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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주이씨 상서공파 대종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종아
신라 6촌의 한 도읍이었던 진지촌의 내력을 기록하는 ‘외동에 관한 책’에 신라 6성에 대한 기사가 혹시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경주이씨’ 씨족을 대표하여 유래와 역사를 정리해서 게재합니다. 종친들께서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 경주이씨 시조의 73대손 이 용 우 -
전설속의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始祖)
우리나라 대다수 이씨(李氏)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지고 있는 경주이씨는 신라 창건 당시의 6부(部) 촌장이자 화백회의의 의장이었던 알천양산촌장 이알평(李謁平 ; 경주이씨가 아닌 향우님들의 편의를 위해 경칭을 생략한다. 이하 다른 이도 같다)을 시조로 하는데, 시조의 36세손인 신라 9주(州) 수장(首長) 중의 한 사람이었던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있다.
경주이씨는 시조 이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무려 1천여 년 간의 계대가 확인되지 못하는 우여곡절이 있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1367년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시조의 원대손(遠代孫)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世系)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이때부터 소판공(蘇判公)이 중조(中祖) 곧 기세조(起世祖)로 확정되기에 이르렀고, 조선말기에 이르러 시조 이후 중시조까지의 실전(失傳) 세계(世系)를 찾아내어 전체의 계대가 규명되었다.
참고로 현재 우리나라 이(李)씨의 본관은 237본이나 되는데, 대체로 한국계와 중국계, 그리고 기타계열로 나뉜다. 한국계는 모두 신라 6성의 하나인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자세한 것은 뒤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신라 6성이란 『삼국사기(三國史記) 1권』 ‘신라본기(新羅本紀)’에서 기록하고 있는 신라 유리왕이 재임 9년(서기32년)에 당시의 6촌장에게 사성(賜姓)한 성씨들을 말한다.
양산촌장 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 고허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崔氏), 대수촌장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 진지촌장 지백호(智白虎)에게는 정씨(鄭氏), 가리촌장 기타(祈陀)에게는 배씨(裵氏), 고야촌장 호진(虎珍)에게는 설씨(薛氏)를 하사한 것 등이 그것이다.
중국계로는 연안이씨(延安李氏), 고성이씨(固城李氏), 안성이씨(安城李氏) 등과 같이 시조가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들이다. 기타계로는 안남국(월남)에서 망명해온 화산이씨(花山李氏), 김해허씨(金海許氏)에서 분적한 인천이씨(仁川李氏) 등이 있다.
삼국지나 삼국유사와 동경지 등에 의하면, 경주이씨 시조(始祖)인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은 지금으로부터 약 2,182년 전(2008년 현재)인 기원전 117년 한무제(漢武帝) 원수 6년 갑자년(甲子年)에 하늘로부터 진한(辰韓) 땅 표암봉(瓢巖峰 ; 지금의 경주시 동천동 산16번지)의 ‘밝바위’에 하강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경주시 동천동 표암재(경주이씨 시조 알평공의 탄강지 - 경주시 동천동 산16)
하늘에서 하강한 시조는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이 된 뒤 아찬(阿飡)에 올라 군무(軍務)를 장악했으며, 서기 32년(유리왕9) 왕으로부터 이씨(李氏)라는 성을 사성(賜姓)받았다. 이후 536년에는 법흥왕으로부터 문선공(文宣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고, 656년에는 무열왕으로부터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追封)되었으며, 후세에 '월성(月城 : 신라조의 서울)'이라는 지명을 붙여 '월성이씨(月城李氏)'라고 하다가 '월성'이 '경주'라는 이름으로 바뀌자 언젠가부터 경주이씨(慶州李氏)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시조께서는 양산촌장(陽山村長)으로서 부족들을 다스리며 혁거세(赫居世)를 양육시켰고, 그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신라 왕조를 창건하였으며, 6부 촌장의 대표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和白會議)제도를 창설하고, 그 의장(議長)을 맡음으로써 오늘날의 우리나라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하는데 선구자적(先驅者的)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현재 경주시 동천동 산16번지 표암재(瓢巖齋)에는 경주이씨의 시조 이알평의 경모비(景募碑)가 건립되어 있다. 1979년 11월 11일 경주이씨 중앙화수회(花樹會) 총재였던 고 이병철(李秉喆)씨의 성금으로 건립한 이 경모비에는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 지은 비문이 조각되어 있다(비문의 내용은 너무 길어 생략한다).
경주이씨 시조 이알평공의 영정
경주이씨 선현들의 행적과 부침(浮沈)의 역사를 시대별로 정리해 본다. 중시조의 관작이었던 소판(蘇判)은 신라의 성골(聖骨)이나 진골(眞骨) 귀족들만이 오를 수 있는 지방수령직으로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공도 소판(蘇判) 출신이었다. 신라는 9개의 주(州)로 나누어 지방을 다스렸는데 그 수장들의 관직이 소판이다. 당시의 9주는 명주(溟州), 양주(良州), 삭주(朔州), 한주(漢州), 상주(尙州), 강주(康州), 웅주(熊州), 무주(武州), 전주(全州) 등이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시조가 신라를 창건한 개국공신이었고, 중시조의 관직이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소판(蘇判)'의 벼슬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조이후 중시조 때까지도 대대로 왕족 다음가는 지위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시조(始祖)이후 8대파 분파(分派) 때까지의 공동선조 및 관직(官職)은 다음 표와 같다. 그런데 아래에 열거한 시조 이후 중시조까지의 관직(官職)은 표에서와 같이 신라조의 관직이라기보다는 거의가 고려조의 관직이다. 따라서 일부 후손들이 찾았다는 시조 이후 28대 또는 35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는 그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는 처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는 끝에서 소개한다.
경주이씨 시조(始祖)이후 8대파 분파(分派) 때까지의 공동선조 및 관직(官職)
대수 |
휘(諱) |
역임 관직 |
관직 해설 |
시조 |
알평(謁平) |
알천양산촌장(급량부장) 화백회의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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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유(侑) |
증좌내사좌군주 (贈左內史左軍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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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타(它) |
농령도위령(農令都尉令) 좌우내시중태사 (左右內侍中太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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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중가(仲嘉) |
부령상서사(副令尙書事) 대보정국공신(大輔靖國功臣) 좌령(左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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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석(奭) |
좌보상등공신(左輔上等功臣) 각간좌령(角干佐令) 승대골천우돈대아찬 (承大骨千牛惇大阿湌) |
대아찬(大阿湌)은 신라시대의 17등 관계(官階) 중의 제5등으로서 진골귀족 계급 |
6 |
문상(文祥) |
대보상등(大輔上等) 정국공신(靖國功臣) 좌령승(左令承) 진골대아찬(眞骨大阿湌) 증좌내사시중태위령상서사 (贈左內史侍中太尉令尙書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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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방(昉) |
태보상당공신(太輔上等功臣) 섭률도위령(攝律都尉領) 어사도부(御史都夫) 내사시중령(內史侍中令) 태사령(太史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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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수장(秀章) |
도위령(都尉領) 상서사(尙書事) 좌우내사농령(左右內史農令) 통정사(通政事) 시중태사대부(侍中太師大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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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수(綏) |
상등공신(上等功臣) 좌우령(左右令) 천우두아찬(天牛頭阿湌) |
아찬(阿湌)은 신라의 관등. 신라 17등 관계 중 제6등 관계 |
10 |
기정(起貞) |
상등대보공신(上等大輔功臣)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천우두아찬(天牛頭阿湌) 상주국(上柱國) 증시충선공(贈諡忠宣公) |
상주국(上柱國)은 국가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고려시대의 명예직, 정2품에 해당 |
11 |
미선(美善) |
참지정사(參知政事) 대광보국상등정국공신 (大匡輔國上等定國功臣) 좌우승(左右丞) 아찬(阿湌) |
참지정사(參知政事)는 중서문하성의 종2품 관직 |
12 |
성립(成立) |
진위좌내사(進爲左內史) 통정사(通政事) 대각간(大角干) 천우돈대보(千牛惇大輔) 상등대아찬(上等大阿湌) 찬현상사(贊賢相事) |
대각간(大角干)은 특수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최대의 예우로 내린 진골 관작(官爵) |
13 |
서(曙) |
누천아간대보상등농승령 (累遷阿干大輔上等農承領) 충참정사당대아찬 (忠叅政事當大阿湌) 상주국(上柱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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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계훤(啓烜) |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상등공신각간아찬상주국 (上等功臣角干阿湌上柱國) 재명상사(載明相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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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걸(傑) |
박사령대보정국공신 (博士令大輔定國功臣) 복령참예통정사 (復令參預通政事) 태위광록대부(太尉光祿大夫) 태사령(太史令) |
광록대부(光祿大夫)는 고려시대의 종3품으로 전체 29등급 가운데 제5계 |
16 |
선장(宣璋) |
칠성현령(七城縣令) 태상시박사시랑 (太常寺博士侍郞) 상등(上等) 좌정사당태위종승 (左政事當太尉宗丞) 증광록대부태사령 (贈光祿大夫太史令) |
박사(博士)는 교육을 맡아보던 관직 |
17 |
기첨(基瞻) |
박사(博士) 사대농승령(寺大農承令) 참예정사대등(參預政仕大等) 좌총재태위대아찬 (坐冢宰太尉大阿湌) 상주국(上柱國) |
대등(大等)은 신라시대의 진골(眞骨)관직으로 뒤에 상대등(上大等)·전대등(典大等)·사대등(仕大等) 등의 관직으로 변천 |
18 |
인흥(仁興) |
태위령(太尉令) 상서총재(尙書冢宰) 통정사(通政事) 태사태전(太師太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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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확(擴) |
정당문학(政堂文學) 좌내사(左內史) 평장사(平章事) 도위(都尉) 시중박사령(侍中博士令) 어사대부(御史大夫) 대농령(大農令) |
정당문학(政堂文學)은 종2품, 평장사(平章事)는 중서문하성에 속해 있던 정2품 관직 |
20 |
선정(善禎) |
병부령(兵部令) 내사문하평장사 (內史門下平章事) 대보공신(大輔功臣) 태사태보(太史太輔) 태중대부(太中大夫) 상주국(上柱國) |
병부령(兵部令)은 지금의 국방장관에 해당 |
21 |
체(棣) |
문하중서사인(門下中書舍人) 상서령(尙書令) 대보공신(大輔功臣) 상주국(上柱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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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태휘(泰暉) |
누천중서사인(累遷中書舍人) 예부시랑(禮部侍郞) 중서시랑(中書侍郞) 평장사(平章事) 간의대부(諫議大夫) 중서령(中書令) |
간의대부(諫議大夫)는 문하부(門下府)에 속하였던 4품의 관직, 중서령(中書令)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장관으로 종1품 |
23 |
우영(又榮) |
협률도위(協律都尉) 위두치공신(衛杜致功臣) 내사문하평장사 (內史門下平章事) 수태위(守太尉) 상서좌복야대보아찬 (上書左僕射大輔阿湌) 상주국(上柱國) 증태사광록대부대위 (贈太師光祿大夫大尉) |
상서좌복야(上書左僕射)는 상서성(尙書省) 관직으로 우복야(右僕射)와 함께 정2품 의 관직 |
24 |
준(駿) |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시중평장사 (門下侍中平章事) 내사시중(內史侍中) |
정당문학(政堂文學)은 종2품, 시중(侍中)은 종1품으로 중서문하성의 최고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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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紹) |
내사시랑(內史侍郞) 대각간(大角干) 문하평장사상서좌복야(門下平章事尙書左僕射) 수태위시중(守太尉侍中) 대아찬(大阿湌) 태전광록대부(太傳光祿大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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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敬智) |
좌명공신정광(佐命功臣正匡) 문하시랑평장사 (門下侍郞平章事) 대농도위령(大農都尉令) 상서사(尙書事) 사종통정사시중 (司從通政事侍中) 상주국(上柱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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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속해 있던 정2품 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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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頊) |
협모보리좌명공신 (協謨輔理佐命功臣) 수태위문하시랑 (守太尉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 (同中書門下平章事), 대각간도위령(大角干都尉令) 상서사시중판어사대 (尙書事侍中判御史臺) 상주국(上柱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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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元長) |
진양도독부도총관 (晋陽都督府都 官) 정해군(正海軍) 누천좌내어태위랑중령) 내사시랑문하평장사 (內史侍郞門下平章事), 상주국(上柱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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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한로(漢老) |
태사태보협률도위 (太史太輔協律都尉) 대농박사(大農博士) 영문하평장사내사시중 (令門下平章事內事侍中) 상주국(上柱國)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는 종1품 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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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탕(季湯) |
춘방한림학사(春榜翰林學士) 내사중서사인(內史中書舍人) 시중문하평장사 (侍中門下平章事)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 태사은청광록대부 (太史銀靑光祿大夫) |
문하시중(門下侍中)은 문하성 최고의 관리로 종1품(조선시대의 영의정과 동일) |
31 |
도(祹) |
한림원태학사(翰林院太學士) 승선관(承宣官)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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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언(嗣彦) |
중서사인(中書舍人) 진한림원학사(眞翰林院學士) 배좌간의대부(拜左諫議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 태사령(太史令)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복령참예정사(復令參預政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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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岐) |
한림학사(翰林學士) 중서시랑(中書侍郞) 간의대부(諫議大夫) 내사문하평장사 (內史門下平章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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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두(禧斗) |
흥중제진두(興中第辰斗) 한림학사(翰林學士) 중서상사(中書尙史)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 증금자광록대부 (贈金紫光祿大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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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 의하면 이분의 종손자(從孫子 ; 翰)가 전주이씨의 시조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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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誡) |
한림원태학사(翰林院太學士) 중서간의대부(中書諫議大夫) 평장사(平章事) 내사상서령(內史尙書令) 도위복령참예정사 (都尉復令參預政事) 사은자광록대부시중령 (賜銀紫光祿大夫侍中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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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명(居明) |
신라진골(新羅眞骨) 소판(蘇判) |
소판(蘇判)은 현재의 시․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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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현(金現) |
병부령(兵部令) |
병부령(兵部令)은 현재의 국방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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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金書) |
중원태수(中原太守) 호부낭중(戶部郎中) |
태수(太守)는 신라시대 지방관으로 군수에 해당, 호부낭중(戶部郎中)은 향리(鄕吏)의 벼슬로 재정사무를 담당하던 호부(戶部)의 제1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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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潤弘) |
병정(兵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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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훈(承訓) |
정조시랑(正朝侍郞) |
시랑(侍郞)은 집사부·병부·창부 등의 차관(次官)에 해당하는 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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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복(周復) |
좌사간(左司諫) |
사간(司諫)은 사간원에 소속된 관직으로 종3품 |
42 |
칭(偁) |
보조공신문하시중 (補祚功臣門下侍中) |
문하시중(門下侍中)은 문하성 최고의 관리로 종1품(조선시대의 영의정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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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치련(侈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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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총섬(寵暹) |
문하시중(門下侍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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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시중(門下侍中)은 문하성 최고의 관리로 종1품(조선시대의 영의정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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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춘정(春貞) |
순흥부사(順興府使) |
부사(府使)는 지방장관직의 하나로 정3품 |
46 |
현복(玄福) |
생원(生員) |
생원(生員)은 소과(小科)인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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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용(宣用) |
군윤(軍尹) |
군윤(軍尹)은 9품의 지방관직 |
48 |
승고(升高) |
보윤(甫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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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견(得堅) |
문림랑상의원직장 동정 (文林郞尙衣院直長 同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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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翮) |
문하평리(門下評理) 증상서좌복야(贈尙書左僕射) |
문하평리(門下評理)는 문하부(門下府)의 종2품 관직 |
소판공(蘇判公) 이후 경주이씨는 천자만손(天子萬孫)으로 번성하여 고려조(高麗朝)에서만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조의 영의정) 4명을 배출했고, 조선조(朝鮮朝)에서도 과거급제자 178명, 재상(宰相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8명, 대제학 3명, 공신 12명, 청백리 10명 등을 배출하는 등 삼한(三韓 ; 한반도 전체를 말한다)의 대표적인 명문거족으로 성장해 왔다.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사당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靑良面) 동천리(東川里) 양천(良川)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중시조 생존당시의 이 지역은 경주지역이었다.
경주이씨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단소(壇所 ; 제단을 모신 장소)
(울산광역시 울주군 소재)
경주이씨(慶州李氏)의 분산(分散)
신라의 왕성(王城) 경주에서 신라왕이 사성하여 태어난 경주이씨의 세거지(世居地)는 당연히 경주여야 하나, 주요 씨족들이 역대왕조의 부침(浮沈)과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틈바구니에서 강제이주를 당했는가하면, 귀양(歸養)을 가고 피난을 가는 등 곡절을 겪은 결과 이제는 전국 일원에 그 세거지(世居地)가 분포되어 있다.
경주이씨의 주요 세거지와 그 형성경위를 간략하게 알아본다. 신라의 창건 주역이었던 경주이씨의 후예들은 천여년을 신라의 진골(眞骨) 귀족으로 왕조와 운명을 같이 해 왔었다. 부패해질 대로 부패해진 신라가 고려에 의해 패망하자 경주이씨들의 후예들은 진골귀족으로서의 사명감과 고려왕조의 볼모정책에 따라 그 주력인사들이 고려의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해진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천여리나 떨어진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나라는 패망하였으나 문무백관(文武百官)으로 재임하던 귀족들이 그들이 섬겨오던 왕을 호종하여 1천여리가 넘는 고려의 왕성으로 볼모가 되어 옮겨간 것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정묘보(丁卯譜)’에 의하면, 경주이씨가 지금의 황해도 금천(金川)에 대대로 분묘(墳墓)를 썼던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가 패망한 이후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명신의 지위를 누리던 경주이씨의 선조들이 고려의 건국당시 개경(開京)으로 강제이주 당하여 인접한 금천(金川)에 터를 잡았다는 근거가 된다.
금천에 터를 잡은 경주이씨는 초기 고려에서는 다른 성씨의 신라유신(新羅諛臣)들과 함께 중신(重臣)의 자리에 올라 고려조의 중신들과 대립하기도 했으나, KBS에서 상영된바 있는 드라마 '천추태후(千秋太后)'에서와 같이 신라계열 중신들이 개혁을 위한 왕권(王權)장악을 꾀하다가 실패하기도 했었다. 개혁운동의 실패는 당연히 신라유신 세력의 배척정책의 단초가 되었고, 이에 따라 경주이씨도 예외 없이 관직(官職)에의 진출이 막혀버렀다.
오랜 세월동안 관직에의 등용이 막혔던 신라조의 후예 중 경주이씨의 경우 필자의 35대조에서부터 겨우 향직(鄕職)에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관직의 길이 트인 경주이씨 후예들은 초인적 정진을 거듭하여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수대에 걸쳐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조의 영의정)에까지 진출하는 등 삼한(三韓)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이 되어 개경일원에서 세거하였다.
그러나 고려조 말부터 경주이씨의 세력이 약화되자 상대 당파의 모략으로 귀양을 가고 유배를 당하는 등 전국으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경주이씨 세거지의 분산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본다. 이하에서의 계대(系代)표시는 필자의 직계 조상일 경우 필자로부터의 상향대수를 나타내고, 방계 조상인 경우는 중시조로부터의 하향대수를 나타낸다.
경주이씨 독자들께서는 필자의 항렬이 ‘우(雨)'자라는 것과 시조(始祖)이신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의 73대 손이며, 중시조(中始祖)이신 이거명(李居明)의 38대손, 파시조(派始祖)이신 익제공(益齋公 : 李齊賢)의 22대손, 입향조(入鄕祖)이신 판윤공(判尹公 : 李之帶)의 18대손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면 계대(計代)에 참고가 되시리라 믿는다.
경주이씨가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최초로 분산된 경우는 17세손인 이규의 증손(曾孫) 이석(李碩)이 여말(麗末)에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羅州)로 퇴거(退居)한 때부터로 보인다. 이후 조선조에 들어서는 23세손 이절(李節)의 대 이래로 당시의 수도인 한성(漢城)에서 경기도 안성(安城), 경상북도 예천(醴泉)ㆍ안동(安東)ㆍ상주(尙州), 전라남도 함평(咸平) 등지로 분산되었다. 일부는 관향인 경주로 되돌아가기도 했었다.
또한 21세손 이인로(李仁老)는 단종손위(端宗遜位) 때 전북 임실(任實)의 두곡리(杜谷里)로 이주하여 정착했고, 이관(李琯)의 동생 이제현(李齊賢)의 자손들 중 필자의 20대조인 이서종(李瑞鍾)의 후계(後系) 중 이지회(李之會)는 경산(慶山)의 자인(慈仁)으로, 필자의 17대조인 이지대(李之帶)는 관향인 경주(慶州)로, 이성지(李成枝)의 후손들은 충청북도 제천(堤川)으로 각각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필자 가문의 경주지역 입향조이신 이지대가 낙향할 당시의 경주부(慶州府) 남면(南面) 남중리(南中里)는 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전 울산군 두서면 구량리) 지역이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의 전신인 신라조 당시의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 지역으로 낙향한 것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4대손이자 필자의 17대조로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을 지낸 판윤공(判尹公) 이지대(李之帶)는 단종 즉위년인 1452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도로 유배시키는 등 폭정을 일삼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관향(貫鄕)인 경주부(慶州府) 남면 남중리로 낙향하였다. 입향조께서는 이 마을에 당도하자말자 은행(銀杏)나무를 심었는데, 500년이 넘은 이 은행나무가 지금은 울주군 두서면 보호수로 지정되어 천연기념물 제64호로 보호받고 있다. 그리고 이 나무가 지금의 울산광역시에 소재한다하여 울산에서는 필자의 입향조이신 이지대 공도 울산을 빛낸 울산사람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판윤공파의 파시조 '이지대'가 심은 현재의 두서면 은행나무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소재)
다시 세거지 얘기로 돌아간다. 중시조의 20세손인 이미(李美)는 조선조 태종조 때 제주도(濟州道)로 유배된 이후 일부가 그곳에 터를 굳혔던 것을 비롯하여 경기도 안성(安城)의 죽산(竹山), 전라북도 완주(完州)의 고산(高山), 충청북도 청원(淸原), 경상북도 영일(迎日 ; 지금의 포항시)의 흥해(興海)와 상주(尙州)의 함창(咸昌) 등지로 산거하기 시작했다.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에까지 오른 이제현(李齊賢)의 경우는 셋째아들 이창로(李彰路)의 후계(後系) 중 21세손 이문(李聞)이 경상북도 영일(迎日)의 흥해(興海)로 낙향(落鄕)하였고, 20세손 이종지(李鍾地)가 단종조 갑술년(甲戌年)에 지금의 함경남도 이원(利原)으로 유배되어 이 무렵부터 이들 지역에 나뉘어 살게 되었다.
한편 17세손 이천의 자손들은 22세손 이만선(李萬善)ㆍ이완원(李完元)의 대에서 경상북도 의성(義城)ㆍ대구(大邱)ㆍ산청(山淸)ㆍ철산(鐵山)에, 23세손 이간(李簡)ㆍ이시영(李時迎)의 대에서 경상북도 안동(安東)ㆍ선산(善山)ㆍ청도(淸道), 전라남도 순천(順天) 등지에 정착했던 사실이 ‘정묘보(丁卯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천의 동생 이매(李邁)의 자손들은 18세손 이경원(李敬元) 이래로 4대에 걸쳐 경기도 용인(龍仁)ㆍ봉산(鳳山)과 경상북도 상주(尙州) 등지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17세손 이과의 자손들은 경상북도 안동(安東)과 강원도 양양(襄陽) 등지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과의 동생 이수(李蓚)의 자손들은 이수가 여말(麗末)에 평안북도 곽산(郭山) 땅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15세손 이수(李蓚)의 자손들은 20세손 이귀산(李龜山) 이래로 관향인 경상북도 경주(慶州)로 돌아갔으며, 17세손 이손보(李孫寶)의 자손들은 21세손 이득산(李得山) 이래로 경상북도 의성(義城)에 정착하였다.
1930년 현재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충청북도 청원군(淸原郡)일원, 충청남도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봉동면(鳳東面), 임실군(任實郡) 덕치면(德峙面),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화산면(花山面), 무안군(務安郡)ㆍ영암군(靈岩郡)ㆍ진도군(珍島郡) 일원,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성서면(城西面), 의성군(義城郡) 다인면(多仁面), 월성군(月城郡 ; 지금의 경주시) 천북면(川北面)ㆍ강동면(江東面), 청도군(淸道郡) 청도읍(淸道邑), 상주군(尙州郡) 낙동면(洛東面), 영일군(迎日郡)ㆍ경산군(慶山郡) 일원,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단양면(丹陽面), 남해군(南海郡) 삼동면(三東面), 울주군(蔚州郡) 일원,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동남면(東南面), 정주군(定州郡) 임포면(臨浦面),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남면(南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오늘날 경주이씨 자손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은 전라남도 영암군(靈岩郡) 영암읍(靈岩邑) 망호리(望湖里)이다. 이곳에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처음 자리 잡은 것은 4백여년 전, 필자의 21대조이자 파시조(派始祖)이신 이제현(李齊賢)의 9대 손인 이기(李琪)가 을묘사화(乙卯士禍)를 피해 이 마을로 오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재 이 마을 1백여 가구가 경주이씨(慶州李氏) 자손들이다.
여기에서 경주이씨의 고려조 이후의 씨족사(氏族史)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영남지방의 경주에서 태어나 천년동안 경주에서 세거(世居)하던 경주이씨의 후손들은 신라(新羅)가 패망하면서부터 고려조의 왕도인 개경(開京)으로 강제 이주당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 고려조가 패망하고 조선(朝鮮)이 창건되자 조선의 수도인 한성(漢城)으로 옮겨와 조상전래의 지능과 노력으로 수많은 상신(相臣 ; 재상급 신하)과 공신(功臣)을 배출하며 명문거족의 지위를 누리다가 앞서 기술한 대로 포악한 군왕(君王)과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희생물이 되어 유배(流配)를 당하고 피난을 하는 등 그 세거지(世居地)가 조선 8도로 분산되었다.
때문에 시조(始祖) 이후의 계대(系代)마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백사파(白沙派)의 ‘무진보(戊辰譜)’에서 중시조 이후의 28대에 이르는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찾아 수록했고, 그 이후 1890년대 광무연간(光武年間)의 ‘갑진보(甲辰譜)’에서 시조 아후 35대에 걸친 실전세계(失傳世系)를 다시 찾아내어 수록함으로써 잃어버린 뿌리를 그런대로 규명하였다.
일설에서는 조선 말기 무렵에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시조 이알평(李謁平)으로부터 이거명(李居明)까지 36대의 명단을 찾아내어 족보에 수록함으로써 지금의 족보가 완성되었다고도 전한다. 실전된 계대(系代)의 근거가 정확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때문에 이 자료의 발견경위와 내용과 관련해서는 ‘정묘대종보(丁卯大宗譜) 실전세계(失傳世系)의 고찰(考察)’에서 이를 신빙할 수 없다는 지적이 대두되고도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말미에 게재한다.
경주이씨(慶州李氏)의 분열(分列)
우리나라의 이씨(李氏)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몇 본(本)의 이씨(李氏)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분관(分貫)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분관과 분파의 내력을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우선 시조 후손에서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는 합천이씨(陜川李氏), 이위(李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이씨(車城李氏)가 갈라졌다.
중조인 이거명(李居明)의 후손에서도 몇 개의 관향이 나누어졌다. 이거명(李居明)의 증손 이윤장(李潤張)의 후손이 평창이씨(平昌李氏)로, 아우인 이윤원(李潤遠)의 후손이 가평이씨(加平李氏)로, 5세손 이주좌(李周佐)의 후손이 아산이씨(牙山李氏)로, 6세손 이우칭의 후손이 재령이씨(載寧李氏)로, 이양식(李陽植)의 후손이 우계이씨(羽溪李氏)로, 이임간(李林幹)의 후손이 장수이씨(長水李氏)로, 15세손 이전(李筌)의 후손이 덕은이씨(德恩李氏)로, 16세손 이자영(李自英)의 후손이 진위이씨(振威李氏)로, 17세손 이영행(李永倖)의 후손이 진주이씨(晉州李氏)로, 22세손 이반계(李攀桂)의 후손이 원주이씨(原州李氏)로 각각 분관되었다.
경주이씨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양호단(良湖壇 ; 사단-祀壇)
(울산광역시 울주군 소재 - '경주이씨'가 아닌 '월성이씨'라고 명기하고 있다)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사분오열(四分五裂)
앞서 말한 대로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고려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배출하면서 삼한(三韓)의 명족(名族)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으나, 17~21세손의 조상에서부터는 이들을 파조(派祖)로 하는 14개의 파가 나뉘어짐으로써 전체적인 결속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17세손인 이규의 후손이 평리공파(評理公派), 이관(李琯)의 후손이 이암공파(怡庵公派),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 익재공파(益齋公派), 이지정(李之正)의 후손이 호군공파(護軍公派), 이천의 후손이 국당공파(菊堂公派), 이매(李邁)의 후손이 부정공파(副正公派), 이과의 후손이 상서공파(尙書公派), 이수(李蓚)의 동생이 사인공파(舍人公派), 15세손인 이강(李康)의 후손이 판전공파(判典公派), 21세손 이지수(李之秀)의 후손이 월성군공파(月城君公派), 19세손 이양오(李養吾)의 후손이 직장공파(直長公派), 이존오(李存吾)의 후손이 석탄공파(石灘公派), 이존중(李存中)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이존사(李存斯)의 후손이 교감공파(校勘公派)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이 14대파(大派) 아래에서 다시 240여 개의 소파(小派)로 나뉘어져 전체 종중의 혈연관계는 더욱 희석되기 시작했다. 하나의 본관(本貫)과 하나의 파(派)로 면면히 이어져 오던 씨족이 갈기갈기 찢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14대파의 파명(派名)과 파조(派祖), 소파(小派)의 수는 다음 각 표와 같다.
경주이씨 14대파의 파명(派名)과 파조(派祖)
파 명 |
중시조로부터 대수 |
파 조 |
평리공파(評理公派) |
16세손 |
이인정(李仁珽) |
이암공파(怡庵公派) |
17세손 |
이 관(李 琯) |
익재공파(益齋公派) |
〃 |
이제현(李齊賢) |
호군공파(護軍公派) |
〃 |
이지정(李之正) |
국당공파(菊堂公派) |
〃 |
이 천 |
부정공파(副正公派) |
〃 |
이 매(李 邁) |
상서공파(尙書公派) |
〃 |
이 과 |
사인공파(舍人公派) |
〃 |
이 수(李 蓚) |
판전공파(判典公派) |
15세손 |
이 강 |
월성군파(月城君派) |
21세손 |
이지수(李之秀) |
직장공파(直長公派) |
19세손 |
이양오(李養吾) |
석탄공파(石灘公派) |
〃 |
이존오(李存吾) |
진사공파(進士公派) |
〃 |
이양중(李養中) |
교감공파(校勘公派) |
〃 |
이존사(李存斯) |
14대파에서 파생된 소파(小派)의 수 (243개 파)
14대파 |
소파(小派)의 수 |
14대파 |
소파(小派)의 수 |
평리공파 |
26 |
사인공파 |
- |
이암공파 |
- |
판전공파 |
3 |
익재공파 |
12 |
월성군파 |
11 |
호군공파 |
15 |
직장공파 |
- |
국당공파 |
117 |
석탄공파 |
1 |
부정공파 |
5 |
진사공파 |
- |
상서공파 |
53 |
교감공파 |
- |
경주이씨(慶州李氏) 출신 명신(名臣)과 벌열(閥閱)
위에서 소개한 분파 중에서 가장 융성한 분파는 조선조 당시 상서공파(尙書公派)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집, 필자의 파조(派祖)인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익재 본인과 그 일문에 이어 조선조에서 일컬어지던 이른바 ‘8별(鼈)의 집’, 그리고 조선조의 명장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菊堂公派)를 들 수 있다.
경주이씨 상서공파(尙書公派) 백사(白沙) 이항복의 집에서는 조선조에서 영의정(領議政) 4명, 좌의정(左議政) 2명, 대제학(大提學) 2명이 나왔고, 익재공파는 고려조에서 익재공 이재현 자신을 비롯하여 문하시중(영의정) 4명, 조선조의 ‘8별의 집’에서 죄의정과 대제학 각 1명을 배출했으며, 국당공파(菊堂公派)의 정순공(靖順公 : 誠中) 후손에서는 좌의정 1명을 배출하였다.
상서공파(尙書公派) 백사 이항복(李恒福)의 초상
이하에서는 신라조에서부터 지금까지 당대의 왕조에 공헌한 경주이씨 출신 관리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지면관계상 필자의 직계 조상중 몇몇 분들만 소개한다. 다른 분파에서는 시조로부터 50세까지는 어느 분파든 거의가 공통사항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경주이씨 ‘정묘보(丁卯譜)’ 상계(上系)편을 살펴보면 경주이씨의 중시조이자 필자의 37대조인 이거명(李居明)이 신라의 소판(蘇判)에 재직했었고, 아들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과 각간(角干)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판(蘇判)이나 병부령(兵部令)은 신라시대에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만이 등용될 수 있는 관등(官等)과 관직(官職)이었다. 지금의 관직으로는 시․도지사와 국방부장관이라 볼 수 있다.
고려조에 와서는 신라 경순왕의 사위이자 필자의 35대조인 이금서(李金書)가 중원태수와 낭중(郎中)으로 관직에 진출했고, 34대조와 33대조는 각각 병정(兵正)과 정조시랑(正朝侍郞)을 지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조의 병정(兵正)은 향리직명이고, 정조시랑(正朝侍郞)은 고려 향직(鄕職)에서 정7품(正七品)의 관계(官階)이다.
패망한 신라(新羅)의 유신(遺臣)들을 상위 품계에 등용하지 않으려는 고려 조정의 방침 때문에 이 당시에는 경주이씨 전체에서도 별다른 현직(顯職)이 없었다. 두 분이 어느 군현(郡縣)에서 향직(鄕職)에 종사했는지도 알 수 없다.
필자의 32대조 이주복(李周復)도 고려조의 정6품 좌사간(左司諫)에 그쳤으나, 이후부터는 중앙관직에 재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6대조 이선용(李宣用)과 25대조 이승고(李升高)의 경우도 고려의 향직(鄕職)인 군윤(軍尹)과 보윤(甫尹)으로 그쳤다.
필자의 직계 선조로 고려왕조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는 22대조이신 이진(李瑱)과 그의 동생 이세기(李世基) 때부터다. 이진(李瑱)은 충렬왕(忠烈王) 6년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서 2등으로, 동생 이세기는 3등으로 합격했었다.
이 후 이진(李瑱)은 밀직승지(密直承旨), 전법판서(典法判書), 정당문학(政堂文學 : 고려·조선시대 관직으로 고려 문종(文宗) 때 정원은 1명, 품계는 종2품)을 거쳐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한 이후에는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충숙왕(忠肅王) 2년 지공거(知貢擧)를 거쳐 검교정승(檢校政丞)에 등용되었다가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경주이씨(慶州李氏)와 필자의 직계 조상중 고려조의 인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의 아들로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ㆍ문장가였던 21대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년~1367년)이다. 고려 명신으로 일곱 임금을 섬기고 네 번이나 정승이 되었다.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개척자인 백이정(白伊正)에게서 수학한 후 충렬왕 27년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15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경주이씨 익재공파 파시조 익재 이재현의 초상
충선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元)나라의 학자인 요수(姚燧)ㆍ기맹부등과 함께 고전(古典)을 연구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이듬해에는 선부의랑(選部議郞)을 거쳐 성균제주(成均祭酒)가 되었고, 1316년에는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승진하였다.
1319년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중국의 강남(江南)을 유람하고 이듬해에는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이후 원나라에 체재중이었던 충선왕이 ‘빠이엔투그스(伯顔禿古思)’의 모략에 의해 토번에 유배되자 원(元)나라의 조정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뒤에 심왕(瀋王) ‘고(暠)’의 고려 왕위계승을 위한 오역사건으로 충숙왕이 원나라에 잡혀가자 다시 연경에 가서 이를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해서 향리(고려의 수도 개경 인근의 '금천'을 말한다)에 은거했다. 충혜왕(忠惠王)이 원(元)에 잡혀갔을 때도 원나라 조정에 글을 올려 사면을 청했다.
충선왕(忠宣王)이 아들에게 고려왕위를 물려주고 조카 ‘고(暠)’에게 심왕위(瀋王位)를 물려준 후 공민왕이 즉위할 때까지 원(元)나라 정권에 의한 고려 왕위의 폐위와 복위가 반복될 때마다 일선에서 고려국의 왕위보전을 위해 눈부시게 노력한 충성의 인물이다. 공민왕이 즉위한 후 우정승(右政丞)ㆍ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로 발탁,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다음 해 우정승(右政丞)으로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시대의 領議政)에 올랐다. 이어 관직을 사직하고 저술(著述)과 학문(學問)에 전심하다 1362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왕(王)을 청주(淸州)로 호종(扈從),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만년에 은퇴한 후 왕명으로 실록(實錄)을 편찬했다.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제현은 당대의 명문장(名文章)으로 외교문서(外交文書)에 뛰어났고, 저술에도 두각을 나타내어 민간가요(民間歌謠) 17수(首)를 한시(漢詩) 7언절구(七言絶句)로 번역한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를 저술하여 고려가요(高麗歌謠)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이 외에도 ‘익재집(益齋集)’과 ‘역옹패설’ 등의 저서가 있으며, 그의 재능은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이로부터 1천여 년 뒤 한말(韓末)의 한문학 대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익재(益齋)의 시를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을 구비한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大家)’라고까지 평가했다. 익제(益齋)가 일찍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원(元)나라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학자 탕병룡(湯炳龍)이 찬(讚)을 썼는데 그 그림이 지금까지 전해져 국보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현의 아들 이달존(李達尊)은 아버지의 스승인 백이정(白伊正)의 사위가 되어 충숙왕 때 과거에 올라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이르렀으나 28세로 요절하고 말았고, 딸은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뒤를 이어 공민왕의 왕비(王妃 ; 惠妃)로 간택되었으나, 공민왕이 시역(弑逆)을 당하자 스스로 여승이 되어버린 비운(悲運)의 왕후이기도 했었다. 조선조 태종8년(1408년)까지 생존했었다.
익제(益齋) 이후 필자의 직계 선대에서는 31대조 이칭, 30대조 이치연(李侈連), 29대조 이총섬(李寵暹)등이 연거푸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조의 영의정)에 등용되었다. 한 씨족의 한 분파에서 4명의 문하시중(領議政)을 배출한 것으로 이는 후일 조선조에서 영의정 4명을 배출한 상서공파(尙書公派)와 맞먹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후 24대조 이득견(李得堅)이 종2품인 직장, 23대조 이핵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등용되었고, 방계인 이강(李康)이 판전객사사(判典客寺事), 이인정(李仁挺)이 문하평리(門下評理), 이보림(李寶林)이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존오(李存吾)가 우정언(右正言), 이달충(李達衷)이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함으로써 각각 분관 또는 분파조로 모셔지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8명의 상신(相臣), 3명의 대제학(大提學), 1백 78명의 문과(文科) 급제자를 내었다.
몰락한 필자의 직계선조(直系先祖)
그러나 필자의 직계 조상에서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신 판윤공(判尹公) 이지대(李之帶)와 그 후손 몇몇 분이 중앙직과 지방직에 등용되었을 뿐 이렇다 할 현직(顯職)에 나아간 사람이 없다. 왕권(王權)을 탈취하기 위하여 척족과 충신을 살해한 세조(世祖)의 정치행각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기 때문에 관계진출 자체를 금기시하거나 천여리의 산간오지(山間奧地)로 은둔했기 때문에 그만큼 기회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때문에 판윤공 이후에는 아드님이신 16대조 이점(李點)이 향직인 부사[(府使 ; 정3품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종3품의 도호부사(都護府使)], 15대조인 이원림(李元林)이 군수(郡守 ; 종4품관), 14대조인 이광증(李光曾)이 찰방[察訪 ;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종6품의 외관직(外官職)], 13대조 이승형(李升亨)이 진주병마절도사(晉州兵馬節度使 ; 병마절도사는 종2품 무관직), 12대조 이몽성(李夢星)이 공조참의(工曹參議 ; 참의는 정3품 문관직), 11대조 이후근(李厚根)이 음성훈도(陰城訓導 ; 훈도는 한양의 4학과 지방의 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한 교관)와 통정(通政 ; 정3품), 10대조 이이훈(李利薰)이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 9대조 이민화(李敏華)가 전연사봉사[典涓司奉事 ; 봉사는 돈녕부(敦寧府)와 각 시(寺)·사(司)·서(署)·원(院)·감(監)·창(倉)·고(庫)·궁(宮)에 설치된 종8품의 관직]를 역임한 이후부터 필자의 직계에서는 9대가 흐른 지금까지 벼슬길에 들어서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선시대 관리들의 직급(職級)과 지금의 우리나라 공직자(公職者)들의 직급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관작대조표(官爵對照表)를 게재한다.
고금 관작대조표(古今 官爵對照表)
조선 시대 |
현 대 | |||
품 계 |
직책 |
지방정부 |
사법부 |
중앙정부 |
정1품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
|
대법원장 |
국무총리 |
종1품 |
좌찬성, 우찬성 |
|
|
부총리 |
정2품 |
판서, 좌참찬 우참찬 |
시도지사 |
대법원판사 검찰총장 |
장관, 차관 |
종2품 |
참판, 관찰사 |
|
법원장, 검사장 |
차관보 |
정3품 (당상관) |
참의, 목사 도호, 부사 |
시도 부지사, 부시장 |
2호이상 판검사 |
관리관 |
종3품 |
집의, 사관 |
부시장, 시도 기획실장 |
4호이상 판검사 |
이사관 |
정4품 |
군수, 사인, 장령 |
부시장, 시도 실국장 |
6호이상 판검사 |
부이사관 |
종4품 |
경력, 첨정 |
|
|
|
정5품 |
현령, 판관, 지평 |
부군수, 시군구 국장 시도 담당관, 과장 |
9호이상 판검사 |
서기관 |
종5품 |
정랑, 교리 |
시도 팀장, 시군구 과장 읍면장, 동장 |
|
사무관 |
정6품 |
좌랑, 감찰 | |||
종6품 |
현감, 찰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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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7품 |
박사 |
주사, 시군구 계장 |
|
주 사 |
종7품 |
직장, 저작 |
주사보 |
|
주사보 |
정8품 | ||||
정9품 |
정사, 훈도 |
서 기 |
|
서 기 |
종9품 |
참봉 |
서기보 |
|
서기보 |
필자의 직계선조들은 이렇듯 쇠락해 왔으나, 대신 방계(傍系)에서는 고종조(高宗朝)에서 외부대신과 법부대신(法部大臣)을 역임한 후손도 있었고, 그 후손의 자손 중에서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陸軍參謀總長)과 국방장관(國防長官)을 지낸 인사도 있었지만, 이들이 지낸 벼슬은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일제(日帝)의 벼슬이었고, 친일(親日)에 따른 보상적 관직이었다.
친일분자(親日分子)들을 척결하기 위한 반민특위(反民特委 :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협력하면서 악질적으로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조사, 처벌하기 위해 1948년 제헌국회 내에 두었던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도 일제 출신 군인과 경찰, 행정관리들을 신생 대한민국의 군과 경찰, 정부관리로 기용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우유부단 덕분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필자의 경주지역 입향조(入鄕祖)이신 판윤공(判尹公) 이지대(李之帶)의 프로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판윤공은 고려 후기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익재 이제현의 4대손이다. 1394년(조선 태조 3년) 경상도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재임하면서 왜구(倭寇)가 탄 배를 나포한 공적으로 왕으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그 후 벼슬이 높아져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르렀다.
판윤공(判尹公)은 1452년(단종 즉위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인보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키는 등 폭정을 단행하고, 단종 3년(1455)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던 집현전 학사들(사육신 ; 死六臣)을 참살하자, 비분강개하여 관직(官職)을 버리고 경주부 외남면 남중리(慶州府 外南面 南中里 ;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斗西面) 구량리(仇良里) 860번지)로 낙향하였다.
이때 판윤공(判尹公)은 한성(漢城)에서 가져온 은행(銀杏)나무를 연못가에 심었는데, 이 은행나무가 1962년 12월3일 천연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된 두서면 은행나무이다. 전설대로라면 이 나무의 나이는 550년 정도인 셈이다. 높이 22m, 가슴 높이의 둘레가 12m에 이른다. 이 나무를 훼손하면 해를 입는다고 하고, 아들을 낳지 못한 부인들이 이 나무에다 정성껏 빌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도 전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신선하게 여겨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이 은행나무가 태풍에 가지가 찢어져 철제 지지대로 받쳐놓고 있다.
판윤공(判尹公)은 이때 은행나무를 심고 구량천이 마을 앞으로 흐르면 눌러 살고, 뒤편으로 흐르면 타지(他地)로 이거(移居) 한다는 방침을 정했는데, 이후 홍수로 마을 앞으로 흐르던 구량천의 수로가 마을 뒤로 바뀌자 지금의 경주시내로 이주하였고, 자신을 따라 낙향한 대소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판윤공(判尹公)께서는 시조의 탄강지이자 명활산(明活山)이 소재하는 지금의 경주시(慶州市) 동천동으로 이주하신 듯하다.
경주시 명활산(明活山)의 판윤공파 입향조 판윤공(判尹公) '이지대'의 묘소
판윤공의 묘소가 이들 지역에 걸쳐 있는 명활산(明活山)에 모셔져 있고, 시조의 탄강지가 바로 옆 동천동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필자의 선대들은 구량리와 30여리 떨어진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방어리(防禦里)와 괘능리(掛陵里) 일원으로 이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가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조상전래의 '월성이씨'들이 일제와 자유당 독재정권 시절에 걸쳐 신흥세력으로 발흥한 포악한 또 다른 '월성이씨' 즉, 상민(常民)과 중인(中人) 출신의 이른바 똑똑하고 돈많은 '경주이씨(慶州李氏)'들을 피해 정든 고향을 등진 경우가 많았다. '월성이씨'와 '경주이씨'의 관계는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경주이씨 판윤공파의 입향조 이지대의 재실(齋室)과 묘소 위치도(경주시 명활산 ; 보문저수지 옆)
- 그림의 '제실'이란 말은 틀린 말임 -
(글자가 잘 보이지 않을 경우 왼쪽 마우스를 그림 위에 놓고 클릭하시면 크게 볼수 있음)
조선조에서의 경주이씨(慶州李氏) 출신 명신(名臣)
조선조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들의 관계(官界) 진출은 중엽 이후 특히 두드러지는데, 익재(益齋) 이제현의 7대손 되는 이공린(李公麟)의 ‘8별(鼈)의 집’에서부터 비롯된다('8별의 집'에 대한 얘기는 기회가 있으면 별도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필자의 직계 조상이 아니기 때문에 생략하고, 경주이씨 전체의 벌열(閥閱)을 소개한다. 경주이씨 가문 중 벌열(閥閱)에 오른 가문으로 상신(相臣)과 공신(功臣)은 다음 표와 같다.
경주이씨 출신 조선조 상신(相臣)
성 명 |
재임왕조 |
직 함 |
성 명 |
재임왕조 |
직 함 |
이항복 (李恒福) |
선조조 |
영의정 (領議政 |
이태좌 (李台佐) |
영조조 |
좌의정 (左議政) |
이경억 (李慶億) |
현종조 |
좌의정 (左議政) |
이종성 (李宗城) |
영조조 |
영의정 (領議政) |
이 완 (李 浣) |
현종조 |
우의정 (右議政) |
이경일 (李敬一) |
순조조 |
좌의정 (左議政) |
이광좌 (李光佐) |
경종조 |
영의정 (領議政) |
이유원 (李裕元) |
고종조 |
영의정 (領議政) |
경주이씨 출신 조선조 공신(功臣)
성 명 |
재임왕조 |
공적 사항 |
이 래(李 來) |
태종조 |
2차왕자난 2등공신(二次王子亂 二等功臣) |
이승상(李升商) |
태종조 |
2차왕자난 4등공신(二次王子亂 四等功臣) |
이흥상(李興商) |
단종조 |
계유정난 3등공신(癸酉靖難 三等功臣) |
이양생(李陽生) |
세조조 |
이시애난 토벌 3등공신(李施愛亂討伐 三等功臣) |
이철견(李鐵堅) |
성종조 |
성종즉위 4등공신(成宗卽位 四等功臣) |
이극정(李克正) |
중종조 |
중종반정 3등공신(中宗反正 三等功臣) |
이 손(李 蓀) |
중종조 |
중종반정 3등공신(中宗反正 三等功臣) |
이항복(李恒福) |
선조조 |
정여립옥사 3등공신(鄭汝立獄事三等功臣)·호성1등공신(扈聖一等功臣) |
이사공(李士恭) |
선조조 |
호성 1등공신(扈聖 三等功臣) |
이정암( ) |
선조조 |
임진왜란 2등공신(壬辰倭亂 二等功臣) |
이수일(李守一) |
인조조 |
이괄난 토벌 2등공신(李适亂討伐 二等功臣) |
이탁남(李擢男) |
인조조 |
이인거 모반적발 2등공신(李仁居謀叛摘發二等功臣) |
역대 왕조(王朝)에서 필자의 분파를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명현(名賢)과 충신들이 부지기수였지만 2천년의 문중역사를 갖고 있는 경주이씨는 그 긴 역사와 70여개의 분파로 분산되어 응집력이 약화된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다수 종중(宗中)들이 문중에 대한 애착이 거의 소멸되어 종씨(宗氏)관계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추세다. 필자뿐만 아니라 모든 문중원(門中員)들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객지에서 항렬이 같은 경주이씨를 만나도 ‘타성받이’ 보듯 할 뿐이다. '월성이씨(月城李氏)'와 '경주이씨' 사이가 특히 그렇다. 2,182년(2008년 현재)의 긴 씨족역사를 지니고 있는 경주이씨는 세습왕조의 군왕을 배출한 일부 성씨를 제외하고는 신라조(新羅朝) 이후 역대 왕조에서 공신(功臣)과 명현(名賢)의 반열을 그 어느 성씨보다 혁혁하게 이어 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부 선조(先祖)의 경우 권력 지향적 변절(變節)과 반민족적 매국행위(賣國行爲)에 가담한 인사들도 있어 마음이 무거워 지고,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변절(變節)과 매국(賣國)에 앞장 선 경주이씨 선대(先代)들
조선초기에 현직(顯職)에 오른 한 선조(후손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실명을 밝히지 않는다. 이하 다른 이의 경우도 같다)의 경우 고려조에서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지냈으나, 조선 개국 후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제2차 왕자(王子)의 난(亂)’을 평정, 태종(太宗) 즉위 후 좌명공신2등(佐命功臣二等)으로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지고, 1407년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좌빈객(左賓客)을 지낸 후 1408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겸 판경승부사(判敬承府事)에 이르러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는 등 승승장구의 족적(足跡)을 남겼으나, 권력에 눈이 어두워 수많은 고려유신(高麗遺臣)들과 척족(戚族)까지 살해한 폭군의 정변(政變)에 스스로 가담하여 벼슬을 했다는 점에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조선조 고종 당시 증광문과(增光文科)에 장원, 부교리(副校理), 부수찬(副修撰), 응교(應敎)등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검상(檢詳), 필선(弼善), 교수(敎授), 병조정랑(兵曹正郞), 우승지(右承旨) 등을 역임한 바 있는 한 어른도 1910년(융희 4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日帝)에 의해 남작(男爵)으로 임명되어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응원하였다. 역시 고종조에서 외부대신(外部大臣), 법부대신(法部大臣) 등을 지낸 한 어른은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일제(日帝)에 의해 자작(子爵)으로 임명되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어용자문기관인 중추원고문(中樞院顧問)을 지냈다. 자랑이 아니라 너무나 치욕스럽다는 얘기다. 이분의 얘기를 추가한다.
이 어른은 조선말기 친일의 거두(巨頭)로 1886년(고종 23) 외아문주사, 사헌부감찰, 전환국위원을 거쳐 9월 박정양(朴定陽)공사를 따라 겸임주차 미국공사관 서기관이 되고, 다시 주차 미국 서리전권대신으로 미국에 주재하였다. 1889년 귀국할 때는 우리나라 철도건설에 관심을 보이는 미국정부로부터 철도의 모형을 얻어오기도 했다. 이어 기기국사사(機器局司事), 웅천과 흥덕의 현감, 외아문참의 등을 거쳐 1895년 궁내부 회계원장이 되고, 주차일본국 특명전권공사로 일본에 주재 중에 일본정부로부터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이 뒤에 중추원부의장, 귀족원경, 중추원의장 등을 역임하고 1899년 의정부찬정, 주차 일본국특명전권공사 겸 의정부찬정이 되었다. 1900년 일본으로부터 훈2등 태극장을 받았다.
1904년 외부대신이 되었는데, 재임기간에 충청도와 황해도 및 평안도의 어로권, 황무지개척권을 일제에 허용하고, 제1차한일협약 체결에 이어 메가다(目賀田種太郞)의 우리나라 재정고문 취임 알선, 일본헌병대에 경성치안권 부여, 그리고 일본에 통신원 이양과 연해하천의 항해무역권 부여 등 모든 이권(利權)을 일본에 넘기는데 앞장섬으로써 사실상 나라를 팔아넘기는 주역을 맡았다. 이들 공적으로 1905년 일본으로부터 훈1등 팔괘장을 받았고, 법부대신과 형법교정총재가 되면서 더욱 친일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중추원고문이 되고,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을 지내는 등 침략자의 주구(走狗)가 되어 부귀를 누렸다.
그런데 이 어른은 필자와 같은 판윤공파(判尹公派 ; 입향조 한성판윤 이지대의 혈손)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한다. 어쩌다 이런 사람이 필자의 선조가 되었는지 기가 막힐 일이다. 비록 직계선조는 아니라도 말이다. 그의 아들도 '시종원경'을 지내며 부친의 작위를 습작(襲爵)했고, 일제를 축출하고 탄생한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陸軍參謀總長)과 국방장관을 지낸 그의 손자도 친일인명사전(親日人名辭典)에 수록되어 있다. 침략의 원흉 일본 천황(天皇)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 49기) 출신 일본군 장교였기 때문이다.
그는 1937년 일본 육사 49기로 임관, 만주와 남양군도 등에서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며 소좌(少佐)까지 진급했었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육군참모총장과 육군대학 총장을 지냈으며, 허정(許政) 과도정부에서는 국방부장관을 역임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비록 친일파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에 있어 다른 친일인사(親日人士)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그가 비록 일본군 소좌를 지내기는 했지만, 해방 후 조부와 부친, 자신의 친일행각(親日行脚)을 크게 참회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의 '부산파동(釜山波動)' 당시에는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명령을 거부했으며, 5·16 군사쿠데타 때는 혁명군(革命軍)에의 협력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었다.
경주이씨의 친일인사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난 자유당 시절 종중의 중앙화수회(中央花樹會) 총재를 역임한 한 어른까지 친일혐의를 뒤집어 쓰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엄연한 친일행위(親日行爲)를 자행했다면, 관직(官職)도 종직(宗職)도 사절해야 ‘경주이씨’ 다운 일인데, 그것까지 빼앗듯 차지했다는 것이 더 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수양대군의 폭정에 비분강개하여 한성판윤(서울시장)의 관직(官職)조차 버리고 천여리의 경주부로 낙향해 버린 입향조 판윤공(判尹公)의 우국충정을 털끝만큼이라도 닮았으면, 이런 짓들은 하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빛 바랜 씨족(氏族)의 결속과 사라진 유대감(紐帶感)
여기에다 다른 성씨와 분파에서도 그렇겠지만, 필자의 경주이씨에서도 이제는 종씨와 종손(宗孫)의 개념(槪念)도 빛이 바래고 사라지고 없어졌다. 양반출신과 종손들은 고향과 조상의 무덤을 지키고 가업(家業)을 잇느라 모두 몰락해 버렸고, 상민(常民)이나 중인(中人) 출신들이 유학을 가고, 대처(大處 ; 도시)로 나가 출세하고 돈을 벌어 재벌이 되고, 유명인이 되어 경주이씨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성씨에 상관 없이 고향과 종가(宗家)를 지키면서 명맥만 이어 오는 일부 종손들의 고루한 사고(思考)는 종중들로 하여금 종씨와 종가(宗家)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퇴색시켜 버린 원인이 되고도 있다. 특히 경주이씨의 경우 거대한 문중의 세력을 정치적(政治的)으로 이용하기 위해 일부 기업인(企業人)이나 정치인들이 시조(始祖)의 제사를 주관하는 등 정치적 관심을 보인바있으나, 대다수 종중(宗中)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혈족으로서의 유대가 사실상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작고한 삼성그룹의 총수(總帥) 이병철씨나 1980년대 후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 총재를 역임한 이민우(李敏雨)씨, 현재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총재로 재임 중인 종친 등이 한 때 문중의 힘을 이용하려는 어눌한 시도를 한바 있었지만, 그들 또한 죽고 몰락(沒落)하여 이제는 그런 움직임도 사라지고 없어졌다.
지난 2007년 5월 3일 경주 표암봉 시조(始祖) 제향(祭享)에서 초헌관(初獻官)으로 봉해졌던 이명박 대통령이 옛 영화의 한 순간을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경주이씨 국당공파(菊堂公派) 후손으로 필자보다 한 항렬 낮은 ‘상(相)’자 항렬이다. 그가 왜 항렬자를 따르지 않았는지는 모르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이 경주이씨인지를 알고 있는 경주이씨도 거의 없다. 현재의 중앙화수회 이상배(李相培)회장도 국당공파 출신이다.
2007년 5월 3일 경주이씨 표암재(瓢巖齋) 시조 추모 제향(시조에 대한 추모제사)
(우측 초헌관이 이명박 대통령)
경주이씨 중앙화수회(中央花樹會)
경주이씨는 1946년 3월 26일 초대부통령을 역임한 성재 이시영(李始榮)에 의하여 경주이씨중앙화수회(慶州李氏中央花樹會)가 창립되었으며, 본관지인 경주에 시조 알평의 사우 표암재(瓢巖齋)를 관리하는 표암화수회(瓢巖花樹會)와 서울특별시,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광역시,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제주도에 시․도화수회를 두고 전국에 시, 군, 구 화수회를 조직하고 있다.
경주이씨의 종세(宗勢)는 2000년 11월 전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142만 여명이며, 분적종회(分籍宗會)까지 합치면 185만 여명에 달한다. 경주이씨 중앙화수회(中央花樹會)에는 화수회를 대표하는 총재(總裁)가 있고, 화수회의 실무를 담당하는 집행기관으로서의 회장(會長)이 따로 있다. 1946년 3월 25일 화수회(花樹會) 창설 이후 역대 총재와 회장, 그리고 2009년 현재 임원은 다음 각 [표]와 같다.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역대 총재
대 수 |
성 명 |
재 임 기 간 |
비 고 |
초 대 |
이시영(李始榮) |
46. 3. 25 ~ 53. 12. 6 |
초대 부통령 |
2, 3대 |
이 인(李 仁) |
53. 12. 6 ~ 58. 6. 29 |
초대 법무부장관 |
4, 5, 6대 |
이갑성(李甲成) |
58. 6. 29 ~ 66. 7. 3 |
3․1운동민족대표, 민의원 |
7, 8대 |
이상철(李相喆) |
66. 7. 3 ~ 68. 5. 12 |
전 국회부의장 |
9~12대 |
이병철(李秉喆) |
68. 5. 12 ~ 87. 11. 19 |
전 삼성그룹 회장 |
13대 |
이민우(李敏雨) |
87. 11. 19 ~ 89. 4. 30 |
전 신한민주당 총재 |
14대 |
이종찬(李鍾贊) |
98. 9. 10 ~ 현재 |
전 국정원장 |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역대 회장
대 수 |
성 명 |
재 임 기 간 |
비 고 |
초대 |
이규채(李圭彩) |
46. 3. 25 ~ 53. 7. 13 |
|
2, 3대 |
이용범(李龍範) |
53. 12. 6 ~ 58. 6. 29 |
제3·4대 국회의원 |
4, 5대 |
이영언(李榮彦) |
58. 6. 29 ~ 61. 4. 3 |
제3·4대 국회의원 |
6대 |
이상철(李相喆) |
61. 4. 3 ~ 66. 7. 3 |
전 국회부의장 |
7대 |
이재만(李在晩) |
66. 7. 3 ~ 68. 5. 12 |
제6대 국회의원 |
8대 |
이상희(李相禧) |
68. 5. 12 ~ 77. 7. 24 |
제6․7대 국회의원 |
9대 |
이성우(李成雨) |
77. 7. 24 ~ 78. 6. 14 |
내무부차관 |
10대 |
이해우(李亥雨) |
78. 6. 14 ~ 79. 4. 7 |
변호사 |
11, 12대 |
이찬우(李燦雨) |
79. 4. 7 ~ 81. 5. 31 |
제5대 국회의원 |
13대 |
이성우(李成雨) |
81. 5. 31 ~ 89. 4. 30 |
내무부차관 |
14, 15대 |
이민우(李敏雨) |
89. 4. 30 ~ 94. 3. 23 |
전 신한민주당 총재 |
16, 17대 |
이종찬(李鍾贊) |
94. 3. 23 ~ 98. 9. 10 |
전 국정원장 |
18대 |
이덕희(李德熙) |
98. 9. 10 ~ 00. 4. 26 |
백제병원 이사장 |
19대 |
이종화(李鍾和) |
00. 4. 26 ~ 02. 4. 26 |
|
20대 |
이상록(李相祿) |
02. 4. 26 ~ 04. 4. 26 |
|
21대 |
이익순(李翼淳) |
04. 4. 26 ~ 06. 4. 26 |
중앙새마을금고협의회 회장(전) |
22대 |
이효우(李孝雨) |
06. 4. 26 ~ 07. 6. 26 |
|
23대 |
이상배(李相培) |
07. 6. 26 ~ 현재 |
제15~17대 국회의원 |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회장, 고문, 자문위원
(2009.1.1 현재)
직위 |
성명 |
주요 경력 |
직위 |
성명 |
주요 경력 |
회장 |
이상배 (李相培) |
제15~17대 국회의원 |
자문위원 |
이상수 (李相洙) |
노동부장관(전) |
고문 |
이종찬 (李鍾贊) |
중앙화수회총재(전) |
〃 |
이재창 (李在昌) |
제15~17대 국회의원 |
〃 |
이건희 (李健凞) |
삼성그룹회장(전) |
〃 |
이재오 (李在五) |
제15~17대 국회의원 |
〃 |
이상득 (李相得) |
18대국회의원 |
〃 |
이방호 (李方鎬) |
제16,17대 국회의원 |
〃 |
이용희 (李龍凞) |
18대국회의원 |
〃 |
이종호 (李鍾虎) |
대한지적공사부사장(전) |
〃 |
이훈동 (李勳東) |
조선내화그룹회장 |
〃 |
이종윤 (李鍾崙) |
중앙화수회감사(전) |
〃 |
이명박 (李明搏) |
대통령(현) |
〃 |
이종걸 (李鍾杰 |
제16~18대 국회의원 |
〃 |
이근양 (李根陽) |
유지재단이사장(현) |
〃 |
이재정 (李在禎) |
통일부장관(전) |
〃 |
이상록 (李相祿) |
중앙화수회장(전) |
〃 |
이규홍 (李圭洪) |
경기도화수회장(전) |
〃 |
이덕희 (李德凞) |
백제병원 이사장 |
〃 |
이흥우 (李興雨) |
국당공파 대종회장(전) |
〃 |
이두학 (李斗鶴) |
중앙새마을금고협의회장(전) |
〃 |
이원희 (李元熙) |
한국스카우트연맹총재(현) |
〃 |
이만섭 (李萬燮) |
국회의장(전) |
〃 |
이상목 (李相穆) |
6.25참전유공자 |
〃 |
이종화 (李鍾和) |
중앙화수회장(전) |
〃 |
이광석 (李鑛石) |
서문문화사대표 |
〃 |
이익순 (李翼淳) |
부일한의원장 |
〃 |
이윤석 (李尹錫) |
제18대국회의원 |
〃 |
이효우 (李孝雨) |
중앙화수회장(전) |
〃 |
이철우 (李喆雨) |
제18대국회의원 |
〃 |
이필우 (李弼雨) |
국회의원(전) |
〃 |
이인영 (李仁榮) |
제17대 국회의원 |
〃 |
이덕우 (李德雨) |
(주)덕양에너젠(현) |
〃 |
이양희 (李良凞) |
제15~16대 국회의원 |
자문위원 |
이화영 (李華泳) |
제17대 국회의원 |
〃 |
이성권 (李成權) |
제17대 국회의원 |
〃 |
이상민 (李相珉) |
제17~18대 국회의원 |
〃 |
이상열 (李相烈) |
제17대 국회의원 |
〃 |
이재웅 (李在雄) |
제17대 국회의원 |
이하 생략 |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초대 총재 이시영 초대 부통령(중앙)
(이시영 부통령 우측은 이승만 대통령, 좌측 뒷줄은 대통령 영부인 '프란채스카'여사다)
경주이씨(慶州李氏)와 월성이씨(月城李氏)
다음은 앞에서 기술한 '월성이씨(月城李氏)'와 '경주이씨(慶州李氏)'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경주이씨는 아직까지 ‘월성이씨(月城李氏)’로 혼용되어 일반 국민들에게 혼선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혼선은 조선조 방목(榜目)과 우리나라 역대 인물란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와 ‘월성이씨(月城李氏)’를 다른 성씨인 것처럼 분리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때 '경주이씨(慶州李氏)'와 ‘월성이씨(月城李氏)’를 타성으로 분류한 것은 잘못된 분류였다. 경주이씨가 월성이씨이고, 월성이씨가 경주이씨이기 때문이다.
신라조와 고려조에서는 '월성이씨(月城李氏)'가 맞고, '월성'이 '경주'라는 이름으로 바뀐 뒤에는 '경주이씨(慶州李氏)'라는 이름이 생겼고, 이 명칭을 병용한 것일 뿐 서로 같은 성씨에 불과하다.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들에도 '경주이씨'를 '월성이씨'라고 표기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지금도 경주이씨의 발상지인 경주(慶州)는 물론 인접한 포항(浦項), 경산(慶山), 영천(永川), 울산(蔚山) 등지에서는 경주이씨(慶州李氏)를 '월성이씨(月城李氏)'라고 부르고 있다. 경주이씨의 발상지에서조차 ‘월성이씨’로 호칭하고 있는 것이다.
월성이씨(月城李氏)임을 나타내고 있는 중시조(中始祖)와 판윤공파 파조의 비석
(비석은 최근에 만들어 세웠지만, ‘경주이씨’가 아닌 ‘월성이씨’라고
조각되어 있다. 경주지역의 ‘월성이씨’ 후손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일하기 위하여 경주이씨(慶州李氏) 중앙화수회(中央花樹會)에서는 지난 1979년, 경주이씨(慶州李氏)로 통일하기로 결의한바 있으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시조의 출생지이자 관향(貫鄕)인 경주지방의 경주이씨들조차 자신들의 본관을 ‘월성이씨’라고 칭하는 이들이 많다. 비록 몰락하기는 했으나, ‘월성이씨(月城李氏)’라는 관명(貫名)은 조상대대로 세거지(世居地)를 지키고 있는 종손(宗孫)들이 주로 쓰는 명칭이고, ‘경주이씨(慶州李氏)’라는 관명은 종손이 아닌 차손(次孫)들로 유학을 하고 대처(大處 ; 도시)에서 부를 축적하여 출세한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관명(貫名)이다.
맏이로 태어나 조상의 묘역을 지키느라 도회지로 진출하지도 못하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종손(宗孫)들은 '월성이씨(月城李氏)'를 아직까지 고집하고 있고, 조상을 모시지 않아도 되는 차남이하 자손들이나 중인이나 상민(常民)출신 종중들은 일찍이 도회지로 진출하여 돈을 벌고 공부를 하여 출세하면서 자신들을 홀대하고 구속하던 틀을 벗어나기 위해 조금은 신식에 속하는 '경주이씨(慶州李氏)'라는 관명을 만들어 전래시켜 온 것이다.
월성이씨(月城李氏) 중시조(中始祖) 단소 향사와 경주이씨(慶州李氏) 후손의 화환
조상의 사단(祀壇)과 묘소의 비석에는 ‘월성이씨(月城李氏)’라고 조각해
놓고, 자신들이 올려드린 화환에는 ‘경주이씨(慶州李氏)’라고 적고 있다.
비석은 전래의 월성이씨 후손들이 만들어 세웠고, 화환은 돈 많고 권력
있는 신흥(新興) 경주이씨(慶州李氏) 후손들이 만들어 보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중인(中人)과 상민(常民)에 속하는 종중(宗中)들이나, 종중에 대하여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이들은 조상전래의 항렬자까지 버리고 엉뚱한 이름을 작명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종중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이들이나, 반감을 가진 이들도 자신의 후대부터는 항렬자(行列字)를 따르지 않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고루한 씨족관념에 대한 무언의 항거라고 볼 수도 있다. 반대로 중인과 상민이 출세를 하고, 부자가 되면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하나같이 항렬자를 사용하고 있다. 같은 경주이씨(慶州李氏)이면서도 월성이씨(月城李氏) 양반들에게 당한 수모를 보상받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6.25 전까지는 '상놈'이나 '서자(庶子)'의 자식들은 '항렬자(行列字)'를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고, 쓴다 해도 족보(族譜)조차 없으니 올릴 곳도 없었지만, 전쟁과 독재정권에 의해 세상이 달라지고부터는 돈과 권력으로 족보업자(族譜業者)를 매수할 수 있었고, 그 족보에 끼워 넣자니 자연스레 항렬자를 만들게 된 것이다.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역대총재 중에도 2~3대 총재인 이인(李仁 : 초대 법무부장관), 4~6대 이갑성(李甲成 : 3․1운동 민족대표, 전 민의원), 9~12대 이병철(李秉喆 : 전 삼성그룹 회장) 총재 등이 항렬을 따르지 않았고, 현재의 고문(顧問) 중에도 이익순(李翼淳) 부일한의원장, 이훈동(李勳東) 조선내화그룹회장, 이근양(李根陽) 대한석탄공사사장, 이두학(李斗鶴) 중앙새마을금고협의회장,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 등이 항렬자를 따르지 않고 있다. 경주이씨 ‘양반님’들로부터 압제받고 탄압 받아 온 중인(中人)이나 상민(常民) 출신 경주이씨들이 특히 그렇다.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은 경주이씨에서 분관된 합천이씨(陜川李氏) 후손이다.
권력과 돈은 항렬자(行列字)가 있든 없든, 분관(分貫) 후손이든 본관(本貫) 후손이든, 적출(嫡出)이든 서출(庶出)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종회(宗會)의 지도자로 둔갑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성씨에도 그런 예가 가끔 발견되지만, 명색이 종친(宗親)모임인데, 증손자(曾孫子) 뻘이 회장을 맡고 증조부(曾祖父)뻘과 조부(祖父)뻘이 부회장과 사무처장을 맡아 증손자와 손자뻘 회장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는 희한한 질서를 연출하기도 한다. 경주이씨 종친회가 특히 그렇다. 한마디로 ‘개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조향사에서 초헌관을 맡은 이명박 대통령
친애하는 향우님 여러분, 그리고 경주이씨(慶州李氏) 종친여러분, 필자는 필자의 본관인 '경주이씨(慶州李氏)'를 소개하면서 경주이씨 후예들의 자랑스러움과 허물을 동시에 소개드렸습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지금까지 어느 씨족이나 가문에서도 이러한 예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의도적으로 밝은 것만 말하는 것보다는 어두운 면도 있는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어 양면을 모두 소개한 것이니 해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역사는 어쨌든 진실을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경주이씨 2007신년교례회(중앙화수회관5층)
이하에서는 필자의 직계 종친인 경주이씨 판윤공파(判尹公派) 향우님들을 위하여 파조(派祖)인 판윤공(判尹公)의 생애와 그의 후손들이 임진왜란과 일제의 압제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간략하게 추가하고자 합니다. 참고가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
경주이씨 판윤공파(判尹公派)의 파조 판윤공(判尹公)의 생애
(타 성씨의 향우님들과 청년종친들을 위해 난해한 고어나, 경칭은 생략합니다)
경주이씨 중시조(中始祖) 이거명(李居明)의 21세손이며 익제(益齋)선생의 현손인 판윤공(判尹公)의 이름은 지대(之帶 : 이하 ‘공(公)’이라 한다), 호는 죽은(竹隱)이다. 족보에는 공(公)의 생존 시의 관직이 한성판윤(漢城判尹 ; 지금의 서울특별시장)으로 되어 있으나, 조선조 한성판윤 역대명단을 살펴보면 공(公)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공(公)의 한성판윤 역임사실은 그의 재임 시로부터 552년이 지난 2005년 10월 그를 추모하는 시향(時享)에서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 중시조의 39세손 이덕봉(李德峯) 선생의 후예인 이상필(李相弼) 종친이 공(公)이 당시의 왕인 태종(太宗)으로부터 받은 왕지(王旨 ; 임명장)를 받들어 와서 고유제를 올림으로써 공(公)의 한성판윤 재임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공(公)의 생애를 추적해 본다.
공(公)의 생졸년(生卒年 ; 태어나고 사망한 해)이 밝혀지지 않아 읍지(邑誌)나 실록, 임명장을 토대로 유추하면, 출생기를 고려 말(末)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때는 고려 공민왕 19년(1368)으로 당시에는 신돈(辛旽)과 이인임(李仁任)의 전횡과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였다. 이에 공(公)은 구국의 일념으로 무과를 지망하여 갑과로 등제했는데, 읍지에 의하면 이때의 공의 나이가 20세로 시기는 고려 창왕 원년(1389)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임명장인 왕지(王旨)에도 “李之帶 爲 嘉善大夫檢校漢城尹者(이지대 위 가선대부검교한성윤자) 영락14년(永樂十四年) 6월(六月) 초2일(初二日)”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태종의 어보(御寶)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공(公)이 급제한 당시의 무과는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3단계로 갑과(甲科) 3명, 을과(乙科) 5명, 병과(丙科) 20명을 선발하여 합격증으로 홍패(紅牌)를 주었다. 공(公)이 최초로 재임한 만호(萬戶)는 원나라 군제의 근본으로 민호(民戶)의 수를 말한다. 만호는 정4품이며, 공이 이후 재임한 수군절제사는 첨수사(僉水使), 첨사(僉使), 도만호(都萬戶)라 하기도 했다. 공(公)이 판윤을 지낸 당시의 한성 또는 한성부(漢城府)는 현재의 서울특별시를 말한다. 또한 한성판윤(漢城判尹)은 당시의 한성부 책임자로서 판윤(判尹)은 정 2품의 관직으로 일제시대까지 한성부사(漢城府使), 윤(尹), 부윤(府尹) 등으로 불렸다. 그러던 것이 1946년에 서울시장이 되었다가, 1949년에 서울시가 특별시가 되면서 특별시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한성부 판윤(判尹)의 업무는 주로 서울의 호구수를 통계내거나, 호적을 작성해서 보관하는 일, 주택이나 건축, 전답, 산림 등을 관장하고 토목공사의 시행, 세금징수, 공공재산관리, 각종 물물조사, 폭력행위단속, 순찰, 우마(牛馬) 관리, 신분증명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관리 감독하는 것이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는 세금과도 직접 연관되는 호적업무였다. 한성부(漢城府)의 위치는 당시의 중부 징청방(澄淸坊)의 호조와 이조 중간에 있었다. 한성부(漢城府)에서 근무하는 관원들은 판윤(判尹)을 비롯하여 90명 정도가 있었는데, 이들은 오전 6시경인 묘시(卯時)에 출근하여 오후 6시경인 유시(酉時)에 퇴근했고, 해가 짧을 때, 즉 겨울에는 오전 8시경인 진시(辰時)에 출근하여 오후 4시경인 신시(申時)에 퇴근했다. 옛날에도 썸머타임 제가 있었던 셈이다.
다시 공(公)의 얘기로 돌아간다. 왕지(王旨)에서 적고 있는 공(公)의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직책은 종2품으로, 문관에게 내리는 정2품 자헌대부라는 직책과 동등한 직책이다. 왕지(王旨)는 왕의 명령인 임명장으로 조선 초기에 사용한 말이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인하여 교지(敎旨)라 하다가 고종 때부터 왕을 황제라고 호칭하면서 칙명(勅命)이라고 고쳐 불렀다. 교지를 교부한 연호(年號) 영락(永樂)은 명나라 성조(成祖)의 연호로 태종16년(1416)을 말한다.
공(公)은 한성판윤으로 재임하다가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성삼문(成三門),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을 비롯한 70여명을 도륙할 때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천 여리나 떨어진 당시의 경주부(慶州府)로 낙향한 후 갈건야복(葛巾野服 ; ‘갈건과 베옷’이라는 뜻으로 ‘은사나 처사들의 의관’을 일컫는 말)으로 산천을 소요하며 조정(朝廷)의 일을 말하지 아니 하였다 한다. 공(公)의 생애를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 분 |
년 도 |
관 직 |
세수 |
비 고 |
고려공민왕19년 |
1369 |
출 생 |
1 |
고려 / 추정 |
고려 창왕 원년 |
1389 |
무과 급제 |
20 |
고려 / 추정 |
조선 태조 원년 |
1392 |
장자 점 출생 |
23 |
조선 / 추정 |
조선 태조 3년 |
1394 |
수군만호 |
25 |
조선실록기록 |
조선 태조 4년 |
1395 |
차자 묵 출생 |
28 |
추 정 |
조선 태종 7년 |
1409 |
수군절제사 |
40 |
추 정 |
조선 태종 16년 |
1416 |
한성판윤 임명 |
47 |
왕 지 |
조선 세종 5년 |
1423 |
장자 장사랑 임명 |
54 |
교지/장자 31세 |
조선 세종 25년 |
1443 |
차자 진사 급제 |
74 |
울산읍지/차자 48세 |
계 유 정 란 |
1453 |
낙남(낙향) |
84 |
추 정 |
조선 세조 4년 |
1459 |
별 세 |
90 |
추 정 |
경주이씨 판윤공파의 입향조 판윤공 이지대의 재실(齋室)
(경주시 보문동 명활산 소재)
경주이씨 출신 경주지방 명장(名將)과 독립투사(獨立鬪士)
여기에서 종친들과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고 있는 사실(史實)과 독립투쟁사 한두 가지를 추가한다. 많은 이들은 경주의 토착성씨인 경주이씨, 특히 경주부에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고 있던 필자의 직속 선대인 판윤공파(判尹公派)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외동읍과 경주일원이 온통 왜놈들과의 전장(戰場)이었는데, 그 후손들 중에서 왜적들과 싸운 의병장 한 사람도 없었는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다. 경주이씨 전체로도 일제 당시에 친일인사는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왜적들과 싸운 경주이씨 후손은 없었느냐는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도 사실을 전하지도 않았고, 알려주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의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경주이씨 판윤공(判尹公) 후손에도 분명 용맹무쌍한 명장(名將)이 있었다. 필자가 이미 “외동이야기” 442번과 444번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외동읍과 경남북 일원에서 왜적을 격파했던 이언춘(李彦春) 장군이 그 분이다.
장군은 비록 이순신장군 만한 중직(重職)과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다른 지역보다는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 일원에서 특별한 전공을 세운 분이다. 장군은 경주이씨 판윤공파 출신 훈련원정(訓練院正)인 충효재공(忠孝齋公) 안국(安國)의 차자(次子)로 태어났으며 판윤공 이지대의 7세손이다. 실기(實記)에서는 명종 원년(1546) 5월 15일 지금의 경주시 동천동(東川洞 ; 경주이씨 시조의 탄강지)에서 태어나 유년기부터 판단력이 출중하였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담력이 남달랐다고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당시 마을 훈장이었던 공(公)은 장정들을 모아 창의(倡義)하여 이시랑을 좌령장으로, 아들 상립(尙立)을 우령장으로 하는 의병조직을 지휘하였다. 장군은 1592 4월 23일 울산 개운포 전투에서 의병장 윤홍명, 이응춘(외동읍 출신), 장희춘 등과 합세하여 백운암에서 적을 크게 물리쳤고, 동년 5월 19일에는 울산 달현 전투에서 이시랑을 좌대장(左隊長)으로 아들 상립(尙立)은 우대장(右隊長)을 장악케 하고, 공(公)은 의병을 총지휘하여 야간공격으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1592년 12월 14일에는 박인국, 이여랑, 류정 등 의병장과 함께 지금의 외동읍 모화리 소재 원원사(遠願寺)에 집결하여 화살을 만드는 작업 중에 적의 침입을 받자 접전 끝에 왜적 70여명을 격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1594년에는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주부에 제수 되었다. 정규군의 장수가 된 장군은 1594년 9월 24일 은진 현감 이의(李穀), 방어사 권응수 등이 주도하는 영천 창암(蒼岩)전투에 나아가 유정(柳汀)과 합세하여 적을 섬멸하였으며, 시현(柴峴)전투에서는 좌령장 이시랑(李時良)과 우령장 상립(尙立)을 지휘하여 왜적을 격퇴하였다. 1594년 12월 10일에는 재침한 왜적을 다시 물리치고, 1596년 3월 3일에는 팔공산 회맹에 참가하여 의병장들과 함께 수성(守城)에 공을 세웠다.
이언춘(李彦春) 장군은 또 1595년 2월 28일, 김득복(金得福) 등과 함께 지금의 괘릉리(掛陵里) 소재 영지(影池)저수지 아래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을 한밤중에 저수지를 무너트려 수공(水攻)으로 격파함으로써 '영지전투(影池戰鬪)'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왜군에게 시달리던 방어리(防禦里) 백성들을 구출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당시 방어리에는 경주이씨의 판윤공파(判尹公派)의 후손들이 씨족부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지전투(影池戰鬪)란 부산포에 상륙한 왜병들이 영남좌로(嶺南左路 ; 영지초등학교 정문 통과)를 따라 북상하다가 지금의 괘릉리(掛陵里) 소재 영지저수지 둑 아래인 ‘영호’마을에 유진하고 있을 때 불국사에서 작전을 숙의하고 있던 천사장(天使將) 이눌(李訥), 격의장(激義將) 이여양, 분격장(奮擊將) 이언춘(李彦春) 등이 김득복군(金得福軍)과 합세하여 이들을 섬멸한 전투를 말한다.
위에서 말하는 영남좌로(嶺南左路)는 한양에서 죽령(竹嶺)으로 통하는 길인데, 서울에서 봉화삼로로 통하는 양주, 광주, 여주, 충주, 단양을 거쳐 죽령을 넘어서 경상좌도의 도시들인 충기, 영천, 안동, 의성, 의흥, 신령, 경주, 울산, 기장, 동래로 연결된다. 불국사역 부근에서는 외동읍 방어리에 소재하는 ‘만다리’와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 정문 앞을 경유하여 '원골'마을과 구어리, 입실리, 모화리를 거쳐 울산으로 이어졌다. 당시의 방어리 원동(院洞 ; 원골)에는 영남좌로의 ‘원(院)’이 있었고, 울산 방향 구어리(九魚里)에는 역촌(驛村 ; 구어역 ; 仇於驛 또는 九魚驛)이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만다리’는 필자의 모교 영지초등학교 뒤쪽 하천에 부설된 다리로 영남좌로(嶺南左路) 당시 이 다리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다리'라는 의미로 ‘만다리’라는 이름이 된 것인데, 당시의 다리는 길이 3.3m, 넓이 1.7m, 두께 30cm의 자연석(自然石)으로 된 돌다리였다. 최근에 이곳에 조성된 마을 이름도 ‘만다리’라 부른다. 그러나 최근 콘크리트다리로 교체하면서 이 다리의 돌들은 모두 '거랑' 바닥에 묻혀버렸다. 필자들이 영지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이 '만다리'를 하루에 두 번씩 지나다녔다. 당시의 '영남좌로'는 지금도 ‘구(舊) 한길’이라고 부른다.
다시 이언춘(李彦春) 장군의 영지전투(影池戰鬪) 얘기로 돌아간다. 당시 불국사(佛國寺)에 유진(留陣)하면서 영지저수지 못둑 밑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의 격퇴를 숙의하던 김득복과 이눌, 이언춘(李彦春) 등은 우선 김득상과 황희안 등을 파견하여 실상을 파악한 후 그날 밤 모든 관군과 의군(義軍)을 불국사에서 ‘영호’마을 뒤 소나무 숲에 잠입시키고, 그곳에서 3대로 나누어 매복하였다. 황희안을 분대장으로 하는 62명의 궁수(弓手)들은 마을 건너 편 숲에 매복시키고, 삽을 든 40여명은 김득복이 인솔하여 영지저수지 둑 안쪽에 은신하게 하였으며, 이눌의 군대 100여명과 이언춘(李彦春)의 군대는 공격조로 편성하여 대기했다.
300여명의 경상감영 소속 관군과 의병군(義兵軍)은 5경쯤(새벽3시경) 되자 행동을 개시하여 남쪽(영지초등학교 통학로가 있던 쪽)과 북쪽('밀개'가 있는 쪽으로 옛적 영못안과 신계리에 거주하던 영지초등학교 학생들이 통학하던 길)에서 못둑(구체적으로는 '밀개')을 끊었다. 지금은 견고한 옹벽이지만, 당시에는 20여명의 장정(壯丁)이 삽으로 끊을 정도로 허술한 '밀개(물막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전투로 후일 불국사(佛國寺)의 목조건물들이 왜병들의 보복으로 전소(全燒)되는 화를 당하기도 했다. 영지전투에서 자신들을 소탕한 관군과 의병들의 본부가 불국사에 있었고, 불국사의 승려(僧侶)들이 관군과 의병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후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언춘(李彦春)장군은 그 전공을 조정으로부터 인정 받아 후일 왕으로부터 증직으로 훈련대장(訓練大將)을 제수 받았고, 동 38년(1605)에는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양무(良武)의 시호를 하사받았다. 1609년 3월16일(음력 ; 일요일)에 사망했다. 후손들은 양무사(良武祠)를 세워 영정을 모시고 제향(祭享-나라에서 올리는 제사)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한 실기(實記)는 동경지에 실려 있다.
경주이씨 후손 중에는 앞서 소개한 대로 친일인사들도 있었지만,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이들도 많았다. 경주이씨 독립운동의 맥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정사(正使)였고, 광복군 정통령(正統領)이었던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그리고 50여명의 전가족을 이끌고 중국(지금의 중국이 아닌 국민당정부가 통치하던 '중화민국' 즉 '자유중국'을 말한다)으로 솔가망명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과 그의 막내동생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등 6형제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만주에 신흥군관학교를 설립하고, 3,5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여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수천 명의 왜적을 섬멸하였으며, 뒤에 3·1운동을 지휘하다가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다.
이후 성재 이시영(李始榮)은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과 법무총장을 맡아 임시정부 수호에 진력하다가 광복 후에 장형 이회영을 비롯한 5형제를 모두 이국(異國) 땅에 묻고, 홀로 귀국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기여한 공로로 초대 부통령(副統領)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948년 초대부통령에 당선된 이시영(李始榮)은 이승만대통령의 비민주적이고, 친일분자들을 앞세운 무단통치에 비분강개하여 임기 중인 1951년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불의를 좌시하지 않는 정의감 때문이었다. 현 중앙화수회 이종찬(李鍾贊) 총재(전 국정원장)와 민주당 이종걸(李鍾杰)의원이 그의 종손(從孫 ; 장형 이회영의 손자)이 된다. 이들 외에도 이규완(李圭完)·이규학(李圭鶴)·이봉우(李鳳雨)·이일범(李一凡)·이항발(李恒發) 등 50여명의 경주이씨들이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경주이씨 실전세계(失傳世系)와 신빙성(信憑性) 여부
다음은 앞에서 기술한 ‘정묘대종보(丁卯大宗譜) 실전세계(失傳世系)의 고찰(考察)’에서 지적하고 있는 시조 이후 소판공까지의 실전세계에 대한 신빙성과 관련한 기록을 약술한다. 대다수 종친들이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경주이씨는 시조이신 알평공이 하늘에서 경주의 ‘밝바위’에 하강했다는 사실을 전설 이상으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다. 신라의 초대군주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마당에 그 시조 이후 1천여 년 간의 실전계대를 어설픈 발굴경위로 되찾았다 해서 신빙성을 부여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본론에 앞서 먼저 실전세계(失傳世系)의 의미를 알아본다. 실전세계란 우리 경주이씨의 경우 시조는 신라의 알천양산촌장이고, 휘(諱 ; 이름)는 알평(謁平)이요, 신라건국 당시 육촌장회의를 주재했었고,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이씨(李氏)를 사성(賜姓) 받은 사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타 여러 문헌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시조이후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까지는 대수(代數)는 물론 선대조(先代祖)의 이름까지도 알 길이 없다 해서 실전세계(失傳世系)라고 말한다.
본론으로 들어간다. 조선 중엽에 이르러 우리나라 각 성씨들은 다투어 족보를 간행했는데, 우리 경주이씨도 1613년경 광양현감 이종언(李宗彦)이 동종계(同宗契)를 창설하고 족보를 작성했으나, 이 책은 백사(白沙)선생께서 쓴 서문만 전해 올 뿐이다. 다음해 1614년에는 서계(西溪)선생이 수초(手抄)했다는 단권보(單券譜)가 청주 거주 종인(宗人)이 소장하고 있다고 했으나 이 역시 찾을 길이 없었다. 그 후 경주이씨는 1684년에 발간된 갑자보(甲子譜)와 1748년 무진보(戊辰譜), 그리고 1814년 갑술보(甲戌譜)를 ‘갑무갑(甲戊甲) 삼대보’라 하는데, 이 족보들은 우리 경주이씨의 근간보(根幹譜)가 되고 있다. 물론 이 삼대보(三大譜)에도 시조 이후 1천년의 실전세계는 수록되지 않았다.
그 후 어느 족보에도 실전세계는 나타나지 않다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868년 무진간(戊辰刊) 백사파보(白沙波派譜) 건곤(乾坤) 2권 중 곤권(坤券) 말에 이유원(李裕元)이 쓴 발문(跋文)에서 실전세계에 대한 언급이 대두되었다. 이유원은 이 발문에서 『삼가 안찰하건대 급량부 대인으로부터 소판공에 이르기까지 실전한지가 천년이 되었다. 그런데 서경(평양)에서 바르지 못한 상계 28대를 등초하여 왔는데, 관제가 삼한과 더불어 다름이 있으니 실적(實籍)이 아님이 틀림없다.』(원문생략)라고 언급하면서 실전 28대의 존재와 이에 대한 신빙성 여부를 제기하였다.
최근에 이 책이 발견되어 다시 상찰(祥察)한 바 있으나, 기록된 내용 중 등장인물에 대한 관직이 ①신라 관직이 아닌 고려 또는 조선의 것이고, ②서문에는 동익이 소판공 30세손으로 되어 있는데, 범례에는 열헌공 22세손이라 하여 7세손 차이가 나며, ③서문에는 간행년도를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5년 정축(丁丑)이라고 하여 1877년에 해당하나, 범례에는 갑술보(甲戌譜, 1814년)이후 67년에 간행한다고 하고 있어 1881년에 해당되고, ④무인추(戊寅秋) 8월 풍덕동 강진(개풍군 동남단)에서 건곤보 2권을 얻었다고 하고 있어 이는 1878년에 해당되나 서문에는 그보다 8년 전인 1870년 경오파보(庚午派譜)에 기록했다고 되어 있는 등 여러 가지 모순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후 19세기말까지는 전혀 기록이 없다가 광무8년(1904년) 경산군수 이계필(李啓弼)이 재직 중에 쓴 족보서문에 『후손 계필이 임인(1902년) 여름에 마침내 이 고을 군수로 왔는데 일가사람 상준, 춘우가 옛날 간행본 한권을 받들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 시조 표암공 이하 소판공 이상 35대의 대계가 써 있는데, 책이 헐고 좀벌레가 먹어 다시 간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으니 그 주모함에 있어 어찌 성력을 다하지 않으리오" 이에 수선하기로 합의하여 오래지 않아 완성되었다. 아! 갑술보도 이 고을에서 간행하고 이 족보도 또 이 고을에서 간행 하였으니 한 고을에서 두 번 발간함이 우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드디어 삼가 서술한다.』라고 기재하면서 다시 실전세계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전 보전출판사 발행본 경주이씨 무오보(1978년) 본문 5면에는 “실전상계가 약 150년 전 쯤 분적종(分籍宗)인 합천이씨(陜川李氏) 가보에서 소판공의 상계에 관한 기록이 발견됨으로서 시조에서 중시조까지의 세계가 명백히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소판공은 시조로부터 36세손이 된다”고 하였고, 혹 경주이씨의 소극적인 파보나 지역적인 편보에도 성씨대관(姓氏大觀)과 같은 내용으로 기록된 바 있다.
그리고 분적종 합천이씨 세보에는 진천에 살던 경주이씨 이학영(李學榮)이 을유(乙酉) 7월에 ‘주문사’로 북경에 가다가 노변에서 경주이씨의 비갈(碑碣)이 산방에 서 있음을 보고 의아스러워 근처에 사는 동종인을 찾아가 물어보니 “본인도 조선국 익재공의 혈손으로 귀국 왕 말에 이 땅에 들어와 산다' 하기에 다시 묻기를 '보 (譜)가 있느냐' 하였더니 '있다' 하여 5일간을 더 머무르며 선조(先祖)의 실계(失系)를 찾아 당지 판각(唐紙 板刻)으로 된 보첩(譜牒) 1권을 받들고 본국에 돌아와 홍문관 도승지인 전주이씨 이인명(李仁明)에게 말했다.”
“이에 이인명이 찬하여 왕에게 진계(進啓)하니 왕이 윤허하기를 ‘실전이 만성중(萬姓中)에 혹 많이 있으되 다행히 실계를 찾았으니 더욱 다행한 일이다. 다시 계보에 계승할 것이며 입북(入北)한 이학영에게 별부직영(別副直營)하여 태릉에 학행(學行)할 것은 직부향사(直副向事)케 하라’하였다. 합천이씨 임신대보(壬申大譜 ; 1932년 발간)시에 나열하여 편차(編次)한 고로 기록을 전한다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기록과 성씨대관의 내용, 그리고 경주이씨의 소극적인 파보(波譜) 및 지역편보의 내용이 상좌(相左)될 뿐 아니라 경주이씨에 진천 거주 이학영이란 사람과 전주인 이인명이란 사람이 이조사(李朝史) 중 국조방목, 사마방목, 국조실록 등 여러 자료에도 고증이 없으므로 불가신(不可信) 불가의(不可疑)라고 별기(別記)하여 후일에 밝혀 주시기를 바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근거가 사실과 상이하여 믿을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으니 후일에 근거를 찾아주기 바란다는 뜻이다. 그러면 근거가 실제와 어떤 이유에서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본다. 첫째, 경주이씨의 분적종(分籍宗)인 합천이씨는 조선말까지 5회에 걸쳐 족보를 발간했으나, 실전 선계(先系)를 등재한 사실이 없고, 1932년 임신대보(壬申大譜) 작성 시에 언급한 실전세계 관련 기사도 1968년에 발간한 강양 합천이씨(陜川李氏) 계보에 같은 내용을 기록하면서 이는 1968년 대전 보전출판소에서 익재공파보와 평창이씨 세보에 의거한다고 되어 있다. 자기 고증(考證)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 때 중국으로 보낸 사신으로는 정기적으로 동지사(冬至使)와 정조사를 보냈고, 정사는 삼공육경(三公六卿: 삼공은 고려 때는 司馬 司空 司徒를 칭하고, 조선 때는 삼정승(三政丞)을 말했으며, 육경은 육조의 판서를 말함)이 되었으며, 부사(副使)와 서장관이 수행했다. 정기적으로 가는 사신 이외에 ‘주청사’가 있는데, 이조실록(李朝實錄)에 보면 ‘주청사’가 10회에 걸쳐 파견되었던 사실이 있으나 본문에 있는 ‘주문사’는 실록에 기록이 없다.
또한 왕에게 찬하여 진계(進啓)했다는 이인명은 이조실록 1750년부터 1770년 사이에 4회에 걸쳐 나타나기는 하나, 우선 그는 홍문관(弘文館)에 재직하지 않았고, 이학영 역시 진천에 살았던 것을 확인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사신(使臣)과 역직(譯職)에 재임했다면 마땅히 족보에 입보(入譜) 했을 것인데 보첩에 기록이 없다.
아울러 실전세계(失傳世系)가 처음으로 등재된 것이 1932년 대보(大譜)였다면, 대전서 간행된 경주이씨 무오보에 150여 년전 합천이씨 가보에서 발견했다는 것은 사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120년 전 이유원(李裕元)이 28대 실계를 명시하였음을 볼 때 그 당시에 35세 실전세계(失傳世系)가 동시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려 말에 요동반도(遼東半島)로 이거(移居)한 익재공 혈손이 실전세계를 소장하고 있었다면, 본국의 후손들이 모를 까닭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