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안중근 토마스의 가계도[발자취따라.연재]
출생일 | 1879년 9월 2일 |
출생지 | 조선 황해도 해주부 |
사망일 | 1910년 3월 26일 (30세) |
사망지 | 일본 제국 만저우 지방 관동주 펑톈 성 료준 |
본관 | 순흥(順興) |
종교 | 유교(성리학) → 천주교(세례명: 토마스) → 신자 자격 박탈(종부성사는 받음) |
정당 | 무소속 |
부모 | 안태훈(부), 배천 조씨 부인(모) |
배우자 | 김아려 |
자녀 | 안문생(장남), 안준생(차남) |
친척 | 안정근(아우) 안공근(아우) 안명근(사촌 남동생) 안경근(사촌 남동생) 안우생(친조카) 안미생(친조카딸) 김인(친조카사위) 안진생(친조카) 안봉생(5촌 조카) 안춘생(5촌 조카) 김구(사돈) 안창호(친족척) |
복무 | 대한의군 |
복무 기간 | 1907년 ~ 1909년 |
최종 계급 | 대한의군 참모중장 |
근무 | 의병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아령지구사령관 |
지휘 |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사령관 |
서훈 내역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기타 이력 | 한학 수학 이후 천주교에 귀의 |
조카 안춘생
할아버지 : 안인수(安仁壽), 진해 현감 역임
아버지 : 안태훈(安泰勳), 성균진사
어머니 : 조마리아(趙性女 마리아) (1862~1927) 독립운동가, 2008년 8월 조마리아 여
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여동생 : 안성녀 누시아(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남동생 : 안정근(安定根),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조카 : 안진생, 미얀마 대사 역임
남동생 : 안공근(安恭根), 독립운동가, 1939년 사망 추정.
조카 : 안우생(安偶生), 묘는 북조선의 애국열사릉에 있다.
부인 : 김아려(金亞麗)
장남 : 안문생(安文生, 일명 안분도), 연해주로 피신하였다가 7살 때 누군가가 준 과자
를 먹고 독살당함.
차남 : 안준생(安俊生, 1907년 ~ 1951년 11월), 폐결핵으로 사망. 혜화동 천주교 공원
묘지에 안장.[40]
자부 : 정옥녀
손자 : 안웅호(雄浩), 의학박사, 안중근의 유일한 손자다.[41]
증손자 : 토니안(안도영)[42]
손녀 : 안연호(1938년 ~ 2011년 2월6일)
손녀 : 안선호( ~ 2003년)
장녀: 안현생(1902 - 1959), 1953년 4월 ~ 1956년 3월 효성여자대학교 (현 대구가톨
릭대학교) 불문학 교수로 재직함. 그녀의 남편은 한교민단(韓僑民團) 단장으로서
활동했었다고 한다. 안중근 순국 100주기가 되는 2010년 3월 26일, 그녀가 쓴
수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사위 : 황일청
외손녀 : 황은주, 황은실
사촌 : 안명근(安明根1879년 ~ 1927년) 독립운동가
사촌 : 안홍근,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44]
사촌 : 안봉근(安奉根)[45]
종질 : 안춘생(安椿生, 1912년 8월 12일 ~ 2011년 1월 26일), 독립운동가, 한국 광복
군, 대한민국 육군 중장, 초대 육사 교장, 국회의원 역임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진해 현감 안인수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태훈 일가의 활동지를 답사한 베네딕토 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와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을 당시에 안인수는 4백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재산을 많이 축적하여 그는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뒤에 일본은 안인수가 "항상 미곡 매입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각종 간악한 수단을 부려 재물을 모아 거부를 이루었다"거나, 안인수는 "성품이 탐욕하고 배부름을 모르고 일상 간계를 써서 타인의 재산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으므로 당시인들이 안억핍(安億乏)이라고 다르게 불렀다"고 말한 반면, 안중근은 "조부가 자산가로서 도내에 이름이 높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안중근의 가계는 그의 5대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소 불확실하다. 순흥 안씨 족보에 의하면 17대조 안려(安廬)는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으로서 건원릉 참봉을 지냈다. 14대조 안효신은 어린 나이에 문단에서 명성을 날릴 정도로 문장에 능했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황해남도 해주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했다. 이로써 안효신은 순흥 안씨 참판공파의 해주 입향시조가 되었다. 이후 안중근의 선조들은 안중근의 14대조 안숙관과 13대조 안류가 통정대부(정3품)의 품계를 받았을 뿐이며, 안중근의 안기옥(安起玉)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불확실한 내용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1845년에 순흥안씨 족보소가 간행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중근의 17대조 안려에게 진사, 후사없음(進士無后)이라고 되어 있으나, 1864년 안최량(安最良)이 편찬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려에 대해 후사가 나와 있지 않고, 진사라고만 되어 있다.
이에 반해 1910년대 이후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장조카로 강진현령을 지낸 안효충(安孝忠)의 둘째 동생인 안순복(安順福)이 안려의 양자로 들어가서 안효신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안중근의 15대조이자 해주입향시조인 안효신의 존재는 1918년에 신문관에서 간행된 순흥안씨족보와 1936년 간행된 순흥안씨 족보 이후부터 나타나고 있다.
또한 1800년대 중반과 후반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형인 안의(安毅)의 후손으로 안효충만 나와 있다. 그런데 1910년대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의의 후손으로 안효충 외에도 안현복, 안순복, 안경복, 안창복, 안성복, 안준복 등이 새로이 나오고 있다. 이로 미루어 해주에 정착한 순흥안씨 참판공파 인사들의 낙향 직전의 세계와 해주 입향 이후부터 한말까지의 신분 문제는 불명확한 사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전후에 안중근의 전기와 비문을 집필한 이들은 안중근 가문의 신분을 한결같이 향리로 보고 있다. 김택영과 이건승은 안중근 의거 이후에 지은 간략한 전기에서 각각 "그 선조는 본래 순흥 사람으로 해주에 살면서 대대로 주리를 지냈다.
안태훈 대에 이르러 글을 읽어 진사가 되었다"거나 "그의 선조는 순흥인데 중도에 해주로 이사하여 주리를 지냈다"고 하였다. 또한 심산 김창숙은 1961년에 지은 '안중근의사 숭모비문'에서 "그 선조의 세가는 서한의 해주에서 주리가 되었는데, 부친 안태훈의 대에 이르러 독서하여 국자생이 되었다."고 하였다.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의 대에 이르러 무과에 급제, 관직 진출을 꾀하였다. 이는 향리직을 장기간 세습하면서 사회경제적 능력을 갖추어 나간 이서층이 과거를 통해 양반층으로 편입되려는 신분상승운동을 벌였음을 의미한다.
안기옥은 안영풍(安永豊), 안지풍(安知豊, 안중근의 고조부), 안유풍(安有豊), 안순풍(安順豊)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도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처럼 향리 가문의 4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한 것은 가문의 위상을 높인 쾌거였다.
또한 안지풍의 장남 안정록(安定錄, 안중근의 증조부), 안유풍의 아들 안두형(安斗亨), 안유풍의 손자 안인환(安仁煥), 안순풍의 아들 안신형(安信亨) 등이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고 안유풍의 손자 안인권(安仁權)이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다.
안인필(安仁弼)은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의 정6품 군직인 사과가 되었고, 안정록의 아들이자 안중근의 할아버지인 안인수는 통훈대부와 진해현감을 지냈다. 기록에는 안인수의 아들 안태건(安泰健)은 고종(高宗) 28년(1891) 신묘(辛卯)년에 24세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으로 등과됨을 알리고 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