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대하고 호호탕탕한 불교(廣大하고 浩浩蕩蕩한 佛敎)?
불교는 너무 광대하고 호호탕탕(浩浩蕩蕩)해서 갓을 잡을 수 없으며
또 세상을 등지고 산간에서 수도하는 것을 보면 일종의 염세철학이요
허무적멸지도라고 생각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연 불교는 광대무량합니다.
너무 호탕한 까닭에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하겠지요.
일찌기 공자께서도「서방에 유 대성인자하니 불치이불란(不治而不亂)하고
불언이자신(不言而自信)하며 불화이자화(不和而自和)하여 탕탕호 민무능명언이라」하셨으니
그 뜻은 서방에 큰 성인이 있으니 다스리지 않아도
어지럽지 않고 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믿으며 교화하지 않아도 스스로 행하게 되니
너무 호탕하여 백성이 능히 이름 지을 수 없다하였고,
노자께서도「건축에 유 고황선생(乾竺에 有 古皇先生)하니 오지사야라(吾之師也라) 불생불멸(不生不滅)하여 선입무
위(善入無爲)하고 면면약존(綿綿若存)하며 선입니원(善入泥洹)하여 반호무명(返乎無名)이라 오금승취(吾今昇就)하
여 역반일원(亦返一源)하노라」하셨으니 그 뜻은 ‘인도의 싣달타 태자는 나의 스승이라, 낳지고 않고 멸하지도 않으
며 무위, 곧 함이 없는 곳에 들어가나 있는 것 같으며 열반에 들어 이름 없는 곳에 돌아오는지라 내가 이제 이를 섭취
하여 또한 한 근원에 돌아 왔노라‘는 것이니 공자의 대지(大智)와 노자의 철안(哲眼)으로도 불타(佛陀)의 진리가 얼마
만큼 심원광대하다는 것을 증명하신 말씀입니다.
‘공생대각중이 여해일구발(空生大覺中이 如海一*發)’이라,
허공이 불타의 대각 가운데서 생하는 것이 바다에 한 물거품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하셨고
대포무외(大包無外)하고 세입미진(細入微塵)이라.
크다면 허공을 싸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고 작다면 미진 속에 들어가서도 시방불찰을 본다고 하셨으니
크다면 이상 더 큰 것이 없고 작다면 이상 더 작은 것이 없는 것이 불법입니다.
생물학자「푸라뉴스」가 현미경 아래서 벌 한 마리를 해부해 보고 말하기를
「가장 작은 데서 가장 큰 이치를 발견했노라」하고 경탄하였다고 하니
그는 불교에서 말하는 대소불이라는 불이법문의 진리를 설파해 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법은 우리가 보는 바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한 까닭에
대소광협이 끊어졌으니 실상은 커도 큰 것이 아니요 적어도 적은 것이 아니라
결국은 큰 것도 없고 적은 것도 없다는 것이 불법입니다.
불법은 시간을 초월한 까닭에 장단이 없고 공간을 초월한 까닭에 대소가 없으니
대소장단(大小長短)을 보게 되는 것은
결국 우리 범인들의 사량분별(思量分別)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걸음 나아가서 불생일념(不生一念)이라 본무일념(本無一念)이라는
실상의 본체를 알기 위하여 아공(我空).법공(法空). 구공을 지나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계에 도달하는 도중에는
과연 천인절벽을 우러러 보는 현애지상도 아니 낼 수 없으며
망망한 창해를 바라보는 망양지탄도 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시호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는 소리가 자연히 입에서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흡사 무변대해에 일엽편주를 띄운 자와 같아서 어느 쪽으로 가야만 무사히 피안에
도착하게 될지 방향을 잘 알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 깊이 생각할 것은 바다가 큰 것을 허물할 것이 아니라
배가 적은 것을 걱정할 것이며 방향을 모르는 것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내게 나침반이 없는 것을 한탄해야 됩니다.
배를 만일에 사오만 톤쯤 되는 철갑선을 가졌다고 하면 태평양. 대서양 같은
큰 바다라도 용이하게 건널 수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정확한 나침반만 가졌다고 하면 어찌 방향을 모르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고인이 수도에 삼난 곧 세 가지 어려움을 말하였는데
첫째 대기난이요
둘째 택사난이요
셋째 조기난이라고 하였습니다.
대가난이란 말은 큰 그릇을 가지기가 어렵다는 말이니 큰 국량 다시 말하면
마음의 그릇 심기(心器)가 커야 한다는 말입니다.
큰 배를 가져야 큰 바다를 용이하게 건너갈 수 있는 것과 같이
심량의 법기가 크면 클수록 무상대도(無上大道)를 받아 가지기가 용이할 것입니다.
마조대사가 방거사에게 ‘일구흡진서강수(一口吸盡西江水) 하라‘
한입으로 서강의 물을 들이마시면 내가 네게 도를 일러 주겠다는 말씀도
결국은 사량복탁을 초월하여 건곤을 탄토하는,
즉 하늘과 땅을 들어 삼켰다 내뱉는 대법기를 가지지 않고는 아무리 큰 도를 일러 주어도
받아 가질 수 없다는 이치를 암시하신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걸음 나아가 바다만큼 큰 배를 가졌다고 하면 구태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려고
애를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걸음 더 나아가 ‘유형지대자는 바다요(有形之大者는 海也)
무형지대자는 허공(無形之大者는 虛空)이나,
유형무형을 초월하여 최대한 자는 심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어떠한 사람이 있어서 유형한 바다보다도 무형한 허공보다도 더 큰 심량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따로 도를 배울 것도 없으며 도를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허공과 같이 청허한 그의 심기는 곧 불타의 심성 그대로 다름이 없이 된 것이니
따로 마음을 닦고 도를 배우며 부처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옛날 석옥화상께서 태고화상에게 묻기를 ‘공겁(공간과 시간을 말함) 이전에 태고가 있었던가 없었더가’ 하고
물으시매
태고화상이 대답하시기를 ‘공생태고중이라’, 허공이 태고 가운데서 나왔다고 하매 석옥화상이 웃으시며
말씀하시되 불법이 동으로 갔다 하시고 법을 인가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걸림이 없는 광대무량한 석옥. 태고 두 화상의 청정한 심월(心月)은
결국 한 거울 속에 비치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불도의 고원광대함을 허물하지 말고 자기의 심기가 협소한 것을 한탄할 것이니
그러므로 대기난이라 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택사난이라는 말은 수도하는 데 사(邪)와 정(正)을 분간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반드시 정사(正師) 곧 바른 스승을 선택해야 된다는 것이니
흡사 정확한 나침반을 가져야만 정당한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조기난이라는 말은 수도를 일찍이 시작해야 된다는 말이니
파거불행(破車不行)이요 노인불수(老人不修)라는 말씀과 같이 심신이 노쇠해지면 혼미하여
정진하기가 곤란한 까닭에 조기에 시작해야만 조속히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입산수도하는 목적은 더러운 세상을 등지고 염세도피하자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자기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한적한 수도장을 선택한 것이 자연히 탐욕이 많은 자는 청렴하게 되고
진심(嗔心)이 많은 자는 유순하게 되며 우치(愚癡)가 많은 자는 지혜(智慧)를 얻게 되고
비겁한 자는 대담하게 되며 공포심이 많은 자는 무외력을 얻게 되나니,
어시호 대의를 위하여는 생명이 초개와 같으며 황금(黃金)이 토석(土石)과 같이 보이고
부귀(富貴)가 부운(浮雲)과 같이 생각이 되나니 이른바 출세대장부의 기백을 얻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소아를 버리고 대아의 경계에 도달한 자라야 비로소 국가의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민족의 사표도 될 수 있고 따라서 난세의 양상과 명장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무리 호탕광대하고 허무적멸지도라 할지라도
조기에 시작하고 바른 스승을 만나서 광대한 심량을 가지고 수도에 정진한다고 하면
성공 못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정즉허(靜卽虛)하고 허즉명(虛卽明)이라’는 말과 같이 허무적멸한 가운데서
진공묘유의 명안과 영지를 얻게 된 것이요, 염세비관한 나머지에 비로소 구세 도생하는 자비와 원력을
길러내게 되는 것이 불교수양의 최고 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현공 윤주일대법사 설법자료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