 맏아들 정승(政丞) 길창군(吉昌君) 또한 지공거가 되었는데, 부모를 모시고 경축(慶祝)하는 자리에 형제와 생질(甥姪)과 사위들이 모두 고관 귀척(高官貴戚)이 되어 앞뒤에서 부옹(扶擁)하니, 광채가 길에까지 가득하였다. 윤공(尹公)이 또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성대한 일로 큰 거리 화려하게 꾸몄고 / 盛事粧成九街畫아름다운 이야기로 온 장안이 밤가는 줄 모르네 / 美談挑盡萬家燈사람 가운데 생불(生佛)이라 말하지 않는 이 없으니 / 無人不道人中佛늙은 정승을 말함인가 젊은 정승을 말함인가 / 老政丞耶小政丞
당시의 일을 잘 묘사하였다.
선군(先君)은 3형제분이었는데, 조모(祖母) 김씨(金氏)의 성품이 근엄하시어 몸소 서사(書史)를 가르치셨으며, 백부(伯父)와 계부(季父)는 불행히 일찍 돌아가시고 선군만이 연세 80에 이르렀는데, 자질(子姪)들을 교양(敎養)하여 세업(世業)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백부의 아들은 내서사인(內書舍人) 전(槫)인데, 성균시(成均試)와 대과(大科)에 모두 장원(壯元)하였으며, 그 아우는 덕원목사(德原牧使) 규(樛)이다.
계부의 아들은 지금 첨의평리(僉議評理)인 천(蒨)인데, 나의 가형(家兄) 이암공(怡庵公) 및 나와 함께 모두 성균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었으므로 민묵헌(閔黙軒 묵헌은 민지(閔漬)의 호)이 선군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꽃봉오리 세 집에 다섯 장원 났으니 / 華萼三家五榜魁사람들 모두 이백(李白)의 재주라 하네 / 人言皆是謫仙才참으로 공의 적선(積善)에 짝할 이 없음을 알겠도다 / 知公積善眞無敵해마다 그대만이 경축연을 여니 / 獨見年年慶席開
내서(內書)는 아들이 없고 덕원(德原)의 아들은 아직 급제(及第)하지 못하였으며, 오직 평리(評理)의 아들 달중(達中)ㆍ배중(培中)과 나의 둘째 아들 달존(達尊)만이 등과(登科)하였는데, 달존은 학문(學文)을 좋아하여 자못 시배(時輩)의 추허(推許)를 받았었으나 30세도 못 되어 죽었다. 늘 후사(後嗣)의 어려움을 생각할 적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다.
첫댓글 月光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린 올빼미인가봅니다. 늦은 시간까지 활동하시느라 바쁘십니다. 이제 자야겠습니다. 주무시죠. 내일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