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문 해외부에 한국일련정종의 실상에 대하여 몇 차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 한국불교일련정종연합회(동개신도회)의 입장을 밝힌 바도 있습니다.
이 글을 접하시는 분들께서는 “뭐 뚱딴지같이 옛날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어.”라고 하실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에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라고 있습니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통하여 새것을 안다는 뜻이지요.
한국일련정종학회로 출발한 동개신도회의 역사는 한국불교일련정종연합회/동개신도회/발자취를 참고하시기 바라며(http://cafe.daum.net/nskdg/YGYb/2 ), 1970년 당시의 한국광포의 실제 상황부터 하나하나 말씀드리고 이를 통하여 투도(偸盜)의 자들에게 대한민국의 광선유포를 맡길 수 없음을 밝히려 합니다.
저가 입신한 무렵인 1970년대 당시 한국일련정종의 상황부터 말씀드리지요.
그 당시 동대문본부를 중심으로 박성일(朴成日)씨 조직, 부산을 중심으로 임성규(林誠奎)씨의 조직, 전라도의 안남식(安南植)씨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 그리고 창가학회의 조직과 전 한국의 신자는 백오만 명이라고 정부는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조직 통합, 조직의 강력함을 주장하던 창가학회였습니다만, 우리나라만큼은 통합을 시킬 수 없었습니다. 겨우 1970년경에 창가학회의 대 간부가 한국에 들어와 전임 한국지도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만, 한국은 학회에 의한 조직 통합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조직을 통합시키지 못한 거대한 벽은 당시 한국에서 최대의 조직인 동대문본부(현 한국불교일련정종연합회, 동개신도회)였습니다.
박소암(朴素巖:초대본부장) 승려는 처음부터 창가학회 회원이 아니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656번지에서 가황사(嘉皇寺)라는 사찰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법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하여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민중을 구할 수 있는 불법(佛法)은 일련정종(日蓮正宗)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창가학회의 도움을 받은 일은 없으므로 창가학회의 산하에 들어간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타개해야만 하는데, 창가학회가 종문을 움직인 것이지요.
어느 날 갑자기 일련정종 종무원 총감의 명의로 한 장의 통달(通達)이 날라 왔습니다. 그것은 종이 반장 정도의 내용입니다만, 그 내용 중에「경성(京城:서울)의 동대문본부는 일련정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종단(宗團)이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동대문본부(현 한국불교일련정종연합회, 동개신도회)가 창가학회 조직에 들어가는 것을 아무리 거부해도 일련정종과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일련정종의 종무원에서 거부당하면 일련정종의 신심의 근본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한국에 있어서 제1차 대 혼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종문의 힘을 빌려서 동대문본부를 공중분해 시키려고 했지만, 동대문본부는 필사의 노력으로 살아남았고, 창가학회는 전 한국을 완전히 통합시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즈음 창가학회는 일련정종 종문의 교의를 창가학회에 맞게 마음대로 고치고, 창가학회는 일련정종의 신자로서 순수성이 없어지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종문에서도, 학회원 신자들 속에서도 생기기 시작하여, 학회를 탈회하여 사원의 신자로 신심하고 싶은 사람이 순식간에 백 명, 천 명, 만 명으로 증가되어지고, 이 신도들은 OO사 단도(檀徒)라고 하였는데, 이 신도들의 운동을 <정신 각성운동(正信覺醒運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때 한국에는 약 4만 명의 단도가 생겼는데, 이 단도를 위하여 종문에서 정식으로 <한국 지도원> 승려가 생기게 되었고, 총본산 제66세 닛다츠(日達)예하님에 의하여 세계에서 최초로 「한국 일련정종 법화강」이 탄생하였습니다.
드디어 한국에 올바른 일련정종의 신심의 뿌리를 내린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로부터 2년 후, 총본산 제66세 닛다츠(日達)상인의 급서로 제67세 닛켄(日顯)상인님이 예하님으로 등좌 하셨으며, 어법주 닛켄(日顯)상인님은 창가학회 수호라는 입장을 내세워 닛다츠(日達)상인이 세계에서 최초로 만든「한국 일련정종 법화강」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해산 직전에 놓이게 되었으며, 그 때가 두 번째 한국 신자의 대 혼란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한국 창가학회는 너무나 기세가 등등했습니다만, 제67세 어법주 닛켄(日顯)상인님은 그로부터 10년 후에 그 창가학회를 파문(破門)시켰습니다. 창가학회의 위압 속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신심하고 있었던 한국 신도의 대다수에게 또다시 새봄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이야기는 다음 ★3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