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도래지(佛敎渡來地) 설(說)
2) 불갑사(佛甲寺) 대웅전(大雄殿)의 용마루 보주
이것을 볼 때, 영광군은 과거부터 불연(佛緣)이 깊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유적(佛敎遺蹟) 및 유물(遺物)만을 가지고 영광군이 백제불교(百濟佛敎)의 초전지역(初傳地域)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유적과 유물은 영광땅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 어느 구석에서라도 영광이 백제불교의 도래지라고 하는 단서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불갑사(佛甲寺)의 경우는 그 역사가 워낙 오래되었고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도 있어 考證을 위한 가장 중요한 단서(端緖)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3) 불회사(佛會寺)의 상량문(上樑文) 및 옥천사(玉泉寺) 사적(事蹟)
그런데 이 불회사(佛會寺)의 위치(位置)가 영광(靈光)과 멀지않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마라난타존자의 영광과의 인연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 상량문(上樑文)들이 사창시(四創時)의 것이고, 그것의 기록년대(記錄年代)가 술오년(戌午年)(1789)이며, 더불어 영광(靈光) 혹은 법성포(法聖浦)에 대한 언급이 없어 보다 분명한 기록이 아쉬운 실정이다.
호좌남평(湖左南平) 덕용산(德龍山) 불호사(佛護寺) 대법당(大法堂) 상량문(上樑文)에 기록(記錄)된 내용(內容)은 다음과 같다.
백암(栢庵) 성총(性聰)스님이 쓴 「성총(性聰) 백암집(栢庵集)」권하(卷下)의 「호남담양법운산옥천사사적(湖南潭陽法雲山玉泉寺事蹟)」에는 우리나라 불교(佛敎)의 전래(傳來)에 대해서 적은 글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4) 불 두(佛頭)
문제의 불두(佛頭)는 그 마모도(磨耗度)로 보나 자체의 석질(石質)로 보아도 이러한 사실들이 수긍된다. 이방(異邦)에 오면서 그것도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宗敎)를 전파할 목적으로 오는 성자(聖者)가 공수(空手)로 올리는 없지 않았겠는가. 한국역대 고승전(高僧傳)에서는 그의 인품과 행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神이 감동(感動)하여 계이(階異)를 영칙(英則)하고 뜻을 유방(遊方)에 약(約)하여 일우(一隅)에 불체(不滯)하였으며 백제에 들어온 후에 궁중(宮中)에서 경봉공양(敬奉供養)하니 그의 說을 품수(稟受)하여 上이 좋아하고 下가 化하여 불사(佛事)가 대흥(大興)하였다. 그의 사상과 교리로써 백제인(百濟人)을 교화하였다기 보다는 도승(道僧)으로써 신통변이(神通變異)와 기행(奇行)으로써 교화(敎化) 내지는 포교(布敎)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교리사상(敎理思想)이 없지는 않았을 터인 즉 미개한 국민수준에 맞추어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라는 도덕적 기본을 바탕에 깔고 토속신앙으로 길들여진 토착민들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신앙적 우상을 제시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존자는 미륵불(彌勒佛)을 모시고 황해를 건너왔을 것이다. 또 일우에 불체(不滯)라 하였으니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암(寺庵)을 마련하며 포교하였을 것이다. 우선 백제(百濟)땅으로는 첫발을 법성포(法聖浦)에 상륙하였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5) 직선로(直線路)와 문적(文籍)
고종(高宗) 33년(1896)에 규장각(奎章閣)에서 발간한 법성진지(法聖鎭誌)의 고적조(古蹟條)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신라통사 어강남시 등주어비지 진지서 대통치하 설치관사"
여기에서 말하는 신라는 통일신라이고 대통치(待通峙)라는 법성포 서방에 위치한 지명은 통사(通使)를 기다리는 고개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미 삼국시대부터 중국과 연결되는 해상로(海上路)가 개설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 지명(地名) 녹기설(綠記說)
첫째 상륙지점이라고 믿는 법성포(法聖浦)의 지명들이 장구한 시간적 간격이나 역사적 변화에도 구애받음이 없이 하나같이 불록적(佛綠的) 색채가 농후하다는 것이다. 조창(漕倉)의 단원(單元)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법성포에는 고려(高麗) 성종(成宗) 11년(1992년)에 조창(漕倉)이 건치되었는데 이때 조정에서는 부용포(芙蓉浦)라는 새로운 지명을 내렸고 여말(麗末)에 일시 문을 닫았던 조창(漕倉)을 복창(復倉)하면서 조선조(朝鮮朝)는 다시 법성포(法聖浦)라는 새로운 지명을 내렸는데 모두가 불연(佛緣) 깊은 이름들이다.
먼저 아무포(阿無浦)를 살펴보면 언제부터 불리운 지명인지는 알수가 없으나 새로운 지명 부용포(芙蓉浦)에 밀려 뒤안길로 사라진 시대는 서기 992년의 일이다. 여하간 이 아무(阿無)라는 염불(念佛)의 의미는 귀명무량수불(歸命無量壽佛) 귀명무량광불(歸命無量光佛)이니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돌아가 구원을 바란다는 말이다. 이 아무포(阿無浦)라는 지명이 서기 384년 난타존자(難陀尊者)의 도래를 기점으로 하였다면 그 이름은 장장 600년이나 계속되었을 것이다.
다음 부용포(芙蓉浦)인데 이 지명은 고려(高麗) 성종(成宗)이 조창(漕倉)을 건치하며서부터 조선건국후(朝鮮建國後) 복창(復倉)이 되는 시기까지 400년간 불리운 이름으로서 이 역시 불교적 색채가 깊은 지명이다. 부용(芙蓉)이란 연화(蓮花)의 별칭으로서 연꽃은 본래 불교(佛敎)에서 신성(神聖)과 순결(純潔)의 표상(表象)인 것이다. 불상(佛像)은 연화좌(蓮花坐) 위에 봉안되며 불교의 모든 행사에는 의례 연화등(蓮花燈)이 등장한다.
또 승려의 가사(袈裟)를 연화의(蓮花衣)라 하며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연화국(蓮花國)이라고도 한다. 끝으로 법성포(法聖浦)는 현재까지 약 600년 동안 불리우는 지명인데 역시 전기한 양지명(兩地名) 더불어 불연(佛緣) 깊은 지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 승려의 가사(袈裟)를 연화의(蓮花衣)라 하며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연화국(蓮花國)이라고도 한다. 끝으로 법성포(法聖浦)는 현재까지 약 600년 동안 불리우는 지명인데 역시 전기한 양지명(兩地名) 더불어 불연(佛緣) 깊은 지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영광(靈光)을 자의대로 풀면 신령(神靈)스러운 빛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광(靈光)이라는 단어가 쓰인 예를 고사에서 찾아보면 불가(佛家)에 먼저 나온다. 한국력대고승전(韓國歷代高僧傳)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실려 있으며 그 설화중에 영광(靈光)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나오고 있다. 여말(麗末)의 고승(高僧) 뇌옹화상(瀨翁和尙)이 1350년 6월에 중국의 정자선사(淨慈禪寺)에 이르렀을 때 그 절의 몽당노숙(蒙堂老宿)이 묻기를 "그대의 나라에도 선법(禪法)이 있는가"하니 게(偈)(불시(佛詩))로 답하되 " 일출부상국 강남해악홍 막간동여별 영광선고통(日出扶桑國 江南海嶽紅 莫間同與別 靈光宣古通)"(해가 부상국에서 떠 강남해악에 붉었으니 같고 다른 것은 묻지마오, 영광은 옛에 뻗쳐 통하였도다.)
또 승려의 가사(袈裟)를 연화의(蓮花衣)라 하며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연화국(蓮花國)이라고도 한다. 끝으로 법성포(法聖浦)는 현재까지 약 600년 동안 불리우는 지명인데 역시 전기한 양지명(兩地名) 더불어 불연(佛緣) 깊은 지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영광(靈光)을 자의대로 풀면 신령(神靈)스러운 빛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광(靈光)이라는 단어가 쓰인 예를 고사에서 찾아보면 불가(佛家)에 먼저 나온다. 한국력대고승전(韓國歷代高僧傳)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실려 있으며 그 설화중에 영광(靈光)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나오고 있다. 여말(麗末)의 고승(高僧) 뇌옹화상(瀨翁和尙)이 1350년 6월에 중국의 정자선사(淨慈禪寺)에 이르렀을 때 그 절의 몽당노숙(蒙堂老宿)이 묻기를 "그대의 나라에도 선법(禪法)이 있는가"하니 게(偈)(불시(佛詩))로 답하되 " 일출부상국 강남해악홍 막간동여별 영광선고통(日出扶桑國 江南海嶽紅 莫間同與別 靈光宣古通)"(해가 부상국에서 떠 강남해악에 붉었으니 같고 다른 것은 묻지마오, 영광은 옛에 뻗쳐 통하였도다.)
2. 우리고장 최초의 지명(地名)
본래 지명이란 지형이나 지세 등 자연조건에 다라 명명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지방의 역사적 배경이나 지역주민의 정치적 세력에 의하여 붙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고장 최조의 지명이 무시이(武尸伊)는 통상적인 유형에 속한다. 그렇다면 무시이(武尸伊)라는 이 한자표기는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또 읽기는 어떻게 읽는 것이 정확할까, 여간 난해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말고 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데 하물며 남의 글을 빌려쓴 이 무시이(武尸伊)라는 지명의 발음과 의미를 밝혀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계(斯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에는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소리(音)만으로 쓴 것이 아니라 뜻(訓)으로도 쓴 흔적이 많다. 그와 같은 연구결과를 토대로 하여 무시이(武尸伊)를 읽으면 "물"이라고 읽어야 한다. 당시 지명의 한자표기에서 이자(伊字)는 발음하지 않는 어조사(語助辭)로 하였고 시자는 리을로 쓴 흔적이 많으므로 무자(武字)를 소리나는 대로 발음할 경우 무시이(武尸伊)는 "물"이 되는데 이는 이 고장이 지니고 있는 자연조건에도 부합된다. 과연 이 고장의 물의 고장이었다.
지금도 홍농(弘農), 법성(法聖), 백수(白岫), 염산(鹽山) 등은 등을 끼고 있지만 옛날에는 군남(郡南), 군서(郡西), 대마(大馬)에도 바닷물이 드나들었고 그 뿐 아니라 영광읍(靈光邑)에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으므로 배들이 출입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를 실증하는 좋은 예가 물무산의 존재이다. 수퇴산(水退山)이라도 하는 이산은 교촌리(校村里)의 남동방(南東方)에 위치한 山으로서 山名이 예시하듯이 물을 매어 놓은 곳 다시 말해서 물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끝지은 산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와 같이 이 고장은 간탁(干拓)이 없던 옛날에는 흡사 물속에 들어앉은 듯한 지형을 하고 있었으니 선인들이 지명을 "물"이라고 하였음도 무리는 아니다. 시자(尸字)를 리을로 발음한(리을 받침으로 쓰인) 예(例)는 신라향가중(新羅鄕歌中)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가 있다. 예시하면 곡옥시(哭屋尸)는 "울" 환어시(還於尸)는 "돌", 회어시(廻於尸)도 "돌", 도시(道尸)는 "길", 숙시(宿尸)는 "잘"이라고 이독학(吏讀學)에서는 해독한다.
3. 백제(百濟)의 지리적(地理的) 환경(環境)과 문화의 특색
이와 같은 자연발생적 요구에 따라 평온하던 부족사회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이 생기게 되고 이러한 지배체제는 국가라고 하는 강력한 권력집단을 등장하게 하였다. 이렇듯 내부적으로 결속, 제도화한 국가라고 하는 대단위 집단은 외부적으로는 영토의 한계를 분명히 하거나, 혹은 그것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야기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한반도(韓半島)에 맨먼저 국가를 세운 것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신라이다. 20년후(年後)인 BC 37年에는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고주몽(高朱蒙)이 고구려를 건국하였는데 우리고장이 속한 백제(百濟)는 그보다 19년 늦은 BC 18년에야 탄생하였다. 고주몽(高朱蒙)의 아들인 온조(溫祚)가 마한(馬韓)의 일부족국(一部族國)인 백제(百濟) 지금의 광주지방(廣州地方)에다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백제라 하였으나 마한(馬韓)의 옛 영토를 완전히 회복하고 명실공히 국가권을 체계화한 것은 13대 근초고왕대(近肖古王代)의 일이다.
그러나 백제는 그가 지닌 두가지의 자연조건 때문에 북방의 고구려와 동방의 신라에게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였다. 첫째 조건은 양국의 중간에 위치하였다는 것이요, 둘째는 가장 비옥한 한강을 차지하고있다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농경(農耕)을 생활의 기본으로 하는지라 광활하고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물이 흐르는 강이 영토분쟁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들만 들어도 西紀 371년경 고구려는 백제의 한강유역을 공략하기 위하여 중국의 전진(前秦)과 남방(南方)의 신라를 동맹국(同盟國)으로 함에 백제(百濟)는 그에 대처하기 위하여 중원(中原)의 동진(東晋)과 바다 건너 일본과 연합하였고 서기(西紀) 397年(17代 아신왕(阿辛王) 6年)에는 고구려(高句麗)의 광개토왕(廣開土王)에 의해 임진강(臨津江) 유역(流域)을 빼앗겼다. |
출처: 돗가비의 요술방망이 원문보기 글쓴이: 길주
첫댓글 유익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