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살이 25년,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꿈꾸며
1996년에 신시가지의 첫 입주자로 해운대에서 살기 시작한 지 어느새 25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집을 몇 번 옮기기는 했지만 좌동을 벗어난 적이 없고 밥 먹고 사는 일터는 20년이 넘도록 그 자리에 있습니다. 한곳에 오래 살다 보니 동네의 모습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아 왔습니다. 40년 전에 논밭이거나 바다였던 곳에 지금은 수십만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좌동, 중동, 우동은 부산의 가장 큰 주거지역이 되었습니다.
마린시티, 달맞이언덕, 센텀지구, 그리고 해운대 해변까지 초고층 건물이 앞다투어 들어서면서 해운대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마천루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각국에서 모여든 관광객들과 이주민들로 해운대는 국제도시가 되었습니다. 해운대에 산다는 것은 곧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곳에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해운대 주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법도 합니다. 더불어 해운대살이의 삶의 질과 만족도도 높아지고 있는 걸까요?
여기에는 분명 명암이 있습니다. 해운대에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건설회사는 아파트 지을 땅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땅은 한정되어 있고 이제는 도저히 아파트 부지로 볼 수 없는 자투리땅마저도 해운대에서는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크고 작은 재개발과 재건축이 곳곳에서 진행되어 해운대는 일 년 내내 공사로 인해 시끄럽고 혼잡합니다. 건설업자의 이익과 주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재개발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제 생각에는 좌·중·우동이 모두 아파트로 채워질 그날까지 멈추지 않을 듯합니다.
우리가 모두 걱정하는 대로 아파트의 폭발적 증가는 교통체증과 과밀학급 등의 여러 문제들을 야기합니다. 이미 해운대의 도로 체증은 해결책을 찾기 힘든 수준으로 악화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파트는 전혀 통제될 것 같지 않군요.
제가 살고 있는 집의 베란다로 보이는 풍경입니다. 신시가지는 아파트의 숲이긴 하지만 그나마 제척지가 있어서 동네 한가운데 숨구멍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이마저도 모두 계획도시로 개발되었다면 신시가지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요? 저는 가끔 30년 전 좌동의 모습이 아직 남아있는 골목길을 걷곤 합니다.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이 낯설고 기묘한 풍경을 스마트폰에 담는 마음은 조금 복잡합니다.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니까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산책을 합니다. 집을 나서 옛 동해남부선 그린레일웨이로 접어들면 예쁜 산책로가 저를 해운대 해변으로 이끌어줍니다. 그 중간에 옛 해운대역사가 쓸쓸하게 서 있고 철도 배후부지가 덩그러니 비어 있습니다. 끊어진 산책로, 그렇지만 저는 비어 있는 이 넓은 공간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지 늘 불안하기만 합니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은 결국 건설업자들에게 이 소중한 땅을 팔아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또 초고층의 아파트가 장벽처럼 들어서서 장산자락의 우1동 동네입구를 가로막아버리겠지요. 슬프지만 뉴욕의 센트럴파크보다 더 멋진 공원이 들어서서 해운대의 가치를 두 배는 끌어올릴 멋진 도시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욕망의 화신들이니까요.
자영업자로 25년을 동네 한구석을 지켜오면서 만나는 가장 슬픈 일은 오래된 가게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는 것을 지켜보는 일입니다. 은행나무 가로수는 나이가 들어가며 해마다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연출하고 우리들에게 소소한 행복을 안겨주는데,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오던 식당들, 문구점, 책방, 수리점, 빵 가게는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고 자리를 비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마치 하루살이 같은 가게들이 들어왔다가 곧 사라지는 일이 반복됩니다. 지하철 역세권 상가들의 목 좋은 대로변 가게들은 이미 통신회사나 대기업 프랜차이즈 매장들로 정리가 끝났습니다. 개인 자영업자들은 뒷골목으로 밀려나고 그마저도 시작과 끝이 없는 불경기를 버티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상가 임대료는 내릴 줄을 모릅니다. 건물주와 임대인은 비워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공생보다는 공멸인가요?
지역사회가 커지긴 했지만 동네가 유지되기 위해선 서로 돕고 살아야 합니다. 저의 단골 고객들로 인해서 저는 밥을 먹고 살아갑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빵을 사고, 매일 목욕탕에서 피로를 풀고, 3주마다 미용실을 찾고, 또 가끔은 치맥을 즐기거나 소주에 삼겹살도 구워야 동네경제가 돌아가는 거지요. 그런데 돈이 잘 돌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파트값이 오르지 않아서 돈을 쓸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인가요? 아니면 돈 되는 아파트를 잡느라 무리하게 당긴 대출 때문에 은행에 꼬박꼬박 이자 내느라 여유가 없어진 건가요? 아니면 대학 졸업하고 서울서 직장 다니는 아들딸에게 살만한 수도권 월세 아파트 보증금 마련해준다고 모아놓은 돈 다 떼주셨나요?
매일 다니는 출퇴근길의 늘어가는 빈 가게들을 마주치면 마음이 우울해집니다. 자영업자로 살아가는 일은 하루하루가 전투입니다. 나만 혼자 전장에서 살아남는 일은 잘 없지요. 우리는 어쩌면 운명공동체입니다. 겉으로 보면 초고층건물의 화려함이 가득한 해운대지만 그 그늘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주민들에게는 일상의 행복의 연속성이 절실합니다.
행복도시 해운대가 되기 위해서 정치와 행정의 역량을 어디에 쏟아야 하는지에 대해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지난 20여 년을 지켜온 해운대라이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이유입니다. 해운대라이프 500호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동호 / 해운대라이프 편집위원 (탑서울치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