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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역사 스크랩 영광의 삼국시대
서화주 추천 0 조회 66 11.03.10 12:0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1. 불교도래지(佛敎渡來地) 설(說)
백제(百濟)땅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사람은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이며 동진(東晋)에서 서기 384년(침류왕(枕流王) 원년(元年))에 도래하였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나 신라(新羅)와는 달리 어떠한 경로(經路)를 통하여 들어왔는지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불가(佛家)에서는 법성포(法聖浦) 도래지(渡來地) 說로 정착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동진(東晋)에서 백제땅에 불법(佛法)을 전하고저 건너와서 첫발을 내디딘 곳이 우리고장 법성포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를 충분히 뒷받침 해주는 근거(根據)가 있으니 차례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불갑사(佛甲寺)의 가람명(伽藍名)
불갑사(佛甲寺)의 갑자(甲字)는 첫째라는 뜻을 가진다. 예로부터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에 속한 우리나라에서는 으뜸이라는 뜻을 갑자(甲字)를 표기해 왔다. 그러한 의미로 본다면 불갑(佛甲)은 부처의 으뜸이다. 다시 새기면 부처는 불사(佛寺)를 의미하며 으뜸이란 최초라는 뜻과도 통하게 된다. 정리해 보면 이는 최초로 마련된 절이라는 이름이 된다

 

2) 불갑사(佛甲寺) 대웅전(大雄殿)의 용마루 보주
영광군내에서 현재까지도 법등을 이어오고 있는 모악산(母岳山) 불갑사(佛甲寺)를 비롯하여 연흥사(烟興寺), 은선암(隱仙庵)과 같은 유서깊은 고찰(古刹)이 있으며, 79곳에서 절터 혹은 절이 있었으리라고 짐작케하는 불교유적 및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영광군은 과거부터 불연(佛緣)이 깊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유적(佛敎遺蹟) 및 유물(遺物)만을 가지고 영광군이 백제불교(百濟佛敎)의 초전지역(初傳地域)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유적과 유물은 영광땅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 어느 구석에서라도 영광이 백제불교의 도래지라고 하는 단서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불갑사(佛甲寺)의 경우는 그 역사가 워낙 오래되었고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도 있어 考證을 위한 가장 중요한 단서(端緖)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가운데에서도 불갑사(佛甲寺) 대웅전(大雄殿) 지붕의 용마루 중앙에 장식된 보주형의 장치물은 인도 혹은 백제불교미술의 원형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여지는 남중국의 불교양식과 관련성이 보이고 있어 고증을 위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3) 불회사(佛會寺)의 상량문(上樑文) 및 옥천사(玉泉寺) 사적(事蹟)
근년에 들어 나주(羅州) 덕용산(德龍山) 불회사佛會寺(불회사(佛護寺)) 대법당(大法堂) 중건(重建) 상량문(上樑文)이 대웅전(大雄殿) 해체복원시(解體復元時) 발견되었으며, 대양문(大陽門) 중건(重建) 상량문(上樑文) 또한 발견되어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가 불회사(佛會寺)를 초창(初創)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불회사(佛會寺)의 위치(位置)가 영광(靈光)과 멀지않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마라난타존자의 영광과의 인연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 상량문(上樑文)들이 사창시(四創時)의 것이고, 그것의 기록년대(記錄年代)가 술오년(戌午年)(1789)이며, 더불어 영광(靈光) 혹은 법성포(法聖浦)에 대한 언급이 없어 보다 분명한 기록이 아쉬운 실정이다.

 

호좌남평(湖左南平) 덕용산(德龍山) 불호사(佛護寺) 대법당(大法堂) 상량문(上樑文)에 기록(記錄)된 내용(內容)은 다음과 같다.
…초창주(初創主)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 백제초조(百濟初祖) 삼한고승(三韓高僧) 교해지의(敎海之義) 용사시해적(龍捨是奚適) 선림지율(禪林之律) 호이사난구(虎離斯難求). 연대즉동진태화원년야(年代卽東晋太和元年也)…
한편, 대양문(大陽門) 상량문(上樑文)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記錄)이 있다.
…백제지초조난타존자시개(百濟之初祖難陀尊者始開)…
이상의 내용을 보면 마라난타존자가 동진으로부터 백제 땅으로 도래하여 영광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불교를 전파했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단지 마라난타존자가 동진에서부터 배를 타고 한반도에 도래할 때, 그 지점이 영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분명치가 않은 입장이다. 그런데 백암(栢庵) 성총(性聰)스님이 적은「호남담양법운산옥천사사적(湖南潭陽法雲山玉泉寺事蹟)」을 보면 백제불교 영광도래설에 대한 보다 근거있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다.

 

백암(栢庵) 성총(性聰)스님이 쓴 「성총(性聰) 백암집(栢庵集)」권하(卷下)의 「호남담양법운산옥천사사적(湖南潭陽法雲山玉泉寺事蹟)」에는 우리나라 불교(佛敎)의 전래(傳來)에 대해서 적은 글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신승순도 내고구려 진함안이년임신 진주부견송지 즉소수림왕시야, 눌지왕시 사문 흑호자 자고구려지 즉신나제십구왕야, 우호승마라난타 자진내마한 진태원구년갑신 즉백제침류왕시야…
…(有神僧順道 來高句麗 晋咸安二年壬申 秦主符堅送之 卽小獸林王時也, 訥祗王時 沙門 黑胡子 自高句麗至 卽新羅第十九王也, 又胡僧摩羅難陀 自晋內馬韓 晋太元九年甲申 卽百濟枕流王時也)…
이 글의 내용을 보면 백제불교(百濟佛敎) 도래지(渡來地)를 입증(立證)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단서(端緖)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호승(胡僧)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가 동진(東晋)으로부터 도래(渡來)한 곳이 곧 마한(馬韓)의 땅이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때가 백제(百濟) 침류왕(枕流王)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영광(靈光)이 마한(馬韓) 땅이었다는 사실과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는 백제불교(百濟佛敎) 영광도래설(靈光渡來說)을 종합해 볼 때, 또한 백암(栢庵) 성총(性聰)스님이 불갑사(佛甲寺)에 주석하신 바가 있음을 볼 때, 마라난타존자의 도래지가 영광지역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가능성은 대단히 높은 것으로 보여진다.

 

4) 불 두(佛頭)
지금 법성면(法聖面) 진내리(鎭內里) 925번지 벼랑밑에 가면 난타존자(難陀尊者)가 도래시(渡來時)에 모시고 왔다고 전하고 미륵불(彌勒佛)의 두상부분(頭上部分)이 모셔져 있다. 불가(佛家)에서의 미륵불(彌勒佛)은 두율천(兜率天)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 치세(治世)에 하생(下生)하여 성불(成佛)한 부처로서 석가불(釋伽佛)이 제도(濟度)하지 못한 유록(有綠) 중생(衆生)들을 구제한다는 부처이다.

 

문제의 불두(佛頭)는 그 마모도(磨耗度)로 보나 자체의 석질(石質)로 보아도 이러한 사실들이 수긍된다. 이방(異邦)에 오면서 그것도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宗敎)를 전파할 목적으로 오는 성자(聖者)가 공수(空手)로 올리는 없지 않았겠는가. 한국역대 고승전(高僧傳)에서는 그의 인품과 행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神이 감동(感動)하여 계이(階異)를 영칙(英則)하고 뜻을 유방(遊方)에 약(約)하여 일우(一隅)에 불체(不滯)하였으며 백제에 들어온 후에 궁중(宮中)에서 경봉공양(敬奉供養)하니 그의 說을 품수(稟受)하여 上이 좋아하고 下가 化하여 불사(佛事)가 대흥(大興)하였다. 그의 사상과 교리로써 백제인(百濟人)을 교화하였다기 보다는 도승(道僧)으로써 신통변이(神通變異)와 기행(奇行)으로써 교화(敎化) 내지는 포교(布敎)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교리사상(敎理思想)이 없지는 않았을 터인 즉 미개한 국민수준에 맞추어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라는 도덕적 기본을 바탕에 깔고 토속신앙으로 길들여진 토착민들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신앙적 우상을 제시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존자는 미륵불(彌勒佛)을 모시고 황해를 건너왔을 것이다. 또 일우에 불체(不滯)라 하였으니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암(寺庵)을 마련하며 포교하였을 것이다. 우선 백제(百濟)땅으로는 첫발을 법성포(法聖浦)에 상륙하였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존자(尊者)는 언어, 지리 풍습 등을 익히기 위하여 한동안 칩거한 후 불갑사(佛甲寺)와 불회사(佛會寺)를 짓고 입경(入京)하였을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5) 직선로(直線路)와 문적(文籍)
중국의 산동반도(山東半島)와 백제의 법성포(法聖浦)(당시(當時)의 지명은 미상(未詳))와는 위도상의 직선거리이기 때문에 중원(中原)땅에서 황해(黃海)를 건너기에는 가장 가까운 지점이었다. 때문에 이전부터 법성포(法聖浦)에는 중국과 직거래하는 수로가 열려 있었다.

 

고종(高宗) 33년(1896)에 규장각(奎章閣)에서 발간한 법성진지(法聖鎭誌)의 고적조(古蹟條)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신라통사 어강남시 등주어비지 진지서 대통치하 설치관사"
"(新羅通使 於江南時 登舟於比地 鎭之西 待通峙下 設置官舍)"

 

여기에서 말하는 신라는 통일신라이고 대통치(待通峙)라는 법성포 서방에 위치한 지명은 통사(通使)를 기다리는 고개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미 삼국시대부터 중국과 연결되는 해상로(海上路)가 개설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 지명(地名) 녹기설(綠記說)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연구분석함에 있어서 확실한 문헌이나 고증할 만한 자료마저 미흡할 때에는 당해지역의 지명과 연관지어 풀어나가는 연구방법이다. 이제 우리도 마라난타(摩羅難陀)의 법성포 상륙을 고증함에 있어서 완전한 자료가 없으니 이러한 학설에 의존하는 것이다.

 

첫째 상륙지점이라고 믿는 법성포(法聖浦)의 지명들이 장구한 시간적 간격이나 역사적 변화에도 구애받음이 없이 하나같이 불록적(佛綠的) 색채가 농후하다는 것이다. 조창(漕倉)의 단원(單元)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법성포에는 고려(高麗) 성종(成宗) 11년(1992년)에 조창(漕倉)이 건치되었는데 이때 조정에서는 부용포(芙蓉浦)라는 새로운 지명을 내렸고 여말(麗末)에 일시 문을 닫았던 조창(漕倉)을 복창(復倉)하면서 조선조(朝鮮朝)는 다시 법성포(法聖浦)라는 새로운 지명을 내렸는데 모두가 불연(佛緣) 깊은 이름들이다.

 

먼저 아무포(阿無浦)를 살펴보면 언제부터 불리운 지명인지는 알수가 없으나 새로운 지명 부용포(芙蓉浦)에 밀려 뒤안길로 사라진 시대는 서기 992년의 일이다. 여하간 이 아무(阿無)라는 염불(念佛)의 의미는 귀명무량수불(歸命無量壽佛) 귀명무량광불(歸命無量光佛)이니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돌아가 구원을 바란다는 말이다. 이 아무포(阿無浦)라는 지명이 서기 384년 난타존자(難陀尊者)의 도래를 기점으로 하였다면 그 이름은 장장 600년이나 계속되었을 것이다.

 

다음 부용포(芙蓉浦)인데 이 지명은 고려(高麗) 성종(成宗)이 조창(漕倉)을 건치하며서부터 조선건국후(朝鮮建國後) 복창(復倉)이 되는 시기까지 400년간 불리운 이름으로서 이 역시 불교적 색채가 깊은 지명이다. 부용(芙蓉)이란 연화(蓮花)의 별칭으로서 연꽃은 본래 불교(佛敎)에서 신성(神聖)과 순결(純潔)의 표상(表象)인 것이다. 불상(佛像)은 연화좌(蓮花坐) 위에 봉안되며 불교의 모든 행사에는 의례 연화등(蓮花燈)이 등장한다.

 

또 승려의 가사(袈裟)를 연화의(蓮花衣)라 하며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연화국(蓮花國)이라고도 한다. 끝으로 법성포(法聖浦)는 현재까지 약 600년 동안 불리우는 지명인데 역시 전기한 양지명(兩地名) 더불어 불연(佛緣) 깊은 지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원래 불가(佛家)에서는 불(佛), 불(佛), 승(僧)을 삼보(三寶)라고 하는데 불(佛)은 부처요, 법(法)은 불경(佛經)이며, 승(僧)은 성인(聖人)을 이른다. 그렇다면 법성(法聖)이라는 말의 어원(語源)은 법(法)을 가지고 성자(聖者)가 도래한 곳이라는 의미로 집약된다. 이제 영광이라는 지명의 불연성(佛緣性)에 대(對)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또 승려의 가사(袈裟)를 연화의(蓮花衣)라 하며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연화국(蓮花國)이라고도 한다. 끝으로 법성포(法聖浦)는 현재까지 약 600년 동안 불리우는 지명인데 역시 전기한 양지명(兩地名) 더불어 불연(佛緣) 깊은 지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원래 불가(佛家)에서는 불(佛), 불(佛), 승(僧)을 삼보(三寶)라고 하는데 불(佛)은 부처요, 법(法)은 불경(佛經)이며, 승(僧)은 성인(聖人)을 이른다. 그렇다면 법성(法聖)이라는 말의 어원(語源)은 법(法)을 가지고 성자(聖者)가 도래한 곳이라는 의미로 집약된다. 이제 영광이라는 지명의 불연성(佛緣性)에 대(對)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영광(靈光)을 자의대로 풀면 신령(神靈)스러운 빛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광(靈光)이라는 단어가 쓰인 예를 고사에서 찾아보면 불가(佛家)에 먼저 나온다. 한국력대고승전(韓國歷代高僧傳)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실려 있으며 그 설화중에 영광(靈光)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나오고 있다. 여말(麗末)의 고승(高僧) 뇌옹화상(瀨翁和尙)이 1350년 6월에 중국의 정자선사(淨慈禪寺)에 이르렀을 때 그 절의 몽당노숙(蒙堂老宿)이 묻기를 "그대의 나라에도 선법(禪法)이 있는가"하니 게(偈)(불시(佛詩))로 답하되 " 일출부상국 강남해악홍 막간동여별 영광선고통(日出扶桑國 江南海嶽紅 莫間同與別 靈光宣古通)"(해가 부상국에서 떠 강남해악에 붉었으니 같고 다른 것은 묻지마오, 영광은 옛에 뻗쳐 통하였도다.)

 

또 승려의 가사(袈裟)를 연화의(蓮花衣)라 하며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연화국(蓮花國)이라고도 한다. 끝으로 법성포(法聖浦)는 현재까지 약 600년 동안 불리우는 지명인데 역시 전기한 양지명(兩地名) 더불어 불연(佛緣) 깊은 지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원래 불가(佛家)에서는 불(佛), 불(佛), 승(僧)을 삼보(三寶)라고 하는데 불(佛)은 부처요, 법(法)은 불경(佛經)이며, 승(僧)은 성인(聖人)을 이른다. 그렇다면 법성(法聖)이라는 말의 어원(語源)은 법(法)을 가지고 성자(聖者)가 도래한 곳이라는 의미로 집약된다. 이제 영광이라는 지명의 불연성(佛緣性)에 대(對)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영광(靈光)을 자의대로 풀면 신령(神靈)스러운 빛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광(靈光)이라는 단어가 쓰인 예를 고사에서 찾아보면 불가(佛家)에 먼저 나온다. 한국력대고승전(韓國歷代高僧傳)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실려 있으며 그 설화중에 영광(靈光)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나오고 있다. 여말(麗末)의 고승(高僧) 뇌옹화상(瀨翁和尙)이 1350년 6월에 중국의 정자선사(淨慈禪寺)에 이르렀을 때 그 절의 몽당노숙(蒙堂老宿)이 묻기를 "그대의 나라에도 선법(禪法)이 있는가"하니 게(偈)(불시(佛詩))로 답하되 " 일출부상국 강남해악홍 막간동여별 영광선고통(日出扶桑國 江南海嶽紅 莫間同與別 靈光宣古通)"(해가 부상국에서 떠 강남해악에 붉었으니 같고 다른 것은 묻지마오, 영광은 옛에 뻗쳐 통하였도다.)

 

2. 우리고장 최초의 지명(地名)
한강유역에 부여족(扶餘族)이 백제를 세운 것은 BC 18년의 일이다. 그러나 정작 국가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8대 고이왕(古爾王)때 부터였고 우리고장이 속해 있는 마한(馬韓)의 중남부 지방까지 행정적으로 정리된 것은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때이다. 이때에 우리고장에 붙여진 이름이 무시이(武尸伊)이고 이것이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우리고장 최초의 지명인 셈이다.

 

본래 지명이란 지형이나 지세 등 자연조건에 다라 명명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지방의 역사적 배경이나 지역주민의 정치적 세력에 의하여 붙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고장 최조의 지명이 무시이(武尸伊)는 통상적인 유형에 속한다. 그렇다면 무시이(武尸伊)라는 이 한자표기는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또 읽기는 어떻게 읽는 것이 정확할까, 여간 난해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말고 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데 하물며 남의 글을 빌려쓴 이 무시이(武尸伊)라는 지명의 발음과 의미를 밝혀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계(斯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에는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소리(音)만으로 쓴 것이 아니라 뜻(訓)으로도 쓴 흔적이 많다. 그와 같은 연구결과를 토대로 하여 무시이(武尸伊)를 읽으면 "물"이라고 읽어야 한다. 당시 지명의 한자표기에서 이자(伊字)는 발음하지 않는 어조사(語助辭)로 하였고 시자는 리을로 쓴 흔적이 많으므로 무자(武字)를 소리나는 대로 발음할 경우 무시이(武尸伊)는 "물"이 되는데 이는 이 고장이 지니고 있는 자연조건에도 부합된다. 과연 이 고장의 물의 고장이었다.

 

지금도 홍농(弘農), 법성(法聖), 백수(白岫), 염산(鹽山) 등은 등을 끼고 있지만 옛날에는 군남(郡南), 군서(郡西), 대마(大馬)에도 바닷물이 드나들었고 그 뿐 아니라 영광읍(靈光邑)에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으므로 배들이 출입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를 실증하는 좋은 예가 물무산의 존재이다. 수퇴산(水退山)이라도 하는 이산은 교촌리(校村里)의 남동방(南東方)에 위치한 山으로서 山名이 예시하듯이 물을 매어 놓은 곳 다시 말해서 물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끝지은 산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와 같이 이 고장은 간탁(干拓)이 없던 옛날에는 흡사 물속에 들어앉은 듯한 지형을 하고 있었으니 선인들이 지명을 "물"이라고 하였음도 무리는 아니다. 시자(尸字)를 리을로 발음한(리을 받침으로 쓰인) 예(例)는 신라향가중(新羅鄕歌中)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가 있다. 예시하면 곡옥시(哭屋尸)는 "울" 환어시(還於尸)는 "돌", 회어시(廻於尸)도 "돌", 도시(道尸)는 "길", 숙시(宿尸)는 "잘"이라고 이독학(吏讀學)에서는 해독한다.

 

3. 백제(百濟)의 지리적(地理的) 환경(環境)과 문화의 특색
기원전 반세기 경까지도 한반도에 들어와 살던 종족(예맥(濊貊) 퉁그스족)들은 부족사회의 형태에서 소유권의 한계나 지배권의 확대를 의식하지 않은 채 그저 평화스럽게 살아갔다. 그러나 점차 인구가 증가하고 인지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지배권이 성립되면서 영토의 한계라고 하는 커다란 문제가 제기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자연발생적 요구에 따라 평온하던 부족사회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이 생기게 되고 이러한 지배체제는 국가라고 하는 강력한 권력집단을 등장하게 하였다. 이렇듯 내부적으로 결속, 제도화한 국가라고 하는 대단위 집단은 외부적으로는 영토의 한계를 분명히 하거나, 혹은 그것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야기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한반도(韓半島)에 맨먼저 국가를 세운 것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신라이다. 20년후(年後)인 BC 37年에는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고주몽(高朱蒙)이 고구려를 건국하였는데 우리고장이 속한 백제(百濟)는 그보다 19년 늦은 BC 18년에야 탄생하였다. 고주몽(高朱蒙)의 아들인 온조(溫祚)가 마한(馬韓)의 일부족국(一部族國)인 백제(百濟) 지금의 광주지방(廣州地方)에다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백제라 하였으나 마한(馬韓)의 옛 영토를 완전히 회복하고 명실공히 국가권을 체계화한 것은 13대 근초고왕대(近肖古王代)의 일이다.

 

그러나 백제는 그가 지닌 두가지의 자연조건 때문에 북방의 고구려와 동방의 신라에게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였다. 첫째 조건은 양국의 중간에 위치하였다는 것이요, 둘째는 가장 비옥한 한강을 차지하고있다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농경(農耕)을 생활의 기본으로 하는지라 광활하고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물이 흐르는 강이 영토분쟁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수류역(漢水流域)은 한반도 최대의 평야이며 젖줄이다. 여기에 또 한가지 백제가 숙명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당시 한반도에 성립한 국가는 3개였기 때문에 중간에 위치한 백제는 南, 北 어느 한 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들만 들어도 西紀 371년경 고구려는 백제의 한강유역을 공략하기 위하여 중국의 전진(前秦)과 남방(南方)의 신라를 동맹국(同盟國)으로 함에 백제(百濟)는 그에 대처하기 위하여 중원(中原)의 동진(東晋)과 바다 건너 일본과 연합하였고 서기(西紀) 397年(17代 아신왕(阿辛王) 6年)에는 고구려(高句麗)의 광개토왕(廣開土王)에 의해 임진강(臨津江) 유역(流域)을 빼앗겼다.
또 475年(개로왕(蓋鹵王)21年)에는 수도인 남한산성(南漢山城)이 고구려군(高句麗軍)에게 함락을 당하였고 22代 문주왕대(文周王代)에는 고구려의 침공에 밀려 도읍을 태진(態津)(공주(公州))으로 옮겼다가 26代 성왕대(聖王代)에 다시 부여(扶餘)로 천도(遷都)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다.
551年(성왕(聖王) 29年)에는 실지회복(失地回復)을 꾀하고자 신라와 동맹을 맺었으나 그들의 배신으로 한간유역을 잃는 아픔도 맞보았다. 백제는 배신한 신라는 보복하고자 고구려에 손을 뻗었으나 신라의 女王 선덕(善德)은 나당련합(羅唐聯合)으로 대적(對敵)하였다.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金庾信)의 연합군에 비참한 최후를 고한 계백(階伯)의 백제는 망국(亡國)의 한(恨)을 씹어야만 하였다. 반면 승기(勝機)를 잡은 신라(新羅)는 고구려(高句麗)마저 병합함으로써 성공(成功)을 거두었다.
이상에서 개설한 바와 같이 백제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요 치욕(恥辱)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중첩(重疊)되는 전란(戰亂)의 와중에서도 백제인들은 그들만의 독창적인 문화와 예술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갔다. 이때 백제는 동진(東晋)이나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교량적 역할도 하였다. 대륙(大陸)의 선진문화를 도입하는 한편 후진 일본에도 전수하였다.
일본의 사기(史記)에 따르더라도 백제의 박사중(博士中)에는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처럼 학문에 능한 박사외(博士外)에도 의박(醫博), 와박(瓦博) 등이 있었다고 하니 고도의 기술과 다양한 전문교육이 있었던 것이다.
백제는 일찌부터 낙랑문화(樂浪文化)의 영향을 받아 한학(漢學)을 발전시켰고 침류왕(枕流王) 원년(元年)에는 동보(東普)에서 불교라고 하는 종교까지 들여와 백제문화의 기조를 이루게 된다. 이 불교는 비단 종교라고 하는 본래(本來)의 정신적 문화에 국한하지 않고 그로 인한 조각, 건축, 미술 등 다양한 예술문화를 꽃피우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백제인들의 기예(技藝)는 타이국(他二國) 보다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에 신라에서도 거대한 불사(佛事)에는 백제의 장인(匠人)들을 초빙하였다. 그 예로서,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에는 아비지(阿非知), 불국사(佛國寺) 석가탑(釋迦塔)에는 아사달(阿斯達)이 참여한 것은 흔히 아는 바이다.
그 뿐 아니라 당시의 삼국중 와당(瓦當)이나 석등(石燈)에 새겨진 문양(紋樣) 등도 백제의 작품들이 유독 빼어난다는 것이 후학(後學)들의 평이다. 고구려의 그것은 너무 지나치게 힘찬 것 만을 표현하고 있으며 신라는 반대로 선(線)이 너무 약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백제의 예술품은 온화하고 정교하였기 때문에 이웃 고구려와 신라의 예술에 크게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멀리 日本의 문화전방에 까지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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